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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과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5월
평점 :
1998년 7월 12일 월드컵 결승이 열리던 날, 화자는 파리 소르본 대학 도서관에서 프랑스왕 샤를 6세의 아우이자 중세 희귀본 수집가로 알려진 루이 도를레앙공의 서재를 발견한다. 그리고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괴물같은 일들에 관한 기록>을 서가에서 뽑아드는데, 그 책은 잉글랜드 바스커빌 출신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윌리엄이 1347년 집필한 서책의 채록 편집본이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내 젊은 날 우연히 만났던 어느 요리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라고 시작하는 그 책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연결 관문인 영원의 도시 베르송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대한 기록이었다.
1298년 프랑스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필립 4세의 갈등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풋내기 수도사 윌리엄은 선친의 죽마고우인 피에르 드 라포레 주교의 부음을 듣고 베르송으로 간다. 사람들은 윌리엄에게 피에르 주교로부터 뭔가 듣거나 특별한 걸 받은적이 없는지 물었지만, 윌리엄이 받은 것은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의 편지 뿐이었다.
피에르 주교의 죽음은 의심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사람들은 그가 죽기 직전 매우 초조해했고, 부주교 레이몽과 언쟁을 벌였으며,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했는데 십년은 늙어보였다고 했다.
어쨌든 베르송의 주교 자리가 공석이 되자 보니파키우스 8세의 충복인 몬테나 추기경과, 교황청의 이단심문관인 발렌티노 카스텔리치가 베르송으로 온다. 한편, 필립 4세의 직신이자 법률고문인 로마법학자 기욤 드 노가레와 마비앙 행정장관도 속속 도착한다. 그들은 신임 주교에 자신들의 세력을 앉히려 했다.
두 진영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참사회의가 평행선을 달리던 그 때, 도시에 페스트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달된다. 후임 주교 선출 안건은 연기되고, 도시는 음울한 기운으로 뒤덮인다.
한편, 요리사이자 과학자인 제롬은 혜안과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9세기 아랍인 자비르 이븐 하밀의 <본초비방집전>에 나온 불귀라는 약초를 먹었을 때 사람이 가사상태에 빠지고 늙어보인다는 구절을 떠올리고 어쩌면 주교가 사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는 윌리엄과 함께 주교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 뚜껑을 열어 돌덩이만 들어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성물 보관실 구석에서 주교를 발결한다. 하지만 그는 극심한 고문과 잘린 혀 때문에 곧 사망하고 만다.
페스트가 도시를 휩쓰는 와중에 인육을 넣은 사순절 파이가 유통되고, 뇌쇄적인 미모를 지닌 벙어리 처녀가 마녀로 몰린다. 윌리엄은 자신이 받은 주교의 편지에 우연히 쏟아진 포도주 덕에 currius라는 글자를 읽게 된다. 그가 받은 편지는 어쩌면 자유영혼의 형제단이나 성전 기사단의 명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괴한에게 습격당해 편지를 빼앗겨 진실은 알 수 없었다. 10년이나 이탈리아를 주유한 뒤 영국으로 돌아간 윌리엄은 currius가 어쩌면 메르쿠리우스일수도 있다는 정보를 듣고 주교가 남긴 편지가 연금술의 비방이고, 제롬 사제가 범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상의 이야기들에 대해 화자는 "대저 인간이 만들어낸 글이라는 것은, 기호라는 것은, 어떤 실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기호를, 선행하는 기호를 소환할 뿐이며, 원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신의 서고에나 존재할 것이다. 요컨대, 나는 그림자의 그림자의 그림자......를 더듬고 있는 꼴이었다." 라고 말하며 이상의 기록들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그리고 자신이 읽었던 판본이 어디까지가 원본에 가까운지 모르겠다고 술회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프리퀄 소설을 이문열 문체로 작성한 듯한 <황금사과>는 연금술의 최종 목적이자 절대진리를 상징하는 '황금'과, 인류가 최초로 신을 배반한 상징 과일인 '사과'를 합성한 제목으로 김경욱의 손에 의해 쓰여졌다.
김경욱은 이 책이 '텍스트'임을 거듭 강조하며 포스트모던적인 시각으로 읽어줄 것을 권유한다. 포스트모던이 곧 불가지론이 아닐진데, 왕왕 포스트모던은 알 수 없음, 도달할 수 없음으로 귀결되는 듯 하다. 거대담론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세계 개조의 원대한 이상이 처참한 패배로 귀결된 후 밀어닥친 포스트모던의 물결은, 그래서 패배와 허무의 색채를 띤다. 양파를 까고 까서 실체를 파악하려 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눈가에 맺힌 눈물 뿐이라는 식의 허무주의. 나는 그런 식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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