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생산 수단은 발전했고, 기술도 발달했지만, 내 생각에 아버지가 생산자로서의 자기 권력에 확신을 갖고 자기 생산물에 자기 이름을 표시한 이래—사유 재산제와 가부장제 가족이 시작되었을 때부터—사회적 착취는 일어난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역사’에 나타난 모든 사회 체제들은 생산 ‘계급’에 대한 착취, 즉 여성의 착취를 기반으로 작용한다. - P226

여성의 (아이들과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능력에 대한 사용 가치와 이들의 교환 가치 구축은 상징적 질서를 보장한다. 이 ‘노동’을 제공하고도 여자들은 이 유통에서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한 채 말이다. 이것은 남성들-아버지들에 의한 고유 명사 독점(또 소유권으로서 이 독점화가 의미하는 것)의 분산인 교환의 이중 체계를 함축할 것이다. (중략) 한 여성을 소유한다는 것은 분명 이 여성이 표현하는 번식 용도라는 가치 때문에 남성에게는 필수 부가결하다. 그러나 그의 욕망은 모든 여성들을 소유하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하나씩 차례로 그리고 동시에 추가로 정복하고, 유혹하고 소유하면서 모든 여자들을 ‘축적’하는 것이다. 즉 남성은 종마(들)와 같다.

상대적 가치를 지니기 위해, 하나의 상품은 자신과 등등하게 작용하는 다른 상품과 맞서야만 한다. 결코 자신의 가치는 그녀 안에서 저절로 드러나지 않는다. (중략) 상품들, 여자들은 남성의 남성을 위한 가치를 내비치는 거울이다. 이러한 작용으로 인해, 여자들은 반사 작용, 사색의 매체-질료인 자신들의 육체를 남성에게 내맡긴다. 여자들은 자신들의 자연적 사회적 가치를 남성 활동의 흔적 표시, 그리고 그에 대한 환상의 장소로 남성에게 내맡긴다. - P230

가치는 동등한 노동력, 동등한 에너지 소비, 동등한 고통을 나타낸다. 이러한 것들이 측정되려면, 이것들이 즉각적으로 모든 자연적 자질들로부터, 구체적인 개인으로부처 추상화되어야만 한다. 일반화 보편화 과정은 사회적 교환 기능 속에 부여된다. 거기에서 남성은 하나의 ‘개념’—남성 노동력이라는—으로 축수되고, 그의 산물은 이 개념의 분명하고 물질적 상관물인 하나의 ‘대상’으로 축소된다. - P238

여성의 위상을 가능케 하는 것, 그 기반을 보장하는 것, 그것은 여자들의 교환이다. 적어도 가부장제의 사회 기능이 정돈되는 것은 남자들 사이에서 여자들이 유통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가정한다. 남성이 자연을 개조한다는 것, 오로지 남성들에 의해서 규정된 ‘인간적’ 기준에 따라 자연이 변화한다는 것, 자연은 노동에, 기술에 굴복한다는 것, 물질적 구체적 감각적 자질을 교환이라는 추상적 가치로 환원시킨다는 것, 게다가 모든 감각의 세계를 남성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활동으로 환원시킨다는 것, 여자들 사이에서는 여자들이 평등하지만 그들 외부에 있는 동등성의 법칙에 따른다는 것, 여자들을 남자들 사이의 관계를 구체화하는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 등이다. - P239

어머니 처녀 창녀, 이것들이 여자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들이다. (이른바) 여성 성욕의 특징들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즉 번식 활동과 영양 공급에 대한 가치 부여, 정절, 정숙함, 무지, 게다가 쾌락에 대한 무관심, 남성들의 ‘활동’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소비자들의 욕망을 부추기 위한 유혹, 그러나 자신은 누리지 않으면서 이 욕망에 필요한 물질적 기반으로 자신을 바친다. 어머니도 처녀도 창녀도 아닌 여성에게는 자기 쾌락에 대한 권리가 없다. - P242

상품들이 자신들을 검사하는 주체들의 개입 없이 자기들끼리 교환될 수 없는 것처럼 여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교환할 수 있다고 평가함에 따라 이들은 서로 구분도고, 분리되고, 따로 떨어져 있으면서 유사한 것이 되기도 하고 상이한 것이 되기도 한다. 무기력하게 서로 뒤엉켜 있는 그녀들 자신, 그녀들 사이에서 그들의 육체는 아마도 소비자에게는 자연적, 모성의, 유용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있을 수 있는 정체성도,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가치도 없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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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사람의 여자이다. 나는 여성이라는 성을 가진다. 나는 여성이란 성으로 구별되었다. 그리고 이 언술의 창출이 어떤 식으로든 무분별하고 부적합하고 부적당하는 사실 속에 있다. 여자가 결코 존재의 속성, 존재할 수 있는 여성이란 성의 특성이 아니더라도, 여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나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더라도, 내가 성적으로 구분되어진 존재라는 사실이 여성이라는 유를 배제하더라도 말이다. 달리 말해 내 성적 현실의 분절은 담화 속에서, 본질적 구조라는 이유로 불가능하다. 내 성은 어쨌든 주체의 속성처럼 추론적 일관성을 보장하는 단언의 기능에서 벗어난다. - P195

지배자 자리에 있는 자는 쉽게 그 자리를 포기하지 않고, 심지어 다른 사람, 즉 이미 ‘거기에서 제외된’ 자를 상상하지도 않는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남성’은 담화의 주도권을 공유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그는 여성과 관계 있는 영역에서 주도권을 공유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그는 여성과 관계 있는 영역에서 이 다른 존재에게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거나, ‘행동’의 권리를 부여하기보다는 말하고 쓰고, ‘여성’으로부터 쾌락을 누리려고 애쓰는 쪽을 더 좋아한다. 여성에게 가장 단호한 금기 사항은 당연히 어떠한 여성적 쾌락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이 쾌락은 담화의 한 ‘영역’, 남자들이 만들어 낸 ‘영역’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사실 이 쾌락은 남성적 담화에게 있어서는 가장 치명적인 위협을 의미한다. - P205

내 욕망은 여성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차를 인정하면서 여성에게 여성의 자리를 내주는 것이다. - P207

여성은 남성의 이면, 게다가 반대로서만 늘 규정되어 왔다. 그러므로 이 결핍 속에 정지하는 것, 이 부정을 폭로하면서 그 속에 정지하는 것, 여성으로부터 ‘성적 차이’의 기준을 만들면서 동일함의 체계를 전복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차이를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정신분석 자신은 자신의 이론과 실천을 성차에 대한 잘못된 인식 속에서 수행해 왔다. 정신분석학적 실천과 이론이 분명 철학적 추론성을 문제로 삼지만, 여전히 상당 부분이 거기에서 추방될 수 있을 것—현재 그렇다—이라는 사실은 여성 성욕의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그것은 정신분석이 여전히 철학의 하녀를 이루기 때문에, 동시에 여성인 내가 거기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에, 남성 철학자, 그 역시 정신분석학의 이론에, 여성의 문제에, 그리고 당연히 소유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남성인 그와의 이 ‘대화’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해 왔기 때문이다. - P208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모든 여성들은 성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동일한 상황에 처해 왔다. 여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이 어떠한 것이든, 여자들은 명확하게 인식하지도 못한 채 모두가 똑같은 억압, 육체의 똑같은 착취, 그들 욕망의 한결같은 부정을 감내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이 서로 ‘자기들끼리’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남성 위주의 사회가 그들에게 할당하고 교육시켜온 위치 역할 행동들로부터 벗어나기를 시도하기 위해, 여자들이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여성 각자에게 그녀가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첨예하게 느껴졌던 것이 모든 여성들에 의해 공통된 조건이라는 사실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이러한 경험은 정치성을 띤다. - P214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기초는 사실 오늘날의 정치에 의해 다시 행해진다. 비록 ‘좌익’ 정치라 해도 말이다. 사실 현재까지 마르크시즘은 여성들에 대한 특수한 착취의 문제들을 거의 책임지지 않았고, 여자들의 투쟁은 가장 일반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혼란스럽게 한 것 같다. 반면에 이 투쟁들은 정치 프로그램들이 정확하게 요구하는 사회적 착취에 대한 분석 도표를 사용하여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매번 이러한 도표들을 다른 식으로 이용한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그러나 어떠한 정치도 지금까지 남성 우월적 궈력과 자신들과의 관계에 의문을 던지지 않았다. (중략) 남자들과 ‘동등한’ 여자들은 단순히 ‘그들처럼 될’ 것이고, 여자들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다시 이렇게 성차는 무시되고, 잘못 알려지며, 은폐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양식의 조직들, 새로운 형태의 투쟁들, 새로운 논쟁들을 창출해야만 한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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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결코 비슷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녀가 내뱉는 말은 물처럼 흘러내리고 변화한다. 또 속인다. 거기에서 독특한 (자신만의) 의미를 상실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그녀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 ‘주체’를 침범하는 이 목소리에 대한 저항들이 거기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이 주체는 쏟아져 내리는 목소리를 마비시킬 때까지 자신의 범주 안에 꼼짝 않고 굳어 있을 것이다. "자 남성 여러분, 당신의 딸들이 벙어리가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언어 활동은 항상 딸들을 그녀들이 여러분에게 이야기했을지도 모르는 것, 이미 여러분에게 털어놓았던 것으로부터 더 먼 곳으로 추방한다. 단지 여러분의 귀가 그렇게 많은 것을 아는 상태가 아니라면, 수많은 의미로 꽉 차 있지 않다면, 당신들의 귀가 어떤 식으로든 전에 들었던 것을 따라하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담화 안에서 분절된 의미 작용에 의해 이미 그 경계가 그어진 장소 바깥에서 여자, 굶주린 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침묵 지대이다. - P149

자연에는 분명 에너지가 존재하지만, 이 자연은 ‘자기 안에’ 원동력을 소유할 수가, 자신의 전체적 형태 안에 이 원동력을 가둘 수가 없다. 그리하여 액체는 단위와의 관계에서 항상 넘쳐나거나 모자란다. 이것은 ‘너는 저것이다’는 것에서 벗어난다. 말하자면 완전히 정지된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액체가 유기체에 속하기 때문에, 거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를테면 성에 대해서 말이다. 거울 속 이미지를 구성하는 여러 결과들 속에서 여자아이의 성이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또한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눈에 보이는 이 세계의 문턱처럼 나타난다"라고 말하는 것이 여성이라는 성이 이 세계에서 제외되리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남성이란 성을 가진 육체 혹은 중성적인 육체가 사회 질서 내 주체의 개입으로/개입이란 축소할 수 없는 자궁, 즉 게슈탈트의 특징들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바를 강조하는 것은 아닌가? "반사적인 나를 사회적인 나로 변화시키는 편집증적 소외"가 거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이 변화는 이미 ‘거울의 단계’에 새겨져 있다. - P155

역사적 결정에 대한 불충분한 의문 제기는 분명 정치와 물질의 역사와 같은 체계를 이룬다. 정신분석이 소유 체제의 어떤 유형, 담화의 유형—서둘러 말해서, 형이상학의 유형—종교적 신화의 어떤 유형 안에 자신이 포섭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 자신은 여성의 성욕에 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사실 여성의 성욕은 정신분석 이론과 실천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국부적인 문제로 축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영역에 감춰진 문화적 토대와 일반적 체계의 해석을 요구한다. - P166

복잡한 것, 그것은 여성이 만들어내는 ‘여성의 담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 직접적으로 말해서 어쨌든 실제적으로 정치적 실천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성에 의해 실현된다는 사실이다. 여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려면, 사고 방식과 정치 태도의 극단적인 혁신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단번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 P168

물론 여자들은 상당 부분 여성 해방 운동에 힘입어 피임과 낙태의 자유 등과 같은 것들을 획득해 왔다. 그리하여 여성의 사회적 지위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다른 식으로 제기된다—특히 여성의 기능을 모성적-재생산자라는 단순한 기능과 분리시키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산물들은 또한 항상 여자들에게 등을 돌릴 수도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주제에 관해서 우리는 아직도 구체적인 여성 정책이 아니라 단지 이를 위한 가능성 있는 몇 가지 조건들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첫번째 조건은 여자들이 당하는 착취에 대한 침묵을 깨는 것이었다. ‘침묵’에 대한 거부는 여성 해방 운동에 의해 체계적으로 실천되었다. - P169

문체와 의미, 이 두 가지는 서로 동일한 것도 아니면서 일치한다. 문체는 결과의 차원에 있다. 여성적으로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문체는 그것의 한 결과이다. 의미는 오히려 무의식, 즉 여성 무의식의 문제를 지칭한다. - P172

‘여성적 말투’의 문제는 욕망의 제스처, 혹은 욕망의 개인 언어—실제로 이것들은 여러 가지 병적 증세들과 병리학의 형태로만 파악될 수 있다—와 구어 체계를 포함한 언어 활동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지속성을 발견하는 것에 불과할 터이다. 여기에서 여전히 우리는 정신분석이 히스테리 증상에 하나의 코드를, 육체로 표출되는 현상 속에, 또 침묵 속에 고정된 욕망과 일치하지 않는 하나의 해석 체계를 지나치게 강요해 온 것은 아닌가를 알아내야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은 남성 사회에 더 잘 적응시키게 하는 암시들을 늘리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히스테리 환자들을 치유하는가?"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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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은 진실에 대한 담화를 여성의 성욕을 근거로 유지한다. 담화란 진실의 진정한 논리를 보여 준다. 즉 여성적인 것은 남성 주체들에 의해 강요된 모델들과 법칙들 내부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을 알기 위한 진실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두 개의 성이 아니라 하나의 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성의 유일한 실천과 표현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여성의 역사로 말하자면, 여성이란 성은 그 필요성, 그 이면, 그것이 결핍하고 있는 것들, 그것의 부정적인 요소/요소들을 유지하는 것이다. - P113

그러나 정신분석이 담화 자체를 자신들의 연구 대상으로 삼을 때, 여성 성욕에 대한 이 참된 사실은 아직까지 매우 엄격하게 진술된다. 거기에서 더 많은 해부학이 두 성 사이의 실제적 차이를 입증하는 증거-구실로 아주 조금이라도 이용될 것이다. 이 두 성은 언어 활동 속의, 언어 활동을 통한 그들의 결정으로 명시된다. 이 언어 활동의 법칙이 수 세기 전부터 남성 주체들에 의해 미리 규정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 P114

쾌락의 중요성 때문에 이해의 시기가 망각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가능하다면. 당신들이 이 시기를 뛰어넘는다면, 당신들의 무지함은 이 논리에/그의 논리에 더 많은 쾌락을 주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지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면 쾌락은 최소가 된다. 그래도 당신들이 누리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는 누린다. 재빨리 유혹하고, 더 빨리 만족하는(?) 당신들은 최고 가치의 공범자이고, 이 최고 가치에 대한 그의 말은 당신들의 육체를 수동적으로 만들라고 부추긴다. 이때 쾌락을 더 많이 누린다는 것은 육체—타자의—와 관련 있다. 말하는 존재인 줓체에게 있어서, 그것은 쾌락을 일으키는 자를 더 많이 누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사랑스런 여인’의 육체가 아니라, 그녀가 알지 못하는 언어 활동의 기능을 사람들이 그녀로 하여금 견디게 한다는 사실이다. - P122

한 여성으로부터 쾌락을 누리는 것, 한 여성의 정신을 분석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남성에게는 그가 그녀에게 빌려 준 무의식을 다시 소유하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 대가를 치른다. 아직까지, 육체로. - P123

타자의 육체에 대한 담화가 갖는 결점은 이따금씩 이 모든 여자들 속에서 변형된다. 발설될 수 있는 언어 활동과 관계 있는 타자의 환희—물론 이것은 여전히 쾌락 향유의 원인으로 존속해야만 한다—는 절제되고, 측정되고, 수많은 여자들 사이에서 통제된다. - P129

타자의, 타자에 의한, 타자 안에서의, 타자를 통한 타자와의 관계는 불가능하다. 즉 "타자의 타자는 없다." - P133

당신들에게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담화가 있다면 "이를 일으키는 것은 여성이 어머니로서만 겨진다는 매우 분석적인 담화이다. 여성은 어머니로서만 성관계 속에서 작용한다." 여성이 ‘어머니로서만 여겨진다’는 사실은 철학적 전통 전체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 조건이기도 하다. 또 여성적 토대의 필요성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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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 유형의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프로이트가 끼어든 덕택에 그의 이론 내부에는 몇 가지 모순이 일어난다. 남성의 욕망에 일치하기 위해 여성은 남성의 어머니와 동일시되어야만 한다. - P91

프로이트는 페니스가 번식 기관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도 확신한다. 그러나 여성의 생식 기관들이 동일한 자기 중심적 혜택을 끌어내지 못하지만 그만큼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번식에 있어서 훨씬 필수적이기도 하다. - P92

무의식의 체계와 두 성 차이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분절은 그에 의해 실현되지 않았다. 더 이상 여성을 억압하지 않는 어떤 문화에서 정신분석학적 개념들에게 어떠한 일이 생기는가를 아는 것은 분명 흥미로울 것이다. 여성의 ‘특수한’ 성욕에 대한 인정은 남성에 의한 가치 독점을, 결국 아버지에 의한 이익 독점을 재검토한다. - P94

프로이트가 성욕을 자기 담화의 주제로,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담화가 담화 자체의 성적 변화에, 특히 자기 담화의 성적 변화에 속해 있다는 해석을 끌어내지 않았다. 이것은 여성의 성욕에 대한 전적으로 ‘남성적인‘ 그의 시각과 다른 곳에서 여성 분석자들의 이론 산물들을 향한 매우 부분적인 그의 관심이 증명하는 것이다. 그는 담화 생산의 편견을 성적 차이와 연관지어 분석하지 않았다. 다른 식으로 말해서, 프로이트의 실천과 이론이 재현 무대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은 이 무대의 성 결정에 관한 문제까지 가지는 않는다. 이러한 연결의 결여로, 프로이트의 업적은 일면 선험적 형이상학에 머무르는 셈이 된다. - P95

오늘날 여성들에게 가장 금기시되는 것은 그들의 쾌락을 말하려는 시도이다. - P99

우리는 여성 착취에 대한 분석과 소유 방식에 대한 분석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사실 남자는 공식적인 교환에 실제적으로 참여한다는 사실로부터 결코 단순한 번식 기능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여자는 사유 재산의 장소인 ‘집’ 안에 은거한다는 사실로부터 어머니 이외에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생산 회로에 들어설 뿐 아니라 피임과 낙태의 보편화로 인해 여성에게 여성이라는 역할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피임이나 낙태를 사람들이 여전히 아주 자주 출생률을 조절하고 더 나아가 ‘억제’하는 수단이라고, ‘원하는 때에’ 어머니가 되는 수단이라고만 이야기한다면, 이러한 것들이 여성의 사회적 위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끌어내는 것, 그리하여 남자와 여자의 사회적 관계의 양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끌어낸다는 것은 회피할 수는 없다. - P106

‘여성’은 오로지 남성에 의해, 남성들을 위해 결정된다. 상호성은 ‘사실’이 아니다.소비와 교환의 대상으로 억지로 실어증 환자가 된 여자들이 ‘말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면, 이 사회와 그것을 조정하는 상징적 기능은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까? - P108

분명 남성적인, 더 정확히 말해서 남근 중심적 ‘모델’에 따르지는 않는다. 이것은 다른 성, 다른 사람, 즉 여전히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이 존재한다는 견지에서 오늘날 법을 제정하고, 성의 차이를 포하한 모든 것에 대한 규칙을 제정하는 담화에 대해 틀림없이 의문을 던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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