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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외출 - 낯선 공간이 나에게 말을 걸다
오영욱.하성란 외 지음 / 이상미디어 / 2012년 5월
평점 :
얼마 전 읽은 책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남편과 말다툼 끝에 답답한 마음을 안고 무작정 나오기는 했으나 어디로 가야 할지 서성이며 결국 찾은 곳이 공원의 작은 벤치였다. 그 곳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맥주 한 잔을 들고 우두커니 앉아 있던 한 여자의 모습. 나이가 들수록 자신 만의 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내가 사라진 곳에 들어서 있는 것은 수 많은 지위가 대신하고 있다. 누군가의 배우자, 부모로서 존재하는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내가 아닌 누구를 위한 존재가 되어 간다.
매일 같이 생활하는 공간이 때론 갑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누구도 없는 고요한 방 안에 있을 때에도 엄습해 오는 중압감에 삶의 무게가 짓누를 때, 문득 여행을 가고 싶지만 여건 상 떠날 수도 없는 내 자신을 보면 서글퍼지곤 한다. 이런저런 핑계들로 당장 여행은 할 수 없지만 잠시나마 그러한 기분에 취해보고자 터덜터덜 발을 옮기는 곳이 공원 구석에 자리잡은 벤치이다. 고요한 호수를 앞에 두고 버드나무 잎이 하늘하늘 춤을 추는 그 아래에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서글픈 현실의 조각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다. 나라는 존재는 동일하지만 내가 있는 공간의 변화로 인해서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고 그 동안 오늘을 딛고 일어 설 힘을 얻을 수 있는 그 신비로운 경험이 ‘어떤 외출’에 담겨 있다.
그들의 외출은 특별한 외출이 아니다. 그들 스스로에게 의미가 있는 공간들로 타인에게는 다분히 평범한 장소 들이곤 하다. 자신이 아끼던 장미꽃을 두고 온 어린 왕자의 소행성 B-612와 같이 나에게만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는 장소나 그 장소로 하여금 되살아나는 기억들의 힘이 그들의 외출을 스스로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한다.
내가 그들의 공간으로 찾아 간다 한들 나에게는 하나의 풍경으로만 비춰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 장소 하나하나는 의미라는 열매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기에, 그들이 그 곳에 있을 때에 그 장소는 빛을 발현하게 된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들이 아닌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 20대 초반에만 해도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모으기 급급했다면 이제는 공간을 보는 여유가 생긴 듯 하다. 거창하지도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지만 나를 위한 곳이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들을 외출에 동행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고마운 일탈이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