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 -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
브라이언 키팅 지음, 마크 에드워즈 그림, 이한음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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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 짐 알칼릴리의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인상 깊게 읽었다. 어려운 주제였지만 물리학에 대한 애정이 커졌다. 그 책을 읽었기에 브라이언 키팅의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가 궁금했다.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란 제목과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란 부제는 살피지 않고 말이다. 누군가 대중에게 과학을 재미있게 설명하는 유튜버 궤도를 떠올릴 수도 있다. 미리 언급하자면 이 책에 윤하의 노래로 잘 알려진 ‘사건의 지평선' 이 등장한다.


고백하자면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노벨물리학상을 받는 물리학자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9명의 물리학자는 내게 특별한 이름이 될 것이다. 물론 외우지는 못할 것이다. 이 책은 우주론자이자 과학자인 브라이언 키팅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9명과 만나 나눈 대화 인터뷰다. 물리학자의 삶과 연구자의 태도에 관해 중점적으로 들려준다. 저자의 설명처럼 여자 물리학자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연구자의 삶이란 어떠할까. 수식과 실험이 전부일 것 같다. 성과를 내야 하고 남보다 빠르게 어떤 이론을 발표하는 일 그게 목표가 아닐까. 이런 나의 생각은 무지한 것이었다. 놀랍게도 물리학자들은 거의 비슷한 느낌을 안겨주었는데 동료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 실패는 당연한 일이며 성과는 혼자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분야든 협력이 중요하며 실패로 인해 좌절하는 대신 실패를 받아들이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9명이 연구하는 분야는 다르지만 말이다.


모든 연구는 사실 어느 한 개인이 홀로 내놓는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종합되는 겁니다. 새로운 뭔가가 출연할 때, 그게 맥락에 놓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려요. (물리학자 덩컨 홀데인, 162~163쪽)


그들은 연구자이면서 과거에는 제자였고 현재는 누군가의 스승이었다. 생각해 보면 물리학에서 하나의 이론이나 우주적 현상을 밝히는 일은 혼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의 주제를 몇 십 년 이상 파고들어 연구를 해야만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결괏값이 반드시 성공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건 우리도 안다. 하루 종일 연구에 매달려도 당장은 결과를 보여줄 수 없는 일.


우리 물리학자들이 하는 연구의 상당수는 사실 쓸모가 없지요. 지금까지 이뤄진 놀라운 발견 대부분이 우리 삶에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도 미치지 않을 거예요. 매일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해 간다는 기쁨을 제외하면 말이죠. (물리학자 셀던 글래쇼, 101쪽)






전자기약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셀던 글래쇼는 학생을 가르치는 기쁨을 말한다. 누군가 그의 강의 덕분에 물리학의 세계를 만나고 연구자의 길을 걸으며 물리학은 발전한다. 그가 연구에만 집중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시를 좋아한다는 물리학 교수 프랭크 윌첵의 말도 인상적이다.


세상은 여러 층위로 기술할 수 있는데, 시도 중요한 역할을 해요. 제 말은 이쪽 아니면 저쪽을 택해야 하는 게 아니란 겁니다. 양쪽 다일 수도 있어요. 같은 대상이나 현상을 다른 식으로 기술할 수 있고, 각 기술 방식은 나름대로 타당해요. (물리학자 프랭크 윌첵, 183쪽)


우주배경복사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존 메데의 솔직함은 감동적이다. 연구자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 대해 확신을 갖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꾸준하게 성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일, 누구나 같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난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뭔가를 연구하지요. 따라서 매일 난 학자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기꾼이 되는 거예요. (물리학자 존 메더, 219쪽)


과학자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동기부여가 될 책이다.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도 충분히 흥미롭고 인상적인 책이다. 물론 실패로 인한 기억으로 도전을 주저하는 이들에게 일어설 힘을 안겨준다. 그러니 이 책은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란 부제에 우리의 삶을 대입하기에 충분하다.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어려움과 실패를 저자의 바람처럼 물리학자처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삶이란 책의 원제(Into the Impossible)처럼 불가능 속으로 전진하는 일이니까.


우리는 어차피 실패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 절박한 질문은 어떻게 실패할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실패를 다룰 것인가, 혹은 실패 끝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하는 문제다.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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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행복 - 가장 알맞은 시절에 건네는 스물네 번의 다정한 안부
김신지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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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에 취한 게 엊그제 같은데 초록에 반하는 날들이다. 나는 혼자 멈춰 있고 계절은 사부작사부작 제 길을 걷는다. 곧 모내기가 시작될 테니 여름인 것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탓에 계절의 움직임을 조금 안다. 그건 참 좋은 일이다. 이맘때의 절기를 찾아보는 것, 계절을 사는 일이다. 경계가 불분명해하지만 계절의 문턱을 지나 다음 계절이 온다는 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인지. 김신지의 『체절 행복』 그런 일상의 감사를 들려준다. 제목 그대로 체절의 행복을 느끼며 사는 일 말이다. 입춘부터 대한까지 24절기를 소개한다. 절기마다 어떻게 재밌고 즐겁게 지내는지 집중하게 만든다.


누군가 사느라 바빠서 절기 따위는 챙길 여력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추운 겨울 지나 꽃이 피면 꽃이 반갑고 그 소식을 전한 기억이 따라올지도 모른다. 계절이 오고 가는지 체감도 못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한 계절이 지났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던 적도 말이다. 엊그제 24절기 중 일곱 번째, 여름의 입구인 입하(立夏)였다. 벌써 올여름의 더위를 걱정한다. 제철이었던 주꾸미도 먹지 못하고 냉동실에 얼려 둔 머위 쌈도 먹지 못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일까. 『체절 행복』을 읽으면서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지혜로운 삶을 살았는지 감탄한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서 자연의 흐름에 맞춰 살아야 했지만 여름 더위를 피하고 겨울 추위를 피해 다른 나라에 갈 수도 있는 세상이니 제철 절기를 알고 챙기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만난다면 나만의 제철 절기를 즐기는 기쁨을 쌓고 싶을 것이다. 봄마다 조팝과 이팝나무를 구분하지 못하고 헷갈렸던 나는 이제 확실히 안다. 키가 큰 게 이팝나무라는 걸 말이다. 계절에 맞게 사는 일, 그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삶이다.


새하얀 눈꽃 치즈를 수북이 뿌려둔 것 같은 이팝나무는 이맘때 어딜 가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저 꽃 좀 봐, 하고 멈춰 서는 순간에 우리 삶은 조금 느리게 흐른다. 한 사람의 삶에서 그렇게 말한 순간들만 모아 편집해둔다면 그건 얼마나 아름다운 영상이 될까. (110쪽)


시골에서 나고 자란 탓에 계절마다 심어야 할 작물이 무엇이고 수확해야 할 게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다. 한데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잊고 지낸 게 많았다. 요즘 마늘종 뽑을 때인데, 어렸을 적에는 그게 정말 싫었다. 바쁜 농사철에는 시험공부를 핑계로 학교로 도망 치곤했는데, 부모님께 정말 죄송하다.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 그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 있다는 것, 제철 절기를 기억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계절마다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쏟으며 사는 일이 좋다. 기쁘게 몰두하는 일을 어쩌면 ‘마음을 쏟다’라고 표현하게 된 것일까. 여기까지 무사히 잘 담아온 마음을 한 군데다 와르르 쏟아붓는 시간 같다. 그렇다면 내게 초여름은 ‘바깥’에 마음을 쏟고 지내는 계절. 좋아하는 계절은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즐기고 그게 곧 잘 사는 이이라고 믿으며 지낸다. (141~142쪽)


바깥에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려고 오며 가며 카페나 식당을 봐 둔다는 저자의 마음이 괜히 설렌다. 나도 더위가 몰려오기 전에,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맘껏 바깥을 즐기는 일상을 계획하고 싶다. 우선은 지금 한창인 작약을 보는 일에 몰두할 생각에 설렌다. 바깥은 아니더라도 집안에서 볼 수 있는 작약, 지금의 제철 행복이다.


다가오는 절기를 헤아려본다. 절기를 안다는 게 참 좋다. 계획을 하지 않아도 자연이 알아서 계획을 알려준다고 할까. 물론 나이가 들고 계절의 흐름이 더 놀라고 신기하고 감사함을 느낀다. 주변의 것들을 둘러보는 마음, 같은 자리에서 좋은 이들과 작년의 이맘때를 기억하고 떠올리는 일, 이 역시 감사하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과 다르게 춥고 날카롭던 겨울에 점점 무뎌지고 한여름의 땡볕 더위를 즐기지 못하는 건 아쉽고도 안타깝다. 이 땅에 살면서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는 절기의 즐거움이 어느 순간 기록에만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건 결국 계절의 흐름을 알고, 계절이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도 알고, ‘제때’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했던 옛사람들과 동식물처럼 사는 것.(333쪽)


다시 돌아오는 계절이 있어 우리 삶을 새로고침 해준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봄이 오는 한 우리는 매번 기회를 얻는다. 동시에 이번 봄은 다음 봄이 아니기에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다. (334쪽)


눈이 부신 이 계절,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제철의 행복을 만끽하고 누리고 싶다. 내가 맞이하는 여름은 작년과 같지만 다를 것이다. 내가 맞이할 가을과 겨울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이때를 놓치지 말길 바란다. 먹어야 할 것을 먹고 봐야 할 것을 보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감사해야 할 것에 감사하자. 계절이 보내는 기척을 놓치지 말고 그것을 반갑게 맞이하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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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5-07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작약철이죠 저희집에도 작약이 조금 폈어요 활짝은 아니고^^ 며칠 지나면 또 장미철이고요 꽃 피는거 보고 있으면 제철행복이 느껴집니다 자목련님이 들이신 작약 보면서 5월 행복하게 보내셔요😄

자목련 2024-05-09 10:49   좋아요 0 | URL
작약에 반갑고, 장미에 설레고!
제가 들인 작약은 활짝으로 가고 있어요^^
 

지레 겁을 먹는 책이 있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압도 당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허먼 멜빌의 『모비 딕』도 그런 책 중 하나였다. 읽기도 전에 읽을 수 있을까, 읽다가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책. 고래를 잡는 포경선 이야기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어쩌면 나 같은 독자가 아무런 편견과 기대 없이 『모비 딕』를 읽기에 알맞은 독자일지도 모른다.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화자 ‘이슈메일’을 따라 나는 포경선 ‘피쿼드’호에 탑승했다. 살짝 고백하자면 이슈메일이 배에 오르기 전까지 여관에서 만난 식인종 친구 퀴퀘그와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둘 사이의 묘한 긴장감, 퀴퀘그만의 의식(피쿼드에서도 그는 대단하다)이 흥미로웠다. 따뜻하고 화창한 봄날의 항해가 아닌 추운 날씨도 모자라 크리스마스에 항해는 시작된다. 이슈메일과 함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그러니까 ‘모비 딕’에 미친 남자 선장 ‘에이해브’는 모비 딕에 가려진 인물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에이해브에겐 오직 모비 딕만 중요할 뿐 그 외 에이해브를 구성하는 건 없다. 한쪽 다리를 잃게 만든 모비 딕을 향한 복수, 눈처럼 하얀 이마와 혹을 지닌 모비 딕이 그의 인생에 전부라는 말이다. 친절하게 수록된 ‘피쿼드’호의 항해 지도에서 볼 수 있듯 대서양에서 출발해 희망봉, 인도양, 일본 연해를 지나 태평양에 도달하는 항해 끝에 운명의 모비 딕을 만난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모비 딕을 쫓는 에이해브의 복수심과 욕망, 그리고 피쿼드에 승선한 선원들과 그들을 관찰하고 소설 내내 이슈메일이 설명하는 고래에 대한 모든 것이라고 정리해도 좋을 소설이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항해사도 작살잡이도 아닌 포경선이 아닌 상선에만 타봤을 이슈메일은 왜 ‘피쿼드’호에 탑승했고 고래에 집착하는가. 포경선에서 일어나는 작고 사소한 사건들, 선장 에이해브와 항해사의 갈등도 빼놓을 수 없다. 에이해브를 제외한 다른 선원들에게 모비 딕은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그저 향유고래를 잡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뿐이다. 고래를 잡는 것은 돈을 버는 것이니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피쿼드 호의 대장은 선장이니 선장 에이해브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


거기에 넓은 바다에서 다른 포경선과 만나는 이야기, 모비 딕을 만나기 전 고래를 잡고 해부하고 기름을 짜는 이야기, 모든 걸 이슈메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준다. 물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고래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 고래 사전, 고래 설명서, 고래 해부학, 고래 역사서라는 말이 이 소설의 부제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또한 인생이라는 끝을 알 수 없는 항해, 그 과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역경을 철학적으로 풀어냈다고 할 수 있겠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긴 항해가 끝났다는 것은 두 번째 항해가 시작된다는 뜻이니, 두 번째가 끝나면 세 번째가 시작되고, 그렇게 영원히 계속된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견딜 수 없는 세상의 노고인 것이다. (120쪽)


누구나 작살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인간이 조용하고 포착하기 힘들지만 늘 존재하는 삶의 위험들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뿐이다. 여러분이 철학자라면, 포경 보트에 앉아 있어도 작살이 아니라 부지깽이를 옆에 놓고 난롯가에 앉아 있을 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공포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403쪽)


일정 부분 지루한 면도 없지 않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에이해브와 모디빅이 언제 만날지가 궁금했고 그 둘의 대결, 그러니까 인간과 고래의 한판 승부를 기다렸다. 망망대해 거친 바다를 항해하면서 다른 포경선과 만날 때마다 에이해브는 언제나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흰 고래를 보지 못했소?” 모비 딕을 기다리는 에이해브는 84일 동안 바다에 나갔지만 물고기를 잡지 못한 산티아고를 떠오르게 했다.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모비 딕을 떠올려야 맞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한낱 인간과 거대한 자연이자 신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모비 딕의 대결이 나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모비 딕』를 향한 다양한 해석과 찬사도 그런 부분이 아닐까 싶다.


마침내 그토록 기다렸던 모비 딕을 만났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놈이다. 나는 모비 딕의 결말을 모르기에 에이해브와 모비 딕의 팽팽한 대결에 빠져들었다. 에이해브가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과 모비 딕이 인간의 욕망에 붙잡히지 않기를 바랐다. 모두가 추앙하고 마주하고 싶은 거대한 존재 “눈처럼 하얀 이마와 혹”을 지닌 아름다운 존재로 남아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모비 딕을 추적하는 하루하루의 생생한 묘사는 압권이다. 마치 태풍 전야의 고요 속 긴장감 가득한 슬픔을 담은 잔인한 아름다움.


적에게 다가갈수록 바다는 더욱 잔잔해져서 물결 위에 융단을 깔아놓은 듯했다. 바다는 한낮의 목장처럼 평화롭게 펼쳐져 있었다. 드디어 숨죽인 사냥꾼이 아직 낌새를 채지 못한 듯이 보이는 사냥감에 바짝 다가가자, 눈부신 혹의 전모가 또렷이 보였다. 그 혹은 독립된 별개의 생물처럼 바다를 헤엄쳐 갔고, 그 주위에서는 양털처럼 고운 초록빛 거품이 끊임없이 빙글빙글 맴도는 고리를 이루고 있었다. 혹 너머에는 살짝 치켜든 대가리에 복잡하게 새겨진 거대한 주름이 보였다. 보드라운 튀르크 양탄자 같은 물결 위에는 그 넓은 우윳빛 이마의 하얀 그림자가 반짝거리며 머리보다 앞서 달렸고, 잔물결은 장단을 맞추어 장난치듯 움직이는 골짜기 속으로 푸른 물이 번갈아 흘러들고 있었다. 양쪽에서 비치는 물거품이 올라와 고래 옆에서 춤을 추었다. (726쪽)


나처럼 지레 겁을 먹고 『모비 딕』 을 두려워하거나 시작도 못하는 독자가 있다면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설령 읽다가 멈추면 좀 어떤가. 한 편의 거대한 바다 뮤지컬 같은 소설, 바다라는 무대 위에 ‘피쿼드’ 승선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모비 딕을 만나 사투를 벌이는 대신 돌아올 수 있고 원하는 순간 바로 ‘피쿼드’에서 내려올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모비 딕과 에이해브의 목숨을 건 전투에서 누가 승리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어쩌면 그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에이해브에겐 항해 목표이자 삶의 목표였던 간절히 바랐던 모비 딕과 조우만으로도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쉽사리 이해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는 에이해브의 집착은 고래를 향한 이슈메일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물론 이 모든 건 하먼 멜빌의 고래를 향한 위대한 집념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그 놀라운 수고와 대단한 노력 덕분에 이제라도 『모비 딕』 을 만났고 흰 고래를 상상할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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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3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5-07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4-05-03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잉 드뎌 모비딕을 읽으셨군요! 뿌듯한 독서였을 거 같아요.
퀴퀘그하고 알콩달콩 재밌죠? ㅋㅋㅋ 둘이 그냥 결혼해라~!!
저는 에이헤브가(이런 인간 유형이) 싫어요;;;

자목련 2024-05-07 10:31   좋아요 0 | URL
드뎌 읽기는 했는데, 설렁설렁 읽었다는 게 맞을 것 같아요. ㅎㅎ
퀴퀘그와의 케미 좋았어요, 퀴퀘그도 살았더라면...

책읽는나무 2024-05-03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모비딕 완독 축하드립니다.
여전히 겁을 먹고 있는 독자라 선뜻 구입하기에도 좀 망설여지는 책이었는데...괜찮다고 다독여주시니...언제 한 번 용기내 보아야겠어요.^^

자목련 2024-05-07 10:33   좋아요 1 | URL
완독이라는 의미가 무색합니다. 고래에 대한 사전 같은 부분은 대충 넘어가기도 해서 ㅎㅎ
저도 읽었으니 나무 님은 더 즐겁게 꼼꼼하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새파랑 2024-05-03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도 드디어 읽으셨군요~!!
인간의 복수심과 맹목성이 얼마나 비이성적일 수 있는건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 마지막 싸움을 위한 빌드업이 좀 길긴 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자목련 2024-05-07 10:34   좋아요 0 | URL
에이해브 같은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정말 정말 피곤할 것 같습니다.
저는 결말을 몰라서 그 부분이 궁금해서 끝까지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ㅎ

stella.K 2024-05-03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은 생각인데 막상 읽어 본 사람들은 다들 좋다고 하더군요.
책이야 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이겠죠?
잃시찾도 그렇다고 하던데. ㅋ
근데 같은 책을 두 권이나 갖고 계시는군요.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2024-05-07 1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Falstaff 2024-05-03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그냥 좋다, 최고다. 뭐 이런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모비딕>은 말 그대로 ˝인류 문화 유산˝ 가운데에서도 앞 자리에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크게 야단맞은 이야기겠지만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창세기˝보다 더 근사합니다.

자목련 2024-05-07 10:39   좋아요 0 | URL
소설적 재미는 별개로 언급하신 <인류 문화 유산>에 동의합니다.
인간과 고래, 그 역사에 대한 어마어마한 자료 조사에 매우 놀랐어요.

잉크냄새 2024-05-03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표지 디자인이 참 인상적이네요.

자목련 2024-05-07 10:40   좋아요 0 | URL
네, 디자인을 잘 한 것 같아요^^
 


4월의 책 목록을 살펴보았다. 읽은 책, 산책, 리뷰를 쓴 책, 리뷰를 쓰지 못한 책. 모든 책들이 줄고 리뷰를 쓰지 못한 책만 늘고 있다. 좋았던 구절을 발췌하고 메모 형태로 임시 저장을 해두었다. 임시 저장은 임시 저장에 불과하다. 살아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죽었다고 할 수 없다. 생명을 불어넣어야 하는 글, 내가 보살펴야 하는 글이다.


책들에게 보살핌을 받았으니 나도 그래야 한다. 뭐 그렇다는 말이다. 5월이니 5월의 소설을 기대한다. 크리스티앙 보뱅, 그를 몰랐다면 어쩔 뻔했는가. 그의 책도 읽고 리뷰를 쓰지 못한 책에 속한다. 아무렴 상관없다. 이번엔 소설이다. 『마지막 욕망』 은 읽고 리뷰를 쓰고 싶다. 이주란의 짧은 소설 『좋아 보여서 다행』은 5월의 붉음을 닮은 표지다. 왠지 5월과 잘 어울릴 것 같다. 제목도 마음에 든다. 5월의 소설에 김이설의 장편소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도 추가될 것이다.





4월이 봄의 끝이었다면 5월은 여름의 시작이다. 5월이 봄이었던 기억은 저기 멀이 있다. 반소매 옷을 입기 시작한지 여러 날이 되었다. 송홧가루의 습격 때문에 창문을 열지 못하는 날들이다. 샛노란 가루가 멀리 퍼진다. 꽃가루가 닿는 곳, 먼 그곳에는 우리가 모르는 생명이 잉태될 준비를 할지도 모른다.


이곳의 5월은 분주할 것이다. 논에 물을 대고 모내기를 시작할 것이고 영글어가는 마늘의 마늘종을 뽑을 것이다. 그럼 나는 맛있는 마늘종 볶음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 5월에는 작약을 주문해야지. 작약을 곁에 두고 매일매일 조금씩 행복해야지. 5월에는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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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5-02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뱅 책 바로 구매했습니다 ~!!
표지가 기존 시리즈랑 좀 달라서 아쉽습니다ㅡㅡ
완전 기대중입니다 ㅋㅋ

자목련 2024-05-02 14:15   좋아요 1 | URL
표지는 저도 그랬어요^^
새파랑 님은 바로 읽으실 것 같습니다!

blanca 2024-05-0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작약이 저도 기다려집니다. ^^

자목련 2024-05-03 09:47   좋아요 0 | URL
연휴 지나고 주문하려고 합니다^^

잠자냥 2024-05-02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뱅 책 바로 받았습니다~!!
가벼운 마음도 저 표지로 바뀐 거 같더라고요?!

라파엘 2024-05-02 21:52   좋아요 0 | URL
표지의 통일성이 훼손되어서 약간 불편한 마음이 드네요. 일관성 있는 질서를 추구하는 게 저의 마지막 욕망인 것 같아요... 😅

라파엘 2024-05-02 22:17   좋아요 0 | URL
그런데, 자냥님 말씀대로 이 작품과 가벼운 마음만 새로운 표지가 적용된다면, 출판사에서 보뱅의 작품 표지를 소설과 에세이로 구분해서 출판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네요 🤔

자목련 2024-05-03 09:49   좋아요 1 | URL
어쩌면 라파엘 님의 말씀처럼 출판사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기존 표지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청혼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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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의 소설은 어렵고 재밌다. 그리고 아름답다. 제발 그 놀랍고 기발한 상상의 세계를 이해하느냐고 묻지 말기를 바란다.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사랑할 수는 있을 것 같다는 답으로 대신하겠다. 가장 최근에 만난 『미래과거시제』 가 가장 인상적이고 특별했지만 11년 만에 개정판으로 돌아온 『청혼』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어려워서 그렇기도 하고 우주를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는 가까운 미래 우리의 일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청혼』이라는 로맨틱한 제목만 생각하면 결혼해서 함께 우주여행이라도 떠나자는 내용인가 싶었다. “휴가를 받으면 한번 놀러 와.” 란 문장의 편지로 시작하는 소설이다. 장거리 연애 중이구나 싶었지 설마 우주 전쟁이 등장할 줄이야. 그랬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목성 근처 소행성대에서 궤도연합군 작전 장교로 복무 중이다. 지구 출신인 너와는 다르게 우주 출신이다. 지구와 목성 근처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거기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을까. 우주 전쟁은 상상도 못하는 지금의 나는 소설 속 연인의 연애가 얼마나 애틋할지 짐작할 수 없다.


“보고 싶었어” 하고 내가 너에게 말했을 때, “나도” 하고 네가 나에게 대답해주기까지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던 그 순간을, 나는 행복이라고 기억해. 사랑한다는 너의 말에 단 한 순간도 망설임 없이 대답해도 너에게 닿는 데 17분 44초가 걸리고 그 말에 대한 너의 대답이 돌아오는 데 또다시 17분 44초가 걸리는 지금의 이 거리를 두고 내가 가장 숨 막히는 게 뭔지 아니? 그건 대답이 돌아오기 전까지의 그 긴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갑갑함이야. (35~36쪽)


소설은 ‘나’가 ‘너’에게 전하는 우주 전쟁의 상황이라고 할까. 우주 출신이라 지구의 중력은 감당하기 힘들지만 견딜 수 있다고 믿는다. 170시간을 날아가야 너를 볼 수 있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너를 사랑하니까, 모든 건 다 괜찮다. 그러나 너와 나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너는 나를 만나러 왔다. 먼 우주를 지나 온 너에게 나는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핑계라면 적들은 우리가 어떤 대형으로 잠복하는지, 뭘 하고 있는지 몰랐는데 그들은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목표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행방을 찾아야 하는 게 나에게는 제일 큰 과제라서 너에게 소홀했다. 때가 되면 찾아오라는 쪽지를 남기고 너는 떠났다.


어쩌면 내가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이런 연애와 사랑은 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소설에 등장하는 우주 함대나 휴양선을 상상이 되지 않는다. 우주적 상상력 부재 때문일 것이다. 광활함 그 자체인 우주, 기회를 엿보고 있을 적들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 그곳을 떠날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나를 비롯한 함대의 군인들의 외로움을 나는 모른다. 알 수 없는 적만큼이나 우주 함대에 있는 동료조차 믿을 수 없다. 적은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너와 나 사이에도 오해가 쌓이는데 업무로 만난 동료는 오죽할까.


배명훈이 묘사한 우주 한가운데 홀로 남겨진 그들의 고독을 너를 포함한 다른 이들이 과연 알 수 있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주 함대와 벌이는 전쟁, 전쟁이 끝나야만 너를 만나러 지구에 갈 수 있다. 가능한 일일까? 편지와 함께 너에게 줄 반지도 준비했다. 그것을 받고 너는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반지를 끼고 나를 기다릴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이 소설을 우주의 미래, 현실적인 우주 전쟁이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우주학, 군사학, 중력렌즈, 전파 망원경의 등장으로 묘사되는 교전을 보면 그렇다. 비슷한 게임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나에겐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였다.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닿고자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멀어지는 연인의 사랑. 그 결말이 어떨지 알 것 같은 사랑 말이다. 그럼에도 우주 한복판에서 너를 향한 영원한 마음을 보낼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를 바라보며 반짝반짝 빛을 내는 별을 말이다.


반드시 돌아올 거야. 이상하지? 나 같은 우주 태생이 어딘가로 돌아올 생각을 하다니. 이제 나도 고향이 생겼어. 네가 있는 그곳에. 고마워. 그리고 안녕. 우주 저편에서 너의 별이 되어줄게. (153~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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