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나무야 -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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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선물받은 책을 꺼내어 읽는다. 비닐 안에 창호지를 넣어 책을 싼 걸로 보아 인하대학교 앞 "새벽" 서점에서 산 책 같다. 책 표지를 넘기니 선물해준 이가 쓴 글이 보인다. 그 친구는 노래패에 몸 담고 있던 친구였다. 동아리가 달랐고, 지향하는 바도 달랐다. 그런데 동기다 보니 이런 저런 일로 자주 만났고, 이유는 잊었지만 책을 선물 받았다. 24년 전 일이다. 그 사이 그 친구와는 연이 끊어져 연락이 닿지 않고, 저자인 신영복 선생도 타계했다. 


<나무야 나무야>는 선생이 남한 곳곳을 여행하고, 그 소회를 담은 글이다. 성찰과 통찰이 번득이는 글들에 밑줄을 그어 책을 읽고, 그 글들을 여기 남겨 시일이 흐른 뒤 다시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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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이야기는 물론 소설가가 그려낸 상상의 세계이며,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사실은 아니라 하더라도 '진실'임에는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사실이라는 그릇은 진실을 담아내기에는 언제나 작고 부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연쇄 가운데에다 자신을 세우기보다는 한 벌의 패션 의상과 화려한 언술로 자기를 실현하고, 또 자기를 숨기려 하는 것이 오늘의 문화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치란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조직해내고 키우는 일' 이라는 것입니다. 권력의 창출 그 자체는 잠재적 역량의 계발과 무관하거나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철폐는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일과 직접 맞물려 있다'


한 시대의 정점에 오르는 성취가 아니라, 그 시대의 아픔에 얼마만큼 다가서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생애를 읽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미륵불은 석가가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마저 구제하기 위하여 오는 부처입니다. 석가의 완성을 위하여 오는 부처이며 반드시 와야 할 부처, 당래불(當來佛)입니다... 소망의 세계마저 제도화되어버린다면 미륵은 영원히 미완인 것으로 완성되어버릴 것 같은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최후의 그린벨트가 바로 '꿈'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한마디로 미륵의 좌절로 점철된 역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은 또 다른 미완성으로 이어져 역사가 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미완은 반성이며 가능성이며 청년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그러기에 '과학'이기 때문입니다. 역경(易經) 64괘는 미완의 괘인 '미제'(未濟)괘로 끝나고 있습니다. 괘사(掛辭)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여우가 시내를 거의 다 건넜을 때 그만 꼬리를 적시고 말았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대의 가장 첨예한 모순을 향하여 서슬 푸르게 깨어 있는 정신이야말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을 가리는 가장 확실한 지표라고 생각됩니다. 


빛과 그림자, 이 둘을 동시에 승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용기이고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없는 이성은 비정한 것이 되고 이성이 없는 사랑은 몽매(夢昧)와 탐닉(耽溺)이 됩니다.


'또 하나의 손'이 짐을 들어주는 손이 아니라 손을 잡아주는 손이기를 바랍니다. 천수보살의 손이 구원의 손길이 아니라 다정한 '악수'이기를 원합니다.


자국내의 모순을 세계화를 통하여 해소하려고 하는 중심부의 그들과는 반대로 세계경제의 중하층에 편입되어 있는 우리의 경제적 위상은 그러한 모순을 내부의 희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대동강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게 내주기로 하고 이룩한 통일은 분명 더 작아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통일이 아니라 광활한 요동 벌판의 상실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어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는 비약에 있는 것...현대사회에서 평가되는 능력이란 인간적 품성이 도외시된 '경쟁적 능력'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낙오와 좌절 이후에 얻을 수 있는 것...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입니다.


금(金) 없이 권(權)이 설 수 없고 권(權) 없이 금(金)이 재생산될 수 없기 때문에 금권의 야합과 세습, 그것은 고금을 통하여 변함 없는 정치적 주제라 하였습니다. 민생(民生)과 철학은 그것의 방편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대학은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종속의 땅'이기도 하지만, 그 연쇄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가능성의 땅' 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강한 사람이란 많은 사람의 힘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며, 가장 현명한 사람이란 가장 많은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드는 사람.


금강산은 빼어나긴 하나 장중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장중하나 빼어나지 못하다고 합니다.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물 위의 배에 지나지 않는 것. 배는 모름지기 물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물을 두려워하여야 한다는 지론을 거침없이 갈파한 남명. 벼슬아치는 가죽 위에 돋은 털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는 탐관오리를 질타하였습니다. 


'오늘의 개량'에 매몰되는 급급함보다는 '내일의 건설'을 전망하는 유장함이 더 소중한 까닭은 오늘의 개량이 곧 내일의 발전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야의 요체는 독립성이라 믿습니다. '오늘'로부터의 독립이라 믿습니다.


없이 사는 사람들의 부정은 흔히 그 외형이 파렴치하고 거칠게 마련이지만 그것은 마치 맨손으로 일하는 사람의 손마디가 거친 까닭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합법적인 불법'을 저지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정작 딱한 것은 그 부분을 줌렌즈의 피사체로 잡는 세상사람들의 춘화적(春畵的) 탐닉이며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당의(糖衣)에 길들어 있는 우리들의 빈약한 의식(意識)이라고 해야 합니다.


사찰의 막강한 소유구조 위에 서 있는 무소유의 역설(逆說)은 우리를 쓸쓸하게 합니다.


저항성에는 그 저항의 근거지가 먼저 요구되는 법이며 개인의 경우 그 근거지는 바로 자기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근거지가 없는 저항성은 결국 후기모더니즘의 무정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지식과 정보는 오직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평등은 단지 '차별의 철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이야말로 '자유의 최고치(最高値)' 이기 때문입니다...'타인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평범한 양식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등은 자유의 실체이며 내용입니다. 자유는 양적 접근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일 뿐입니다.


역사란 과거로 떠나는 여정이 아니라 현재의 과제로 돌아오는 '귀환'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084037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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