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후 복학생 신분으로 맞은 첫 학기, 그러니까 199*년 봄부터 초여름 사이 희한하게도 매주 화요일마다 비가 내렸다. 당시 전공부터 교양까지 커리를 화·수·목·금 나흘에 몰아넣고 주말과 월요일 내리 사흘을 놀고서 거의 폐인 상태로 등교하던 화요일마다 비를 맞으면서 허 거참 요상하다 궁시렁대기 일쑤였기에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팩트다.
재작년부터인가 추석 다음 날이면 잔뜩 흐렸다가 기어코 비를 뿌린다. 식구들 처가에 두고 먼저 귀가 후 이런저런 소일하며 쉬다가 큰빨래 해치워 널고 나면 그때서야 꼭. 젊어선 이게 다 생활의 잔재미, 낭만일 수도 있으려니 넘기던 일들에 짜증 넘어 역정이 나는가 하면 또 금세 시무룩, 허무해진다. 이젠 내게 남겨진 시간들이 지나온 세월보다 적음을 무의식 중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려나 싶기도 하다.
저자가 누구였더라. 구로사와 아키라였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였나. 달포 전 읽은 책에 따르면 일본 민간신앙에 삼도천에서 돌을 쌓는 죽은 아이의 혼령 이야기가 나온다. 어려서 죽은 아이가 부모를 공양하겠다고 돌탑을 쌓는데 쌓아도 쌓아도 무심한 도깨비들이 그 돌탑을 무너뜨려 끝없이 되풀이한다는. 자연스레 시지프스 신화가 연상됐다. 아마 이런 신화 혹은 설화의 전형이 나라 별로 하나 씩은 다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어떤 영화에서 '진짜 절망은 늘 헛된 희망을 동반한다'라던 대사가 유행했었다. 그때 나는 그 명제가 일면 겉멋 들린 언어도단이라 여겼다. '기대'가 들어갈 자리에 '희망'을 슬쩍 바꿔 넣은. 섣부른 기대는 실망과 낙담을 지나 절망과 재앙의 짝패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 허나 알베르 카뮈의 희망론을 지지한다. '희망은 우리가 믿는 것과는 반대로 체념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삶을 체념하지 않는 것이다.' 내게 희망이란 없기보다 있어서 좋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