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결코 비슷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녀가 내뱉는 말은 물처럼 흘러내리고 변화한다. 또 속인다. 거기에서 독특한 (자신만의) 의미를 상실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그녀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 ‘주체’를 침범하는 이 목소리에 대한 저항들이 거기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이 주체는 쏟아져 내리는 목소리를 마비시킬 때까지 자신의 범주 안에 꼼짝 않고 굳어 있을 것이다. "자 남성 여러분, 당신의 딸들이 벙어리가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언어 활동은 항상 딸들을 그녀들이 여러분에게 이야기했을지도 모르는 것, 이미 여러분에게 털어놓았던 것으로부터 더 먼 곳으로 추방한다. 단지 여러분의 귀가 그렇게 많은 것을 아는 상태가 아니라면, 수많은 의미로 꽉 차 있지 않다면, 당신들의 귀가 어떤 식으로든 전에 들었던 것을 따라하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담화 안에서 분절된 의미 작용에 의해 이미 그 경계가 그어진 장소 바깥에서 여자, 굶주린 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침묵 지대이다. - P149

자연에는 분명 에너지가 존재하지만, 이 자연은 ‘자기 안에’ 원동력을 소유할 수가, 자신의 전체적 형태 안에 이 원동력을 가둘 수가 없다. 그리하여 액체는 단위와의 관계에서 항상 넘쳐나거나 모자란다. 이것은 ‘너는 저것이다’는 것에서 벗어난다. 말하자면 완전히 정지된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액체가 유기체에 속하기 때문에, 거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를테면 성에 대해서 말이다. 거울 속 이미지를 구성하는 여러 결과들 속에서 여자아이의 성이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또한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눈에 보이는 이 세계의 문턱처럼 나타난다"라고 말하는 것이 여성이라는 성이 이 세계에서 제외되리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남성이란 성을 가진 육체 혹은 중성적인 육체가 사회 질서 내 주체의 개입으로/개입이란 축소할 수 없는 자궁, 즉 게슈탈트의 특징들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바를 강조하는 것은 아닌가? "반사적인 나를 사회적인 나로 변화시키는 편집증적 소외"가 거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이 변화는 이미 ‘거울의 단계’에 새겨져 있다. - P155

역사적 결정에 대한 불충분한 의문 제기는 분명 정치와 물질의 역사와 같은 체계를 이룬다. 정신분석이 소유 체제의 어떤 유형, 담화의 유형—서둘러 말해서, 형이상학의 유형—종교적 신화의 어떤 유형 안에 자신이 포섭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 자신은 여성의 성욕에 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사실 여성의 성욕은 정신분석 이론과 실천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국부적인 문제로 축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영역에 감춰진 문화적 토대와 일반적 체계의 해석을 요구한다. - P166

복잡한 것, 그것은 여성이 만들어내는 ‘여성의 담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 직접적으로 말해서 어쨌든 실제적으로 정치적 실천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성에 의해 실현된다는 사실이다. 여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려면, 사고 방식과 정치 태도의 극단적인 혁신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단번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 P168

물론 여자들은 상당 부분 여성 해방 운동에 힘입어 피임과 낙태의 자유 등과 같은 것들을 획득해 왔다. 그리하여 여성의 사회적 지위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다른 식으로 제기된다—특히 여성의 기능을 모성적-재생산자라는 단순한 기능과 분리시키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산물들은 또한 항상 여자들에게 등을 돌릴 수도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주제에 관해서 우리는 아직도 구체적인 여성 정책이 아니라 단지 이를 위한 가능성 있는 몇 가지 조건들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첫번째 조건은 여자들이 당하는 착취에 대한 침묵을 깨는 것이었다. ‘침묵’에 대한 거부는 여성 해방 운동에 의해 체계적으로 실천되었다. - P169

문체와 의미, 이 두 가지는 서로 동일한 것도 아니면서 일치한다. 문체는 결과의 차원에 있다. 여성적으로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문체는 그것의 한 결과이다. 의미는 오히려 무의식, 즉 여성 무의식의 문제를 지칭한다. - P172

‘여성적 말투’의 문제는 욕망의 제스처, 혹은 욕망의 개인 언어—실제로 이것들은 여러 가지 병적 증세들과 병리학의 형태로만 파악될 수 있다—와 구어 체계를 포함한 언어 활동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지속성을 발견하는 것에 불과할 터이다. 여기에서 여전히 우리는 정신분석이 히스테리 증상에 하나의 코드를, 육체로 표출되는 현상 속에, 또 침묵 속에 고정된 욕망과 일치하지 않는 하나의 해석 체계를 지나치게 강요해 온 것은 아닌가를 알아내야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은 남성 사회에 더 잘 적응시키게 하는 암시들을 늘리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히스테리 환자들을 치유하는가?"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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