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4 - 충렬왕에서 최영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4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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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리즈의 마지막 편까지 왔다. 공부를 할수록 고려의 역사가 더 좋아지고 궁금해진다. 고려의 역사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셨으면 좋겠는데 이런 쉽고도 알찬 교양서를 통해서 공부한다면 쉽고도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난 권 마지막에 삼별초의 항쟁이 끝나고 강화도에 있던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이제 명실상부 몽골의 내정 간섭이 시작되었다. 
 
원종에 이어 즉위한 충렬왕은 쿠틀륵케미시(제국대장 공주)와 혼인(제국대왕 공주와 충렬왕의 관계는 딱히 좋지는 않았음)하면서 부마 지위를 활용해 외교적 이익을 추구했다. 1278년 몽골에 가서 쿠빌라이 칸을 만나 몽골의 다루가치 배치와 호구조사 요구를 철회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몽골이 고려에 항복을 받아들이게 하면서 요구한 ‘6사‘의 내용 중 고려가 결코 들어줄 수 없는 두 가지 사항들이었는데 이때야 비로소 받아들여진 것이다. 또 이 때 고려에 주둔한 몽골군이 철수하면서 몽골 관리나 군대가 상주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서 고려 국왕의 지위는 부정되지 않았으며 고려 독립국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매사냥을 하는 응방의 인물을 측근들에게 맡기는 등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들 위주로 정치를 행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함으로써 한계를 보인다.

충선왕은 충렬왕이 죽지 않은 상태에서 왕위를 양위받는다. 그는 쿠빌라이의 외손자이기도 했고 계국대장 공주와 혼인하여 몽골의 부마가 되면서 왕위 경쟁에서 유리했다.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으나 그녀는 쿠빌라이 칸의 정비 소생이 아니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다. 쿠빌라이 칸이 죽고 후계를 정할 때 충렬왕이 원 성종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아버지의 측근 정치를 보고 못마땅했던 충렬왕의 측근세력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원의 의심을 샀고 계국대장공주와 불화가 생기자 8개월만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원나라 성종이 죽고 인종과 무종 간에 대결이 펼쳐졌는데 줄을 잘 선 충선왕은 원의 실력자로 등극한다. 이후 그는 고려 인사 행정 관제를 바로잡고 공이 있는 자를 포상하고 백성 착취를 금지하는 등 개혁 정책을 펼쳐 나갔다. 하지만 그는 즉위 후 3개월만에 원에 가서 고려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 같은 측근정치를 하지 않기를 원했지만 결국 이전의 측근정치를 반복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고려 내에서 직접 개혁을 했다면 나았겠지).

기황후는 몽골에 끌려간 공녀가 뛰어난 정치력으로 황후에 자리까지 오르면서 큰 권력을 가졌던 인물이다. 이 무렵 원나라와 고려 내 왜구 출몰이 잦아지자 원 조정은 공민왕을 세워 해결하려 한다. 공민왕은 핵심 부원 세력이었던 기황후 세력을 몰아내고 신돈을 기용해 개혁 정치를 펼쳐 나가는데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동행송 이문소를 폐지하고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으며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력이 불법소지한 토지와 노비를 토해내게 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권문 세력을 몰아냈다. 또 과거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기존의 유학자들의 계파 정치의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새로운 인물을 발탁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신돈이 사적 권력을 지나치게 휘두르자 공민왕도 그를 경계하며 내치게 된다. 중국은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었고 공민왕은 명나라에 책봉됨으로써 친정 정치를 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인임은 대표 권문세족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이다. 그는 개혁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을 내치고 개혁 이전으로 흐름을 돌리기 위해 최영과 결탁하였다. 명 사신이 피살되는 일이 발생하자 이인임은 원과 끊어져 있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북원에 사신 영접을 추진한다. 그로서는 명, 원과 둘 다 관계를 가짐으로써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인임의 고단수 정치력은 여기서 발휘되는데 대표적인 신진사대부였던 정도전을 북원 사신으로 보내려고 한다. 정도전이 이를 받아들일리가 없었고 이 일로 정도전은 나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나주 현장에서 백성들의 참상을 보면서 그는 개혁 의지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인임은 정도전 뿐 아니라 이 때 신진사대부들을 모조리 싹쓸이함으로써 개혁 동력을 끊고자 했다. 그러나 이인임의 계속되는 국정 농단 때문에 최영과의 연립 의지는 끊어진다. 이인임이 이 때 개혁 세력들을 잘 보듬고 건강하게 끌어갔다면 고려는 더 이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권력욕과 탐욕은 그들에게 내어줄 의지가 없었다.

14세기 말 왜구가 침공하자 고려는 전국에 계엄령을 내린다. 이 때 일본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만큼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중국은 원-명 교체였기 때문에 정세가 불안정했다. 왜구의 출몰이 심각했던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최영이 홍산에서 왜구를 막아내고 이성계는 황산에서 왜구를 막아냈다. 1389년에는 조선과 왜구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던 쓰시마를 정벌한다. 일본이 남북조를 통일하자 내부가 안정되었고 원-명이 교체되고 명이 해금 정책을 펼치면서 왜구는 자연스레 줄어들게 되었다.

최영은 이성계와 손을 잡고 이인임을 비롯한 권문 세족(구 귀족 세력)을 제거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최영과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사건으로 갈린다. 명이 고려에 철령 이북 땅을 요구하자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했고 이성계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이성계가 돌아온 뒤 최영은 체포되고 명이 철령 이북 땅을 포기함으로써 최영은 고려의 마지막 무신으로 남았고 이성계는 고려의 무신이자 조선의 개국 왕으로 변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물론 이 때 당시에는 새 왕조를 열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최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마지막 이야기는 조선과 이어져서 대중들도 잘 아는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려 말의 역사는 조선의 건국 역사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더 자주 다루어져서 잘 알게 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은 패널에 신병주 선생님이 참여함으로 인해 고려의 역사를 조선의 역사와 비교하여 설명해주면서 더 쏙쏙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다. 책을 읽기 전 역사저널 그날 고려편을 보아도 좋고 후에 복습 겸으로 해서 보아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고려 편을 복습해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일었다.

아쉬운 점은 역사저널 시리즈로 조선은 총 8권의 분량이었는데 고려는 4권의 분량이어서 상대적으로 짧았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방송 분량 자체가 조선보다 훨씬 짧았기 때문일 것이다. 11월에 드라마 방영도 있는 만큼 고려의 역사를 더 다루는 기획 시리즈가 있으면 좋겠다. 고려의 역사는 여전히 부분적으로 가려져 있어 메워야 할 역사가 많다. 앞으로 더욱 많은 자료가 발굴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들이 보충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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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0-15 0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모르지만 아는 이름이 보이기도 하는군요 고려 시대 일어난 일은 잘 모르고 이름만 기억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조선은 기록을 잘해서 더 많이 알기도 하겠습니다 고려 때 왕권이 약해서 조선이 되고는 왕권을 강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0-15 16:08   좋아요 1 | URL
조선으로 넘어가기 전 역사는 의외로 많이 드라마에서 다루기도 했고 알려진 게 많아서인지 익숙한 면이 있습니다. 아마도 공민왕 때부터인 것 같아요. 조선은 자료도 많이 남아 있어서 더 매체에서 다루기 쉬운 것이겠죠^^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 - 만적에서 배중손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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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민‘의 힘을 믿는 편이다. 우리 역사상으로도 ’민‘은 많은 역할을 해왔고 때로는 주도적인 힘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왔다.
3권은 특히나 민의 힘이 돋보이는 주제들이 많아서인지 지금 나라 꼴이 엉망이어서이기도 하지만 힘이 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주제 파악 좀 하시지.‘라는 말을 우리는 많이 듣고 산다. 그런데 주제 파악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계급이나 신분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임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어쩌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박차고 일어난 ’민‘들을 생각하면 전율이 인다. 그 세세한 이름들을 알 수 없어 더욱 그렇다.

3권은 민란을 일으킨 주인공들을 다루며 시작한다. 먼저 만적은 최충헌의 노비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다. 왜일까? 고려사에서 ‘만적의 난‘ 사건은 최초의 신분해방운동의 성격을 가진다. 그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를 주장하며 신분해방을 꿈꿨다. 하물며 주인인 최충헌이 무신시기 집권자인 상태에서 말이다. 물론 그 전에 이의민이 소금장수 출신의 천민으로 무신 집권자가 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에서는 본보기가 있다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삼국 시대에도 신분 차별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며 봉기가 일어난 경우가 있지만 만적은 신분 해방을 꿈꿨다는 측면에서 그 경우가 달랐다.
공주에서는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났다. 당시 공주는 ‘부곡‘에 속하던 곳이었는데 이곳은 ‘향‘과 마찬가지로 농산물을 생산했다(‘소‘는 수공업품이나 광물, 수산물을 생산). 고려 시대 지방 체계는 주현-군현-향소부곡 구조로 주현만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형태였다. 처음 교과서에서 향소부곡을 배울 때 잘못 배웠는지(그 이후에 바뀐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천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해였다. 고려 시대에 천민은 국역을 지지 않으면 천민이고 나머지는 다 양인이다. 향소부곡도 국역을 지기 때문에 당연히 양인이다. 다만 주현이나 군현의 주민들보다 조금 천한 일을 하는 것 뿐이다. 이번 기회에 향소부곡민이 양인이라는 것을 재확인하고 넘어간다.

최충헌 집권 시기는 길었던 만큼 자기 손으로 두 명의 국왕을 폐위시키고 두 명의 국왕을 옹립시켜서 결과적으로 여러 임금을 모셨다. 앞서 2권 후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최충헌은 개인에 대한 권력욕과 탐욕이 많았던 인물이었던 만큼 왜 스스로가 왕이 될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궁금했을 수 있다. 그래도 하극상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서일 수도 있겠지만 민심의 눈치를 살폈던 이유가 아무래도 더 클 것 같다(생각은 했지만 감행을 안 한 것일지 모르나 이것은 기록에도 없고 추측일 뿐이다).
최충헌의 권력이 끝모르게 비대해지자 희종은 그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암살을 시도한다(최충헌은 이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암살 시도를 받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암살은 실패했고 희종은 유배길에 오른다. 그런데 이후에도 희종은 최충헌에 대한 견제를 멈추지 않았고 최충헌은 결국 희종을 폐위시키고 강화도에서 명종의 맏아들인 왕숙을 데려와 강종으로 옹립시키게 된다. 앞선 의종은 망나니였다고 쳐도 희종의 암살 시도가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아들인 최우가 있었다지만 아버지가 살해당한 만큼 최씨 집권이 더 이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무신 정권 자체가 종료되었을수도 있지 않을까.

몽골은 앞선 거란과 여진의 침입과 다르게 고려에 큰 피해와 영향을 주었다. 그렇지만 몽골이 침입한 국가엔 흔적 하나 남지 않았다는 역사를 보면 고려는 왕조를 지켜냈고 얻을 것은 얻어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후손으로서 감사하면서도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몽골군은 고려 땅에 언제 들어오게 되었을까. 1218년 12월 거란이 침입했을 때 거란군을 따라 몽골군이 떠밀려 내려온 것이 그 시작이었다. 몽골군도 처음에는 형제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앞선 거란과 여진과 달리 지나친 공물과 보상을 요구하면서 고려에 부담을 주게 되었다. 어느 날 몽골 사신인 제구예가 들어왔다 피살되자 양국 교류는 단절된다. 범인은 고려일 수도 있고 몽골(의 자작극)일 수도 있고 동북쪽에 있던 동진이라는 나라일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추정 세력일 뿐이고 정확하지는 않다. 어쨌든 몽골군의 1차 침입의 명분은 이 사건(이라고 주장) 때문에 발생한다. 1차 침입(1231.9) 때는 귀주성에서 큰 전투가 있었다. 여기서 정주 지방의 장군을 맡고 있던 김경손이 불과 12명의 군사를 데리고 성문을 나와 몽골군을 기습 공격하면서 긴장시킨 덕분에 무려 4개월 동안 성을 지키며 전투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더는 전투를 이어가는 것은 피해를 키우는 일이라 보았기 때문에 지휘관인 박서에게 항복을 종용하면서 몽골과 화친(1232.1)을 맺게 된다.

1232년 7월 최씨 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40여년 가까운 강화도 시대가 시작된다. 최씨 조정은 강화도에 있었으나 와중에도 산성이나 섬으로 대피하는 방식으로 몽골군과의 전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산성에는 산성방호별감이라는 관리자를 파견하여 수령을 지휘하게 하고 백성을 위한 구휼 사업도 하였다. 문제는 강화도 최씨 정권의 탐욕이다. 병사들과 백성들은 전투로 다치거나 죽어가고 있는데 그들은 세금으로 연회를 열고 펑펑 놀았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왜 집권자들이 되면 이리 엉망이 되는지 모르겠다. 인간의 욕심이 결국 발현되는 것이겠지.
1232년 8월 몽골이 2차 침입을 단행하자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승려인 김윤후가 주연급 활약을 하였는데 그는 백성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면서 전투를 승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 값지다고 생각한다(처인은 원래 부곡이었으나 주현으로 2단계나 승격되었다).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면 홍복원인데 그는 몽골에 귀부해 관리가 되고 세력을 얻어 이후 몽골 침입 때마다 길잡이 노릇을 한다. 고려판 앞잡이로 보면 되겠다. 사람의 선택은 한 순간이지만 역사에 어떻게 이름을 남기는가는 그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몽골의 3차 침입은 1235년에 시작해서 무려 5년 간 이어졌고 경상, 전라 지역까지 몽골군이 밀고 내려오면서 문화재까지 소실되는 등 피해가 극심했다. 1241년 우구데이 칸이 사망하고 1246년 구육 칸이 즉위하면서 몽골 내정이 혼란했기 때문에 전쟁은 잠시 멈추어졌으나 다시 1247년 4차 침입이 이어지고 1248년 구육 칸이 사망하여 다시 휴지기를 갖다가 1253년에 5차 침입이 이어진다. 5차 침입 때는 몽골이 철저히 준비를 하고 나와 공성 무기와 발화 무기를 사용하여 방어에 주력하던 고려군이 힘에 부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충주성 전투에서는 2차 침입 때 처인성 전투에서 활약한 김윤후가 다시 백성들을 이끌어내며(노비 문서를 소각해주겠다라는 명분) 활약한다.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은 고려 시기를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사건이었다. 태자였던 원종은 신의 판단력으로 당시 즉위 순위 1위인 아릭 부케를 만나러 가지 않고 쿠빌라이를 만났고 쿠빌라이가 칸에 즉위하면서 원종은 고려를 안정적으로 이끌 동력을 얻게 된다.
1254년 몽골이 6차 침입 후 고려 땅을 떠나지 않으면서 더는 몽골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해진 고려는 강화 후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몽골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게 된다. 몽골은 ‘6사‘를 요구했는데 고려의 대응이 놀라울 정도로 멋지다(지금도 왜 이렇게 외교를 못하는 건지...).
참고로 몽골이 요구한 ‘6사‘는 다음과 같다.
1.인질 보낼 것 2.군사 파견 요청 시 올 것 3.수량과 군량 수송 4.성역과 역참 개설 5.호구조사 보고 6.다루가치를 둘 것
특히 5, 6번 원칙은 고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고려의 원칙은 단 한 가지였는데 고려를 지킨다는 것이다.
무신정권이 원종을 폐위하자 그는 쿠빌라이 딸과 결혼하고 몽골군의 힘을 빌린다(이 지점이 두고 두고 아쉽다). 결국 1270년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정권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고려 내 몽골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개경 환도 세력에 맞서 배중손 지휘 하에 삼별초가 자신들의 조정을 세우고 강화도, 진도와 제주도로 옮겨 가며 몽골군과 항쟁한다. 삼별초는 본래 무신정권의 핵심군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몽골군과 대결하기로 하면서 백성들은 이에 힘을 실어준다(몽골군에 맞서길 원했고 또 호적 문서를 불태워준다는 약속이 있었음). 특히 진도에서 싸울 때는 전라도 남부를 석권할 정도로 그 세력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1273년 제주도에서 아쉽게도 삼별초 항쟁은 막을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몽골을 괴롭혔고 고려의 자주성을 보여주는 기회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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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0-15 0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몽골이 고려에 쳐들어오다니 그런 게 전라 지역까지 밀고 내려 온 적도 있었군요 삼별초 생각나기도 하는데, 삼별초가 몽골과 끝까지 싸우다니... 잘 안 됐다 해도 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나라를 다 빼앗기지 않았겠지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0-15 16:06   좋아요 1 | URL
몽골은 고려에 여러 모로 큰 피해를 입혔고 또 많은 영향을 주었죠. 시기가 긴 것도 있었고요. 6차까지 침입을 했던 걸 보면 백성들의 피해는 알만합니다.
삼별초가 전라도 지역을 한 때 장악했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그리고 개경 정부와는 달리 정부를 새로 세웠다는 것도 새로 인식하게 되었고요. 삼별초가 그냥 단순한 반란군이 아닌 셈이죠!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 - 강감찬에서 최충헌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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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권은 거란의 2차 침입부터 무신 정권의 지도자인 최충헌이 들어설 때까지를 다루고 있다. 책이 두껍지 않기 때문에 <무신 정변>을 깊이 다루어주지 못할거라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대중들이 사건의 배경과 전개 과정, 결과를 충분히 살펴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고려의 역사를 처음으로 배울 때 ‘무신 정변‘(과거에는 무신의 난이라고 하기도 했었던)이 흥미로운 사건이라 생각했음에도 지도자가 바뀌는 과정이 복잡하거나 어려워서 오히려 공부를 등한시했었다. 하지만 ‘무신 정변‘은 고려 시대의 전기와 후기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며 무려 100년간 이어진 이 시기에 몽골의 침입이 있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1. 우리는 거란의 침입에 대처한 고려의 인물로 보통 ‘서희‘는 알고 있어도 2차 침입 때 협상을 주도한 하공진과 후방 공격에서 활약한 양규는 잘 알지 못한다. 거란이 2번째로 침입하자 현종은 강감찬의 권유에 따라 나주로까지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비슷한 것으로 조선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길에 행차한 게 떠오르지만 이 때 고려는 하공진을 사신으로 보내 협상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전쟁을 끝내기 위한 노력도 동시에 했다. 양규의 활약은 알고 있었으나 거란과 협상한 하공진은 훨씬 덜 알려져 있기에 안타깝다. 그는 그 때 인질로 잡혔는데 거란으로 귀부할 것을 종용받았으나 거절하면서 살해되고 말았다. 꼭 기억해두어야 할 분이 아닐 수 없다.

2. 현종이 거란의 침입으로 피난하던 중 공주절도사인 김은부를 만나 눈도장을 받게 되는 일이 있었다. 당시 외부인의 침입으로 민심이 흉흉했기 때문에 현종의 피난길은 아주 험악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김은부가 대접을 잘해주니 현종 입장에서는 없던 총애도 생길 수밖에 없다. 김은부의 세 딸이 왕실과 혼인하게 되면서 그는 문벌 귀족 세력의 하나(안산 김씨)로 올라서게 된다. 또 하나의 문벌 세력인 인주 이씨는 김은부의 처조카인 이자연(이자겸의 아버지)의 딸이 문종의 왕비가 되면서 성장하게 되는 세력이다. 김은부 딸이 왕실과 혼인하게 된 사건이 왜 중요하냐면 최초로 외부 세력이 왕실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기존까지 고려 왕실의 결혼은 왕실 근친혼이었다).

3. 12세기에는 북쪽에서 힘을 키운 여진이 고려에 침입한다. 1차 침입 때 윤관의 활약(기만 전술)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패배하였으나 3년 간 별무반을 만들어 열심히 기병을 보강한 뒤 2차 침입 때는 여진족이 점령하고 있었던 영토에 9성을 쌓아올리는(동북9성) 쾌거를 거둔다(동북9성의 위치는 일반적으로는 두만강 북쪽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 않아 학계적으로도 의견이 분분하다). 아쉽게도 2년 만에 동북9성을 다시 여진에 내어주게 되면서 윤관은 그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여진이었을 때도 힘이 만만치 않았지만 금나라는 차원이 다르게 막강했다. 금은 처음에 형제 관계로도 만족했으나 나중에는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고 실리상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쉽게 느껴지겠지만 그 때 사람이라 생각해보면 최선이 아니었나 싶다.

4. 이자겸은 딸을 예종에 보내고 그 아들인 인종이 왕위에 오른 후 다른 두 딸도 인종에 시집을 가면서 그는 외조부이자 장인으로 명실상부 최고의 권력자가 된다. 그 시기 인종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인종은 이자겸의 권력이 강해지자 이를 견제하고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자겸을 공격한다. 또 이자겸이 오른팔인 척준경과 틈이 벌어지는 것을 알고 이 갈등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이자겸이 오히려 조연이고 인종이 주인공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자겸이 워낙 유명한 문벌귀족세력의 대표 수장이어서 위세가 등등해서 인종의 행동이 뒤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5. 묘청이 ‘서경천도운동‘(수도를 서경으로 옮기고 금나라를 정벌하며 왕을 황제로 칭하고 연호를 사용하자 주장) 사건을 일으킨다.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주장은 ‘국가의 자주권‘를 원하는 백성들에게 먹히는 점이 있었다. 서경천도운동을 김부식이 진압하면서 두 세력은 충돌했다. 묘청의 주장 자체는 그럴싸 했지만 결정적으로 신룡의 침(기름을 넣은 떡을 물에 던져 놓고 물에 떠오른 기름이 무지개처럼 나타난 효과를 보고 이는 상서로운 일이니 서경으로 천도해야 한다)으로 무리수를 두며 자멸의 빌미가 된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신채호 선생님의 말인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 문장만 보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위대한 혁명 운동처럼 비쳐지지만 그것은 분명한 오해다. 묘청이 자충수를 두면서 이후 진취적인 개혁이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안타까움을 담은 것이다. 백성들은 호응했지만 당시 금국 정벌이 현실적으로 가능했다고 보이지 않을 뿐더러 무리한 서경천도운동 주장으로 그 운동은 실패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6. 무신정변은 하위 지배층인 무신들이 고위 지배층인 문신들을 누르고 집권 세력으로 올라선 사건이지만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수 없다. 왕인 의종의 정치적 무능과 고려 초기 이후 계속된 무신들의 지위 상승, 지배층의 분열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일어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의종은 책에서 말하길 고려판 연산군이라고 패널들이 이야기하는데 에피소드를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한다. 정사는 돌보지 않고 향락과 유흥에 빠져 있었으며 대간들을 쫓아내고 환관과 내시를 주변에 두어 측근정치를 강행했으니 지금으로 보아도 언제 탄핵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의방이 의종을 폐위하고 문신 세력을 모두 몰아내면서 단독자로 올라선다. 이후 정중부(권력욕이 강했음)->경대승(복고를 표방)->이의민(행동대장 스타일)으로 집권자가 변화되지만 그들은 자신들끼리의 투쟁, 살육, 파괴를 이어가면서 백성들에게도 명분을 얻지 못했다. 경대승은 무신정변에 참여하지 않은 세력이었던데다가 그나마 도방을 세우고 문신 인사들을 등용하려고 노력했지만 안타깝게도 잘 되지는 않았다.
이후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무신정권의 최씨 집권기가 시작된다. 그는 백성의 눈을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권력을 독점하면서 사병을 강화하는 등 국가를 위한 힘이 아닌 사적인 힘을 키우는 데 골몰했다.

3권은 남은 무신집권의 시기와 몽골과의 투쟁기가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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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0-11 0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역사를 배우기는 했지만, 하나도 생각나지 않네요 그래도 조선 시대는 여기저기에서 보기도 했는데... 고려는 잘 모르는군요 여러 사람 이름은 생각나기도 합니다 고려는 왕족이 친척끼리 결혼을 했군요 어쩐지 조선 시대에는 그걸 아주 안 좋게 여긴 듯도 합니다 옛날 드라마 보면 상사병으로 죽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는데, 어떤 책을 보다 그건 친척을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0-11 09:10   좋아요 1 | URL
고려 왕실은 기본적으로 자기들끼리만 인연을 맺는 근친혼이었는데 문벌귀족세력이 등장하면서 이때부터 외척 관계를 맺게 됩니다. 고려 역사는 조선에 비해서 사료나 유물이 부족하다보니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고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죠. 참 아쉽습니다. 저는 고려에서 특히 유연한 외교 철학은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1 - 왕건에서 서희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1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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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서를 읽는 일은 역시 지식을 적당하게 채우면서도 머리를 가볍게 해주어 즐겁다. 고려의 역사를 실로 오랜만에 읽게 되었다. 계기는 우연찮게도 11월에 방영될 대하 사극이 고려와 관련되어 있어서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중국의 역사를 원나라까지 한 번 훓은 김에 고려의 역사를 병행하여 읽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다. 시작은 가볍게 읽는 것이 좋은데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적당하다 여겼다. 책은 TV 프로그램으로 봤다는 이유로 사두기만 하고 정작 읽어보지 못한 채 보관용으로만 갖고 있다 이제서야 펼치게 되었다. 어쨌든 갖고만 있으면 읽게 되는구나.


고려의 역사는 475년 동안 거란, 여진, 몽골(원), 홍건적과 왜구 등 세기 별로 전쟁이 이어지다보니 대부분 ‘전쟁’의 사건과 관련 인물들을 위주로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역사 공부를 좀 한 사람이라면 기억할 만한 업적을 가진 초기의 ‘광종’과 후기의 ‘공민왕’ 정도나 알까. 

고려는 조선보다 훨씬 더 알려져 있고, 더 오래 전의 신라보다도 오히려 덜 알려진, 미지의 나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고려는 우리 역사상 두 번째 통일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성과 개방성이 살아 있어 오늘날 우리가 배울 점이 있는 나라였다. 지방 사람들이 세운 나라였고, 화려한 귀족 문화가 발전한 나라였으며, 불교와 유교가 공존한 나라였고, 넓은 세상과 교류한 나라였다. 이런 고려를 미지의 상태로 남겨 둔다면 우리의 한국사 지식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 P5


고려판 왕좌의 게임의 주인공 왕건 vs 견훤의 승자는 최종적으로 왕건이었다. 둘의 대결을 마치 오늘날의 선거판으로 재해석하여 내놓아 재미를 더한다. 

견훤은 후백제의 왕으로 활동 범위는 주로 오늘날의 전라도 지역이었는데 출생지는 경상도 상주 가은현 출신 호족 아자개의 아들이었다. 대부분의 건국 조상에 해당되는 이에 신화가 부여되듯 그에게도 어릴 적 호랑이가 젖을 물렸다는 설화와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설화가 존재한다. 지렁이가 한자로 ‘지룡’으로 표현되는데다가 지렁이의 한자가 ‘진훤’으로 표현되는 것을 보면 지렁이의 설화가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둘의 싸움에서 견훤이 공산성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고창 전투(930)에서 지면서 승기는 넘어갔고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왕건에게 넘어가면서 힘이 더욱 실리게 되었다. 나중에 신라 경순왕의 귀부, 아들인 신검까지 왕건에게 귀부하면서 둘의 싸움은 종지부가 찍힌다.  물론 둘의 승부를 가른 결정적인 일은 지방 호족 세력들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얻는 데 왕건이 승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왕건은 결혼을 통한 동맹을 이용해 지방 호족의 지지를 얻었다. 총 29번의 결혼을 통해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제외하고 세 번째 결혼부터는 정략 결혼이 행해졌지만 이로 인해서 다음 왕위가 순탄치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제1왕후인 신혜왕후 유씨의 성격은 탄복할 만하였다. 궁예가 학정을 펼치니까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이 왕건에 가 함께 거사를 도모하려 했다(왕건은 주저하던 상황). 거사를 도모하는 회의 전 왕건이 아내에게 오이를 따오라고 내보냈는데(회의 내용을 듣지 못하게 하려고 고의로 내보냄) 밖으로 나가는 척하다가 휘장 속에 숨었다 그것을 걷고 나와 “의거를 일으켜 포악한 군주를 교체하는 일은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지금 장수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저도 의분이 솟구치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어떠하겠습니까?” 하며 왕건의 군대 파병을 종용했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성을 쓰고 본관이 정착된 것이 고려 초 지방 호족들에게 성을 하사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알아두어야 할 키포인트다.

태조는 그 많은 아들 중 둘째 왕후의 아들인 ‘무’에게 일찌감치 정윤(조선으로 치면 ‘태자’)으로 책봉했는데(첫째 왕후는 아들이 없었음) 비록 처가 집안은 한미하였으나 장자 계승 원칙을 가능하면 지킴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려 초기는 유독 조선 초기와 특히 비슷한데 왕자의 난까지 닮은꼴로 일어난다. 태조를 이어 혜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병석에 눕자 태조의 아들이었던 왕요와 왕소가 대립했고 혜종의 장인인 왕규가 난을 일으켜 자신의 외손자이자 태조의 아들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리려다가 실패하여 왕요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상한 것은 왕규가 혜종의 장인인데 왜 굳이 난을 일으켜서 자기 발등을 찍었느냐 하는 것인데 사료가 충분하지 않다보니 결과만 놓고 추측할 수 밖에 없어 아쉬움이 인다. 혜종이 얼마 안 가 죽고 왕요가 정종으로 즉위한다. 정종은 서경 천도를 통해서 자신의 힘을 키우고자 했으나 민심이 곱지만은 않았고 서경 이외의 호족 세력도 반발했기 때문에 광종이 즉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광종은 조선판 태종과 나란히 둘 수 있을 정도로 개혁의 피바람을 몰고 온 왕이다. 집권 초기 7년은 조용히 숨죽여 지내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시행으로 호족들을 충격에 빠뜨린다. 특히 ‘노비안검법’은 호족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일종의 노비 해방인데 자신의 권력 기반이었던 노비를 양민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국가는 노동력을 확보하고 세금을 더 걷을 수 있겠지만 호족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노동력이 빠져 나가는 일이었다. 아무튼 광종 같은 사람이 정말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광종 집권 15년차가 되면 주변의 문제될 만한 인물들(혜종과 정종의 아들 등)을 모두 숙청하기 시작한다. 근데 또 숙청을 하는 동안에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법회를 열고 절을 창건하고 구제안민책을 실시했다는 것을 보면 죄를 씻고 싶은 욕망도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조선의 정종도, 고려의 광종도 개국한 왕들에 이어 왕권을 유지하며 강화하고자 짐을 지은 공통점이 존재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천추태후의 이야기는 언제 봐도 흥미롭고 재미있다. 드라마 <천추태후>가 방영되기 전에는 나도 잘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목종을 섭정하고 김치양과 사랑에 빠졌으며 김치양과 사이에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헌정왕후와 숙부 왕욱 사이 태어난 대량원군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려 사람으로 유교적 이념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고려는 남녀를 불문 재산 균분 상속이었으며 부모 봉양 의무도 동일했던 만큼 딸과 아들의 차이가 없는 사회였고 이혼과 재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단지 고려 왕실은 족내혼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김치양의 신분이 문제가 되는 것일 뿐이었다. 게다가 김치양은 천추태후 근거지인 황주 부근의 동주여서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이 무렵 국경을 수비하던 강조가 정변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두 아들을 모두 잃었으며 권력도 잃고 본거지로 쫓겨난다. 강조의 변에 대한 기록은 처음에 목종이 김치양을 제거하려고 강조를 끌어들였는데 강조가 김치양을 제거하면서 목종까지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옹립했다고 되어 있다. 이처럼 천추태후는 강조가 수도로 오는 것을 막으려 했고 목종은 강조가 수도로 들어오길 원했다. 그런데 강조는 목종의 부름을 받고 정변을 일으키면서 김치양을 제거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왜 목종을 폐위하는 것으로 변모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 사건도 사료가 불충분해서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는 게 안타깝다. 강조의 변은 거란이 고려를 쳐들어오는 데 빌미가 되기도 했고 향후 고려 사회가 호족 시대에서 귀족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거란의 침입은 1차와 2차로 나뉘어진다. 1차 침입 당시 고려는 성종이라는 왕을 중심으로 왕권이 안정되어 있어 서희 같은 명장을 배출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성공하였다(강동 6주 획득). 그런데 제2차 침입 때는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왕위에 올리면서 정치 체제가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강동 6주가 무너지고 개경이 함락되면서 현종이 몽진까지 하는 상황 속에 패배하고 만다. 


이처럼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의 1권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전투에서 승리한 935년부터 거란의 침략으로 위기를 겪게 된 993년의 시기를 담고 있다. 책에는 우리가 역사서에서 배우는 내용도 있지만 잘 모르는 사실들, 오해하고 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이를 보충한 역사적 사료와 역사 패널들의 대화를 통해서 공부하는 효과까지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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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 사라진 알베르틴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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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존재가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형태를 갖추고 시간이란 틀에 복종해야 한다. 연속적인 순간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존재는 한 번에 한 모습밖에 보여 주지않으며, 그 모습에 대해서도 단 하나의 사진밖에 생산하지 않는다. 오로지 순간들의 집합으로만 이루어진 존재에게 그것은 큰 약점이지만, 또한 큰 힘이기도 하다. 존재는 기억의 영역에 속하며, 또 어느 한순간의 기억은 그 후 일어난 일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때 그 기억이 기록한 순간은, 그리고 그 순간과 더불어 드러난 존재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지속된다. 그리고 그런 파편화는 다만 죽은 이를 살아나게 할 뿐만 아니라 죽은 이를 무한대로 증식한다. - P110


과거의 사진을 볼 때 우리는 그 때의 자신과 만나면서 그 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재현되는 일을 경험하곤 한다. 이 문장을 만나면서 지금의 나도 단 한 순간의 나이며 한 모습의 나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도 본인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마주하지는 못하고 거울에 비친 한 쪽의 얼굴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도 타인도 나의 한 쪽면을 볼 뿐이다. 단 한 순간의 시점들이 점처럼 모여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알베르틴은 떠났지만 나는 한동안 고뇌를 하지 않는 듯 가장하며 생활해간다. 만약 그녀가 떠난 게 아쉬웠다면 직접적 그녀를 만나러 가거나 편지를 쓰는 방식으로 본인의 의사를 명확히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고 주변 사람을 대리자로 보내 지속적으로 떠보는 행동을 한다. 나는 과거 질베르트에게도 그랬었다. 좋은 일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고 모순적 행동을 자기표절까지 해가면서 왜 할까. 최악이라 느껴졌다. 특히나 연인 관계에서 이런 태도는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며 후회를 낳을 뿐이다. 


지금까지 나는 습관이 우리 지각의 독창성과 의식마저 제거하고 무로 돌리는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습관을 우리에게 고정된 무시무시한 신(神)으로 간주했고, 그 무의미한 얼굴이 그토록 우리 마음속 깊숙이 박혀 있어서, 만일 우리가 거기서 떨어져 나가거나 멀어지기라도 하면 여태껏 거의 알아볼 수 없던 그 신은 어느 누구보다 무서운 고통을 야기하고, 그리하여 죽음만큼이나 잔인한 존재가 된다. - P16~17


알베르틴이 편지를 보내왔다.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왜 내게 직접 편지를 쓰지 않았나요? 그랬다면 매우 기쁘게 돌아갔을텐데…” 뒷 문장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첫 문장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걸 보고 나는 후회하면서도 그녀에게 거짓 고백이 담긴 편지를 보낸다. 이때야말로 진심을 보이면 될 텐데 왜 또 거짓 답장인 것인지 모르겠다.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나를 기준으로 타인을 생각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상황을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행동 때문이 아니었나. 


한 존재와 우리의 관계는 오로지 우리 사유 속에만 존재한다. 기억이 희미해지면 그 관계는 느슨해지고, 우리는 환상에 쉽게 속아 넘어가고 싶어 하면서도, 또 사랑이나 우정, 예의나 체면, 의무감 때문에 타인을 속이면서도 결국은 홀로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며, 자기 안에서만 타자를 인식하며, 그렇지만 그와 반대되는 말을 하면서 거짓말하는 존재이다. - P65


나는 지난 9, 10권을 읽을 때도 생각했지만 알베르틴에 대한 나의 감정이 과연 사랑일까 싶었다.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상냥함을 불신하는 태도로서는 어느 누구를 만나도 이런 행동은 반복될 것이다. 나의 감정은 그저 알베르틴이라는 얼굴의 이미지와 육체적 욕망 뿐이었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알베르틴은 더 이상 돌아올 수 없게 되었지만 나는 과거로 돌아가 그녀에 대한 탐색과 욕망을 이어간다. 이 때부터 피로한 감정이 밀려왔다.


우리의 잘못은 다른 이들의 상냥함과 지성에 무관심한 데 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올 때라야 거짓은 분노를, 선의는 항상 우리 마음속에 고마운 마음을 다시 불러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육체적 욕망은 우리의 지성에 진정한 가치를, 우리의 정신적 삶에는 단단한 토대를 마련하는 경이로운 힘을 가지게 된다. 다시는 결코 그 성스러운 존재, 다시 말해 모든 것을 다 얘기할 수 있으며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 P140


설령 내게 가르쳐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해도, 나는 알베르틴이 사귀었거나 사귀었을지도 모르는 여인들, 그녀와 같은 환경이거나 또는 그녀 마음에 들었던 환경의 여인들, 한마디로 알베르틴과 비슷한 매력을 가진, 또는 그녀의 마음에 들었던 여인이라는 매력을 가진 여인에게만 마음이 끌렸다. 이렇게 알베르틴 자신을, 또는 알베르틴이 좋아했을지 모르는 타입의 여인들을 환기하다 보니, 그 여인들이내게 질투와 회한이 섞인 잔인한 감정을 깨어나게 했는데, 이런 감정은 나중에 슬픔이 진정되었을 때 조금은 매력이 없지도 않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 P229


지난 리뷰에서 주인공이 알베르틴이라는 이미지를 좋아할 뿐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이 문장을 보니 내가 느꼈던 감정의 내용이 그대로 문장에 나와서 깜짝 놀랐다. 역시 그는 그런 이미지들의 여자만을 추구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고 망각의 길로 들어가야했다. 개인적으로 망각은 시간만이 해결해준다고 믿는다. 아무리 힘든 기억이라도 시간은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며 감정을 무뎌지게 만든다. 

나는 주변의 사람들을 당장은 받아들이지 못했으나 주변에 있는 사교계 사람들 등 지인들과 교류하면서 알베르틴 없는 삶을 살아갈 동력을 점차 얻게 된다.


어쩌면 그때 내가 느낀 피로감과 슬픔은 이미 망각한 것을 헛되이 사랑한다는 사실보다는 살아 있는 새로운 사람들, 순수한 사교계 사람들, 그들 자체로서는 전혀 흥미롭지 않은 단순히 게르망트네의 친구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내가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데에서 더 많이 연유하는지 몰랐다. 사랑했던 여인이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빛바랜 추억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편이, 활기차지만 기생충과도 같은 인간 식물군으로 우리의 삶을 장식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공허한 활동의 발견보다는 어쩌면 더 쉽게 내 마음을 달래 주었을 것이다. 그런 식물군도 죽으면 또한 무로 돌아갈 것이며 우리가 알았던 것과도 이미 무관해질 텐데도, 우리의 수다스럽고 우울하고 영합적이며 노쇠한 존재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쓴다. 이제 알베르틴 없이도 쉽게 삶을 견딜 수 있는 새로운 존재가 내 마음속에 출현했다. - P302


어머니는 몇 주일 동안 나를 베네치아에 데려갔다. 나는 그곳에서 콩브레의 기억이 소환된다. 이는 베네치아의 일상적인 삶이 과거의 콩브레의 풍경과 비슷하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산마르코 대성당, 리알토 다리, 대운하…

나는 산마르코 대성당을 보면서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살아 있는 존재처럼 느꼈다. 시간의 색조의 선명함을 보존한 곳에서 성당은 마치 거대한 벌집 모양의 밀랍 모형처럼 부드럽고 유연한 재료로 만들어진 듯 보였고, 반대로 시간이 재료를 딱딱하게 만들고 또 예술가들이 투조 세공하고 금박으로 장식한 곳에서는 코르도바 가죽으로 장정한 베네치아의 복음서 귀중본처럼 보였다. 


나는 처음으로 「마귀 쫓는 의식을 거행하는 그라도의 총대주교」란 그림을 보았다. 높은 굴뚝을 상감하듯 박아 넣은 선홍빛과 보랏빛의 그 경이로운 하늘을 나는 오래 바라보고 있었는데,튤립꽃이 피어나듯 벌어진 굴뚝모양과 붉은색이 휘슬러가 그린 많은 베네치아 풍경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내 시선은 오래된 리알토 나무다리에서 금빛 기둥머리로 장식된 대리석 궁전이 있는 그 ‘15세기의 베키오 다리‘로 갔다가 다시 대운하로 돌아갔는데, 분홍빛 재킷 차림에 깃털 달린 챙 없는 모자를 쓴 젊은이들이 작은 배를 모는 모습이, 마치세르트와 슈트라우스와 케슬러가 만든 그 경탄할 만한 발레 「요셉의전설」에 나오는, 진짜 카르파초를 연상시키는 인물과 혼동될 정도로 닮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림을 떠나기 전, 내 눈은 당시 베네치아 삶의 정경으로 가득한 운하 기슭으로 되돌아갔다. 면도기를 문지르는 이발사, 술통 든 흑인, 대화 중인 이슬람 교도들, 다마스쿠스산의 화려한 비단 옷과 버찌 빛깔의챙 없는 벨벳 모자를 쓴 베네치아 귀족들. 그러다 나는 갑자기 가슴을 가볍게 깨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소매와 깃에 금박과 진주로 수놓은 장식에서 그들이 가입한 즐거운 협회의 표시를 알아볼 수 있는 그 ‘칼차의 동반자들 중 한 사람의 등에서, 알베르틴이 나와 함께 베르사유로 무개차를 타고 갔을 때 입었던 망토를 알아본 것이다. - P392~394


이 그림은 비토레 카르파초의 ‘성십자가의 기적’으로 베네치아 리알토 다리의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림으로 실제 내용은 그라도의 총대주교가 리알토 다리 옆에서 마귀 쫓는 의식을 거행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주인공은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을 환기했다.



나는 베네치아에서 돌아와 앙드레와 만나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알베르틴이 베르뒤랭 연회에 참석하고 싶어했던 이유가 봉탕 부인이 알베르틴의 결혼 상대로 생각한 베르뒤랭 부인의 조카를 만나기 위한 것이지, 뱅퇴유 딸과의 만남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 알베르틴의 필체로 오인한 질베르트의 전보가 실은 질베르트와 생루의 결혼을 알리는 청첩장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생루가 질베르트와 결혼한 것도 그녀가 가진 부와 모렐과의 관계를 숨길 수 있어서이고, 샤를뤼스가 모렐로부터 버림받은 쥐피앵의 조카딸을 양녀로 삼은 뒤 캉브르메르 후작의 아들과 결혼시킨 것도 모렐에 대한 복수 때문이었다. 질베르트는 파리의 포르슈빌 가에 상속녀가 되었지만 부와 명예에 철저히 이용되면서 정작 본인의 삶은 불행히 이어간다. 


그 먼 시절이 긴 고통에 지나지 않았던 영혼의 상태로부터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마멸되고 사라지는 이 세상에서 폐허로 변하는 것, 아름다움보다 잔해를 덜 남기면서 보다 완전하게 파괴되는 것은 바로 슬픔이기 때문이다. - P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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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0-03 13: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벌써 11권! 이제 얼마 안남으셨군요~! 전 개인적으로 11권이 가장 좋았었습니다.
역시 화가님이어서 그림도 찾아보셨군요 ~!!

거리의화가 2023-10-03 15:49   좋아요 1 | URL
네. 힘들어서 얼른 끝내고 싶은데 아직도 2권이 남았습니다ㅋㅋㅋ 그림은 항상 궁금해서 찾아보게 되더군요^^; 책의 설명과 비교하면서 보는 맛도 있고요^^
새파랑님은 11권이 가장 좋으셨군요! 저는 아직까지도 1~3권이 가장 좋았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이 어떻게 결론이 날지 궁금하네요.

페크pek0501 2023-10-03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책을 읽느라 레 미제라블2에 머물러 있어요.님의 꾸준함을 본받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10-03 15:51   좋아요 1 | URL
페크님 거의 10개월째 읽다보니 힘들어서 이제는 좀 끝내야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평소 여러 권의 책을 읽는데 잃시찾 시리즈는 한번에 몰아읽기가 힘들어서 계속 쉬다 읽다를 반복하고 있네요. 어쨌든 남은 2권은 올해 안에는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페크님의 독서 생활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