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용의자
찬호께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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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1세의 무직 남성이 사망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구조대원은 숯이 피워진 그릇, 외부 침입 흔적이 없는 점 등을 근거로 남성의 사인을 자살로 결론 짓는다.

하지만 철수 직전, 옷장에서 크기가 제각각인 원통형 유리병 스무개 남짓이 발견되면서 사건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유리병 안에 인간의 팔다리와 장기가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피해자는 최소 2명. 남성과 여성으로 추측되는 두 시신은 보존된 시기가 달라 보였다. 문제는 셰바이천이라는 이 남성이 20년간 화장실 딸린 방 안에서만 생활한 극단적 은둔형 외톨이라는 데 있었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옆집 사는 30년지기 친구이자 추리소설가인 칸즈위안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과연 시신은 누구인가? 셰바이천은 이들을 죽인 범인일까? 만약 그렇다면 동기가 무엇일까? 경찰의 집요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실마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게다가 유력한 용의자로 점찍었던 칸즈위안의 알리바이가 확실해지자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지고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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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린궈원(람궈완)이라는 택시운전기사가 경찰에 체포된다. 죄명은 연쇄살인. 택시운전사였던 그는 4명의 여성을 납치하여 강간 살해하였고, 이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하거나 사진 찍어 현상하였으며, 성기 일부를 플라스틱 용기에 담고 술에 절여 보관하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벌인 인물이다.

그가 체포된 것은 어이 없게도 사진 현상을 맡겼다 들통 났기 때문이다. 친구가 운영하는 현상소에 필름을 맡겼는데 공교롭게 기계가 고장나는 바람에 친구가 다른 현상소에 필름을 건냈고, 현상과정에서 기괴한 범죄 현장을 본 직원이 경찰에 신고하여 검거된 것이다. '유리병 살인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이 <고독한 용의자>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이다.

20년 전 쉐바이천은 불치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절친 칸즈위안에게 자신이 죽은 뒤 그 사실을 숨겨 달라고 부탁한다. 외할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맨션을 호시탐탐 노리는 외삼촌이 자신이 죽게되면 어머니를 꼬드겨 소유권을 빼앗아갈 것이 틀림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리병에 든 첫 번째 시신은 쉐바이천이다. 칸즈위안은 쉐바이천이 죽기 직전 일상 생활에서 주고 받을 만한 대화들을 녹음기에 녹음한 뒤 쉐바이천이 퇴사 스트레스로 은둔형 외톨이가 된 것처럼 설정하고 쉐바이천이 죽은 뒤에도 그의 어머니를 속이기 시작한다.

한편, 칸즈위안은 과거 불 난 건물에서 '더듬이'라는 별명의 친구 아위안이 도와준 덕에 목숨을 건진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사고로 '더듬이'는 아버지를 잃었고, 갈 곳 없게 된 '더듬이'는 칸즈위안의 집에서 얹혀 살게 되었다.

그러다 쉐바이천이 죽자 '더듬이'가 쉐바이천 역할을 하면서 그 방에 살게 된다. 진짜 은둔형 외톨이는 '더듬이'였다. 그러다 '더듬이'가 궈쯔닝이라는 여성과 웹상에서 친구가 된 뒤 서로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는데, 궈쯔닝이 쉐바이천의 집에 왔다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궈쯔닝은 쉐바이천의 외삼촌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다 이를 비관한 것이었다. 궈쯔닝이 바로 두번째 유리병의 시신이었다.

찬호께이는 만약 쉐바이천이 20년간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면 범죄도 저지를 수 없다는 대전제를 독자에게 제시한 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내면서 전제를 깨나가는 방식으로 소설을 진행시킨다. 이 수법은 때로 절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무리한 방식으로 여겨진다.

쉐바이천 역할을 하던 '더듬이'가 자살하고 시신이 담긴 유리병이 발견되면서 자살사건은 살인사건으로 방향 전환된 뒤 모든 증거들이 쉐바이천의 외삼촌을 향한다. 이 과정에서 서술 트릭, 바꿔치기, 시점전환 등 미스터리 소설의 각종 기법이 현란하게 구사되는데 기술적 측면에서는 훌륭하다. 하지만 20년을 못 봤다 해도 '아들을 구별 못하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과연 독자에게 얼마나 어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13.67>이 그의 전성기이고 이후 죽 내리막이 아닌가 싶은 불안감이 이번 작품에서도 확인된 느낌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073983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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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문학과지성 시인선 230
진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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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규는 1945년 전북 고창 출생으로 국어 교사와 미술 교사를 했으며 시인이자 화가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은 그가 살고 있는 전주 지방 풍경과 견훤, 이성계, 정몽주 등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 동학 혁명과 광주민주화항쟁, 정여립의 난 등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감상, 그리고 꽃과 별, 눈과 산 등 자연에 관한 완상을 노래한 시집이다.

1부에서 백제 장수 견훤에 대해 노래하는데 <눈썹 끝에 연꽃 피는 - 덕진채련> 에서

젊은 장수 견훤은 반월성 짓고 눈 눈 지그시 앉아 눈썹 끝자리쯤 해서 연못을 팠습니다.... 아마도 무왕 대에 현신하지 않은 미륵을 당신은 꼭 보리라 믿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하는 것을 보면 사뭇 흠모의 정이 느껴진다. 실패했지만 그의 의지는 미륵세상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까지 평가하는 것을 보면...

한편, 이성계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깎아 내리는데 <좁은목 약수를 마십니다 - 한벽청연>에서

도조인지 익조인이 환조인지, 아무튼 이태조 웃할아버지는 소싯적 전주천 한벽당 돌아 병풍바위 밑에 소낙비를 피하다가 그 바위 무너지는 순간에 빠져나와 목숨을 구했답니다. 저고리도 벗어던지고 빠져나왔습니다만, 피하지 못한 동네 아이들은 그 자리에 다 죽고 말았답니다

라며 동네 사람들이 약숫물이라며 줄을 서서 떠다 마시는 좁은목에 대해 연관된 고사를 들먹이며 빈정댄다. 기막힌 운을 타고 나서 너는 살아남았을지 몰라도 그때 아이들은 죄다 깔려 죽었는데 거기 솟아나는 약수가 한을 품지 않았겠느냐 하는 으스스함마저 느껴진다.

시인은 그림도 그리는데 그러한 시각적 정서와 청각적 요소가 시에 담겨 즐거움을 준다.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솔 꽃가루 쌓인

토방 마루

소쩍새 울음 몇

몸 부리고 앉아

피먹진 소절을 널어

말립니다

산 발치에서는 한바탕

보춘화 꽃대궁 어지럽더니

진달래 철쭉 몸 사르더니

골짝 골짝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쌓인 송홧가루

밭은기침을 합니다.

<가을 도드리 2>

하늘과 땅 사이를

기차 하나가 지납니다

누런 들과

푸른 하늘을 가릅니다

세상은 미완성의 수채화

첫사랑의 뒷모습 같은

머플러 한 장 나부끼며

기차 하나

그림 속을 갑니다.

겨울산에서 하산하면서 완상에 잠기는 시인의 모습을 그린 <겨울산 어둠은>도 반복해서 읽게 된다.

<겨울산 어둠은>

산을 내리는 우리 걸음보다

몇 발 앞서 명명한 어둠이 갔다

뒤돌아보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못 들은 척하는 것인가?

멈칫거리는가 다시 보면

저만큼 가고 있었다

내리막을 거침없이 훑다가도

농부들이 흘리고 간 것들까지

무엇하나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골짜기의 마른 고춧대, 무명대

꺾인 억새 잎에도

북 장단 두어 번 잊지 않고

매김하고 갔다

마른 싸릿가지 꺾인 채로

어둠 속을 버티어 있는 것을 보고는

봉우리에 첫눈 내리던 날

자작나무 늘어서서

휘파람 불던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산비탈에 누운 고사목 고자빠기

'라'음으로 마른기침을 했다

아득히 산 너머

눈 소식이 오고 있었다.

팬지꽃은 80년 5월 광주 시가지에 피었던 꽃이다. 시인이 전주가 아닌 광주를 노래한 시 세 편이 있다. 그중 한 편을 옮겨 적어본다.

<팬지꽃 1>

광주에 가면

서성거리는 사람을 만난다

충장로에나 금남로에나

특별한 일이 없어도

거리에 나서는

얼굴이 팥죽 같은 사람을 만난다

밤늦은 시간에도

옷 깨끗이 다려 입고

짖어대는 자동차

끄떡도 않고

골목골목을 둘러보며

길을 걷는 사람을 만난다

바람 부는 날도

말 한마디 없이

무등산 아래 지산동까지

팬지꽃 한 송이까지 챙기며

서성이는 사람을 만나다.

제6부는 그 빈자리 연작인데 마음을 끄는 시 한 편을 옮겨 적어본다.

<낙숫물 -그 빈자리 6>

깊은 밤 나를

깨우는 것은

아득한 빛

유년의 사금파리처럼

낭자한 빗줄기의

끝, 먼 강을

건너며

가슴으로

낙숫물.

<문학과 지성사> 창간 맴버인 평론가 김치수는 해설 <고향에서 부르는 행복의 노래>에서 이렇게 쓴다. 소설가와 시인을 구분하는 독특한 시각이라 기록해둔다.

소설가는 삶의 고통이나 불행을 그 뿌리부터 결말까지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면 시인은 그러한 지속적인 삶 속에서 부딪치거나 발견하는 기쁨과 행복의 순간을 포착하고 이를 노래하는 사람이다... 소설가는 자신이 살았던 고향이 사라졌고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불행의 근원을 찾고자 한다. 반면에 시인은 모든 사물에서, 그리고 어디에서나 자신의 고향의 모습을 재발견하고 그때마다 행복을 노래한다... 소설가는 불행을 이야기하기 위해 태어난 비극적 운명의 소유자라면, 시인은 매순간의 삶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노래하는 초원적 세계관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진동규는... 전주... 고향에 사는 행복을 누리고 있고 그것을 노래하는 드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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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집
김용택 지음 / 마음산책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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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연애시집>을 읽는다. 와닿는 시가 별로 없다.

그가 노래하는 산이나, 강이나, 들꽃들의 이미지가 나의 파장과 일치하지 않고, 정념(情念)이 느껴지지 않는 연애 이야기는 어쩐지 허무하다.

허위의식까지야 아니겠지만 순하고 깨끗한 것들이 연애의 속살을 이루고 있어 아프지 않고 곱고 착하기만 하다. 평이한 시어가 주는 편안함 이면에서 느껴지는 헛헛함.

그래도 게중에 여러 번 읽은 시를 추려서 적어본다.

<빈 들>

빈 들에서

무를 뽑는다

무 뽑아 먹다가 들킨 놈처럼

나는

하얀 무를 들고

한참을 캄캄하게 서 있다

때로

너는 나에게

무 뽑은 자리만큼이나

캄캄하다

<초가을1>

가을인갑다

외롭고, 그리고

마음이 산과 세상의 깊이에 가 닿길 바란다

바람이 지나가는갑다

운동장가 포플러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어제와 다르다

우리들이 사는 동안

세월이 흘렀던 게지

삶이

초가을 풀잎처럼 투명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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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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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67년, 컬럼비아 대학 2년생인 애덤 워커는 파티에서 루돌프 보른이라는 인물을 만난다. 그는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프로방스 시인 베르트랑 드 보른을 연상 시켰다. 드 보른은 자신의 잘린 머리통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기다란 램프처럼 앞뒤로 흔드는 자, 환각과 고문이 횡행하는 '지옥편'에서 가장 기괴한 인물 중 하나였다.

어쨌든 서른 여섯의 보른은 콜롬비아 대학 정경학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를 강의하는 교수였고, 마고라는 이름의 프랑스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다.

얼마 뒤 다시 만난 보른은 워커에게 잡지사를 창간해 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한다. 자신의 애인 마고가 워커를 도와 달라 했고, 마침 유산을 상속 받아 그 정도 돈을 댈 수 있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였지만, 워커에게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워커는 문학 청년 다운 열정으로 잡지 창간 준비에 열의를 보였지만, 마고와 자고 싶지 않냐는 보른의 교묘한 부추김과 마고의 유혹하는 듯한 태도 때문에 마고와 5일간 정사를 나눈다.

프랑스에 갔다 되돌아 온 보른은 워커와 마고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아는 눈치였는데도 화를 내기는 커녕 마고를 떼어낼 좋은 핑계가 생겼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길을 걷던 둘 앞에 갑자기 흑인 소년이 나타났다. 소년의 손에는 총이 쥐어져 있었고 워커는 공포에 사로 잡혔다. 하지만 보른은 평온한 태도로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 소년을 찌른다. 소년이 손에 든 총에는 총알이 들어 있지 않았다. 워커는 공포에 사로잡혀 구급차를 부르려 했지만 보른의 냉혹한 태도에 기가 질려 그러지 못한다. 다음 날 보른이 워커에게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협박 편지를 보냈기에 워커가 마음을 다잡고 경찰에 신고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지난 뒤였다. 하지만 이미 보른은 프랑스로 떠나버린 후였다.

이상의 원고는 애덤 워커가 쓴 자전적 소설 일부로, 원고 수취인은 콜롬비아 대학 시절 동기로 지금은 소설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짐이었다. 워커는 자신이 백혈병으로 천천히 죽어가고 있고, 남은 생이 1년을 넘지 않을 것 같다고 밝힌 뒤, 짐이 자신을 방문해 줄 수 있는지 궁금해 한다.

짐이 애덤 워커를 방문하기로 약속한 뒤 두번째 원고가 도착한다. 원고에는 <여름>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뒤, 애덤 워커는 도서관 부사서로 일하면서 누나인 그윈과 함께 자취한다. 둘은 어렸을 적 죽은 막내 동생 엔디를 추모하면서 생긴 묘한 동료 의식을 공유했다. 어느 날, 애덤 워커는 루돌프 보른의 이야기를 그윈에게 하는데 누나인 그윈은 어쩌면 보른의 행동들이 동성애적 갈망일 수도 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웨스트 107번가의 그 허름한 아파트에서 애덤 워커와 그윈은 묘한 동료 의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적인 비밀을 공유하기 시작하다 마침내 근친상간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둘은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했고 그런 일들이 매우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온갖 성적 언사들을 뇌까리며 둘은 서로의 몸을 탐닉했고 이런 일들은 애덤 워커가 교환학생으로 파리로 갈 때까지 계속 되었다.

<여름>을 읽은 짐은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있는 워커의 집을 찾아 갔지만 그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워커가 의붓딸 레베카에게 컴퓨터에 있는 모든 원고를 삭제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기에 짐이 받은 <가을에 대한 노트> 가 유일한 원본이었다.

프랑스에 가난한 고학생으로 간 워커는 파리에서 마고를 다시 만난다. 보른과 마고는 예전과 같이 몸을 섞는다.

마고는 때로 보른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가 스파이 일을 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또한 그에게 잔혹한 면이 있었고, 마고와 마고의 전 남친이 성행위하는 것을 보고 엄청나게 흥분했던 것으로 보아 그런 쪽의 도착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워커의 기대와 달리 뜻밖의 장소에서 보른과 재회한다. 보른은 여전히 어딘가 잔혹한 냄새를 풍기며 워커에게 접근했고, 워커는 그런 보른을 안심시키며 화해를 제안한다. 하지만 워커의 속마음은 보른에게 어떤 식으로든 복수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워커는 보른이 결혼할 예정인 엘렌과 그녀의 딸 세실에게 접근해 자연스러운 관계를 형성한다. 관계가 깊어지고 신뢰가 구축되면 보른의 만행을 백일하에 드러낼 계획이었다. 문제는 문학을 좋아하는 세실이 보른에게 반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워커는 자신이 택한 어느 시점이 되자 엘렌과 세실에게 보른이 과거 흑인 소년을 잔인하게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러나 엘렌과 세실의 반응은 워커가 기대한 그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보른이 이 사실을 알고 교묘한 계략으로 워커를 옭아매 워커는 프랑스에서 추방당하고 만다.

마지막 <겨울> 원고를 워커가 쓰지 않았으므로 짐은 그 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짐은 워커의 누나 그윈을 찾아가 워커의 원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윈은 근친상간은 없었다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짐은 그녀가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근친상간 하는 부분은 어쩌면 워커가 '일어나길 원했던', 그러나 '일어나지 않았던' 일일지도 몰랐다.

세실은 소설에 등장했던 인물 중 유일한 생존 인물이었다.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된 세실에게 워커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아주 어릴 적 사랑했던 워커를 여전히 마음 깊숙이 간직하고 있었다면서 눈물 짓는다.

세실의 어머니 엘렌은 끝내 보른과 결혼하지 않았다. 세실은 그 뒤 보른에게 연락하는데 보른은 자신이 외딴 섬에서 한가롭게 노후를 보내고 있다면서 꼭 한번 휴가를 보내러 오라고 초대한다. 세실도 그 제안이 매력적으로 느껴져 섬으로 가는데 보른은 그녀에게 결혼하자며 질척대며 온갖 주접을 떨었다. 결국 산 중턱에 있는 보른의 집에서 세실은 차도 없이 걸어 나온다. 평지로 나오니 50-60명의 흑인들이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다른 손에는 끌을 잡고 돌을 쪼개고 있었다. 그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오래도록 세실의 몸에 머물렀고, 여생 동안 그녀를 따라다닐 것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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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독특한 구성의 소설인데, 1부와 2부는 애덤 워커가 작성한 원고이고 3부는 편집자로 등장한 짐이 원고를 재구성한 것이며 4부는 원고 없이 생존자의 후일담을 듣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67년으로 반전 구호가 전 세계를 휩쓸던 시기이며, 세계적으로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는 1968년, 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일렉트릭 기타로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를 분출하던 1969년으로 이어진다.

문학에서 길을 찾으려던 애덤 워커는 냉전시대를 상징하는 냉혹한 스파이 보른이 제시하는 잡지사 창간 유혹에 마구 휘둘린다. 어린 워커는 교수로 분한 보른의 본성을 파악하지 못했고 그가 칼을 꺼내들어 흑인 소년을 죽인 뒤에야 실체를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때도 응당 해야할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머뭇대서 사실상 소년의 죽음을 방조하고 만다.

또 보른이 마고를 권하자 별다른 죄의식 없이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마고는 아무런 정치적 편향성도 없는 무색무취의 부르주아였다.

결국 1부의 워커는 냉전시대 힘에 굴복하고, 부르주아적 향락에 취해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인물이다.

2부의 워커는 막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근친상간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사후 밝혀진 바와 같이 근친상간은 그의 바람에 불과했을 뿐 실제 일어나지는 않은 일이었던 것 같다. 가족에서 위로와 안식처를 찾고자 했으나 실패한 워커는 파리로 떠난다.

3부에서 워커는 자신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고자 한다. 하지만 아직 미성숙한 세실은 워커에게 침을 뱉고, 엘렌 역시 워커의 말을 믿지 않는다. 게다가 워커는 보른의 간계에 휘말려 파리로부터 영구히 추방 당한다.

되돌아온 워커는 문학을 버리고 법률가로 평생을 살며 밥벌이를 하지만 끝내 4부를 완성하지 못한다. 인생의 마침표를 제대로 찍지 못한 그를 대신해 세실이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세실은 보른에게 침을 뱉었고,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평생 그를 기억했던 인물이다. 세실이 보른과 결별한 뒤 듣는 노동하는 자들의 망치 소리는 애덤 워커로 상징되는, 냉전과 반전운동, 그리고 68혁명을 거친 세대들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소리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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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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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미네 시게키는 아내를 여읜 뒤, 딸 에마가 커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낙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학교 친구들과 불꽃놀이를 보러 간 에마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나가미네는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지만 메뉴얼에 따른 미온적 대처 외 적극적 개입은 없었다.

며칠 뒤, 아라카와 강 하류에서 에마의 시체가 발견된다. 벌거벗은 채 발견된 에마의 사인은 급성 신부전. 마약 과다 투여에 의한 사망이었다.

범인은 동네 양아치 일당 스가노 가이지, 도모자키 아쓰야, 그리고 이들에게 협박 당해 자가용을 빌려주고 심부름을 하는 나카이 마코토였다. 스가노 가이지는 클로로포름으로 에마를 질식시켜 납치한 뒤 각성제를 먹이고 강간 하였으며, 이 과정을 비디오로 찍어 보관하는 엽기적 행각을 벌였다. 마약이 과다 투여된 에마가 정신을 잃고 사망하자 가이지와 아쓰야는 에마의 시신을 마코토 아버지의 차에 싣고 가 강가에 유기했다.

뉴스를 통해 가이지와 아쓰야가 납치한 여자애를 죽이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된 마코토는 고민 끝에 나가미네에게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변조한 뒤, 범인은 스가노 가이지와 도모자키 아쓰야라고 밝히고, 주소와 열쇠를 숨겨두는 장소를 알려준다. 나가미네는 익명의 제보자 말에 따라 아쓰야의 집에 잠입해 들어갔다가 딸이 강간 당하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발견하고 분노에 휩싸인다. 귀가한 아쓰야와 맞닥뜨린 나가미네는 식칼로 아쓰야를 찔러 사망케 한 뒤 분을 참지 못해 성기를 절단하고, 공범 가이지가 나가노의 펜션으로 몸을 숨기기 위해 떠났다는 말에 따라 엽총을 들고 추격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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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법은 피해자를 위한 것도 아니고 범죄 방지를 위한 것도 아니다. 소년은 잘못을 저지르기 마련이라는 전제 아래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피해자의 슬픔이나 억울함은 반영되지 않고 실상은 무시되었다. 공허한 도덕관일 뿐이다..... 범인 체포로 이어진다 해도 자세한 경위는 설명해주지 않을 게 뻔하다. 그 범인을 만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그리고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채 재판이 시작되고 유족 입장에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범인은 대단한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89p)

도모자키 아쓰야를 죽인 것을 저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한이 풀렸냐고 물으시면 그럴 리 없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더 분했을 겁니다.

도모자키는 미성년자입니다 게다가 고의로 에마를 죽인 게 아니라, 예를 들어 알코올이나 마약의 영향으로 정상적인 판단력이 없었다고 변호사가 주장하면 도무지 형사처벌이라 할 수 없을 가벼운 판결이 내려질 우려가 있습니다. 미성년자의 갱생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피해자 측의 마음을 완전히 무시하는 상황이 벌어질 게 빤합니다...... 한번 생긴 '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령 가해자가 갱생하더라도 그들이 만들어낸 '악'은 피해자들 속에 남아, 영원히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183-184p)

<방황하는 칼날>은 2004년 12월 일본에서 출판된 후 갱생을 주 목적으로 하는 소년법에 대한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나가미네를 돕는 펜션 여주인 와카코의 불안과 안타까움, 나가미네 체포는 곧 강간살인범 가이지에 대한 낮은 처벌로 이어지는 걸 알고 고뇌하는 형사들의 양가적 감정 등이 소설의 결말까지 이어져 시종일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국민의 법감정과 동떨어진 법과 제도가 있으니, 바로 촉법소년과 주취감경 문제다. 피해자나 유족의 상처와 아픔이 가해자의 나이가 어리다 해서 회복되는 것도 아닌데 처벌을 면하게 해주거나, 술 취해 저지른 행동이라는 이유로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감경시켜 주는 이러한 제도에 공감하는 국민이 얼마나 있을까.

특히 법 집행 기관인 경찰과 최종 판결 기관인 법원이 객관성을 담보하기는 커녕 그들만의 권력 유지를 위해 주권자 국민 위에 군림하려 하였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난 지금, 대한민국에는 '방황하는 칼날'을 붙들어 줄 제3의 존재가 아예 없는 공(公)권력 부재 상태나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 하에 <방황하는 칼날>과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면 어느 부모가 형사와 법의 판단을 믿고 시스템에 의지할 것인가...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050751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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