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박 넘기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3
스티븐 모튼 지음, 이운경 옮김 / 앨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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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가?>라는 스피박의 에세이를 읽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며 지독히 난해한 글쓰기가 스피박의 의도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에세이도, 이 책도 잘 이해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서발턴'은 하위주체, 하위계층 등으로 번역된다. 또는 힘을 뺏았긴 사람들로도 옮겨진다. 그러나 서발턴에서는 이렇게 한 묶음으로, 집단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라는 반성적 사고가 깃들어 있다.  그들이 노동자, 비정규직, 도시빈민, 소작농민 등의 이름으로 규정되는 순간 그것은 서구 이론의 틀에 갇혀버린다. 힘을 뺏았긴 사람들 하나 하나는 이러한 이론적 틀로는 설명될 수 없는 개별적 고통과 경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서구의 이론적 잣대로 설명할 때, 또는 재현하려고 할 때 그들은 말할 수 없게 된다는 것.   

 

   
 

 식민 담론 연구가 피식민지인이나 식민지에 관한 문제를 재현하는 데에만 집중한다면, 오히려 식민주의-제국주의를 과거에 안착시켜 현재의 식민주의적 지식 생사에 봉사하게 될 수도 있다. -232p

 
   

 

이러한 그의 발언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그런 점에서 스피박은 "유보적이고 비정형적 글쓰기 양식"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의 글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그의 글만이 아니라 그의 글이 다루고 있는 서발턴의 삶과 고통이 쉽게 재현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에세이와 이론적 작업이 의미를 갖는 것은 서구, 또는 근대의 이론에 갇힌 피식민지인, 서발턴의 삶을 재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성찰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주어는 목적어다. 목적어는 주어다'라는 서술문은 사고의 대상이 그것을 탐색하는 주체에 의해 결정되는 방식을 논증한다. 이를 서구가 비서구의 세계에 관해 생산한 지식에 대입해보면, 사고 대상은 서구식 재현의 무게에 짓눌려 사라진다. -82p  
   


결국 서발턴이 말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서발턴에 의해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 서발턴의 자기 역사쓰기일까? 증언을 듣고 고통을 기록하고 그들의 삶을 재현하려는 르포르타주는 이 자기 역사쓰기와 어떻게 만나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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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 국민, 국가, 고향, 죽음, 희망, 예술에 대한 서경식의 이야기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4
서경식 지음, 송현숙 그림 / 철수와영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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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필자인 서경식 씨에게 원고를 청탁하려다 실패했다.
이 책을 읽고 간곡히 부탁을 드렸는데 많이 바쁘셨던 모양이다.
리뷰를 쓰려고 다시 책을 집어들고 책장을 넘기다보니 청탁이 불발된 것이 더욱 아쉽다.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더라는 자명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이로
90년대 홍세화와 있었다면 2000년대 서경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라지만 근 50년 가까이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섬이었다.
거의 모든 학문은 일본을 통해 수입되었고
거의 모든 정보는 미국을 통해서만 입수될 수 있었고
사상과 이론은 반공이라는 견고한 벽을 넘지 못했다.
불과 20년 전까지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인들이 서슴없이 우리나라, 우리사회, 우리국민이란 표현을 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이 표현을 쓸 수가 없다. 
한국에서 국민은 국가를 만든 것이 아니라 (반공)국가가 국민을 만들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침대처럼
사상과 전력을 가지고 누구는 1등 국민, 누구는 2등 국민, 누구는 빨갱이
학살과 낙인, 배제가 이 나라 건국의 역사다. 
 
지금이라고 달라졌을까.
비정규직, 노숙인,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국민이라는 말 속에는 그래서 폭력이 담겨 있고 차별이 들어있다.
파업 투쟁에서 경찰에게 두들겨 맞은 한 노동자는 맨 처음 드는 생각이
"내가 경찰에게 맞다니! 나는 국민도 아닌가보구나"였다고 한다.  

재일 조선인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재일 조선인 처우 문제가 맞듯이
이주노동자 문제, 장애인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이주노동자 처우 문제, 한국의 장애인 인권 문제가 맞다.
원인과 결과를 혼동시켜서는 안 된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확실히 구분해야 하며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기억하는 일은 쉽지 않다.

더욱 어려운 일은 배제된 자들, 비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고자 할 때
주류 이데올리기에 어떻게 사로잡히지 않고
다수의 언어에서 어떻게 저항하고 벗어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 투쟁은
기억을 독점하려는 국가와 주류에 맞선 싸움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성찰하는 가운데 내면화된 지배 이데올로기를 발본색원해야 하는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쉽게 희망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아래는인용에서 강조는 내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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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소수자, 주변화된 사람들, 차별받고 있는 사람들, 자기 자신의 뜻을 나름대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 표현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할 때 쉽게 범할 수 있는 잘못은, 다수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수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그들을 정보 제공자로만 여기면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인용하고, 이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고서나 논문 같은 것을 쓰고 해석할 권리를 갖습니다. 해석할 높은 권위는 어디까지나 다수자인 중심부가 갖고 있으면서 소수자에게는 "네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거 이거다."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p19 

- 모든 글쓰는 사람은 해석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누가 그들에게 해석의 권리, 해석의 권위를 주었을까? 권위가 없는 글쓰기가 가능할까? 오히려 끊임없이 자신의 권리가 어디까지인지 의심하고 확인하고 잘못 주어진 권위에 반발하는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말하자면 국가의 국민은 스스로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국민이 되면 누구나 책임의 망에 갇히게 됩니다. 국가가 제공하는 여러 가지 권리만 누리면서 나는 관계가 없다, 책임이 없다는 얘기는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것이지요. 재일 조선인이면 누구나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비디오 하나 빌릴 때조차 일본 국민이 아니어서 여러 가지로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신용카드 가입이라든가 골프장 회원 가입이라든가 하는 일에서 여러 가지 불편함을 못 느끼는 일본 사람들이 일본 국가가 저지른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지요? 책임을 안 느낀다면 자기 자신이 져야 할 일본이라는 근대 민주주의 국가 국민의 책임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p60  

- 한국은 한국국민이 국민되지 않을 권리, 자유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 귀화는 가능하지만 국적포기는 불가능하다.(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이상) 평택 대추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래서 국가에 대한 저항으로 국적포기라는 투쟁을 했다. 이러한 저항도 중요하지만 이 한국이란 나라의 죄악에 연대책임을 갖는 것,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 또한 중요하겠다.

'귀화'라는 말은 문명에 귀순한다는 뜻 p67

-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귀화 제도를 가지고 있고 일본보다 힘들면 힘들지 쉽지 않으며 매우 까다로운 '국민되기' 장치와 제도를 가지고 있다. 이 속류 제국주의의 부끄러움...  

히로시마에 우연히 원폭이 떨어졌는데요. 그때 조선반도가 일본 영토였으니까, 진해, 원산 그런 곳에 원폭이 떨어졌대도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지요? 그렇죠? 진해는 당시 일본군의 군항인데, 만일 진해에 원폭이 투하되어 조선 사람 수만 명이 죽었으면 한국 역사에 한국 국민의 얘기로 서술되었겠지만,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어 히로시마에서 죽은 조선인 3만 명은 전부 이 나라(한국)에서 망각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이런 잘못이 어떻게 생기냐면 기억하는 주체, '누가' 기억하는가, '누가' 그 기억을 얘기하는가에 따라 기억은 달라질 텐데, 그 주체 자신이 국민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p105

- '김형률'이라는 사람이 떠오른다. 지금은 세상에 없다. 원폭 피해자 인권운동을 했던 이다. 히로시마 원폭으로 목숨을 잃은 많은 사람들 중에 조선인이 3만 명이었고 그의 많은 후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원폭 피해 후유증으로 힘들어하고 있다. 그에 대한 국가적 보상은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전무했다. 어쩌면 그들도 국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 국가의 기억만이 아니라 국민의 기억도 문제다. 국민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기억의 주체는 국가도 국민도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기억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소수자? 배제된 사람들? 저항하는 사람들?


... 루쉰의 것은 '희망, 소망이 없다고는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거의 없다. 그래도 걸어갈 수밖에 없다. '는 얘기예요. 이것이 '희망'이라는 겁니다. … '오히려 이런 절망, 절망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거의 희망이 없다는 지경이야말로 동아시아에서는 희망이다.'라는 것을 제가 느꼈습니다. … 다수자가 그러듯이 "그래도 희망은 있는데…." 하는 식으로 해석을 당해 버리는 것이 서발턴(기층민중)이죠. "안 그렇다. 희망은 우리에게는 없다. 희망은 우리에게는 허망이다." 하고 저항하고 충돌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수자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문제 제기할 수 있고, 어떤 새로운 개념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p189~190

-  지식인, 먹물들이 쉽게 이야기하는 희망은 거짓이고 기만이다. 세상에 넘처나는 처세술과 자기계발서들을 보라. 긍정적이고, 부지런하고, 새롭게 생각하고, 자신을 잘 알고, 타인과 잘 소통하고... 신자유주의 아래 성공하기 위한 방법은 대형서점에 쌓여있다. 그런데 서점 밖을 나오면 왜 실패자들만이 득실될까? 요즘은 루저 문화라며 실패자들을 위한 '상품'이 득세한다. 쉽게 희망을 말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무슨 일인가가 있었다. 누군가 인간이 그곳에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부재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 자신들의 상상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답답함과 두려움을 느껴 보는 것, 그것이 멋들어진 기념비 앞에서 헌화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p233

- 곧 5.18이다. 학교 다닐 때는 거의 매년 망월동으로 갔다. 전현직 대통령들, 대선후보들이 앞다투어 찾는 거기를 이제 더 이상 갈 일은 없을 거 같다. 기념비 앞에서 헌화하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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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람이 있다 - 대한민국 개발 잔혹사, 철거민의 삶
강곤 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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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가 파리를 점령한 직후 한 게슈타포 장교가 피카소에게 “당신이 <게르니카>를 그렸나?”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피카소의 답은 “아니, 당신들이 그렸지”였다.   

그렇다면 이 책의 지은이 또한 이 정부를 비롯한 개발지상주의자들이 분명하다. 아파트 공화국, 개발지상주의자들과 건설자본과 재개발 이익의 단물에 흠뻑 취한 한국사회에서 개발 잔혹사는 멈추지 않는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 집을 빼앗긴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이웃에게까지 숱한 싸움들이 있어왔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그 와중에 1월 20일 용산 참사가 있었다.  

용산구청은 이들을 가리켜 재개발 지역에서 보상금이나 몇 푼 더 바라고 떼를 쓰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경찰은 전문 시위꾼들이며 외부 세력이라고 했다. 정부 여당은 도심 한 복판에서 건물을 점거하고 화염병을 던진 이들은 분명 테러리스트가 틀림없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검찰은 이들이 스스로 신나를 붓고 화염병을 던져 죽음을 선택했다고 했다.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 죽은 이들의 유족은 벌써 석 달이 넘게 진상규명과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체포되고 구속되고 수배를 당하면서도 이들의 죽음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싸움을 멈추지 않겠다고 한다.  

전국철거민연합. 과연 이들은 누구인가.  

왜 이들은 부서진 건물 옥상에 올라 망루를 짓고, 거기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까.  

또 왜 경찰은 이들의 화염병이 실제로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1차 진압에서 불이 났음에도 소방차 대신 경찰특공대를 올려보내 다섯 명의 철거민과 한 명의 경찰특공대를 죽게 했을까. 왜 불에 타 죽었다는 시신에서 지갑과 신분증이 고스란히 남았는데 서둘러 유족의 동의도 받지 않고 부검을 실시했고 검찰은 아무런 과학적 단서도 찾지 못한 채로 이들이 스스로 화염병을 던져 불이 났다고 발표를 했을까.  

이 책은 지난 1월 20일 용산 참사 당시 망루에 있었던 사람들과 그 밖에서 가족의 생사를 몰라 애타게 울부짖던 유족들, 그리고 전국철거민연합 회원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재개발 통지서가 날아들지 전까지 화훼농장의 주인이었고 호프집 사장님이었으며 민물장어집을 하며 아이를 키우던 가장이었다. 그러던 이들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삼성이나 두산, SH공사 등 개발업체와 조합, 그리고 용역깡패에게 몰리면서 철거민이 되어가고 결국 화염병을 갖고 망루에 오를 수 밖에 없었던 과정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이 책에서 어떤 이는 "집 평수를 넓히려는 사람들의 욕망 속에 폭력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한 없이 위태롭고 불안한 이 한국사회에서, 가진 자만을 위한 정책들이 서슴치 않고 추진되는 이 정부 아래서 이 욕망에 죄를 물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이렇게 무참하게 짓발아도 되는 것일까. 이렇게 이들의 죽음을 모욕해도 되는 것일까.  

서부영화에서 인디언은 사람 머릿가죽을 벗기는 야만인으로 그려진다. 실제로 인디언은 사람 머릿가죽을 벗겼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쳐준 것은 다름아닌 백인이었다. 하지만 서부영화는 백인이 백인을 위해 만든 영화였기에 왜 인디언이 사람 머릿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는지,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정부나 가진 자들, 지배자들은 용사 참사를 테러로, 범죄로 기록하고 처벌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수많은 학살들이 단죄되었듯 이 참사 또한 저들의 기록에 그저 묻혀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공권력이 동원되어 가난한 사람들이 지은 망루를 허물 수는 있을지언정 진실과 정의를 바라는 사람들의 가슴 밑바닥에서 건져올린 이야기들로 쌓아올린 이 망루는 결코 허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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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2009-04-07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누가 벌써 이 책의 서평을 썼을까 궁금해했는데..ㅋㅋ

극단드림플레이 2011-04-14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극단드림플레이입니다.
용산참사를 소재로한 연극<여기,사람이 있다> 공연을 준비중입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2011.4.28-5.1 /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_ 2011서울연극제
문의_02.745.4566
 
폴 포트 평전 - 대참사의 해부 역사 인물 찾기 26
필립 쇼트 지음, 이혜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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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킬링필드>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학교 다닐 무렵 학교에서 단체관람을 했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이것도 반공영화라고 단체관람을 시킨 것인지, 그나마 나은 반공영화여서 여러 목록 중에 학교 선생들이 선택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좀 논다는 친구들은 화장실 다녀오는 척 하고 영화관 밖으로 내뺐지만, 나는 수업을 안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만족하며 그럭저럭 영화를 다 봤던 것 같다.  

그렇지만 군사정권이나 그 시다바리에 가까웠던 학교의 애초 의도나 목적과는 달리 이 영화를 보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영화의 줄거리나 결말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저녁무렵 허허벌판을 줄지어 걸어가는 사람들의 행렬만이 인상에 남았다. 그 속에서 나는 TV나 영화에서 보던 한국전쟁 당시를 연상했는지 모른다. '킬링필드'라고 알려진 캄보디아 크메르루즈의 학살을 그래서 1950년대 무렵 벌어진 일로 한 동안 잘못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크레르루즈의 핵심 멤버이자 킬링필드 학살의 책임자 중 한 명인 키우 삼폰인가 누온 체아인가를 인터뷰한 한계레21 기사를 보고 내가 알고 있던 기억이 대단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 킬링필드를 둘러싼 역사적이고 실체적인 진실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공산주의 세력인 크메르루즈가 왜 공산화 된 베트남과 전쟁을 했어야 했는가? 캄보디아 국왕이었던 시아누크는 왜 그들을 탄압하다가 다시 그들과 협력했고 마침내 다시 그들과 결별했는가? 무엇보다도 인민해방을 추구했던 크메르루즈가 왜 인민을 그토록 무참하게 학살해야만 했는가? 

이런 의문들에 대한 나름의 해답이 <폴 포트 평전>에 나와 있다. 필립 쇼트가 지은 이 책은 사실 평전이라기보다는 크메르루즈와 킬링필드에 대한 르포에 가깝다. 폴 포트와 그의 동료들은 중국의 마오쩌둥이나 베트남의 호치민과 같이 식민주의에 맞선 민족해방의 이념을 프랑스 유학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에서 찾아냈고 중국과 베트남에서와 마찬가지로 캄보디아에서 그 이념을 구현하려 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중국이나 베트남, 혹은 북한과도 달랐으며 훨씬 더 극단적이고 급진적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크메르루즈를 일반적인 공산주의, 맑스주의라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소승불교와 앙코르와트의 재현이라는 캄보디아 민족 특유의 문화에서 발생한 변종으로 보고 거기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점에서 꽤나 설득력이 있다. 또한 캄보디아에서의 대량학살, 제노사이드는 크메르루즈 뿐만이 아니라 당시(그리고 지금 현재도) 캄보디아를 둘러싸고 있던 베트남, 중국, 소련, 미국과 같은 주변열강에게도 상당부분 책임이 있음을 대단히 풍부한 사료와 증언을 통해 증명해내고 있다.  

그럼에도 어떻게 인간해방의 이념이 대량학살로 치닫게 되었는지, 그것도 특별히 부패하거나 비교적 타락하지 않았던 집단에 의해서 그러한 만행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나는 아직도 의문을 떨칠 수 없다.  

어쩌면 모든 '주의'와 '이념'의 극단은 이토록 무서운 것일까? 쇼트가 지적한 캄보디아 특유의 문화, 개인주의적이며, 위선적으로 보일만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거짓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현실에 대해 체념적인 풍토와 나치나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가 결합했을 때 인류는 이토록 심각한 위협을 직면하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한국사회도 어쩌면 그런 위협에 대비해야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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優良出会い系サイト 2011-06-15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으로 서두에 보여드린 이미지는 디자인로그의 포토샵 강좌 게시물을 운영 중인 페이스북 'Design' 페이지로 공유한 모습입니다. 아주 깔끔하게 링크 업데이트가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겁니다. 여러분도 페이스북 '코멘트(commets)' 소셜 플러그인을 완벽하게 설치하셔서 많은 페이스북 사
 
여론조사의 덫
다니오카 이치로 지음, 양진철 외 옮김 / 심산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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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한나라당 탈당은 여론조사가 만든 작품이라는 기사(오마이뉴스 ‘여론조사가 만든 손학규 탈당 드라마’)가 눈길을 끈다. 사연인 즉은 올해 초 유력 경제일간지가 범여권 대선주자 지지도를 조사하면서 손학규 전 지사를 고건, 정동영, 김근태, 강금실 등과 함께 문항에 넣었고 손 전 지사는 고건 전 총리(30.0%)에 이어 2위(11.9%)를 차지했다. 그리고 고건 전 총리의 불출마 선언 직후의 여론조사에서 손 전 지사는 마침내 1위를 차지했는데 범여권의 애타는 러브콜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비슷한 사례가 있다. 1991년 미국에서 생존 중인 4명의 전직 대통령들의 인기도를 물었는데 지지율 낮기로 유명했던 카터 전 대통령이 닉슨과 포드는 물론 재직 중에 높은 인기를 누렸던 레이건까지 제치고 1위를 한 것이다. 『여론조사의 덫』의 저자 다니오카 이치로의 분석은 이렇다. 카터는 민주당이고 나머지 세 명은 공화당이니 민주당 표는 모였고 공화당 표는 세 갈래로 나뉘었다는 것. 불순한 의도에서였거나 멍청했거나, 어쨌든 하나마나 한 조사였던 셈이다.

사회조사학 외에도 범죄학, 캠블사회학이란 독특한 학문을 전공한 저자는 이런 여론조사를 거침없이 (죄민수 버전으로) ‘쑤레기’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조사기획 권한을 주면 무엇이든 원하는 결과를 보여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그가 지목하는 쓰레기 생산지는 데이터를 웬만해서는 공개하지 않는 정부와 항상 누이 좋고 매부 좋기로 유명한 학계, 그리고 당파성에 지나치게 충실한 언론과 시민단체들이다. 7년 전에 일본에서 나온 책이지만 읽다보면 청출어람이라고 바로 우리네 이야기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저자는 ‘리서치 리터러시(research literacy)’, 즉 여론조사를 읽고 쓰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며 책 후반부에 친절하게 연습문제도 맛보기로 달아놓았다. 최소한 알아야 속지나 않지, 하는 생각에 열심히 풀어보기는 했지만 만만치 않다. 하기야 백전백패가 빤한 것들로 꽉 채워진 인권의 항목들 앞에서 한눈팔지 말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마음이나 열심히 ‘리터러시’ 하는 게 이쯤에서의 바른 해답일지 모른다.  

- 2007년 4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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