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줍다가 덜컥 겁이 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왜 겁이 났냐고?

밤을 줍다가 뱀을 만나서?

적어도 오늘은 그게 아니었다.

 

사실, 밤을 줍다가 뱀을 만난 건 지난 주 일요일 오후였다.

그날은 새벽 일찍 서울을 떠나 당일치기로 성묘차 고향을 찾았었다.

조상님들의 산소를 오르내리며 더러 길가에 널브러진 알밤을 줍기도 하고,

밤나무에 잔뜩 매달린 밤송이들이 탐나 더러 나뭇가지를 던져 가며 밤을 쬐끔 털기도 했다.

논두렁을 오가며 부드럽게 피어 오른 억새를 쓰다듬으며 고향의 가을 정취를 듬뿍 맛보기도 했고.

 

그렇게 새벽잠을 설치며 시작된 성묘 나들이도 거의 다 끝날 무렵이었다.

아버님의 산소에서 스무남은 걸음쯤 떨어진 곳에 제법 큰 밤나무 한 그루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올커니, 저 밤나무 아래에 가면 알밤들이 제법 많겠군, 싶었다.

그래서 밤을 더 줍기도 귀찮다는 동생들은 제쳐 두고 형과 함께 둘이서 밤나무 아래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낫으로 마른 풀과 잔가지를 괜시리 이리저리 헤쳐 가면서.

혹시나 뱀이라도 도사리고 있다면 서로 곤란하니까.

두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부산을 떨면서 뱀들에게 일종의 경고음을 울린 셈이었다.

 

생각보다 그 밤나무 아래에는 알밤들이 별로 없었다. 누가 미리 다녀갔는지도 몰랐다.

안 되겠다 싶어서 수풀과 잔가지들이 무성한 좀 더 안 쪽으로 헤쳐 들어가 볼 작정을 했다.

혹시라도 모르니 낫을 휘들러 이리저리 잔가지와 수풀들을 자꾸만 쳐댔다.

혹시라도 뱀이 있으면 서로 곤란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내 제법 큰 뱀 한 마리가 몸뚱이를 흐느적거리며 나와는 반대편으로 내빼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머리 쪽은 보이지 않았지만 몸뚱이의 절반 이상은 넉넉히 내 눈에 보였다. 서너 걸음쯤 떨어진 곳이었다.

대체로 거무스름한 색을 띈 녀석이었는데 몸통 중간쯤에 흰 줄이 하나 뚜렷이 나 있는 게 특이했다.

 

"어이쿠! 뱀이네!"

 

놀라 소리치면서 나는 슬금슬금 꽁무니를 뒤로 빼기 시작했고, 깨끗이 벌초가 된 아버님 산소 쪽으로 물러났다.

열 걸음도 떨어져 있지 않던 형도 그 소리를 듣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밤나무 밑에서 서둘러 빠져 나왔다.

 

'밤은 왜 뱀과 한 획 차이밖에 나지 않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 * *

 

오늘도 아무런 예고 없이 아내와 함께 밤을 주으러 모처(?)를 다녀왔다.

 

아내가 하는 말인 즉슨, 어제 오후에 호수공원에 나갔더니 도토리가 엄청 많이 떨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밤을 줍던 그곳에도 틀림없이 오늘쯤엔 알밤이 지천으로 떨어져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아내의 예측이 과히 틀리지는 않았다.

오늘은 기껏 한 시간 남짓 밤을 주웠는데도 무려 15Kg이나 주웠던 것이다.

 

 

 - 오늘 주운 밤들_01

 

 

 - 오늘 주운 밤들_02

밤을 주워 오면 가장 먼저 거실 마룻바닥에 쫙 펼쳐 놓고 '뉘 골라내듯' 선별작업을 해야 한다.

밤벌레가 침투한 흔적이 약간이라도 있는 밤이 탈락 1순위다. 씨알이 너무 작은 밤도 탈락이다.

그런 밤들을 골라내기만 해도 대략 두세 되쯤 나오는 것 같다.

그렇게 골라낸 밤들은 집근처 정발산을 오르내릴 때 청설모와 다람쥐들 먹이로 던져 준다.

 

맨 처음으로 그 밤나무 산을 알게 된 건 아내의 고교 친구 덕분이었다.

그녀는 이번 추석 연휴에 홀로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어서 2박 3일 일정으로 템플 스테이를 왔는데,

위치를 자세히 알고 보니 우리가 사는 동네와 그리 멀지 않으니 바람이나 쐬러 오라는 것이었다.

마침 그날 공양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서 서둘러 집을 나서서 찾아갔더니 밥도 공짜였고, 커피도 공짜였다.

점심을 먹고 나서 바람을 쐬며 이리저리 절간 주위를 산책하며 거니는 동안,

템플 스테이를 와 있던 아줌마들이 밤을 잔뜩 주웠다면서 자랑을 하며 지나갔다.

절 주변을 여기 저기 잘 살피면 토실토실한 알밤들을 제법 많이 주울 수 있다면서.

 

그래서 시작된 알밤 줍기가 오늘로서 벌써 세 번째였다.

맨 처음엔 절간 담벼락 바로 아래 비탈에서 자란 밤나무 주변을 공략했었다.

그런데 그 밤나무 아래는 너무 비탈이 심해서 접근조차 그리 쉽지 않았다.

또한 밤나무 주위에는 예상치 못한 물건들도 더러 버려져 있었다.

꽃을 담았던 플라스틱 바구니 정도는 제법 양호한 편이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좀 더 접근이 쉬운 다른 '밤나무 밭'을 수소문했다.

 

절에서 내려오다가 왼편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밤 밭'이 나온단다.

대략 20분쯤 걸어가면 무슨 옹달샘이 나오고, 거기서 몇 십 미터만 더 가면 된단다.

아내 친구와 셋이서 그 길을 따라 오르내리며 부지런히 옹달샘을 찾았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도 밤송이가 잔뜩 널브러진 지역이 그 오솔길 주위로 여기 저기 있긴 있었다.

비록 아쉬운 대로 아무데서나 알밤을 줍기 시작했다.

밤이라는 게 그저 줍는 재미지 수확량이 무에 그리 중요하랴 싶었다.

그래도 셋이서 줍기 시작하니 한 시간 남짓에 각자 이삼 킬로쯤은 너끈히 주워모을 수 있었다.

 

두 번째 공략일은 지난 주 토요일 오후였다.

가을 날씨가 너무나 화창해서 어디로든 나들이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될 듯한 날씨가 좋은 핑계였다.

시장에서 사 온 먹다 남은 찐 옥수수랑 쥬스랑 커피를 새참으로 먹기 위해 조그만 배낭에 챙겨 넣었다.

삼겹살을 구울 때 자주 쓰는 집게도 두 개나 챙겼고, 비닐 봉다리도 서너 개 챙겨 넣었다.

맨 처음 셋이서 주울 때보다 밤이 훨씬 더 많았다. 연휴가 지난 탓인지도 몰랐다.

한 시간 남짓 주웠는데도 집으로 돌아와서 재어 보니 무려 8키로나 되었다.

 

오늘도 밤을 줍기엔 제법 좋은 타이밍이고 날씨인 듯했다.

금요일과 토요일에 걸쳐서 가을 태풍이 지나간 탓에 밤들이 우수수 털리기도 했을 테고,

이번 주말을 넘기고 나면 밤들이 차츰 변색되면서 자연으로 돌아갈 채비에 바쁠 듯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갖은 핑계를 찾은 끝에 또다시 밤줍기에 나섰다. 벌써 세 번째였다.

먹다 남은 케익과 과일 쥬스, 집게, 비닐 봉다리에 더해 오늘은 장갑까지 챙겼다.

예상했던 것보다 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내려진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수확이 알찼다.

산비탈을 이리저리 누비며 40분쯤 주웠더니 두 번째 방문때 수확량을 넘어설 정도가 되었다.

흐르는 땀도 식힐 겸 새참을 먹고 나서 조금만 더 줍고 가자고 했다.

그렇게 다시 10분쯤 밤을 줍고 있는데, 아내가 조용히 외쳤다.

 

"여보! 이리로 와 봐"

"응, 알았어, 여기도 밤은 많은데, 뭘."

"그게 아니라니까, 암튼 얼른 이리로 와 봐."

"알았어, 금방 갈께."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연신 밤을 주워 담으며 허리를 굽힌 채로 아내 쪽으로 다가갔다.

 

오, 과연 거긴 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전인미답의 신천지가 확실했다!

떨어진 밤 송이가 가득했고, 밤송이 안팎으로 밤들이 쏱아져 널브러져 있었다.

서둘러 밤을 줍다 말고 덜컥 겁이 났다.

이거 혹시 남의 재산을 훔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밤 줍기를 멈추고 하산하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내려오면서 드는 생각은 이랬다.

그래도 우리가 이 정도로 밤을 줍는 게 범죄 행위까지는 아닐 꺼야.

왜냐하면, 템플 스테이 하러 온 사람들도 이미 숱하게 그 주변에서 밤을 주웠고,

절간 스님들도 으레 그쪽에 가면 밤을 많이 주울 수 있다고 귀뜸해 주기도 했고,

그 야산에서 밤을 줍는 사람들은 우리 말고도 그동안 적잖이 우리 눈에 띄었고,

무엇보다도 그 야산과 그곳에서 자란 밤나무의 주인이 명백히(?) 따로 있었더라면,

진작부터 이곳 저곳에 '경고 간판'을 내걸었을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튼 밤을 줍다가 밤이 너무 많아서 덜컥 겁이 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밤이 많았다.

 

 

 * * *

 

 밤 관련 책을 찾았더니 이런 책들이 나온다.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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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8-10-08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 고향에서 포도밭 하는 친구네 갔다가 밤을 엄청 주웠답니다. 포도밭 주인의 딸인 친구 왈,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밤이 떨어진 걸 본 건 처음이라네요. 해마다 사람들의 손을 타고 있었다는 얘기겠지요. <7년의 밤>이 빠졌네요.ㅎㅎㅎ

oren 2018-10-08 18:29   좋아요 0 | URL
올해는 밤이 한꺼번에 익었다가 빠르게 우수수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아직도 지천에 널려 있는 그 많은 밤들이 이제는 죄다 썩어 없어지겠구나 생각하니, 저 밤나무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많은 밤들을 봄부터 가을까지 열매로 영글도록 그토록 애썼을까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단단한 가시로 무장시켜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