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산 -하 을유세계문학전집 2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다. 실체가 없으면서 전능한 것이다. 현상계(現象界)의 하나의 조건으로 공간 속에 존재하는 물체와 그것의 운동과 결부되고 혼합된 하나의 운동이다. 그러면 운동이 없으면 시간도 없는 걸까? 뭐든 물어 보라! 시간은 공간이 행하는 기능의 하나인가? 또는 그 반대일까? 또는 두 개가 동일한 것일까? 얼마든지 물어 보라! 시간은 활동적이고, 동사적인 속성을 갖고 있어, 그것은 '낳는' 힘을 지닌다. 그러면 시간은 무엇을 낳을까? 변화를 낳는 것이다! 지금이 당시가 아니고, 이곳이 저곳이 아닌 것은, 이 두 개 사이에 운동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을 재는 운동은 순환적이고, 자체적으로 완결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운동과 변화는 거의 정지와 정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당시는 부단히 현재 속에, 저곳은 이곳 속에 쉬지 않고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한한 시간과 한정된 공간이라는 개념은 아무리 필사적인 노력을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영원하고 무한하다고 '생각'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분명 이게 사리에 맞을 거리는 믿음에서, 딱히 옳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좀 더 나을 거라는 믿음에서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과 무한한 것을 확실하게 정한다는 것은 한정된 것과 유한한 것을 논리적으로나 수학적으로 부정하고, 상대적으로 그것을 영(零)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닐까? 거리, 운동, 변화 같은 개념들이나, 또는 우주 속의 한정된 물체라는 존재가 영원한 것과 무한한 것이라는 임시적인 가정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좌우간 얼마든지 물어 보라!

  

한스 카스토르프는 머릿속에서 이런 것을, 이와 유사한 것을 물어 보았다. 그의 머리는 이 위에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고 꼬치꼬치 캐묻는 것에 적합한 본성을 드러냈다. 그 후로 점잖지 못하지만 강력한 욕구를 충족하고 난 후 어쩌면 특히 이런 것에 예민해지고, 이것저것 따지는 데 대담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러한 질문을 자기 자신과 선량한 요아힘에게 했고, 아득히 먼 옛날부터 눈에 잔뜩 뒤덮여 있는 골짜기에게도 했지만,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그럴듯한 대답을 기대할 수 없었다.(9∼10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6장》, <변화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7-09-02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마스 만의 이야기가 일전에 oren님께서 말씀하신 베르그송의 시간과도 연계되지 않을까 조심럽게 추측해 봅니다...

oren 2017-09-02 14:00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마의 산』 속에 나오는 ‘시간과 공간 이야기‘를 들으면 흡사 베르그송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베르그송이 직접 영문으로 번역한 책의 제목은 『시간과 자유의지』)을 ‘복습‘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9-02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렇군요.. 후에 <마의 산>을 읽기 전 베르그송에 대해 미리 공부해야겠습니다. oren님 덕분에 학습 계획을 세우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oren 2017-09-02 23:56   좋아요 1 | URL
철학자 베르그송은 여러모로 참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철학 사상도 몹시 흥미롭지만, 그가 구사하는 문장도 여간 매혹적인 게 아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