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심벌 1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버트 랭던이 등장하는 세 번째 음모/추리 소설로, 작품을 관통하는 음모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프리메이슨이 미국 워싱턴 D.C. 지하에 보물을 숨겨두었는데, 그 보물의 위치는 피라미드의 심벌론을 해독해야 알 수 있다. 보물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알 수는 없으나, 발견자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한다는 것은 틀림 없다"


로버트 랭던은 위와 같은 음모는 말이 전달되면서 곡해된 것이라 치부하던 부류였다. 하지만 친구이자 프리메이슨의 고위 단원인 솔로몬의 잘려나간 손목이 국회의사당에서 발견되고, 그 사건에 CIA 보안실이 뛰어 들면서, '문제의 보물'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각종 상징들을 해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이면에는 온몸에 문신을 하고 자신의 성(性)을 스스로 거세해버린 말라크라는 수수께끼의 괴물이 있다. 처음에는 단지 프리메이슨의 보물에 미친 광신자인줄 알았으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그가 솔로몬의 집에 침입해 솔로몬의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게다가 지금은 솔로몬의 여동생 캐서린의 목숨마저 노리고 있다.


미국의 심장부에 숨겨져 있다는 프리메이슨 보물의 실체는 무엇이고, 수수께끼의 악마 말라크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난 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해운대 해수욕장이 바로 건너다 보이는 수련원을 빌려 밤마다 에어컨 바람을 쐬가며 읽었다. 


음모론은 진실의 이면에 있을 법한 가공의 사실에 그럴싸한 상상력을 덧붙여 만들어낸 이야기이므로 음모론 자체에는 전혀 모순됨이 없다. 모순된 부분은 생성되는 과정에서 매끄럽게 다듬어지거나, 혹은 생략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실을 잘 모르는데 음모론부터 접하면 음모론의 충격적인 내용과 완벽한 논리에 빠져들어 깜빡 진실로 오인하고 만다. 그런데 이런 음모론의 성격 때문에 음모 소설은 독자와 정당한 게임을 하지 않는다는 약점을 갖게 되고,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를 갖추기 힘들다.

하지만 댄 브라운은 <천사와 악마>, <다빈치 코드>에서 너무나 그럴싸한 음모론을 제시하기 때문에 독자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헤깔리게 되고, 깔끔한 마무리로 소설이 끝나기 때문에 음모론의 진위 여부를 떠나 지적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번 <로스트 심벌>은 밑밥은 잔뜩 깔아놓고 기껏 송사리 낚는 수준의 결말을 제시하는 바람에 김빠진 콜라 같은 소설이 되고 말았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10655048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너럴 루주의 개선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3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도조대학병원의 오렌지 신관 1층은 구명구급센터로 이곳의 책임자는 하야미 부장이다. 그는 ICU(집중치료실)을 관리하며 '제너럴 루주'로 불렸다. 그가 이런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과거 큰 화재가 일어났을 때 아직 경험이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병원 전체의 통솔권을 틀어쥐고 수많은 사상자들을 일사분란하게 치료해 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개선장군 같았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안색이 창백해 보이면 환자와 병원 스탭들이 동요할 것이라 생각해 하야미가 입술에 립스틱을 칠한 것이 제너럴 뒤에 '루주'가 붙은 이유이다.

그런 하야미에 관한 투서가 리스크 매니지먼트 위원회에 날아든다. 내용은 그가 특정 회사와 유착관계를 맺고 부정한 금전을 취득하고 있으며, 간호사도 한 패라는 내용이었다. 리스크 매니지먼트 위원장이자 부정수소외래(특별한 원인이 발견되지 않는 사소한 증세의 외래 환자를 돌보는 진료) 센터를 맡고 있는 다구치는 고민에 빠지고 만다. 하야미의 성품을 알기에 그가 이유없이 유착관계를 맺지 않았을 것이 뻔했고, 대학 때 부터 친한 그를 조사하는 것이 껄끄러웠던 것이다.

너구리 같은 병원장은 다구치에게 에식스 위원회와 상의하라며 한 발 물러나 버리고, 에식스 위원회는 지난 번 <바티스타 팀> 사건으로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분풀이를 하기 위해 하야미를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유착관계에서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푼도 쓰지 않고 모두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썼다는 히라토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심각한 윤리 위반이라는 에식스 위원회.

다구치가 하야미를 방어하기 위해 에식스 위원회 공격을 간신히 무력화시키던 그 때, 홀연 응원군이 나타난다. 바로 후생성의 시라토리. 게다가 이번엔 얼음공주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실수가 잦은 의문의 간호사(사실은 의사) 히메미야까지 대동하고 나타났다.


2007년 추석 때 당직을 섰다. 지금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편의점에서도 책을 팔았다. 지금은 세븐 일레븐으로 통합된 바이더웨이에서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을 사서 한나절 시간을 잘 보냈는데, 10년여가 지나서 그 후속편을 읽는다.

작가 가이도 다케루는 1961년 생으로 현직 외과의사였는데 틈틈히 쓴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이 덜컥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상을 수상하자 곧 작가 활동과 본업을 병행하기 위해 병리의로 전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직 의사답게 각종 병과 처치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사실적이고, 특히 병원 시스템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 다툼에 대해 미시적인 분석까지 곁들이므로 메디컬 미스터리 분야에서 독보적인 작가이다. 단점은 읽다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상황을 너무 남발한다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퀴벌레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태국 방콕의 사창가에서 주태국 노르웨이 대사 아틀레 몰네스가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대사는 샛노란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등 한가운데는 손잡이가 푸른색 유리로 장식된 칼이 꼽혀 있었다. 노르웨이 외무부 국장 닥핀 토르후스는 해리 홀레를 태국으로 파견해 달라고 경찰에 요청한다. 사안이 민감하기 때문에 팀을 꾸려선 안되고, 해리 혼자만 수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토르후스의 주장에 경찰도 이의가 없었다.

한창 알콜 중독에 빠져 정신 못차리던 홀레가 약간의 마찰을 빚은 끝에 태국으로 파견되고, 그곳에서 현지 경찰들과 팀을 꾸린다. 큰 체구에, 대머리이며, 미국인 혼혈 리즈 크럼리 경위와 그녀의 팀원들이 해리를 돕는다.

해리는 여러가지 의문사항을 조사하지만 각각의 사실들이 하나의 일관된 줄거리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첫째, 대사의 가방에서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성적 남용을 당하는 사진이 발견된다. 그는 소아성애자였을까? 하지만 대사의 딸 루나에 따르면 대사는 동성애자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대사는 누군가를 협박하기 위해 그 사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둘째, 대사가 타고다니던 차량에서 약을 담았던 것으로 보이는 캡슐이 발견된다. 현지 경찰은 엑스터시인 것 같다고 말하지만 해리는 그것이 천식약임을 알아본다. 대사관저에서 미모의 비서 아오가 천식약을 먹는 것을 본 해리는 대사와 그녀의 관계를 의심한다. 하지만 그녀는 산펫이라는 늙은 운전기사와 불륜관계였다.


셋째, 대사의 등 한복판에 꼽힌 칼은 보통 버마쪽에서 두 자루 한 쌍으로 만들어지는 칼인데 칼날에서 순록 기름이 검출된다. 범인은 노르웨이 인일 수도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었다.


넷째, 산펫에 따르면 대사는 최근 경마도박으로 10만 달러를 잃었고, 빚에 쪼들려 사채업자를 찾아갔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사의 집안은 막대한 부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왜 대사는 겨우 10만달러를 해결하지 못해서 쩔쩔 맸을까? 그리고 사채업자를 찾아가자 다짜고짜 폭력을 행사하는 거구의 중국인 우의 정체는 무엇일까?


산발전으로 제기되는 단서들을 추적하던 해리는 바클레이스 타일랜드 지사의 유능한 중개인 옌스 브레케의 진술이 주차장 CCTV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는 대사의 부인 힐데 몰네스와 불륜관계였기 때문에 동기도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얼마 뒤, 주차장을 관리하던 짐 러브라는 사내가 살해당하고, CCTV가 조작되었음이 밝혀져 옌스 브레케는 혐의를 벗는다. 그리고 새로이 등장한 용의자는 오베 클리프라 라는 노르웨이 출신 건설업자였다.

어린아이를 성적으로 남용하는 사진의 주인이 오베 클리프라일수도 있다는 많은 증거들이 나오고, 한쌍으로 제조된 칼의 나머지 하나가 그의 집에서 발견된다. 그 시점에 루나가 납치되고, 부랴부랴 오베 클리프라의 은신처를 찾아간 해리는 너무 늦었음을 깨닫는다. 루나는 납치된 직후 살해된 것 같았고, 오베 클리프라의 머리에도 총알 구멍이 나 있었다.

오베 클리프라가 경찰의 포위망이 조여오자 자살한 것으로 결론나려는 찰나, 해리는 오베의 손이 루나의 머리카락 밑에 있음을 발견한다.


------


<바퀴벌레>는 해리 홀레 시리즈의 두번째 소설로, 우리나라에는 2016년에 소개되었지만 노르웨이에서 발표된 해는 1998년이다. 해리 홀레가 알콜 중독으로 정신 못 차리고 있고, 비아르네 묄레르는 이제 막 PAS(경찰간부)로 승진했다.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레이먼드 챈들러나 더실 해밋 풍의 하드보일드 색채를 띠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수수께끼 풀이의 정교함이 오히려 묻히는 분위기다. 소설 중반부터 꾸준히 복선을 깔고 논리구조를 쌓아가다가 마지막에 빵 터뜨리며 한바탕 카타르시스를 맛보여줘도 될 법 하건만, 해리는 너무나 과묵하고 스타일리쉬하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추리한 바를 중간중간 독자에게 얘기해주지도 않고 꿍하니 안고만 있다가 맨 나중에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는 식으로 풀어내니, 독자 입장에서는 '어... 이런 얘기가 있었던가?' 하며 앞장을 뒤적이게 된다. 아직 작가의 초기작이라서 다소 거친 면이 느껴진다.

 

소설의 범인은 동기가 제일 많은 사람이고,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이는 곳도 범인을 감추는 부분이다.


집에 에어컨이 없어 푹푹 찐다. 북유럽 소설을 읽으면 잠시나마 한기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젠장, 소설의 배경이 태국이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읽었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10544958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96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김형경 외 / 현대문학 / 1996년 9월
평점 :
품절


김형경의 <세상의 둥근 지붕>이 제일 처음 수록되어 있다. 주인공 승주는 결혼 뒤 두 번 유산을 한다.  언청이가 되는 유전 내력 때문에 고통을 겪던 어머니는 승주가 어렸을 때 집을 나갔고, 그런 아픔과 두려움 때문에 승주가 유산을 하는지도 몰랐다. 남편은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타입이었고, 곧 '생산하지 못하는 승주'에게 별거를 통보한다. 그러다 기찻간에서 어머니 또래의 비구니를 만난다. 승주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짧은 이야기를 통해 김형성은 여성성과 모성성에 대한 낡은 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배수아의 <검은 저녁 하얀 버스>는 역시나 파격적이고 당돌하다. 작가의 문체는 어딘지 모르게 번역투를 띤다. 등장인물들도 <사촌>, <사촌의 오빠>, <사촌이 좋아하는 여자아이>, <사촌의 오빠의 여자친구>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촌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으로 연관되고 싶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일까? 이 작품에서도 배수아의 예민한 감수성은 돋보이지만, 작가의 소설은 다소 엽기적인 줄거리와 만날 때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성석제의 <이른 봄>은 야성성을 버린 대신 장수한 장끼가 젊고 매력적인 까투리를 만나는 내용이다. 성석제 특유의 해학은 있지만, 내용은 다소 상투적이다.

송하춘의 <갈퀴 나무꾼들>은 안정된 삶을 누리는 중년 남성 진백이 외도의 백일몽을 꾸는 내용인데, 작가가 이야기를 엮어 가는 솜씨가 능수능란하여 속된 느낌이 없는 담백한 작품이다.

신경숙의 <마당에 관한 짦은 얘기>는 20년 전 감수성이 예민할 때 읽었던 터라 감회가 남다르다. 소설속 짧은 문장 하나가 당시에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생이 송두리채 비껴가고 있어도 저 또한 한쪽으로 비껴서서 신발로 땅바닥이나 콕콕 찧고 있겠지.


그땐 왜 저 문장이 그렇게도 쓸쓸하게 느껴졌는지...


윤대녕의 <상춘곡>은 2017년에 읽기엔 불편하다. 여성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저열함이 느껴지고, 과장된 욕심 때문에 전체적인 줄거리가 작위적이다. 그리고, 전두환을 "단군이래 5,000년 만에 만나는 미소"로 칭송한 미당이 그의 문학적 스승인 듯 해서 뒷맛이 좋지 못하다.

이동하의 <젖은 옷을 말리다>는 예전에 읽었던 소설인데, 이동하가 훌륭한 소설가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비가오는 날,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의 묘를 이장하는 내용인데 주의깊게 읽어보면 작가가 이야기 뒤에 숨겨 놓은 것들의 무게가 보통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역사와 운명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대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왠지 긴 소설을 읽었다는 착각이 든다.

이한음의 <대화>는 사뭇 재기발랄하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로 추정되는 인물이 상대편을 이기기 위해 계략을 짜고 음모를 꾸미는 설정도 재밌고, 알레고리 수법으로 90년대 중반을 포착한 솜씨도 훌륭하다. 다소 생소한 이름이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현재는 주로 과학서적 번역하는 일에 몰두하고 소설은 쓰지 않는 듯 하다.

이혜경의 <불의 전차>는 무척 순진한 소설이다. 주인공은 과거 선생을 하다 관두고 남편 뒷바라지에 전념하다 한 기업이 주최한 백일장에 글을 내서 당선된다. 이를 보고 예전 제자가 찾아온다. 제자는 정신없이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했다. 주인공은 제자를 보면서 남편 생각을 하고, 생존경쟁에 휩쓸려 헉헉대는 그들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런 내용인데, 다분히 고리타분한 공자님 말씀이 쓰여 있다.

최수철의 <어둠의 후광>은 어느 날 주인공이 사람들의 머리 뒤쪽에서 아우라를 보는 이야기이다. 이렇다할 줄거리는 없고, 마지막에 주인공이 태양을 보면서 인간 존재들 사이에 후광이란 무엇인지 깨닫는다. 작가는 우울하고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인간 존재가 느끼는 답답함을 장인의 솜씨로 빚어 내는데, 읽는 과정이 매우 고통스럽다. 작가 역시 고통스럽게 글을 썼음이 느껴진다. 좋은 작품이긴 하지만 선뜻 손이 안가는 작가이다.

하성란의 <두 개의 다우징>은 신인다운 신선함은 느껴지는데 다소 산만한 것이 흠이다. 다우징은 수맥이나 광맥을 찾을 때 쓰는 막대기이다. 바람핀 아버지를 찾으러 갔다 만난 이복 언니, 있지도 않은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준다며 22층 창밖으로 밥풀과 고기조각을 던져대는 엄마, 치통을 앓는 주인공이 감각적 필치로 그려져 있다.

함정임의 <바다로>는 빠다냄새 물씬 풍기는 소설이다. 폴 발레리, 그가 묻힌 세트, 동성애자인데도 청혼을 했다가 도망가는 옛 남자친구. 이런 소설이 나는 싫다.


김형경의 <세상의 둥근 지붕>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사람들이 대체로 과거를 그리면서, 그 시절 그때를 이야기하면서 사는 이유를 승주는 이제 알 것 같다. 모든 과거에, 모든 인간들은 현재보다 조금 더 젊었던 것이다. 조금 더 힘이 있었고, 조금 더 많은 문 앞에 서 있었고, 조금 더 순수했다.


과거를 추억하는 것은 그 시절의 '나'를 욕망하는 것이니, 김형경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96년에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바보'에 불과했지만, 순수하긴 했던 것 같다. 대학교 3학년이던 그 해에 나는 <Pearl Jam>과 <일기예보>의 테이프를 늘어질 때까지 듣다가 영장이 나오자 군대에 갔고, 재검판정을 받는 바람에 시골집에 머물면서 기독병원을 주 1회 들락거렸다. 의대를 유급당한 친구가 있어서 매일 함께 오락실에 가서 <사무라이 쇼다운>을 했고, 밤까지 하릴없이 어슬렁 거리다 해가 뜰 때 쯤이면 우리집에 가서 낄낄대다 잠이 들곤 했다. 이야기 7.1 프로그램으로 통신도 했던 것 같고,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 청소부>에 보라색 형광펜을 칠해가며 읽던 기억도 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비생산적인 시기였다. 팀원이 한 명 빠져서 일이 많다. 그래서 96년이 떠올랐나 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10493508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리 퀴리의 지독한 사랑
페르 올로프 엔크비스트 지음, 임정희 옮김 / 노블마인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의 목록에 오른 책이라 흥미가 동했기 때문이다. 한 때 어떤 책을 읽어야 할 지 몰라 갈팡질팡 했었고, 1001권의 목록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이 책도 2011년에 사서 고이 모셔두었던 터다. 그리고, 1001권의 목록에 올라있는 책들 중 실망한 두 번째 책이 되었다.(첫번째 실망한 책은 미셸 우엘벡의 <투쟁 영역의 확장>이었다)


내용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마리 퀴리, 그리고 그녀의 친구이자 조수 블랑슈 비트만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두는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이야기한 "Amor Omnia Vincit,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한다" 라는 말로 시작되며, 작가는 시종일관 이 책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임을 독자에게 상기시킨다. 그 사랑이야기가 명확하지도 않고 일반적이지도 않지만, 사실관계만 놓고 본다면 다음과 같다.

마리 퀴리는 남편 피에르가 죽고난 뒤, 네 아이의 아버지이자 유부남인  폴 랑주뱅과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 관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들통나고, 폴 랑주뱅은 마리를 배신하며, 언론은 마리 퀴리를 부도덕한 창녀로 몰아간다.

한편, 블랑슈 비트만은 히스테리 환자이자 영매로 전설적인 신경과 의사 장 마르탱 샤르코의 병원에 입원해 히스테리와 관련된 실연에 참여하며 유명해진 여자다. 샤르코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블랑슈 비트만에 대해 경외에 가까운 동경을 품고, 블랑슈 비트만은 그런 샤르코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게 한 채 애를 태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이야기되는 사랑은 관념과 사변의 세계에서 둥둥 떠다니느라 도무지 시작과 끝이 불분명하고, 애틋함도 없다. 게다가 사실관계만 놓고 본다면 그저 한차례 불륜에 불과한 관계였는데 편지가 언론에 공개되는 바람에 창피만 톡톡히 당했거나(마리 퀴리와 폴 랑주뱅), 이렇다할 정신적 육체적 교감도 없이 마조히즘을 연상시키는 묘한 관계 속에서 십여년 이상을 질질 끌어온 관계(블랑슈 비트만과 샤르코의 관계) 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작가는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한다' 고 중언부언해댄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극복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리 퀴리는 배신한 남자와 언론을 피해 도망치고, 블랑슈 비트만은 끝내 사기꾼과 진짜의 모호한 경계에서 배회할 뿐이다. 게다가 소설 속 화자는 가끔 '나' 라고 지칭하며 1인칭 시점을 제시하면서 3인칭 시점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도대체 소설 속 '나' 가 누구란 말인가?-, 역자 임정희는 분명 독일어 전공자인데 스웨덴 소설을 번역해내는 기염을 토하며 전문 번역가라고 프로필에 올려 놓았다.(독일어 번역본을 재번역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본래의 의미가 훼손되었을 것이라는 강한 의구심이 드는 문장은 소설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가 있다)


먼저 작가가 얼마나 비맞은 중처럼 웅얼거리는지 보자.


그 당시 샤르코는 알아차려야 했다. '난 절대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거에요'라는 말의 뜻을. 사랑의 본질은 이런 식으로 기술될 수밖에 없는데도 마리를 구하기 위해 내가 쓴 모든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더 나가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275p)


곰곰히 읽어봐도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샤르코가 죽음을 앞두고 블랑슈 비트만에게 울면서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야기하자 블랑슈 비트만이 "난 절대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거에요"라고 말한 뒤 이어지는 문장이다.

첫 문장은 사랑한다는 말을 '절대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식으로 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정도의 의미인 것 같기는 한데, 알아차려야 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또, 뜬금없이 '마리를 구하기 위해 내가 쓴 모든 이야기'는 또 무슨 말인가? (마리 퀴리에 대한 이야기는 몇 페이지를 앞 뒤로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더 나가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인가. 도무지 맥락도 없고 이유도 없는 문장들이 300페이지에 걸쳐 적혀 있다.


게다가 역자는 기본적인 한국어 문장 자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함에 분명한데,


금지된 열정과, 죄악의 가장 내밀한 동기이자 위협적인 종착역인 유혹을 창조하는 여자에 대한 경건주의의 고착의 산물인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어린아이들은, 이 순진한 어린아이들은 초원이나 숲 속, 눈밭에 작게 무리지어 누워서 옷을 입은 채로 토끼들이 우글거리며 교배할 때 보인 일상의 경련성 동작들을 따라했다.


해석 불가다. 도대체 꾸미는 대상이 무엇인지 수수께끼를 내는 문장 같다. 결국 꾸역꾸역 끝까지 읽긴 했으나 한숨만 나오는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