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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1967년, 컬럼비아 대학 2년생인 애덤 워커는 파티에서 루돌프 보른이라는 인물을 만난다. 그는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프로방스 시인 베르트랑 드 보른을 연상 시켰다. 드 보른은 자신의 잘린 머리통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기다란 램프처럼 앞뒤로 흔드는 자, 환각과 고문이 횡행하는 '지옥편'에서 가장 기괴한 인물 중 하나였다.
어쨌든 서른 여섯의 보른은 콜롬비아 대학 정경학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를 강의하는 교수였고, 마고라는 이름의 프랑스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다.
얼마 뒤 다시 만난 보른은 워커에게 잡지사를 창간해 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한다. 자신의 애인 마고가 워커를 도와 달라 했고, 마침 유산을 상속 받아 그 정도 돈을 댈 수 있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였지만, 워커에게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워커는 문학 청년 다운 열정으로 잡지 창간 준비에 열의를 보였지만, 마고와 자고 싶지 않냐는 보른의 교묘한 부추김과 마고의 유혹하는 듯한 태도 때문에 마고와 5일간 정사를 나눈다.
프랑스에 갔다 되돌아 온 보른은 워커와 마고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아는 눈치였는데도 화를 내기는 커녕 마고를 떼어낼 좋은 핑계가 생겼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길을 걷던 둘 앞에 갑자기 흑인 소년이 나타났다. 소년의 손에는 총이 쥐어져 있었고 워커는 공포에 사로 잡혔다. 하지만 보른은 평온한 태도로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 소년을 찌른다. 소년이 손에 든 총에는 총알이 들어 있지 않았다. 워커는 공포에 사로잡혀 구급차를 부르려 했지만 보른의 냉혹한 태도에 기가 질려 그러지 못한다. 다음 날 보른이 워커에게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협박 편지를 보냈기에 워커가 마음을 다잡고 경찰에 신고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지난 뒤였다. 하지만 이미 보른은 프랑스로 떠나버린 후였다.
이상의 원고는 애덤 워커가 쓴 자전적 소설 일부로, 원고 수취인은 콜롬비아 대학 시절 동기로 지금은 소설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짐이었다. 워커는 자신이 백혈병으로 천천히 죽어가고 있고, 남은 생이 1년을 넘지 않을 것 같다고 밝힌 뒤, 짐이 자신을 방문해 줄 수 있는지 궁금해 한다.
짐이 애덤 워커를 방문하기로 약속한 뒤 두번째 원고가 도착한다. 원고에는 <여름>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뒤, 애덤 워커는 도서관 부사서로 일하면서 누나인 그윈과 함께 자취한다. 둘은 어렸을 적 죽은 막내 동생 엔디를 추모하면서 생긴 묘한 동료 의식을 공유했다. 어느 날, 애덤 워커는 루돌프 보른의 이야기를 그윈에게 하는데 누나인 그윈은 어쩌면 보른의 행동들이 동성애적 갈망일 수도 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웨스트 107번가의 그 허름한 아파트에서 애덤 워커와 그윈은 묘한 동료 의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적인 비밀을 공유하기 시작하다 마침내 근친상간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둘은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했고 그런 일들이 매우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온갖 성적 언사들을 뇌까리며 둘은 서로의 몸을 탐닉했고 이런 일들은 애덤 워커가 교환학생으로 파리로 갈 때까지 계속 되었다.
<여름>을 읽은 짐은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있는 워커의 집을 찾아 갔지만 그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워커가 의붓딸 레베카에게 컴퓨터에 있는 모든 원고를 삭제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기에 짐이 받은 <가을에 대한 노트> 가 유일한 원본이었다.
프랑스에 가난한 고학생으로 간 워커는 파리에서 마고를 다시 만난다. 보른과 마고는 예전과 같이 몸을 섞는다.
마고는 때로 보른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가 스파이 일을 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또한 그에게 잔혹한 면이 있었고, 마고와 마고의 전 남친이 성행위하는 것을 보고 엄청나게 흥분했던 것으로 보아 그런 쪽의 도착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워커의 기대와 달리 뜻밖의 장소에서 보른과 재회한다. 보른은 여전히 어딘가 잔혹한 냄새를 풍기며 워커에게 접근했고, 워커는 그런 보른을 안심시키며 화해를 제안한다. 하지만 워커의 속마음은 보른에게 어떤 식으로든 복수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워커는 보른이 결혼할 예정인 엘렌과 그녀의 딸 세실에게 접근해 자연스러운 관계를 형성한다. 관계가 깊어지고 신뢰가 구축되면 보른의 만행을 백일하에 드러낼 계획이었다. 문제는 문학을 좋아하는 세실이 보른에게 반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워커는 자신이 택한 어느 시점이 되자 엘렌과 세실에게 보른이 과거 흑인 소년을 잔인하게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러나 엘렌과 세실의 반응은 워커가 기대한 그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보른이 이 사실을 알고 교묘한 계략으로 워커를 옭아매 워커는 프랑스에서 추방당하고 만다.
마지막 <겨울> 원고를 워커가 쓰지 않았으므로 짐은 그 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짐은 워커의 누나 그윈을 찾아가 워커의 원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윈은 근친상간은 없었다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짐은 그녀가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근친상간 하는 부분은 어쩌면 워커가 '일어나길 원했던', 그러나 '일어나지 않았던' 일일지도 몰랐다.
세실은 소설에 등장했던 인물 중 유일한 생존 인물이었다.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된 세실에게 워커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아주 어릴 적 사랑했던 워커를 여전히 마음 깊숙이 간직하고 있었다면서 눈물 짓는다.
세실의 어머니 엘렌은 끝내 보른과 결혼하지 않았다. 세실은 그 뒤 보른에게 연락하는데 보른은 자신이 외딴 섬에서 한가롭게 노후를 보내고 있다면서 꼭 한번 휴가를 보내러 오라고 초대한다. 세실도 그 제안이 매력적으로 느껴져 섬으로 가는데 보른은 그녀에게 결혼하자며 질척대며 온갖 주접을 떨었다. 결국 산 중턱에 있는 보른의 집에서 세실은 차도 없이 걸어 나온다. 평지로 나오니 50-60명의 흑인들이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다른 손에는 끌을 잡고 돌을 쪼개고 있었다. 그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오래도록 세실의 몸에 머물렀고, 여생 동안 그녀를 따라다닐 것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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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독특한 구성의 소설인데, 1부와 2부는 애덤 워커가 작성한 원고이고 3부는 편집자로 등장한 짐이 원고를 재구성한 것이며 4부는 원고 없이 생존자의 후일담을 듣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67년으로 반전 구호가 전 세계를 휩쓸던 시기이며, 세계적으로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는 1968년, 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일렉트릭 기타로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를 분출하던 1969년으로 이어진다.
문학에서 길을 찾으려던 애덤 워커는 냉전시대를 상징하는 냉혹한 스파이 보른이 제시하는 잡지사 창간 유혹에 마구 휘둘린다. 어린 워커는 교수로 분한 보른의 본성을 파악하지 못했고 그가 칼을 꺼내들어 흑인 소년을 죽인 뒤에야 실체를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때도 응당 해야할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머뭇대서 사실상 소년의 죽음을 방조하고 만다.
또 보른이 마고를 권하자 별다른 죄의식 없이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마고는 아무런 정치적 편향성도 없는 무색무취의 부르주아였다.
결국 1부의 워커는 냉전시대 힘에 굴복하고, 부르주아적 향락에 취해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인물이다.
2부의 워커는 막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근친상간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사후 밝혀진 바와 같이 근친상간은 그의 바람에 불과했을 뿐 실제 일어나지는 않은 일이었던 것 같다. 가족에서 위로와 안식처를 찾고자 했으나 실패한 워커는 파리로 떠난다.
3부에서 워커는 자신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고자 한다. 하지만 아직 미성숙한 세실은 워커에게 침을 뱉고, 엘렌 역시 워커의 말을 믿지 않는다. 게다가 워커는 보른의 간계에 휘말려 파리로부터 영구히 추방 당한다.
되돌아온 워커는 문학을 버리고 법률가로 평생을 살며 밥벌이를 하지만 끝내 4부를 완성하지 못한다. 인생의 마침표를 제대로 찍지 못한 그를 대신해 세실이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세실은 보른에게 침을 뱉었고,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평생 그를 기억했던 인물이다. 세실이 보른과 결별한 뒤 듣는 노동하는 자들의 망치 소리는 애덤 워커로 상징되는, 냉전과 반전운동, 그리고 68혁명을 거친 세대들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소리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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