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 죽음을 앞둔 철학자가 의료인류학자와 나눈 말들
미야노 마키코.이소노 마호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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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宫野真生子)와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磯野真穗)가 주고 받은 편지 모음집이다.

미야노 마키코(宫野真生子)는 후쿠오카대학 인문학과 교수로 인간과학 박사로 일본 철학사를 연구했다. 20세기 초 철학자인 구키 슈조가 연구한 우연성에 천착한 연구를 진행하였고, 저서로 <우리는 왜 사랑하며 살아가는가: '만남'과 '연애'의 근대 일본 정신사>, <마주침의 아련함: 구키 슈조의 존재논리학과 해후의 윤리> 등이 있다.

이소노 마호(磯野真穗)는 인류학자이자 국제의료복지대학 부교수로 문학 박사이며 전문 분야는 문화인류학과 의료인류학이다. 저서로 <왜 평범하게 먹을 수 없는가: 거식과 과식의 문화인류학>, <의료인이 말하는 정답 없는 세계: 목숨을 지키는 이들의 인류학> 등이 있다.

미야노 마키코는 암이 재발하여 자신의 몸이 암세포에 의해 침식 당하던 즈음인 2019년 4월 27일, 이소노 마호에게 첫 편지를 보낸다. 그 후 병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2019년 7월 9일 이노소 마호로 부터 마지막 답장을 받고 며칠 뒤인 7월 22일 영면한다.

철학자와 의료인류학자는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우연한 시점에 질병을 얻게 된 상황을 철학적으로 고찰하려 애를 쓴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자면 "죽음은 분명히 다가온다. 다만 지금이 아닐 뿐이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철학자와 의료인류학자는 하이데거, 구키 슈조, 프리드리히 셸링, 팀 잉골드 등을 인용하며 암 발병이라는 우연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생을 대해야 하는지, 지금의 우연이 필연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탐구한다.

편지글 중 인상깊었던 구절들을 옮겨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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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일상에 쫓기는 인간에게 '죽음'이란 무엇인지 질문하고 다음처럼 말했습니다. "죽음은 분명히 다가온다. 다만 지금이 아닐 뿐이다."(26p)

'언제 죽어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이라는 말에서 기만을 느끼는 까닭은 죽음이라는 도착지가 확실하다고 해도 그 도착지만 보고 지금을 살아간다면 시시각각 변하는 인생의 가능성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32p)

환자가 듣는 이야기에는 미래에 대한 의료인의 예상과 더불어 그 예상 속에서 환자가 취해야 하는 이상적인 행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환자는...... 의료인이 제시한 확률에 따라......제일 결과가 좋은 쪽을 고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내 몸은 하나뿐이라 길도 하나만 골라야 합니다.(43p)

"암이 나으면 뭐가 가장 하고 싶나요?"라는 물음은 은연중에 '낫지 않으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합니다.(48p)

이 세상 만물의 근본에는 최종적으로 왜 지금처럼 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수수께끼가 남습니다......이렇게 최종적으로 남는 수수께끼를 구키 슈조는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셸링의 용어를 빌려 '원시우연(Urzufall)' 이라고 불렀습니다. 구키 슈조는 원시우연을 고려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결국 필연이란 없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매 순간 갖가지 원인이 우연히 겹쳐서 '지금'이 태어나고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미래가 펼쳐지는 식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성립되는 것 아닐까요. 구키 슈조는......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지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우연이다. 우연은 '현실의 생산점'이다. (102-103p)

불운에...... 얌전히 따르면 ㅜ자신의 존재를 '환자'라는 역할에 고정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놓아 버리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불행이 생겨나는지도 모릅니다......불운이라는 부조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인생을 고정한 순간 불행이라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129p)

불운이란 한 줄로 늘어선 여러 가능성 중 실제로 한 가지(점)가 일어난 것입니다. 한편 불행은 이미 일어난 일을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딘가에 두고 의미를 부여한 결과입니다. 그렇기에 불운은 점, 불행은 선이라 할 수 있다.(149p)

인간은 죽음을 제어할 수 없고 언제 죽음이 닥칠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준비한들 충분할 수는 없습니다. 저의 인생은 무언가 하는 도중에 중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이란 완성될 수 없으며, 인간은 항상 '자신의 미연' - 아직 목적지로 가는 도중- 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180p)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여 미완결인 채 끝날 수밖에 없는 인간이 과연 미래에 대해 미리 결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죽음의 가능성을 일단 생각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미래에 대해 결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약속을 맺습니다......그처럼 무모한 모험, 또는 도박을 눈앞의 상대에게 '지금' 표명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184p)

제가 우연에 의문을 품고 '없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을 계속 설명하려 한 뿌리에는 무(無)에 사로잡혀도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애쓰는 삶에 대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없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을 설명함으로써 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 하는 집착이 있었지요.(199p)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팀 잉골드가 쓴 책 <선들>......에서 '궤적과 연결선'을 다룬 장. "역사 속에서 선(궤적)을 만들어내던 운동이 점차 선(궤적)에서 없어지는 경위를 밝히는 것"......최종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도보 여행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세계를 지각하고 그 세계와 친밀감을 나누며 통과해가는 일종의 운동입니다. 그렇게 운동함으로써 궤적(선), 즉 발자취가 새겨진다고 하지요. 그런데... 도보 여행이 수송으로 변하는 순간......출발지와 도착지라는 점과 점을 직선으로 연결하여 화물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 횡단시키는 행위......수송되는 동안 승객에게 다가오는 풍경, 소리, 감각은 승객을 옮기는 움직임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209p)

함께 운동하여 계속 선을 그리면서 세계를 통과하는 것, 그러는 와중에 서로를 기분 좋게 하는 언동을 발견하고 그 발견을 발자취로 남긴 다음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관계성을 만드는 것이란 바로 이렇게 앎과 깨달음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움직임(운동)(214p)

제가 돌봄을 받을 뿐인 약자가 된다면 모두들 친절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면 '돌보는 자 - 돌봄을 받는 자'라는 고정적인 형식이 생겨나고, 그 매뉴얼을 따르면 일단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전혀 행복하지 않겠죠(251p)

구키 슈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뚜렷이 나타난 상황의 우연성과 직면하여 정열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무력無力한 초력超力이 운명의 자리"라고요. 풀어서 써보면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우연에 휘말리면서(무력) 그 우연에 대응하는 와중에 자신이란 무엇인지 발견해내고 우연 속을 살아가는 것(초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59p)

자연 발생만으로는 우연이 일어날 수 없으며, 우리가 그곳에 있기에 우연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각자 끌어낼 용기를 품고, 우연을 필연으로서 받아들일 각오를 지닌 채 만났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는 이와 같은 근원적 만남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 만남을 위해서는 선을 그리겠다는 각오, "연결점이 되지 않으려 저항하면서 사람들과 진실하게 마주하고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겠노라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용기를 지니고 우연을 붙잡아 끌어낸다면, 근원적 만남이 가득한 세계에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의 그물을 짜 넣을 수 있습니다.(264-2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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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X들 안전가옥 FIC-PICK 11
서미애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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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미애의 <거짓말의 발톱>은 경기 호황기에 애널리스트와 결혼해서 반짝이는 삶을 사나 싶던 주인공이 경기가 불황으로 돌아서자 이혼한 뒤 몰락의 길을 걷는 이야기다. 현실에서 복구가 불가능해진 주인공은 SNS에서 손쉬운 재기를 노리고, 거짓의 이자가 불어나 결국 호된 빚잔치를 하게 된다. 미국에 갔던 주인집 노파가 일찍 돌아오자 칼을 휘두르는 손쉬운 결말은 다소 진부하다.

송시우의 <술래의 역습과 피 흘리는 다수>는 '은둔 청년의 이상 동기 범죄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차 위에 물이 떨어져서 곰팡이가 핀다'는 말이나, 증거 '은멸' 이라는 알 수 없는 단어 등에 자꾸 흐름이 끊긴다. ('은멸'이라는 단어는 두 번이나 나오니 편집상 오타는 아니리라) 피해 망상 외 범인 심리에 관한 면밀한 분석이 없어 아쉽다.

정해연의 <원해>는 수록작품들 중 가장 소설꼴을 갖추고 있다. 스토킹을 피해 지방으로 내려간 주인공이 친한 선배에게 다시 배신 당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 이면의 추악함을 들춰낸다.

홍선주의 <Crazy Love>는 이렇다 할 매력 포인트가 없다. 외딴 섬에서 촬영하는 만남 프로그램 진쟁 중 사망자가 발생한다. 타살이 분명한 상황에서 대타로 나간 주인공이 경찰공무원 준비중이라는 이유로 사건에 살짝 개입하나 어설픈 행동이었을 뿐이고 진실은 동성애인의 소행이었다는 내용이다.

이은영의 <히즈 마이 블러드(He's my blood)>는 쓰다 만 습작 느낌이다. 피가 환생해서 사람처럼 변한 뒤 본래 주인을 돕는다는 설정도 공감이 가지 않고, 줄거리도 난삽하다.

한새마의 <잠든 사이에 누군가>는 윌라 오디오북으로 들었던 작품인데 한 여성이 함정에 빠져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과정을 공포스럽게 잘 그렸다. 다만 소재나 줄거리에서 오리지널리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문제.

<미친X들>은 미스터리 소설을 쓰는 여성 작가 모임인 미스 마플 클럽의 두 번째 단편집이다. 첫 번째 단편집은 <파괴자들의 밤>.

작품집의 테마는 Crazy인데, 작품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 정제되지 못한 감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 그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아이디어에서 형상화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 채 혼자만의 중얼거림으로 끝나는 작품도 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98231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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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자도서]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 제1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리더스원 큰글자도서
조영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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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는 6학년 겨울 방학을 맞아 목하 첫 몽정을 치룬 참이다. 상대는 같은 빌라 102호 소연이었는데,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애가 몽정 상대로 꿈에 등장한 것은 뜻밖이었다.

'나'의 가족은 건물발파기술자였으나 이제는 다쳐서 리모컨을 끼고 TV 드라마만 보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서 중고트럭에 의지해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 그리고 장애가 있어 늦된 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는 곳은 청운연립 빌라 옥상의 무허가 컨테이너다.

어찌됐건 몽정 치룬 '내'가 밖으로 나와보니 달동네는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때 온 몸이 흰 털로 덮인 하얀 여우가 나타났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지난 여름, 형이 동물원 여우 우리에 빠져 여우에게 공격당할 뻔 하자 아버지가 여우를 돌로 내리쳐 죽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최초로 쓸쓸함의 의미를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섹소폰을 불며 산기슭에 사는 노인 전인슈타인에게 하얀 여우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인슈타인은 여우 이야기를 듣고도 그저 갸웃할 뿐이었다.

겨울에 접어 들면서 엄마는 중고트럭을 맡기고 포장마차를 빌려왔다. 포장마차 신메뉴가 인기를 끌자 손님이 늘었고, 중고트럭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때보다 돈이 조금 더 들어왔다. 그리고 엄마는 립스틱을 바르고 꽃무늬 셔츠를 입은 채 일탈의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어쩐지 그런 상황이 불안하기만 하다.

그러는 중에 나는 샛별문구 곱추 여자에게 꼬임을 당해 인형 눈을 붙이고 푼돈을 얻어 쓰다 끝내 성추행을 당한다. 얼마 뒤 샛별 문구 여자는 모자란 형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 '나'는 형에게 악을 쓰며 곱추여자를 찾아가지 말라고 한다.

어느 날 샛별문구는 원인 모를 화재로 타버린다. 그리고 아버지가 폭파하고 싶었던 64빌딩도 원인 모를 이유로 무너진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전인슈타인이 사라지며 섹소폰을 나에게 남겨주었고, 빌라는 재개발 구역에 편입 되었으며, 엄마는 용역깡패들이 부숴버린 포장마차 대신 중고트럭을 다시 가지고 온다. 일탈의 기운은 사라졌다. '나'의 가족은 이사를 가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통과의례 이야기는 상당히 다루기 어려운 글감이다. 게다가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새의 선물> 과 같은 괄목할 작품들을 읽은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비교의 대상으로 올릴 수밖에 없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는 이런 점에서 상당히 불리한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불리한 출발점을 상쇄할 만한 장점이 눈에 띄지 않는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는 '아 그렇구나, 아 그랬구나' 하는 정도의 몰입감 밖에 주지 못하는 밋밋한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제11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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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트 마지막 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34
에드먼드 클레리휴 벤틀리 지음, 손정원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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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의 거물 시그즈비 맨더슨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장마다 일대 공황의 폭풍우에 휩쓸렸다. 물가는 지진으로 탑이 무너지듯 폭락했고, 월가는 아비규환에 찬 지옥을 연상케 했다. 투자기업이 많은 미국 곳곳에서 파산하는 사람이 나타나 숱한 사람들이 허무하게 자살했고, 유럽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 전개되었다. 월가가 폭락에 빠지는 것을 시그즈비 맨더슨이라는 거물이 가까스로 억누르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레코드> 신문사는 이 사건을 파헤쳐 진상을 밝혀 낸다면 특종은 따논 당상이라고 생각해 전직 화가이자 현직 탐정인 트렌트를 초청한다.

이에 응한 트렌트는 사건 현장으로 가기 전 나다니엘 버튼 카플스씨와 면담을 하는데, 그는 맨더슨의 아내 메이벨의 고모부였다. 카플스 씨는 맨더슨이 메이벨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맨더슨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카플스를 통해 알아낸 바에 따르면 맨더슨은 눈에 총을 맞아 사망했는데 권총이 주변에 떨어지지 않은 점, 양쪽 손목이 벗겨져 멍이 든 점 등으로 보아 살해된 것 같았다. 옷은 그런대로 차려입은 상태였지만 평상시와 달리 서두른 흔적이 있었고, 구두끈도 평상시와 달리 흐트러진 상태였다. 또 회중시계가 반대 주머니에 들어있고 틀니를 착용하지 않은 점 등이 특이했다. 그가 서둘러 외출했다고 생각한다면 납득할 수도 있었지만 어딘지 이상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트렌트는 맨더슨이 아내 메이벨과 소원하게 지냈다는 점, 그가 비서 존 머로우와 아내 메이벨의 관계를 의심했던 점 등에 착안해 조사를 시작하고, 사건 현장에서 지문을 채취하여 증거를 확보한 뒤 범인이 머로우라는 결론에 이른다.

사실 머로우는 맨더슨이 사망한 시각 알리바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머로우가 자신이 맨더슨인 것처럼 꾸민 뒤 집에 돌아온 것으로 집안 사람들을 속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알아낸 트렌트는 자신이 알아낸 사실 일체를 메이벨에게 편지로 남긴 뒤 맨더슨의 저택을 떠난다. 트렌트는 메이벨에게 반해 그녀가 공범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사건을 덮어버린 것이다.

시간이 흘러 트렌트는 메이벨에 관한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다. 그녀는 자신의 예측과 달리 비서 존 머로우와 결혼하지 않았으며, 조용한 곳으로 이사 해 예술에 몰두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존 머로우 역시 어떤 여성과 결혼한 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맨더슨 집안과 관계를 단절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트렌트의 가정, 즉 메이벨과 존 머로우가 내연관계를 맺었고 이에 대부호 맨더슨을 살해하고 유산을 노렸다는 전제 자체가 완전히 틀렸다는 말이 아닌가! 이에 트렌트는 메이벨을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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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클레리휴 벤틀리는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과 매우 절친한 사이였는데, 그가 <목요일의 남자>를 벤틀리에게 헌정하자 벤틀리는 1912년 이 책 <트렌트 마지막 사건>을 체스터튼에게 헌정한다.

작중 탐정 트렌트는 전직 화가로 사물을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안락의자형 탐정인데, 제목과 달리 트렌트가 등장하는 시리즈가 있는 것은 아니다. 벤틀리는 본업이 소설가가 아니었으므로 계속 책을 낼 가망이 없다 보고 이렇게 제목을 지은 것이라 한다.

작품은 두 번의 반전이 있는데, 첫번째는 트렌트가 메이벨과 만나 진상을 들은 뒤 비서 존 머로우의 진술을 듣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맨더슨은 자신의 아내와 비서 존 머로우가 내연관계라고 의심하여 존 머로우를 없애기로 한다. 그래서 다량의 현금을 인출하고 다이아몬드를 매입한 뒤 상자에 담아 존 머로우에게 건낸다. 그리고 사업상 비밀을 요하는 일이라는 전제를 단 뒤, 밤새 운전해 가야 하는 장소로 가서 가명으로 투숙한 뒤 누군가를 만나 상자를 건내주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이는 존 머로우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략이었다. 맨더슨은 그가 떠나고 나면 자살하여 존 머로우를 강도살인범으로 몰 작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존 머로우가 맨더슨의 행동을 수상히 여겨 그와 헤어진 장소로 다시 갔다가 맨더슨의 사체를 발견하면서 고민에 빠진다. 자신이 진실을 말해도 배심원들이 받아들여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존 머로우는 그의 시체를 옮기고 자신이 맨더슨인 양 집안에 들어갔다 나와 알리바이를 만든다.

이상의 진실을 알게 된 트렌트는 메이벨의 자조 섞인 고백, 자신이 재혼하면 상속 유산이 무효가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을 듣고 그녀에게 청혼한다.

다른 반전은 이와 같은 사실을 메이벨의 고모부 카플스씨에게 고백했을 때 드러난다. 카플스씨는 심드렁하게 자신은 처음부터 존 머로우가 범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 이유를 묻자 뜻밖에도 '맨더슨을 쏜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닌가.

사실 맨더슨은 자살하려던 것이 아니라 총으로 자신을 쏘아 존 머로우의 강도상해로 몰려 했는데 그 일을 실행하려던 순간 카플스씨에게 목격당해 격투를 벌이다가 사고로 눈을 맞고 사망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안락의자 탐정의 추리 곳곳에 헛점이 발견되어 진실이 몇 번이나 뒤바뀌는 상황을 설정한 작가는 이 책을 쓴 의도에는 첫째, 기존 안락의자 탐정들이 독자와 모든 단서를 공유하지 않는 점, 둘째, 그들의 추리가 무오류가 아닌 이상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을 비판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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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사냥개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7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성희 옮김 / 해문출판사 / 198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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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사냥개>는 신비한 힘을 가진 수녀에 관한 이야기다.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수녀원을 점령하려 하자 마리 안젤리크라는 이름의 수녀가 기이한 힘을 발휘해 그들을 폭사시켜 모두 죽인다. 그리고 번개가 내린 벽에는 거대한 사냥개 모양의 자국이 남았다고 했다. 후에 의사 로즈가 수녀에 관해 조사한 뒤 그녀의 힘을 불완전하게 소유하게 되고 자신의 유복한 친척에게 벼락을 내려 죽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자신도 벼랑이 무너져 죽고 만다. 두 사건 모두 커다란 사냥개 같은 형상이 후에 남았다.

공포와 심리적인 요소를 버무린 B급 소설과 포와로가 등장하는 수수께끼 풀이 이야기 등을 뒤죽박죽 섞어 놓은 이 해문사판 단편집은, 본래 1933년에 발표된 오리지날 작품집과 구성에 차이가 있다. 1933년도판에 실린 작품은 위 목록 중 1번, 2번, 3번, 4번이고 나머지는 이런 저런 단편집에 실린 것을 모아 놓은 것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애거서 크리스티가 품고 있는 제국주의적 편견, 특히 동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자주 드러나는데 <아서 카마이클 경의 기묘한 사건> 같은 경우가 특히 그렇다.

  1. 죽음의 사냥개(The Hound of Death)

  2. 집시(The Gipsy)

  3. 등불(The Lamp)

  4. 아서 카마이클 경의 기묘한 사건(The Strange Case of Sir Arthur Carmichael)

  5. 목편꽃(Magnoliz Blossom)

  6. 개 다음에(Next to a Dog)

  7. 이중범죄(Double Sin)

  8. 말벌둥지(Wasp's Nest)

  9. 의상 디자이너의 인형(The Dressmaker's Doll)

  10. 이중단서(The Double Clue)

  11. 성역(Sanctuary)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975659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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