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슬프다! 대체로 계책의 설익음과 무르익음과 성패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깊구나!

 - 사마천, 『사기』 중에서

 

 * * *

 

까마득한 과거의 역사를 읽는 동안에 우리가 처한 눈 앞의 현실을 겹쳐 떠올리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역사의 거울'에 비춰 보면 오늘날의 복잡다단한 일들이 뜻밖에도 몹시 선명하게 그 본질을 드러내 밝혀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할 때에도 그랬다. 그때 읽었던 역사책들 속에서 박근혜 정부의 잘못이 얼마만큼 더 뚜렷하게 드러났는지를 이제 와서 새삼 들춰낼 필요가 있을까.

 

박근혜 정부가 온갖 실정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국정을 농단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다 드러나고 말았을 때, 국민들이 한겨울 추위를 마다 않고 저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외친 단 하나의 구호는 '이게 나라냐'는 거였다. 그만큼 국민들은 대통령의 '제멋대로식 권력 행사'에 대해 거센 분노를 쏟아냈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은 통치자에게 그런 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라고 나라를 맡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명제가 그때만큼 절절하게 국민들의 가슴을 파고 든 적도 일찌기 없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끝끝내 자신의 잘못을 사과할 줄 몰랐다. 수차례에 걸친 대국민 담화와 변호인의 기자 회견과 특검의 수사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과정에서 '일관되게' 국민들에게 보여준 것이라고는 '거짓과 변명' 뿐이었다.

 

요즘 푹 빠져 읽고 있는 역사책은 사마천의 『사기 열전』인데, 이 유명한 역사책을 읽는 동안에도 오늘날 우리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실 속의 사건들이 너무 자주 오버랩된다. 사마천의 책은 기원전 91년에 완성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110년 전에 나온 셈이다. 이토록 오래 전에 쓰여진 책인데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며, 21세기에 우리들의 목전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까지도 명쾌하게 비춰주는 거울 같은 느낌을 주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으려는 인간들의 처절한 생존 투쟁과 인간의 변치 않는 본성들이 그 책 속에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책은 온갖 권모술수가 '역사상 유례가 드물 정도로 난무하던' 저 유명한 춘추전국시대를 주된 시대 배경으로 다루는 데다가, 그 당시 전국 7웅(戰國 七雄)이라고 일컬어지던 일곱 나라가 국가의 존망을 둘러싸고 온갖 비상한 책략과 술책을 총동원했던 까닭에, 오늘날 총성 없는 전쟁이나 마찬가지인 '국가 간의 무역 전쟁'을 연상시키는 대목들이 아주 많이 등장한다. 특히나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 절박한 과제로 불쑥 떠오른 '한일 무역 전쟁'을 둘러싼 양국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보노라면 사마천의 『사기』에 담긴 이야기들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더군다나 이번 무역 전쟁이 어느새 '통상적인 무역 분쟁'이 아니라 '어느 한쪽은 옳고 다른 한쪽은 그르다'는 식의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중차대한 전쟁'으로 차츰 확대되고 변질되는 모습은 자못 이채롭기까지 하다. 더군다나 이같은 사건 전개 양상이 양쪽 집권 세력의 교모하고도 주도면밀한 전략 또는 다소 고의적인 상대방 무시 전략 때문에 빚어졌다는 의심까지 불러일으키는 형국에 이르렀고, 이번 분쟁을 둘러싼 온갖 해법과 논쟁과 해석들이 백가쟁명식으로 쏟아지는 것도 모자라, 같은 나라 안에서도 '무역 전쟁의 원인과 대응 방식'을 놓고 서로 치열한 세력 다툼까지 벌이는 지경에 이르고 보니, 이래저래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는 처지에 놓인 국민들로서는 그저 황망할 뿐이다.

 

이 문제가 양국 사이의 '불행한 과거사' 때문에 빚어진 일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한 양국 사이의 정치외교적인 갈등 때문에 빚어진 문제를 치졸한 '경제 보복'으로 옮겨 간 아베 정권의 잘못을 부인할 사람도 우리나라 국민들한테서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 정부의 대응은 근본적인 사태 해결 방식인 '외교적인 접근'은 등한시한 채 '무역보복의 부당성'에만 촛점을 맞추는 것인가.

 

물론 처음엔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기습적으로, 그것도 몹시 치졸한 방식으로 '급소'를 아주 세게 얻어맞았으므로 거기에 마땅한 거센 분노를 터뜨리고, 일본을 부리나케 찾아가서라도 따지고 항의하고, 국제 여론에도 이번 조치의 부당성을 구구절절 호소하고, 세계 만방에 우리의 억울함을 알리는 게 지극히 당연하고도 마땅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일본의 기습적인 '무역 보복' 조치가 발표되고도 무려 일주일 가까이 침묵했더랬다. 몹시 기이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 '기나긴 침묵' 자체가 이번 사태를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한편의 무언극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뭔가 몹시 걱정하고 우려하던 일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는데, 정작 그 일을 당하고 나니 너무나 당혹스러운데다가 막상 뚜렷한 대응방법조차 없어서 몹시 당황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부터 들었다.

 

과연 그랬다. 대통령도 일본의 보복 조치 이후 최초의 공식적인 대응에서 분명하게 밝혔듯이, 이번 문제는 결국 외교적으로 푸는 게 최선인데도, 도무지 그 해법이 마땅치 않아서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번 사태가 치졸한 무역 보복으로까지 비화한 데는 우리에게도 몇 가지 귀책 사유가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마땅한 어휘를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귀책 사유'라고 표현했지만 우리에게 무슨 크나큰 잘못이 있다기보다는 상대방이 강력하게 항의할 만한 '빌미'를 제공했다는 의미로 쓴 단어일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귀책 사유란 폭넓게는 1965년의 한일협정까지도 포함될 수 있으며, 좁게 보자면 박근혜 정부에서 졸속으로 처리한 '최종적이고도 불가역적인' 위안부 합의, 2018년 10월에 내려진 대법원의 배상 판결, 대법원의 판결이 필연적으로 몰고 올 '일본과의 외교 마찰'에 대한 대처 부족,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 합의 파기 등까지도 두루 포함시킬 수 있을 듯하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에게 아무런 귀책 사유가 없었더라면 일본이 어떻게 저토록 무모하게 '반도체 핵심 소재'를 무기 삼아 우리의 목줄을 비틀듯이 대담하게 공격할 수 있었겠으며, 우리 정부 또한 기습 공격을 당하고도 무려 일주일 가까이 침묵한 끝에 '외교적인 해법이 최선'이라는 말부터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겠는가. 정작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이번 사태가 갑자기 엉뚱한 쪽으로 비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길래 (아무리 비난하고 욕을 해도 시원찮을 족속인) 일본이 감히 우리에게 부당한 '경제 침략'을 벌일 수 있느냐는 격앙된 반응이 급속히 확산된 것이다. 좀 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다짜고짜로 일본을 향해 거세게 덤벼드는 '총반격 모드'로 돌변했다는 게 오히려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의병 운동이 일어나야 마땅하다'는 격한 반응이 뒤따랐고(도대체 '관군'은 어디서 무슨 전투를 벌이고 있었길래!), 청와대 핵심 참모의 SNS에서는 '죽창가'가 올라오더니, 국가 안보실 고위관계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언급할 정도로 사태가 급박하게 '항일 운동'으로 비화되었다. 때마침 지방행사에 참석했던 대통령은 '12척의 배'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까지 불러냈다. 그러나 이토록 가열차게 전쟁을 독려하는데도 사태 해결의 실마리는 점점 더 요원해 보이고, 날이 갈수록 이번 무역전쟁이 점점 더 이상한 방향으로 꼬여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마땅히 정치외교적으로 풀어야 마땅할 문제임은 누구라도 빤히 아는 상식일진데, 정부 당국자들의 입에서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공허한 얘기만 쏟아져 나오는 까닭은 무엇인가.

 

오랜 원한 관계가 쌓인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은 통치자들이 바뀔 때마다 다양한 부침을 겪게 마련이다. 때로는 누그러지고 때로는 격화된다. 이건 동서고금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가 그랬고,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제후국들이 그랬다. 섶에 누워 자거나 쓸개를 씹으면서 복수심을 키우다가도(와신상담) 같은 배를 타고(오월동주) 다른 나라를 치기 위해 동맹을 맺는 게 일상 다반사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에서야 한일 사이의 갈등이 언필칭 해방 이후 최고조로 나빠졌을까.

 

나는 그 원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양국 통치자의 상반된 이념적 편향성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극우 성향의 아베 정권은 헌법을 고쳐서라도 전쟁 가능 국가가 되려고 혈안이다. 문재인 정권은 진보 정권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좌파 정권에 가깝다. 일본에 대해서는 엄연한 안보 우방국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데 비해 중국과 북한에 대해서는 한없이 나약하거나 지나치게 너그럽다. 우리의 정당한 안보 주권에 관한 문제엿던 '사드 배치' 때만 보더라도 그렇다. 중국이 거세게 반발하자 주권 포기에 가까운 '삼불 정책'을 선뜻 약속했기 때문이다.

 

양국의 지도자 사이는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대법원 판결' 이후로 얼마든지 '합리적인 해결 방안'을 함께 모색할 수 있었을 테고, 아베 정권이 저토록 치졸한 '무역 보복'을 감행하는 일도 없었을 테고, 문재인 정권에서도 이토록 가열차게 앞뒤 가리지 않고 '반일 투쟁'을 독려하지도 않았을 테고, 심지어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을 파기하겠다는 식의 '자해 소동'에 가까운 무리수를 꺼내들지도 않았을 테고, 이번 무역 보복의 궁극적인 목적이 '문재인 정권 끌어내리기'라는 섬뜩한 주장이 우리의 귀에까지 들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상관없다. 어차피 언젠가는 이 문제가 풀릴 테고, 그때 아무쪼록 우리가 보란듯이 일본을 확실하게 눌러 이겼으면 좋겠다. 어쨌든 일본은 우리로서는 용서하기 힘든 끔찍한 죄악을 저지른 '역사의 죄인'이자 불구대천의 원수임이 명백하니 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꺼림칙한 의문은 남는다. 이번 사태가 악화되면 될수록 가장 큰 피해는 결국 우리나라의 기업들과 국민들에게로 귀착될 게 너무나 빤한 데도 도대체 왜 집권 여당에서는 '궁극적인 해법'에 대해서는 가급적 언급을 피하면서 오로지 '반일 운동'으로 똘똘 뭉치는 것만이 최선책인 것처럼 이번 사태를 호도하는 것일까.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조항이 그토록 금과옥조처럼 받들어지는 데도,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의 피해가 날이 갈수록 확산될 게 뻔한 데도, 이번 사태를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국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서둘러 해결하려는 노력은 갈수록 뒷전으로 밀려나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사태가 자꾸만 이상하게 꼬이다 보니 기어이 엉뚱한 데서 '큰 일'이 터지고 말았다. 현 정권의 2인자나 마찬가지인 청와대 핵심 참모가 이번 대법원 배상 판결에 비판적인 국민들을 모조리 '친일파'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도대체 대한민국의 어느 국민이 자기 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부당한 보복을 당하는 처지를 진심으로 좋아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현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국민들을 하루 아침에 '친일파'로 몰아 세우고, '애국자' 아니면 '매국노'일 수밖에 없다고 규정해 버리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당장이라도 죽창가를 부르며 일본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어 싸워야만 '애국자'인가. 차분하고도 냉정하게 양국의 갈등을 해소할 묘책은 없을까 고민하고 모색하는 사람들까지도 한사코 '친일파'로 규정하고 낙인찍어야 옳을 일인가. 국민들은 다만 양국 사이의 싸움이 커질수록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두려울 뿐이다. 그래서 일본이 저토록 길길이 날뛰는 까닭이 무엇인지 그 연유를 살펴 보고, 혹여 우리가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여지라도 찾아낼 수 없을까 하고 살필 따름이다. 그래서 사법부의 판단이나 정부의 후속 대응에 대해서도 혹시나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살피면서 이런 저런 견해를 밝힐 뿐이다. 그런데 정권의 2인자가 '죽창가'를 내세우면서까지 전투 의욕을 고취시키는 것도 부족해서, 현정부의 대처 방식을 비판하는 국민들을 모조리 '친일파'로 규정하겠다니 이런 억지와 오만이 어디 있는가.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가뜩이나 살림살이가 고달프고 힘겨워 하루라도 빨리 궁극적인 해법을 모색해 달라거나, 일본과 정치적으로 서로 양보하고 타협할 여지는 없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봐 달라는 요구가 그렇게도 못마땅한가. 현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내놓는 국민들을 모조리 '친일파'로 낙인찍고 한켠으로 따돌린다고 해서 도대체 사태 해결에 무슨 보탬이 되는가.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도 아니고 그저 매국노일 뿐인가. 느닷없는 무역 보복 때문에 날로 시름이 깊어가는 데도 그저 가만히 앉아서 피해만 당하는 국민들이 불쌍하지도 않은가.(비록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훗날의 역사가들은 청와대 민정 수석의 이번 '친일파' 발언을 '문재인 정권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망언'으로 기록할지 모른다. 왠지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토록 황당한 주장이 뉴스를 장식할 무렵에 내가 펼쳐든 역사책의 대목이 하필이면 <이사 열전>이었다. 이 열전은 사기에 담긴 70편의 열전 가운데서도 특히나 명문으로 꼽힌다. 이 열전의 핵심은 둘이다. 그 중 하나는 육경(六經)에 통달할 정도로 탁월한 인물이었던 승상(권력의 2인자) 이사가 황제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선비들을 탄압하는 계책을 올린 데서 비롯된 '분서갱유' 이야기다. 두 번째는 경쟁자이던 이사를 모함하고 제거한 끝에 2인자로 등극한 '환관 조고'가 무소불위의 권력에 취해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는 지경에 이른 '지록위마'에 얽힌 이야기다. 진시황때 일어난 이 유명한 일화가 오늘날의 사태에 비춰봐서도 그리 동떨어진 얘기는 아니라는 느낌은 나만의 지나친 비약일까. 혹시나 싶어 '지록위마'의 뜻을 다시 찾아봤다. 이 말은 윗사람을 농락하여 자신이 권력을 휘두른다는 뜻도 있고, 억지를 부림으로써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넣는다는 의미도 있단다. 청와대 핵심 참모가 이번 사태에 비판적인 국민들을 '친일파'로 불러야 마땅하다는 주장이야말로 '억지'를 부림으로써 국민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 *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사람은 그 유명한 진시황이었다. 진나라가 나머지 여섯 나라를 멸망시키고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널리 인재를 구한 덕분이었다. 그런 인재들 가운데에는 진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음모를 꾸미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나중에 승상에 올라 진시황의 핵심 참모로 일했던 이사도 한때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들어 있었다. 그때 이사는 진시황에게 장문의 글을 올려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대변했다.(이것이 저 유명한 「간축객서()」다. 「간축객서」는 간절한 구직서일 뿐 아니라 이사의 재능과 모략과 지혜가 담긴 명문이다.)

 

신이 듣건대 "땅이 넓으면 곡식이 많이 나고, 나라가 크면 인구가 많으며, 군대가 강하면 병사도 용감하다."라고 합니다. 태산은 흙 한 줌도 양보하지 않으므로 그렇게 높아질 수 있었고, 하해는 작은 물줄기 하나도 가리지 않으므로 그렇게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왕은 어떠한 백성이라도 물리치지 않아야 자신의 덕을 천하에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는 사방의 구분이 없고 백성에게는 다른 나라의 차별이 없으며, 사계절이 조화되어 아름답고, 귀신은 복을 내립니다. 이것이 오제와 삼왕에게 적이 없었던 까닭입니다.(666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진시황은 빈객을 내쫓으라는 명령을 거둬 들이고, 이사의 관직을 회복시켜 그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에 진나라는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고, 이사는 승상이 되었다.

 

시황제 34년에 함양궁에서 주연을 베풀었을 때, 순우월이 황제에게 간언한 적이 있었다. "어떤 일이든 옛것을 본받지 않고 오랜 시일 이어졌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옛날의 좋은 제도는 다시 되살려 복원하자는 말이었다. 시황제는 이 건의를 승상 이사에게 검토하도록 했다. 이사는 순우월의 견해가 황당하다며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옛날에는 천하가 흩어지고 어지러워도 아무도 이를 통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후들이 나란히 일어났고, 말하는 것마다 옛것을 끌어내어 지금의 것을 해롭게 하고, 헛된 말을 꾸며서 실제를 어지럽혔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배운 것을 옳다고 여기고 조정에서 세운 제도를 비난하였습니다. …… 그들은 군주를 비방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고,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겨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어 비방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금지하지 않으면 위로는 군주의 권위가 떨어지고 아래로는 당파가 이루어질 테니 금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청컨대 모든 문학과 『시경』, 『서경』, 제자백가의 책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이것을 없애도록 하고 이 금지령을 내린 지 삼십 일이 지나도 없애지 않는 자는 이마에 먹물을 들이는 형벌을 가하여 성단(사 년 동안 새벽부터 일어나 성 쌓는 일을 하는 죄수)으로 삼으십시오.(668∼669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시황제는 그 제안을 옳다고 여겨 제자백가의 책들을 몰수하고 모든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어 천하에 그 누구도 옛것을 끌여들여 지금 세상을 비판하지 못하게 했다. 이른바 분서갱유의 시작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난 이듬해(BC 212년) 시황제는 함양에 있는 유생을 체포하여 결국 460여 명이 구덩이에 매장되는 형을 받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시황제는 세상을 두루 돌아보러 궁궐을 떠났다가 그만 객사하고 만다. 시황제가 병이 위독할 때 환관 조고에게 부탁한 일은 '맏아들 부소에게 후사를 맡기노라'는 편지를 맏아들에게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황제의 곁에는 막내 아들 호해와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가 있었다. 이들은 갑작스런 황제의 죽음을 한동안 외부에 알리지 않은 채 일을 꾸몄다. 환관 조고의 주도 하에 맏아들 호해가 태자로 오르게 만든 것이다. 시황제가 맏아들 부소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이 조작됐다.

 

"지금 너는 장군 몽염과 함께 군사 수십만 명을 이끌고 국경 지방에 두준한 지 십여 년이 지났으나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병졸을 많이 잃었을 뿐 한 치의 공로도 세운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글을 올려 직언하고 비방하고, 지금의 직분을 그만두고 돌아와 태자의 지위에 되돌아갈 수 없음을 원망하고 있다. 너는 아들로서 불효하여 칼을 내리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든 부소는 사람됨이 어질었기 때문에 부하 장수인 몽염이 말리는데도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태자는 2세 황제로 즉위하였고, 조고는 2세 황제를 모시고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어린 황제는 한가한 틈에 조고를 불러 물어보았다.

 

"사람이 태어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비유하자면 준마 여섯 필이 이끄는 수레가 달려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짧은 시간이오. 이제 황제로서 천하에 군림하게 되었으니 귀로 듣고 싶고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을 모두 즐기고, 종묘를 편안히 하고 많은 백성을 즐겁게 하고 천하를 길이 소유하고, 타고난 내 수명을 누리고 싶은데 어떤 방법이 있겠소?"

 

조고가 대답했다.

 

"법을 준업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며, 죄 있는 자는 연좌제를 실시하여 죄를 지으면 그 일족을 모조리 죽이고, 선제 때의 대신들을 물러나게 하고 폐하의 형제들을 멀리하며, 가난한 자를 부유하게 하고 천한 자를 높여 주십시오. 선제의 옛 신하를 모두 제거하고 폐하께서 믿을 수 있는 자를 새로 두어 가까이 하십시오. 이렇게 하신다면 숨어 있던 덕이 폐하에게로 모이고 해로운 것이 없어지며, 간사한 음모는 막히고 신하들은 폐하의 은택을 입고 두터운 덕을 입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며, 폐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베고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은 없습니다."(679∼680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2세 황제는 조고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죄를 짓는 자가 있으면 조고에게 맡겨 조사하도록 했고, 왕자 열두 명을 함양의 시장 바닥에서 죽이고, 공주 열 명을 두에서 기둥에 묶어 놓고 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그들의 재산은 모두 거둬들였다.

 

법령에 따라 죽이고 벌하는 일이 날로 더욱더 가혹해지자 여러 신하가 스스로 위험을 느껴 모반하려는 자가 많아졌다. 또 황제를 위하여 아방궁을 짓고 곧게 뻗은 큰길과 넓은 길을 만드느라 세금이 더 무거워지고 변방 부역에 징발이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초나라 수비병 진승과 오광 등이 반란을 일으켜 산동에서 일어나니 호걸과 날랜 사람들이 다 일어나 스스로 제후가 되고 왕이 되어 배반했다. 그 반란군은 홍문까지 진격했다가 물러날 정도로 거셌다.(681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승상 이사는 여러 번 황제에게 시국 수습책을 간언하려 했지만 황제는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이사를 문책했다. 이사는 벼슬과 봉록을 소중히 여겨 황제의 비위만 맞출 뿐이었다. 이리하여 처벌을 더욱더 엄격히 하고, 백성으로부터 많은 세금을 걷는 자를 현명한 관리라고 했다. 2세 황제가 말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처벌을 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길에 다니는 사람 중 절반은 형벌을 받은 자이고, 형벌을 받아 죽은 자가 날마다 시장 바닥에 쌓여 갔다. 그리고 사람을 많이 죽인 관리를 충신이라고 했다. 2세 황제는 말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처벌을 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87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승상은 나중에 조고를 견제하기 위한 계책을 꾸미다가 도리어 환관 조고로부터 역습을 당해 황제로부터 신임을 잃고 만다. "조고가 아니었다면 승상에게 속을 뻔했소." 조고는 이사와 그의 아들 이유의 모반에 관한 진술서를 마음대로 꾸몄고, 황제는 이사에게 오형을 갖추어 함양의 시장 바닥에서 허리를 자르도록 하였다. 이사가 죽고 나자 조고는 중승상으로 승진했고, 크든 작든 모든 일은 조고가 결정했다. 이 당시 조고의 위세를 상징하는 사건이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지록위마' 사건이었다.

 

조고는 자신의 권력이 무거운 줄을 알고 2세 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했다. 2세 황제가 좌우에 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이것은 사슴이지?"

 

좌우에 있던 이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했다.

 

"말입니다."

 

2세 황제는 놀라서 스스로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태복(점을 치는 관리)을 불러 점을 치게 했다. 그러자 태복은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봄가을로 교사(제왕이 교외에서 천지에 올리는 제사)를 지낼 때 종묘 귀신을 모시면서 재계가 석연치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덕을 많이 쌓아 재계를 충분히 하셔야 합니다."(696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2세 황제는 나중에 환관 조고가 꾸민 일에 속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고는 황제의 옥새를 꺼내어 찼지만 곁에 있던 신하 가운데 아무도 따르는 자가 없어 시황제의 손자 자영을 불러 옥새를 주었다. 자영은 즉위한 지 세달 만에 유방의 군대가 쳐들어 오자 옥새가 달린 끈을 목에 걸고 항복했다. 유방은 자영을 관리에게 넘겼으나 초나라 항우가 와서 목을 베었다. 태사공(사마천을 말함)은 말한다.

 

이사는 삼공의 지위에 올랐으므로 높은 자리에 등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는 육경의 근본 뜻을 잘 알면서도 공명정대하게 정치를 하여 군주의 결점을 메워 주려 힘쓰지 않고, 높은 작위와 봉록을 누리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군주에게 아첨아고 좇으며 구차하게 비위를 맞추기만 했다. 조칙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였으며, 조고의 간사한 의견을 따라 적자를 폐하고 첩의 자식을 제위에 오르게 했다. 제후들이 이미 뒤돌아선 뒤에야 비로소 군주에게 충고하려 했으니 때가 너무 늦었구나! 세상 사람은 모두 이사가 충성을 다했는데도 오형을 받아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근본을 살펴보면 세속의 말과는 다르다.(698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 * *

 

사마천의 『사기 열전』을 읽는 동안에 자주 떠올린 말은 '무엇이 중헌디?'라는 말이었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지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고 난 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다툴 때의 일화 하나가 그걸 깨우친다. 한나라 고조 유방을 도와 초나라 항우를 무찌른 데에는 역이기(역생)의 공도 컸다. 그는 초나라 왕이 오창(오산에 세워진 식량 창고)을 소홀히 다루는 걸 보고 항우가 천자에 오를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한고조 유방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 듣건대  '하늘이 하늘 된 까닭을 아는 사람은 왕의 일을 이룰 수 있고, 하늘이 하늘 된 까닭을 모르는 사람은 왕의 일을 이룰 수 없다. 왕 노릇 하는 자는 백성을 하늘로 알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 라고 합니다. 오창에는 천하의 곡식을 날라다 놓은 지 오래되었는데, 신은 그곳에 쌓아 놓은 식량이 매우 많다고 들었습니다. 초나라 군대가 형양을 함락시키고도 오창을 굳게 지키지 않고 오히려 군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면서 죄를 지어 변방으로 쫓겨나 병사가 된 자들에게 성고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한나라를 돕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초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쉽게 취할 수 있을 때인데, 한나라가 도리어 물러나는 것은 스스로 좋은 기회를 버리는 것입니다." (64쪽)

 

 - 사마천, 『사기 열전_2』, <역생 · 육고 열전> 중에서

 

또한 사마천의 책에는 정치와 외교와 군사뿐만 아니라 '경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부분도 있다. 대표적인 게 바로 <화식 열전>이다. 화식 열전의 핵심 사상 또한 '입고 먹는 것이 다스림의 근원이다'라는 것이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극히 잘 다르려지는 시대는 이웃 나라끼리 바라보고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은 제각기 자신들의 음식을 달게 먹고, 자기 나라의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 자기 나라의 습속을 편히 여기고, 자신들의 일을 즐기며,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837쪽)

 

 - 사마천, 『사기 열전_2』, <화식 열전> 중에서

 

 

태사공(사마천을 말함)은 말한다.

 

"신농씨 이전의 일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시경』과 『서경』에서 말하는 우나 하나라 이래의 것을 보면 귀와 눈은 아름다운 소리와 아름다운 모습을 한껏 즐기려 하고, 입은 소와 양 따위의 좋은 맛을 다 보려 하며, 몸은 편하고 즐거운 것을 좋아하고, 마음은 권세와 유능하다는 영예를 자랑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풍속은 백성의 마음속까지 파고든 지 이미 오래여서 미묘한 이론을 가지고 집집마다 깨우치려 해도 도저히 교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가장 잘 다스리는 방법은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이익을 이용하여 이끄는 것이며, 그 다음은 가르쳐 깨우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백성을 가지런히 바로잡는 것이고, 가장 정치를 못하는 것은 백성과 다투는 것이다."(837∼838쪽)

 

 - 사마천, 『사기 열전_2』, <화식 열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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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간축국서(諫逐國書)
    from Value Investing 2019-08-25 16:58 
    (사마천의 『사기』에 담긴 간축객서[諫逐客書]를 빗대어 '간축국서'라는 제목을 달아봤다. 온통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법무장관 후보자인 조국 전 수석을 이제는 과감하게 물리치고 보다 널리 새로운 인재를 구하라는 철없이 순진한(?) 바램으로 써 본 글이다. 간축객서[諫逐客書]는 중국 진시황 시대에 활약했던 승상 이사가 쓴 명문장이다. 왕에게 올리는 건의를 담은 서간문 형식의 상서上書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역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