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이상은 안정된 농경사회였다. 이는 도가적인 이상에 바탕을 둔것으로 덕을 갖춘 소수의 연장자가 감독하는 자급자족적인 촌락들로 - P39

이루어지는 사회다. 국가는 최소한의 세금을 받아 기본적인 역할만 했다. 농민들은 촌락에 묶여 있고 공장(工匠)들은 국가에 소속되어 일했고, 상인들은 부족한 필수품만을 거래해야 했으며 군인들은 변경에서국가를 방어했다. 행정은 아주 소수의 교육받은 계급에 맡겨졌고 이들은 스스로를 엄격하게 성찰하는 도덕군자들이었다.
홍무제의 목표는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백성은 일단한 곳에 정착하면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만 이동이 가능했다.
또한 왕조의 핵심법률을 모아 편찬한 『대명률』(大明律)에서는 신체적 이동뿐 아니라 사회적 이동도 제한하고 있다. 공장(工匠)의 아들은 공장이 되어야 했고, 군인의 아들은 군인이 되어야 했다. 직업을 바꾼 자에 대한 벌은 물리적 장벽을 넘어선 자에 대한 벌만큼이나 가혹했다. - P40

항구적인 정착 농촌이라는 목가적인 그림이 고대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재생산된 이유는 이 그림이 통치자들이 갈망하는 영구적인 정치적 안정을 만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명대 초기에조차 그것은 그저 그림일 뿐이었다. 마을의 실제 생활은 달랐다. 여인들이 들로 나가 일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은 정부가 닦아놓은 길을통해 필요한 물자를 교환했다. 명조가 수송체계를 재건하자, 교역은그 수송체계에 의지하여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더욱 빨라지고 편리해졌으며 상업은 더욱 활발해졌다. 1425년경에는 상당수의 생산자들이잉여를 지역시장에서 거래했고 일부 일용품은 원격지로 이동하기도했다. - P96

쑤저우는 홍무제의 경쟁자였던 장스청(張士誠)의 본거지이자 몽골지배하의 신사-지주세력의 중심지였다. 홍무제는 재위 초기에 무거운 세금 부과와 사민(徙民)정책을 통해 쑤저우를 굴복시키는 한편 난징에는 수도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투자를 집중하여 쑤저우의쇠퇴를 앞당기려 했다. 이 정책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쑤저우는 상업경제가 크게 성장하여 황제가 부과한 세금을 무리 없이 소화해낼 수있었다. 오히려 세금 부담이 상업화를 촉진시키기도 했다. 사람들이돈을 벌 수 있는 혁신적인 전략에 골몰했던 것이다. - P106

끊임없는 세수 확대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명조는 몇 가지 과세를은납으로 대체했다. 그 일부가 베이징으로 보내졌고 그 비율은 점점커졌다. 은납의 시작은 금화은이 부과된 1436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앞장에서 남부지방 일곱 개 성의 조량 일부가 은납으로 대체되었다고언급한 바 있다. 명 중기의 요역 개혁도 다른 대체제도를 필요로 했다.
‘지방별 조달‘(坐辦)이 ‘연례 징수‘(歲辦)로 대체되었다. 이는 수도에물품을 제공하는 지현은 그 비용을 자체 예산으로 부담하고, 그렇지않으면 은을 중앙정부에 보내는 것이었다. 지방의 역전(驛傳)에서 필요로 하는 의무적인 복무는 점차 사라지고 대신 ‘역은‘(驛銀)을 납부하 - P124

는 일이 많아졌다. 1490년에 시작된 이런 현상은 1507년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런 개혁과 그 밖의 개혁들이 국가 세수를 점차 현금위주로 바꿔나갔다. 16세기 말에는 실제로 이갑제를 통해 징발되던 모든 요역이 일조편법에 따라 토지에 대한 부가세로 과세되어 납으로대체되었다. - P125

명의 국가이념으로 인해 이 시기의 중국에서는 상업적인 해상여행을권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의 법률은 당국의 허가를 받기만 하면 해상무역을 용인했다. 말, 무기, 철제품, 동전, 비단 같은 전략상품 이외의 중국상품은 해외로 나갈 수 있었다. (사법관원들은 『대명률』 - P162

에 열거된 전략상품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전략상품이 아닌 상품에 대해서도교역을 금지시킬 수 있었다. 한 예로 1524년에 한 관원은 중국의 조선공이외국인에게 무역선을 만들어주는 일을 허가하는 것에 반대하는 상주문을 올렸다. "법에 따르면 이는 금지된 무기를 국외로 반출하다 적발된 것과 한가지입니다."
‘즉 해군에서 사용할 경우 배가 무기로 간주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외국상품의 수입도 가능했지만, 단 지정된 항구를 통해서 들어와야 하고 수입관세를 물어야 했다. 『대명률』은 돛대가 둘인 배에 이런제한을 가하고 있는데 그보다 작은 배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것은해상무역을 하는 대상(大商)들이 축적할 수 있는 부를 제한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허가되지 않은 외국상품을 사들이거나 보관한 사람들은 국내의 상세를 회피한 경우보다 더 과중한 벌금형을 받았다. 『대명률』의 한 항목에 대한 주석에 따르면, 이렇게 벌금에 차이를 둔 것은원래는 국가가 고수익 거래에 대해 정당한 세금을 징수하겠다는 뜻이었지만,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대외무역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고 한다. - P163

1513년 포르투갈인들은 라파엘 페레스트렐로가 지휘하는 한 척의선박을 타고 말라카를 떠나 중국 남부에 처음 당도했다. 두 번째 대규모 원정은 1517년 광저우(廣州)에서 무역을 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포르투갈 왕이 통상관계를 맺기 위해 중국황제에게 파견한 사절단이 동행했다. 이외교적 접근은 실패했고, 임무를 맡은 포르투갈인들은 고초를 겪다가 결국 옥사했다. 하지만 은밀한 거래는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었고 유럽의 배들이 중국연안에 더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중국과 포르투갈의 계절무역이 1549년에 이르러 정기적으로 이루어졌고 무역상들은 마카오 반도의 남서쪽 상촨(上川, 포르투갈인은상주앙이라 불렀음) 섬에서 접촉했다. 포르투갈인은 그곳에서 마카오로진출하여 1557년에 합법적인 조약항을 설치했다. 이 조약항은 아주작았지만, 유럽과 중국 사이의 무역이 장기간 이어지게 한 최초의 발판이 되었다. - P168

브로델은 유럽 자본주의 발전의 이해라는 커다란 지적 의문 안에서근세 유럽 상업의 성장모델을 정식화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시장경제의 확대에 따라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현명한 주장을 했다. 오히려자본주의는 시장경제의 최상부에 형성되는 사회적 신분질서 안에서형성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특정한 사회구조와 시장경제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유럽 자본주의의 진화는유럽 역사에서만 보이는 유일한 것이다. 사회구조가 다를 경우에는 경제의 발전과정 역시 다르게 이루어진다. 이 부분에서 근세 유럽과 명대 중국사에 대한 해석은 갈라져야 한다. 엘리트 형성의 맥락이 서로다르고 국가권력의 영향도 다르다. 명대 후기의 중국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물론 이 말이 중국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실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자본주의와 다른 어떤 경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경제는 국가의 통신망을 이용하여 지역간 경제를 연결시킨확대된 시장경제로서, 일부 지역에서는 농촌과 도시의 노동을 연속적인 생산과정으로 조직했다. 하지만 농촌가구가 그대로 기본 생산단위로 유지되었으며 생산과 소비의 완전한 분리는 일어나지 않은 채 소비패턴을 재편했다. 경제의 변화는 더뎠지만 확실하게 신사층 내부에 침투하여 상업에 대한 유교적 경멸을 불식시켰다. 이런 신사층의 변화는엘리트의 이익이 청대에도 온존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유럽적 의미에서의 자본주의는 아니다. - P263

명 후기에 은은 연간 수백만 냥씩 유입되었다. 이 정도의 은 유입은경제를 활성화시켰을 것이 틀림없다. 그 흐름이 붕괴된다는 것은 최소한 단기적 위기라고 할 만한 상황이었다. 1623년 네덜란드 무역상들이 웨 항을 봉쇄하고 중국정부에 무역을 허가해달라고 요구하며 폭력을 휘둘렀을 때, 장저우의 중국상인들은 그 위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300명의 장저우 상인들은 순무에게 "네덜란드인과 거래를 허락해달라"고 진정했다. 봉쇄에 가담했던 한 네덜란드 선장도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은 전쟁으로 상품을 잃었고 전쟁이 계속되면 모두 한순간에빈털터리가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순무에게 강화안에동의하고 우리와 거래하게 해달라는 긴급 청원을 올린 것이다." - P272

봄은 북부 사람들이 저장 해안의 푸퉈 섬으로 가는 도중에 항저우를 지나는때이기도 했다. 이 몇 달간 시 호의 절들은 참배객으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가깝게는 이웃 부에서 오기도 했지만 멀리 산둥 성에서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장난 지방에서 율(律)의 중심 사찰인 소경사(昭慶寺)는 골동품과 기념품을 파는 큰 장터로 변해버렸다. 불당의 안팎, 신도들이 다니는 길 위아래, 연못의 좌우, 산문(山門)의안쪽과 그 너머까지, 모든 공간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이용되었다.
[상인들은 방이 있으면 거기에 진열대를 세우고, 방이 없는 곳에는헛간을 짓고, 헛간 앞에는 또 천막을 세우고, 천막 뒤에는 더 많은 진 - P307

열대를 설치했다. 없는 게 없었다. 화장품, 머리장신구, 귀고리, 상아, 가위, 경전, 목탁, 아이들 장난감까지 모든 것을 살 수 있었다.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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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을 때, 나는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면 다른 귀신들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귀신이 되고 나서야 귀신은 가장 고독한 존재이며 공간과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이나 사건과도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시간의 분과 초 사이의 틈새로만 흘러 다니다가 나뭇가지 끝에 박쥐들과 함께 조용히 매달려 잠을 자고, 매미와 함께 흙속에서 편안하게 매복한다. 고정된 형상과 냄새, 온도, 색깔이 없기 때문에 탐색과 관측이 불가능하며, 무게도 질감도 없다. 사람들이 탁자 가득 제물을 차리면서 귀신들과 외로운 혼귀들을 먹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제물은 인간의 사욕일 뿐이다. 사람들은 안전함이 부족할수록 죽음을 더 두려워하게 되고, 귀신들에게 바치는 제물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제사상 위의 제물도 갈수록 풍성해진다. 사실 제물이 풍성할수록 귀신들은 더 고독하다.

‘발전’을 외치는 것은 원래 있던 전통적인 것들이 모두 좋지 않고 열등하며 도태되거나 개량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 말하고 싶다. 사람들을 찾아 다 말하고 싶다. 하지만 또 남들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마음속에 넣어 두고 있는 게 가짜인 것 같을 때가 있다. 입 밖에 내야 진짜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말하지 않는 거다. 침묵은 일종의 도피다. 마음속에 감춰 두고 있는 거지. 내가 죽으면 비밀도 따라 죽을 것이고.

인간의 기억은 선별되기도 하고 감춰지기도 했다.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웠던 성장의 한 구간을 지워 버리고 아름답고 좋았던 것은 남길 수 있었다.

난민들은 바다를 건넌다. 고향집이 포탄 공격에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집이 없어졌다. 나라가 망하거나 추방되어 의지할 데 없이 떠돌아다니게 되는 것, 더 이상 돌아갈 본향이 없는 것이 바로 ‘집이 없는’ 상태였다. 뿌리가 잘려 나가는 단절이자 영원한 이별이었다. 돌아갈 본향이 없어졌다. 집이 없다.

바람이 시작되는 곳은 어디일까? 멀고 먼 바다일까? 아주 먼 곳에 있는 산일까? 오늘 용징에 불어오는 바람은 발트해에서 출발한 바람이고 백악관의 방습 상자에서 출발한 바람이고 양타오 과수원의 나뭇가지에서 출발한 바람이었다. 바람은 한 겹 한 겹,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종종 윌리엄 포크너의 명구가 생각났다. "과거는 죽지 않았다. 과거는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았다."
누구나 아픈 기억과 상처가 있으면 이를 덮어 버리거나 묻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그림자 같고, 지나간 일들은 다시 반복된다. 과거가 있는 한 귀신은 존재한다. 인간 세계 곳곳에 귀신들이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귀신인지도 모른다.

기억은 믿을 수 있는 걸까? 과연 기억은 진실일까? 유년은 정말로 존재했던 것일까? 용징은 존재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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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에는 자신이 구상한 공동체의 건축학적 규준을 파사주에서 보았다. 파사주를 반동적인 방식으로 변형한 것, 이것이 푸리에 관점의특징이다. 즉 파사주들은 원래 상업의 목적에 기여하는 것인데, 푸리에는 이것을 거주지로 변형한다. 그의 공동체는 파사주들로 이루어진도시이다. 푸리에는 제정의 엄격한 형식세계에서 비더마이어의 다채로운 목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 P188

파노라마에서 자연을 모방하여 그릴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파노라마는 자연을 묘사하면서 그 변화의 모습들을 실제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하게 만들어내려고 함으로써 스스로 사진을 넘어 무성영화와 유성영화를 예시(示)하게 된다. - P190

회화는 우선 색의 요소들을 강조함으로써 사진에대응하기 시작한다. 인상파가 입체파에 자리를 내주면서 회화는 사진이 당분간 따라올 수 없는 영역을 개발하였다. 사진은 사진대로 고객이 전혀 이용할 수 없었거나 단지 그림으로만 이용할 수 있었던 형상, 풍경, 사건을 무제한으로 시장에 쏟아냄으로써 19세기 중엽부터 상품경제의 영역을 엄청나게 확대해나갔다. 판매를 확대하기 위해 사진은 촬영기술을 유행에 맞게 변형함으로써 대상 영역을 새롭게 개척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이후 사진의 역사를 결정짓게 된다. - P193

만국박람회는 상품들의 우주를 구축한다. 그랑빌의 상상들은 상품적 성격을 우주로 확산시킨다. 그의 상상들은 우주를 현대화한다.

유행은 상품이라는 물신이 경배받고자 하는 의식(儀式)을 규정해준다.
그랑빌은 유행이 일용품에 대해 갖는 요구를 거의 우주에까지 확대한다. 그는 유행을 극단에 이르기까지 추구함으로써 유행의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 P197

사적 개인에게 처음으로 거주 공간이 작업장과 대립된 위치에 서게 된다. 거주 공간은 실내(Interior)에서 형성된다. 사무실은 그 실내의 보충물이 된다. 사무실에서 현실의 일들을 처리하는 사적 개인은실내에서 자신의 환상들을 즐길 수 있기를 요구한다. - P199

신상품들을 파는 상점들에 발맞추어 신문들이 등장한다. 언론은 정신적 가치들의 시장을 조직하기 시작하고 이 시장은우선 호황을 누린다. 비타협주의자들은 예술을 시장에 내다 파는 데저항한다. 그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art pour l‘art)의 기치 아래 모여든다. 이 구호에서 종합예술작품(das Gesamtkunstwerk)이라는 구상이생겨난다. 종합예술작품은 기술의 발전에 맞서 예술을 밀폐시키고자한다. 종합예술작품을 기념하는 예식은 상품을 미화하는 기분 전환과짝을 이룬다. 둘 다 인간의 사회적 현존을 사상(象)해버린다. 보들레르는 바그너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 P206

푸리에는 공동체를 위해서 미덕을 믿는 대신 열정을 추진력으로삼는 사회의 효율적인 기능을 믿으려 한다. 열정을 동력장치로 삼아서, 즉 기계론적 열정과 비교(秘敎)적 열정의 정교한 조합을 통해 그는 시계의 메커니즘과 비슷한 집단심리학을 상상한다. 푸리에적 조화는 이러한 조합의 유희가 낳은 필수적인 산물이다. - P227

그랑빌의 판타지는 이러한 유행의 정신에 상응하는데 아폴리네르는 후에 유행의 이미지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제는 자연의 여러 영역에서나온 모든 물질이 여성 의복을 제작하는 데 도입될 수 있다. 나는 코르크 마개로 만들어진 매혹적인 드레스를 보았다. [……… 자기, 사암, 도기(陶器)가 갑자기 의상예술에 나타났다. (………) 사람들은 베니스의 유리로 구두를 만들고 바카라의 크리스털로 모자를 만들고 있다." - P233

거리산보자는 군중 속에서 은신처를 발견한다. 거리산보자에게 군중은 베일이 되는데 그에게 친숙한 도시가 그 베일을 통해 판타스마고리아로 변한다. 이 판타스마고리아 속에서 도시는 때로는 풍경이, 때로는 방이 된다. 나중에 백화점의 장식은 도시가 풍경 혹은 방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환상에서 영감을 얻게 되고 그렇게 해서 백화점은 거리산보자마저 상품 판매고를 높이는 데 기여하게 만든다. 아무튼 백화점은 거리 산보가 이루어지는 마지막 구역이다. - P238

보들레르에게서 알레고리적 형식의 핵심은 상품이 가격 때문에 갖게 되는 특수한 의미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17세기의 알레고리에서는 이른바 사물들에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사물들 그 자체의 가치는 하락하는데, 이러한 알레고리의 특징은 상품화된 사물에 가격이매겨짐으로써 일어나는 특이한 가치 하락에 상응한다. 상품으로 가격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인해 사물이 겪는 이러한 가치 하락은 보들레르에게서는 새로움의 측정 불가능한 가치에 의해 상쇄된다. 새로움은더는 어떠한 해석도, 또 어떠한 비교도 허용하지 않는 그러한 절대적인 것을 표상한다. 새로움은 예술의 궁극적인 참호가 되었다. - P241

오스망은 스스로 자신을 ‘파괴의 예술가라고 불렀다. 그는 그가 기획했던 일에 대해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회상록"에서 그점을 강조한다. 중앙 시장들은 오스망이 건설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데, 여기에 흥미로운 징후가 있다. 사람들은 파리 시의 발원지가 된 시테 섬>에 대해 오스망이 지나간 곳에는 오로지 교회 하나, - P243

병원 하나, 공공건물 하나, 서민 아파트 한 동만이 남는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위고와 메리메는 오스망에 의한 파리의 변형이 파리 시민들에게 얼마만큼 나폴레옹 폭정의 기념물로 보였는지를 암시한다. 파리시민들은 도시에서 더는 안락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도시의 비인간적 성격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막심 뒤 캉의 기념비적작품 파리가 탄생한 것은 이러한 의식에서였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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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2-20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읽어내셨군요...!!
 

가을에 蕭王이 銅馬를 鄭縣에서 공격할 때에 吳漢이 突하였다. 銅馬가騎를 거느리고 淸陽으로 와서 모이니, 군사와 말이 매우양식이 다하여 밤에 도망하자, 蕭王이 관도에서 추격해서 모두 격파하여 항복시키고 큰 우두머리를 봉하여 列侯로 삼았다. 諸將들도 믿지 못하고 항복한 자들도 스스로 안심하지 못하였는데, 蕭王이 그 뜻을 알고는 칙령을 내려 항복한 자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 무장하게 한 다음 직접 경무장한 기마를 타고서 部隊와陣營을 순행하니, 항복한 자들이 번갈아 서로말하기를 "이 眞心을 미루어 사람의 뱃속에 넣어 두니, 어찌 목숨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이로 말미암아 모두 복종하였다. 이에 항복한 사람을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어 배속시키니, 무리가 마침내 수십만이었다. 그러므로 關西지방에서는 劉秀를 이름하여 銅馬帝라 하였다. - ≪後漢書吳漢傳≫에 나옴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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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순전히 제의로만 이루어진, 교리도 없는 종교이다.
자본주의는 칼뱅주의에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정통 기독교 교파들에서도 입증되어야 할 테지만 서구에서 기독교에 기생하여, 종국에는 기독교의 역사가 그것의 기생충인 자본주의의 역사가 되는 형태로 발전해왔다. - P124

걱정들(Die Sorgen)은 자본주의 시대에 고유한 정신병이다. 빈곤,
떠돌이걸인-탁발승적 행각에서 정신적(물질적이 아닌) 탈출구 없음. 그처럼 탈출할 길이 없는 상태는 죄를 지우는 상태이다. ‘걱정들‘
은 이 탈출구 없음의 죄의식을 나타내는 지표다. ‘걱정들‘은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는 불안에서 생겨난다. - P125

"초현실주의는 그 본질적인 진실의 측면에서 대화를 재건한다는 사명을 갖고 나왔다. 파트너들은 예의범절의 강박에서 해방되었다. 말하는 자는 어떤 명제도 연역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답은 원칙상 말한 사람의자기애를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과 이미지들은 듣는 자의 정신에게는 디딤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P137

키치는 우리가 꿈속에서나 대화에서 사멸한 사물세계의 힘을 빨아들이기 위해 두르는 평범한 것의 마지막 마스크이다.
우리가 예술이라 불렀던 것은 신체에서 2미터 떨어진 곳에서 비로소 시작한다. 그런데 키치 속에서 사물세계는 사람의 몸에 닥쳐온다.
사물세계는 더듬는 그의 손에 몸을 맡기고 마침내 그 손아귀 내부에서 자신의 형상들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인간은 옛 형식들의 모든 정수를 자신 속에 지니고 있으며, 19세기 후반부에서 유래한 환경과의 갈등 속에서 ㅡ꿈들에서든 몇몇 예술가들의 문장과 이미지에서든ㅡ만들어지는 것은 "가구가 비치된 인간으로 부를 수 있을 어떤존재다. - P139

종교적 각성을 참되고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결코 환각제를 통해서가 아니다. 그 극복은 범속한 각성(profane Erleuchtung), 유물론적이고 인간학적인 영감 속에서 이루어진다. - P147

혁명을 위한 도취의 힘을 얻기, 이것이 초현실주의의 모든 책과시도가 추구하는 목표이다. 초현실주의는 그것을 자신의 가장 고유한 - P162

과제라고 불러도 좋다. 이 과제를 성취하려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모든 혁명적 행위 속의 어떤 도취적 요소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부족하다. 그 과제는 무정부주의적 과제와 동일하다. 그러나 강세를오로지 무정부주의적 과제에만 둔다는 것은 혁명을 방법과 기율 면에서 준비하는 일을 순전히 연습과 전야제 사이에서 휘청거리는 실천을위해 소홀히 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도취의 본질에 대한 너무 단순하고 비변증법적인 견해까지 추가된다.
오히려 우리는, 일상을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변증법적 시각의 힘으로, 그 비밀을 일상 속에서 재발견하는 정도로만 그것을 꿰뚫을 수있다. - P163

혁명의전제조건은 어디에 있는가? 신념의 변화에 있는가 아니면 외적 환경의 변화에 있는가? 이것은 정치와 도덕의 관계를 규정짓고 어떠한 얼버무림도 용납하지 않는 핵심적 물음이다. 초현실주의는 그 물음에대한 공산주의적 답변에 더욱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은 전 - P164

방위적인 염세주의를 뜻한다. 절대적으로 그렇다. 문학의 운명을 불신하고 자유의 운명을 불신하고, 유럽의 인류의 운명을 불신하며, 무엇보다 계급 간의, 민족 간의, 개인 간의 모든 소통을 불신, 불신, 불신하기이다. - P165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하면서 사람들 위에 전혀 새로운 빈곤이 덮쳤다. 그리고 점성술과 요가의 지혜,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손금 보는 점술, 채식주의와 그노시스, 스콜라 철학과 심령주의를 가지고 사람들 사이로 파고든, 아니 오히려 사람들 위로 덮친, 답답하게널린 갖가지 이념들이 이러한 빈곤의 이면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진정한 부활이 아니라 갈바니(Galvani) 전기 작용이기 때문이다.
여기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우리가 겪고 있는 경험의 빈곤은 거대한 빈곤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 그 거대한 빈곤은 다시 중세 걸인의 얼굴과 같은 날카롭고 정확한 윤곽을 띤 얼굴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 P173

자연과 기술, 원시성과 안락함은 여기서 완전히 하나가 된다. 또한 끝없는 일상의 분규에 지쳐버렸고 삶의 목적이 수단들에 대한 무한한 원근법적시각에서의 가장 먼 소실점으로만 떠오르는 사람들의 눈앞에는 어느방향에서나 가장 단순하면서 동시에 가장 안락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충족시키는 삶이 구원의 빛처럼 나타난다. 그런 삶 속에서 자동차는 밀짚모자보다 더 무겁지도 않고, 나무에 열린 열매는 어떤 기구의풍선처럼 빠르게 둥그렇게 익는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일단 거리를두고, 물러서려 한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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