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그림자 - 김혜리 그림산문집
김혜리 지음 / 앨리스 / 2011년 10월
장바구니담기



죽음을 기억하라
니콜라 콘스탄티노, <젖꼭지 코르셋>, 1999

현대미술의 곡예에 단련된 오늘날의 관람객들은 웬만한 도발에는 뒷목을 잡지 않는다.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니콜라 콘스탄티노의 <젖꼭지 코르셋>도 멀찌감치 서서 보면 약간 아리송한 작품에 불과하다. 미술관에 웬 란제리? 생뚱맞음에 방심하다가, 코르셋을 입은 토르소를 약 1.5미터 정도 근접하면 질겁하게 된다. 고급 핸드백에 쓰이는 타조 가죽쯤으로 보였던 코르셋의 소재가, 실은 인피-의 모사품-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젖꼭지 코르셋>은 수많은 유두로 뒤덮인 사람의 피부로 제작한 상상의 코르셋이다.
콘스탄티노의 고국은 식육 산업과 피혁 산업이 성한 아르헨티나다. 그녀의 초기작은 육식을 위한 도축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인간이 먹고 입는 과정에는 살생이 도사리고 있다. 콘스탄티노는 눈에 보이지 않고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짐짓 모른 체하는 삶의 카니발리즘적 속성을 환기시킨다. 죽은 사람의 가죽으로 바느질된 드레스와 구두는, 패션이 희구하는 영원한 청춘과 성적 매력의 꿈에 불길한 소멸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들은 기분 나쁘게 궛전에 속삭인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뱀을 노래하다
도르예 커스텐 신노, <봄날의 쾌활한 뱀>

김혜리가 쓴 뱀에 대한 글은 꼭 읽어봐야한다.



숨겨진 공간을 찾아 다시 감추다
다니엘 아르샴, <시트>, 2007

흔히 자연의 맞은편에 놓여 무기적인 영구불변함의 표상으로 치부되는 건축물도 따지고 보면 한정된 삶을 산다. 그들은 녹슬고, 늙고, 숨 쉬며, 진동한다. 우리가 집이 살아 있다고 실감하는 때는 역설적으로 집을 오래 비운 연후다. 긴 여행으로부터 돌아와 첫 발을 들여놓으면 빈 집은 쾨쾨한 황폐의 냄새를 피운다. 한동안 어지르고 때 묻히지 않았으니 말끔해야 마땅할 텐데, 웬일인지 후줄근하고 시들어 있다. 그제야 집과 내가 날숨과 들숨을 주고받고 있었음을 안다. 어쩐지 훈훈한 깨달음이다.
<시트>는 순백의 벽을 웅크린 사람의 몸에 친친 감긴 침대 시트로 바꾸어놓는다. 1미터가 조금 넘는, 사람보다 작지만 일반적인 인형보다는 큰 어정쩡한 크기의 인체 모형은 관람자가 감각하는 공간의 스케일을 불안하게 흔들어놓는다. 그는 지금 아무것도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고, 그저 벽 속으로 스며들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느리고 고된 섬광
야마시타 기요시, <불꽃놀이>

야마시타는 지적 장애가 있었고 세 살 무렵 고열을 앓은 다음부터 걸음걸이도 불편했다. 자연, 자라면서 이지메가 따라왔다. ... 고흐에게 꿈틀거리는 필적이 있었다면 야마시타에겐 손으로 일일이 뜯어낸 종잇조각이 있었다.
야마시타의 색종이 조각은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민들레 꽃잎 같다. 연약하지만 조밀하게 서로에게 몸을 의탁해 단호한 형태를 이룬다. 불꽃놀이를 포착한 사진과 회화는 흔하지만, 야마시타의 ‘하나비(불꽃놀이)’연작이 특별한 이유는, 섬광의 이미지를 가장 느리고 고된 방식으로 재현하는 역설이 거기에 있어서일 것이다.



거울 앞의 ‘몽롱한 집중’
에드가르 드가, <머리 빗기> 1892~96

이부자리 정돈, 커피 끓이기, 단추 채우기, 이메일 확인...... 날마다 절반쯤 무의식중에 해내는 일들이 있다. 정신은 잠가둔 채로 감각만 열어 수행하는 일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호흡 요령이나 걸을 때 팔다리를 내미는 순서를 일일이 인지하지 않는 현상을 좀 고도화시킨 버전이랄까. 그렇다고 이 반자동적 행위들이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덜하냐면, 그렇지 않다. 다음 정차 역까지 데려다주는 철로의 구실을 떠올려보자. 아침저녁으로 거울 앞에서 여자들이 보내는 일정한 시간도, 예의 ‘몽롱한 집중’의 순간 중 하나다.
몸치장은 세상에서 가장 얇은 무장이다. 치장하는 여성은 본인의 섹슈얼리티를 디자인하는 중이며 순수한 즐거움에 겨워 제 외모가 남에게 미칠 영향을 점검한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몰입, 흔들림 없는 응시와 세밀하게 조율된 터치, 어쩌면 그들의 손가락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이런 식으로 만져주었으면’하는 바람이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옷을 입었건 벗었건, 그 정경에는 가까이 지켜보기만 해도 볼이 달아오르게 하는 관능성이 조용히 흐른다. 일부 문화가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화장하는 일을 불편하게 여기는 연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정말 묘사된 실낙원
노먼 록웰. <도망자>, 1958

도망자라곤 했지만, 그림 속의 꼬마는 가출한 것이 분명하다. 빨간 보자기에 주섬주섬 싼 허술한 보퉁이가 홧김에 꾸린 여장임이 한눈에 보인다. 집에서 그리 멀리 가지도 못한 책 배가 고파 쭈뼛쭈뼛 식당에 들어섰으리라. 동네 순경과 주방장은 어린 도망자의 행색에 모든 걸 눈치챈 듯 사연을 묻는다. <도망자>가 ‘가출’ 삽화라면, <집을 떠나며>는 ‘출가’의 이미지다. 농사일로 거칠어진 아버지와 대처의 대학으로 떠나는 아들이 허름한 트럭에 걸터앉아 있다.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차표와 아래쪽에 보이는 침묵으로 보아 장소는 간이역이며, 날 세워 다린 아들의 양복바지 위에는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과 이별을 슬퍼하는 개의 머리가 얹혀 있다. 이 그림의 드라마는 시선의 교차에서 나온다. 부자는 각자 반대 방향을 보고 있다. 젊은이는 홍조 띤 얼굴로 목을 길게 빼고 다가오는 미래에 넋을 빼앗겼고, 어깨를 늘어뜨린 아버지는 약해지지 않기 위해 모자를 꼭 쥐고 있다. 미국 잡지 <새터데이 모닝 포스트>의 표지로 쓰인 이 두 일러스트레이션의 작가는 노먼 록웰이다.



노먼 록웰, <집을 떠나며>, 1954



인간 정신의 특별한 구역
조앤 이어들리, <아이들, 글래스고 항>, 1955

빈민가 아이들을 그린 이어들리의 작품에서 전후 다큐멘터리 사진과 영국 키친 싱크 리얼리즘의 미학을 연상하는 것은 온당하다. 그러나 여기에 “이 참상을 보라!” 식의 지적은 없다. 곤궁한 일상을 영위하며 매일 아침 다시 끓어오르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재미난 일을 찾아 골목으로 뛰쳐나오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일일이 불평하지 않는 강건함과 기묘한 스토이시즘이 있다. 삶의 특정 시기에만 열렸다 닫히는 인간 정신의 특별한 구역,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귀여움과 연민이 아니라 차라리 존경이다.



그림이라는 쿠션
에드워드 아디존, <작은 책방>의 삽화, 1955

뛰어난 삽화들은 내가 아는 한, 타임머신에 가장 가까운 물건이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훌쩍 안아 올려 잃어버린 낙원의 오후로 데려다준다.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배를 깔고 누워 읽었던 동화책 속 이탤릭체 외래어들의 이국적 유혹, 점자처럼 뒷면에 배긴 조판활자의 자국을 더듬는 간지러움, 새로 산 문고판의 빳빳한 종이에 손가락을 베는 달콤한 통증을 한꺼번에 부활시킨다.
삽화가의 재능은 화가의 그것과 통하지만 다르다. 삽화는 무엇보다 ‘작은 그림’이고 삽화가는 작게 그릴 줄 아는 사람이다. 문장이 독자를 유혹해 상상세계의 문턱을 넘게 하면, 삽화는 그 안에 안락하게 처박힐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것은 마치 <피너츠>의 라이너스가 자라서도 떼놓지 못하는 푸른 담요와 같다. 에드워드 아디존의 그림은 쿠션과 같다. 회화가 우리를 눕게 한다면 그의 삽화는 우리를 기대게 한다.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이미지를 잔뜩 거느린 요즘 어린이들도 동화의 삽화에 매료되는지 문득 궁금하다.



미완의 드라마
로버트 브레이스웨이트 마티노, <가난한 여배우의 크리스마스 디너>, 연도 미상

소녀는 예뻤다. 마을 남자아이들이 그렇게 속삭였고 거울도 확인시켜주었다. 자신이 철저히 낯선 사람 앞에서만 수줍음을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혈혈단신으로 런던행 열차 삼등칸에 오르던 날, 봄바람이 약속했다. 오늘이 너의 남은 생을 통틀어 가장 초라하고 추운 하루일 거야. 앞으로는 점점 더 양지바른 날이 찾아올 거야. 그러나 세상은 그녀의 열정을 내보일 틈을 좀처럼 주지 않았다. 극작가가 점심을 먹는 두시간 동안 찌는 듯한 오디션 대기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화장은 녹아내리고 마음은 무너졌다. 한때 스캔들을 염려하는 배우로 살아갈 날을 상상했지만, 이제 그녀는 가끔 윤기 있는 한 끼 식사를 위해서라도 애인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영양과 희망의 결핍으로 거칠어진 머릿결과 말라붙은 표정을 쇼윈도에 비추어보며 여자는 읊조렸다.
“난 무인도에 가더라도 시선을 끌지 못할 거야.”
최악의 고역은, 마음의 바닥을 아무리 긁어봐도 한 줌의 자긍심조차 그러모을 수 없는 순간에도 도도한 표정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었다. 스스로를 연민하는 순간 자기 안의 마지막 광채가 스러진다는 걸 알기에 여자는 필사적이었다.



순진한 열망의 정원
앙리 루소, <꿈>, 1910

궁핍한 가정환경 탓에 일찍이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는 억울함을 품고 살았던 루소는 아카데미 화가들의 사실적인 묘사력을 몹시 동경했다. (줄자로 모델을 재서 비율을 계산하고 물감을 피부에 대보고 색을 정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러나 세상이 ‘소박파’라는 브랜드를 붙여주고 명망 있는 화가들이 “당신의 투박함을 소중히 간직하라”고 조언하자, 루소는 자신의 천진하고 순박한 페르소나를 예술적 인정을 위해 순순히 받아들이고 이용했다. 뭐니뭐니 해도 그는 손아귀에 들어온 모든 것을 이용해 남은 시간이 다하기 전에 자신의 예술과 삶의 의미를 증명해야 했던 가난하고 나이든 화가였던 것이다.
실제 열대 식생과 어긋나는 루소의 밀림 풍경화는 화가가 꿈꾸는 동물과 식물을 하나씩 집어놓고 싶어서 가꾼, 환상의 정원이다. 기술적 역량의 한계를 일축하고 가진 모든 파편을 그러모아 무엇인가 표현하려는 자의 긴급함, 아는 것들을 조합해 미지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자의 순진한 열망이 그 정원을 교교히 밝힌다. 루소의 마지막 작품<꿈>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망을 이룬자의 포만감이 서려 있다.



아파서 나는 아프다
알브레히트 뒤러, 제목 미상, 1512~13 또는 1519

함께 느낄 수 없음은 둘째 치고, 고통은 그 양과 질을 의사소통하기도 어렵다. 이에 온갖 직유와 은유가 총동원되어 ‘뼈를 에이는 듯한’, ‘하늘이 노래지는’ 등등이 난무한다. 니체와 같은 학자는 자신의 통증에 ‘개’라는 애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애견처럼 충성스럽고 끈덕지고 뻔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고통의 표현이 까다로운 또 하나의 까닭은 그것이 ‘번진다’는 점에 있다. 육체의 고통이 진전되면 몸의 나머지 부분도 덩달아 욱신거리기에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 통증의 진앙을 가리키기가 쉽지 않다. 또한 인간은 아파할 뿐 아니라 자기가 앓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정신적 괴로움을 느끼는 동물이다. 요컨대 고통은 언어를 거절한다. 비명과 신음이 차라리 명쾌하다.
뵐플린은 뒤러의 예술적 약점으로 열정의 결핍과 근엄함을 꼽은 바 있다. 확실히 십자가 수난처럼 처절한 소재를 다룬 뒤러의 작품에서도 괴로움의 묘사가 인체와 배경, 사물의 정확한 형상을 향한 관심을 능가하는 걸 보기 힘들다. <여기가 아프다>에서 뒤러는 얼마나 어떻게 아픈지 전혀 표현하지 않고 있다. 다만 통증이 발생한 지점을 추정해 가리킬 뿐이다.
이상하게도 고통을 묘사하고 나름대로 호소하는 그 냉정한-거의 쓸쓸하기까지 한- 태도가 우리를 매료시킨다. 페터 코르넬리우스의 표현을 빌리면 “불타는 듯 준엄했던” 이 르네상스의 대가는, 아마 고통은 궁극적으로 그릴 수 없는 것이라고 진즉 판정한 게 아닐까? 그리고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 온전히 체계화할 수 없는 영역에는 아예 관여하지 않기로 작심한 게 아닐까?



LOVE & D.I.Y
이주요,,2005

얼핏 보아도 이주요의 오브제들은 ‘간신히’ 기능한다. 여기서 ‘간신히’라는 부사는, 고통과 불편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완화하되 쾌감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겠다는 자세를 의미한다. 어쩌면 그것을 절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세상에 흘러다니는 고통의 총량이 정해져 있어서 내가 감당할 만한 몫을 짊어지지 않으면 누군가의 어깨에 과한 짐이 얹힐 거라는 묵시적인 가정, 이주요의 여린 작품에서는 그런 단단한 윤리적 속살이 만져진다.



사랑한 후에
피에르 보나르, <남과 여>, 1900

<남과 여>는 섹스 직후의 정적을 그린 작품이다. 화폭을 단호하게 이분한 버티컬 스크린을 중심으로 왼쪽 침대에 앉아 있는 여인이 마르테, 오른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가 보나르다. 많은 사람들은 <남과 여>를 정사 후 급속히 냉랭해진 남성과 엷은 후회에 젖은 여성을 묘사한 그림으로 읽는다. 그러나 좀 더 귀를 귀울이면 다른 이야기가 들려온다. 따스한 햇볕에 감싸여 보드라운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 마르테는 스스로를 나른하게 해방하고 있다. 고개 숙여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으며 지켜보는 우리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반면 어둠 속에서 옷가지를 집으려는 남자는 허무하고 불안해 보인다. 우리를 향해 노출된 그의 이목구비는 주변의 음울한 적색에 먹히고 있으며, 벗은 몸을 그린 붓질은 뭉그러져 화가가 주저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보나르는 2년 전부터 비슷한 침실 그림을 그렸으나 <남과 여>에 이르러서야 두 인물 사이에 ‘벽’을 쳤다. 더불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섹스의 환상이 썰물처럼 물러난 후, 남과 여 사이엔 다시 바리케이드가 내려와 있다.



몇주 동안 이 책을 읽으며 모처럼 내가 독자여서 참 행복하단 생각을 했더랬다. 김혜리는 인터뷰집 말고도 일기든 그림에 대한 얘기든 어떤 글이든 써주면 좋겠다란 생각도 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2-21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2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