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착할수록 기대할수록 욕망은 미친 듯 몸뚱이를 불리기 시작한다.  k팝 스타를 보고 싶은 마음은 쥐알만 했는데 노트북의 다운과 애플 컴퓨터로는 도저히 다운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빵빵 터져주자 오로지 그것 하나만 보길, 그게 단 하나의 소원인양 애면글면한다. 스도쿠 한판을 4분 안에 끝내길, 테트리스로 달이 되고 별 등급이 되길 바란 것처럼 무용하고 모자란 욕심들이 끝도 없이 늘어진다. 

 

 * 예전 페이퍼를 보면서 이건 좀 숨기고 여긴 고치고 이건 아예 없애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깝다. 짧든 길든 잘 쓰든 못쓰든 몇년 전의 기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페이퍼를 단촐한 서재로 만들 생각으로 없앤다는게. 혹시 아는가. 예전 페이퍼에 반해 매일같이 서재를 들락날락하며 글을 읽고 있을 사람이 있을지.(망상이 심각한 수준) 하긴 요즘처럼 뭘 끄적여도 재미가 없는 글만 쓰는 때에는 그나마 예전 페이퍼-자꾸 예전예전하니 한 오백년 서재질을 한 것 같음-라도 있어야 면목이 설지도. 


* 다시 심리게임 이야기.

  a랑 오만가지 이유로 싸우면서 심리게임이 자꾸 생각나 이건 또 어떤 게임인가 골똘하게 된다. 예컨대 a가 내게 귀염을 떨 때 나 역시 그의 귀여움에 맘과 몸을 한껏 열어젖히면 아무 문제가 없다. 헌데 귀찮거나 갑자기 '나는 누구인가'에 빠져있을 때, 배가 고플 때, 피곤에 쩔어있을 때는 게임이 시작된다. 같이 맞장구 치거나 더한 귀여움으로 상대의 오바를 사전에 막는 방법도 있지만 그마저도 내키지 않는다. 훠이훠이하거나 내 기분을 짧게 말하면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너 잘 걸렸다' 게임을 하려고 폼을 잡기 시작한다.


 왜 너는 내 기분 하나 못맞추냐(그건 아무도 못맞출거다)에서 시작해 왜 자꾸 라면을 먹는지, 쓰레기를 누가 버리는가란 문제까지 후다닥 배열을 정렬해 공격 태세를 갖춘다. 급기야는 애먼 까뮈를 누가 챙기냐, 우리에게 미래가 있냐까지 나오면 슬슬 a도 '보자보자하니 누굴 보자기로보나' 게임을 할 준비를 한다. 이때 내가 심리게임을 잘한다면 한숨을 푹 쉬며 그만하자고 할 텐데 나는 a를 도발하고야말고 결국 서로 상처를 받는데까지 이르고 만다. 


 심리게임의 강점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하는 말과 행동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분석할 수 있게 하는 점이다. 다만 그런다고 내가 사람들을 더 잘 대하거나 심리게임을 잘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심리게임의 문제는 게임하는 사람들 사이의 진심이 보였을 때, 게임이 아니라 진짜 싫어서 짜증을 내고 맘이 식어서 토를 달기 시작할 때 생긴다. 이럴 때는 내가 무슨 게임을 걸든 상대가 독창적인 게임을 생각해내든 백전백패. 게임의 '게'자도 꺼내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부정과 윽박지름의 심리게임 대신 진심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울 일이다.


 심리게임 책에 대해 얘기할 때면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나란 의구심이 든다. 그런데 또 책은 제대로 읽지 않는다. 맨날 화이트 부인과 화이트씨 얘기만 읽는 듯.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대화가 통하는 사람. 얌체같지 않고 어느 정도 눈치 있는 사람. 과장 화법을 지양하고 자기 얘기만 늘어놓지 않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랑만 얘기하고 싶다. 이렇게 사람을 가려서 사귀니 친구가 별로 없다. 사적인 관계에서는 물론 공적인 자리에서도 소신을 힘껏 발휘하는 모난 부분 때문에 다른 사람과 껄끄러운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까칠함을 적대시하며 어떻게든 조직의 일원으로 만드려는 이곳의 부드러운 압력 덕분에 나는 차라리 눈을 감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박수를 치면 정력에 좋다는 말을 하며 고등학생들의 박수를 독려하는, 성장기의 청소년은 오로지 생식기능만 있다는 듯 구는 선생이란 작자에게는 (강의 맥락과 상관없이 걸그룹 동영상을 보여주며, 열정이 보이나요, 가슴이 좋나요. 이러고 있다) 좋은 낯으로 못대할 것 같다.


 이런 글을 쓴 건 다 이 책 때문이다.


 감정에 대해 얘기하며 다른 사람의 맘에 안 드는 점을 참을줄 모르는 사람은 공동체에서 배척된다는.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이 문제로 고민할 것이다. JJ 말대로 계속 비슷한 문제가 찾아온다.
















* 카펫이며 소파에 오줌과 똥을 싸대는 까뮈(까매서 까미인데 까뮈란 이름이 더 좋길래)에게 며칠 목끈을 매서 일정한 반경에서만 움직이도록 했다. 목끈이 있는데도 식탐을 못이겨 먹는 소리만 들리면 목이 아플 정도로 팽팽하게 당기길래 어제 저녁에는 인터넷 검색을 해가며 잘 매지지 않는 어깨끈으로 바꿔줬다. 오늘 아침, 밥 먹을 준비를 하며 꼼지락대는데 까뮈는 꿈쩍도 않는거다. 식사 준비를 마치고 먹으려는데 말끔한 얼굴로 기지개를 쭉 피며 까뮈가 이불 속에서 나왔다.  like a virgin처럼

 어깨끈은 이불 속에 팽개쳐져 있었다. 어떤 반전보다 놀랍다.

 


 

투표기간 : 2012-02-22~2012-02-23 (현재 투표인원 : 11명)

1.예전 페이퍼가 좋아. 그대로 남겨두길 바람.
18% (2명)

2.아니다, 뭔가 난삽하다. 줄일건 줄이자.
0% (0명)

3.전에 있던 페이퍼는 읽어보지 않음. 이 서재도 오늘 처음임.
9% (1명)

4.리뉴얼할 생각말고 부지런히 하던대로 하삼.
81% (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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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2-22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나 4번에 투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2-02-22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까뮈는 고양이라는 거에요 개라는 거에요?

Arch 2012-02-22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뮈는 개예요. 미니핀이라고 저번에 말했는데~ 다락방 거기다 댓글도 달았으면서

다락방 2012-02-22 16:12   좋아요 0 | URL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웽스북스 2012-02-22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5번. 무조건 아치님 마음가는대로!

Arch 2012-02-23 09:55   좋아요 0 | URL
아! 그 방법이 있었네. ^^
난 시키는대로 하는 것도 좋아해요.

nada 2012-02-22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4번이 압도적이군요. 저도 4번!
like a virgin처럼 나오는 건 도대체 어떤 거예요.ㅋㅋㅋ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턴 이 직유, 맘에 들어요.

본능에 충실한 동물들 보면 너무 귀엽고 쨘해요.
식탐이 많은 까뮈라니. 아 쨘해. >.<


박수를 치면 정력에 좋다라.
강용석스러운 발언인데요..

Arch 2012-02-23 10:0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까뮈는 옷을 입은 건 아니지만 목줄은 차고 있었거든요. 어디에 묶여 있으나 안 묶여있으나. 그런데 몸에 아무것도 안 걸치고 이불 속에서 유유히 걸어나와 기지개를 켜는데 바로 저 말이 생각나더라구요. 익숙하게는 마돈나 노래에서부터 안 어울리게는 아치의 비유로 쓰이는 말이랄까...^^

배가 빵빵해서 더 먹으면 안 될 것 같은데도 그래요. 어제는 벽지를 갉아놓고 아무데나 똥을 싸고 '이래도, 이래도? 나한테 제대로 안 해?' 이러는 것 같아요. 흑...

진짜! 올해의 비유인데요~


순오기 2012-02-23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투표했어요~ 몇번에? 고건 비밀~~ ㅋㅋㅋ

Arch 2012-02-23 10:03   좋아요 0 | URL
3번이요? 헐~ ^^ 3번엔 내가 한 것 같고... 몇번에 하셨을라나.

치니 2012-02-23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1번과 4번에서 망설이다가 4번 했어요. 히히.

Arch 2012-02-23 10:04   좋아요 0 | URL
히히~ 고마워요. 치니님.
서재가 하도 썰렁하고 심심해서 해본건데 무려 10분이나 참여해주셔서 전남 영광이에요.
 
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선 실패의 원인을 살펴보고 사랑의 의미를 배워야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전제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사랑하는’ 문제로 파악하기보다는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건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사랑스럽다는 말에 함축된 의미는 통속적이며, 인기가 있다는 것과 성적 매력이 뒤섞여 있다. 둘째, 사랑은 ‘대상’의 문제이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전제이다. 세 번째 과오는 사랑에 ‘빠진다’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 속에 ‘머물러 있다’는 상태를 혼동하고 있는 데 있다. 여기서 심취, 즉 서로에게 ‘미쳐 있다’는 것을 사랑의 강도를 나타내는 증거로 여기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이 서로 사랑하기 전에 얼마나 고독했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사랑의 의미를 배우려면 삶이 하나의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이론을 습득하고, 실천에 익숙해져야 한다. 

 1. 사랑,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 

 인간의 절실한 욕구는 분리되어 있는 경험으로부터 파생되는 불안을 극복하는 것이다. 어떻게 자신의 객관적인 삶을 초월하여 편안함을 찾아내느냐 하는 문제 말이다. 분리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와 성적인 극치감을 들 수 있다. 부족 내에서 공동으로 행해질 때 이러한 방법에선 불안 혹은 죄책감이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정당한 미덕으로까지 여겨진다. 하지만 개인에 의해 선택될 때는 (알코올, 마약 중독) 당사자는 죄책감으로 고민한다. 황홀경을 추구하는 모든 형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강도가 너무 강하며, 전인격에 걸쳐서 일어나고, 오래 지속하지 않고 주기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황홀경만으로는 분리 불안을 극복할 수 없다. 

 극치감의 극점에 일치의 양식이 있다. 집단과의 일치는 분리감을 극복하는데 널리 사용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조하려는 욕구를 알지 못한 채 사소한 차이로 자신의 개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지만 자본주의 체제하에선 그마저도 어렵다. 일치를 달성하는 다른 방법으로는 ‘창조적인 활동’이 있다. 인간은 창조 과정 속에서 자신을 세계와 일치시킨다. 그러나 오늘날 사무원의 작업 과정에서는 노동자에게 창조적인 경험이 주어지기란 어렵다. 일치의 완전한 해답은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타인과의 융합, 즉 사랑의 성취에 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떤 종류의 합일을 통해 이루어져야하는가. 공서적 합일(미성숙한 형태의 사랑)은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와의 관계에서 생물학적인 유형을 찾아볼 수 있다. 수동적인 유형은 매저키즘으로, 능동적인 형태는 사디즘으로 나타난다. 성숙한 사랑은 개인의 통합성, 즉 개성을 유지한 상태에서의 합일로 두 존재가 하나가 되지만 동시에 따로따로 남는다는 모순이 성립한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며, ‘빠져드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원래 ‘주는’ 것이며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준다는 것은 잠재력의 최고의 표현이다. 나는 자신을, 충만되어 있고 소비하고 살아 있는, 따라서 즐거워하는 자로 경험한다. 주는 행위를 통해 나의 삶이 표현되기 때문에 받는 것보다 더욱 즐거운 것이다. 준다는 요소 이외에도 사랑의 적극적인 성격은, 배려, 책임, 존경, 지식 등이다. 또한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과 성장에 적극적으로 관계하는 일로 자발적인 행위다. (요나서의 요나 이야기) 존경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독특한 개성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사고를 통한 지식은 심리학적인 지식이긴 하지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 완전한 지식에 이르는 필요조건이다. 즉 자신을 객관화하여 사랑의 행위를 통해 그의 궁극적인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각주에서 심리학적인 지식을 ‘사랑의 행위를 통해 완전한 지식에 한 걸음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지식의 대용품이 된다’라고 밝히고 있다.

2.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어머니는 내가 나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수동적이고 무조건적이다. 획득하거나 만들거나 통제할 수 없는 사랑이며 유아적이다. 아버지는 은혜에 따라 사랑을 준다. 아버지는 세계에 대한 길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사랑은 사유재산에 따른 조건이 붙은 사랑이고, 순종이 주요 덕목이며 보상을 바란다. (신에 대한 사랑에서도 모계와 부계 신앙과 관련해서 비슷한 설명이 나옴)

3. 사랑의 대상 

 사랑은 어떤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세계와의 관계를 결정짓는 태도이며, 성격의 방향이기 때문에 자신을 빼놓고 사랑을 말할 수는 없다. 사랑은 의지며 결단, 판단, 약속으로 실현되기에 일시적인 육체적 사랑은 진정한 사랑으로 볼 수 없다. 우리 자신도 우리의 감정과 태도의 ‘대상’이다. 자기애는 타자와 자기의 관심을 양자택일할 수 밖에 없는 이기심과는 구별된다. 

 신에 대한 사랑은 바람직한 선이란 무엇인가란 신의 개념을 이해함으로써 신을 숭배하는 인간의 성격 구조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는 인류의 발달 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 자연과의 원초적 합일을 희구하면서 동물을 숭배하는 토템에서 시작해 자신이 만든걸 숭배하고 자기가 만든 신에게 인간의 모습을 부여한다. 신에 대한 사랑은 두 가지 차원으로 발전한다. 여성적인가, 남성적인가. 혹은 인간이 성취한, 그가 만든 신의 본성과 그 신에 대한 사랑의 본질을 결정하는 성숙도가 그것이다. 

 신에 대한 사랑은 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태도로 인해 근본적 차이가 발생한다. 역설 논리학은 신의 개념과 중요한 관련을 맺고 있다. 신은 최고의 실재를 나타내지만 인간의 정신이 모순 속에서만 실재를 지각하는 것이므로, 신에 대해서는 어떤 적극적인 전술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사고를 통해 해답을 찾아내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결론이 나온다. 세계를 유일하게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행위 속에, 일체성의 경험에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스피노자, 마르크스, 프로이트에 의해 역설 논리학은 심층적인 경험으로 표출된다. 사고가 아닌 행위에 강조점을 둔 역설 논리학은 관용과 인간 개조에 대한 강조를 가져왔다. 역설적 사고는 관용과 자기 변혁을 향한 노력을 가져왔다. 

사랑과 현대 서구 사회에서의 그 붕괴

  현대 서구 문화에서 서구 문명의 사회 구조와 거기서 야기된 정신이 사랑의 발달에 필요한 것인지 알아봐야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정치적 자유 원리와 경제적. 사회적 관계의 규제자로서의 시장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자본과 물품이 노동력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현 체제는 현대인의 성격 구조에 깊은 영향을 준다. 자본이 중앙집권화 될수록 개인은 개성을 상실하고 기계의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별 마찰없이 지내며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도록 기호가 표준화되며 예측 가능하길 바란다. 상품화된 개인은 자신의 생명력을 소비와 투자 대상이라는 한정된 관계에서 경험하며 동료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고 말았다. 현대 문명은 사람들의 고독을 깨닫지 못하도록 수동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완충제를 제공한다.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자동 인형은 결코 사랑하지 못하고 ‘인간 상품’을 교환하고 공정한 계약을 희망할 뿐이다. 개인은 사랑과 결혼에서 팀의 정신과 상호 관용을 강조함으로써 고독감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으려고 한다. 이와 같은 그릇된 사랑은 신경증, 우상 숭배적인 사랑, 감상적인 사랑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의 개념은 소외된 성공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에 적합한 개념으로 변형되었다. 종교는 사업을 하고 있는 인간을 돕기 위한 자기 암시와 심리요법과 손을 잡는다. 사랑과 정의, 진리에 있어서 신과 하나가 된다기보다는 신을 사업상의 동반자로 삼으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의 실천

 사랑의 실천을 위한 훈련은 전생애에 걸쳐 정신 집중과 인내를 통해 실현할 수 있다. 정신 집중은 혼자가 되는 걸 의미하며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하는 능력을 갖기 위한 조건인 것이다. 사랑하는 능력에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성은 자아도취를 극복해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며 이성의 배후의 정서적 태도는 겸손이다. 사랑하는 능력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과 탄생, 자각의 모든 과정을 필요로 하며 이때 신념이 요구된다. 신념은 합리적이어야 하고 확실성과 견고함, 자신에 대한 신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또한 내면적인 활동, 즉 자기 힘의 생산적인 활동인 ‘활동성’과 공정성의 윤리(이웃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도 필요하다.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인 해결책으로서 사랑에 진지하게 대처하는 사람은, 만일 사랑이 개인주의적이며 주변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 되려면 우리의 사회 구조에는 중요하고도 철저한 변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책에서는 이같은 변혁의 방향을 암시할 따름이다. 

* 모성형에서 부성형으로 사랑을 나누고 부성형의 사랑이 더 성숙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성별 역할을 도식적으로 나눴을 뿐이라고 봄.
* 역설적 논리학에 따르면 일체성의 경험이야말로 사랑이 도달해야할 궁극적인 목표라고 했다. 하지만 결론도 두루뭉실하고 수련을 통해 도달하는 사랑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다.
* 심리학적 지식은 도구로 이용할 뿐이라고 했는데 에리히 프롬이 입증하려고 하는 사랑이란 것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비슷하지 않을까.

더 읽어보면 좋을 책

* 사랑, 그 혼란스러운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 철학, 심리학, 생물학, 뇌과학, 동물학, 사회학, 문화인류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사랑에 질서를 부여함.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 사랑, 결혼, 가족에 대한 에세이
* 개선문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 사랑이란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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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2-2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이거 보고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을 검색해서 장바구니에 넣었거든요. 책 링크 좀 걸어주면 안되요? 순전히 아치님 덕에 사게 되는건데 땡투 하고 싶어서요.
[사랑, 그 혼란스러운]을 읽다 포기하고 방출한 저로서는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잘 읽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Arch 2012-02-22 13:35   좋아요 0 | URL
ㅋㅋ 다락방님~ 리뷰에는 책이 안 들어가요.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사랑, 그 혼란스러운 보다 별로였는데... 적극 추천 목록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지운 페이퍼를 어떻게 살린담.

다락방 2012-02-22 13:46   좋아요 0 | URL
아..리뷰에는 책이 안들어가는군요!!!!!

Arch 2012-02-22 14:01   좋아요 0 | URL
다른분께 양보할게요. 아까워라...
이럴때 짠하고 다락방님께 다른 책을 추천하면 좋으련만.

다락방 2012-02-22 14:32   좋아요 0 | URL
안살래요.. ㅎㅎ

Arch 2012-02-22 14:34   좋아요 0 | URL
ㅋㅋ 재미있다. 다락방은 책 줄인대매~

머큐리 2012-02-22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선문에 사랑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있었군요... 읽었는데 나는 왜 지나쳤을까요...^^;;

Arch 2012-02-22 14:07   좋아요 0 | URL
섬세한 묘사가 아니었나, 우선 의심 먼저 하고.
몇년 된거라 생생하진 않지만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어쩌면 사랑에 대한 섬세한 묘사라기보다는 뭐랄까, 연인 사이의 감정의 진폭, 흐름, 혹은 심리게임에 홀딱 반했죠.
 
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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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규석이 좋다. 최규석 덕분에 나 자신의 궁상스러움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럴듯함을 꾸미려는 맘을 조금쯤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작가는 그가 가진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최규석만큼은 '그의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작가의 작품 중 아직까지도 습지생태보고서와 대한민국 원주민은 참 제일 좋다. 그래서 좀 미안하지만 그가 가장 잘하는 이야기를 계속 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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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2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2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2-02-22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 포토리뷰엔 너무 아치 감상이 적어요!!

Arch 2012-02-22 15:31   좋아요 0 | URL
포토리뷰에선 원래 포토만 보여주는거에요. 나름 혼자 독단적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음.

다락방 2012-02-22 16:11   좋아요 0 | URL
그런거 아니야!! 아치는 빵꾸똥꾸! 바보에요!!!!!!!!!!!!!!!!!!!!!!!

nada 2012-02-22 19:28   좋아요 0 | URL
그런 거 아니야!!
이거 우리 조카 말투 같아요.ㅋㅋㅋㅋㅋ

Arch 2012-02-23 09:21   좋아요 0 | URL
다락방이 애기라 그래요.

뭔가를 적고 싶긴 한데 사족 같아 다 지워버렸어요. 특히 저 장면들의 느낌을 말로 표현하는건 참 어렵더라구요.
 


지민 계획표. 지민인 광개토대왕 마니아다.



틈나는대로 TV신청해주는 옥찌의 계획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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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2-16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녘 식사랑 점심은 보이는데, 옥찌는 아침식사도 빠뜨리진 않은거죠? ㅎㅎ

Arch 2012-02-17 16:17   좋아요 0 | URL
예리한 다락방~
저기 돌봄교실 전에 살짝 칸이 나눠진걸로 봐서 아침도 먹은걸로 보입니다.

굿바이 2012-02-16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에 두 번이나 tv를 신청하는군요, 굉장합니다 :)

Arch 2012-02-17 16:18   좋아요 0 | URL
그 굉장합니다는 코빅에서 나온건가요? ^^꽤 바쁘겠죠

LAYLA 2012-02-16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직한 시간표네요 전 뻔뻔하게 공부만 하겠다고 적어놨었는데 (이런건 어차피 지키는게 아니라고 생각했었죸ㅋㅋ)

Arch 2012-02-17 16:19   좋아요 0 | URL
저도 밥 먹고 공부, 뭐하고 공부 이랬는데.
누가 적으라고 시킨게 아니라 자기들이 정해놓고 하는거라 좀 헐렁하게 짰나봐요.
 
그림과 그림자 - 김혜리 그림산문집
김혜리 지음 / 앨리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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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억하라
니콜라 콘스탄티노, <젖꼭지 코르셋>, 1999

현대미술의 곡예에 단련된 오늘날의 관람객들은 웬만한 도발에는 뒷목을 잡지 않는다.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니콜라 콘스탄티노의 <젖꼭지 코르셋>도 멀찌감치 서서 보면 약간 아리송한 작품에 불과하다. 미술관에 웬 란제리? 생뚱맞음에 방심하다가, 코르셋을 입은 토르소를 약 1.5미터 정도 근접하면 질겁하게 된다. 고급 핸드백에 쓰이는 타조 가죽쯤으로 보였던 코르셋의 소재가, 실은 인피-의 모사품-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젖꼭지 코르셋>은 수많은 유두로 뒤덮인 사람의 피부로 제작한 상상의 코르셋이다.
콘스탄티노의 고국은 식육 산업과 피혁 산업이 성한 아르헨티나다. 그녀의 초기작은 육식을 위한 도축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인간이 먹고 입는 과정에는 살생이 도사리고 있다. 콘스탄티노는 눈에 보이지 않고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짐짓 모른 체하는 삶의 카니발리즘적 속성을 환기시킨다. 죽은 사람의 가죽으로 바느질된 드레스와 구두는, 패션이 희구하는 영원한 청춘과 성적 매력의 꿈에 불길한 소멸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들은 기분 나쁘게 궛전에 속삭인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뱀을 노래하다
도르예 커스텐 신노, <봄날의 쾌활한 뱀>

김혜리가 쓴 뱀에 대한 글은 꼭 읽어봐야한다.



숨겨진 공간을 찾아 다시 감추다
다니엘 아르샴, <시트>, 2007

흔히 자연의 맞은편에 놓여 무기적인 영구불변함의 표상으로 치부되는 건축물도 따지고 보면 한정된 삶을 산다. 그들은 녹슬고, 늙고, 숨 쉬며, 진동한다. 우리가 집이 살아 있다고 실감하는 때는 역설적으로 집을 오래 비운 연후다. 긴 여행으로부터 돌아와 첫 발을 들여놓으면 빈 집은 쾨쾨한 황폐의 냄새를 피운다. 한동안 어지르고 때 묻히지 않았으니 말끔해야 마땅할 텐데, 웬일인지 후줄근하고 시들어 있다. 그제야 집과 내가 날숨과 들숨을 주고받고 있었음을 안다. 어쩐지 훈훈한 깨달음이다.
<시트>는 순백의 벽을 웅크린 사람의 몸에 친친 감긴 침대 시트로 바꾸어놓는다. 1미터가 조금 넘는, 사람보다 작지만 일반적인 인형보다는 큰 어정쩡한 크기의 인체 모형은 관람자가 감각하는 공간의 스케일을 불안하게 흔들어놓는다. 그는 지금 아무것도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고, 그저 벽 속으로 스며들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느리고 고된 섬광
야마시타 기요시, <불꽃놀이>

야마시타는 지적 장애가 있었고 세 살 무렵 고열을 앓은 다음부터 걸음걸이도 불편했다. 자연, 자라면서 이지메가 따라왔다. ... 고흐에게 꿈틀거리는 필적이 있었다면 야마시타에겐 손으로 일일이 뜯어낸 종잇조각이 있었다.
야마시타의 색종이 조각은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민들레 꽃잎 같다. 연약하지만 조밀하게 서로에게 몸을 의탁해 단호한 형태를 이룬다. 불꽃놀이를 포착한 사진과 회화는 흔하지만, 야마시타의 ‘하나비(불꽃놀이)’연작이 특별한 이유는, 섬광의 이미지를 가장 느리고 고된 방식으로 재현하는 역설이 거기에 있어서일 것이다.



거울 앞의 ‘몽롱한 집중’
에드가르 드가, <머리 빗기> 1892~96

이부자리 정돈, 커피 끓이기, 단추 채우기, 이메일 확인...... 날마다 절반쯤 무의식중에 해내는 일들이 있다. 정신은 잠가둔 채로 감각만 열어 수행하는 일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호흡 요령이나 걸을 때 팔다리를 내미는 순서를 일일이 인지하지 않는 현상을 좀 고도화시킨 버전이랄까. 그렇다고 이 반자동적 행위들이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덜하냐면, 그렇지 않다. 다음 정차 역까지 데려다주는 철로의 구실을 떠올려보자. 아침저녁으로 거울 앞에서 여자들이 보내는 일정한 시간도, 예의 ‘몽롱한 집중’의 순간 중 하나다.
몸치장은 세상에서 가장 얇은 무장이다. 치장하는 여성은 본인의 섹슈얼리티를 디자인하는 중이며 순수한 즐거움에 겨워 제 외모가 남에게 미칠 영향을 점검한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몰입, 흔들림 없는 응시와 세밀하게 조율된 터치, 어쩌면 그들의 손가락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이런 식으로 만져주었으면’하는 바람이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옷을 입었건 벗었건, 그 정경에는 가까이 지켜보기만 해도 볼이 달아오르게 하는 관능성이 조용히 흐른다. 일부 문화가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화장하는 일을 불편하게 여기는 연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정말 묘사된 실낙원
노먼 록웰. <도망자>, 1958

도망자라곤 했지만, 그림 속의 꼬마는 가출한 것이 분명하다. 빨간 보자기에 주섬주섬 싼 허술한 보퉁이가 홧김에 꾸린 여장임이 한눈에 보인다. 집에서 그리 멀리 가지도 못한 책 배가 고파 쭈뼛쭈뼛 식당에 들어섰으리라. 동네 순경과 주방장은 어린 도망자의 행색에 모든 걸 눈치챈 듯 사연을 묻는다. <도망자>가 ‘가출’ 삽화라면, <집을 떠나며>는 ‘출가’의 이미지다. 농사일로 거칠어진 아버지와 대처의 대학으로 떠나는 아들이 허름한 트럭에 걸터앉아 있다.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차표와 아래쪽에 보이는 침묵으로 보아 장소는 간이역이며, 날 세워 다린 아들의 양복바지 위에는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과 이별을 슬퍼하는 개의 머리가 얹혀 있다. 이 그림의 드라마는 시선의 교차에서 나온다. 부자는 각자 반대 방향을 보고 있다. 젊은이는 홍조 띤 얼굴로 목을 길게 빼고 다가오는 미래에 넋을 빼앗겼고, 어깨를 늘어뜨린 아버지는 약해지지 않기 위해 모자를 꼭 쥐고 있다. 미국 잡지 <새터데이 모닝 포스트>의 표지로 쓰인 이 두 일러스트레이션의 작가는 노먼 록웰이다.



노먼 록웰, <집을 떠나며>, 1954



인간 정신의 특별한 구역
조앤 이어들리, <아이들, 글래스고 항>, 1955

빈민가 아이들을 그린 이어들리의 작품에서 전후 다큐멘터리 사진과 영국 키친 싱크 리얼리즘의 미학을 연상하는 것은 온당하다. 그러나 여기에 “이 참상을 보라!” 식의 지적은 없다. 곤궁한 일상을 영위하며 매일 아침 다시 끓어오르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재미난 일을 찾아 골목으로 뛰쳐나오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일일이 불평하지 않는 강건함과 기묘한 스토이시즘이 있다. 삶의 특정 시기에만 열렸다 닫히는 인간 정신의 특별한 구역,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귀여움과 연민이 아니라 차라리 존경이다.



그림이라는 쿠션
에드워드 아디존, <작은 책방>의 삽화, 1955

뛰어난 삽화들은 내가 아는 한, 타임머신에 가장 가까운 물건이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훌쩍 안아 올려 잃어버린 낙원의 오후로 데려다준다.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배를 깔고 누워 읽었던 동화책 속 이탤릭체 외래어들의 이국적 유혹, 점자처럼 뒷면에 배긴 조판활자의 자국을 더듬는 간지러움, 새로 산 문고판의 빳빳한 종이에 손가락을 베는 달콤한 통증을 한꺼번에 부활시킨다.
삽화가의 재능은 화가의 그것과 통하지만 다르다. 삽화는 무엇보다 ‘작은 그림’이고 삽화가는 작게 그릴 줄 아는 사람이다. 문장이 독자를 유혹해 상상세계의 문턱을 넘게 하면, 삽화는 그 안에 안락하게 처박힐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것은 마치 <피너츠>의 라이너스가 자라서도 떼놓지 못하는 푸른 담요와 같다. 에드워드 아디존의 그림은 쿠션과 같다. 회화가 우리를 눕게 한다면 그의 삽화는 우리를 기대게 한다.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이미지를 잔뜩 거느린 요즘 어린이들도 동화의 삽화에 매료되는지 문득 궁금하다.



미완의 드라마
로버트 브레이스웨이트 마티노, <가난한 여배우의 크리스마스 디너>, 연도 미상

소녀는 예뻤다. 마을 남자아이들이 그렇게 속삭였고 거울도 확인시켜주었다. 자신이 철저히 낯선 사람 앞에서만 수줍음을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혈혈단신으로 런던행 열차 삼등칸에 오르던 날, 봄바람이 약속했다. 오늘이 너의 남은 생을 통틀어 가장 초라하고 추운 하루일 거야. 앞으로는 점점 더 양지바른 날이 찾아올 거야. 그러나 세상은 그녀의 열정을 내보일 틈을 좀처럼 주지 않았다. 극작가가 점심을 먹는 두시간 동안 찌는 듯한 오디션 대기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화장은 녹아내리고 마음은 무너졌다. 한때 스캔들을 염려하는 배우로 살아갈 날을 상상했지만, 이제 그녀는 가끔 윤기 있는 한 끼 식사를 위해서라도 애인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영양과 희망의 결핍으로 거칠어진 머릿결과 말라붙은 표정을 쇼윈도에 비추어보며 여자는 읊조렸다.
“난 무인도에 가더라도 시선을 끌지 못할 거야.”
최악의 고역은, 마음의 바닥을 아무리 긁어봐도 한 줌의 자긍심조차 그러모을 수 없는 순간에도 도도한 표정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었다. 스스로를 연민하는 순간 자기 안의 마지막 광채가 스러진다는 걸 알기에 여자는 필사적이었다.



순진한 열망의 정원
앙리 루소, <꿈>, 1910

궁핍한 가정환경 탓에 일찍이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는 억울함을 품고 살았던 루소는 아카데미 화가들의 사실적인 묘사력을 몹시 동경했다. (줄자로 모델을 재서 비율을 계산하고 물감을 피부에 대보고 색을 정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러나 세상이 ‘소박파’라는 브랜드를 붙여주고 명망 있는 화가들이 “당신의 투박함을 소중히 간직하라”고 조언하자, 루소는 자신의 천진하고 순박한 페르소나를 예술적 인정을 위해 순순히 받아들이고 이용했다. 뭐니뭐니 해도 그는 손아귀에 들어온 모든 것을 이용해 남은 시간이 다하기 전에 자신의 예술과 삶의 의미를 증명해야 했던 가난하고 나이든 화가였던 것이다.
실제 열대 식생과 어긋나는 루소의 밀림 풍경화는 화가가 꿈꾸는 동물과 식물을 하나씩 집어놓고 싶어서 가꾼, 환상의 정원이다. 기술적 역량의 한계를 일축하고 가진 모든 파편을 그러모아 무엇인가 표현하려는 자의 긴급함, 아는 것들을 조합해 미지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자의 순진한 열망이 그 정원을 교교히 밝힌다. 루소의 마지막 작품<꿈>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망을 이룬자의 포만감이 서려 있다.



아파서 나는 아프다
알브레히트 뒤러, 제목 미상, 1512~13 또는 1519

함께 느낄 수 없음은 둘째 치고, 고통은 그 양과 질을 의사소통하기도 어렵다. 이에 온갖 직유와 은유가 총동원되어 ‘뼈를 에이는 듯한’, ‘하늘이 노래지는’ 등등이 난무한다. 니체와 같은 학자는 자신의 통증에 ‘개’라는 애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애견처럼 충성스럽고 끈덕지고 뻔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고통의 표현이 까다로운 또 하나의 까닭은 그것이 ‘번진다’는 점에 있다. 육체의 고통이 진전되면 몸의 나머지 부분도 덩달아 욱신거리기에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 통증의 진앙을 가리키기가 쉽지 않다. 또한 인간은 아파할 뿐 아니라 자기가 앓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정신적 괴로움을 느끼는 동물이다. 요컨대 고통은 언어를 거절한다. 비명과 신음이 차라리 명쾌하다.
뵐플린은 뒤러의 예술적 약점으로 열정의 결핍과 근엄함을 꼽은 바 있다. 확실히 십자가 수난처럼 처절한 소재를 다룬 뒤러의 작품에서도 괴로움의 묘사가 인체와 배경, 사물의 정확한 형상을 향한 관심을 능가하는 걸 보기 힘들다. <여기가 아프다>에서 뒤러는 얼마나 어떻게 아픈지 전혀 표현하지 않고 있다. 다만 통증이 발생한 지점을 추정해 가리킬 뿐이다.
이상하게도 고통을 묘사하고 나름대로 호소하는 그 냉정한-거의 쓸쓸하기까지 한- 태도가 우리를 매료시킨다. 페터 코르넬리우스의 표현을 빌리면 “불타는 듯 준엄했던” 이 르네상스의 대가는, 아마 고통은 궁극적으로 그릴 수 없는 것이라고 진즉 판정한 게 아닐까? 그리고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 온전히 체계화할 수 없는 영역에는 아예 관여하지 않기로 작심한 게 아닐까?



LOVE & D.I.Y
이주요,,2005

얼핏 보아도 이주요의 오브제들은 ‘간신히’ 기능한다. 여기서 ‘간신히’라는 부사는, 고통과 불편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완화하되 쾌감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겠다는 자세를 의미한다. 어쩌면 그것을 절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세상에 흘러다니는 고통의 총량이 정해져 있어서 내가 감당할 만한 몫을 짊어지지 않으면 누군가의 어깨에 과한 짐이 얹힐 거라는 묵시적인 가정, 이주요의 여린 작품에서는 그런 단단한 윤리적 속살이 만져진다.



사랑한 후에
피에르 보나르, <남과 여>, 1900

<남과 여>는 섹스 직후의 정적을 그린 작품이다. 화폭을 단호하게 이분한 버티컬 스크린을 중심으로 왼쪽 침대에 앉아 있는 여인이 마르테, 오른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가 보나르다. 많은 사람들은 <남과 여>를 정사 후 급속히 냉랭해진 남성과 엷은 후회에 젖은 여성을 묘사한 그림으로 읽는다. 그러나 좀 더 귀를 귀울이면 다른 이야기가 들려온다. 따스한 햇볕에 감싸여 보드라운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 마르테는 스스로를 나른하게 해방하고 있다. 고개 숙여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으며 지켜보는 우리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반면 어둠 속에서 옷가지를 집으려는 남자는 허무하고 불안해 보인다. 우리를 향해 노출된 그의 이목구비는 주변의 음울한 적색에 먹히고 있으며, 벗은 몸을 그린 붓질은 뭉그러져 화가가 주저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보나르는 2년 전부터 비슷한 침실 그림을 그렸으나 <남과 여>에 이르러서야 두 인물 사이에 ‘벽’을 쳤다. 더불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섹스의 환상이 썰물처럼 물러난 후, 남과 여 사이엔 다시 바리케이드가 내려와 있다.



몇주 동안 이 책을 읽으며 모처럼 내가 독자여서 참 행복하단 생각을 했더랬다. 김혜리는 인터뷰집 말고도 일기든 그림에 대한 얘기든 어떤 글이든 써주면 좋겠다란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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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1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2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