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 국민, 국가, 고향, 죽음, 희망, 예술에 대한 서경식의 이야기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4
서경식 지음, 송현숙 그림 / 철수와영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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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필자인 서경식 씨에게 원고를 청탁하려다 실패했다.
이 책을 읽고 간곡히 부탁을 드렸는데 많이 바쁘셨던 모양이다.
리뷰를 쓰려고 다시 책을 집어들고 책장을 넘기다보니 청탁이 불발된 것이 더욱 아쉽다.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더라는 자명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이로
90년대 홍세화와 있었다면 2000년대 서경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라지만 근 50년 가까이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섬이었다.
거의 모든 학문은 일본을 통해 수입되었고
거의 모든 정보는 미국을 통해서만 입수될 수 있었고
사상과 이론은 반공이라는 견고한 벽을 넘지 못했다.
불과 20년 전까지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인들이 서슴없이 우리나라, 우리사회, 우리국민이란 표현을 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이 표현을 쓸 수가 없다. 
한국에서 국민은 국가를 만든 것이 아니라 (반공)국가가 국민을 만들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침대처럼
사상과 전력을 가지고 누구는 1등 국민, 누구는 2등 국민, 누구는 빨갱이
학살과 낙인, 배제가 이 나라 건국의 역사다. 
 
지금이라고 달라졌을까.
비정규직, 노숙인,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국민이라는 말 속에는 그래서 폭력이 담겨 있고 차별이 들어있다.
파업 투쟁에서 경찰에게 두들겨 맞은 한 노동자는 맨 처음 드는 생각이
"내가 경찰에게 맞다니! 나는 국민도 아닌가보구나"였다고 한다.  

재일 조선인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재일 조선인 처우 문제가 맞듯이
이주노동자 문제, 장애인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이주노동자 처우 문제, 한국의 장애인 인권 문제가 맞다.
원인과 결과를 혼동시켜서는 안 된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확실히 구분해야 하며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기억하는 일은 쉽지 않다.

더욱 어려운 일은 배제된 자들, 비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고자 할 때
주류 이데올리기에 어떻게 사로잡히지 않고
다수의 언어에서 어떻게 저항하고 벗어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 투쟁은
기억을 독점하려는 국가와 주류에 맞선 싸움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성찰하는 가운데 내면화된 지배 이데올로기를 발본색원해야 하는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쉽게 희망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아래는인용에서 강조는 내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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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소수자, 주변화된 사람들, 차별받고 있는 사람들, 자기 자신의 뜻을 나름대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 표현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할 때 쉽게 범할 수 있는 잘못은, 다수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수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그들을 정보 제공자로만 여기면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인용하고, 이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고서나 논문 같은 것을 쓰고 해석할 권리를 갖습니다. 해석할 높은 권위는 어디까지나 다수자인 중심부가 갖고 있으면서 소수자에게는 "네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거 이거다."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p19 

- 모든 글쓰는 사람은 해석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누가 그들에게 해석의 권리, 해석의 권위를 주었을까? 권위가 없는 글쓰기가 가능할까? 오히려 끊임없이 자신의 권리가 어디까지인지 의심하고 확인하고 잘못 주어진 권위에 반발하는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말하자면 국가의 국민은 스스로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국민이 되면 누구나 책임의 망에 갇히게 됩니다. 국가가 제공하는 여러 가지 권리만 누리면서 나는 관계가 없다, 책임이 없다는 얘기는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것이지요. 재일 조선인이면 누구나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비디오 하나 빌릴 때조차 일본 국민이 아니어서 여러 가지로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신용카드 가입이라든가 골프장 회원 가입이라든가 하는 일에서 여러 가지 불편함을 못 느끼는 일본 사람들이 일본 국가가 저지른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지요? 책임을 안 느낀다면 자기 자신이 져야 할 일본이라는 근대 민주주의 국가 국민의 책임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p60  

- 한국은 한국국민이 국민되지 않을 권리, 자유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 귀화는 가능하지만 국적포기는 불가능하다.(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이상) 평택 대추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래서 국가에 대한 저항으로 국적포기라는 투쟁을 했다. 이러한 저항도 중요하지만 이 한국이란 나라의 죄악에 연대책임을 갖는 것,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 또한 중요하겠다.

'귀화'라는 말은 문명에 귀순한다는 뜻 p67

-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귀화 제도를 가지고 있고 일본보다 힘들면 힘들지 쉽지 않으며 매우 까다로운 '국민되기' 장치와 제도를 가지고 있다. 이 속류 제국주의의 부끄러움...  

히로시마에 우연히 원폭이 떨어졌는데요. 그때 조선반도가 일본 영토였으니까, 진해, 원산 그런 곳에 원폭이 떨어졌대도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지요? 그렇죠? 진해는 당시 일본군의 군항인데, 만일 진해에 원폭이 투하되어 조선 사람 수만 명이 죽었으면 한국 역사에 한국 국민의 얘기로 서술되었겠지만,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어 히로시마에서 죽은 조선인 3만 명은 전부 이 나라(한국)에서 망각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이런 잘못이 어떻게 생기냐면 기억하는 주체, '누가' 기억하는가, '누가' 그 기억을 얘기하는가에 따라 기억은 달라질 텐데, 그 주체 자신이 국민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p105

- '김형률'이라는 사람이 떠오른다. 지금은 세상에 없다. 원폭 피해자 인권운동을 했던 이다. 히로시마 원폭으로 목숨을 잃은 많은 사람들 중에 조선인이 3만 명이었고 그의 많은 후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원폭 피해 후유증으로 힘들어하고 있다. 그에 대한 국가적 보상은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전무했다. 어쩌면 그들도 국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 국가의 기억만이 아니라 국민의 기억도 문제다. 국민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기억의 주체는 국가도 국민도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기억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소수자? 배제된 사람들? 저항하는 사람들?


... 루쉰의 것은 '희망, 소망이 없다고는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거의 없다. 그래도 걸어갈 수밖에 없다. '는 얘기예요. 이것이 '희망'이라는 겁니다. … '오히려 이런 절망, 절망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거의 희망이 없다는 지경이야말로 동아시아에서는 희망이다.'라는 것을 제가 느꼈습니다. … 다수자가 그러듯이 "그래도 희망은 있는데…." 하는 식으로 해석을 당해 버리는 것이 서발턴(기층민중)이죠. "안 그렇다. 희망은 우리에게는 없다. 희망은 우리에게는 허망이다." 하고 저항하고 충돌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수자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문제 제기할 수 있고, 어떤 새로운 개념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p189~190

-  지식인, 먹물들이 쉽게 이야기하는 희망은 거짓이고 기만이다. 세상에 넘처나는 처세술과 자기계발서들을 보라. 긍정적이고, 부지런하고, 새롭게 생각하고, 자신을 잘 알고, 타인과 잘 소통하고... 신자유주의 아래 성공하기 위한 방법은 대형서점에 쌓여있다. 그런데 서점 밖을 나오면 왜 실패자들만이 득실될까? 요즘은 루저 문화라며 실패자들을 위한 '상품'이 득세한다. 쉽게 희망을 말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무슨 일인가가 있었다. 누군가 인간이 그곳에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부재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 자신들의 상상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답답함과 두려움을 느껴 보는 것, 그것이 멋들어진 기념비 앞에서 헌화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p233

- 곧 5.18이다. 학교 다닐 때는 거의 매년 망월동으로 갔다. 전현직 대통령들, 대선후보들이 앞다투어 찾는 거기를 이제 더 이상 갈 일은 없을 거 같다. 기념비 앞에서 헌화하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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