도해 타이완사 - 선사 시대부터 차이잉원 시대까지
궈팅위 외 지음, 신효정 옮김, 천쓰위 감수 / 글항아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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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의 역사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근대의 역사가 우리와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가는 것이 있었을 뿐이지

실상 타이완의 역사에는 무지하다.

지금까지 타이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책을 본 기억이 없었던 것도 한 몫 했고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여전히 이슈인 타이완의 역사를 온전히 담아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은 우선 타이완의 통사를 개설하였다는 의미를 지닐 수 있겠다.

일반인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만큼 쉽게 쓰여져서 친절하고 사진, 표 등의 다양한 자료들을 담고 있어서 좋았다.

나는 타이완이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기 전의 역사는 전혀 알고 있지 못했기에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청나라 이전 해상 각축의 시기에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 스페인이 이곳까지 세력을 확장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전후 시기 국민당이 들어와 정권을 잡았음에도 냉전의 여파와 맞물려 계엄령이 1987년까지 이어져 국민들은 백색테러의 공포에 떨어야 했고 민주화를 위해 많은 이들이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보니 대한민국의 현대와도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았다.

확언하지 못하는 역사에 대해서는 단정하지 않고 기술하려는 노력이 엿보였으며 타이완인들의 시선에서 지배자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를 모두 담으려고 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아쉬웠던 부분은 하나의 사건이 이곳 저곳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경우가 잦고

여러 명의 저자들이 참여하다보니 기술의 일관성이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개설서 정도로 보기엔 적당해도 깊이 있는 지식을 기대하기에는 어렵다. 

책을 읽다가 관심 있는 사건이나 인물을 만났다면 체크했다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기를 권한다.


미중 사이에서 타이완은 여전히 뜨거운 위치에 있다.

미국은 타이완을 끌어들이는 것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 하고 중국은 간섭하지 말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자국의 역사의 주체적 기술을 위해서 역사가들의 노력과 용기가 이어져야 하고 시민들의 지지도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타이완의 역사가 좋은 방향으로 계속 이어지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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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은 진실에 대한 담화를 여성의 성욕을 근거로 유지한다. 담화란 진실의 진정한 논리를 보여 준다. 즉 여성적인 것은 남성 주체들에 의해 강요된 모델들과 법칙들 내부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을 알기 위한 진실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두 개의 성이 아니라 하나의 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성의 유일한 실천과 표현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여성의 역사로 말하자면, 여성이란 성은 그 필요성, 그 이면, 그것이 결핍하고 있는 것들, 그것의 부정적인 요소/요소들을 유지하는 것이다. - P113

그러나 정신분석이 담화 자체를 자신들의 연구 대상으로 삼을 때, 여성 성욕에 대한 이 참된 사실은 아직까지 매우 엄격하게 진술된다. 거기에서 더 많은 해부학이 두 성 사이의 실제적 차이를 입증하는 증거-구실로 아주 조금이라도 이용될 것이다. 이 두 성은 언어 활동 속의, 언어 활동을 통한 그들의 결정으로 명시된다. 이 언어 활동의 법칙이 수 세기 전부터 남성 주체들에 의해 미리 규정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 P114

쾌락의 중요성 때문에 이해의 시기가 망각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가능하다면. 당신들이 이 시기를 뛰어넘는다면, 당신들의 무지함은 이 논리에/그의 논리에 더 많은 쾌락을 주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지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면 쾌락은 최소가 된다. 그래도 당신들이 누리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는 누린다. 재빨리 유혹하고, 더 빨리 만족하는(?) 당신들은 최고 가치의 공범자이고, 이 최고 가치에 대한 그의 말은 당신들의 육체를 수동적으로 만들라고 부추긴다. 이때 쾌락을 더 많이 누린다는 것은 육체—타자의—와 관련 있다. 말하는 존재인 줓체에게 있어서, 그것은 쾌락을 일으키는 자를 더 많이 누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사랑스런 여인’의 육체가 아니라, 그녀가 알지 못하는 언어 활동의 기능을 사람들이 그녀로 하여금 견디게 한다는 사실이다. - P122

한 여성으로부터 쾌락을 누리는 것, 한 여성의 정신을 분석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남성에게는 그가 그녀에게 빌려 준 무의식을 다시 소유하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 대가를 치른다. 아직까지, 육체로. - P123

타자의 육체에 대한 담화가 갖는 결점은 이따금씩 이 모든 여자들 속에서 변형된다. 발설될 수 있는 언어 활동과 관계 있는 타자의 환희—물론 이것은 여전히 쾌락 향유의 원인으로 존속해야만 한다—는 절제되고, 측정되고, 수많은 여자들 사이에서 통제된다. - P129

타자의, 타자에 의한, 타자 안에서의, 타자를 통한 타자와의 관계는 불가능하다. 즉 "타자의 타자는 없다." - P133

당신들에게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담화가 있다면 "이를 일으키는 것은 여성이 어머니로서만 겨진다는 매우 분석적인 담화이다. 여성은 어머니로서만 성관계 속에서 작용한다." 여성이 ‘어머니로서만 여겨진다’는 사실은 철학적 전통 전체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 조건이기도 하다. 또 여성적 토대의 필요성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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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 유형의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프로이트가 끼어든 덕택에 그의 이론 내부에는 몇 가지 모순이 일어난다. 남성의 욕망에 일치하기 위해 여성은 남성의 어머니와 동일시되어야만 한다. - P91

프로이트는 페니스가 번식 기관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도 확신한다. 그러나 여성의 생식 기관들이 동일한 자기 중심적 혜택을 끌어내지 못하지만 그만큼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번식에 있어서 훨씬 필수적이기도 하다. - P92

무의식의 체계와 두 성 차이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분절은 그에 의해 실현되지 않았다. 더 이상 여성을 억압하지 않는 어떤 문화에서 정신분석학적 개념들에게 어떠한 일이 생기는가를 아는 것은 분명 흥미로울 것이다. 여성의 ‘특수한’ 성욕에 대한 인정은 남성에 의한 가치 독점을, 결국 아버지에 의한 이익 독점을 재검토한다. - P94

프로이트가 성욕을 자기 담화의 주제로,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담화가 담화 자체의 성적 변화에, 특히 자기 담화의 성적 변화에 속해 있다는 해석을 끌어내지 않았다. 이것은 여성의 성욕에 대한 전적으로 ‘남성적인‘ 그의 시각과 다른 곳에서 여성 분석자들의 이론 산물들을 향한 매우 부분적인 그의 관심이 증명하는 것이다. 그는 담화 생산의 편견을 성적 차이와 연관지어 분석하지 않았다. 다른 식으로 말해서, 프로이트의 실천과 이론이 재현 무대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은 이 무대의 성 결정에 관한 문제까지 가지는 않는다. 이러한 연결의 결여로, 프로이트의 업적은 일면 선험적 형이상학에 머무르는 셈이 된다. - P95

오늘날 여성들에게 가장 금기시되는 것은 그들의 쾌락을 말하려는 시도이다. - P99

우리는 여성 착취에 대한 분석과 소유 방식에 대한 분석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사실 남자는 공식적인 교환에 실제적으로 참여한다는 사실로부터 결코 단순한 번식 기능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여자는 사유 재산의 장소인 ‘집’ 안에 은거한다는 사실로부터 어머니 이외에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생산 회로에 들어설 뿐 아니라 피임과 낙태의 보편화로 인해 여성에게 여성이라는 역할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피임이나 낙태를 사람들이 여전히 아주 자주 출생률을 조절하고 더 나아가 ‘억제’하는 수단이라고, ‘원하는 때에’ 어머니가 되는 수단이라고만 이야기한다면, 이러한 것들이 여성의 사회적 위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끌어내는 것, 그리하여 남자와 여자의 사회적 관계의 양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끌어낸다는 것은 회피할 수는 없다. - P106

‘여성’은 오로지 남성에 의해, 남성들을 위해 결정된다. 상호성은 ‘사실’이 아니다.소비와 교환의 대상으로 억지로 실어증 환자가 된 여자들이 ‘말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면, 이 사회와 그것을 조정하는 상징적 기능은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까? - P108

분명 남성적인, 더 정확히 말해서 남근 중심적 ‘모델’에 따르지는 않는다. 이것은 다른 성, 다른 사람, 즉 여전히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이 존재한다는 견지에서 오늘날 법을 제정하고, 성의 차이를 포하한 모든 것에 대한 규칙을 제정하는 담화에 대해 틀림없이 의문을 던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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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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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학과 철학자와 친하지 않다.

몇몇 철학자들의 이름과 그가 어느 철학파 분류에 속하는지 정도만 겉핧기로 아는 정도이다.

우선 철학이 내 삶에 크게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았고 철학과 철학자들을 매칭시키는게 마치 암기 공식처럼 느껴져서 싫었던 것 같다.


살아갈수록 좋은 일보다는 곤란을 겪는 경우가 늘어간다.

인생이 왜 이리 안 풀리지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시기와 상황이 조금씩 다를 뿐 저마다의 곤란을 겪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드니 현실감이 는 것일수도 있는데 좋은 말로 말하면 현실성이고 회의적 인간이 된 것일테다.

어렸을 적 있었던 긍정마인드가 이제는 내게서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철학이 왜 내 삶에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없을까.

왜 어렵게만 느껴질까 생각해봤는데 철학은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도록 만들기 때문이었다.

철학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애시당초 방향이 틀린 것이었다.

철학은 오히려 질문을 더 많이 만들어낼 뿐 결과를 만들어낼 순 없다.


이 책을 읽으며 인상적인 부분은 상실, 늙어감,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내겐 사회에서 만난 스승님이 계신다.

20대까지는 먹고 사느라 바빠서 나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30대가 넘어서야 어느 정도의 안정이 찾아왔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솟아올랐다.

그 당시 만나게 된 분이다.

나는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고 그 생각을 오류라고 내보이는 것을 싫어했다. 오만한 학습자였다.

그런 내게 스승님은 너는 다양한 생각을 충분히 수렴해야 한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었다.

스승님은 내게 상실이란 단어를 가르쳐주신 분이기도 하다.

나는 아직까지 큰 상실을 겪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스승님은 여러 번 상실을 겪으셨다.

작게는 노트북 데이터를 몽땅 날려먹은 일부터 크게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는 이런 일을 어떻게 견디고 넘기실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좀 흘러 만나뵙게 되었을 때 스승님은 시간이 가서 조금은 강도는 약해진다하더라도 상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문득 문득 배어나온다고. 

헤밍웨이도 단편소설 모음집 전체를 잃어버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걸 보자마자 스승님의 노트북 사건이 생각났다.

글쟁이는 아닌데도 내가 만약 그 상황이라면 상상조차 하기가 싫다.


이 책의 한 챕터를 보부아르(그것도 늙어감에 대한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에 반가웠다.

몇 년전만 해도 어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얼마전부터는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거울을 볼 때마다 늘어가는 주름이 원망스럽고 짙어진 다크서클과 마스크 밖으로도 선명히 보이는 깊어진 주름이 나를 서글프게 한다.

이렇게 나도 나이가 드는구나. 

길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보부아르에게 던진 한 마디는 나도 좌절감이 들게 했다.

"저희 엄마 같으세요."

나이들수록 더 강렬한 형태의 자기 자신이 된다는 말은 더 암울하게 만든다.

나의 고집과 아집이 갈수록 더해진다니...

그렇게 늙긴 싫은데. 난 정말 그러기 싫어.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게 나이들 수 있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건강함은 나와 주변 이들을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이제는 추잡하게 늙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크다.

여러 가지 조언이 있지만 노년을 위해 습관을 들인다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라 생각했다.

60대가 되어도 늘 하던 것들을 계속 했다는 보부아르.

글을 쓰고 읽고 음악을 듣는 습관. 거기에 걷기까지 더한다면 지금의 나와 정확히 들어 맞는다.

얀제까지나 그렇게 살고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상실과 이어지는 측면이 많다.

최악의 상실이 죽음이 아닐까?

어쨌든 인간이라면 어떤 나이가 되었든 죽음이란 것이 낯설지 않을까 생각한다.

막연해서 무섭고 두려운 것. 불안한 것.

죽음을 생각하거나 상상한다고 해서 선뜻 떠올려지지는 않는다.

죽음이 내게 어렴풋이 와 닿은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이다.

할아버지는 나를 크게 아끼지는 않으셨지만 나는 할아버지를 내심 좋아했던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사업이 어려워지신 뒤로 할아버지께선 상실감이 크셨는지 고향에 가셔서 얼마 안되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곁에서 돌아가신 것도 아니었는데 충격이 컸다.

부모님은 더 상실감이 크셨겠지~ 

상실과 죽음은 이처럼 이어져 있다.

헌데 몽테규와 죽음이 무슨 관련이 있지 싶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중요시여겼다는 점이 저자를 이끈 것이 아닌가 싶다. 이건 나도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나를 짜증나게 하는지 무엇이 나를 놀라게 하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는 것.

들여다보지 않으면 나에게서 피어나는 의심들을 거둘 수가 없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할테니까.

막연한 죽음을 상상하기 어렵다면 몽테뉴처럼 삶을 잘 살아내려는 노력이 중요할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 뿐이다.


이 책은 철학자가 관련지은 장소를 여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읽기 쉽고 철학이 일상까지 들어온 느낌이라 좋았다.

시몬 베유와 세이 쇼나곤이라는 이름 모를 작가를 알게 된 것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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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16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스승님을 만나셨군요. 저도 예전보다 잦아진 부고소식에 나이듦과 죽음을 생각하곤 합니다. 노년을 위해 습관을 들인다가 와닿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거리의 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1-11-16 18:17   좋아요 2 | URL
노년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이 더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글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불편한 편의점 불편한 편의점 1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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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가 횡행하면서 남의 일에 간섭하고 참견하는 일을 보는 것이 드물어졌다.

우리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을 만나면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여긴다.

30년 전만 해도 이웃이란 단어가 멀게 느껴지진 않았는데 이제는 낯설게 여겨지는 건 비단 나 뿐이 아니겠지.

그만큼 사회가 삭막해진것일지도 모르겠다.


편의점이란 공간은 수많은 개인들이 오고 가는 곳이다.

일하는 사람은 기계적으로 물건을 팔고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은 담배를 사는 것처럼 특별한 주문을 하지 않는다면 말 꺼낼 일도 없다.

저자가 하필이면 편의점이란 공간을 선택한 것이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보이고 느끼지 않는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니~ 호기심이 일었다.


책을 읽으며 여러 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곳엔 따뜻한 어묵 국물 같은 소시민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믿을 사람 하나 없다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쓸쓸함을 느꼈을 때 읽으면 온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다르다고 틀리다고 생각하고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고 경계를 긋는 세상에서

손을 내민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니 말이다.


내 일이 아니라고 쉽게 넘기지 않고 달려든 누군가에 의해 상대는 따스함을 느끼고 그만큼 세상은 밝아질 기회가 생긴다.

삶을 포기해버렸던 사람이 상대에게 내민 손길이 자신을 구원하는 기회를 만들어준 주인공이 등장한다.

대한민국엔 이런 사람들이 아직까지 존재한다는 것이 희망적이라 생각한다.


편의점주.

노숙자.

사업에 목숨건 사람.

고시생.

대기업 신입사원에서 집안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게 된 사람.

외로움을 술로 푸는 사람.

돈과 지위로 해결하려는 사람들.

작가.

저마다의 사연으로 모두 삶의 힘겨움을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와 멀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라 공감이 많이 갔는데 한편으론 씁쓸하고 한편으론 훈훈하기도 했다.


누구도 자신을 구원해주지는 못하지만(결국 자신이 자신을 일으켜야 한다.)

타인을 돕는 것이 자신을 구원할 기회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보면서 마음이 저릿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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