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세탁기를 연이어 두 번 돌렸다. 세탁기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삭거리는 여름 이불을 덮고 있으면서 이불솜을 벗겨야 하는 일이 귀찮아 빨지 않은 이불을 세탁해야 했다. 더 미루면 안 되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고 비가 올 거라 해도 세탁기는 돌아가야 했다. 이불 커버와 고정된 여러 매듭을 하나씩 풀고 이불솜을 먼저 세탁하고 뒤이어 이불 커버를 세탁했다. 이제 진짜로 그 계절을 정리하는 기분이었다.


건조대와 식탁 의자에 이불을 널고 더 글로리 때문에 가입하고 끊어내지 못한 넷플릭스 시리즈 가운데 <사냥개들>을 봤다. 내용 전개상 폭력성이 짙은 부분은 살짝살짝 빨리 넘겨 가면서 끝까지 봤다. 선의란 무엇일까. 그 무해한 선의를 이용한 유해한 사람들의 마음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은 『소설보다: 여름 2023』 속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가 생각났다. 맞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우리는 왜 이렇게 아둥바둥하는 걸까. 2023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의 소설이 괜찮았다. 아니, 좋았다. 이 작가의 소설이 궁금해졌다. 아직 나머지 두 단편은 읽지 못했지만 공현진의 소설만으로도 기대는 충족되었다.





『소설보다: 여름 2023』과 함께 야금야금 산책은 레일라 슬리마니의 『한밤중의 꽃향기』와 장바구니를 정리할 때마다 살아(?) 남은 존 버거의 『결혼식 가는 길』이다. 레일라 슬리마니의 산문도 소설만큼 좋을 것 같다. 잠자냥 님의 오별이니까. “글을 쓴다는 것은 혼자가 되는 것이다.” 이 문장만으로도 말이다. 책장엔 존 버거의 책이 꽤 있다. 장바구니와 마찬가지로 책과 책장을 정리할 때 제외되는 작가다. 읽지 않은 책들이 있지만 그 목록에 한 권 올라가는 일은 즐겁다.


새벽 내내 내리던 비는 그쳤다. 장마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곧 다시 내릴 것이다. 장마는 시작되었으니까. 장마에 대한 걱정은 뒤로하고 수국을 생각한다. 어제 주문한 수국은 내일 도착한다. 올해는 분홍 수국을 주문했다. 수국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3-06-2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탁기에게 미안하시다는 그 마음,
저는 그런 마음이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어제 세탁기에 제대로 미안하게 일을 시켰어야 하는데 밤사이에 이미 장마가 시작되었네요^^:;;

저도 6월 30일 배송 받기로 하고 수국 3단을 주문했는데,
자목련님의 수목이 먼저 도착해서 페이퍼에 올라올 수도 있겠네요^^

자목련 2023-06-27 09:01   좋아요 1 | URL
장마가 온다는 소식에 건조 기능을 쓰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어요. ㅎㅎ
저는 한 송이만 주문했는데 얄라 님이 주문한 풍성한 수국은 얼마나 예쁠까요?

2023-06-27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28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전 이별 - 나를 지키면서 상처 준 사람과 안전하게 헤어지는 법 오렌지디 인생학교
인생학교 지음, 배경린 옮김, 알랭 드 보통 기획 / 오렌지디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별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알다시피 이별은 어렵다. 아무리 굳게 다짐을 해도 이별을 통보하거나 통보받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생각하는 것과 안다고 짐작하는 것은 실제 아는 일, 당사자가 되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 된다. 그러니 이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이별은 필요하다. 혼자로 살아가는 일이 두렵겠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나를 위한 삶이라는 판단이 섰을 때에는 이별을 실행하는 것이 좋다. 안다, 그게 어려다는 거, 그래서 힘들가는 것 말이다.


이별 후유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경험이 있다면 더욱 이별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함께 있는 게 서로에게 도움이 안 되고 서로를 성장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별하는 게 맞다. 그동안의 정 때문에 지내온 시간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면 자세히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알랭드 보통’이 참여하고 기획한 인생 학교 시리즈 『안전 이별』 은 이별 앞에서 주춤하는 이들에게 24가지 질문과 답을 통해 제대로 이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오은영 리포트 결혼 지옥>이나 <연애의 참견>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독자는 『안전 이별』의 상담소에 내담자라고 하면 맞겠다.


그렇다. 『안전 이별』 은 연인(배우자, 동거인)이라는 대상과의 이별에 대한 책이다. 처음 『안전 이별』 이란 제목을 보고 모든 이별을 떠올렸다. 반려자, 반려동물, 형제, 부모, 연인, 친구 그들과의 이별에 대한 안내서가 아닌가 싶었다. 그러니 이 책은 확실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책이다. 지금 연애를 하고 있거나, 연인과 관계의 점검이 필요하거나 동거인과의 헤어짐을 생각하고 있다면 도움이 될 책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길을 제시한다.


서로 사랑해서 시작된 관계가 어느 순간 시들해지진다. 마냥 좋을 수는 없으니까. 대부분 상대에게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원인을 찾아도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기란 어렵다. 회복하려는 마음은 있으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아프고 외로운지 확인하고 상대에게 전했을 때 인정하고 고치려 노력한다면 이별은 다음 단계가 아닐 것이다. 아무런 진전과 노력도 없다면 연인에게 필요한 건 이별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견딜 수 없는 것, 그래서 애인에서 이별을 고하고 싶게 만드는 것은 바로 애정의 부제다. 상대의 관심을 받는 것, 내 존재를 이해받고 받아들여지는 것, 궁극적인 자극을 받는 것, 내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것, 누군가 있다는 것,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애정을 쏟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충만하게 느끼는 것이 연인 관계의 핵심이다. (30쪽)


이별은 왜 어려운가. 어쩌면 좋은 이별을 꿈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대에게 헤어진 후에도 좋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 같은 것 말이다. 중요한 건 책의 제목처럼 『안전 이별』이다. 굳이 이별 통보 후 일어나는 사건을 떠올리지 않아도 알 것이다. 헤어짐을 왜 받아들지 못하는 것일까. 다른 사랑을 만나지 못할까 봐, 이별을 후회하게 될까 봐, 혼자인 시간을 견디지 못할까 봐. 이유는 많다. 이별을 결정하기 전 누구나 고민했을 문제는 이 책을 읽고 나면 한결 쉬워질 것이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고민, 아마도 이런 마음은 아닐까.


이미 바캉스 티켓을 사 두었더라도, 집 계약서에 도장을 막 찍었더라도, 결혼식 청첩장을 찍은 후라도 상관없다. ‘이건 아니야’라는 확신이 든다면, 미적지근하게 굴지 않고 확실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게 바로 상대를 위한 ‘진정한 친절’이다. 상대와 내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는 건 절대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며, 이별을 고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 되어서도 절대 안 된다. (130쪽)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조언을 하는 책이다. 관계를 돌아보고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더 나은 사랑, 더 나은 삶을 위한 이별을 실체도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미루고 있다면 『안전 이별』 을 만나보길 바란다. 연인과 잘 지내는 방법을 배울 수도 있다. 연애를 하는 이, 사랑을 기대하는 이, 혼자를 꿈꾸는 이, 이별해도 괜찮다는 위로가 필요한 이, 누구에게도 나쁘지 않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결정, 나를 위한 삶이 가장 먼저라는 걸 기억한다면 이별도 조금은 수월해지지 않을까.


그 누구도 나를 붙을 권리가 없고, 나 역시 억지스러운 요구에 발맞출 이유가 없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의무는 나 자신을 돌보고 성장시키는 것이다. 헤어질 사람에게 마음이 쓰인다고 혼란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좋은 사람을 알아본 과거의 자신에게 아낌없이 칭찬을 건네자. 동시에 현재와 미래의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말자. (108~109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3-06-23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전이별! 뭔가 어울리지 않는듯 하면서도 납득이 되네요.
아이들 책 중에 <네가 뭐라건, 이별 반사>란 책이 생각납니다. 가슴아프지만, 아름다운 이별하는 법에 대해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자목련 2023-06-24 09:25   좋아요 1 | URL
요즘 사회적 이슈가 떠오르기도 했어요.안전하고 건강한 이별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개해주신 책은 제목이 넘 귀엽습니다^^

미미 2023-06-24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있어요! (조금씩ㅋㅋ) 알랭 드 보통은 평범한 주제를 뻔하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가는 능력이 있더군요. 인생 학교 시리즈 다 궁금해요.^^

자목련 2023-06-26 10:34   좋아요 1 | URL
알랭 드 보통의 기획이 참 좋은 것 같아요. 정말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는 인생 학교가 아닐까 싶어요.
미미 님, 즐겁게 만나시고 맑은 한 주 시작하세요^^
 
ALONE - 이 시대를 대표하는 22명의 작가가 쓴 외로움에 관한 고백
줌파 라히리 외 21명 지음, 나탈리 이브 개럿 엮음, 정윤희 옮김 / 혜다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오빠와 언니들, 동생까지, 나는 대가족의 일원이었다. 명절에는 다른 곳에 사는 친척들이 도착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작은 방에 테트리스를 하듯 자리를 잡고 잠을 청했다. 고독이나 외로움 같은 건 찾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외로웠던 것 같다. 나만의 공간이 없었고 오빠와 언니, 남동생을 향한 관심을 나로 돌리고 싶었다. 나를 봐주고 나를 사랑해 주고 나를 아껴주는 이가 없다고 여겨 외로웠다. 학교에서 만난 친구나 선생님에게 집중했는지도 모른다.


22명의 외국 작가가 외로움에 대해 쓴 『ALONE』을 읽기 전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건 그때 내가 많이 외로웠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고 하지만 정작 그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나의 외로움을 말하는 일은 혼자만의 비밀을 말하는 일이며, 상대의 의도도 모르고 손을 내미는 격이니까. 그러니까 은밀하고 내밀한 고백 같은 것이다. 그런 마음을 읽는 일은 조금 쓸쓸하다. 그러나 매우 곡진한 태도의 외로움에 대한 22명의 글을 읽다 보면 저절로 마음 깊숙이 자리한 나의 외로움에 대해 꺼내고 싶게 만든다. 한 번도 말하지 못했지만 내 안에 깊게 자리한 그것들에 대해 말이다.


22명의 작가에 대한 정보가 없어 걱정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이 들여주는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특히 여성이라서 이입할 수 있는 감정들이 많았다. 남성에 비해 여성이 느끼는 외로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결혼, 출산, 육아를 경험하면서 여성이 감당하는 외로움을 말이다. 누군가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외로움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외로움이 아니기에 당연한 외로움이라 치부하면 안 된다.


'에이미 션'의 「홀로 겉는 여자」는 뉴욕에서 시베리아까지 혼자 걸어가겠다고 선언하고 실행한 여성 ‘릴리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지금처럼 혼자 모든 걸 하는 시대가 아닌 시절에 릴리언을 향한 세상은 그녀를 기이하고 이상한 여자로 본다. 아내와 엄마로 살아온 '에이미 션'은 릴리언의 고독이 부럽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마침내 남편과 헤어지고 혼자만의 삶을 시작한다. 어쩌면 남편은 끝내 에이미 션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외로움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고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지만 그녀는 충만함을 느낀다. 그걸로 충분하다. 이 외로움이야말로 스스로 선택한 행복한 외로움이다.






어떤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는 의무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느끼는 외로움은 단절 그 자체가 된다. '마야 샨바그 랭'의 「놓아 보내기」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라 이내 공감하고 만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아이들을 키우고 알츠 하이머를 앓는 엄마를 돌보느라 장학금 신청서를 쓰지 못하는 그녀에겐 도움이 절실하다. 하지만 제목처럼 놓아 보내지 못하기에 힘들다. 요양원에서 엄마는 잘 지내는 모습을 확인하고야 외로움에 갇혔던 자신을 놓아준다.


내 생각에, 이것이야말로 외로움이 지닌 가장 억압적인 특징이다. 상상력을 제안하고, 삶은 결코 나아지지 않을 거라 속삭이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꿈꾸지 못하게 스스로를 얽매는 것. 외로움은 그렇게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나는 혼자 걱정에 사로잡힌 채 불확실한 상황의 이면에도 좋은 결과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높이 도약하기 전엔 새로운 삶이 지닌 이점들을 볼 수 없는 법이다. ( 「놓아 보내기」, 85쪽)


이처럼 돌봄이나 양육을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맥락은 '헬레나 피츠제럴드'의 「기묘하고도 힘겨운 기쁨」에서도 만날 수 있다. K- 장녀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녀는 가족 공동체를 돌보는 역할을 부여하고 혼자 사는 소설 속 비련의 주인공으로 혼자인 여성을 묘사하는 사회에 대해 비판한다. 그녀는 남편과의 생활에 만족하지만 가족의 위한 여성의 온전한 희생은 부당하다고 말한다.


여성으로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호사스러운 삶을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부장제가 만들어 놓은 전제와 기대라는 틀 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기묘하고도 힘겨운 기쁨」, 123쪽)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삶에 나 자신이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나의 일부는 여전히 혼자 지내는 삶이 지닌 강렬한 즐거움을 향해 끊임없이 되돌아간다. (「기묘하고도 힘겨운 기쁨」, 131쪽)


두 개의 언어로 인한 외로움, 이민을 인해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는 혼돈의 삶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인도에서 미국으로 왔지만 둘 중 어디에도 속하거나 버리지 못한 부모님의 태도를 글쓰기의 주제로 삼은 줌파 라히리 역시 어느 곳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외로움에 대해 말한다. 어찌 보면 '줌파 하리리'와 닮은 듯 보이는 '진 곽'이나 '이윤 리'의 글에서는 다른 종류의 외로움을 발견한다.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글쓰기를 하는 이윤 리에게 중국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중국어로 글을 쓰지 않느냐고 묻는다. 평범한 것들을 영어로 쓴다며 글을 잘 쓰지 못하니 부끄럽게 여기라고 한다.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배우고 익히는 언어는 보통의 언어, 공적인 언어라 할 수 있고 오히려 떠나온 곳의 언어, 그러니까 중국어가 사적인 언어가 될 수 있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영어는 사적인 언어라고 말한다. 두 언어 사이를 오가는 외로움을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녀의 글을 통해 그것을 짐작할 뿐이다.


나는 종종 글쓰기가 공허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것도,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외로움이란 자신만의 사적인 언어로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 공허함은 공적인 언어나 감성적인 관계를 통해 채울 수밖에 없다. (「두 개의 언어」, 305쪽)


우리는 경계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건너가고 싶은 곳, 속하고 싶은 곳에 다다르지 못할 때 속상해한다. 다르다고 느낄 때 외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어딘가 소속되었다 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다. 외로움을 알기에 함께하는 간절함을 안다. 외로움은 온전히 쓸쓸한 게 아니며 나쁜 게 아니다. 외로움을 설명하는 일은 때로 비굴하고 귀찮을 수 있지만 외로움 그 자체로도 충만해질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삶을 꿈꾼다.


두 번의 이민자 생활을 겪은 사람으로서 나는 인생 대부분을 외롭게 지냈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여러 버전으로 나 자신을 설명해왔지만 아직도 주변 사람들과 내가 조금은 다르다고 느낀다. 우리 모두는 언어와 문화, 눈에 보이지 않는 과거라는 거대한 덩어리에 종속되어 있다. 이것들은 우리는 짓누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존엄을 부여하기도 한다. (「영원한 이방인」, 272쪽)


아름다운 책이다. 살아가면서 마주할 외로움과 고독의 순간에 꺼내보면 좋을 것이다. 아니, 지금 이 순간 혼자만의 시간과 감각을 원한다면 『ALONE』을 만나보길 바란다. 나의 외로움과 당신의 외로움이 만들어내는 눈부신 다정함이 거기 있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3-06-22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적인 언어로 대화할 수 없는 상태, 그 공허함은 공적인 언어나 감성적인 관계를 통해 채울수밖에 없다!
말하지 않고 다 알아지는 관계는 그 공허함이 사라질까요?^^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자목련 2023-06-23 08:15   좋아요 1 | URL
그래서 잘은 모르지만 ‘이윤 리‘가 무척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녀는 여전히 외로운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어요.
 
슬픔을 아는 사람 - 유진목의 작은 여행
유진목 지음 / 난다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에는 감정이 있다. 당연하다. 애써 숨기려 해도 어떤 틈새로 감정이 새어 나온다. 참 이상하다. 글이 주는 위로와 위안도 마찬가지다. 일부러 위로를 전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어떤 글은 슬그머니 내가 기대게 만든다. 유진목의 『슬픔을 아는 사람』도 그런 책이다. 누군가 이 책이 많은 위로로 다가올 것이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도 있냐고 반문하겠지만 살다 보면 그런 사람 꽤 있다. 그러니까 슬픔 따위 필요 없다고 여기는 사람, 슬픔이 없는 사람, 그래서 상대의 슬픔은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 정호승의 시 한 구절이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절로 따라온다.


'유진목'이란 이름은 익숙하지만 정작 그의 시집이나 책은 읽은 적이 없다. ‘슬픔을 아는 사람’이란 제목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여행 에세이를 나는 즐기지 않아서다. 코로나 시국 2022년 여름, 베트남 하노이에 다녀온 세 번의 여행을 글과 56컷 사진을 담아낸 책을 베트남 하노이 여행기 대신 ‘유진목의 감정 여행, 마음 여행’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계속 지나고 있을 때, 의지와 상관없는 일로 고통받을 때 우리는 도망치고 싶다. 나 자신도 외면하고 싶은 순간 말이다. 어디론가 달아날 수 있다면 미련 없이 짐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유진목에게는 하노이가 그랬다. 그는 아침 약, 저녁 약을 먹어야만 견딜 수 있는 날들, 약을 먹기 전에는 술을 마시고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알코올이 아닌 약으로 대체되었지만 이제는 약을 먹지 않고 잠들기를 기도한다. 계획했던 여행이 아니라 하노이에 가면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떠났다. 하노이에서 돌아왔는데도 자꾸 하노이에 가고 싶어서 다녀온 지 열흘이 지나고 다시 하노이로, 돌아와서 또 한 번 하노이에 다녀왔다. 한 번 본 커피 가게 사장이, 오토바이 기사가, 호텔 직원이 이제 그를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글을 읽으며 같이 침잠하고 웃고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산책을 하고 기차에서 잘못 내리고 비를 맞고 하다 보면 하노이에는 뭐가 있냐고 묻는 이들에게 하노이에는 내가 있어요라고 답하는 그처럼 나도 하노이에 있어라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아는 이는 알겠지만 그는 힘든 소송을 진행했다. 무려 육 년이라는 시간이었다.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간, 그 시간을 분노, 미움, 슬픔과 함께 살아왔을 것이다. 마침내 소송에서 이겼고 끝이 났다. 하지만 그에게 육 년의 시간이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수 없다.


삶이 기다리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삶이 경험하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면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무언가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일을 살아 있는 동안에 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인간은 나이가 들고 육체가 쇠락하고 병들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90쪽)


모든 감정과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곳이 필요했다. 그에게 하노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곳에 가면 웃을 수 있고 그곳에 가면 내 몸이 이끄는 대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곳. 나를 잡아끄는 상념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나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것. 맘껏 신나서 맘껏 기쁘게 지낼 수 있는 곳. 낯선 이에게 무표정이 아닌 웃음을 지어주는 사람, 거리낌 없이 사진을 찍어도 되는 곳.


과거의 단단한 끈에서 폴려난 나는 바로 지금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폴짝폴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자꾸만 하노이에 오는가 했더니 내 두발을 묶은 지긋지긋한 과거를 끊어내려고 그랬구나. 잘했다. 잘했다. 나는 나에게 잘했다고 여러 번 말해주었다. (134쪽)


『슬픔을 아는 사람』이란 말을 생각할 때, 유진목의 다른 글을 만나면 하노이가 떠오를 것이다. 뜨거운 열기와 커피와 담배와 사람들의 웃음으로 채워진 하노이 말이다. 누군가 슬픔에 힘겹고 절망에 빠졌을 때 이 책은 그만의 하노이가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기는 시가 되고 시는 일기가 된다. 시를 쓰려고 한 게 아니지만 일기는 쓰다 보면 길을 잃고 차마 알아볼 수 없는 감정에 닿는다. 그런 것들이 모이고 하나하나 다듬으면 시가 될 수 있다. 하루를 마감하며 쓴 짧은 몇 줄 혹은 긴 장문의 글은 어느 날에 읽어보면 시로 변해있다. 울프의 일기와 황인찬의 시집을 두고 생각나는 대로 쓴 것이다.


일기와 시, 그 끝에 닿는 게 같은 감정일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의 『울프 일기』는 오랫동안 장바구니에 있었다. 당장 읽겠다거나 사겠다는 의지와 상관없이 거기 그렇게 있었다. 이제 읽을 때가 된 건 아니고 사 버렸다. 그러니까 사 버린 것이다. 샀으니 됐다. 나는 뿌듯하다. 그래도 펼친다. 펼쳐서 나온 날의 일기는 이렇지 않고 짧은 일기를 찾았다.


예절 바른 편지를 보냈다. 아직 답장이 안 왔고, 또 올 리도 없다. 덕분에 나는 7월에 소설을 쓰다 말고 밖으로 나가, 머리에 모피 털이 달린 모자를 쓰지 않아도 된다. 지금은 전에 없이 멋진 봄이다. 부드럽고, 파랗고, 안개가 서려 있다. (3월 28일, 화요일)


편지를 썼던 날이 언제였던가. 그러니 답장 같은 게 올 리가 없다. 새벽 어스름에 온통 뿌연 기운이 가득했다. 안개가 나를 덮치는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서서히 안개는 사라지고 아무 일 없는 듯 하루가 열렸다. (6월 16일, 금요일, 울프를 따라 써보기)





황인찬 시에 대한 기억은 첫 시집의 느낌이 좋아서 꾸준하게 읽는 건 아니지만 시집이 나오면 관심이 가고 사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번 시집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엔 이런 시가 있다. 여름이라서, 장미라서, 눈에 들어왔는데 슬프구나.


장미가 화병에 꽂히기로 결심했으므로

화병에 장미 한 다발이 있을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면 온 집안에 썩은 내가 가득할 것이다


나는 너에게 왜 꽃을 버리지 않느냐고 묻겠지

너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한 달이 지나면 장미는 완전히 마르고

너는 이 집에 없을 것이다


꽃은 묘지에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있는 법인데


화병에 장미 한 다발이 있을 것이다

목이 꺾긴 채로 말라버리기로 되어 있는 장미들


나는 너에게 장미 한 다발을 준다

그것이 장미의 결이라고 믿으면서 (「장미는 눈도 없이」, 전문)


일기를 쓰고 시를 읽는 하루를 그려보면 근사하다. 하지만 일기를 쓰고 시를 읽는 하루를 사는 일은 근사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한 것과 다르게 흐르는 일상, 생각과 똑같은 일이 얼마나 될까. 그래도 시 읽고 일기 쓰는 마음은 간직해 보도록 하자. 시를 쓰는 것도 아니니까.











댓글(8)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괭 2023-06-16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프일기 엄청 두껍네요 후덜덜
황인찬 시인 시 맘에 듭니다! 예전에 시 낭송 들었는데 목소리가 참 좋으시더라고요.

자목련 2023-06-19 09:27   좋아요 1 | URL
얇은 시집 옆에 있어서 더 두껍게 보이네요 ㅎ
황인찬 목소리, 급 궁금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6-16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울프 일기는 저도 보관함에 두었는데 잊고 있었네요. 울프 소설들부터 읽어야할텐데...^^ 시를 읽고 일기를 쓰는 마음. 마음을 간직한다는 말이 그냥 좋습니다^^

자목련 2023-06-19 09:28   좋아요 1 | URL
살짝 넘겨봤는데 일기를 읽고 울프의소설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같이 읽어도 좋을 것 같고요.
간직해야 할 마음이 너무 많아 걱정입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3-06-16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프 일기‘ 읽고 울프의 작품 이해하는데 도움 받았어요.
글 잘 쓴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고요^^

자목련 2023-06-19 09:29   좋아요 1 | URL
역시 페널로페 님은 이미 만나셨군요.
버지니아 울프는 정말 글을 잘 쓰는 것 같아요.

책읽는나무 2023-06-16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은 일찌감치 사다 놓긴 했습니다만^^;;;;

자목련 2023-06-19 09:29   좋아요 1 | URL
나무 님 책장에 없는 책은 궁금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