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NE - 이 시대를 대표하는 22명의 작가가 쓴 외로움에 관한 고백
줌파 라히리 외 21명 지음, 나탈리 이브 개럿 엮음, 정윤희 옮김 / 혜다 / 2023년 6월
평점 :
절판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오빠와 언니들, 동생까지, 나는 대가족의 일원이었다. 명절에는 다른 곳에 사는 친척들이 도착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작은 방에 테트리스를 하듯 자리를 잡고 잠을 청했다. 고독이나 외로움 같은 건 찾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외로웠던 것 같다. 나만의 공간이 없었고 오빠와 언니, 남동생을 향한 관심을 나로 돌리고 싶었다. 나를 봐주고 나를 사랑해 주고 나를 아껴주는 이가 없다고 여겨 외로웠다. 학교에서 만난 친구나 선생님에게 집중했는지도 모른다.


22명의 외국 작가가 외로움에 대해 쓴 『ALONE』을 읽기 전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건 그때 내가 많이 외로웠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고 하지만 정작 그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나의 외로움을 말하는 일은 혼자만의 비밀을 말하는 일이며, 상대의 의도도 모르고 손을 내미는 격이니까. 그러니까 은밀하고 내밀한 고백 같은 것이다. 그런 마음을 읽는 일은 조금 쓸쓸하다. 그러나 매우 곡진한 태도의 외로움에 대한 22명의 글을 읽다 보면 저절로 마음 깊숙이 자리한 나의 외로움에 대해 꺼내고 싶게 만든다. 한 번도 말하지 못했지만 내 안에 깊게 자리한 그것들에 대해 말이다.


22명의 작가에 대한 정보가 없어 걱정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이 들여주는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특히 여성이라서 이입할 수 있는 감정들이 많았다. 남성에 비해 여성이 느끼는 외로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결혼, 출산, 육아를 경험하면서 여성이 감당하는 외로움을 말이다. 누군가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외로움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외로움이 아니기에 당연한 외로움이라 치부하면 안 된다.


'에이미 션'의 「홀로 겉는 여자」는 뉴욕에서 시베리아까지 혼자 걸어가겠다고 선언하고 실행한 여성 ‘릴리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지금처럼 혼자 모든 걸 하는 시대가 아닌 시절에 릴리언을 향한 세상은 그녀를 기이하고 이상한 여자로 본다. 아내와 엄마로 살아온 '에이미 션'은 릴리언의 고독이 부럽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마침내 남편과 헤어지고 혼자만의 삶을 시작한다. 어쩌면 남편은 끝내 에이미 션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외로움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고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지만 그녀는 충만함을 느낀다. 그걸로 충분하다. 이 외로움이야말로 스스로 선택한 행복한 외로움이다.






어떤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는 의무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느끼는 외로움은 단절 그 자체가 된다. '마야 샨바그 랭'의 「놓아 보내기」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라 이내 공감하고 만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아이들을 키우고 알츠 하이머를 앓는 엄마를 돌보느라 장학금 신청서를 쓰지 못하는 그녀에겐 도움이 절실하다. 하지만 제목처럼 놓아 보내지 못하기에 힘들다. 요양원에서 엄마는 잘 지내는 모습을 확인하고야 외로움에 갇혔던 자신을 놓아준다.


내 생각에, 이것이야말로 외로움이 지닌 가장 억압적인 특징이다. 상상력을 제안하고, 삶은 결코 나아지지 않을 거라 속삭이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꿈꾸지 못하게 스스로를 얽매는 것. 외로움은 그렇게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나는 혼자 걱정에 사로잡힌 채 불확실한 상황의 이면에도 좋은 결과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높이 도약하기 전엔 새로운 삶이 지닌 이점들을 볼 수 없는 법이다. ( 「놓아 보내기」, 85쪽)


이처럼 돌봄이나 양육을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맥락은 '헬레나 피츠제럴드'의 「기묘하고도 힘겨운 기쁨」에서도 만날 수 있다. K- 장녀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녀는 가족 공동체를 돌보는 역할을 부여하고 혼자 사는 소설 속 비련의 주인공으로 혼자인 여성을 묘사하는 사회에 대해 비판한다. 그녀는 남편과의 생활에 만족하지만 가족의 위한 여성의 온전한 희생은 부당하다고 말한다.


여성으로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호사스러운 삶을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부장제가 만들어 놓은 전제와 기대라는 틀 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기묘하고도 힘겨운 기쁨」, 123쪽)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삶에 나 자신이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나의 일부는 여전히 혼자 지내는 삶이 지닌 강렬한 즐거움을 향해 끊임없이 되돌아간다. (「기묘하고도 힘겨운 기쁨」, 131쪽)


두 개의 언어로 인한 외로움, 이민을 인해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는 혼돈의 삶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인도에서 미국으로 왔지만 둘 중 어디에도 속하거나 버리지 못한 부모님의 태도를 글쓰기의 주제로 삼은 줌파 라히리 역시 어느 곳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외로움에 대해 말한다. 어찌 보면 '줌파 하리리'와 닮은 듯 보이는 '진 곽'이나 '이윤 리'의 글에서는 다른 종류의 외로움을 발견한다.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글쓰기를 하는 이윤 리에게 중국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중국어로 글을 쓰지 않느냐고 묻는다. 평범한 것들을 영어로 쓴다며 글을 잘 쓰지 못하니 부끄럽게 여기라고 한다.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배우고 익히는 언어는 보통의 언어, 공적인 언어라 할 수 있고 오히려 떠나온 곳의 언어, 그러니까 중국어가 사적인 언어가 될 수 있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영어는 사적인 언어라고 말한다. 두 언어 사이를 오가는 외로움을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녀의 글을 통해 그것을 짐작할 뿐이다.


나는 종종 글쓰기가 공허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것도,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외로움이란 자신만의 사적인 언어로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 공허함은 공적인 언어나 감성적인 관계를 통해 채울 수밖에 없다. (「두 개의 언어」, 305쪽)


우리는 경계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건너가고 싶은 곳, 속하고 싶은 곳에 다다르지 못할 때 속상해한다. 다르다고 느낄 때 외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어딘가 소속되었다 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다. 외로움을 알기에 함께하는 간절함을 안다. 외로움은 온전히 쓸쓸한 게 아니며 나쁜 게 아니다. 외로움을 설명하는 일은 때로 비굴하고 귀찮을 수 있지만 외로움 그 자체로도 충만해질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삶을 꿈꾼다.


두 번의 이민자 생활을 겪은 사람으로서 나는 인생 대부분을 외롭게 지냈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여러 버전으로 나 자신을 설명해왔지만 아직도 주변 사람들과 내가 조금은 다르다고 느낀다. 우리 모두는 언어와 문화, 눈에 보이지 않는 과거라는 거대한 덩어리에 종속되어 있다. 이것들은 우리는 짓누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존엄을 부여하기도 한다. (「영원한 이방인」, 272쪽)


아름다운 책이다. 살아가면서 마주할 외로움과 고독의 순간에 꺼내보면 좋을 것이다. 아니, 지금 이 순간 혼자만의 시간과 감각을 원한다면 『ALONE』을 만나보길 바란다. 나의 외로움과 당신의 외로움이 만들어내는 눈부신 다정함이 거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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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6-22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적인 언어로 대화할 수 없는 상태, 그 공허함은 공적인 언어나 감성적인 관계를 통해 채울수밖에 없다!
말하지 않고 다 알아지는 관계는 그 공허함이 사라질까요?^^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자목련 2023-06-23 08:15   좋아요 1 | URL
그래서 잘은 모르지만 ‘이윤 리‘가 무척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녀는 여전히 외로운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