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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 죽음을 앞둔 철학자가 의료인류학자와 나눈 말들
미야노 마키코.이소노 마호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1년 3월
평점 :
이 책은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宫野真生子)와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磯野真穗)가 주고 받은 편지 모음집이다.
미야노 마키코(宫野真生子)는 후쿠오카대학 인문학과 교수로 인간과학 박사로 일본 철학사를 연구했다. 20세기 초 철학자인 구키 슈조가 연구한 우연성에 천착한 연구를 진행하였고, 저서로 <우리는 왜 사랑하며 살아가는가: '만남'과 '연애'의 근대 일본 정신사>, <마주침의 아련함: 구키 슈조의 존재논리학과 해후의 윤리> 등이 있다.
이소노 마호(磯野真穗)는 인류학자이자 국제의료복지대학 부교수로 문학 박사이며 전문 분야는 문화인류학과 의료인류학이다. 저서로 <왜 평범하게 먹을 수 없는가: 거식과 과식의 문화인류학>, <의료인이 말하는 정답 없는 세계: 목숨을 지키는 이들의 인류학> 등이 있다.
미야노 마키코는 암이 재발하여 자신의 몸이 암세포에 의해 침식 당하던 즈음인 2019년 4월 27일, 이소노 마호에게 첫 편지를 보낸다. 그 후 병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2019년 7월 9일 이노소 마호로 부터 마지막 답장을 받고 며칠 뒤인 7월 22일 영면한다.
철학자와 의료인류학자는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우연한 시점에 질병을 얻게 된 상황을 철학적으로 고찰하려 애를 쓴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자면 "죽음은 분명히 다가온다. 다만 지금이 아닐 뿐이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철학자와 의료인류학자는 하이데거, 구키 슈조, 프리드리히 셸링, 팀 잉골드 등을 인용하며 암 발병이라는 우연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생을 대해야 하는지, 지금의 우연이 필연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탐구한다.
편지글 중 인상깊었던 구절들을 옮겨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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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일상에 쫓기는 인간에게 '죽음'이란 무엇인지 질문하고 다음처럼 말했습니다. "죽음은 분명히 다가온다. 다만 지금이 아닐 뿐이다."(26p)
'언제 죽어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이라는 말에서 기만을 느끼는 까닭은 죽음이라는 도착지가 확실하다고 해도 그 도착지만 보고 지금을 살아간다면 시시각각 변하는 인생의 가능성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32p)
환자가 듣는 이야기에는 미래에 대한 의료인의 예상과 더불어 그 예상 속에서 환자가 취해야 하는 이상적인 행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환자는...... 의료인이 제시한 확률에 따라......제일 결과가 좋은 쪽을 고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내 몸은 하나뿐이라 길도 하나만 골라야 합니다.(43p)
"암이 나으면 뭐가 가장 하고 싶나요?"라는 물음은 은연중에 '낫지 않으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합니다.(48p)
이 세상 만물의 근본에는 최종적으로 왜 지금처럼 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수수께끼가 남습니다......이렇게 최종적으로 남는 수수께끼를 구키 슈조는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셸링의 용어를 빌려 '원시우연(Urzufall)' 이라고 불렀습니다. 구키 슈조는 원시우연을 고려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결국 필연이란 없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매 순간 갖가지 원인이 우연히 겹쳐서 '지금'이 태어나고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미래가 펼쳐지는 식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성립되는 것 아닐까요. 구키 슈조는......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지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우연이다. 우연은 '현실의 생산점'이다. (102-103p)
불운에...... 얌전히 따르면 ㅜ자신의 존재를 '환자'라는 역할에 고정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놓아 버리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불행이 생겨나는지도 모릅니다......불운이라는 부조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인생을 고정한 순간 불행이라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129p)
불운이란 한 줄로 늘어선 여러 가능성 중 실제로 한 가지(점)가 일어난 것입니다. 한편 불행은 이미 일어난 일을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딘가에 두고 의미를 부여한 결과입니다. 그렇기에 불운은 점, 불행은 선이라 할 수 있다.(149p)
인간은 죽음을 제어할 수 없고 언제 죽음이 닥칠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준비한들 충분할 수는 없습니다. 저의 인생은 무언가 하는 도중에 중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이란 완성될 수 없으며, 인간은 항상 '자신의 미연' - 아직 목적지로 가는 도중- 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180p)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여 미완결인 채 끝날 수밖에 없는 인간이 과연 미래에 대해 미리 결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죽음의 가능성을 일단 생각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미래에 대해 결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약속을 맺습니다......그처럼 무모한 모험, 또는 도박을 눈앞의 상대에게 '지금' 표명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184p)
제가 우연에 의문을 품고 '없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을 계속 설명하려 한 뿌리에는 무(無)에 사로잡혀도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애쓰는 삶에 대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없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을 설명함으로써 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 하는 집착이 있었지요.(199p)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팀 잉골드가 쓴 책 <선들>......에서 '궤적과 연결선'을 다룬 장. "역사 속에서 선(궤적)을 만들어내던 운동이 점차 선(궤적)에서 없어지는 경위를 밝히는 것"......최종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도보 여행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세계를 지각하고 그 세계와 친밀감을 나누며 통과해가는 일종의 운동입니다. 그렇게 운동함으로써 궤적(선), 즉 발자취가 새겨진다고 하지요. 그런데... 도보 여행이 수송으로 변하는 순간......출발지와 도착지라는 점과 점을 직선으로 연결하여 화물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 횡단시키는 행위......수송되는 동안 승객에게 다가오는 풍경, 소리, 감각은 승객을 옮기는 움직임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209p)
함께 운동하여 계속 선을 그리면서 세계를 통과하는 것, 그러는 와중에 서로를 기분 좋게 하는 언동을 발견하고 그 발견을 발자취로 남긴 다음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관계성을 만드는 것이란 바로 이렇게 앎과 깨달음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움직임(운동)(214p)
제가 돌봄을 받을 뿐인 약자가 된다면 모두들 친절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면 '돌보는 자 - 돌봄을 받는 자'라는 고정적인 형식이 생겨나고, 그 매뉴얼을 따르면 일단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전혀 행복하지 않겠죠(251p)
구키 슈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뚜렷이 나타난 상황의 우연성과 직면하여 정열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무력無力한 초력超力이 운명의 자리"라고요. 풀어서 써보면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우연에 휘말리면서(무력) 그 우연에 대응하는 와중에 자신이란 무엇인지 발견해내고 우연 속을 살아가는 것(초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59p)
자연 발생만으로는 우연이 일어날 수 없으며, 우리가 그곳에 있기에 우연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각자 끌어낼 용기를 품고, 우연을 필연으로서 받아들일 각오를 지닌 채 만났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는 이와 같은 근원적 만남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 만남을 위해서는 선을 그리겠다는 각오, "연결점이 되지 않으려 저항하면서 사람들과 진실하게 마주하고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겠노라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용기를 지니고 우연을 붙잡아 끌어낸다면, 근원적 만남이 가득한 세계에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의 그물을 짜 넣을 수 있습니다.(264-2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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