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획정은 크게는 광범위한 지역의 정치적 재편(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부터 작게는 철도건설을 위한 지역계획과 농촌 토지소유권 문제를 둘러싼 미세한 조정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에서 진행되었다. 공유지(Allmende)의 해체와 사유화 과정은 때로는 정부의 통제가 없는 상태에서 혼란스럽게 진행되었다.
다른 경우에는 정부의 엄격한 지도와 계획 아래서 진행되었다. 국가가 토지를 기준으로 하여 세금을 징수하자 누가 무엇을 부담해야하는지, 토지 소유자와 점유자 중에서 누가 부담해야 하는지 ——촌락공동체는 더 이상 과세대상이 아니었다 — 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 P352

세계 어느 곳에서든 이것은 정부활동이 지방에까지 확산되는 가장 중요한 동기였다. 이후 복잡한 토지 소유관계를 정리하여 합리적인 방식으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세기 혹은20세기에 시행된 거의 모든 토지개혁은 이런 부분에 대한 대비책을소홀히 하지 않았다. 토지의 계획적인 운용은 현대사회의 기본행위 가운데 하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20세기 소련, 동유럽, 중국의 대규모 집단화였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기울이지 않았다. 하나의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 토지등기제도와토지의 자유로운 처분권이 없는 국가는 ‘현대‘ 국가라고 할 수 없다. - P353

상이한 국경 관념이 충돌하는 곳은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국경을 획정하는 현장이었다. 마지막 승자는 대부분 현지에서 세력이 가장 강한 쪽이었다. - P362

국경은 부분적으로는 영토로서의 깊은 뿌리가 없는 행정구획이었고, 부분적으로는 (특히 ‘간접통치‘ 상황일 때) 식민지가 되기 전 통치구역의확인 표지였다. 제국 사이의 국경은 온전한 연속선으로 표시되는 기우는 드물었고, 유럽의 국경처럼 면밀하게 지키기도 어려웠다.
모든 제국에는 열려져 있는 측면이 있었다. 프랑스의 경우 그것은알제리 사하라였고, 영국의 경우는 인도 서북 국경이었고, 제정러시아의 경우는 카프카스였다. 그러므로 국가적 경계의 역사적 순간은식민지가 해체되고 새로운 주권국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1945년이후 시기에 찾아왔다. 이때 ‘철의 장막과 함께 유럽과 한국이 분단되었다. 국경은 유사 이래 최고도로 군사화 되었다. 국경의 불가침성을 확인하기 위해 핵무기와 철조망이 동원되었다. 국경에 대한 19세 기적 강박관념이 20세기 60년대에 극치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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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는 지리학이 과학으로 전환해가던 첫 번째 단계이자 지리발견의 마지막 시대였다. 유럽인의 발길이 닿은 적이 없는 곳, 지도 위에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공백으로 남아 있는 곳, 고도의 위험만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곳을 찾아가는 영웅적인 여행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 P294

기독교도라는 종교적 자기인식을 넘어선 보편적인 유럽인의 의식‘은 계몽주의 시대에엘리트들 사이에서 점진적이며 산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유럽 전체에서 보편적인 유럽인의 인식이 완성된 것은 아무리 늦어도 나폴레옹 시대의 일이었다. - P313

공간을 묘사하는 모든 개념은 역사를 통해 자리 잡아야 한다. 근대 사회지리학의 연구 성과는 공간, 자연형태, 지역을 선천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역사학자들의 믿음이 옳은 것임을 증명해준다.54) 역사를 연구하는 (혹은 ‘해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학술적 저서와 학교 교과서, 세계정치에 관한 언론의 보도, 동시대의 현실이나역사적 상황을 반영한 지도를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지도는 지리학 개념을 표출하는 효과적인 매체일 뿐만 아니라 공간인식의 수단이자 도구이다.
19세기에 지도의 정확성을 요구했던 배경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있었다. 오랫동안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던 실용적 목적 — 교통, 전쟁, 식민통치 —— 이외에 19세기 초부터 지도제작에는 새로운 목적,
즉 지도를 통한 국가영토의 시각화가 추가되었다. 최근까지 국가의식과 지도를 통한 표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깊은 연구가 있었고 연구성과물도 풍부하다.55) 영토가 비교적 완전한 민족국가와 비교했을때 영토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방대한 제국은 시각정보를 끊임없이 갱신해야 할 필요가 컸다. 1830년대 이후 제국의 영토를 유명한붉은색으로 표시한 세계지도가 보급되면서 영국 대중에게 제국의식이 생겨났다는 해석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 P320

19세기 후반에 상호 연관된 두 가지 역사 발전과정이 병행하여어났다. 첫째, 유럽의 직업적 또는 비직업적 지리학자들이 전례 없대규모 ‘탐험’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가적 후원을 배경으로 하여 서로 경쟁을 펼쳤다. 세계지도 위에 표된 적이 없거나 측량된 적이 없는 ‘공백지역‘이 하나씩 채워졌다.
행자와 지리학자들도 식민 제국주의가 이용할 수 있는 통치지식을갈수록 더 많이 만들어냈다. 이와 함께 지역 지도의 정확성도 끊임이 높아졌다. 그러나 1780년대가 되어서야 파리의 모든 건물을 표시한 도시 지도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지도의 제작목적은 관광 안나용이 아니라 재산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자료용이었다. 5) 이 지도의 등장으로 인류는 마침내 관찰 각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정확한 측량 수치를 근거로 하여 세계의 모습을 그린, 관점에 따라서 결정되는 심리적 지도가 아니라 지표면 형태를 과학적으로 묘사한 지도를 갖게 되었다.
세계지도를 제작하는 일은 1차 대전 이전에 이미 완성되었고 이 때문에 유럽과 미국 지리학계는 세계적인 명성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지도는 동시에 군사 지휘관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청일전쟁(1894-95)과 러일전쟁(1904-1905)에서 일본군이 이길 수 있었던 핵심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본군 지휘관들이 갖고 있던 지도가 적이 갖고 있던 지도보다 더 정확했기 때문이다. - P325

둘째, 공간에 대한 주관적 인식이 세계 각지에서 재정비됨에 따라객관화가 크게 확대되었다. 인류의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오래된 중심은 점차 해체되었고 많은 지역이 어느 순간에 자신이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새로 발전하고 있는 더 넓은 공간범주 국제적인 국가질서 또는 국제적인 교역망과 금융망의 변두리에 있다는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새로운 중심과 좌표가 끊임없이 생겨났다. 예컨대, 1868년 이후 일본은 자신이 참조해야 할 대상은 더 이상 중국이 아니라 군사·경제적으로 더 친근한 ‘서방‘ 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다시 30년이 지나자 일본은 또 한 번 시각을 바꾸어 아시아대륙을 자신의 제국주의적 확장의 대상 공간으로 보았다. 지금까지 시선을 내륙으로 향하던 국가들은 전대미문의 각종 위험이 대양으로부터 자신에게 밀려오고 있는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위험이 찾아오자 같은 방향에서 새로운 기회도 찾아왔다. 일부 오래된 제국의 중심은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예컨대, 오스만제국은 발칸반도로부터 서서히 밀려나면서 아라비아에서 미래의 가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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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적 변화는 특수한 시간구조, 특수한 속도, 특수한 전환점, 특수한 공간 차이와 일정 정도의 지역적 특색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간구조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목적이다. - P197

19세기는 파편화된 세기, 무명의 세기, 쉽게 정의할 수 있는 두 시대 사이에 끼어 있는 긴 과도기라고 부를수 있다. 어쩌면 난감한 세기일지도 모른다. - P201

연대의 상대성은 역사 시기를 묘사할 때 채용된 각양각색의 명칭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역사 시기를 고대, 중세, 근대로 나누는 3단론 유럽에서는 1680년대 이후 점차적으로 채택되었다은 풍부한 사료를 통해 그 연속성이 증명되는 다른 문명권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는 이론이다. 다른 문명권에도 이른바 혁신이나 부흥이란 논법은 있었다. 그러나 유럽과 접촉하기 전에 사람들은 자신이 과거보다 우월한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 P208

여러 가지 증거가 보여주듯이, 앞으로 확장된 ‘긴‘ 18세기와 뒤로 확장된 ‘긴‘ 19세기 사이의 시간적 중첩기에 시대적 특징을 부여하고 이를 ‘안장형 시기‘란 이름을 붙여 개념화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안장형 시기‘ (Sattelzeit, 鞍裝形 時期)는시대구분과는 관련이 많지 않은 맥락에서 독일의 역사학자 코젤렉(Reinhard Kosellek)이 제시한 개념이다.41)이 시기는 대략 1750년에서 1850년 사이(때로는1770-1830년)를가리키는데, 이 시기 이후에 중간기로 진입한다. 오늘날 되돌아보면 이 중간기에 응축되어 나타난 여러 가지의 문화현상은 최소한 유럽의 범주에서 보자면 전형적인 19세기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이 물결‘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그래서) 우리는 이 10년 동안을 한 역사시기의 특수한 분파라고 하지 않을 수없다. 우리는 당시에 통용되던 한 개념을 빌려서 이 시기를 세기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세기의 분기점이 아니라 세기의 유일무이한 마지막이었다. - P221

모든 것을 종합할 때 ‘진정한 19세기 또는 ‘빅토리아시대의 19세기를 ‘몸통시기‘ (Rumpfperiode) — 독일사를 논할 때 쓰는 표현인데,
"1830년대와 1890년대 사이의 상대적으로 짧고 역동적인 과도기" 이다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 P230

모든 역사 발전과정은 상이한 시간의 틀 안에서 발생하므로 간단하게 단기·중기 · 장기로 구분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의궤적이 연속적인지 비연속적인지, 가역적인지 불가역적인지, 가속적인지 감속적인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과정은 반복적으로 나 - P238

타나고(코젤렉이 말한 ‘중복적 구조‘)76) 어떤 과정은 독특한 가변성보인다.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변화의과정을 근거로 하여) 역사학자들이 나누어 놓은 학과 사이에 인과관계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예컨대, 환경요인이 사회구조에 미치는향, 환경요인이 경제행위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 등이 그런 것이다.7)만약 변화의 과정들이 병렬로 일어난다면 그들 사이의 관계는 흔히
‘비동시적‘이다. 우리는 통일된 자연의 시간질서 속에서 시간질서이외의 시대구분 방식을 기준으로 하여 역사 발전과정의 위치와 의미를 판정하려 한다.78) 미세한 시간구조를 밝혀내야 하는 과제에 비한다면 역사를 세기‘로 나누는 일은 필요악에 불과하다. - P239

역사는 선형적 누진적 궤적을 따라가는 발전이 아니라 끊임없이 - P241

반복되는 ‘원주형(圓周形) 운동이란 사상을 전근대적 사고방식의표현이라 매도할 수는 없다. 또한 전혀 가치 없는 분석도 아니다. 기제사학자들이 연구한 다양한 시간 폭을 가진 생산과 경기순환 모델은 19세기 경제학의 중요한 성과이다. 제국주의의 지배와 패권의긴 물결(long waves) 이론‘은 세계의 군사력 대비에 관한 연구에서계몽적 방식이었다.80) 역사운동의 선형 모델과 주기형 모델은 둘 다서방에 알려져 있었지만 18세기 이후 서방은 점차 미래개방적 역사발전관을 받아들였다( ‘진보‘ 도중에 정체하거나 우연한 후퇴가 나타나기는 하지만).81)유럽에서 시작된 진보사관은 그 후 점차 다른 문명에서도 받아들여졌다. 어떤 문명(예컨대 이슬람문명)에서는 이 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비연속적 선형 역사관 — 역사를 연속적발전과정이 아니라 수많은 단절된 순간의 연속적 배열로 본다을버리지 않았다. 82) 현대 역사과학 영역에서 이처럼 본토화 된 역사관과 시간관을 받아들이는 것이 역사적 실체를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되는지 최소한 고려해볼 가치는 있다. - P242

우리가 특별히 주의를기울여야 할 문제는, 사회적 시간을 한 시대의 주기로 보았을 때 사회의 집단인식과 부합하는지, 어떤 조건 아래서 그렇게 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복잡한 외피를 뚫고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일은 역사주의 인류학과 사회학의 중대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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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전문화는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다. 그 결과 역사는 크게 보아 사회과학의 범주 안에 자리 잡았다. 시간의 깊이와 공간의 광대함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회학자와 정치 이론가들이 역사 연구의 주류를 떠맡았다. 역사가들에게는 훈련을 통해 습득한 직업적 특성 때문에 거친 일반화나, 단선적인 인과론적 설명이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멋진 공식을 달갑게 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의 영향을 받아 일부에서는 ‘거대서사’ 또는 장기 과정에 대한 해석은 가능하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사 서술은 전문분야의 상세한 연구를 대중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설명하는 권위와 능력을 전문가들로부터 회수해 오려는 시도이다. - P29

19세기는 더 이상 주관적 추억의 대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서술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 되었다. 19세기 이전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명의 표현방식의 역사에서 19세기는 이미 18세기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자리를 차지했다. 그 표현방식과 메커니즘은 대부분의 19세기 자신이 발명한 것들로부터 나왔다. 우리에게 19세기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자료들을 제공해주는 박물과, 국가기록보관소, 국가도서관, 촬영기술, 사획통계학, 영화 등은 19세기의 발명품이다. 19세기는 기억이 체계화된 시대이고 기억이 자기관찰로 승화된 시대이다. - P72

19세기는 과거의 역사와 모순으로 가득 찬 관계를 형성했다. 그런 관계는 오늘날의 인류의 입장에서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미래에 대한 낙관의 개방성, 혁신에 대한 호감, 기술적 도덕적 진보에 대한 믿음이 19세기만큼 높았던 때는 없었다. 19세기는 동시에 역사주의가 성행한 시대였다. 역사주의의 조류가 모방과 재현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수장과 보존을 중시한 시대였다. 19세기는 박물관과 기록보관소의 시대이자 고고학과 고증학의 시대였다. 100년 동안에 인류의 초기 역사에 관한 기록된 지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그 속도도 과거의 어떤 세기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빨랐다. 엄격하게 말하면 위에서 서술한 특징은 서방에만 해당된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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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적) 문화는 가장의 제국을 추종하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동족 결혼을 잘못 알고 있다. 순조로운 남자들간의 관계 진행에 의한 처방 이외의 성, 서로 다른 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P251

상품들은 그들의 ‘감시자들’의 시선하에서만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판매자들-구매자들-소비자들인 주체들의 통제 없이 상품들이 혼자서 ‘시장’으로 가고, 상품들이 자기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며,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욕망을 품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가 상인들의 이해 관계 속에서 적대적이 된다는 것도. - P256

포르노 영화의 장면에서 이 여성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택의 입장, 즉 여자 주인공의 위치에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육체와 쾌락은 누구에게 보여지는가? 여성은 남자들 사이에서 전개되는 장면에 속하기보다는 전경에 더 많이 속한다. - P262

오르가슴은 남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쾌락의 테크닉이 중요하다는 것, 남성은 쾌락을 창출하는 수단에 있어서 틀림없는 대가라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발기와 사정의 강박 관념, 남성 성기의 과대 평가된 중요성, 행위들의 정형화된 비참함, 구멍내야 할 표면으로 축소되는 육체, 폭력, 강간 등은 우발적으로 쾌락—여자들이 타고난—에 굴복하도록 만든다. 여자들이 이 쾌락에 침묵하고 유일하게 무지하다는 것, 누가 이 사실에 놀랄 것인가? 남자들만의 생산 방식에 굴복하는 여성의 ‘본성’은 이 방식을 통해, 여자들이 그 방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굴복한다는 조건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즐긴다. 여자들이 누리는 쾌락에 힘입어 이 방탕한 사내가 그녀들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에게 이것은 최고의 기쁨이다. - P263

육체에 대한 쾌락은 항상 울타리의 불법 침입으로—피를 흘리더라도— 일어나게 된다. 혹은 소유권에 대한 침입인가? 이 침입은 누구에 의해, 누구를 위해 이루어지는가? 이른바 반사유 재산권에 대한 이 범죄가 어떤 남자(들)에게 관련되는가? 가장 흔하게 이 범죄가 여자들 전체를 대상으로 자행되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이 방탕한 남자는 아주 흔히, 그리고 당연하게 돈과 언어 테크닉을 갖춘다. 부와 생산 도구들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걸맞게 그가 여자들과 아이들, 가장 불쌍한 이들을 유혹하고 자신의 쾌락에 이들을 구속시키는가? 사실 포르노 영화의 장면—암묵적으로, 혹은 명백하게 공화당 권력에 의해 부추겨지는—은 칸막이로 잘 가려진, 거리낌 없는 ‘사정’과 ‘오염’의 장소로 작용한다. 인체의 움직임은 거기에서 자기 욕망이, 일어날 수 있는 과도한 성욕이 주기적으로 완전하게 해소된다고 생각한다. - P265

포르노 영화, 그것은 연속성의 힘이다. 한 번 더 늘어나는 ‘여자 희생자,’ 늘어나는 구타, 늘어나는 죽음….. - P266

여자들이여, 더 이상 노력하지 말아라. 사람들은 당신들에게 당신들이 한 남자 혹은 모든 남자들의 사적 혹은 공적 소유물이었음을 가르쳐 왔다. 한 가정, 한 부족, 우연하게도 한 공화국의 소유물이었음을 말이다. 당신들의 즐거움이 그런 것이었음을 가르쳐 왔다. 당신들에게 이 쾌락은 항상 고통과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것이 당신들의 본질이라는 것을 가르쳐 왔다. 남성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당신의 불행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 P267

그러나 당신들의 본질은 신기하게도 항상 오직 남자들에 의해서만, 즉 사회과학 분야나 종교 분야, 성적인 영역에서 당신들의 영원한 스승들에 의해서만 규정되었다. 만일 그들의 법, 규칙, 관습들이 명령하는 것과는 다른 것에서 생긴 매력에 당신들이 끌린다면 당신들의 ‘본질’이 그때 작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그 핑계를 다시 찾지도 말아라.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 당신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하라. ‘이유’도, ‘중요한 원인’도, ‘변명’도 늘어놓지 말아라. 당신들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들의 충동을 신성한 명령의 범주로 고양시킬 필요는 없다. 이 충동들은 스스로 변화하여 이러저러한 타자의 충동들에 일치될 수 있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당장 말이다. 반복에 굴복하지 말아라. 당신들의 꿈과 욕망을 획일적이고 결정적인 모습으로 고정시키지 말아라. 당신들에게는 탐색해야 할 많은 공간들이 있기 때문에, 당신들에게 경계선을 긋는 것은 당신들의 ‘본질’ 자체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될 터이다. - P268

그들의 언어 활동에서 나가라. 그들이 너에게 부여한 이름들을 다시 가로질러라. 나는 너를, 나를 기다린다. 되돌아가라.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너는 여기에 남아 이미 꾸며진 장면들에, 이미 들리는 수정된 문장들에, 이미 알려진 행동들에 몰두하지 않는다. 너는 너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힘쓴다. 나 자신에게. 규범이나 습관에 스스로를 방치하지 않으면서. - P272

우리는 환영들, 이미지들, 거울들 이편에서 둘로 살아간다. 우리 사이에서 한쪽이 ‘진짜’가 아니면 나머지는 그 복제품도 아니고, 한쪽이 원본이 아니면 다른 쪽은 그 그림자가 아니다. 그들의 체계에서 그토록 완벽한 모방꾼이 될 수 있는 우리는 모방하지 않고 서로 관계를 맺는다. 우리의 닮음은 위장 없이도 가능하다. 너를 만지고, 나를 만져라. 너는 ‘보게 될’ 것이다. ‘모방하기’ 위해 우리가 거울의 두번째 모습을 만들 필요는 없다. 재현 이전에 우리는 둘이다. 너의 피가 너로 하여금 만들게 한 나의 육체가 너에게 상기시키는, 살아 있는 이 둘이 서로 다가가도록 내버려둬라.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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