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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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적부터 진보적 성향을 견지하며 시 외엔 손 대지 않은 이적요. 그가 일흔이 다 된 나이에 제자라 할 수 있는 서지우 이름으로 세 권의 소설을 발표한다. 평단은 환호했고, 장르 소설 공모에서는 5천만원 상금까지 받았다. 장난스럽게 시작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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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은교라는 아이가 자신의 집 데크에서 잠이 든 모습을 본 시인의 내부에서 어떤 감정이 생겨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 감정이 사랑인지, 갈망인지, 아니면 노욕이나 권력욕인지 명확치 않았다. 확실한 것은 은교가 없었다면 자신의 의발을 물려주려 했던 서지우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2인자 또는 연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은교가 이적요 시인이 젊었을 적 추구했던 가치의 현현, 또는 뮤즈가 되어 번뇌의 씨앗이 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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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우와 은교가 이미 성적으로 맺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이적요의 번뇌가 깊어간다. 자신의 지난 삶이 재조명 되고 평가되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이적요는 허위를 벗어 던지고 하나의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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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라이터에 관한 가장 유명한 예는 로맹 가리가 필명 에밀 아자르로 발표한 소설 <자기 앞의 생>으로 콩쿠르 상을 탄 사건일 것이다. 평론가들은 신예 에밀 아자르를 치켜세우는 한편, 로맹 가리가 활기를 잃고 진부한 소설만 쓴다고 비판했다. 로맹 가리는 유서에 자신이 에밀 아자르였음을 밝힌다. 이로써 한 사람에 두 번 주어지지 않는다는 콩쿠르 상을 로맹 가리는 두 번 탔다.

로맹 가리 만큼 유명한 사건은 아니지만 스티븐 킹도 리처드 바크먼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해 결과적으로 평단을 조롱한 적이 있다. 스티븐 킹을 대중작가라 비판하던 평론가들이 리처드 바크먼은 극찬했다. 한 서점 직원이 우연히 둘이 동일 인물이 아니냐고 의심했고, 스티븐 킹이 이를 인정하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 양태는 로맹 가리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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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또 다른 삶에 대한 욕구와 갈망. 그 영원성과 일회성, 그 무거움과 가벼움은 이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밀도 깊게 다뤄진 주제다. 여기 있고 싶지 않은 욕망, 다른 것이고 싶은 갈망은 스스로를 조롱거리로 내던지는 위험을 수반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그 환상에 몸을 내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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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요가 자신의 소설을 서지우를 통해 발표한 것은 시가 소설보다 우월한 장르라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소설 작품들이 잊히는 것 보다는 서지우의 이름으로라도 각광 받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그것은 '참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은교라는 존재가 나타나자 허위의 장막이 벗겨지며 게임의 룰이 바뀐다. 이적요는 젊은 시절을 진보적인 가치에 헌신하고 시라는 장르에 천착한 결과 '은교'라는 대상물을 획득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고 느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서지우라는, 자신이 그 지위를 부여해준 후계자가 '은교'를 차지하는 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단순한 질투와는 또 다른 감정이다.

이스마엘 카다레의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에서 2인자를 제거하는 권력자, 장정일의 <중국에서 온 편지> 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진시황의 이야기가 이제 이적요의 서지우 제거 이야기로 다시 변주된다.

소설을 물려주고 시혜를 베푸는 아름다운 의발 전수 스토리가 치정극으로 돌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러므로 사랑과 치정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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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은교는 이적요의 내밀한 욕망을 자극하 뮤즈와 같은 존재이므로 지고지순한 이미지여야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에서 험버트 험버트가 상상하는 님프 이미지는 머릿 속에서나 존재할 뿐 실제 롤리타는 님프가 아닐 뿐 아니라 저열한 작가와 눈이 맞아 험버트 험버트를 배신하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흔한 여자였을 뿐이었다. 어쩌면 은교는 <돈키호테>의 둘시네아 같은 존재는 아니었을까...

문제는 이적요의 잔여수명이 길지 않다는 데 있다. 이제 와서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욕망과 갈망의 나선계단에서 내려올 수 있을까... 그냥 그 굴레에서 스스로를 속여가며 연극을 계속하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을까? 젊은 후계자, 젊은 아들들을 저주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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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헌신해 겨우 얻은 것들을 카페 안의 저들이 독점하고 있다고 나는 새삼 느꼈다. 화가 났다. 달려내려가 희희낙락하는 저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너희가 지금 누리는 달콤한 인생을 누가 주었냐고,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고, 마음대로 너희들만 누릴 권리는...없다고.(1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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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두고 이적요는 롤리타와 같은 존재 하나를 '뒤늦게 발견'했다. 발견이 늦은 이유는 이미 사그러졌다고 생각했던 정념이 새로이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손에 쥔 금덩이가 사실은 도금된 것에 불과하다고 인정한 뒤, 왕좌에서 내려와 덜 떨어진 후계자의 즉위식을 봐야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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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2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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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고요한 욕망이었다. 한없이 빼앗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내 것을 해체해 오로지 주고 싶은 욕망이었다. 아니 욕망이 아니라 사랑, 이라고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비로소, 욕망이 사랑을 언제나 이기는 건 아니라는 확고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3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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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적요의 이와 같은 고백이 진실한 내면의 소리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 독백인지는 모를 일이다. 마침내 이적요는 자신의 후계자, 자신의 아들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결행한다. 이적요는 임종할 때까지 서지우를 죽였다고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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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될 말인가. 진시황은 불멸하지 못했고, 후계자를 제거한 독재자는 제1의 후계자를 제거했을 뿐이다. 지금 내가 이룩한 모든 것은 다음 세대가 손쉽게 차지하고, 아름답고 어린 뮤즈는 성적 불능에 이른 이적요가 아니라 서지우의 차지가 될 뿐이다. 과거의 왕이 가진 왕관의 힘은 현재의 거렁뱅이가 가진 동냥그릇만큼의 힘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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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요의 다음과 같은 음울한 고백이야말로 '노인을 위한 나라'의 새로운 고백송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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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이라고, 시대라고, 역사라고 불렀던 것들이 사실은 직관의 감옥에 불과했단는 것을, 시의 감옥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시들은 대부분 가짜였다.(394p)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남성 이적요와 서지우의 착각은 은교가 어느 누구의 의미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은교를 의미 짓고, 재단하고, 머릿속으로나마 소유하고 내돌렸지만 은교의 본질에 접근한 적이 없다. 작품 속에서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몸 파는 여자의 대사가 떠오른다. "남자들, 불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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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두박질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25
마이클 프레인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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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철학자이자 미술사를 연구하는 마틴 클레이는 안식년 동안 책을 쓰려 하지만 뜻대로 진척되지 않자 분위기 환기를 위해 시골로 내려간다. 하지만 시골은 마틴의 생각과 많이 달랐다. 여기 저기 널려 있는 허섭 쓰레기들과 추워 보이는 집, 그리고 남성미를 풀풀 풍기는 속물 지주 이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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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이름은 토니 처트였는데 과장된 태도로 마틴 가족을 환영하며 식사에 초대했다. 토니는 식사 중 나눈 대화에서 마틴과 아내 케이트의 직업이 철학, 미술사, 도상학 등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알게되자 눈을 빛내며 자신의 그림을 보아달라 했다. 그는 꽤 값나가는 그림들을 보여 주었는데 마틴은 벽난로 검댕 떨어지는 용도로 방치된 작품에 눈이 갔다. 그 그림은 아무리 봐도 16세기 네델란드 화가 브뢰겔의 작품으로 보였다. 브뢰겔은 풍경을 풍경으로 보며 그 자체를 그림의 주제로 삼은 최초의 화가로 만약 진품이라면 엄청난 가치를 지닐 터였다. 하지만 토니는 그 그림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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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는 그림을 소더비나 크리스티로 가져가면 수수료를 내야 하고 눈탱이 맞을 우려가 있다며 마틴에게 그림을 적당한 값에 처분해줄 수 있는지 묻는다. 마틴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만약 토니가 원하는 정도의 값을 받아주면서 슬쩍 브뢰겔의 그림을 끼워 넣으면 엄청난 부를 거머쥘 수도, 분실된 것으로 알려진 그림을 발견한 미술사가로 이름을 남길 수도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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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은 일단 그림의 진위 여부와 언제 어떻게 분실된 작품인지 알아보기 위해 남몰래 런던을 오가며 조사를 시작한다. 그 결과 마틴이 알아낸 사실은 다음과 같다.

서양 최초로 풍경을 그림의 독립적인 주제로 삼았으며, 천둥이나 벼락 그리고 이단적인 생각까지 그림에 담은 것으로 평가되는 그 위대한 화가는 한 해의 위대한 변화를 담은 연작을 그렸다. 토니 처트의 집에 방치된 그림은 그 연작의 첫 번째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었다. 1959년과 1659년의 어느 시점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그 작품이 마틴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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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은 토니 처트를 속이기 위해 가상의 벨기에인이 그림에 관심 있어 한다고 운을 띄운다. 그리고 토니 처트가 팔고자 하는 그림과 브뢰겔의 작품을 묶어 거래한다는 계획을 들려주는 한편, 거래 대금 마련을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일으킨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마틴의 계획은 자꾸만 지연된다. 또다른 미술사가가 나타나 브뢰겔의 작품을 알아볼 위기가 찾아오는가 하면, 비밀리에 진행한 계획을 케이트에게 들키고, 브뢰겔의 작품이 진품이라는 확신이 흔들리기도 한다. 또 토니 처트의 아내 로라가 중간에 껴들어 사기 계획이 치정극으로 흘러갈 위기가 닥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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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토니의 동생이 나타나 유산과 상속세 문제로 변질되어 한바탕 활극이 벌어지고 브뢰겔의 작품은 소동 한가운데 불타버리고 만다. 그리고 나머지 미술품들은 다른 이에 의해 처분된다. 모든 사건이 끝난 뒤 토니는 이렇게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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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이후로 내 손가락을 빠져나간 게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것 가운데 단 하나라도 그 진정한 가치와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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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프레인은 1933년 런던 태생으로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일하다 철학을 공부한 뒤 기자와 칼럼니스트를 거쳐 작가가 되었다. <곤두박질>은 1999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네델란드 화가 브뢰겔(피터르 브뤼헐)의 사라진 작품을 소재로 스스로 판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철학자 이야기다.

인간은 살면서 수많은 곤경에 처하지만 자신이 판 함정은 그 깊이와 폭이 남다르다. 자신이 만든 연극 무대에서 남과 자신을 아울러 속여가며 연기해야 하기에 스스로 판 함정에 허우적대는 것은 블랙코미디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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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누군가를 만나 사랑할 수 있을까
임영태 지음 / 창해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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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하기는 10년째 목장을 운영하며 조용히 생활하고 있다. 아내는 아이를 잃고 난 뒤 자살 시도 끝에 정신을 놓아 버렸다. 둘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었다. 젊었을 적 이상과 꿈은 스러져 가뭇 없어진 지 오래고, 정념도 갈망도 없는 나날의 반복되었다. 그것이 한하기에게 남은 인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손찌검으로 결혼생활에 파경을 맞게 된 차영서가 우연히 목장에 들게 된다. 둘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끌렸다.

한하기는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피를 돌게 하고 근육을 부풀게 함을 느낀다.

한하기는 사춘기 소년처럼 얼굴 붉혀가며 차영서를 그리워했고, 말로 내뱉어지지 않는 내밀한 의사를 읽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차영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실이라는 제약 때문에 사소한 어긋남이 생기고 관계의 지속이 어려워지자, 한하기는 약사라는 사소한 단서 하나를 쥐고 서울 동네를 이 잡듯 뒤지기까지 한다.

마침내 다시 만난 둘은 앞으로의 인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다. 각자 신변을 정리한 뒤 만나기로 한 날, 떠나려는 한하기에게 아내가 인사를 건낸다. 불구가 되어 의사표시도 온전하게 하지 않던 아내의 '잘 갔다오라'는 그 말에 한하기는 멈춰선다. 그리고 자신이 꿈 꾸었던 다른 생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직감한다.

미안하다는 말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밖에 없다는 한하기의 말에 차영서가 고속도로를 타고 떠난다. 발작적으로 한하기는 그 뒤를 쫓는다.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어쩌려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한하기는 트럭의 속도를 높여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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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어느 마을에 립 밴 윙클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사냥을 나갔다가 네델란드인(유령)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논 뒤 잠에 든다. 깨어나 집으로 돌아와 보니 20년의 세월이 흘러 미국은 독립이 되어 있었고 자신은 백발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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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워싱턴 어빙이 1819년에 쓴 단편 <립 밴 윙클>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그저 신비로운 이야기로 여겼다. 그런데 나이를 먹은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는 새로운 사랑에 대한 알레고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처가인 립 밴 윙클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누군가와 새로운 사랑을 꿈꾸다) 돌아와 보니 미국은 독립이 되어 있고(모든 것이 달라져 있고), 자신은 백발이 된(더 이상 정념을 불태울 수 없는) 상황.

문제는 립 밴 윙클이 만난 사람들이 유령(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고, 되돌아온 그는 더 이상 누군가를 만나 사랑할 수 없는(호호백발) 상태가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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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소설은 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의 결말을 복기하게 만든다. 얽어맨 인연을 끊어내려 했으나 또 다른 수렁에 빠지고 만다는 음울한 결말의 걸작. 그것이 사랑이 변질되어 가는 필연적 속성이라면 인간의 삶은 얼마나 불가해한 것인가.

그런 음울한 생각 끝에 양희은의 노래를 차용한 <다시 누군가를 만나 사랑할 수 있을까>를 읽으면서 제목 앞에 '죽기 전에'를 붙여도 이야기가 되려나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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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어 가며 읽었던 구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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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깨달음이란 결국 한번은 비약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는 걸 내가 느끼게 된 것은 그 오랜 후였습니다. 육화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일종의 관통이 있어야 된다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우리는 단 한순간에 중심을 질러 이 세계의 배후, 생의 핵심과 대면합니다. 이를테면 시적인 비약이지요. 바로 그때, 한 사람이 서늘히 전율하면서 제 생의 중심에 도달합니다.(89-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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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호수라는 지명이 옛이야기 속의 이상한 마을 이름처럼 느껴졌다.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나올 수 없다는 마을.(120-1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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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꿈틀거림, 세포가 새로 생성되고 근육의 힘줄이 다시 팽팽해지고 있는 듯한 기분을 한하기는 느꼈다. 자기 안의 무언가가 빠르게 재배치되며 새로운 물질로 변형되고 있었다.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실제적인 진행으로 한하기는 그것을 느꼈다. 그건 분명 육체의 거듭남이었다. 어떤 소멸과 어떤 생성의.(1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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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서라는 여자가 자신에게 다가온 또 하나의 운명인 것은 분명했다. 그 운명을, 운명으로 만들 것인가 스쳐보낼 것인가. 그 선택은 이제 한하기가 자기 삶에 어떤 색깔을 칠하고 싶은가에 달려 있었다.(1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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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만드는 의미는 언제나 실제의 의미를 쫓아가지 못합니다. 의미가 극적일수록 말은 제한적이에요. 우리 삶 중에 어떤 순간들에 대해서는 그래서 말을 아껴야 하지요. 그 순간에 담겨 있는 진정으로 신성한 의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요. (1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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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라는 노래(1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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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없는 행위는 그 맹목성만으로 진실이 된다. 사랑이 바로 그렇다. 사랑은 사랑이어서 스스로 진실인 것이다. (2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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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는 말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야하는 말이에요(2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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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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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드라마를 찍고 난 뒤 버려진 강 기슭 세트장에 사람들이 모여 산다. '가족'으로부터 상처받고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들은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서로를 긍정하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새미가 마을 밖으로 나갔다가 조폭들의 눈길을 받는다. 성욕에 눈이 먼 조폭 하나가 새미를 뒤쫓고, 새미의 동생 준호가 조폭의 눈을 나뭇가지로 찔러 실명케 한다.

눈이 뒤집힌 조폭들이 떼를 지어 마을로 처들어올 기미를 보이자 가장 연장자인 영필은 새미를 마을 밖으로 내보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가족이 뭐냐?는 여산의 물음에 영필은 마음을 고쳐 먹는다. 이제 버려진 세트장에서 <7인의 사무라이>를 찍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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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발표된 소설로 문학평론가 차미령은 신자유주의 물결이 넘실대는 강 밖의 세계가 공동체를 위협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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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약한 고리를 솎아내고, 그들을 '배제된 자'로 만듦으로써, 전체의 안위를 구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약자들을 대변하는 것이라 호도하는 방식(2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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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반나치 투쟁을 이끈 루터교 목사 마르틴 니묄러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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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가 사회주의자를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 조합원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 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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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에 대해 생각했다. 핏줄로 이어진 것이 뭐라고 우리들은 그 사슬에 묶여 상처 받고, '말리는 시누이'의 궤변을 듣고, '자기 마음 편하자는 구성원'에 의해 화해를 강요 받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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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서 '가족'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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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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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단어는 핏줄로 이어진, 그것이 반쪽이든 반의 반쪽이든 혈연으로 연결된 구성원의 집합을 총칭하는 말이다. 핏줄이 이어지지 않았으면 법적으로라도 구속되어 있어야 한다.

어찌 보면 사전적 의미의 가족은 유산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 지를 법적으로 정해놓은 관계 같다. 혈연을 우선으로 유산을 배분하되, 법적으로 가족이면 거기까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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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본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소나티네>를 보면 야쿠자 두목 무라카와와 똘마니들이 해변가에 몸을 숨기고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모든 걸 잊고 웃고 떠들며 천진하게 지내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공동체나 가족의 이미지를 보았다. 물론 그 가족은 오래가지 못한다. 뿌듯한 공동체의 충일감은 대량 사살과 자살로 끝이 난다.

<소나티네>에서 모티브를 차용한 것이 틀림 없어 보이는 <달마야 놀자> 역시 재밌게 봤지만 끝내 <소나티네>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결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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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파탄에 이르렀고, 그 파탄의 주요한 원인으로 가장이 지목되며, 그로 인해 가족 안의 가장 약한 구성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흔이 남는다는 사실, 나아가 그 구성원들이 그들을 옭아맨 사슬로부터 자살적인 탈주를 감행한다는 사실은 외면하기 힘든 사회 심리적인 상징이다.(247p)

군림하고 제압하는 '부권'이 아니라 인정하고 보살피는 '부성'이 필요한(251p) 신자유주의 시대에 공동체와 생태주의의 해법을 제시한 성석제의 <위풍당당>은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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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산 스님.초롱불 노래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3
이즈미 교카 지음, 임태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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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산 스님

'나'는 우연히 기차에서 만난 고승과 여관방을 함께 쓰게 된다. 슈초라는 이름의 그 승려는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과거 행각승 시절에 겪었던 기이한 일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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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초가 히다산을 넘을 때 일이다. 먼저 출발한 약장수가 인적 끊긴 길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된 슈초는 그의 안위가 걱정돼 뒤따르기로 한다. 길은 점점 험해졌고 뱀과 거머리가 달려 들었다.

슈초가 갖은 고생을 해가며 길을 줄여 나가노라니 집 한 채가 보였다. 거기엔 아리따운 부인이 덜떨어진 사내와 살고 있었다.

부인은 슈초를 갖은 정성으로 대했다.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식사 시중을 들어주었으며, 잠자리를 보아 주었다. 부인이 풍기는 매력과 안온함에 빠져든 슈초는 도를 깨우치는 것 따위 잊고 현실에 안주해 한 세상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집에 드나드는 영감으로부터 부인이 알 수 없는 매력을 풍겨 그녀에게 연심을 품은 자들을 짐승으로 변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들은 슈초는 그 집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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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불 노래

에도시대의 인기작가 짓펜샤 잇쿠의 소설 <도카이도 도보 여행기>는 주인공 야지로베와 기타하치가 도카이도, 도쿄, 오사카를 여행하는 익살스러운 이야기다.

노(能)배우 온치 겐자부로와 쓰즈미(鼓) 명인 헨미 셋소는 소설 주인공의 행적을 따라 여행을 하고 있다.

그들이 구나와의 미나토야 여관에서 머물 때 일이다. 오미에라는 어설픈 기생이 이들을 접대하기 위해 들어왔는데, 그녀는 노래를 못했고, 샤미센도 잘 타지 못했다. 다만 한 남자로부터 배운 요쿄쿠(謠曲)만은 그럭저럭 할 수 있다며 보여준다.

온치 겐자부로는 충격을 받는다. 그녀에게 요쿄쿠 가르쳐준 남자가 다름아닌 자신의 조카이자 전인 기다하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다하치는 자신의 기예만 믿고 맹인 안마사 소잔을 치욕스럽게 하여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한다. 스승 온치 겐자부로는 기다하치를 파문하고 내쫓는다.

기다하치는 뒤늦게 자신의 교만을 후회했지만 때는 늦어 떠돌이 악사가 되어 하릴없이 전국을 떠돌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한 여인을 만나 요쿄쿠를 가르쳐 주는데, 그녀가 바로 오미에였다. 그리고 오미에는 죽은 맹인 안마사 소잔의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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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 교카는 1873년 2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어머니 스즈는 에도 출신으로, 노(能) 예능인 가계에서 자랐다고 한다. 1882년 12월 24일, 이즈미 교카의 어머니가 산욕열로 28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한다. 이 사건은 이후 이즈미 교카의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고야산 스님>의 슈초가 만난 아리따운 부인 역시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변형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는 요괴나 마녀의 형상을 띠고 이즈미 교카의 주변을 떠돌며 끊임없이 죽음으로 손짓한다. 주인공은 그 안온한 세계로 빨려들어갈 듯 하다. 거기엔 공포나 두려움보다 매혹과 향수의 분위기가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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