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는 제군(諸軍) 가운데서 용사 수백 명을 선발하여 검무(劍舞)를 가르쳤는데 모두 공중에 칼을 던질 줄 알았고 그 몸을 솟구치며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이를 이어받게 하니 보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거란이 사자를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는데, 편전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면서 이어서 검사(劍士)들을 나오게 하여 이를 보여 주었다. 수백 명이 웃통을 벗고 북을 치며 시끄럽게 하면서 칼을 휘두르며 들어오면서 뛰고 던지는 것이 이어졌는데 그 미묘함이 다 표출되니 사자는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성을 순시하면서 반드시 검사들로 하여금 춤을 추면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는데, 각기 그 기량을 드러내자 성 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를 바라보면서 간담이 깨졌다.

갑신일(6일) 새벽에 유계원(劉繼元, ? ~992)이 그의 평장사(平章事)인 이운(李?) 등을 인솔하고 흰 옷에 사모(紗帽)를 쓰고 대(臺) 아래에서 죄받기를 기다렸는데, 조서를 내려서 그를 풀어주고 불러서 대(臺)에 오르게 하고 위문하였다. 유계원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신은 거가가 친히 왕림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몸을 묶어 명령에 귀의하려고 하였는데, 대개 망명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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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죽을까 두려워하며 신에게 겁을 주어 항복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황제는 망명한 사람들을 적어 오게 하여 모두 그들을 목 베었다. 회해국왕(淮海國王) 전숙(錢?)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경은 한 지역을 보존하여 나에게 귀부할 수 있었고,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깊이 아름답다 할 것이요."

유계원이 항복하자 사람들마다 상 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황제는 장차 끝내는 요(遼)를 치고 유·계(幽·?, 幽州와 ?州)를 빼앗고자 하였다.
제장들도 모두 가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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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전도우후(殿前都虞候)인 최한(崔翰, 928~992)만이 홀도 상주하여 말하였다.
"이 한 번의 일은 다시 거병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이번의 파죽지세(破竹之勢)를 타고서 이를 빼앗는 것이 아주 쉬우며 시기란 잃을 수 없는 것입니다."
황제는 기뻐하여 바로 추밀사(樞密使)인 조빈(曹彬)에게 명령하여 둔병(屯兵)을 움직여 발동하는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요(遼)의 남경권유수(南京權留守)인 한덕양(韓德讓, 941~1011)은 두려움이 심하였지만 지삼사사(知三司事)인 유홍(劉弘)과 더불어 성에 올라가서 밤낮으로 수어(守禦)하였으나 성 밖에서는 항복하라고 부르고 협박하는 것이 아주 급하자 사람들은 두 마음을 품었다. 마침 적리도(迪里都, 鐵林都)도지휘사인 이찰륵찬(李?勒燦, 盧存)이 나와서 항복하니 성 안에서는 더욱 두려워하였다.
요(遼)의 어잔랑군(御盞?君)인 야율학고(耶律學古)가 남경이 포위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이를 구하였는데, 포위한 군사가 바야흐로 엄하여 마침내 땅에 굴을 파고 나아가서 한덕양 등과 함께 기계를 가지런히 하고 불안한 것을 안정시키며 적당하게 대비하고 막으니 투지(鬪志)가 조금도 해이되지 아니하였다.

"경 등은 정찰하는 일을 엄히 하지 않았고, 군사를 사용하는 것이 법도가 없어서 적(敵)을 만나자 바로 패배 하였으니 어찌 장수라 하겠는가!"
특리곤(特里袞, ?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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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야율휴격(耶律休格, 休哥, ? ~998)은 일이 급한 것을 알고 스스로 가서 원조하게 해달라고 청하니 요주는 마침내 야율휴격으로 야율희달(耶律希達)을 대신하게 하고 오원(五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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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란히 출발하게 하였다.

계주(桂州)관찰사인 조한(曹翰)·조주(?州, 甘肅省 臨潭縣)관찰사인 미신(米信, 926~992)이 성의 동남쪽 귀퉁이에 주둔하였는데, 군사들이 땅을 굴착하다가 해(蟹, 게)를 얻자, 조한이 제장들에게 말하였다.
"게란 물에 사는 물건인데 육지에 살다니 그 사는 곳을 잃은 것이다. 또한 발이 많으니 적(敵)의 구원병이 곧 도착할 상(象, 상징)이다. 또 해(蟹)라는 것은 해(解, 해산)라고 풀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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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군사를 돌릴 것이다."

정월 초하루 병자일에 요(遼)에서는 황제의 아들인 야율융서(耶律隆緖, 972~1031)를 책봉하여 양왕(梁王)으로 하고 야율융경(耶律隆慶, 973~1016)을 항왕(恒王)으로 하였다. 야율융서는 어려서부터 서한(書翰)을 좋아하여 10세에는 시(詩)를 지을 수 있었으니 요주(遼主)는 위촉(委囑)하려는 뜻을 품었다.

겨울, 10월 초하루 신미일에 요주는 무사(巫師)에게 명령하여 천지(天地)와 병신(兵神)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신사일(11일)에 곧 남침(南侵)하려고 하여 기고(旗鼓)에 제사를 지냈다. 계미일(13일)에 요주가 남경(南京, 북경)에 다다랐다.

황제가 장차 북변을 순행하려고 하였다. 기축일(19일)에 조서를 내렸다.
"경사(京師)에서 웅주(雄州, 河北省 雄縣)에까지 백성들을 징발하여 도로를 닦고 장애물을 제거하라."

무신일(9일)에 남쪽의 군사들이 물의 남쪽에 진을 치고 싸우려 하자 요주는 야율휴격의 말에만 홀로 황색을 입히어 적이 알아보게 하였다가 재빨리 검은 갑옷에 흰말로 바꾸도록 명령하였다.
야율휴격이 드디어 정예의 기병을 인솔하고 물을 건너서 분발하여 치니 남쪽의 군대는 크게 패배하였고, 뒤쫓아서 막주(莫州)에 이르렀는데 가로 누운 시체가 들에 널려 있었고 산채로 몇 명의 장수를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요주는 어마(御馬, 황제의 말)와 금잔(金盞, 금으로 된 술잔)을 가지고 그를 위로하고 말하였다.
"경의 용감함은 명성을 뛰어넘는데, 만약에 사람들마다 경과 같다면 어찌 이기지 못할까 걱정하겠는가?"

요(遼)에서는 야율희곤(耶律喜袞)이 이미 갇혔는데, 병오일(10일)에 요의 상경한군(上京漢軍)이 반란을 일으켜서 겁탈하여 야율희곤을 세우려고 하였지만 조주(祖州, 內蒙古 巴林左旗 西南 石房子村)의 성이 견고하여 들어갈 수가 없자 그 아들인 야율유례수(耶律留禮壽)를 세웠다. 상경유수인 제실(除室)이 그들을 붙잡으니 야율유례수는 돌아오자 바로 복주(伏誅)되었다. 한 해가 넘어서야 비로소 야율희곤에게 죽음을 내렸다.

가을 7월 병오일(11일)에 황제는 장차 크게 거병하여 요(遼)를 치려고 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발해왕(渤海王)에게 조서를 하사하고 군사를 발동하여 호응하게 하면서 요(遼)를 멸망시키는 날 유·계(幽·?)의 영역은 다시 중조(中朝)로 귀납하겠지만 삭막(朔漠, 북방 사막지대) 밖의 것은 모두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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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무원년(을유 25)

돌아와 中山郡에 이르니 여러 장수들이 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따르지 않았고, 행군하여 南平棘에 이르러서 여러 장수들이 굳이 청하였으나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耿純이 나아가 아뢰기를 "천하의 士大夫(勇士와 大夫)들이 친척을 버리고 土壤(고향)을 떠나 화살과 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大王을 따르는 것은 그 계책(목적)이 진실로 용의 비늘을 붙잡고 봉황의날개에 붙어서 그 뜻을 이루기를 바라서인데, 지금 大王께서 시일을 지체하고 무리들의 마음을 거슬려 황제의 칭호와 지위를 바로잡지 않으시니, 저는천하의 들이 희망이 끊어지고 계책이 궁해지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생각을 두어 오랫동안 스스로 괴로워하지 않을까 두려우니, 큰 무리가 한 번흩어지면 다시 모으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왕이 깊이 감동하여 말하기를
"내 장차 생각하겠다." 하였다.
행군하여 물에 이르러서 馮異를 불러 사방의 동정을 묻자, 馮異가 대답하기를 "更始(劉玄)는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宗廟社稷의 우려가 대왕에게있으니, 마땅히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後漢書≫〈耿純傳〉과 〈馮異傳〉에 나옴
이때 마침 儒生 張華가 關中에서 赤伏符를 받들고 왕에게 찾아오니, 여기에이르기를 "劉秀가 군대를 내어 無道한 자를 토벌하니, 사방 오랑캐들이 구름처럼 모여 龍이 들에서 싸우는데 四七의 즈음에 화가 주인이 된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이로 인하여 다시 주청하자, 6월에 왕이 물의 남쪽에서 황제의지위에 오르고 연호를 바꾸고 大赦하였다. - ≪後漢書 光武帝에 나옴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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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이 얼마나 철저하게 가부장주의와 주종관계를 임금관계로 대체했든, 몇몇 개인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어계층의 사닥다리 위로 올라섰든, 성공한 자들이 자신의 발 밑에서 해체되는 기준과 구별에 대해 얼마나 깊이 고민을 했든, 명초의 중국사회를 묶어놓은 가부장주의와 주종관계에 기초한 계급체계는 그 마지막까지도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들은 상업에 의해 많이 변용되었다. 상인들은 엘리트층으로 가는 길을 찾아냈고, 신사층은 수입을늘리기 위해 상업에 의존했다. 하지만 토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교통·통신과 상업이 명조 사회 내에 유도한 그 모든 유동성에도 불구하고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구조적 경계는 약해지지 않았다. 각 개인은1644년의 위기를 고통스럽게 지나갔지만 사회제도는 의연히 살아남았다. 실은 더 강해졌을 것이다. 가을의 족장들은 겨울의 족장들이 형성되었던 환경과는 전혀 다른 조건하에서 백성을 다스렸으나, 그들의지배에는 변함이 없었고 다음 왕조에 들어서도 그들의 지배는 계속될것이었다.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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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이상은 안정된 농경사회였다. 이는 도가적인 이상에 바탕을 둔것으로 덕을 갖춘 소수의 연장자가 감독하는 자급자족적인 촌락들로 - P39

이루어지는 사회다. 국가는 최소한의 세금을 받아 기본적인 역할만 했다. 농민들은 촌락에 묶여 있고 공장(工匠)들은 국가에 소속되어 일했고, 상인들은 부족한 필수품만을 거래해야 했으며 군인들은 변경에서국가를 방어했다. 행정은 아주 소수의 교육받은 계급에 맡겨졌고 이들은 스스로를 엄격하게 성찰하는 도덕군자들이었다.
홍무제의 목표는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백성은 일단한 곳에 정착하면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만 이동이 가능했다.
또한 왕조의 핵심법률을 모아 편찬한 『대명률』(大明律)에서는 신체적 이동뿐 아니라 사회적 이동도 제한하고 있다. 공장(工匠)의 아들은 공장이 되어야 했고, 군인의 아들은 군인이 되어야 했다. 직업을 바꾼 자에 대한 벌은 물리적 장벽을 넘어선 자에 대한 벌만큼이나 가혹했다. - P40

항구적인 정착 농촌이라는 목가적인 그림이 고대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재생산된 이유는 이 그림이 통치자들이 갈망하는 영구적인 정치적 안정을 만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명대 초기에조차 그것은 그저 그림일 뿐이었다. 마을의 실제 생활은 달랐다. 여인들이 들로 나가 일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은 정부가 닦아놓은 길을통해 필요한 물자를 교환했다. 명조가 수송체계를 재건하자, 교역은그 수송체계에 의지하여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더욱 빨라지고 편리해졌으며 상업은 더욱 활발해졌다. 1425년경에는 상당수의 생산자들이잉여를 지역시장에서 거래했고 일부 일용품은 원격지로 이동하기도했다. - P96

쑤저우는 홍무제의 경쟁자였던 장스청(張士誠)의 본거지이자 몽골지배하의 신사-지주세력의 중심지였다. 홍무제는 재위 초기에 무거운 세금 부과와 사민(徙民)정책을 통해 쑤저우를 굴복시키는 한편 난징에는 수도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투자를 집중하여 쑤저우의쇠퇴를 앞당기려 했다. 이 정책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쑤저우는 상업경제가 크게 성장하여 황제가 부과한 세금을 무리 없이 소화해낼 수있었다. 오히려 세금 부담이 상업화를 촉진시키기도 했다. 사람들이돈을 벌 수 있는 혁신적인 전략에 골몰했던 것이다. - P106

끊임없는 세수 확대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명조는 몇 가지 과세를은납으로 대체했다. 그 일부가 베이징으로 보내졌고 그 비율은 점점커졌다. 은납의 시작은 금화은이 부과된 1436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앞장에서 남부지방 일곱 개 성의 조량 일부가 은납으로 대체되었다고언급한 바 있다. 명 중기의 요역 개혁도 다른 대체제도를 필요로 했다.
‘지방별 조달‘(坐辦)이 ‘연례 징수‘(歲辦)로 대체되었다. 이는 수도에물품을 제공하는 지현은 그 비용을 자체 예산으로 부담하고, 그렇지않으면 은을 중앙정부에 보내는 것이었다. 지방의 역전(驛傳)에서 필요로 하는 의무적인 복무는 점차 사라지고 대신 ‘역은‘(驛銀)을 납부하 - P124

는 일이 많아졌다. 1490년에 시작된 이런 현상은 1507년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런 개혁과 그 밖의 개혁들이 국가 세수를 점차 현금위주로 바꿔나갔다. 16세기 말에는 실제로 이갑제를 통해 징발되던 모든 요역이 일조편법에 따라 토지에 대한 부가세로 과세되어 납으로대체되었다. - P125

명의 국가이념으로 인해 이 시기의 중국에서는 상업적인 해상여행을권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의 법률은 당국의 허가를 받기만 하면 해상무역을 용인했다. 말, 무기, 철제품, 동전, 비단 같은 전략상품 이외의 중국상품은 해외로 나갈 수 있었다. (사법관원들은 『대명률』 - P162

에 열거된 전략상품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전략상품이 아닌 상품에 대해서도교역을 금지시킬 수 있었다. 한 예로 1524년에 한 관원은 중국의 조선공이외국인에게 무역선을 만들어주는 일을 허가하는 것에 반대하는 상주문을 올렸다. "법에 따르면 이는 금지된 무기를 국외로 반출하다 적발된 것과 한가지입니다."
‘즉 해군에서 사용할 경우 배가 무기로 간주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외국상품의 수입도 가능했지만, 단 지정된 항구를 통해서 들어와야 하고 수입관세를 물어야 했다. 『대명률』은 돛대가 둘인 배에 이런제한을 가하고 있는데 그보다 작은 배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것은해상무역을 하는 대상(大商)들이 축적할 수 있는 부를 제한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허가되지 않은 외국상품을 사들이거나 보관한 사람들은 국내의 상세를 회피한 경우보다 더 과중한 벌금형을 받았다. 『대명률』의 한 항목에 대한 주석에 따르면, 이렇게 벌금에 차이를 둔 것은원래는 국가가 고수익 거래에 대해 정당한 세금을 징수하겠다는 뜻이었지만,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대외무역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고 한다. - P163

1513년 포르투갈인들은 라파엘 페레스트렐로가 지휘하는 한 척의선박을 타고 말라카를 떠나 중국 남부에 처음 당도했다. 두 번째 대규모 원정은 1517년 광저우(廣州)에서 무역을 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포르투갈 왕이 통상관계를 맺기 위해 중국황제에게 파견한 사절단이 동행했다. 이외교적 접근은 실패했고, 임무를 맡은 포르투갈인들은 고초를 겪다가 결국 옥사했다. 하지만 은밀한 거래는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었고 유럽의 배들이 중국연안에 더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중국과 포르투갈의 계절무역이 1549년에 이르러 정기적으로 이루어졌고 무역상들은 마카오 반도의 남서쪽 상촨(上川, 포르투갈인은상주앙이라 불렀음) 섬에서 접촉했다. 포르투갈인은 그곳에서 마카오로진출하여 1557년에 합법적인 조약항을 설치했다. 이 조약항은 아주작았지만, 유럽과 중국 사이의 무역이 장기간 이어지게 한 최초의 발판이 되었다. - P168

브로델은 유럽 자본주의 발전의 이해라는 커다란 지적 의문 안에서근세 유럽 상업의 성장모델을 정식화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시장경제의 확대에 따라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현명한 주장을 했다. 오히려자본주의는 시장경제의 최상부에 형성되는 사회적 신분질서 안에서형성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특정한 사회구조와 시장경제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유럽 자본주의의 진화는유럽 역사에서만 보이는 유일한 것이다. 사회구조가 다를 경우에는 경제의 발전과정 역시 다르게 이루어진다. 이 부분에서 근세 유럽과 명대 중국사에 대한 해석은 갈라져야 한다. 엘리트 형성의 맥락이 서로다르고 국가권력의 영향도 다르다. 명대 후기의 중국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물론 이 말이 중국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실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자본주의와 다른 어떤 경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경제는 국가의 통신망을 이용하여 지역간 경제를 연결시킨확대된 시장경제로서, 일부 지역에서는 농촌과 도시의 노동을 연속적인 생산과정으로 조직했다. 하지만 농촌가구가 그대로 기본 생산단위로 유지되었으며 생산과 소비의 완전한 분리는 일어나지 않은 채 소비패턴을 재편했다. 경제의 변화는 더뎠지만 확실하게 신사층 내부에 침투하여 상업에 대한 유교적 경멸을 불식시켰다. 이런 신사층의 변화는엘리트의 이익이 청대에도 온존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유럽적 의미에서의 자본주의는 아니다. - P263

명 후기에 은은 연간 수백만 냥씩 유입되었다. 이 정도의 은 유입은경제를 활성화시켰을 것이 틀림없다. 그 흐름이 붕괴된다는 것은 최소한 단기적 위기라고 할 만한 상황이었다. 1623년 네덜란드 무역상들이 웨 항을 봉쇄하고 중국정부에 무역을 허가해달라고 요구하며 폭력을 휘둘렀을 때, 장저우의 중국상인들은 그 위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300명의 장저우 상인들은 순무에게 "네덜란드인과 거래를 허락해달라"고 진정했다. 봉쇄에 가담했던 한 네덜란드 선장도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은 전쟁으로 상품을 잃었고 전쟁이 계속되면 모두 한순간에빈털터리가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순무에게 강화안에동의하고 우리와 거래하게 해달라는 긴급 청원을 올린 것이다." - P272

봄은 북부 사람들이 저장 해안의 푸퉈 섬으로 가는 도중에 항저우를 지나는때이기도 했다. 이 몇 달간 시 호의 절들은 참배객으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가깝게는 이웃 부에서 오기도 했지만 멀리 산둥 성에서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장난 지방에서 율(律)의 중심 사찰인 소경사(昭慶寺)는 골동품과 기념품을 파는 큰 장터로 변해버렸다. 불당의 안팎, 신도들이 다니는 길 위아래, 연못의 좌우, 산문(山門)의안쪽과 그 너머까지, 모든 공간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이용되었다.
[상인들은 방이 있으면 거기에 진열대를 세우고, 방이 없는 곳에는헛간을 짓고, 헛간 앞에는 또 천막을 세우고, 천막 뒤에는 더 많은 진 - P307

열대를 설치했다. 없는 게 없었다. 화장품, 머리장신구, 귀고리, 상아, 가위, 경전, 목탁, 아이들 장난감까지 모든 것을 살 수 있었다.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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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을 때, 나는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면 다른 귀신들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귀신이 되고 나서야 귀신은 가장 고독한 존재이며 공간과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이나 사건과도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시간의 분과 초 사이의 틈새로만 흘러 다니다가 나뭇가지 끝에 박쥐들과 함께 조용히 매달려 잠을 자고, 매미와 함께 흙속에서 편안하게 매복한다. 고정된 형상과 냄새, 온도, 색깔이 없기 때문에 탐색과 관측이 불가능하며, 무게도 질감도 없다. 사람들이 탁자 가득 제물을 차리면서 귀신들과 외로운 혼귀들을 먹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제물은 인간의 사욕일 뿐이다. 사람들은 안전함이 부족할수록 죽음을 더 두려워하게 되고, 귀신들에게 바치는 제물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제사상 위의 제물도 갈수록 풍성해진다. 사실 제물이 풍성할수록 귀신들은 더 고독하다.

‘발전’을 외치는 것은 원래 있던 전통적인 것들이 모두 좋지 않고 열등하며 도태되거나 개량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 말하고 싶다. 사람들을 찾아 다 말하고 싶다. 하지만 또 남들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마음속에 넣어 두고 있는 게 가짜인 것 같을 때가 있다. 입 밖에 내야 진짜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말하지 않는 거다. 침묵은 일종의 도피다. 마음속에 감춰 두고 있는 거지. 내가 죽으면 비밀도 따라 죽을 것이고.

인간의 기억은 선별되기도 하고 감춰지기도 했다.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웠던 성장의 한 구간을 지워 버리고 아름답고 좋았던 것은 남길 수 있었다.

난민들은 바다를 건넌다. 고향집이 포탄 공격에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집이 없어졌다. 나라가 망하거나 추방되어 의지할 데 없이 떠돌아다니게 되는 것, 더 이상 돌아갈 본향이 없는 것이 바로 ‘집이 없는’ 상태였다. 뿌리가 잘려 나가는 단절이자 영원한 이별이었다. 돌아갈 본향이 없어졌다. 집이 없다.

바람이 시작되는 곳은 어디일까? 멀고 먼 바다일까? 아주 먼 곳에 있는 산일까? 오늘 용징에 불어오는 바람은 발트해에서 출발한 바람이고 백악관의 방습 상자에서 출발한 바람이고 양타오 과수원의 나뭇가지에서 출발한 바람이었다. 바람은 한 겹 한 겹,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종종 윌리엄 포크너의 명구가 생각났다. "과거는 죽지 않았다. 과거는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았다."
누구나 아픈 기억과 상처가 있으면 이를 덮어 버리거나 묻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그림자 같고, 지나간 일들은 다시 반복된다. 과거가 있는 한 귀신은 존재한다. 인간 세계 곳곳에 귀신들이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귀신인지도 모른다.

기억은 믿을 수 있는 걸까? 과연 기억은 진실일까? 유년은 정말로 존재했던 것일까? 용징은 존재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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