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선 실패의 원인을 살펴보고 사랑의 의미를 배워야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전제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사랑하는’ 문제로 파악하기보다는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건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사랑스럽다는 말에 함축된 의미는 통속적이며, 인기가 있다는 것과 성적 매력이 뒤섞여 있다. 둘째, 사랑은 ‘대상’의 문제이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전제이다. 세 번째 과오는 사랑에 ‘빠진다’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 속에 ‘머물러 있다’는 상태를 혼동하고 있는 데 있다. 여기서 심취, 즉 서로에게 ‘미쳐 있다’는 것을 사랑의 강도를 나타내는 증거로 여기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이 서로 사랑하기 전에 얼마나 고독했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사랑의 의미를 배우려면 삶이 하나의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이론을 습득하고, 실천에 익숙해져야 한다. 

 1. 사랑,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 

 인간의 절실한 욕구는 분리되어 있는 경험으로부터 파생되는 불안을 극복하는 것이다. 어떻게 자신의 객관적인 삶을 초월하여 편안함을 찾아내느냐 하는 문제 말이다. 분리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와 성적인 극치감을 들 수 있다. 부족 내에서 공동으로 행해질 때 이러한 방법에선 불안 혹은 죄책감이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정당한 미덕으로까지 여겨진다. 하지만 개인에 의해 선택될 때는 (알코올, 마약 중독) 당사자는 죄책감으로 고민한다. 황홀경을 추구하는 모든 형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강도가 너무 강하며, 전인격에 걸쳐서 일어나고, 오래 지속하지 않고 주기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황홀경만으로는 분리 불안을 극복할 수 없다. 

 극치감의 극점에 일치의 양식이 있다. 집단과의 일치는 분리감을 극복하는데 널리 사용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조하려는 욕구를 알지 못한 채 사소한 차이로 자신의 개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지만 자본주의 체제하에선 그마저도 어렵다. 일치를 달성하는 다른 방법으로는 ‘창조적인 활동’이 있다. 인간은 창조 과정 속에서 자신을 세계와 일치시킨다. 그러나 오늘날 사무원의 작업 과정에서는 노동자에게 창조적인 경험이 주어지기란 어렵다. 일치의 완전한 해답은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타인과의 융합, 즉 사랑의 성취에 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떤 종류의 합일을 통해 이루어져야하는가. 공서적 합일(미성숙한 형태의 사랑)은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와의 관계에서 생물학적인 유형을 찾아볼 수 있다. 수동적인 유형은 매저키즘으로, 능동적인 형태는 사디즘으로 나타난다. 성숙한 사랑은 개인의 통합성, 즉 개성을 유지한 상태에서의 합일로 두 존재가 하나가 되지만 동시에 따로따로 남는다는 모순이 성립한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며, ‘빠져드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원래 ‘주는’ 것이며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준다는 것은 잠재력의 최고의 표현이다. 나는 자신을, 충만되어 있고 소비하고 살아 있는, 따라서 즐거워하는 자로 경험한다. 주는 행위를 통해 나의 삶이 표현되기 때문에 받는 것보다 더욱 즐거운 것이다. 준다는 요소 이외에도 사랑의 적극적인 성격은, 배려, 책임, 존경, 지식 등이다. 또한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과 성장에 적극적으로 관계하는 일로 자발적인 행위다. (요나서의 요나 이야기) 존경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독특한 개성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사고를 통한 지식은 심리학적인 지식이긴 하지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 완전한 지식에 이르는 필요조건이다. 즉 자신을 객관화하여 사랑의 행위를 통해 그의 궁극적인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각주에서 심리학적인 지식을 ‘사랑의 행위를 통해 완전한 지식에 한 걸음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지식의 대용품이 된다’라고 밝히고 있다.

2.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어머니는 내가 나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수동적이고 무조건적이다. 획득하거나 만들거나 통제할 수 없는 사랑이며 유아적이다. 아버지는 은혜에 따라 사랑을 준다. 아버지는 세계에 대한 길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사랑은 사유재산에 따른 조건이 붙은 사랑이고, 순종이 주요 덕목이며 보상을 바란다. (신에 대한 사랑에서도 모계와 부계 신앙과 관련해서 비슷한 설명이 나옴)

3. 사랑의 대상 

 사랑은 어떤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세계와의 관계를 결정짓는 태도이며, 성격의 방향이기 때문에 자신을 빼놓고 사랑을 말할 수는 없다. 사랑은 의지며 결단, 판단, 약속으로 실현되기에 일시적인 육체적 사랑은 진정한 사랑으로 볼 수 없다. 우리 자신도 우리의 감정과 태도의 ‘대상’이다. 자기애는 타자와 자기의 관심을 양자택일할 수 밖에 없는 이기심과는 구별된다. 

 신에 대한 사랑은 바람직한 선이란 무엇인가란 신의 개념을 이해함으로써 신을 숭배하는 인간의 성격 구조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는 인류의 발달 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 자연과의 원초적 합일을 희구하면서 동물을 숭배하는 토템에서 시작해 자신이 만든걸 숭배하고 자기가 만든 신에게 인간의 모습을 부여한다. 신에 대한 사랑은 두 가지 차원으로 발전한다. 여성적인가, 남성적인가. 혹은 인간이 성취한, 그가 만든 신의 본성과 그 신에 대한 사랑의 본질을 결정하는 성숙도가 그것이다. 

 신에 대한 사랑은 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태도로 인해 근본적 차이가 발생한다. 역설 논리학은 신의 개념과 중요한 관련을 맺고 있다. 신은 최고의 실재를 나타내지만 인간의 정신이 모순 속에서만 실재를 지각하는 것이므로, 신에 대해서는 어떤 적극적인 전술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사고를 통해 해답을 찾아내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결론이 나온다. 세계를 유일하게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행위 속에, 일체성의 경험에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스피노자, 마르크스, 프로이트에 의해 역설 논리학은 심층적인 경험으로 표출된다. 사고가 아닌 행위에 강조점을 둔 역설 논리학은 관용과 인간 개조에 대한 강조를 가져왔다. 역설적 사고는 관용과 자기 변혁을 향한 노력을 가져왔다. 

사랑과 현대 서구 사회에서의 그 붕괴

  현대 서구 문화에서 서구 문명의 사회 구조와 거기서 야기된 정신이 사랑의 발달에 필요한 것인지 알아봐야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정치적 자유 원리와 경제적. 사회적 관계의 규제자로서의 시장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자본과 물품이 노동력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현 체제는 현대인의 성격 구조에 깊은 영향을 준다. 자본이 중앙집권화 될수록 개인은 개성을 상실하고 기계의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별 마찰없이 지내며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도록 기호가 표준화되며 예측 가능하길 바란다. 상품화된 개인은 자신의 생명력을 소비와 투자 대상이라는 한정된 관계에서 경험하며 동료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고 말았다. 현대 문명은 사람들의 고독을 깨닫지 못하도록 수동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완충제를 제공한다.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자동 인형은 결코 사랑하지 못하고 ‘인간 상품’을 교환하고 공정한 계약을 희망할 뿐이다. 개인은 사랑과 결혼에서 팀의 정신과 상호 관용을 강조함으로써 고독감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으려고 한다. 이와 같은 그릇된 사랑은 신경증, 우상 숭배적인 사랑, 감상적인 사랑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의 개념은 소외된 성공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에 적합한 개념으로 변형되었다. 종교는 사업을 하고 있는 인간을 돕기 위한 자기 암시와 심리요법과 손을 잡는다. 사랑과 정의, 진리에 있어서 신과 하나가 된다기보다는 신을 사업상의 동반자로 삼으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의 실천

 사랑의 실천을 위한 훈련은 전생애에 걸쳐 정신 집중과 인내를 통해 실현할 수 있다. 정신 집중은 혼자가 되는 걸 의미하며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하는 능력을 갖기 위한 조건인 것이다. 사랑하는 능력에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성은 자아도취를 극복해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며 이성의 배후의 정서적 태도는 겸손이다. 사랑하는 능력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과 탄생, 자각의 모든 과정을 필요로 하며 이때 신념이 요구된다. 신념은 합리적이어야 하고 확실성과 견고함, 자신에 대한 신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또한 내면적인 활동, 즉 자기 힘의 생산적인 활동인 ‘활동성’과 공정성의 윤리(이웃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도 필요하다.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인 해결책으로서 사랑에 진지하게 대처하는 사람은, 만일 사랑이 개인주의적이며 주변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 되려면 우리의 사회 구조에는 중요하고도 철저한 변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책에서는 이같은 변혁의 방향을 암시할 따름이다. 

* 모성형에서 부성형으로 사랑을 나누고 부성형의 사랑이 더 성숙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성별 역할을 도식적으로 나눴을 뿐이라고 봄.
* 역설적 논리학에 따르면 일체성의 경험이야말로 사랑이 도달해야할 궁극적인 목표라고 했다. 하지만 결론도 두루뭉실하고 수련을 통해 도달하는 사랑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다.
* 심리학적 지식은 도구로 이용할 뿐이라고 했는데 에리히 프롬이 입증하려고 하는 사랑이란 것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비슷하지 않을까.

더 읽어보면 좋을 책

* 사랑, 그 혼란스러운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 철학, 심리학, 생물학, 뇌과학, 동물학, 사회학, 문화인류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사랑에 질서를 부여함.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 사랑, 결혼, 가족에 대한 에세이
* 개선문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 사랑이란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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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2-2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이거 보고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을 검색해서 장바구니에 넣었거든요. 책 링크 좀 걸어주면 안되요? 순전히 아치님 덕에 사게 되는건데 땡투 하고 싶어서요.
[사랑, 그 혼란스러운]을 읽다 포기하고 방출한 저로서는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잘 읽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Arch 2012-02-22 13:35   좋아요 0 | URL
ㅋㅋ 다락방님~ 리뷰에는 책이 안 들어가요.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사랑, 그 혼란스러운 보다 별로였는데... 적극 추천 목록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지운 페이퍼를 어떻게 살린담.

다락방 2012-02-22 13:46   좋아요 0 | URL
아..리뷰에는 책이 안들어가는군요!!!!!

Arch 2012-02-22 14:01   좋아요 0 | URL
다른분께 양보할게요. 아까워라...
이럴때 짠하고 다락방님께 다른 책을 추천하면 좋으련만.

다락방 2012-02-22 14:32   좋아요 0 | URL
안살래요.. ㅎㅎ

Arch 2012-02-22 14:34   좋아요 0 | URL
ㅋㅋ 재미있다. 다락방은 책 줄인대매~

머큐리 2012-02-22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선문에 사랑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있었군요... 읽었는데 나는 왜 지나쳤을까요...^^;;

Arch 2012-02-22 14:07   좋아요 0 | URL
섬세한 묘사가 아니었나, 우선 의심 먼저 하고.
몇년 된거라 생생하진 않지만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어쩌면 사랑에 대한 섬세한 묘사라기보다는 뭐랄까, 연인 사이의 감정의 진폭, 흐름, 혹은 심리게임에 홀딱 반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