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들 쓰십시다 이청준 문학전집 연작소설 1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1965년 <퇴원>으로 소설 활동을 시작한 이청준의 문학전집이 2000년 열린원에서 발간되었는데, 발간 당시 기준 장편 11권, 중단편소설 10권, 연작소설 3권, 산문집 2권, 동화집과 별권 1권 총 28권 분량이다.

<자서전들 쓰십시다>는 연작소설 제1권으로 70년대 '남도 사람' 연작소설을 엮은 <서편제>와 일부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소설집은 단편 <떠도는 말들(언어사회학서설①, 1973.2월)>로 시작된다. 주인공은 자서전을 대필하는 윤지욱이라는 인물이다.

눈 내리는 어느 날, 잘못 연결된 전화기 건너편 여자가 치근댄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장난질 치는것이라 여겨 전화를 끊으려 햇으나 그녀는 윤지욱을 '윤 선생님'이라 불렀고 그의 직업이 기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거두절미하고 만나뵙기를 청했으므로 윤지욱은 그녀가 지정한 장소로 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윤지욱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자는 자신이 심한 감기에 걸려 약속을 어겼노라고 변명했다. 전화를 끊고 이번엔 윤지욱 편에서 병원을 찾아갔으나 그녀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얼마 후 다시 여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자는 혼선된 전화통의 또 다른 남성에게 지욱에게 그랬듯 수작을 걸었다. 지욱은 이것은 말 유령들의 교미라고, 음란스럽고 허망하고 정처 없는, 그리고 이제는 그 자신들끼리도 서로서로 복수를 꿈꾸고 있는 음흉한 말들의 교미라고 생각했다.

모든 말들이 길을 헤매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말을 하여 말들의 주소를 바꿔놓음으로써 말들을 혹사했고 말들을 배반했고, 결국에는 그 말들이 기진맥진 지쳐나게 했다. 말들은 그들의 고향을 잃어버렸고 자신들의 고향에 대한 감사와 의리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배반당한 말들은 자유였다...... 그러나 말들은 이제 정처가 없었다.(30p)

말이 올바로 쓰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이청준의 문제의식은 <자서전들 쓰십시다(언어사회학서설②, 1978. 8월)>로 확대된다.

윤지욱은 유명한 코미디언 피문어 씨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일에 착수했다. 하지만 '나의 말은 나의 말이 아니며 나의 웃음은 나의 웃음이 아니다. 나의 말은 관객의 말이며 내 웃음 또한 관객과 청중의 웃음일 뿐이다. 내 말과 웃음이 이미 나의 말과 웃음이 될 수 없으매......' 라는 문장을 써놓은 뒤로 영 진도를 빼지 못하고 있다.

말들은 과연 이제 정처가 없었다. 말이 존재의 집이라면, 말의 집은 또한 존재의 실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들은 이제 그 실체의 집을 떠난 지 오래였다.(51p)

이러한 윤지욱의 인식은 자서전을 대필하는 일에 대한 사유로 이어지고, 급기야 피문오씨에게 장황하게 자서전 대필을 그만두겠노라는 편지를 쓰게 된다.

그런 식으로 남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제 머릿속에서 멋대로 창작해 내고 그럴듯하게 분장시켜 나가는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언제부턴지 모르게 제겐 차츰 허망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군요......(55p) 엉터리없는 자서전으로 하여 보다 치명적인 자기 기만에 빠져 그 두꺼운 도배지 속에 감금된 과거로부터 영원히 풀려날 길을 잃고 만 것입니다. 저는 제 자서전 대필업으로 하여 그들을 과거의 갈등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것 속에 감금시키는 일을 계속해 온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어두운 과거도 아름답게만 회상되고 과오도 미덕으로 미화되기 쉬운 것이 자서전 집필의 위험스런 함정일진대, 하물며 그런 과거에서조차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꾸며낸 인간사라면 그것이 얼마나 완벽하고 위대해 보일 수 있겠습니까...... (58~59p)

윤지욱은 피문오 씨 같은 사람의 자서전을 거짓으로 펴내면 '능력 없는 자가 억지로 지어낸 거짓의 동상'만 늘어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피문오 씨 다음으로 자서전 집필이 예정되었던 최상윤 선생을 찾아간다. 선생은 10만 평의 황무지를 자신의 힘만으로 옥토로 바꾼 농사꾼이었다. 그는 최상윤 씨와 같은 이의 삶을 쓴다면 자서전으로서의 어떤 순기능이 실현되지 않을까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최상윤 선생을 만나보니 그는 신념으로 똘똘 물칭 인물이었고, 윤지욱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논리적인 이해가 불가능한 신념은 맹목적인 아집에 그칠 위험성이 있었고, 회의 없는 신념은 맹목적 자기 독단으로 흐르리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회의 없는 자서전이야말로 영락없이 한 거인의 동상에 불과할 터였다.

결국 최상윤 선생의 자서전 쓰기도 포기하고 돌아온 윤지욱에게 피문오 일행이 들이닥쳐 찍자를 붙는다. 이런저런 협박과 회유를 해대는 피문오가 고물 라디오나 시계 고치는 사람들처럼 골목골목 외고 다니지만 않았다 뿐이지 먹고 살겠노라 일을 맡아간 거 아니냐, 하면서 능청스런 목소리로 외치는 말이 윤지욱에게 아프게 와 닿는다.

"고장난 시계나 라디오들 고칩시다아-- 채권 삽니다아-- 부서진 우산이나 빈 병 삽니다아-- 자서전이나 회고록들 쓰십시다아--"

<지배와 해방(언어사회학서설③, 1977. 봄>에서 윤지욱은 오접 전화 사건과 자서전 대필 일에서 '떠도는 말'과 '살아있는 말'의 화해에 실패한 뒤 말들의 지나친 혹사와 학대로부터 비롯된 말들의 무서운 복수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그 방편으로 강연회나 세미나를 쫓아다니면서 연사들의 강연이나 토론 내용을 녹음해 들이는 일에 열을 냈다. 말을 감금해두기 위해서였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말들의 집단 수용소를 차려 감금해 두었다가 말을 만나고 있는 자의 책임을 감당해 보자는 것이었다. 말을 부린 자와 말과의 약속을 따질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녹음한 이정훈 이라는 소설가의 강연을 녹음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왜 쓰는가, 글은 왜 쓰는가, 작가는 무엇 때문에 소설이라는 것을 쓰고 또 써야 하는가, 작가의 소설은 어떤 동기와 욕망과 충동의 힘에 의해 씌어지며, 그것은 또 누구를 위해, 어떤 목적에서 씌어지는가...(102p)

그가 애초에 글을 생각하게 된 동기는... 바깥 세계에 대한 강렬한 복수심 때문이었습니다...(116p) 최초로 글을 생각하고 그것을 써보고 싶어하게 된 개인적인 동기와 깊이 관련되고 있는 그의 삶의 욕망을 배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117p)

개인적인 삶의 위로와 구제, 한술 더 떠 복수심, 더 나아가 그 현실의 질서를 자기 식으로 뒤바꿔놓고 싶은 욕망, 그가 꿈꾸고 모색해 낸 새로운 질서로 그 세계를 지배하고 싶은 욕망...... 그러한 지배 욕망은 과연 한 작가와 독자 사이를 구체적으로 연결 짓는 어떤 조화로운 관계 질서를 창조해 갈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일방적으로 파괴만을 꿈꾸는 복수심에서와는 달리, 그의 독자에 대한 명백한 문학의 책임 문제가 뒤따르게 되는 것...(124p)

새로운 세계로의 출구를 열어젖힌 순간에 그것을 그의 독자들에게 내맡기고 자신은 또 다른 세계를 꿈꾸기 시작하는 것이므로 작가는 당연히 이상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127p)

결국 이정훈에 따르면 당초 글쓰기 욕망은 개인 차원의 위로, 구제의 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같은 욕망은 자신의 뜻과 같지 않은 현실 사회에 대한 복수심으로, 나아가 현실 사회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뒤바꾸고 싶은 욕망으로 발전한다. 소설가는 자신이 구축한 새로운 세계상이 독자에게 호소력을 발휘하여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동의과정은 영속적인 상태가 아닌데 작가는 또 다른 소설을 쓰기 때문이다. 새로운 소설은 새로운 세계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이상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지배는 필연적으로 '억압'을 불러온다. 그러므로 글이 주는 억누름으로부터 벗어나서 온전한 삶, 본래의 자유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로므로 작가는 자유의 질서로서 독자를 지배해 나감으로서 억압이 아닌 '해방'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다.

그리고 작가노트를 통해 평론가 김현의 <한국문학의 위상> 일부를 인용한다.

그것은 인간의 꿈이 가지고 있는 불가능성과의 싸움을 뜻한다...... 인간이 현실적인 삶 자체의 조건들에 쫓기는 동물들과 다른게,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을 꿈꾸는 버릇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쓸모 없는 것을 꿈꾸는 일은 그것이 우리의 현실 생활에 유용하지 않다는 점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 삶을 억누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우리의 삶에 유용한 것이 아니며 우리 삶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실제로 살고 있는 삶이 얼마나 억눌린 삶인가 하는 것을 반성할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해 주며, 그러므로 몽상으로서의 문학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욕망의 노예 상태 속에 갇혀버린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해방시켜 주는 고마운 기능을 발휘한다고 말한다.(137p)

하지만 이청준은 윤지욱의 입을 빌어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고백하며 언어사회학 서설 4편인 <가위잠꼬대> 그리고 <서편제>에 실린 언어사회학 서설 5편 <다시 태어나는 말>에서 탐구를 계속한다.

<가위잠꼬대(원제: 몽압발성, 언어사회학서설④, 1981.1월)>에서 윤지욱은 이정훈 등과 함께 무기력증에 빠져 다방에 죽치고 앉아 말을 조율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그들은 이미 소설이고 시고 글들을 전혀 쓰지 못하고 있었다. 말들은 이미 실체와의 약속 단계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세상을 떠돌고 있어 소설이고 시고 사람이 시도하는 어떤 통일적인 구조 속에 놓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 시기 사이비 부흥회가 공설운동장에서 열리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구원을 약속하는 거짓선지자의 사기행각에 말의 구원을 간절히 발하는 글쟁이 일원들 마저 드나들기 시작하는 희망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윤지욱은 말들의 배반과 긴 악몽이라는 가위눌림에서 벗어나는 길은 더 깊이 잠이 들어버리는 방법이 아니라 깨기 위해 고통스럽게 싸우는 길 뿐이라고 생각한다.

언어사회학 서설 연작 외 <빈방 - 혹은 딸꾹질 주의보(1979.여름)>, <건방진 신문팔이(1974.2월>, <미친 사과나무(1971)>가 실려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리커버)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01호 명주는 단체급식소에서 일하다 입은 다리 화상으로 육체 노동이 불가능했다. 이혼했고, 하나 있는 딸은 돈을 요구할 때만 명주를 찾았다. 생활이 어려워 어머니 집으로 들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다.

간병생활은 지옥이었다. 어머니는 명주에게 욕을 하고, 변이 묻은 기저귀를 세탁기에 넣어 돌렸으며, 변기물로 양치질을 했다. 명주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어 어머니에게 손을 대기도 했다.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잘못했다'고 빌었다.

지옥같은 생활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몰라 절망할 즈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 앞으로 나오는 연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었기에, 명주는 어머니의 죽음을 숨겼다. 작은방 한구석에 관을 놓고, 그 안에 어머니를 안치한 뒤 모든 것을 유예된 상태로 놓아두고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런 어머니를 진천할아버지라는 분이 찾았다. 두분은 노년에 우정을 키워가고 있었던가 보았다. 같이 제주도에 놀러가려고 이백만원이 넘는 돈을 함께 모았다고도 했다. 명주는 어머니를 자꾸 찾아오는 진천 할아버지가 불안했다.

702호 준성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낮에는 아버지를 운동시킨 뒤 밥을 해 먹이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했다. 아버지가 거동을 하고, 자신도 물리치료사 자격증을 따면 그럭저럭 생활이 될 거라 여기며 좋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준성의 눈을 피해 술을 사다 마셨다. 어느 날인가는 가스레인지를 잘 못 다뤄 큰 화상을 입기도 했다. 불행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비오는 어느 날, 준성이 벤틀리를 대리운전하다 주차장 기둥에 차를 긁는 사고를 낸 것이다.

대리운전 업체는 준성이 내는 보험료 일부를 착복했고, 그때문에 전액 보험처리가 되지 않아 물어야 할 돈이 기천만원에 달했다.

명주와 준성은 가끔 아파트 복도에서 마주쳤다. 처음엔 데면데면 했지만 서로의 처지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연민의 정을 나눴다.

어느 날, 준성이 아버지를 씻기기 위해 애를 쓰다 사고를 당한 팔목에 힘이 빠져 아버지를 놓치고 만다. 준성의 아버지는 그대로 욕실바닥에 처박혔다. 숨을 쉬지 않는 아버지를 두고 준성은 패닉에 빠져 복도로 나갔다가 명주와 맞닥드린다. 명주는 흥분한 준성을 진정시킨 뒤 욕실에 들어가 준성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망설임 끝에 명주는 자신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

일본에서 여러차례 사회적 이슈가 된 문제를 다룬 소설이라 오리지널리티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지만, 명주와 준성의 불행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굉장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사실적 서사가 과연 어떻게 끝날지 궁금해 하는 독자에게, 작가는 함박눈이 내리는 날 명주와 준성이 트럭에 시체를 싣고 증평으로 내려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트럭 짐칸에 잘 못 탄 치매 할머니를 '엄마 삼기'로 하고 뜨끈한 우동을 먹으러 가자고 말한 뒤 새근 새근 잠든 둘을 바라보는 준성의 모습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체를 암매장하기 위해 트럭에 싣고 달리는 상황과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제도와 법률이 정한 도덕과 원칙에 반해 새로운 가족을 이룸으로서 대안을 찾는 가난한 사람들.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7313498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 노인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담다 실버 센류 모음집 1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 포푸라샤 편집부 지음, 이지수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는 2001년부터 <실버 센류> 공모전을 개최하고 있다. 실버는 일본식 영어로 '노년 세대'를 뜻하고, 센류는 일본 정형시의 일종이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은 2011년과 2012년 입선작을 포함한 여든여덟 수를 모은 작품집이다.

나무위키를 찾아보니 센류는 5-7-5의 형식을 띠고 있어 하이쿠와 유사하지만 계어(季語)를 안 써도 된다는 점, 키레(切れ)가 필수적이 아닌 점, 하이쿠와 달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을 주제로 한다는 점 등을 특징으로 한다고 쓰여 있다. 일상생활의 풍자, 신세 한탄 등을 주조로 하는 경우가 많아 하이쿠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장르로 이해된다.

기억에 남는 센류 몇 편

자명종

울리려면 멀었나

일어나서 기다린다

- 야마다 히로마사, 일흔한 살

두 사람의 연애담

처음 들은

장례식 날 밤

- 나카마쓰 지즈루, 스물다섯 살

손주 목소리

부부 둘이서

수화기에 뺨을 맞댄다

- 나카쿠보 시로, 일흔여섯 살

늙은 두 사람

수금원에게

차를 대접한다

- 기무라 도시요, 일흔두 살

「요전에 말이야」

이렇게 운을 뗀

오십 년 전 이야기

- 오모리 지호, 마흔세 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공자
최인호 지음 / 열림원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첫 번째 출국 - 공자와 안자

소설은 기원전 571년 소공(昭公) 25년,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자신이 태어난 노(魯)나라를 빠져나와 제(齊)나라로 향하는 첫 번째 출국(出國)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때 공자 나이가 35세. 공자는 훗날 <논어>에서 자신의 성장과정에 대해 "나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志學), 30세에는 자립하였으며(而立), 40세에는 미혹하지 않게 되었고(不惑), 50세에는 천명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知天命), 60세에는 귀로 듣는 대로 모든 것을 순조로이 이해하게 되었으며(而順), 70세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慫心)" 라고 이야기 한다.

당시 노나라는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猛於虎)' 라는 일성이 터져나올 만큼 난세였다. 임금은 소공이었으나 정치권력은 삼환(三桓)씨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어 임금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며, 군대는 세 집안의 사병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노나라 소공은 제나라로 망명해 명목 뿐인 주군이었다.

이때 제나라 군주는 경공이었는데 그의 곁에는 명재상 안영이 있었다. 공자는 안영을 '남과 잘 사귀었고 오랫동안 남을 잘 공경하였다'고 평가했고, '불법(不法)의 예'란 최상의 찬사로 극찬해 마지 않은 인물이었다. 안영은 형식적인 예절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를 행할 줄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영이 영공(靈公)과 장공(壯公), 그리고 경공의 3대를 섬기며 뛰어난 통치술을 펼치고 있는 제나라도 사실은 퇴폐와 사치에 물들어 병든 환부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공자가 그처럼 존경하던 안영은 사실 경공과 공자의 만남을 교묘하게 방해했다. 안영은 공자를 뛰어난 사상가로서는 인정하고 있지만 정치가로는 별로 신뢰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유자(儒子)란 말만 그럴싸하게 하지 바른 규범을 지키지 못하여 알맹이가 없는 법입니다." 이것이 공자에 대한 안영의 평가였다.

반년이 지난 후 경공을 만난 공자는 '정치는 재물을 절약하는 데 있다'고 답함으로서 제나라의 근심이 사치에 있음을 밝히고, 음악을 통해 백성을 교화해야 한다는 진언을 들려준다. 하지만 안영의 지속적인 반대로 경공은 공자를 등용하지 않는다.

제나라로 망명 온 지 거의 일 년 만에 경공을 두 번째로 알현하게 된 공자에게 경공은 '정치하는 방법'에 대해서 묻는다. <논어>의 안연(顔淵)편에 그 대화 내용이 실려 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이는 공자의 정명주의(正名主義)에서 비롯된 말로, 정명이란 '명분을 올바르게 한다' 또는 '명칭(이름)을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이 자기에게 주어지는 명칭이나 명분과 꼭 맞는 올바른 상태에 있는 것이 질서의 극치'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다시 공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경공을 안영은 재차 막아선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권력이 대부들에게 있지 아니하고, 천하에 도가 있으면 백성들이 혼란되지 않는다(天下有道 則庶人不義).

공자는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제'야 말로 '하늘 아래의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안영은 공자의 그러한 정치철학은 현실을 무시한 보수적인 낡은 정치관이라고 생각했다. 안영은 이미 제후중심의 '지방분권제'가 도래하였음을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정치를 펴고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 출국 - 노자와 공자

공자의 출생에 대해 사마천은 <사기>에서 '숙량흘은 안씨(顔氏)의 딸과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라고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사생아로 기원전 551년(양공 22년) 음력 8월 27일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 지금의 산동성 곡부 남쪽 22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추현(鄒縣)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였는데, 키가 9척 6촌으로 매우 컸고 머리가 움푹 들어갔기 때문에 구(丘)라 하였다고 묘사된다. 사회에서 벼슬할 수 있는 계급 중 가장 낮은 신분인 사(士) 계급의 공자는 가난하고 천했으나(孔子貧具賤) 어렸을 때부터 예기(禮器)를 진열하고 놀 정도로 예에 대한 태도가 선천적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506년, 공자는 남궁경숙(南宮敬叔)과 주(周)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첫 번째 출국 이후 다시 9년 만의 출국이다. 이때 공자의 나이 46세였다.

노나라 주군 소공은 7년 동안 망명생활을 했으나 끝내 객사했고, 그 뒤를 이어 정공(定公)이 왕위에 올랐지만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 무렵 노나라 정치는 계손씨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는데, 이 계손씨는 또한 신세력으로 대두된 양호(陽虎)에 의해 견제되고 있었다. 계환자와 양호 모두 공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므로 공자는 피곤한 처지였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공자가 존경하였던 인물로 주의 노자, 위의 거백옥, 제의 안평중, 초의 노래자가 있는데 공자는 지금 그 중 한 명인 노자(老子)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어렵사리 노자를 만난 공자는 예에 대해 가르침을 달라고 청한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를테면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고 있어 얼핏 보면 점포가 빈 것처럼 보이듯 군자란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이는 것일세. 그러니 그대도 제발 예를 빙자한 그 교만과 그리고 뭣도 없으면서도 잘난 체하는 말과 헛된 집념을 버리라는 말일세."

공자는 노자와 만난 후 '제자들에게 '노자는 마치 용과 같은 분이셨다', '내가 알기로는 노자는 모름지기 무위의 도를 닦는 분인 것 같다' 라고 말했다 한다. 노자가 쓴 유일한 경서 <도덕경>의 첫 구절이 '도라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로 시작하고 있다. 예에 대한 질문에 노자는 무위의 도를 이야기한 것이고, 공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를 잡고 물고기를 낚는 인간사를 포기할 수 있겠느냐고 항변한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 도란 사람이면 반드시 통과하여야 할 문(門)이라면, 노자에게 있어서 도는 통과해야 할 문조차 없는 무문(無門)이라고 보았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내는 대도무문(大道無門)과 어찌보면 일맥상통한다.

황금시대

기원전 501년, 노나라 정공 9년 공자는 마침내 중도재(中都宰)란 벼슬로 오랫동안 꿈꿔왔던 정치에 뛰어들게 된다. 이때 공자의 나이 51세였다.

공자는 상대적으로 강대국인 제나라의 위협과 견제에 맞서 여러가지 활약을 펼쳤고 이 덕분에 육경 중 하나로 국토를 다스리는 사공(司空), 이후 형옥을 관장하는 사구(司寇)의 벼슬까지 오른다.

공자는 '위정자 자신이 올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제대로 되고 위정자 자신이 올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내려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라며 백성들의 다툼은 너그럽게 처리하고 권신의 위법은 추상과 같이 엄격히 처분했다.

일 년 뒤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인 대사구(大司寇)에 올랐다. 정치가로서 뛰어난 역량을 펼친 공자는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삼환씨의 세력을 제거하고 노나라의 임금인 정공을 중심으로 한 정권의 회복과 군사력의 통일을 꾀하고자 했다.

그러나 51세에 중도재가 된 이래 55세에 대사구로서 재상의 일을 겸직하는 5년의 황금기는 전혀 뜻밖의 일로 끝나게 된다.

당시 제나라는 명재상 안영이 죽고 여서가 경공을 보필했다. 공자의 활약으로 노나라가 차츰 부강해지자 경공은 노나라에 땅을 떼어주고 화친하려 했다. 하지만 여서의 생각은 달랐다. 여서는 자신이 직접 아름다운 여인 80명을 골라 뽑고 좋은 말 120필을 골라 노나라 정공에게 선물로 보냈다.

<논어> 미자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제나라 사람들이 여악을 보내왔다. 노나라의 계환자가 이를 받아들여 즐기느라 사흘 동안이나 조회(朝會)를 하지 않았다. 공자께서는 이에 노나라를 떠났다'

대사구 재상직을 55세에 버리고 자기 이상을 정치적으로 실현할 나라와 임금을 찾아 국외로 여행길에 오른 것이 56세. 그 뒤 다시 노나라로 돌아온 것이 기원전 484년, 노나라 애공 11년, 공자 나이 68세 였으니 13년 동안 열국을 주유하며 '상갓집의 개(喪家之狗)'의 처지가 될 고달픈 시절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세번째 출국 - 상가지구(喪家之狗)

기원전 496년 노나라 정공 14년, 56세의 나이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위(衛)나라를 찾아간다. 위나라 영공은 무도했지만 그 밑에는 현명한 신하가 많았다. 공자는 위나라 대부 사어(史魚)는 정직한 사람이고 거백옥(籧伯玉)은 참군자라고 말했다. 공자는 영공의 인재 발탁 능력을 믿고 기대를 걸었다.

위나라에 가니 군사에 뛰어난 무장 왕손가가 공자를 찾아왔다. 그는 "옛말에 이르기를 아랫목에 아첨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부뚜막에 아첨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라며 공자를 떠본다. 실권을 가진 자신에게 잘 보이는 것이 어떠한가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해 공자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게 된다"고 답한다.

얼마 후 위나라 영공이 만나기를 청했다. 영공은 공자에게 6만 두의 봉록을 주기로 하나 공자에 대해 참언하는 신하들에 휘둘려 공자를 위리안치(圍籬安置)해 둘 뿐 등용하지 않았다. 이에 10개월 만에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 조나라, 송나라, 정나라 등을 떠돈다. 이 과정에서 감금과 굶주림을 겪으며 상갓집의 개와 같은 처지가 된다.

이듬해인 495년 57세의 공자는 정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도착한다. 그러나 3년을 머무는 동안 진나라 임금 민공(湣公)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며, 정치적 활동도 벌이지 못했다. 공자는 웅대한 뜻을 품고 주유천하의 행각에 나섰으나 5년 동안이나 허송세월하게 되자 탄식했다.

59세에 공자는 다시 위나라로 향한다. 세번재 위나라 입국이었다. 영공은 노쇠했고, 공자를 무용지물로 생각했다. 이때 공자가 한 말이 <논어>의 자로편에 기록되어 있다.

'진실로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일 년이면 그 나라를 바로 잡을 수가 있고, 3년이면 완전한 정치의 성과를 올릴 수가 있으련만(苟有用我者 基月而已可也 三年有成)'

또 다시 위나라를 떠난 공자의 신세는 '썩어서 먹을 수 없는 박, 쓸모없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박'과 같은 처지였다. 공자는 급박한 처지에 절망해 진의 대부 조간자가 자신들의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실권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몸을 의탁할 결심을 한다. 하지만 황하를 건너기 직전 조간자가 두명독과 순화라는 두 사람의 어진 현인을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 강을 건너지 않고 한탄한다.

이때 거백옥이 공자를 초청하여 그는 다시 위나라에 간다. 하지만 전보다 더 초라한 식객 신세였다. 영공은 공자를 무시했다.

기원전 492년, 60세의 공자는 진나라로 향한다. 진나라에서 공자는 2년 이상 머물렀지만 그는 등용되지 못했다.

그해 가을 노나라 계환자가 병으로 죽으면서 후계자인 계강자에게 공자를 초빙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하지만 주변 신하들의 만류하자 공자의 제자 염구(冉求, 염유)를 등용한다. 염구는 계강자의 가재(家宰)가 되어 공을 세운다. 염구가 등용되기 전 또 다른 공자의 제자 자공은 "자네가 노나라에서 드용되어 큰 공을 세우면 선생님을 잊지 말고 반드시 불러 모시도록 하게나"라고 당부했다.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간다.

네 번째 출국 - 양금택목(良禽擇木)

기원전 490년 노나라 애공 5년. 공자 나이 62세에 섭나라를 찾아간다. 묵묵히 스승을 따라 수행하던 제자들도 서서히 권위와 가르침에 반기를 들거나 벼슬을 찾아 떠나갔다. 섭공은 공자 일행이 자신의 영토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공자의 제자 자로에게 묻는다. "그대의 스승 공자는 어떤 사람인가?" 이에 '자로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사기>는 기록한다.

공자는 자로를 불러 "너는 왜 섭공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스승의 사람된은 도를 배우기에 게으르지 않고, 사람 가르치기를 싫어하지 않고, 도를 즐기기를 밥 먹는 것을 잊을 정도이며, 또한 가난을 근심하지 않아 어느새 늙어 노년에 이른 것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공자는 이후 섭공을 두 번 면담하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채나라로 간다. 그리고 3년쯤 되던 해 초나라 소왕이 공자를 초빙한다. 채나 섭과 달리 초나라는 대국이었고 소왕 역시 공자가 어진 임금이라고 칭찬한 적이 있을 만큼 인격과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나라와 채나라 대부들은 아연 긴장한다.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에 오래 머물러 제후들의 약점과 대부들의 비행을 낱낱이 알고 있었으므로 초나라 소공에게 등용된다면 자신들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군사를 풀어 공자 일행을 들판에서 포위한다.

이때의 곤경을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자로가 성이 나 공자를 뵙고 말하였다. "군자도 곤경에 빠질 때가 있습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한다. "군자도 곤경에 빠지기 마련이다. 다만 소인이 곤경에 빠지면 함부로 굴게 되는 것과 다를 뿐이다."

사면초가에 빠진 공자는 위기 극복을 위해 외교술에 능한 자공을 소왕에게 보내 실정을 알리고, 소왕은 곧 군사를 보내 공자 일행을 구해준다. 이때 소왕은 공자에게 서사(書社)의 땅 7백 리를 봉토로 떼어주는 조건으로 공자를 초빙하려 했다. 하지만 재상 자서(子西)가 반대한다. 2만여 호의 영지를 공자에게 주었다가 외교술에 뛰어난 자공, 용감한 장수 자로, 탁월한 행정가 재여,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을 지휘할 수 있는 안회의 보좌를 받아 초나라를 능가할 권력을 잡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간언한 것이다. 소왕은 망설임 끝에 초빙계획을 취소하고 그해(기원전 489년) 가을 군막 안에서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만다. 이로써 공자의 마지막 희망도 물거품이 되버린다.

소왕이 죽은 뒤에도 공자는 선뜻 초나라를 떠나지 못한다. 자공이 말하였다. "여기 아름다운 옥이 있습니다. 스승께서는 이것을 궤 속에 넣어 감추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상인을 찾아 파시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하였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그리고 덧붙였다. "나는 상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我待賈者也)"

공자가 또다시 위나라를 찾아갔을 때에는 노나라의 애공 6년(기원전 489년) 공자 나이 63세 때였다. 위나라 영공은 이미 죽고 그의 손자인 출공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출공의 아버지 괴외는 자신의 아버지 영공의 음탕한 부인 남자(南子)를 죽이려다 실패해 외국으로 도망쳤는데 귀국을 가로막고 자신이 왕이 된 불효한 자였다.

위나라로 돌아가는 스승에 대해 제자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다. 출공은 공자의 보좌를 받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자는 출공이 관직을 주면 받을것이냐는 제자의 물음에 반드시 명분 먼저 바로잡겠다고 답한다. 이에 성질 급한 자로가 도대체 이름 같은 것을 바로잡아서 어찌하시겠다는 거냐고 따져 묻는다. 이에 공자가 답한다.

"군자는 바르지 않으면 언어의 도리가 맞지 않는 법이다. 언어가 도리에 맞지 않으면 하는 바의 일을 성취하기 어렵다. 하는 일을 성취하지 못하면 예와 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와 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을 죄과에 알맞게 줄 수가 없게 된다. 형벌이 죄과에 맞지 않으면 백성들은 손발을 안심하고 놓을 곳이 없게 된다. 그래서 군자란 행위가 있으면 반드시 이름이 있어야 하고 말을 하였으면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래서 군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명분이 바로 이름인 것이다."

이로써 제자들은 각자 뿔뿔이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자공은 노나라 초빙으로 사신으로 등용되며, 자로는 위나라 작은 마을의 읍재(邑宰)가 된다. 자공은 노나라에 외교관으로 등용된다. 하나 둘 제자들이 떠나가던 시절, 고향으로 부터 아내 올관(兀官)이 죽었다는 부고가 날아든다.

설상가상으로 몸을 뒤탁하고 있던 공문자(孔文子)가 사사로운 원한을 풀기 위해 공자엑 전쟁하는 법에 대해 물었다가 실수를 깨닫고 변명하자 공자는 "새가 나무를 선택해야지 어찌 나무가 새를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良禽擇木 木豈能擇鳥)"라 한탄하며 말한 뒤 천하를 주유하였던 열정과 13년의 모든 지난 세월과 단절을 선언한다. 이로써 공자의 주유열국은 종말을 맞게 된다.

공자천주(孔子穿珠)

노나라 애공 11년, 기원전 484년 공자는 마침내 노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 공자 나이 68세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공자가 73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6년간 공자는 노나라 정치에 뛰어들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한다.

자신을 '상인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옥(美玉)'으로 비유했던 공자는 자신을 팔아주는 상인을 만나지 못했다. 또한 자신을 '아홉 개의 구멍을 가진 진귀한 구슬'로 생각하고 있던 공자는 실을 꿰어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착한 소녀의 거짓말 - 구드 학교 살인 사건
J.T. 엘리슨 지음, 민지현 옮김 / 위북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0년 이상 사립 명문 여학교의 명성을 유지해 온 구드학교. 오늘 그 학교 정문에 시신이 한 구 매달려 있다. 무참히 꺽인 목에 빨간 실크 스카프가 감겨 있고, 졸업 가운과 색색의 숄을 두른 시신은 거리를 등지고 있었는데 얼굴이 훼손되어 누군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얼마 후 웨스트헤이븐 학장이 타나났다. 신원을 아느냐는 경찰의 질문에 학장은 모른다고 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소녀들이 이름 하나를 중얼거렸다. 애쉬.

애쉬 칼라일의 본명은 애슐린 카이고, 아버지 데미언 카 경은 영국 상류층의 자산관리를 해주며 명성을 쌓은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출세 외엔 관심이 없었고, 독재적인 성향 때문에 반항심 넘치는 애쉬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둘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자 데미언은 딸을 미국에 있는 구드학교 기숙사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바로 그 즈음 데미언이 추문에 휩싸인다. 이 때문에 차관 자리를 놓친 데미언은 불같이 화를 내며 애쉬에게 손찌검을 한다. 딸 애쉬가 범인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애쉬가 집을 뛰쳐 나가버리고, 얼마 뒤 데미언 카 경이 자살한다. 애쉬의 어머니 역시 권총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다.

애쉬는 구드 학교 입학을 허락받았지만 영국의 복잡한 상속 제도 때문에 사실상 무일푼이었다. 데미언 카 경은 애쉬 칼라일이 대학 학위를 취득한 뒤 25세가 되면 유산을 물려주도록 유언장을 작성했기 때문이다. 사정을 딱하게 생각한 웨스트헤이븐 학장은 애쉬에게 구드 학교 장학금을 주기로 결정하고 졸업 때까지 대리인 자격으로 돌봐주기로 한다.

구드학교에 입학한 애쉬는 큰 키와 예쁘장한 외모, 영국 출신이라는 이력 때문에 주위의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애쉬는 비사교적인 태도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 했고, 이런 태도가 또 다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겨 베카의 주목을 끈다.

비밀클럽의 수장이자 명예규율을 관리하는 학생회장 베카의 눈에 드는 것은 모든 하급생이 바라는 바였음에도, 애쉬는 베카의 비위를 맞추기는 커녕 베카에게 저항한다. 베카의 처절한 응징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베카로 부터 비밀클럽 초대를 받게 되는 애쉬. 그리고 그런 애쉬를 질투해서 애쉬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룸메이트 카밀과 친구들...

애쉬가 학교에 입학한 직후 애쉬의 피아노를 전담하게 될 뮤리얼 그래슬리 교수가 알레르기로 사망하고, 얼마 후 애쉬의 룸메이트 카밀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자살한 뒤 부검 과정에서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10년 전 구드학교에서 있었던 살인사건과 그 범인의 아들 루미. 그리고 자신보다 한참 어린 루미와 불륜관계를 이어가는 웨스트헤이븐 학장. 애쉬가 받아갈 재산의 반을 즉시 수령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배다른 언니의 등장. 소설은 점점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거짓이 하나하나 드러나는데, 과연 애쉬는 왜 학교 교문에 시신이 되어 매달리게 되었을까...

------

작가 J.T.엘리슨은 정치학과 영문창작을 전공했는데 커리어의 초반에는 정치 분야에 뛰어들어 대통령 임명직으로 백악관 상무부에 근무했다. 이후 방위 및 항공우주 업체 재무분석가로 근무하다 2012년 캐서린 쿨터(Catherine Coulter)와 공동 작업을 하면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다수의 베스트셀러 작품을 출간했으며, Joss Walker 라는 필명으로 판타지 소설도 집필하고 있다.

<착한 소녀의 거짓말>은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를 모티프로 하여 진행된다.

뮤리얼 그래슬리 교수는 애쉬가 실수로 준 캐러멜 때문에 사망한 것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사망 덕에 애쉬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이 늦춰진다.

애슐린은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으나 자신도 동생,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죽인 사이코패스이다. 아버지에게 얻어 맞거나 우울할 때 자신의 곁을 지켜준 알렉산드리아와 신분을 바꾸기로 한 건 미국에 있는 구드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되었을 때다. 알레산드리아는 교육 받을 처지가 못 됐고, 애슐린은 공부하기 싫었으므로 이 거래는 별 문제없이 성사된다.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둘이 배다른 자매라는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배다른 언니에게는 즉시 유산을 지급한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애슐린이 눈이 돌아 여러가지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교문에 매달린 소녀는 베카였다. 애쉬라는 이름을 소녀들이 중얼거리는 장면을 삽입해 독자를 착각하도록 만든 것은 반칙성 트릭이지만, 비밀클럽에 공을 들여 음산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장면이나 카밀이라는 또 다른 사망자를 슬쩍 끼워 넣어 사건을 복잡하게 직조하는 수법은 훌륭하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7243696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