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의 탄생
배리 네일버프, 애비너시 딕시트 지음, 이건식 옮김, 김영세 감수 / 쌤앤파커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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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시나리오가 완벽히 맞아 들어가긴 어렵다.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변수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내생 변수와 외생 변수가 있다. 내부에서 발생하는 내생 변수와 달리 외생 변수는 통제하기 힘들다. 노력에 의해 제어되는 게 아니라 외부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변수이기 때문이다. 결국 완벽한 전략이란 가장 유동적이고 성공 확률이 높은 전략이다. 백 프로는 없지만 백 프로에 가깝게 머리를 굴리고 벼린 전략이다. 무엇보다 내생 변수에 대한 통제는 기본이다. 그렇기에 전략은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다. 최선은 있지만 절대적 전략이란 없다.

 이 책을 읽기 전 ‘삼국지와 게임이론’이란 책을 읽었다. 게임 이론으로 본 삼국지 이야기였는데 새로운 해석이 맘에 들었다. 제갈량의 공성지계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마의가 군권을 유지하기 위한 흑심이 작용했다는 거다. 즉 제갈량이란 맞수가 없다면 사마의는 군권을 놓치기 때문에 뛰어난 연기력으로 제갈량의 책략에 넘어간 척 했다는 거다. 물론 정사에는 이 사건이 허구라고 나온다. 허나 갖가지 상황을 게임이론이란 프레임으로 해석한 이 책은 꽤나 재밌었다.

 헌데 이 전략의 탄생이란 책은 위의 책과 다르다. 재미있긴 하나 어렵다. 수학이 많이 사용된다. 전개 방식은 ‘게임트리’를 통해 눈으로 설명 되고 균형전략 표로 숫자화 된다. 많은 사례가 다소 딱딱할 수 있는 내용에 윤기를 준다. 그렇다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게임이론은 이전에 ‘수리 경제학’ 수업 때 배운 적이 있다. 2년 전 백경환 교수님께 배웠는데 이 책은 거의 학부 전공 심화 수준이다. 재정정책이란 수업에서 배운 호텔링 이론도 나오고 도시 경제학 수업에서 배운 시장과 시장 참가자의 유인을 그래프로 계산하는 방식도 사용된다. 그 때의 지근거림이 생각날 정도로 머리를 많이 쓰며 책을 읽어야 한다. 게임이론에서 가장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 정도는 아주 우습다. 이 책에 나오는 갖가지 사례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해의 기반 위에 상대도 매우 똑똑하다는 가정 하에 이야기되고 해석된다. 다들 이렇게 까지 머리를 쓰며 살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기실 인간의 이성을 120프로 사용해야 성공에 가까워지는 현 사회의 팍팍함은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무엇보다 경제학이 가진 형이상학적 측면을 실용과 잘 맞추어 설명하였다. 이 책을 오롯이 이해한다면 웬만한 경제학 학사보다 더 뛰어나다고 보면 될 듯하다. 물론 게임이론에 관해서 만이다.

 앞서 어떤 분은 번역의 오류를 지적하였으나 깔끔한 편집과 정갈한 문장은 그런 지적의 적절성을 의심케 했다. 전략의 탄생이란 제목도 어느 정도 ‘전쟁의 기술’이란 책의 아류라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의도적 비틂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원제를 그대로 번역했다면 전략의 기술이 됐을 테다). 그렇기에 제목 또한 괜찮다고 본다.

 좋은 책이다. 다만 좀 어렵고 실생활에 적용하기엔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다. 이 책을 읽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챕터 하나씩 이삼일에 걸쳐 읽으면 좋을 듯하다. 어쩌면 경제학을 전공해서 더 오래 걸렸을지 모른다. 스스로의 불민함을 탓하며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오롯이 이해하기 위해 공을 너무 들였나 보다. 이런 책을 볼 때마다 경제학 전공이란 게 뿌듯하다. 배움의 기쁨을 느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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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글감옥 - 조정래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
조정래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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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왜 빨갱이가 안 됐냐?”

한 달 전 친구가 내게 한 말이다. 행동하는 좌파가 되겠다며 대안학교 교사로 일하게 된 친구가 ‘빨갱이’라는 말을 한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중1 때 아리랑을 읽고 중2 때 태백산맥을 읽었다는 내 회고담 때문이었다. 이런 책을 어렸을 때 읽었다면 당연히 좌파가 되어야 하는 데 이데올로기가 분명치 않은 내 정체성에 친구가 의문을 표한 것이다. 나는 웃어 넘겼다. 스스로를 만족시킬 만큼 명쾌한 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였다.

이 두 편의 대하소설을 접하게 된 건 민족주의자였던 중학교 국어 선생님 덕이었다. 그분의 강직함과 올곧음은 표상으로 남았고 아직 아이였던 마음에 자그마한 불을 지폈다. 그 분은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반드시 읽어야 할 세권의 책으로 ‘태백산맥’, ‘아리랑’, ‘동의보감’을 꼽았다. 동경하는 대상의 그림자라도 좇고 싶던 어린 마음은 이 세 부를 근 1년 만에 다 읽게 하였고 그 이후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글짓기 대회 같은 데 나가면 심심찮게 상도 받아오곤 했다. 조정래 씨의 시대정신과 문장에 길들여진 탓이었다.

헌데 내 친구가 가치중립적으로 말한 빨갱이가 되긴 싫었다. 장정일 씨 소설에 나오는 ‘은’처럼 나는 힘을 추종했다. 강자가 휘두르는 권력이 뒷받침 되어야 내 주장은 온전한 모양새를 띈다고 여겼다. 중학생 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남자들끼린 주먹 잘 쓰는 자가 권력을 가졌고 그런 권력은 부당한 일은 가능케 했다. 그런 부당함 앞에 말은 부질없었고 약자의 자기 위로에 불과했다. 후에 권력을 쥐는 자는 주먹에서 공부 잘하는 이로 넘어갔고 요즘 내 지인들 사이에선 출세가 그 바통을 이어 받고 있다. 이런 저런 혼란 속에 지금의 나는 시대가 강요하는 중도가 되어 김훈을 좋아라 하고 그 허무함을 긍정하려 한다. 허나 질풍노도의 시기에 내 1년을 앗아갔던 조정래 문학의 세례는 여전히 내 밑둥에 남았고 종종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다. 제 자신에게 솔직해지려는 좌편향과 조금 더 세속적인 이익을 찾으려는 우편향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충돌한다.

이 책은 과거 그의 문학에 빠져있었던 시간으로 잠시나마 나를 되돌려 놓았다. 한강이란 소설은 대학 2학년 때 완간되었기에 어느정도 머리가 굵어지고 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인지 그 울림은 두 편의 전작만 못했다. 무엇보다 아리랑과 태백산맥은 매우 힘겹게 읽었는데도 그 기억이 비교적 뚜렷한데 한강의 추억은 흐릿하다. 특히 이 자서전에서 한 여학생이 한 질문인 왜 전라도 사람을 ‘하와이’라고 하는지에 대한 답을 나 또한 하지 못하겠다. 진정 궁금하니 혹 아시는 분은 댓글 달아주시길 바란다.

책은 문학에 대한 조정래의 정의와 그의 삶, 또 현실에 대한 갖가지 생각이 뭉쳐진 교향곡이다. 주제 선율은 민족주의와 글쓰기이고 2악장과 3악장에선 과거의 조정래를 대면하게 되어 주제 선율의 울림을 더 깊게 해준다. 허나 조정래 본인이 원하던 주제 선율은 시인 김초혜와의 사랑이었던 듯하다. 역사의 도저한 흐름 속에 그 애틋한 설렘은 피아노 선율이 되어 위 교향곡과 협주곡을 이룬다. 역사를 이야기할 때나 제 삶을 돌이켜 볼 때 언제나 등장하는 그녀의 존재는 이 책이 지닌 협주곡적 성격의 증명이다.

또한 이 책은 구술문학처럼 쉽게 읽힌다. 문답형으로 되어 있는 구성 때문인데 신문기사와 같은 딱딱한 종결형이 아닌 대화에서 드러나는 살가움이 문장을 맛깔나게 한다. 또한 좋은 답을 듣기 위해선 질문이 얼마나 좋아야 하는 지에 대한 가르침도 준다. 책을 이끌어 가는 형식인 질의응답에 중점을 둔다면 이 책은 이중주적 구성으로도 볼 수 있다. 다만 격이 낮은 질문에 까칠함으로 답하는 조정래의 일갈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이런 불협화음은 이중주란 정의와 사맛디 아니하게 한다.

책은 뒤로 갈수록 정치적 이야기가 많아지는 데 앞서의 문학과 삶에 대한 조명만큼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미 그의 문학으로 그런 이야기는 쉬이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이 형상화 되는 과정을 통해 독서의 추억을 오롯이 복기할 수 있던 앞 장의 뿌듯함이 사라져서 그럴 테다. 문학의 외피를 벗은 날것의 말은 다소 빈약해 보였다. 그는 천상 작가여야 한다.

한편 고등학생 한명이 아리랑과 같은 소설의 정사 장면이 너무 적나라하단 질문을 한 부분이 있다. 나 또한 중학교 1학년 때 읽어서 그러한 부분이 나올 때마다 낯부끄러움과 심장의 빠른 고동 때문에 마음을 추스르기 쉽지 않았더랬다. 조정래 씨는 이에 대한 답변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데 다소 명쾌한 답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왜냐면 나또한 왜 이렇게 성애 묘사가 자세할까 하는 생각을 그 즈음에 했기 때문이다. 글들이 그려낸 머릿속 영상을 누군가 알아챌까 심히 부끄러워하며 책을 읽은 추억 또한 겹쳐졌다. 지금은 왜 그런지 이해가 가지만 질문을 했던 그 고등학생과 유년의 낯붉음을 잊지 못하는 과거의 나를 위해서 엄밀한 언어로 풀어줬으면 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문을 꼽아 보자면

‘종교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라는 부분이다. 최근 철학 책을 읽으며 부딪쳤던 그 무용함에 대한 고민이 조정래의 정의로 명쾌해졌다. 물론 그 명쾌함이 지극히 온당한 것은 아니나 나름 언어로 육화할 수 있기에 가슴에 닿았다. 문학이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는 정의는 조정래 문학관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말이다. 그의 글이 그래왔고 그의 삶이 그래왔으니 이러한 정의는 지당하고 또 지극히 설득력 있었다.

조정래 덕분에 나는 학창시절 남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세상을 겹눈으로 보려 노력했다. 덕분에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으며 힘에 대한 맹목적 추구는 점점 사위어 갔다. 구월의 이틀마냥 당시 1년은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내 성긴 하루와 자늑자늑 이어지는 삶속에서 말을 이야기를 한다.

왜 내가 빨갱이가 되지 않았냐는 질문은 그 친구 외에도 ‘프레시안’ 기자로 일하는 친구와 진보신당 진성당원으로 열렬히 활동했던 절친한 형 또한 했던 질문이다. 답하자면 조정래의 글은 내 삶을 변화시켰지만 규정짓진 않았다. 그 울림이 작아서라기 보단 내 고민에 대한 해답으론 다소 야위었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입으로만 좌파를 부르짖으며 미시파시즘을 행하는 사람이나 물질적 쾌락은 오롯이 누린 채 좌파를 부르짖는 ‘강남좌파’의 덜된 자기 객관화와 비겁함만은 갖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여전히 내 삶은 현실에 대한 던적스러움과 ‘권력에의 의지’의 길항작용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이 충돌을 감내하지 못해 흐느적거리며 현실을 영위한다. 덕분에, 이 책은 무엇보다 나를 돌아보게 하였다. 그 때의 1년이 가슴에 여울지며 다시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첨언하자면 시사인에서 나온 책이다. 조정래답고 온당 그리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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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상처 - 김훈 기행산문집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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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배와 파스타를 먹고 학교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후배는 내 표현력이 좋다며 나를 추어올렸다. 최근 김훈 씨 소설을 많이 봐서 그럴 거라 답했다. 그 애는 남자들은 대부분 김훈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일반화를 내렸다. 나는 김훈의 글이 가진 허무성과 힘을 부정하지 않는 보수주의의 매력 덕이라 했다. 그 말은 즉각적으로 나왔지만 여태껏 여투어둔 생각의 결정이 언어화 된 것이었다. 그랬다. 내게 김훈은 과한 문장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시쁘게 여기지 않는 허무적 보수주의자였다.

 이 책은 이러한 정의와는 다소 빗겨있다. 아무래도 그가 기자시절 썼던 글모음이라서 그럴 테다. 서사라는 고갱이가 빠진 그의 글은 아무래도 공허하다. 레토릭은 강하고 말은 차고 또 넘친다. 사물의 외양을 오롯이 글로 나타내려는 닿지 않는 노력이 안타깝다. 외양에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으려는 언어의 성찬이 다소 가벼이 느껴지는 건 이러한 미욱한 노력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때의 김훈은 지금처럼 문장이 짧지 않고 생각이 날카롭게 벼려있지 않다. 두루뭉술한 느낌을 나타내기 위해 과한 레토릭에 의존하는 나약함도 보인다.

 기실 그는 책의 뒤편에 이 글은 완성이 아니라 흔적이라고 했다. 이제 이런 문장을 쓰지 않으며 그는 삶의 일상성과 구체성을 추수하듯이 챙기는 글을 쓰고 싶다고 한다. 그 또한 15년 동안 제 스스로 갈무리한 문장과 적확한 언어들에 비해 비루하고 가난한 과거의 글이 마뜩찮았을 테다. 그럼에도 이런 책을 낸 건 자신의 과거를 오롯이 감싸 안으려는 예의 그 보수주의와 더불어 출판사의 판매 전략이 작용한 탓일 테다.

 다만 글에 관한 그의 자잘하고 너른 생각들은 유심히 읽어볼 만하다. 미당의 글에 대한 예찬과 천상병에 대한 야릇한 그리움, 또 신경숙의 말을 파헤치고 쪼개려는 그 말들은 청신하다. 헌데 고종석의 글과 비교하면 김훈의 문학에 대한 평은 덜 아름답다. 고종석은 ‘모국어의 속살’이란 책을 통해(한국일보에 연재한 칼럼이기도 하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시에 버금가는 언어들로 찬란히 풀어냈다. 과거의 글과 현재의 글 사이에서 주례사 비평이 아닌 앙칼진 비평도 쏟아내고 제 스스로의 욕심도 드러내는 솔직한 글쓰기는 책 속 시만큼 아름다웠다. 헌데 김훈은 꾸준히 말로 시인을 드높이고 글로 시를 감싸려하니 핍진한 언어가 더욱 빈약해 보인다. 물론 두 글의 시차를 감안해야겠지만 고종석의 문장을 더 높이 쳐줄 수밖에 없는 명징한 차이가 있다.

 기자라는 직함에 갇혀 문학성을 억누르던 김훈의 짓누름이 최근의 다작이란 드러냄으로 나타난다면 이 책은 그 시발점이다. 그는 이 산문을 통해 자신을 가두고 있던 기자의 틀을 벗어 던지고 제 말을 마음껏 휘두른다. 바르고 정확한 말만 구사해야 하는 기자란 직업 속에 벼리고 쟁여둔 말이 거침없이 쏟아지다 보니 독자에 대한 배려는 부족했던 듯하다. 그 화려한 풍경이 상처로 남은 이유다.

 여전히 나는 김훈의 글을 부지불식간에 따라하고 또 그의 생각과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한다. 김훈이 비교적 젊은 시절에 남긴 이 글은 그 또한 많은 시간을 들여 제 글을 살찌웠단 걸 알게 해준다. 문학을 꿈꾸는 이에겐 이 책이 조바심을 다소 눅여줄 듯하다. 그도 시간의 세례를 받아 자신을 완성했음을 이 책은 오롯이 증명한다. ‘던적스럽다’나 ‘비루하다’란 말이 잘 어울리는 요즘 세상에 김훈의 글은 더 빛이 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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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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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책을 예전부터 읽고 싶었다. 인생의 제 맘대로 사는 친구에게 조르바라는 별명을 붙여주고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이름을 들먹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기실 이 책을 읽지 않은 채 조르바를 이야기 했고 왠지 모를 죄스러움은 이 책을 언제가 갚아야 빚으로 남게 했다. 때마침 알라딘에서 서평 대회도 하니 이제 이 책을 읽을 때가 됐다고 여겼다. 헌데 이 책, 읽기가 만만찮았다.

 한 소설을 읽을 때 어느 정도 소설 배경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얼마 전 타계한 레비스트로스의 이야기처럼 사회를 이해하는 덴 말로 드러나는 의식 보다 무의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헌데 그리스 문학은 호메로스의 이야기 외에 낯설기 마련이다. 또한 이 책은 카잔차키스에 대한 이해, 그리스 정교에 대한 이해, 그리스와 터키의 관계에 대한 이해, 무엇보다 그리스 문화에 대한 이해가 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 이윤기 씨가 이름난 번역가임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쉬이 넘어가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무의식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대신 난 조르바의 언행에 집중해서 책을 읽었다. 이 책 속 조르바와 화자야 말로 니체가 이야기한 디오니스소와 아폴론적 인간의 전형적이며 절대적 사례다. 조르바는 제 자신에 충실하고 배가 터질 때까지 버찌를 먹으며 무중력인간처럼 춤을 추고선 제 자유의지를 중요시 한다. 이에 반해 작품 속 화자는 스스로의 정념을 잡으려 애쓰고 항상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하며 불교의 윤회사상에 심취해 있다. 조르바는 화자를 답답해하고 화자는 조르바에게 많은 걸 배운다. 니체가 말했듯 문명에 의해 억압되어 있던 디오니스소적 인간이 아폴론적 인간을 압도하는 광경이다. 화자는 조르바에게서 차라투스트라의 현현(顯現)을 보는 듯한 감동을 느끼고 그에게서 많은 걸 배운다. 카잔차키스가 니체의 사상에 심취했다는 걸 안다면 이러한 극적 구성은 지극히 그럴 듯하다.

 또한 조르바의 말은 거친 언어가 조합해 낸 생활 속 아포리즘이다. 책을 많이 읽었기에 말이 무겁고 행동이 굼뜬 화자를 탓하며 제멋대로 행동하고 말을 내뱉는 조르바다. 그는 화자보다 더 당당하고 씩씩하다. 화자는 제 불민함을 탓하며 반성하는 지식인으로 조르바를 아끼고 존중한다. 특히 화자를 ‘두목’으로 부르는 조르바는 사물에 이름을 제 멋대로 부르며 사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 명명철학으로도 볼 수 있는 이러한 이름 짓기는 조르바의 깊음이 철학적 숭고함과도 맞닿아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조르바가 매력적인 이유다.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전부터 조르바처럼 살고 싶었고 허랑방탕한 삶을 꿈꿨다. 조르바와 같은 인물이 주위에 많았으면 하는 바람도 가졌다. 다만 현 사회는 조르바와 같은 인간을 알아 줄 현인이 많지 않고 그를 실패자로 낙인찍을 것이 분명하다. 학문의 진입 장벽이 높아지고 학자간의 카르텔이 강해지는 현실은 조르바와 같은 인물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풍토를 말해 준다. 아마 니체가 현 사회에 살고 있었다면 역사적 발전에 수반되는 폭력에 대한 성토 대신 현실의 두터운 장벽을 증언하다 미쳐버렸을지 모른다. 점점 디오니소스적인 면을 억압하고 아폴론적인 면을 찬양하는 현 세태는 조르바식 자유분방함을 태생적으로 싫어할지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이 더 필요하다. 거짓 언어가 횡행하고 말이 넘치는 요즘 세상에서 조르바와 같은 사람이 많아지는 게 세상을 밝게 할 테다. 혹 이미 내 주위에 있는 조르바를 나 역시 홀대 했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나는 항상 스스로를 낮추고 사람을 대하려 한다. 나는 ‘한국인 조르바’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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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11-22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바밤바님. 가끔 눈팅하다가 조르바가 반가워서, 오늘 즐겨찾기에도 등록하고 덧글도 처음으로 남겨요. 흐흐. 여기저기 건너서 이름은 몇번 들었었는데 말이죠. ^-^

저는 조르바가 두목 심부름 갔다가 한참동안 안와서 두목이 막 화를 내야지, 결심하는데 정작 조르바가 오니까 속으로는 너무 좋아서 화도 잘 못내던 (아, 이 표현력 하고는 -_-) 그 장면 정말 좋아해요. ^-^

바밤바 2009-11-22 21:14   좋아요 0 | URL
ㅎ 안녕하세요~ 저도 웬디양님 여기저기서 많이 뵈었습니다~ㅎ
두목이란 호칭이 참 좋았던거 같아요. 저도 사람들 호칭을 제 맘대로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이게 '생활의 조르바화'라 여기며 꾸준히 실행하고 있답니다^^

비로그인 2009-11-22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바뀌었나 보네요.

조르바.. 그를 생각하면 사람들 북적거리는 시장통이 먼저 생각납니다. 먹물냄새없는, 어떤 "그래야 할" 의무 같은 것도 없는 것 말이죠.

그의 얘기를 들으며 푸코의 책을 연상하는 것은 비약일까요? 저는 수많은 보이지 않는 감옥들을 거쳐온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어느 저녁에 해 봅니다..

바밤바 2009-11-23 15:42   좋아요 0 | URL
그 유명한 표지는 절판 된거 같더군요~ 조르바와 푸코라.. 어느정도 닿는 부분이 있네요^^ㅎ
 
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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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의 이름과 그들의 배경은 명쾌하다. 금과 은이란 동년배 친구는 말 그대로 씨줄과 날줄이 되어 이야기를 직조한다. 한 쪽에 치우치지 않던 얘기는 뒤로 갈수록 갸우뚱 한다. 성적 취향에 대한 고민이란 또 다른 더께가 얹어진 은 때문이다. 니체식 권력에 대한 의지와 히틀러식 힘에 대한 무한 추종이 느껴진다. 다만 그러한 추종을 드러내는 방식이 사뭇 자의적이고 폭력적이다. 즉 독자가 충분히 공감케 하기 힘든 성긴 구석이 보인다.

 우선 금과 은을 니체 식으로 분류하자면 금은 디오니소스에 가깝고 은은 아폴로에 가깝다. 금은 쾌락을 좇고 은은 절제와 배격의 자세를 보인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와도 견줄만 하다. 헌데 은의 과한 절제는 후에 성적 취향에 의한 자기혐오가 뒤엉킨 방어기제의 결과라는 게 드러난다. 이러한 절제와 쾌락의 이중주가 가정의 불화와 갖가지 이유로 인해 다른 양상을 띠면서 둘의 경계는 무뎌진다. 특히 둘이 몸을 섞으면서 권력 관계가 역전되고 사랑 앞에 약자가 된 금이 문학을 탐하고 은이 권력을 탐하는 건 다소 상투적이다. 물론 소설적 구성은 뛰어나다.

 이야기의 시작은 조금 도식적이다. 금은 태생적으로 한국 정치에 민감한 전라도 출신이고 은은 상대적으로 우파 프레임에 갇혀있는 부산 출신이다. 금의 아버지가 지역 정치에 뛰어든 배경 외에 그의 언어가 좀 더 공격적이고 정치지향적인 이유는 이러한 성장배경에 있다. 이에 반해 은은 부산이란 도시 덕에 문학이란 탈출구를 오롯이 탐닉할 수 있었다. 다만 문학의 열정이 권력에 대한 탐미로 전이되는 과정이 매끄럽지 않다. 문학을 니체식의 ‘약자의 원한’이 점철된 패자의 변명 정도로 여기게 된 이유가 아비의 무능함 때문인지 타고난 본성 때문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섬세함과 예리함을 가지고 있던 한 지성이 순수 우파로 전향하는 과정에 대한 깊은 고찰이 아쉬웠다.

 다만 히틀러가 그림을 좋아하던 우수어린 청년에서 1차 대전 이후 권력의 맛을 알게 돼 변모하는 과정을 은이란 인물을 통해 드러낸 듯도 하다. 그러다 보니 은이 커서 무엇이 될지가 상당히 궁금하였는데 이 소설에선 단지 1년의 혼돈을 나타낼 뿐이라 다소 아쉬웠다. 또한 뒤로 갈수록 취재가 부족했다는 걸 느꼈다. 금과 은이 다니는 학교가 연세대라는 건 쉽게 알 수 있는 데 내가 알고 있는 현 학교의 모습과 충돌하는 장면이 몇몇 눈에 띄었다. 또한 성관계가 지극히 쉽게 일어나는 장정일 식 일탈은 소설적 장치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아쉬운 점이었다. 거북선생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읊조리며 우파의 사상적 빈곤을 토로할 땐 장정일 식 공격성이 다시 불거져 나오는 듯하여 다소 안타까웠다. 무엇보다 장정일 본인이 클래식 마니아이므로 자신의 부르주아적 취미에 대한 죄스러움을 거북선생을 통해 위악(僞惡)적으로 드러낸 듯 했다. 보수 언론과 뉴라이트에 대한 악감정을 드러내는 방식도 좀 더 세련됐으면 했다.

 장정일은 작가의 말을 통해 ‘은과 금’이 될 뻔 했던 책 제목이 류시화 시인을 만나 ‘구월의 이틀’로 정해졌다 말한다. 헌데 제목이 소설 속 은의 이야기처럼 모든 이야기를 다 아우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이야기는 1년 만에 일어나기엔 밀도가 높고 진폭이 크며 이틀 만에 일어나기엔 다소 헐겁다. 물론 삶을 반추해보았을 때 어떤 1년이 평소의 10년에 준하는 위용을 띨 때가 있다. 레닌 또한 혁명기의 1주일은 평소의 10년과 맞먹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다만 한 개인의 삶에 헤르만 헤세가 묻어나고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몰아치며 온갖 정치적 함의와 성적 충돌이 뒤엉키는 1년은 너무나 소설적이다. 물론 그래서 사람은 소설을 읽을지 모른다. 또한 어느 구월의 이틀마냥 물리적 시간으로 재단하기에 그들의 삶은 꾸준히 현재 진행형이었고 이전 보다 이후의 삶이 더 치열할 것은 자명해 보인다.

 갖가지 통찰이 빛났던 경직돼 있는 후반부 때문에 빛이 바랬다. 마치 매력적인 주제 선율을 제시하고선 뒤로 갈수록 다소 성긴 느낌을 주는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같다. 이야기는 쉽게 읽히고 어느 정도 몽환적이지만 현실적 치열함은 다소 덜 해 보인다. 장정일은 글은 그의 ‘독서 일기’나 ‘공부’를 읽은 게 다다. 물론 이 소설에서도 그의 방대한 독서량이 문장 곳곳에 묻어난다. 다만 이야기가 이야기의 뒷부분도 앞부분만큼 재기발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구월의 이틀만큼 나의 하루가 치열했는지 되묻는 계기가 되어 좋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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