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는 숲, 숲으로 가자 - 어머니 약손처럼 찌든 삶과 아픈 몸을 어루만진다
윤동혁 지음 / 거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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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좀의 역사는 길다. 중학교 3학년쯤에는 걷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여 용인 근처에 있는 유명한 '문둥이 약국(병원?)'이라는 데도 가서 약을 지어오고 뽕나무를 태운 잿물에 발을 담가서 무좀을 치료하기도 했다. 

그후 몇십년 동안 내 몸의 일부처럼 달고 산 게 무좀이었다. 그러다가 4~5년 전에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고 독하다는 약을 몇개월 먹었더니 그럭저럭 낫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왼쪽 엄지 발톱 주변이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절뚝거릴 정도는 아니었으나 걷는 데 불편하고 계속 신경이 쓰여 우울해질 정도였다. 이번에는 다른 피부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치료약이 독하다하여 간검사까지 받아가며 3~4개월 치료를 받았으나 증세가 호전되지 않자, 의사도 더 이상의 치료는 권하지 않았다. 

3~4년 전부터 한여름에는 샌들을 신고 지내다가 작년부터는 본격적으로 6월부터 9월 말까지 스포츠 샌들만을 착용했다. 양말은 아예 신지도 않았다. 어디를 가건, 심지어 해외 여행을 가도 그 샌들차림 그대로였다. 그리고 퇴근할 때는 특별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 경우 집근처의 생태공원을 한 시간 정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생태공원은 흙길이어서 걷기에는 최상의 조건인데 때때로 마른 갯벌길을 맨발로 걷곤 했다. 

올 여름 어느 날 문득 발을 내려다보고 발톱이 깨끗해진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무던히도 속 썩히던 무좀이 다 나은 것이다.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바로 맨발과 흙길이 아니었을까? 

흙길을 걷고 맨발로 걷게 된 건 바로 이 책 <나를 살리는 숲, 숲으로 가자>을 통해서였다. 반신반의하면서 하는 둥 마는 둥이었는데 그래도 그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 책에 소개된 사람들처럼 적극적으로 숲에 들어가 한뎃잠을 자거나 맨발 산행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건 모를 일이다. 몸이 더 망가져서 의사도 포기할 정도라면 전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이 책에 소개된 아토피 환자들의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다. 자연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호전된다고 하지 않는가. 딸아이도 아토피는 아니었지만 건선 비슷한 피부염으로 1년 동안 고생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치료법은 별 게 아니었다. 해로운 음식 삼가고 몸에 있는 나쁜 것들을 사우나와 반신욕으로 배독하고 약간의 한약을 복용하는 게 전부였다. 물론 여러 명목으로 치료비는 2~3백 만원 들어갔었다.  

숲으로 들어가자. 흙길을 맨발로 걷자. 이 단순한 진리가 우리를 구원한다, 고 이 책은 열변한다. 무좀을 완치한 기념으로 다시 읽자니 그 단순 명쾌한 처방이 새록새록 다가온다. 벗자! 벗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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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아시아 - 24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찾아가다
안진헌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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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안진헌을 알게된 건 2003년으로 방콕-앙코르-베트남을 단체 배낭으로 여행할 때였다. 그는 우리팀의 길잡이였다. 그에 대한 인상은, 절대로 화를 내지 않을 것 같은 온화하고 감성적인 사람으로 기억된다. 어찌보면 그는 여행 가이드라는 일이 썩 잘 어울리면서도 좀 아까운 사람이다. 이후에 내가 만나본 이러저러한 여행 가이드들과 비교할 때 말이다. 

언젠가는 그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공저가 아닌 단행본으로.  

이 책은 그의 성품처럼 잘 절제되어있다. 품위있다. 그러나 여행자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에피소드 같은 것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약간 아쉽긴하다. 분명 이런 쪽으로 한 권 이상의 분량을 책으로 낼 수도 있을 텐데...다음 책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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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인도 북부 기행문


*기간: 2010년 7월 22일 ~8월 9일(18박19일)

*일정: 델리(1)-버스(1)-마날리(2)-사추캠프촌(1)-레(4)-알치(1)-카길(1)-소남마르그(새벽1시까지)-스리나가르(1)-델리(1)-비행기(1)-홍콩(2)-비행기(1)


1.가 근무하는 학교 신문에 실을 예정으로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기행문을 썼다. 마치 방학 숙제하는 기분으로 말이다. 내가 늘 대하는 중학생 아이들은 숙제와 공부를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절대로 숙제를 공부라고 여기지 않는다. 숙제는 그저 매일 교복을 입고 정해진 일정대로 등교해야하듯, 해치워야할 의무 사항일 뿐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선생인 나 역시 그렇게 받아들인 지 오래되었다. 물론 매번 숙제를 내줄 때마다 살짝살짝 아이들을 속이고 나 자신을 속일 뿐이다. 그런 숙제를 늘 부과하며 선생으로서의 위치를 겨우 유지하고 있다가 모처럼 의무사항으로서의 글을 써보았더니 과연 숙제는 숙제일 뿐이라는 사실을 통감하게 되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독자를 상정하고 독자의 이해 수준과 흥미 수준, 집중력 유지 시간을 고려하여 -마치 수업 지도안 짜듯-사진까지 몇 장 곁들여 쓴 글이었지만 아무리 읽어보아도 글에 흥이 실려 있지 않았다. 내가 하는 수업도 이 모양일까, 하는 생각이 더해지면서 자괴감마저 들었다.

일단 기행문을 완성하고 몇몇 친구와 지인들에게 메일로 그 글을 보냈다.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다.


·친구1(37년 지기): 야, 새로 써라.

·친구2(요즘 들어 새로 친해진 옛 친구): 지난 번 같이 맛깔스럽지 않지만...(재미가 없더라)

·친구3(대학 동창): 네 글이 끊겨서 내 컴퓨터가 고장 난 줄 알았다.(그게 전부야?)

그러나 딱 한 사람,

·지인1: 예전의 기행문보다 이번 글이 훨씬 흥미로웠다.


‘흥미로웠다’는 지인은 연전에 이미 이 인도 북부 지역을 다녀온 분이었다. 이분은 얼마 후 휴대폰 문자로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내왔다. ‘...히말라야가 삶의 지침을 돌려놓을 만큼의 자력으로 날 뒤흔들었던 기억...결국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이런 분이었으니 히말라야라는 단어만 들어도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난 지금도 ‘차도와 인도’라는 말만 들어도 ‘사람이 다니는 길’이란 뜻의 인도를 내가 늘 그리워하는 인도로 여과해서 듣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그 심정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지인에게는 그렇게 의미가 있는 기행문이었건만 한 번도 인도를 다녀오지 않은 내 친구들을 위해 결국 기행문을 새로 쓰기로 했다. 친구들아, 고마워!


2. 또 인도냐구?

난 2008년 1월, 인도의 우다이푸르를 여행할 때였다. 헌책방에서 책 한 권을 놓고 주인과 흥정을 하게 되었다. 시종 무표정한 주인의 눈빛을 살피며 살살 가격 흥정에 들어갔으나 여간해서 책값을 깎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툭 던져보았다. “당신이 이 책을 깎아주면 내가 또 인도에 오겠다.” 주인 왈, “그래? 인도에 몇 번이나 왔었는데?” 순간 주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번이 네 번째다.” 그렇게 해서 깎은 돈은 50루피. 우리 돈으로 1,300원 남짓. 인도에선 참 악착스러운 인도인을 닮아가기도 한다. 하여튼 그 서점 주인과의 약속 아닌 약속이 늘 마음에 남아있었다. 그래, 난 소심하다구!!!

작년에 <인도소풍>이라는 인도전문여행사에서 인도기행문 공모전을 열었다. 이러저러한 일로 그곳을 드나들었던 인연도 있고, 공모전에 대한 반응도 영 시원치 않아보여서 도움이 될까하고-왜 있잖은가. 식당에 사람들이 들끓어야 들어갈 맛이 나지 않은가-응모를 하게 되었는데, 워낙 응모자가 적었던 터라 입선을 하게 되었다. 상금으로 10만원을 받고 보니 무척이나 송구스러웠다. 빚진 기분마저 들었다. 그 빚도 갚을 겸, 그래 이번엔 이 여행사 상품으로 여행가보자, 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래, 난 나름 깔끔하다구!!!

우리 가족은 뭘 구입하고 싶을 때 미리 노래를 부른다. 수차례 노래를 부르다보면 자연스레 구매리스트에 올라가 어느 순간 그 물건을 구입하게 된다. 그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사실은 나도 늘 그렇게 노래를 불렀다. “내 언젠가 히말라야 5,000m 까지는 올라가봐야지.” “인도는 늘 겨울에만 갔었는데 언젠가 여름 인도를 맛보리라.” 기도와 다름없는 이 노래 덕분이었을 게다. 다시 인도에 가게 된 것이.


3. 델리

난 지금까지 부산에는 두 번 갔었다. 그런데 델리는 네 번째이다. 그렇다고 델리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이상한 게 기행문도 처음 간 곳에 대해선 할 말도 많고 쓸 말도 많으나 같은 장소를 여러 번 다녀오면 입도 조심스러워지고 무거워진다. 재미도 덜해진다. 재미가 덜하다는 건 기행문을 쓸 때 암초와 같은 것이다.

델리는 지금 말 그대로 공사 중이다. 무슨 세계적인 행사를 치를 준비 중이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온통 공사장이다. 거지도 눈에 띄게 줄었다. 예전에 비해 거의 없는 수준에 가깝다. 한마디로 수도다운 면모를 갖추기 위해 여기저기 뜯어 고치고 새로 짓고 있는 중이다. 대부분의 대도시들이 그렇듯 델리도 현대화와 세계화의 물결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행자의 어설픈 시선으로 보아도, 선발 주자와의 뒤떨어진 거리를 줄이기 위해 애쓰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일 정도이다. 중국의 변화가 무섭듯 인도의 변화 또한 그에 못잖은 것 같다.

힌두교 신자임을 상징하는 미간에 찍는 빈디를 한 사람들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인도에 처음 갔을 때, 사람들의 이마에 곤지처럼 찍힌 빈디를 보고 그들의 신앙심이 그 붉은 점 하나로 드러나 보였다. 아무리 남루한 옷을 걸쳤어도, 아무리 화려한 사리를 입었어도 그 붉은 빈디 하나로 드러난 그들의 신앙심에는 빈부의 격차를 느낄 수 없었기에, 내 딴에는 인도의 상징과도 같은 부호로 여겨졌었다. 언제부턴가 서서히 진행되었을 그런 변화를 이제야 감지하게 된 것은 무얼까? 이제야 인도가 보이기 시작하는 걸까? 재미가 덜해진 탓일까? 신혼 시절이 지나야 상대방의 진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듯 말이다.



하여튼 델리의 눈부신 변화는 당혹스럽다.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가 없다.


4. 마날리

우리가 한여름에 휴가를 보내기 위해 강원도로 몰려가듯 인도 사람들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인도 북부에 위치한 마날리로 간다고 한다. 우리도 델리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마날리로 향한다. 델리를 벗어나 산악 지역에 접어드니 일단 무더위를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딸아이가 몹시 괴로워한다. 멀미 때문이다. 강원도 홍천과 양양을 수도 없이 드나들어서 이젠 이력이 날만도 한데 연거푸 빈속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이제 겨우 여행 초반인데 어쩌나, 걱정부터 앞선다.

거의 언제나 우리 가족끼리 하던 여행을 오랜만에 낯선 사람들 속에 섞여 단체 여행을 하게되다보니 어딘지 불편하고 낯설기만 하다. 차량 수배나 호텔 숙박 같은 문제가 일단 해결되어 큰 걱정거리는 줄었으나 그만큼 여행이 가벼워졌다고 보기도 힘들다. 우리 가족을 제외한 13명의 일행과 길잡이 아가씨 한 명, 또 다른 조직이다. 늘 조직 속에 몸담고 있는 삶을 진저리치건만 여행조차도 조직을 벗어나지 못하다니. 물론 내가 선택한 여행법이긴 하지만.

작년 초 까지만 해도 2인실 호텔에서 세 식구가 자는 데는 별로 불편한 게 없었다. 물론 중간에서 자는 딸아이의 발이 침대와 침대 사이에 끼이는 일도 있지만 그래도 잘 만했다. 그러나 이제는 딸아이가 나보다 덩치가 커진 탓에 일인용 침대를 함께 쓰기에는 무리가 있다. 내가 아무리 체구가 작은 미래형 인간이라 해도 말이다. 결국 나는 김제에서 온 내 연배의 임씨 아줌마(초등학교 병설유치원 교사)와 잠잘 때만 한 방을 쓰기로 했다. 나 혼자 떠나왔다면 아마도 나는 이 분과 더 친해졌을지도 모른다. 이 분은 워낙 붙임성이 좋은 분이었고 나도 사람을 새로 사귀는 것을 어려워하지는 않기에 아마도 죽이 잘 맞았을 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에게도 좀 미안하다.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산세 수려하고, 계곡물 시원하게 흐르고, 기온도 적당히 선선한 이곳 마날리는 본격적인 히말라야 여정을 위한 전초기지와 같은 곳이다. 고산증에 대비한 고산증약도 이곳에서 복용하기 시작한다. 해발 2,050m라고 하지만 급하게 뛸 일이 없는 이상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용기와 담력을 시험할 겸, 산중턱에 자리 잡은 바쉬쉿이라는 온천 마을을 걸어서 올라가기도 하고, 올드 마날리와 신시가지를 잇는 비 내리는 산림구역지역을 바람막이 자켓 하나로 버티며 통과해보기도 한다. 여행 초반의 이 무모한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 채 말이다.

하나 더. 이곳 마날리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인도와는 많이 다르다. 델리에서 인도 냄새를 맡을 수 없듯이 이곳 역시 그렇다. 그저 휴양지일 뿐이며 관광지가 그렇듯 이곳도 물가가 농담처럼 출렁거리며 여행자를 우울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지로 오지로 향하는가 보다. 빨리 오지로 떠나고 싶다.


5. 달리고 달리고.....사추 캠프촌

6명, 6명, 5명씩 세 대의 지프차에 나눠 탔다. 우리 차의 맨 앞자리에는 60대 중반의 베토벤 아저씨(파마한 머리 스타일이 베토벤을 닮았고 귀에 보청기도 껴서 일행 중의 어떤 분이 붙인 별명이다)가 앉고, 전남에서 온 백씨 부자(컴퓨터 교사와 대학생인 아들)는 뒷좌석, 그리고 우리 세 식구가 가운데 좌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가운데 좌석 중 1인용 좌석에는 딸아이가 앉고 2인용 좌석에 나와 남편이 앉아 가게 되었는데 이때 끼다시피 했던 허리가 이내 아파오기 시작하더니 근 일주일 이상을 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달려간다. 자동차는 더 높이 더 높이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며 순식간에 고도를 높여가며 산으로 산으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아랫배에 신호가 온다. 차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는 산길에서 화장실이 되어줄 적당한 나무를 물색하며 아우성치는 뱃속의 신호를 지긋이 눌러보지만 어디 이게 이성적으로 다스려질 일인가. 드디어 차가 멈췄다. 다시 시동을 걸려면 한참 걸릴 모양이다. 급히 차에서 내려 산으로 기어 올라가 해결하고 나니 다시 세상이 살 만해진다.

한 알씩 나눠준 고산증 약을 먹었으나 머리가 갈수록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오르려면 금방 숨이 차오른다. 이렇게 고산증의 정체를 파악하며 적응하고 있을 무렵 딸아이의 안색이 심상치 않다.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이내 먹은 걸 토해낸다. 아침밥이라고 먹은 것도 별로 없는 상태여서 맑은 물만 게워낸다. 안타깝지만, 토하고 나면 괜찮아 질 거야, 말 뿐인 위로를 한다. 내가 엄마 맞나?

도중에 낙석으로 인해 두 어 시간 차량들이 정체를 했는데 그 모양이 꼭 휴가철 영동고속도로와 흡사하다. 이 고산 지대에선 길이라고는 이것뿐인데 어쩌라구...그렇게 히말라야 산자락을 돌고 돌았다. 낄롱(해발3,350m)과 달차라는 시골 마을을 지나고 해가 지기 바로 전에 도착한 곳은 오늘의 목적지인 사추였다.

고산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분지에 자리 잡은 이곳은 말 그대로 텐트 수십 동으로 이루어진 캠프촌이다. 텐트는 생각보다 훌륭하다. 침대는 물론 수세식 변기까지 딸린 원룸이다. 변기 옆에는 간이수도 시설까지 갖추어서 간단하게나마 씻을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 웬 호사인가 싶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이 험하고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고산에서 수세식 변기까지 딸린 텐트라니...

다행히 저녁밥과 아침밥이 포함된 여행 상품이라서 두 끼는 고민하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밥이라야 저녁으로는 라면 스프맛이 나는 이름 모를 스프와 인도식 카레밥이고 아침엔 토스트 몇 조각과 계란 오믈렛이 전부지만 이 산중에서는 그나마도 고마운 일용할 양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딸아이는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이나마도 거의 먹지 못했다. 이 밤을 어찌 보낼지...

춥다. 별들이 요란할 줄 알았는데 흐린 날씨 탓인지 그저 그렇다. 준비해온 내복을 껴입고, 거위 털 자켓도 걸치고, 양말을 신은 채로 잠자리에 든다.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이 완벽하게 해결되었다는 안도감에 잠이 달콤하다. 하늘 아래 척박한 산 밖에 없는 동네에서는 의·식·주라는 의미가 각별하게 다가온다.


6. 레(해발 3,505m)

자동차로 넘을 수 있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고개라는 탕그랑라(해발5,360m)에 드디어 도착했다. 한계령의 6배쯤 되는 높이지만 그 긴장감과 스릴은 수치를 비교할 수도 없는 아찔한 체험이다. 이곳까지 우리를 무사히 데려다준 제롱이라는 이름의 네팔인 운전수가 순간 아름다워 보인다. 물어보니 이번이 6번째란다. 우리야 평생에 한 번이나 가능한 일일 테지만 아직 젊은 그는 평생에 몇 번이나 더 이곳에 오르게 될까?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니 더 궁금해진다. 그의 평생 무사 안전을 기원한다.

고산증 약 탓인지 가는 곳마다 오줌이 마렵다. 흉가 같은 건물 뒤로 돌아가니 한 서양 아가씨가 일을 보고 있기에 몇 발작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바지를 내린다. 물론 그 아가씨에게 미소 짓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있잖은가, 깊은 동지애 같은 거.

우리가 탄 지프는 Ping(핑)이라는 평원지역을 바람을 가르며 시원하게 달린다. 모처럼 평지를 달리니 낭떠러지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잠이 솔솔 쏟아진다. 그러나 풍경 하나하나가 아깝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려가며 바깥 풍경에 마음을 쏟는다. 내 언제 이 풍광을 다시 접하리...


오후 점심 무렵. 드디어 라닥 지방의 중심지인 레에 도착했다. 호텔 Meridian에 도착해서 방을 배정 받고는 <아미고>라는 한국 식당으로 곧장 간다. 탈진 직전인 딸아이의 성화가 밉기는커녕 고마울 지경이다. 우리나라 텔레비전에도 한 번 소개된 곳이기도 한 이 식당은 이곳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의 아지트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역시나 한국인들이 들락날락한다. 모처럼 식욕의 의지를 보이는 딸아이를 위해 비빔밥을 주문했는데 우리보다 나중에 온 남학생들 밥이 먼저 나오는 것이다. 쪼르르 카운터로 달려가 항의를 하니 여주인이 사정을 말한다. 비빔밥은 밥을 새로 지어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노라고. 단순 명료한 그녀의 사정 앞에서, 그간의 딸아이의 상황을 몇 마디로 축약하자니 더 이상 말할 기운이 나지 않는다. 주인은 미안하다며 곶감을 예쁘게 썰어 담은 접시를 내밀며 먹어보란다. 주인의 친절이 고맙지만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딸아이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지고 삭아들고 있었다. 고통스럽게 밥이 나오기를 기다린 끝에 드디어 밥을 마주했지만 딸아이는 몇 숟가락을 겨우 먹고는 다시 식탁에 엎어진다. 나도 끝까지 밥을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놓았다.



이튿날. 곰파(사원) 순례에 나선다. 지프 영업도 지역별로 하게 되어 있는지 우리가 타고 왔던 지프는 돌아가고 이번에는 티벳인과 라닥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게 되었다. 사원을 호칭하는 단어는 종교 마다 다른데, 보통은 템플(temple), 이슬람에서는 모스크(mosque), 유태교에서는 시나고그(synagogue), 하는 식으로 이곳 라닥에서는 이러저러한 사원을 일컬어 곰파(gompa/gonpa)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절들이 산 속의 아늑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반해 이곳 곰파는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는 언덕 꼭대기 부근에 자리 잡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이 황량한 산악지역에 곰파의 존재는 경이롭기만 하다. 도무지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보이는 열악한 곳에 위치한 곰파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지탱에 주는 중심이 될 것이다. 몇 백 년 된 낡은 사원, 그 사원과 더불어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스님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을 동자승들. 이 모든 것들이 슬쩍 스쳐지나가는 여행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불현듯 눈보라 몰아치는 한 계절을 이런 곰파에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곳의 척박하고 황량함은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아무것도 없잖아> 바로 그것이다. 좀 인용해보면,
........

친 가시밭길을 지나                                                                              꼬박 석달을 왔지만
아무 것도 없잖어
푸석한 모래 밖에는 없잖어
풀은 한 포기도 없잖어
이건 뭐 완전히 속았잖어
소들은 굶어 죽게 생겼잖어
딱딱한 자갈 밖에는 없잖어
먹을 거는 한 개도 없잖어
이건 뭐 뭐가 없잖어                                                                               돌아 갈 수도 없잖어
.......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아직도 히말라야 산자락 어딘가를 끊임없이 걸어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레에서 3일째 되는 날. 이날은 판공호수를 가는 날로 일정이 잡혀있다. 새벽부터 딸아이가 고통을 호소해온다. 열이 나서 해열제를 먹여보지만 열은 내리지 않고 설사마저 난다. 겁먹은 딸아이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참담해진다. 옆에 있는 남편은 짐을 대충 꾸려놓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런 남편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나는 옆방의 길잡이를 데리고 왔다. 당연히 길잡이는 우리보고 이곳에 그냥 있으라고 한다. 길잡이가 돌아간 후 남편의 얼굴이 험악해진다. 어젯밤부터 부르퉁하게 있는 남편에게 말을 걸기가 싫어서 혼자 내린 결론이었는데 이 일로 해서 남편은 크게 화가 난 것이다.

어제 저녁에 시내 중심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이 가게 저 가게 기웃거리다가 남편을 어떤 가게에 홀로 남겨놓고 무심히 내가 앞질러 걷게 되었는데 이 일로 남편이 심드렁해져 있었다. 남편은 집안의 대소사에 대해선 거의 모든 것을 함께 하고 함께 나누는 것을 좋아하고 그걸 거의 원칙으로 삼고 있는데 반해 나는 좀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다. 예전에 학사편입이랍시고 또 다른 대학 공부를 도모할 때에도 부모님과 의논도 없이 저질러놓고는 나중에 등록금을 낼 때쯤 통보한 적 도 있었다. 남편은 옷을 살 때도 나와 함께 가서 옷 고르기를 즐기는 반면, 나는 나 혼자 가서 사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이런 성향은 분명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를 닮았다. 이 유전적인 결함을 남편은 절대 이해할 수 없으리라.

하여튼 호텔에 우리만 달랑 남게 되었다. 차라리 남편이라도 혼자 일행을 따라서 판공호수를 간다면 좋으련만 절대 그럴 사람은 아니고, 아이가 아프다보니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이 호텔에서 나흘을 묵어야만 했다. 할 일이라고는 딸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일밖에 없었다. 화가 나있는 남편에게 말도 걸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자니 이런 고역이 없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구나 싶었다.

일행이 빠져나간 호텔은 썰렁하기만 했다. 다행히 우리 방은 전망이 좋아서 하루 종일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아침마다 텃밭에서 일하는 부지런한 사람들, 그 텃밭 주위에서 푸성귀를 얻어먹고 있는 송아지들, 멀리 그림같이 누워있는 앞산과 맑고 푸른 하늘, 고즈넉한 동네의 한가로운 모습. 이런 광경들을 보고 또 보았다. 그것 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고마운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 호텔의 매니저였다.

첫 날은, 뜨거운 물이 나오는 시간대가 따로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샤워를 하려고 보니 뜨거운 물이 안 나오는 것이었다. 당장 매니저한테 왜 뜨거운 물이 안 나오느냐고 따졌더니(내가 다른 건 몰라도 따지는 영어는 좀 한다) 정중하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내 요구대로 데운 물을 두 양동이 갖다 주었다.(그 후로 그런 부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호텔에 우리만 남게 되고 딸아이가 아픈 게 안 돼 보였는지 하루에도 몇 차례 딸아이의 차도를 살펴 주었다. 자신도 5년 전 뭄바이에서 왔는데 처음에는 산소가 15%부족한 이곳에 적응이 안 돼 고생이 많았다면서 물을 많이 마시라는 조언도 해주었다. 이 호텔에 머무는 한 어떤 도움을 청해도 친절하게 들어줄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하는 사람이었다. 직업상 미소를 입에 달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지금까지 내가 머문 호텔에서 이 매니저 보다 더 품위 있게 친절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직업상의 친절이라 할지라도 나는 이렇게 누군가에게 친절해본 적이 있던가? 객실이 20여개 밖에 안 되는 작은 호텔이지만 깔끔하게 잘 운영되고 있는 호텔임을 이 매니저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아, 그런데 이 매니저의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다. 작고 다부져 보이는 키에 검은 피부, 귀와 눈썹에는 피어싱을 한 20대 후반의 남자다.

호텔 매니저의 친절을 이렇게 과도하게 칭찬하는 것은 아마도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곳에서 나흘을 묵어보니 비로소 사람이 보이고 사물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한밤중 새벽에 깨어 조심스레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을 때의 광경을 내 잊지 못하리라.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볼품없는 산에 불과하지만 투명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초롱초롱한 별빛과 더불어 환상적인 실루엣을 그리고 있는 모습은 뭐랄까, 이 세상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상상 속의 외계가 이러지 않을까 싶었다. 고독한 아름다움에 마음이 시릴 정도였다.

일 년 중 4개월 밖에 외부인의 육로 통행이 허락되지 않는 곳. 왕래가 두절된 이곳의 겨울 생활은 또 어떤 모습일까? 이곳에서 한 철을 보내고 싶다는 강한 유혹에 시달린다.


7. 알치와 카길

드디어 떠난다. 이틀 연속 병원에 다녀오는 일 밖에 없던 무료한 시간을 얼른 밀어내고 싶었다. 그저께와 비슷하게 오늘도 곰파로 시작해서 곰파로 끝날 모양이다. 그 절이 그 절이듯 곰파 역시 그곳이 그곳처럼 보인다. 이젠 그만 봐도 아쉬울 게 없으련만 달리 볼 게 없는 동네인지라 마치 처음 가보는 것처럼 기대를 안고 사원 문에 들어선다. 역시 신심이 부족한지라 건성 건성이다. 법당에서 오체투지라도 해보면 훨씬 좋으련만 오로지 숨 고르기에 전력을 다 할 뿐이다.

하루 종일 바스고, 리끼르, 리종이라는 이름의 동네를 거쳐서 도착한 곳은 알치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세상에 이런 작은 시골 마을에 다 오다니! 개별 여행이었다면 정말 오기 힘든 곳이 이런 곳이다. 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대중교통으로 오기에 만만치도 않고, 숙박 시설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뭘 보러 여기까지 오겠나 싶은 작은 시골 마을이다. 그런데 그래서 마음에 드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물론 이곳에도 유명한 곰파가 있긴 하다. 특이하게도 이곳 곰파는 동네 한 구석에, 그러니까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유래가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곰파로 인도-티베탄 양식의 프레스코 벽화로 유명한 곳이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잠깐 이 곰파를 순례할 뿐 하루를 머무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음, 그런데 인도-티베탄 양식은 또 뭐지?

유장하게 흐르는 인더스 강을 배경으로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이 작은 마을의 특징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평화다. 이 보다 더 평화로운 동네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내 어릴 적 고향이 이랬던가. 딸아이도 조금씩 기력을 회복하고 있고, 우리가 머문 방은 이 지역의 전통 양식을 경험할 수 있는 최적의 방이었고, 티베트 전통 가면을 구입했고, 식당에서 모처럼 밥다운 밥을 먹었고, 동네 처자들을 위해 30kg짜리 가스통을 날라다 준 남편은 행복해했고, 이방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라닥인들의 표정이 평화롭기 그지없는 곳. 남편과의 그간의 갈등이 봄 눈 녹듯이 녹아버렸다.

다음 날. 또 달리고 달리는 날의 연속이다. 달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유명해진 라마유르. 역시 곸파도 있었다. 나름 유명한 곳인데 자꾸 신경이 지프로 향한다. 겨우 기운을 차리기 시작한 딸아이가 지프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달린다. 전 구역이 낙석 위험 구간이라 언제 어디서 어떤 돌멩이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안고 천길 낭떠러지 길을 오늘도 달린다. 드디어 오늘의 종착지 카길이다. 누군가의 글을 인용하면,


카길은 라닥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인도 파키스탄 정전선과 인접한 접경 도시다. 카길은 스리나가르와 레를 잇는 국도 중간에 위치한다. 잠무 카슈미르 주의 주도인 스리나가르에서 서쪽으로 204km, 레에서 동쪽으로 234km 떨어진 곳이다. 카길은 한 때 대상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현대에 들어와서는 국경분쟁이 일어나는 전쟁터로 아픔을 겪었고, 최근에는 중앙아시아와 인도 여행자들의 통행로로 이용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가 악화되면 전쟁터로 변할 수 있는 곳으로, 한마디로 위험가능지역이다. 그래 그런지 동네 분위기가 요상하다. 지리적으로는 라닥(주로 불교신자가 많음)에 속하지만 인구의 대부분은 시아파 무슬림이다. 7부 바지를 입고 있는 남편이, 반바지를 입은 다른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서 책을 펼쳐 보았더니, 이곳은 라닥의 다른 지역보다 보수적이니 반바지는 입지 말라고 점잖게 충고하고 있었다. 어쩐지 행인들의 눈빛이 인도의 여느 지역과도 다르더라.


8. 스리나가르 가는 길

(이 부분은 먼저 쓴 기행문에 있는 글임. 다시 써도 이 이상으로 나올 것 같지 않아 그대로 옮김.)

현재(2010년 8월 중순경)는 폭우 때문에 인도 북부의 마날리-레-스리나가르 구간이 폐쇄되어서 그 지역에 갇힌 여행자들의 안위를 걱정해야하지만, 불과 일주일 전에는 카시미르 지역의 분리투쟁 때문에 여행자들의 발이 묶인 상태였다.  

이 신문을 전해준 나이 지긋한 주인은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 아무런 관련도, 아무런 힘도 없는 한낱 여행자인 우리에게 카시미르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면서 이 신문을 가져가라고 했다. 사진이 많이 실린 왼쪽 신문만 가져간다고 하니 "Only one?"하며 서운한 기색을 보이기에 읽지도 못할 오른쪽 장과 몇 장을 더 가방에 챙겨 넣었다. 

장례식 행렬과 바리케이드가 처진 거리, 저항 수단이라고는 돌멩이 밖에 없는 시민들.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경찰과 군인들...80년의 광주민중항쟁을 지나온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아니 좀 싱거운 사진인데도 카시미르인인 이 주인은 시종 목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나라에서는 화염병을 던지고 경찰은 물대포를 쏜다고 한수(?) 가르쳐 주었다. 그나저나 60여 년간 분쟁의 와중에서 말 못할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대체 얼마나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역지사지로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참혹한 삶일 것이다. 

7월30일부터 시작된 스트라이크(그곳 사람들은 이런 시위를 이렇게 불렀다)로 21명이 죽었다고 방송에서는 떠들고 있으나 실제는 35명 이상이 죽었다고 주인은 주장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인 그의 어린 아들은 두 달째 학교가 폐쇄된 상태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이런 나라가 싫어서 미국, 호주, 캐나다 등지를 떠돌다가 돈을 벌어서 늦게 정착한 이곳이 이런 곳이라며 오직 카시미르의 독립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는 주인의 상기된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No Pakistan! No India!를 부르짖는 그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이 지역의 스트라이크 때문에 우리 일행이 이 스리나가르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레에서부터 우리의 지프차를 운전하던 운전기사들은 두 명이 티벳인, 한 명은 라닥인이었는데 이곳 특유의 인종간의 갈등으로 스리나가르의 진입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실제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지는 지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스리나가르에서 두 시간 거리인 소남마르그라는 곳까지 이 운전기사들이 우리를 데려다주고 그곳에서부터는 카시미르인들이 운전하는 지프차로 갈아타게 되었다. 

소남마르그에서는 동네 분위기부터 심상치 않았다. 외국인들이 한무리로 몰려 있으면 극히 위험하다고 하여 우리는 일단 차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언제 떠날지 모르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두 명씩 혹은 세 명씩 짝을 이루어 차에서 빠져나와 근처의 호텔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호텔에서는 방 세 개에 17명이 되는 사람들이 적당히 한 무리씩 들어갔다. 전체적인 상황이나 분위기는 험악했으나 그리 긴장감은 없었다. 분쟁 지역에서 살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런 여행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가. 이런 상황에 담담한 내가, 대담한 건지 겁이 없는 건지는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민방위 훈련을 받아온 덕이라고나 할까. 분명 쇼는 아닌데 그것 참...하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새벽 1시에 출발 명령이 떨어졌다. 가는 길이 험하지는 않은데 군데군데 도로에는 돌무더기들이 한아름씩 떨어져 있었다. 저항군과 진압군이 대치된 상태에서 지나간다면 저 돌을 피할 수는 없었으리라. 이런 통행금지 상태를 이들은 curfew라고 불렀다.

이 통행금지 때문에 이곳을 벗어나는 일도 쉽지 않았다. 6시에 아침을 먹고 7시쯤에 지프차에 올라 스리나가르 공항을 향해 출발했으나 공항 진입까지는 또 한참을 도로 위에서 기다려야했다. 오후 3시경에 출발하는 델리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아침 일찍 서두른 것은 우리뿐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스리나가르 하우스보트에서 꼼짝없이 사흘간 갇혀 있다가 새벽 2시에 공항에 왔다고 한다. 겨우 하룻밤 묶은 우리도 몸살이 날 지경이었는데 그들의 기분이 어떠했을 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 일이었다.   

지상 낙원이라는 스리나가르의 옛 명성이 회복되는 날을 볼 수 있으려나.


참고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8111810021001


스리나가르편을 그대로 옮기다보니 하나 빠진 게 있다. 드라스(Drass)라는 곳이다. 카길에서 하룻밤을 묵고 스리나가르로 향하던 중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들렀던 곳이다. 여행안내서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이곳 역시 카길과 마찬가지로 1999년 인도·파키스탄 분쟁 시 파키스탄군의 폭격을 심하게 입은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두 번째로 추운 주거지역이라고 한다. 그런 내용을 적은 커다란 입간판도 도로 한 옆에 있다.


일행과 점심을 먹은 후 차를 마시러 들어간 길옆의 식당에서 한 노인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의례적인 질문이 몇 차례 오간 후 남편이 나이를 물어보라고 한다. 온 얼굴에 깊게 주름살이 잡혀있고 머리도 거의 반백인 걸로 보아 내 나이쯤 되어보였다. 그런데 37세란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어보았다. 역시 37세란다. 남의 나이를 물어보았으니 나도 내 나이를 말할 차례다 싶어 내 나이를 말해 주었다. 나이를 말해주고는 잠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너무 늙어보여서.

움푹 들어간 눈으로 멀뚱히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한마디 더 던져본다. 이곳이 춥다고 하는데 도대체 얼마나 춥냐고 물어본다. 영하 45도까지 내려간단다. 다시 확인해본다. 정말 45도냐고. 그렇단다. 겨울에는 시베리아란다.

머리에 염색을 하지 않길 잘했다. 꼭 내 나이만큼 들어 보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더 늙어 보인다면? 할 수 없지.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까? 새삼 고민되네.


9. 마치며

겨우 기운을 되찾은 딸아이에게 물었다.

“공부가 어렵니? 여행이 어렵니?”

딸, “여행이 더 어려워!”



(2010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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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안 걸리는 장 건강법
신야 히로미.이사자와 야스에 지음, 나지윤 옮김 / 살림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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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건강 서적을 읽어보지만 한 줄의 서평이라도 끄적거려보는 책은 많지 않다. 특별히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참고할 만한 내용이 들어있는 괜찮은 책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 요리에 관한 책 역시 서평하고 싶지 않은 책 중의 하나다. 

그런 중에 모처럼 이 책에 대해서는 한마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실천 가능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자기의 몸을 자신의 손가락을 가지고 마사지 해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잠들기 전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는 스트레칭조차 귀찮아서 못한다. 손끝 하나 까딱하기 싫은 사람에게도 누워서 하는 이 장 마사지는 한번 시도해볼 만한 건강법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어떤 것을 챙겨서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책에는 장 마사지와 더불어 섭생에도 신경을 써야한다고 나와 있다. 세 가지를 강조하는데, 1) 효소 먹기, 2)현미밥 먹기, 3)생수 마시기 등이 있다. 모두 실천 가능한 내용이라 부담스럽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변비로 고생한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며칠간 실험해본 결과 배변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남 한테 의지하지 않고 내가 내 몸을 보살필 수 있다는 게 그 무엇보다도 좋다. 별 볼 일 없는 내 몸뚱아리지만 복부를 여기저기 만지다 보면 그동안 너무나 무심하게도 홀대해왔다는 생각마저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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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아시아 - 24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찾아가다
안진헌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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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도 않고 쓰는 40자평. 오랫동안 이 책을 기다렸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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