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나무야 -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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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선물받은 책을 꺼내어 읽는다. 비닐 안에 창호지를 넣어 책을 싼 걸로 보아 인하대학교 앞 "새벽" 서점에서 산 책 같다. 책 표지를 넘기니 선물해준 이가 쓴 글이 보인다. 그 친구는 노래패에 몸 담고 있던 친구였다. 동아리가 달랐고, 지향하는 바도 달랐다. 그런데 동기다 보니 이런 저런 일로 자주 만났고, 이유는 잊었지만 책을 선물 받았다. 24년 전 일이다. 그 사이 그 친구와는 연이 끊어져 연락이 닿지 않고, 저자인 신영복 선생도 타계했다. 


<나무야 나무야>는 선생이 남한 곳곳을 여행하고, 그 소회를 담은 글이다. 성찰과 통찰이 번득이는 글들에 밑줄을 그어 책을 읽고, 그 글들을 여기 남겨 시일이 흐른 뒤 다시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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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이야기는 물론 소설가가 그려낸 상상의 세계이며,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사실은 아니라 하더라도 '진실'임에는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사실이라는 그릇은 진실을 담아내기에는 언제나 작고 부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연쇄 가운데에다 자신을 세우기보다는 한 벌의 패션 의상과 화려한 언술로 자기를 실현하고, 또 자기를 숨기려 하는 것이 오늘의 문화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치란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조직해내고 키우는 일' 이라는 것입니다. 권력의 창출 그 자체는 잠재적 역량의 계발과 무관하거나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철폐는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일과 직접 맞물려 있다'


한 시대의 정점에 오르는 성취가 아니라, 그 시대의 아픔에 얼마만큼 다가서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생애를 읽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미륵불은 석가가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마저 구제하기 위하여 오는 부처입니다. 석가의 완성을 위하여 오는 부처이며 반드시 와야 할 부처, 당래불(當來佛)입니다... 소망의 세계마저 제도화되어버린다면 미륵은 영원히 미완인 것으로 완성되어버릴 것 같은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최후의 그린벨트가 바로 '꿈'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한마디로 미륵의 좌절로 점철된 역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은 또 다른 미완성으로 이어져 역사가 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미완은 반성이며 가능성이며 청년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그러기에 '과학'이기 때문입니다. 역경(易經) 64괘는 미완의 괘인 '미제'(未濟)괘로 끝나고 있습니다. 괘사(掛辭)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여우가 시내를 거의 다 건넜을 때 그만 꼬리를 적시고 말았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대의 가장 첨예한 모순을 향하여 서슬 푸르게 깨어 있는 정신이야말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을 가리는 가장 확실한 지표라고 생각됩니다. 


빛과 그림자, 이 둘을 동시에 승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용기이고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없는 이성은 비정한 것이 되고 이성이 없는 사랑은 몽매(夢昧)와 탐닉(耽溺)이 됩니다.


'또 하나의 손'이 짐을 들어주는 손이 아니라 손을 잡아주는 손이기를 바랍니다. 천수보살의 손이 구원의 손길이 아니라 다정한 '악수'이기를 원합니다.


자국내의 모순을 세계화를 통하여 해소하려고 하는 중심부의 그들과는 반대로 세계경제의 중하층에 편입되어 있는 우리의 경제적 위상은 그러한 모순을 내부의 희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대동강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게 내주기로 하고 이룩한 통일은 분명 더 작아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통일이 아니라 광활한 요동 벌판의 상실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어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는 비약에 있는 것...현대사회에서 평가되는 능력이란 인간적 품성이 도외시된 '경쟁적 능력'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낙오와 좌절 이후에 얻을 수 있는 것...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입니다.


금(金) 없이 권(權)이 설 수 없고 권(權) 없이 금(金)이 재생산될 수 없기 때문에 금권의 야합과 세습, 그것은 고금을 통하여 변함 없는 정치적 주제라 하였습니다. 민생(民生)과 철학은 그것의 방편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대학은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종속의 땅'이기도 하지만, 그 연쇄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가능성의 땅' 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강한 사람이란 많은 사람의 힘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며, 가장 현명한 사람이란 가장 많은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드는 사람.


금강산은 빼어나긴 하나 장중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장중하나 빼어나지 못하다고 합니다.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물 위의 배에 지나지 않는 것. 배는 모름지기 물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물을 두려워하여야 한다는 지론을 거침없이 갈파한 남명. 벼슬아치는 가죽 위에 돋은 털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는 탐관오리를 질타하였습니다. 


'오늘의 개량'에 매몰되는 급급함보다는 '내일의 건설'을 전망하는 유장함이 더 소중한 까닭은 오늘의 개량이 곧 내일의 발전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야의 요체는 독립성이라 믿습니다. '오늘'로부터의 독립이라 믿습니다.


없이 사는 사람들의 부정은 흔히 그 외형이 파렴치하고 거칠게 마련이지만 그것은 마치 맨손으로 일하는 사람의 손마디가 거친 까닭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합법적인 불법'을 저지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정작 딱한 것은 그 부분을 줌렌즈의 피사체로 잡는 세상사람들의 춘화적(春畵的) 탐닉이며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당의(糖衣)에 길들어 있는 우리들의 빈약한 의식(意識)이라고 해야 합니다.


사찰의 막강한 소유구조 위에 서 있는 무소유의 역설(逆說)은 우리를 쓸쓸하게 합니다.


저항성에는 그 저항의 근거지가 먼저 요구되는 법이며 개인의 경우 그 근거지는 바로 자기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근거지가 없는 저항성은 결국 후기모더니즘의 무정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지식과 정보는 오직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평등은 단지 '차별의 철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이야말로 '자유의 최고치(最高値)' 이기 때문입니다...'타인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평범한 양식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등은 자유의 실체이며 내용입니다. 자유는 양적 접근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일 뿐입니다.


역사란 과거로 떠나는 여정이 아니라 현재의 과제로 돌아오는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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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재다
다니엘 켈만 지음, 박계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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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년 4월 30일 독일에서 태어난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하나로 꼽힌다. 아직 말을 하기 전 어린 시절 아버지가 계산을 틀리게 하자 이를 지적했다든가, 학교에 들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1부터 100까지 더하라는 선생의 과제에 3분만에 5,050이라는 답을 말한 일화가 유명하다.(1+100, 2+99, 3+98 ... 모두 101이므로 101 x 50으로 계산)

대수학, 정수론, 해석학, 기하학, 통계학, 물리학, 천문학, 전자기학에 기여했고, 발표된 논문 외 미발표 논문들도 다른 수학자들이 평생에 걸쳐 연구한 내용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한다.

최소제곱법을 만들어 현대 통계학의 기초를 마련하고 행성 세레스의 궤도를 정확히 계산하는 등 당시로서는 다른 수학자들이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을 젊은 시절 대부분 해치웠다.

정17각형 작도, 소수 정리로 유명하고 가우스 기호, 가우스 분포, 가우스 소거법, 가우스 적분 등등 그의 이름이 들어간 정의들도 무수히 많다.


1769년 9월 14일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훔볼트는 형과 함께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광업학교에서 광물과 식물을 조사하며 학문적인 소양을 익힌 훔볼트는 봉플랑이라는 동료와 함께 남미의 미개척지 대부분을 여행하였고, 특히 오리노코 강의 곳곳을 유럽에 소개하여 유명해졌다. 또한 당시 최고봉으로 알려진 침보라소 산을 무산소 등정했다. 갖가지 독물을 직접 먹어보고, 화산 분화구에 들어가 보는 등 무엇이든 몸으로 직접 경험해보고자 한 사나이였다. 그는 찰스 다윈, 괴테 등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독일 이외의 여러 나라의 국왕이 그의 모험담을 직접 듣고자 하였다.


<세계를 재다>는 '뭐든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방랑벽의 소유자 훔볼트'와 '밤낮 책상머리에만 붙어 앉아 수학과 물리 문제를 고민하는 은둔형 천재 가우스'의 이야기를 교대로 직조하여 역사적 사실과 작가적 상상력이 교묘하게 교차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문체는 유머러스하고 상상력이 개입하는 부분은 엽기적이다. 기승전결이 없는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이 느껴지는 것은 전기와 달리 두 인물의 삶에서 흥미로운 특정 부분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문단의 평가는 꽤나 좋았는데 캉디드 상, 아데나우어 기금 문학상, 클라이스트 당, <디 벨트> 문학상을 수상했고, 독일 북셀러 선정 2005년 올해의 작가 및 올해의 책, <타임>지 선정 2006년 전 세계 10대 소설에 선정되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08198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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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다르게 - 박노해의 희망 찾기
박노해 지음 / 해냄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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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련이 몰락하고, 박노해가 잡혀가고, 대학을 입학하던 해에는 시인 김남주가 사망했다. 그런 시기에 나는 사회과학 동아리에 가입했다. 동아리방에 굴러 다니던 잡지에 기고한 백태웅의 글이 기억난다. 


소련이 무너졌기 때문에 우리 사회 모순마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존엄성을 깨닫고 변화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련이 무너진 것을 이상향이 없어져 버린 것과 같은 태도로 절망하고 좌절한다면 그것은 운동이 아니라 종교이다.


현실 사회주의권이 몰락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당시의 나는 몰랐다. 


철거촌에서 조폭이 웃통을 까고 문신을 드러낸 채 깨진 유리병으로 주민들을 겁박하던 모습. 무전기를 들고 쳐다만 보던 정보과 형사. 집에서 쫓겨나게 생겨 하염없이 울던 아주머니들. 1994년 남한의 어느 곳에서 벌건 대낮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나는 알았다. 그때는 어렸고, 그런 것들이 슬펐다. 


동아리방에서 박노해의 시 <하늘>에 곡을 노래를 부르면서 여러 번 울었던 기억, 옥중에서 출간한 시집 <참된 시작>에 <나도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짤막한 글을 읽고 어떤 일이 있어도 여자를 돈 주고 사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기억. 그런 기억들이 떠오른다.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리던 박노해는 1991년 사노맹 사건으로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 검사의 구형은 '사형' 이었다. 6년의 수배, 8년의 감옥생활. 1998년 8.15 특별 사면으로 석방된 박노해가 1999년 펴낸 책이 <오늘은 다르게>이다.


사람이 품은 사상이나 마음가짐 때문에 사형을 선고 받는다는 것, 무기징역을 산다는 것. 그것은 견디기 힘든 공포와 고통을 가져왔을 것이 틀림없다. 아무리 굳센 의지를 가진 혁명활동가라 할지라도 고문을 이겨낼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기껏해야 거짓으로 시간을 버는 것 정도가 가능할까,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육체를 정신의 그릇으로 삼고 있는 이상, 육체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하물며, 사형이다, 무기징역이다, 하는 정신에 직접 가해지는 공격에 피폐해지지 않을 사람은 또 누구이랴. 


박노해는 <오늘은 다르게>를 통해,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얘기들을 늘어 놓는다. 잘 봐줘야 한 때 운동을 했던 생태주의자 정도로 느껴진다. 그는 자신이 패배하지 않았다, 더 나은 차원의 운동을 하려는 것이다, 라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그는 패배자의 두려움을 책 곳곳에서 풍긴다. 두려움의 냄새는 잘 감지되는 법이다. 


책 속에 수록된 시 중 섬뜩한 문구가 있어 적어본다.


기억하라

앞서가는 이여

그대를 지켜보는 의혹의 시선들을

그리고 단 한 번의 실수를


진보진영에 가해지는 무자비한 공격들, 그리고 연이은 자살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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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막이 내릴 때 (저자 사인 인쇄본)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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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센다이에 사는 미야모토 야스요가 편지를 한 통 받는다. 남편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인이 자신의 가게에 취직하러 왔는데 일자리가 없어 거절했다, 사정이 안타까우니 야스요의 가게에 취직시켜주면 어떻겠느냐, 하는 내용이었다. 야스요가 당사자를 직접 보니 참해 보였고, 마침 사람도 모자란 터라 그녀를 채용한다.

여자의 이름은 다지마 유리코였고, 그녀 덕에 가게는 번창했다. 사내들은 그녀에게 끌렸다. 그렇다고 남자들에게 헤프게 구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점에 남자들이 달뜬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유리코는 16년을 일했다. 그만 둘 무렵엔 와타베 라는 이름의 남자와 좋아 지내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이상 발전은 없었다. 그만 둘 즈음 그녀는 몸이 좋지 않다고 했다.

어느 날인가, 그녀의 집을 찾아간 야스요는 그녀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경찰은 범죄 혐의점이 없어 사건을 종결시킨다. 야스요는 유리코의 유골을 와타베라면 인수해주지 않을까 해서 그를 수소문한 끝에 연락이 닿는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와타베는 유골 인수를 거부했다. 대신 며칠 말미를 달라고 하더니 유리코의 아들 주소를 알려준다. 야스요의 연락을 받은 아들이 어머니의 유골을 수습하러 온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의 사내였는데, 이름이 가가 교이치로라 했다. 

가가는 유골을 수습한 후 와타베를 만나보고 싶어했다. 어머니의 마지막 시절을 함께한 사내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하지만 와타베라는 사내는 행방이 묘연했다. 


시간이 흐른 후...


고시카와 라는 중년 사내의 집에서 오시타니 미치코라는 이름의 여성이 시체로 발견된다. 마쓰미야는 이 사건이 하천 둔치에서 살해당한 노숙자 사건과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의심한다. 의심은 곧 증명된다. 하천둔치에서 살해당한 남자의 DNA와 고시카와의 집에서 발견된 빗의 DNA가 일치했다. 


오시타니 미치코가 도쿄에 오게된 경위는 좀 복잡했다. 그녀는 직업상 요양원에 드나들었는데, 그곳에 최근 들어온 골치 아픈 노인네가 중학교 동창 아사이 히로미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노인네는 극구 아사이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래서 미치코는 연극 연출가로 성공한 아사이 히로미도 만날 겸 도쿄에 간다. 마침 그녀가 올린 연극 '이설 소네자키 동반 자살'의 첫 공연날이었다.

그런데 30년 만에 만난 동창 아사이 히로미가 들려준 이야기는 기구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중학교 때 바람이 나서 적금통장을 들고 집을 나간 뒤 연이 끊겼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투신자살했고, 결국 아사이도 시설에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이제 와서 어머니를 만날 용의는 없다는 것이다. 미치코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이상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아사이 히로미에게 경찰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마쓰미야 등의 수사는 여기서 벽에 가로 막힌다. 


마쓰미야가 답답한 마음에 사촌형 가가에게 사건과 관련한 조언을 구한다. 가가는 고시카와의 DNA 자체가 위조된 것일 수도 있다고 조언한다. 이런 저런 정보를 주고 받던 과정에서 고시카와의 집 달력에 다리에 관한 메모가 적혀 있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1월 야나기 다리, 2월 아사쿠사 다리, 3월 사에몬 다리, 4월 도키와 다리... 가가는 경악한다. 그 메모와 똑같은 메모를 어머니의 유품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가가는 언젠가 아역 배우들을 데리고 검도를 배우겠다며 찾아온 아사이 히로미를 떠올린다. 그녀는 정말 단지 검도를 배우기 위해 가가를 찾아왔을까... 가가는 어머니의 죽음 직후 사라진 사내 와타베라는 인물을 이번엔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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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날개>에서 생긴 의문이 <기도의 막이 내릴 때>를 읽으면 풀린다. 


<기린의 날개>에서 가가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않은 비정한 아들로 그려진다. 

'아내가 홀로 죽어가면서 느꼈을 쓸쓸함을 자신도 느낌으로써 속죄하겠다.'

이것이 가가 아버지의 결심이었기에 임종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가가의 어머니는 술집 출신으로 친척들에게 멸시를 당했고 이 때문에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다. 어린 가가와 함께 동반자살하려던 그녀가 정신을 차린 뒤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가출밖에 없었다. 16년의 기간 동안 그녀는 홀로 지낸 이유이다.


마지막에 좋아 지냈던 와타베는 아사이 히로미의 아버지였다. 그는 아사이 히로미와 함께 빚쟁이들에게 쫓기다 자살을 결심한다. 그런데 하필 그날 밤, 히로미가 어떤 사내를 사고로 찔러 죽인다. 히로미의 아버지 다다오는 사내와 자신의 신분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시체를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려 다다오가 투신한 것처럼 속인 뒤 살해된 남자의 신분인 원전 노동자로 전국을 떠돌며 지낸다. 

부녀는 자주 만나선 안 되었다. 그래서 매월 다리 양쪽에서 얼굴을 보며 전화를 했다. 그렇게라도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

그러다 다다오가 살인을 하게 된다. 첫번째 대상은 히로미에게 집착하던 담인 나에무라였다. 그러나 살인은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미치코가 아사이 히로미를 만나러 왔다가 자신을 알아보자 미치코까지 죽인다. 두 건의 살인 사건을 일으킨 다다오는 평생 도망치던 삶을 끝내고 싶었다. 다다오는 딸인 히로미에게 목숨을 끊어달라고 부탁한다. 히로미는 숨진 아버지를 노숙자의 숙소에 눕히고 불을 지른다. 


어쩌다 보니 <기린의 날개>와 <기도의 막이 내릴 때>를 대평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어본 것은 실용서를 제외하고는 27년 만이다. 마지막으로 읽었던 것은 인하대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읽은 무협지이다. 


가가 교이치로가 이제 연애를 할지도 모르겠다. <기린의 날개>에서 아버지의 3주기를 치뤄야 한다고 채근했던 간호사 도키코가 어머니에 얽힌 이야기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러브라인이 형성된 것이다. 또, 가가 형사가 니혼바시 경찰서를 고집했던 이유도 해소된 만큼 이제 경시청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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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사라지지 않는 달
서성란 지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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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란은 1967년 익산 출생으로 1996년 중편 <할머니의 평화>로 제3회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녀가 다루는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이주여성, 다운증후군 모녀, 발당장애 아동과 그들의 엄마 등 다소 힘겨운 처지에 놓인 경우가 많다.


<모두 다 사라지지 않는 달>은 자폐 등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와 그들의 엄마가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에서 동정의 냄새가 풍기지는 않는다. 아마도 서성란이 이들을 응원하며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 교사로 첫째 동수가 자폐아인 원희, 신체는 어른이 되었는데 정신은 여전히 어린이에 머물러 딸 정하와 엄마 영선, 어렸을 때 친하게 지냈다가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났는데 둘 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동병상련을 느끼는 순님과 유선. 

이들은 발달장애 아이를 둔 부모들이 편하게 이야기하고 쉬어갈 수 있는 '작은 씨앗 나눔터'를 매개로 아픔을 공유하고, 한 걸음 나아가 사물놀이 공연을 준비하며 아이들이 이 사회 구성원으로써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소설에서 아찔한 순간들이 몇 차례 나온다. 아이들이 갑자기 엄마 손을 놓고 차도에 뛰어든다든가, 감정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속절없이 자해를 한다든가 하는 장면은 '공감'의 감정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을 느끼게 한다. 

한 걸음 떨어져 보는 사람도 막막함을 느끼는데, 부모 심정이야 오죽하랴. 

게다가 아이들의 형제, 자매들도 자신들 몫의 애정을 온전히 받지 못해 힘들어하고, 남편들은 냉소와 자포자기에 쉽사리 빠져든다. 


발달장애는 치매와 마찬가지로 가족이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다. 오죽하면 발달장애 아이가 죽고 난 다음 날 죽었으면 싶다는 말까지 나올까. 


때로 인간은 자신이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하는 것 보다, 알고 있는 것으로 치환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 자폐에 대해서 알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 보다는, 그들이 지능이 떨어지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훨씬 편리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렇게 해왔다. 


그런데 칼리라는 소녀가 이러한 인식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통상 자폐증을 가진 사람은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한데 칼리의 경우에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하여 필담을 할 수 있었다.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고 자해를 하는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대신해서 지능이 떨어진다고 믿어졌다. 하지만 칼리는 필담을 통해 이런 인식들이 전혀 근거 없음을 이야기한다. 

자폐아들은 정보를 다른 이들보다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면 처리하기 버거워 힘들어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ABC 방송에 소개된 칼리의 이야기는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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