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을 때, 나는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면 다른 귀신들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귀신이 되고 나서야 귀신은 가장 고독한 존재이며 공간과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이나 사건과도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시간의 분과 초 사이의 틈새로만 흘러 다니다가 나뭇가지 끝에 박쥐들과 함께 조용히 매달려 잠을 자고, 매미와 함께 흙속에서 편안하게 매복한다. 고정된 형상과 냄새, 온도, 색깔이 없기 때문에 탐색과 관측이 불가능하며, 무게도 질감도 없다. 사람들이 탁자 가득 제물을 차리면서 귀신들과 외로운 혼귀들을 먹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제물은 인간의 사욕일 뿐이다. 사람들은 안전함이 부족할수록 죽음을 더 두려워하게 되고, 귀신들에게 바치는 제물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제사상 위의 제물도 갈수록 풍성해진다. 사실 제물이 풍성할수록 귀신들은 더 고독하다.

‘발전’을 외치는 것은 원래 있던 전통적인 것들이 모두 좋지 않고 열등하며 도태되거나 개량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 말하고 싶다. 사람들을 찾아 다 말하고 싶다. 하지만 또 남들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마음속에 넣어 두고 있는 게 가짜인 것 같을 때가 있다. 입 밖에 내야 진짜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말하지 않는 거다. 침묵은 일종의 도피다. 마음속에 감춰 두고 있는 거지. 내가 죽으면 비밀도 따라 죽을 것이고.

인간의 기억은 선별되기도 하고 감춰지기도 했다.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웠던 성장의 한 구간을 지워 버리고 아름답고 좋았던 것은 남길 수 있었다.

난민들은 바다를 건넌다. 고향집이 포탄 공격에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집이 없어졌다. 나라가 망하거나 추방되어 의지할 데 없이 떠돌아다니게 되는 것, 더 이상 돌아갈 본향이 없는 것이 바로 ‘집이 없는’ 상태였다. 뿌리가 잘려 나가는 단절이자 영원한 이별이었다. 돌아갈 본향이 없어졌다. 집이 없다.

바람이 시작되는 곳은 어디일까? 멀고 먼 바다일까? 아주 먼 곳에 있는 산일까? 오늘 용징에 불어오는 바람은 발트해에서 출발한 바람이고 백악관의 방습 상자에서 출발한 바람이고 양타오 과수원의 나뭇가지에서 출발한 바람이었다. 바람은 한 겹 한 겹,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종종 윌리엄 포크너의 명구가 생각났다. "과거는 죽지 않았다. 과거는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았다."
누구나 아픈 기억과 상처가 있으면 이를 덮어 버리거나 묻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그림자 같고, 지나간 일들은 다시 반복된다. 과거가 있는 한 귀신은 존재한다. 인간 세계 곳곳에 귀신들이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귀신인지도 모른다.

기억은 믿을 수 있는 걸까? 과연 기억은 진실일까? 유년은 정말로 존재했던 것일까? 용징은 존재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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