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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젊었을 적부터 진보적 성향을 견지하며 시 외엔 손 대지 않은 이적요. 그가 일흔이 다 된 나이에 제자라 할 수 있는 서지우 이름으로 세 권의 소설을 발표한다. 평단은 환호했고, 장르 소설 공모에서는 5천만원 상금까지 받았다. 장난스럽게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은교라는 아이가 자신의 집 데크에서 잠이 든 모습을 본 시인의 내부에서 어떤 감정이 생겨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 감정이 사랑인지, 갈망인지, 아니면 노욕이나 권력욕인지 명확치 않았다. 확실한 것은 은교가 없었다면 자신의 의발을 물려주려 했던 서지우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2인자 또는 연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은교가 이적요 시인이 젊었을 적 추구했던 가치의 현현, 또는 뮤즈가 되어 번뇌의 씨앗이 된 탓이었다.
서지우와 은교가 이미 성적으로 맺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이적요의 번뇌가 깊어간다. 자신의 지난 삶이 재조명 되고 평가되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이적요는 허위를 벗어 던지고 하나의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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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라이터에 관한 가장 유명한 예는 로맹 가리가 필명 에밀 아자르로 발표한 소설 <자기 앞의 생>으로 콩쿠르 상을 탄 사건일 것이다. 평론가들은 신예 에밀 아자르를 치켜세우는 한편, 로맹 가리가 활기를 잃고 진부한 소설만 쓴다고 비판했다. 로맹 가리는 유서에 자신이 에밀 아자르였음을 밝힌다. 이로써 한 사람에 두 번 주어지지 않는다는 콩쿠르 상을 로맹 가리는 두 번 탔다.
로맹 가리 만큼 유명한 사건은 아니지만 스티븐 킹도 리처드 바크먼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해 결과적으로 평단을 조롱한 적이 있다. 스티븐 킹을 대중작가라 비판하던 평론가들이 리처드 바크먼은 극찬했다. 한 서점 직원이 우연히 둘이 동일 인물이 아니냐고 의심했고, 스티븐 킹이 이를 인정하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 양태는 로맹 가리와 비슷했다.
인간의 또 다른 삶에 대한 욕구와 갈망. 그 영원성과 일회성, 그 무거움과 가벼움은 이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밀도 깊게 다뤄진 주제다. 여기 있고 싶지 않은 욕망, 다른 것이고 싶은 갈망은 스스로를 조롱거리로 내던지는 위험을 수반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그 환상에 몸을 내던진다.
이적요가 자신의 소설을 서지우를 통해 발표한 것은 시가 소설보다 우월한 장르라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소설 작품들이 잊히는 것 보다는 서지우의 이름으로라도 각광 받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그것은 '참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은교라는 존재가 나타나자 허위의 장막이 벗겨지며 게임의 룰이 바뀐다. 이적요는 젊은 시절을 진보적인 가치에 헌신하고 시라는 장르에 천착한 결과 '은교'라는 대상물을 획득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고 느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서지우라는, 자신이 그 지위를 부여해준 후계자가 '은교'를 차지하는 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단순한 질투와는 또 다른 감정이다.
이스마엘 카다레의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에서 2인자를 제거하는 권력자, 장정일의 <중국에서 온 편지> 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진시황의 이야기가 이제 이적요의 서지우 제거 이야기로 다시 변주된다.
소설을 물려주고 시혜를 베푸는 아름다운 의발 전수 스토리가 치정극으로 돌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러므로 사랑과 치정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한편 은교는 이적요의 내밀한 욕망을 자극하 뮤즈와 같은 존재이므로 지고지순한 이미지여야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에서 험버트 험버트가 상상하는 님프 이미지는 머릿 속에서나 존재할 뿐 실제 롤리타는 님프가 아닐 뿐 아니라 저열한 작가와 눈이 맞아 험버트 험버트를 배신하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흔한 여자였을 뿐이었다. 어쩌면 은교는 <돈키호테>의 둘시네아 같은 존재는 아니었을까...
문제는 이적요의 잔여수명이 길지 않다는 데 있다. 이제 와서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욕망과 갈망의 나선계단에서 내려올 수 있을까... 그냥 그 굴레에서 스스로를 속여가며 연극을 계속하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을까? 젊은 후계자, 젊은 아들들을 저주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헌신해 겨우 얻은 것들을 카페 안의 저들이 독점하고 있다고 나는 새삼 느꼈다. 화가 났다. 달려내려가 희희낙락하는 저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너희가 지금 누리는 달콤한 인생을 누가 주었냐고,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고, 마음대로 너희들만 누릴 권리는...없다고.(135p)
죽음을 앞두고 이적요는 롤리타와 같은 존재 하나를 '뒤늦게 발견'했다. 발견이 늦은 이유는 이미 사그러졌다고 생각했던 정념이 새로이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손에 쥔 금덩이가 사실은 도금된 것에 불과하다고 인정한 뒤, 왕좌에서 내려와 덜 떨어진 후계자의 즉위식을 봐야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지옥이다.
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203p)
그것은 고요한 욕망이었다. 한없이 빼앗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내 것을 해체해 오로지 주고 싶은 욕망이었다. 아니 욕망이 아니라 사랑, 이라고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비로소, 욕망이 사랑을 언제나 이기는 건 아니라는 확고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311p)
그러므로 이적요의 이와 같은 고백이 진실한 내면의 소리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 독백인지는 모를 일이다. 마침내 이적요는 자신의 후계자, 자신의 아들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결행한다. 이적요는 임종할 때까지 서지우를 죽였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될 말인가. 진시황은 불멸하지 못했고, 후계자를 제거한 독재자는 제1의 후계자를 제거했을 뿐이다. 지금 내가 이룩한 모든 것은 다음 세대가 손쉽게 차지하고, 아름답고 어린 뮤즈는 성적 불능에 이른 이적요가 아니라 서지우의 차지가 될 뿐이다. 과거의 왕이 가진 왕관의 힘은 현재의 거렁뱅이가 가진 동냥그릇만큼의 힘도 없는 것이다.
이적요의 다음과 같은 음울한 고백이야말로 '노인을 위한 나라'의 새로운 고백송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세상이라고, 시대라고, 역사라고 불렀던 것들이 사실은 직관의 감옥에 불과했단는 것을, 시의 감옥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시들은 대부분 가짜였다.(394p)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남성 이적요와 서지우의 착각은 은교가 어느 누구의 의미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은교를 의미 짓고, 재단하고, 머릿속으로나마 소유하고 내돌렸지만 은교의 본질에 접근한 적이 없다. 작품 속에서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몸 파는 여자의 대사가 떠오른다. "남자들, 불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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