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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들 (2disc) - 할인행사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세상을 뒤흔든 하루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대한민국, 10월26일의 궁정동의 주변을 매우 가깝게 아주 디테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종에게 영웅은 없다는 헤겔의 명언이 있다. 가까이서 아주 가까이서 본다면 영웅이라도
한명의 사람일 따름이고 그의 생활 상당수는 먹고 마시고 화장실 가는 것으로 채워지고
더 나아간다면 술먹고 여자끼고 놀고 헛소리하는 모습까지 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삶을 아주 가까이서 기록한 비서의 책이나 영화 <몰락>의 모습도 그러하다.
아마 손떨리며 아이에 불과한 소년병에게 훈장 달아주는 그의 모습을 보면 어떻게 저 사내가
유럽을 그렇게 뒤흔드는 괴물이었나 하는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박정희의 입에서 나오는 일본 노래나,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김재규의 모습, 밖에서는 힘주는
권력자지만 안에서 아부할 때는 낯 간지러워지는 고위관작의 인물들의 모습이 그렇다.
독도를 놓고 열을 내는 분들은 이런 장면을 보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하지만 너무 놀라지 마라. 박정희는 일본 사관학교에서 매우 우수한 성적을 쟁취한 학도였던 점을
상기해보라. 실제 독도를 놓고 벌인 JP의 협상의 핵심은 소유권 논쟁을 유보하는 것이었다.
또 아시안게임 등 북한 여자분들 응원오면 김정일 첩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노인분들도 살펴볼필요가 있다.
북에서 벌어진다고 예상하는 장면이 70년대 한국에서 벌어졌다는 점을 이 영화가 보여주니 말이다.
이 영화에 비쳐진 박정희의 모습은 어떠했나?
김재규의 눈으로 본다면 그는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백성들 수만명을 죽여도 좋다는
차지철의 아부성 발언을 듣고 있는 독재자다.
의전과장 박선호의 눈에는 100명 이상을 갖다 바쳐도 채워주기 힘든 성욕으로 가득찬 권력자다.
그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차지철의 주먹과 발길질이 날라오는 것도 참기 힘든일이다.
영화를 떠나서 실제로 차지철은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주먹을 잘 날렸다고 한다. 물론 목적은 각하의
보위였다.
그런 그들이 의기투합해서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의 근본원인을 제거하자고 나선 것도
꽤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를 둘러싼 주변의 공간은 어떠한가?
궁정동 안가의 주변은 정보부에 의해 끌려온 여러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쉽게 간첩죄라는 엄청난 혐의를 쉽게 뒤집어쓰는지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감독은 시대의 배경을 이런식으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오늘 한 둘은 잡아넣어 쥐어패고 있지만 그 배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열망이 있다.
이렇게 철로 하나위에 왼쪽에서는 자유와 민주를 외치는 학생과 기층민중의
한 무리가 오른쪽에서는 이를 누르고 권력을 지속하려는 집권세력의 힘이 달려오고 있다.
충돌한다면 그 결과는 가깝게는 4.19, 후일 광주에서 보았듯이 민중의 피였을 것이다.
박정희의 60년대는 그럭저럭 평가해줄만한 수준의 정치였다. 근대화를 위해 자원을 모으고
사람들에게 목표를 주어 뛰게 만든 점은 긍정적인 부분이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정신은 이곳저곳에서 건축물을 만들어내었다. 포항에서는 박태준의 군화발길질에 POSCO가 만들어졌고. 경부고속도로는 터널 공사의 많은 인명피해 끝에 완공되었다.
이런 성과를 지켜본 피터 드러커의 경우 한마디로 놀랍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 있다고 찬사를 보낸다.
반면 거꾸로 해도 안된다라고 하는 영역이 생겼다. 바로 민주화와 자유에 대한 이야기다.
어른들은 늘 해보았자 너만 피해를 본다라고 누누히 아이들에게 타일르면서 말했다.
맞다 쉽게 마음먹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목숨 잃기 딱 십상이었다.
이 두가지는 박정희의 빛과 그림자였다. 거대한 중후장대한 개발성과를 낸 점은 분명 여전히
인정하지만 자유를 기반으로 가능한 각종 예술이나 언론, 인문학 등의 성과가 미흡한 점은 그 후유증일 것이다.
박정희 시대는 왜 끝나야 했을까? 단적으로 가장 가까이 지켜보던 부하들 조차 제대로 공감시키지 못했다는 점이 바로 철권통치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멀리 그리스의 우화 중에 하나가 단 하루 권좌에 앉은 신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참 힘주어 자신의 권력을 만끽하다가 천장을 보니 대롱대롱 달린 칼이 자기를 겨누고 있었다.
박정희에게는 바로 그 칼을 붙들고 있던 끈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권력은 결국 총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게 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행동을 다루고 있다. 어찌 보면 우연찮게 내려진 결심이고
그에 따른 행동으로 보인다. 잔뜩 우화적으로 표현된 인물들의 모습이 그렇고 그들이 결국 걷게된
사형장으로의 걸음이 씁쓸하게 느껴진다.
그들에 대한 사형은 때로 매우 당연히 여겨져왔었다. 사람을 죽였으니 죽어야 한다는 법의 논리.
그렇다면 왜 똑 같은 질문을 우리는 박정희에게 던지지 않았나?
유신을 거치며 무수히 희생된 죄 없는 죽음들의 대가는 누가 치를 것인가?
시대정신은 누군가의 마음과 손을 움직여 자신의 뜻하는 바를 이루어낸다.
박정희를 쏜 총도 그 시대정신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모른다.
단 막힌 고리를 풀어 새로운 물결을 열었으되 그 물결을 직접 탈 수 있는지 아닌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막상 그 시대를 열었던 사람들은 짧게 자신의 생을 마쳐야만 했다.
아마 역사를 이루는 시대정신은 그렇게 인간들을 놓고 장난을 치는지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역사에 대한 평가를 놓고 왈가왈부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YS,DJ에 이어 노무현 정부가 사회를 거대한 실패로 몰아가다 보니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반대로
올라갈 수 밖에 없게 된다.
먼저 근대화의 산물에 따른 빚을 박정희에게 지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반면 대통령이 죽고 모든 것이 돌아오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어느 시인의 목소리도 기억하자.
적어도 자유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박정희의 부정적 요소를 벗게 된 것에 김재규의 공로도 얼마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영화는 직접 주장은 최대한 아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숙제를 우리에게 남기며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