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러므로 나는 외롭지 않다.

 

젊은 날의 아리스토텔레스. 두 발을 편안하게 꼰 채 푹신한 의자에 앉아, 한 손은 옆으로 늘어뜨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마를 받친 자세로 무릎 위에 펼쳐진 두루마리를 읽고 있다. 베르길리우스가 죽고 1500년의 세월이 더 흐른 뒤에 그려진 그의 초상화. 터번을 쓰고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베르길리우스가 한 손으로 유난히 튀어나온 콧등 위에 '틀안경'을 잡고서 책장을 넘기고 있다.

 

······ 어부이자 수필가였던 아이작 월턴이 웬체스터 성당 가까이 흐르는 이첸 강가에서 자그마한 책을 읽는 모습을 그린 그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스테인드 글라스 화가가 던지는 충고는 바로 "조용하도록 애쓰라(Study to be quiet)"이다.

 

······ 앞을 못 보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책 읽어 주는 사람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더 분명하게 들으려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

 

이들 모두가 독서가다. 그들의 몸짓, 기술, 독서를 통해 얻는 기쁨과 책임감과 지식은 나의 그것과 똑같다. 그러므로 나는 외롭지 않다.(9∼12쪽)

 

(나의 생각)

책의 시작부터 뭔가 범상치 않다. '젊은 날의 아리스토텔레스'로 시작되는 책도 다 있구나 싶다. 책의 첫 머리에 실어 놓은 열여덟 장의 사진들도 하나같이 다들 인상적이다. 기대 만발이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 아니면 이해의 단서를 얻기 위해 읽는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또 어디쯤 서 있는지를 살피려고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읽는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 아니면 이해의 단서를 얻기 위해 읽는다. 우리는 뭔가를 읽지 않고는 배겨 내지 못한다. 독서는 숨쉬는 행위만큼이나 필수적인 기능이라고 하겠다.(15쪽)

 

 

그러므로 나는 외롭지 않다.

 

이들 모두가 독서가다. 그들의 몸짓, 기술, 독서를 통해 얻는 기쁨과 책임감과 지식은 나의 그것과 똑같다. 그러므로 나는 외롭지 않다.(9∼12쪽)

 

 

1백만 권의 자서전

 

캐나다의 수필가인 스탠 퍼스키는 언젠가 나에게 "독서가들에게는 이 세상에 1백만 권의 자서전이 있음에 틀림없어" 라고 말했다. 우리 인간들은 책 한 권 한 권에서 우리네 삶의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 같다는 뜻에서였다. 버지니아 울프도 "해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을 새로 읽고 그때마다 감동을 글로 남기면 그것은 사실상 우리 자신들의 자서전을 기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인생 경험이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인생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해석도 그만큼 더 절실하게 와닿기 때문이다" 라고 적고 있다.(19쪽)

 

 

어린 시절의 독서야말로

 

미국의 심리학자인 제임스 힐먼은 어린 시절에 이야기를 직접 읽었거나 다른 사람이 읽어 주는 것을 들으면서 성장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줄거리로만 듣고 자란 사람들에 비해 예지력이 훨씬 뛰어나고 정신 발달 상태도 더 낫다고 주장했다. 일찍부터 삶을 경험한다는 것, 그것은 이미 인생에 대한 전망을 얻는 것이다. 힐먼은 어린 시절의 독서야말로 몸소 경험하며 살아 본 듯한 그 어떤 것으로 남게 된다고 보았는데, 그게 바로 영혼의 깊이를 더하는 길이 아닐까.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끊임없이 그런 책 읽기로 되돌아갔고 지금도 그런 되풀이를 거듭하고 있다.(20쪽)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싶은 욕망과 가능한 한 결말 부분을 늦추려는 욕망 사이

 

보모가 편물기계 일을 가느라 자리를 비우거나 내 방 건너편 침실에서 코를 골며 잠에 빠질 때면 나는 침대 옆 램프를 켜곤 했다. 그렇게 책에 빠져들면 나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싶은 욕망과 가능한 한 결말 부분을 늦추려는 욕망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었다. 아주 재미있는 대목이면 몇 쪽 앞으로 되돌아가 그 부분을 다시 음미하면서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놓쳐 버렸던 세부적인 내용까지 다시 잡아 내려고 무척 노력했다.(21쪽)

 

(나의 생각)

까마득한 옛날 '어린이 세계문학전집'을 읽던 그 시절의 나 또한 그랬었다. 그토록 오래 전의 기억들이 망겔의 책 덕분에 순식간에 다시금 떠오르게 될 줄이야. '맞아, 맞아'

 

 

나는 '맞아, 맞아' 라고 중얼거리면서

 

책 한 권 한 권은 나름대로 하나의 세계였고 그곳에서 나는 안식처를 찾았다. 비록 나 자신은 내가 즐겨 읽던 작가들의 작품처럼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 낼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더러는 내 의견이 작가들의 것과 일치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몽테뉴의 표현대로) "나는 '맞아, 맞아' 라고 중얼거리면서 그 작가들보다 훨씬 뒤처져서 그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21∼22쪽)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다시 그 부분을 펴보면

 

발터 벤야민도 그와 똑같은 경험을 이렇게 묘사했다. "······ 누구든 책을 독파하지는 못한다. 어느 대목에 한참 머물며 맛을 음미했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다시 그 부분을 펴보면 당신의 눈길이 머물렀던 그 문장의 새로움에 깜짝 놀랄 때도 있지 않은가."(22∼23쪽)

 

 

그러므로 나는 외롭지 않다.

 

『작은 아씨들』과 『허클베리핀의 모험』을 사들고 오던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이들 책에는 한결같이 '이 책이 쓰여지게 된 사연'이란 제목으로 메이 램버턴 베커가 쓴 서문이 실려 있었다. 그 서문에 담긴 가벼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나에게는 책을 이야기하는 방식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방법의 하나로 보인다. 『보물섬』에 쓴 베커 여사의 서문은 다음과 같다. "그래서 1880년 9월의 어느 차가운 아침, 스코틀랜드의 빗줄기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스티븐슨은 벽난로 쪽으로 다가가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24쪽)

 

그 책과는 도저히 헤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책들 중 많은 것들이 먼지를 털어 내는 차원을 넘어 마구 나를 유혹하는 게 아닌가. 그 책들은 마치 나의 손에 잡혀서 책장이 넘겨지고 또 자세히 검토되기를 바라는 듯했다. 간혹 책장을 살피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몇 번은 유혹에 못이겨 책을 훔치기도 했다. ····· 소설가 자메이카 킨케이드도 어린 시절 안티과에서 도서관에 다니다가 책을 훔쳤다는 비슷한 죄를 고백하면서 자신의 의도는 책을 훔치는 것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던 적이 있다. "단지 어떤 책의 경우 읽고 나면 그 책과는 도저히 헤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28∼29쪽)

 

(나의 생각)

나는 왜 여태까지 '책 한 권' 훔쳐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

 

 

그는 서점을 떠날 때쯤 나에게 저녁 시간에 바쁜지 물어 왔다

 

어느 날 오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여든여덟 살 된 노모의 손에 이끌려 그 서점을 찾아왔다. 당시 그는 이미 유명한 인물이었는데도 나는 그의 시 몇 편과 소설을 읽었을 뿐 아직 그의 문학에 압도감을 느끼지는 않던 때였다. 그는 거의 맹인이나 다름없었지만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를 거부했으며 서점에 들르면 마치 손가락으로도 제목을 볼 수 있다는 듯이 손으로 서가를 훑곤 했다. 보르헤스는 당시 자신이 막 열정을 쏟고 있던 영어를 연마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고 있었는데, 그를 위해 우리는 월터 윌리엄 스키트의 사전과 주해가 붙은 『몰던의 전투Battle of Malden』를 주문해 주었다. ······ 마침내 그는 몸을 돌려 나에게 책 몇 권을 주문했다. 나는 그 중 몇 권을 찾아 줬고 나머지 책은 서지 사항 등을 적어 두었는데, 그는 서점을 떠날 때쯤 나에게 저녁 시간에 바쁜지 물어 왔다. ······

 

그 후 2년 동안 나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다른 우연한 만남이 그러하듯, 저녁 시간이나 또 학교가 허락할 때는 아침 시간에도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31∼32쪽)

 

 

이미 보르헤스가 죄다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거실에서, 로마의 원형 폐허를 조각한 피라네시의 작품 아래에서 나는 키플링, 스티븐슨, 헨리 제임스, 브로크하우스 독일어 백과사전의 몇 개 항목, 마리노, 앙리크 방크, 그리고 하이네의 시들을 읽었다(그렇지만 이들 시는 이미 보르헤스가 죄다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머뭇거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곧 이어 그가 한 구절 한 구절 기억 속에서 되살려 낼 때면 나의 책 읽기는 방해를 받곤 했다. 보르헤스의 망설임은 오로지 시의 가락에서 나타날 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던 시어에서는 절대로 그러질 않았다).(32쪽)

 

 

일종의 행복한 포로처럼

 

에블린 워의 작품 중에는 아마존 정글 깊숙한 곳에서 위험에 처했다가 구조받은 사람이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의 강요로 남은 인생 내내 디킨스의 작품을 큰 소리로 읽어 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보르헤스에게 글을 읽어 주는 일을 두고 나는 그저 하루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만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그 경험은 일종의 행복한 포로처럼 느끼게 했다.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보르헤스가 나에게 안겨 준 텍스트 그 자체였다기보다는(그들 중 상당수는 결국 나 자신도 사랑하는 작품이 되었지만), 광범위하면서도 전혀 막힘 없이 해박하고, 매우 재미있고, 가끔은 잔인하지만 거의 언제나 무시할 수 없는 그의 논평이었다.(35쪽)

 

 

독서는 등비급수적으로 진행된다

 

독서는 누적적이어서 등비급수적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나는 재빨리 깨달았다. 독서를 할 때마다 읽은 내용은 그전까지 읽었던 것들 위에 덧쌓인다는 말이다. 보르헤스가 나에게 선택해 주는 작품에는 언제나 선입견부터 앞섰다. 키플링의 산문은 딱딱하다든지, 스티븐슨의 문체는 유치하다든지, 조이스의 것은 난해하다든지 ······. 그러나 곧바로 그런 편견은 경험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고, 한 작품의 발견은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작품을 기대하도록 만들었으며, 그 작품들은 보르헤스의 반응과 나 자신의 반응에 대한 기억으로 더욱 풍요롭게 되었다. (36쪽)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

 

그의 반응에 자극을 받아 나는 나 혼자 읽었을 때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까지도 이제는 마치 이미 오래 전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을 회상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전에 다른 책을 읽었을 때를 회상하고 서로 비교하면서 그때의 감정을 불러내는 사람들도 있다"고 아르헨티나의 작가인 에세키엘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는 촌평했다.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 보르헤스는 체계적인 도서 목록을 불신하고 그런 간통 같은 독서를 권장했다.(37쪽)

 

 

독서가의 '막연한 명성'

 

그렇지만 책 읽기를 두려워하는 건 전체주의 정권만은 아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정부 관공서나 교도소 못지않게 학교 운동장이나 탈의실에서도 구박을 당한다. 거의 모든 곳에서 독서가라는 공동체는 그 자체가 풍기는 기득권에서 비롯된 막연한 명성을 안고 있다. 독서가와 책의 관계가 갖는 어떤 특성은 현명하고 유익한 것으로 인식되는 한편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세상의 소란함에는 무관심한 듯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한 인간의 이미지가 침범할 수 없는 프리이버시와 이기적인 눈길, 그리고 은밀한 행동을 풍기기 때문이다(내 어머니께서는 내가 책 읽는 모습을 보면 마치 나의 조용한 행동이 인생에 대한 당신의 판단과는 모순된다는 듯이 "밖에 나가서 놀아라!" 하고 꾸짖곤 했다.). 책을 읽는 사람이 책에 파묻혀 무슨 꿍꿍이수작이라도 부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남자들이 여자를 마주할 때 여체의 은밀한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 그리고 요술쟁이나 연금술사들이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컴컴한 곳에서 어떤 짓을 하는지에 대해 느끼게 되는 두려움과 별 차이가 없다.(39쪽)

 

 

그래서 나는 야심만만하게도 독서 행위의 역사로 나아가려 한다

 

그래서 나는 야심만만하게도 독서가로서의 나 개인의 역사에서 벗어나 독서 행위의 역사로 나아가려 한다. 아니 여러 독서의 역사 중 하나로 나아가려 한다. 역사는 어떤 것이든-역사란 특별한 직관과 개인적인 환경의 산물이랄 수 있다-철저히 개인적인 특성을 배제시킨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여러 개인 역사 중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40쪽)

 

 

독서의 역사와 문학 비평사의 순서

 

독서의 역사는 문학 비평사의 순서를 그대로 따를 수도 없다. 그 이유는 19세기의 신비주의자인 안나 카타리나 엠머리히가 표현한 우려(인쇄된 텍스트는 결코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담을 수 없다)의 경우 그보다 2천 년 앞서서 소크라테스(책이 배움에 방해 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에 의해, 그리고 우리 시대에는 독일의 비평가인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문맹을 칭송하고 구술 문학이 갖는 본래의 장조성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했다)에 의해 훨씬 더 강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41쪽)

 

 

만약 당신이 책을 한 권 들고 있다면

 

독서 행위 그 자체처럼, 독서의 역사는 우리 당대로-나를 향해서, 그리고 독서가로서의 내 경험을 향해서-돌진해 왔다가 아득히 먼 세기의 첫 페이지로 되돌아간다. 독서의 역사는 장(章)을 뛰어넘기도 하고 대충 훑거나 선별해 읽고 또다시 읽기도 하면서 판에 박힌 순서를 따르길 거부한다. 역설적이지만, 독서 행위를 역동적인 삶과 반대되는 일로 파악했던 그 두려움은, 나의 어머니로 하그음 나를 의자와 책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리고 열린 공간으로 나가도록 내몰게 했던 그 두려움은 정말 엄숙한 진실을 인정하고 있다. 터키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하얀 성』에서 '편도 마차 승차권으로는 한번 여행이 끝나고 나면 다시는 삶이라는 마차에 오를 수 없다"라고 적은 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책을 한 권 들고 있다면, 그 책이 아무리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당신은 그 책을 다 읽은 뒤 언제든지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음으로써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고 그것을 무기로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라고 덧붙이고 있다.(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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