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다르게 - 박노해의 희망 찾기
박노해 지음 / 해냄 / 1999년 9월
평점 :
절판


소련이 몰락하고, 박노해가 잡혀가고, 대학을 입학하던 해에는 시인 김남주가 사망했다. 그런 시기에 나는 사회과학 동아리에 가입했다. 동아리방에 굴러 다니던 잡지에 기고한 백태웅의 글이 기억난다. 


소련이 무너졌기 때문에 우리 사회 모순마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존엄성을 깨닫고 변화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련이 무너진 것을 이상향이 없어져 버린 것과 같은 태도로 절망하고 좌절한다면 그것은 운동이 아니라 종교이다.


현실 사회주의권이 몰락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당시의 나는 몰랐다. 


철거촌에서 조폭이 웃통을 까고 문신을 드러낸 채 깨진 유리병으로 주민들을 겁박하던 모습. 무전기를 들고 쳐다만 보던 정보과 형사. 집에서 쫓겨나게 생겨 하염없이 울던 아주머니들. 1994년 남한의 어느 곳에서 벌건 대낮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나는 알았다. 그때는 어렸고, 그런 것들이 슬펐다. 


동아리방에서 박노해의 시 <하늘>에 곡을 노래를 부르면서 여러 번 울었던 기억, 옥중에서 출간한 시집 <참된 시작>에 <나도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짤막한 글을 읽고 어떤 일이 있어도 여자를 돈 주고 사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기억. 그런 기억들이 떠오른다.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리던 박노해는 1991년 사노맹 사건으로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 검사의 구형은 '사형' 이었다. 6년의 수배, 8년의 감옥생활. 1998년 8.15 특별 사면으로 석방된 박노해가 1999년 펴낸 책이 <오늘은 다르게>이다.


사람이 품은 사상이나 마음가짐 때문에 사형을 선고 받는다는 것, 무기징역을 산다는 것. 그것은 견디기 힘든 공포와 고통을 가져왔을 것이 틀림없다. 아무리 굳센 의지를 가진 혁명활동가라 할지라도 고문을 이겨낼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기껏해야 거짓으로 시간을 버는 것 정도가 가능할까,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육체를 정신의 그릇으로 삼고 있는 이상, 육체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하물며, 사형이다, 무기징역이다, 하는 정신에 직접 가해지는 공격에 피폐해지지 않을 사람은 또 누구이랴. 


박노해는 <오늘은 다르게>를 통해,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얘기들을 늘어 놓는다. 잘 봐줘야 한 때 운동을 했던 생태주의자 정도로 느껴진다. 그는 자신이 패배하지 않았다, 더 나은 차원의 운동을 하려는 것이다, 라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그는 패배자의 두려움을 책 곳곳에서 풍긴다. 두려움의 냄새는 잘 감지되는 법이다. 


책 속에 수록된 시 중 섬뜩한 문구가 있어 적어본다.


기억하라

앞서가는 이여

그대를 지켜보는 의혹의 시선들을

그리고 단 한 번의 실수를


진보진영에 가해지는 무자비한 공격들, 그리고 연이은 자살들이 떠올랐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0743930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