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대충 합리적인가 - 인간의 속마음을 풀이한 현실 경제학
조준현 지음 / 을유문화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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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뭐를 먹을까, 이번에는 어떤 화장지를 주문할까, 내일까지 동네 슈퍼 원 플러스 원 세일이던데. 이미 그 안에 있으면서 경제학은 나와 관계가 없는 분야라 여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선택하면서, 돈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아가기 어려우면서. 왜 나와는 동떨어진 영역이라 간주한 걸까.

마음은 없으면서 돈으로만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다니! 이 자본주의적 인간 같으니라고!’ 드라마 속 대화에 고개를 끄덕인다. 자본과 마음은 정반대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물질만능주의의 극단이 아니라면 마음 가는 곳으로 발걸음이 향하듯 돈을 포함한 물질도 그렇게 흘러가는 게 아닐까.

사람은 왜 대충 합리적인가는 경제와 관련하여 사람이 그런 선택을 하는 이유를 풀이한 책이다. 경제학의 한 분야인 행동경제학을 연구한 학자들과 이론을 소개한다. 다양한 사례를 분석하며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본질을 성찰한다.

 

경제 분야의 심리학 저서를 읽는다는 착각이 들 만큼 흥미롭다.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경제뿐 아니라 정치, 문화, 역사, 교육, 예술, 사회적 현상 등 인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이라는 것.

어떻게 선택하면 더 행복해질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저자는 선택의 목적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학이 성찰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이기심과 합리성을 지니며 자기 이해가 잘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이상기체처럼 이론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합리적이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한다. 현실에서의 경제인은 때때로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그럭저럭 합리적인 존재다. 작가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정보가 제한적이고 확률적으로 행동하는 게 어려우며 확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여러 가지 경제 용어와 실험과 게임이론과 효과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용어는 휴리스틱이다. 주먹구구식 행동, 어림짐작으로 행동하기, 대충 선택하기 등의 의미이다. 여러 사례의 통계를 보면 얼핏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들이 많다. 잘못된 편견, 고정 관념, 이용하기 쉬운 정보를 더 많이 이용한다는 것, 마지막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아 보인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옳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휴리스틱으로 인해 바이어스라 부르는 편향이 나타난다.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다든지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손실이 두려워 지금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

확률이 주어질 때 사람들이 어떻게 전망하며 선택하는가 설명하는 프로스펙트 이론도 흥미롭다. 낮은 확률일수록 위험성을 선호하고 높은 확률에서는 위험성을 회피한다는 것, 이익에 대해서는 위험기피적이고 손실에 대해서는 위험선호적이라는 것, 낮은 확률에서는 확률을 과대평가하고 높은 확률에서는 확률을 과소평가한다는 것, 준거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소비와 관련된 내용은 구체적인 우리의 일상과 연결된다. 상황에 따라 달리 계산한다는 것, 한계 효용이 나의 소비를 결정한다는 것, 주어진 조건에 따라 선호가 달라진다는 것, 자신이 선택할 때의 선호와 다른 사람에게 팔 때의 가치 평가가 반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례들을 보며 과거의 경험을 떠올린다.

마케팅하는 사람이 참고하면 도움이 될만한 이론도 있다. 어떤 대안을 제안할 때 대비되는 다른 대안을 함께 제시하면 내가 원하는 대안을 상대가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유인 효과와 타협 효과까지 읽으니 살짝 소름이 돋는다. 아뿔싸! 가전제품을 고를 때 판매 직원이 보여준 제품들이 의도한 선택을 이끌기 위한 상술이었다니!

한계 효용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총효용을 계산하는 과정이 이해가 안 되어 비전공자의 한계를 느낀다. 당최 기초가 없어 인터넷에 나오는 공식에 대입조차 되지 않아 슬그머니 포기한다. 결과 해석만 직관적으로 받아들인다.

 

과학자들은 무질서해 보이는 자연 현상을 관찰하여 규칙적인 패턴을 찾는다. 무지한 나는 법칙과 원리를 발견하고 체계화하는 건 주로 자연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줄로만 착각한다. 사회과학도 못지않게 많은 법칙과 원리와 현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경제학에도 많은 수식과 그래프와 확률이 등장하니 수학의 비중도 만만치 않다.

경제학은 선택의 학문이고 선택의 목적은 나의 행복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하는 선택이 가장 합리적인 이유다. 사례를 제시하는 저자의 질문에 답을 하며 책장을 넘겼다. 나를 가리키는 화살표를 건네받은 기분이다.

인간이란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 존재인가. 맞아, 맞아! 맞장구치게 되는 원리,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 버린 이유에 대한 가시적인 해석. 대단한 통찰이다.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 나도 모르게 받았던 영향을 떠올리며 경제학자들의 열정을 가늠한다. 사람이 대충 합리적인 존재라고 하여 인간의 마음을 읽기 위한 노력도 대충 기울이는 건 아니니까. 어쩌면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에만 적용되는 건 아닌지 모른다.

 

 

p47, 2번째 줄: 공짜일가? ~?

p60, 밑에서 2번째 줄: 꼴지 꼴찌

p133, 4번째 줄, p141, 2번째 단락: 프로스텍트 ~펙트

p146, <5-3>제목: 최소극대화 최대극소화

p157, 중간: 1 > 2가 음수가 되면 부등호가 반대가 되어 < -2가 되는 것이다.

1 < 2 ~ -1 > -2 ~

p158, 2번째 단락: 100만원×0.1=10만원 < 200만원×0.8=16만원

100만원×1=100만원 < 200만원×0.8=160만원

v(100만원×0.1) > v(200만원×0.8) v(100만원×1)~

p158, 3번째 단락: v(100만원×0.1) v(100만원×1)

v(-100만원×0.1) v(-100만원×1)

p159, 6번째 줄: 위험에 대해서는 손실~

p186, 밑에서 2번째 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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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8-15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하게 독서하셨네요.

나비종 2023-08-15 22:50   좋아요 0 | URL
배경지식이 없기에 어려운 내용도 있어 책의 내용을 100%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책과 삶에 관한 짧은 문답 - 박웅현과 함께한 7번의 북토크 인티N 북톡 1
박웅현.인티N 지음 / 인티N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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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잘 지나왔어, 괜찮아질 거야.

삶에 지치고 사람에 지쳐 나를 찾는 이들에게 종종 말해왔지만, 반복은 조금씩 나를 지치게 했다. 단지 들어주고 몇 마디 말을 해줄 뿐이건만. 마음이 소모되기라도 하듯 점점 힘이 들었다. 스스로 태워서 내는 열기에 어느 순간 데일 것 같은 느낌이 엄습한다.

괜찮아, 잘 지나왔어, 괜찮아질 거야.

나도 같은 말을 듣고 싶었다. 글자라도 괜찮다라는 문장은 친근한 친구가 건네는 말처럼 따뜻하게 마음을 보듬어주니까. 뻔한 얘기라도 거울을 보듯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다. 적절한 거리에서 다른 온기를 쬐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책과 삶에 관한 짧은 문답2022년에 출간된 박웅현의 저서문장과 순간에 관한 7번의 북토크를 엮은 책이다. 1부에서는 책과 삶에 대한 포괄적인 질문 10가지가 담긴다. 2부에는 삶을 향한 구체적인 질문 23가지가 실린다.

제목이 에 관한 문답이라도 내용의 무게중심은 에 있다. 저마다의 삶에서 안고 있는 문제는 고유 명사이겠지만 많은 이들이 안고 있는 보통 명사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삶과 연결되니 당연한 치우침이다.

저자의 말은 한 편의 시로 읽힌다. 적절한 생략으로 만들어지는 함축미와 출렁이는 문장으로 전해지는 생생한 리듬감이 그의 문장의 장점이다.

 

마을에 현명한 어르신이 계신다면 진지하게 여쭙고 싶은 질문들이 방출된다. 어디서 들어보거나 선뜻 답하기 어려운 궁극적인 질문이다. 그의 문장은 명쾌해서 좋다. 15초 광고처럼 메시지가 명확하다. 애매모호하게 답을 흐리지 않고 자신만의 답을 제시한다. 저자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인다.

세상 모든 책에서 말하는 좋은 이야기를 가장 짧게 줄이면 지금, 여기.’라는 말, 몸으로 읽는다는 말, 몸을 바쁘게 움직일 때 오히려 머릿속이 비워진다는 말, 행복은 어떤 조건이 아니라 삶의 태도의 문제라는 말, ‘바람노력이 더해지면 희망이 된다는 말, 좋은 책을 고르는 첫 번째 기준은 자존이라는 말, 힘든 일이 있을 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좋은 일이 있을 땐 평생 처음 보는 것처럼.’ 마음에 남는 내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삶이 정갈해지는 듯하다.

 

누군가 같은 질문을 한다면 몇몇 질문에는 나도 비슷한 답을 했을지 모른다. 저자가 말하듯 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으니까. 좋은 음악은 반복해서 들어도 좋다. 그의 문장으로 읽으니 나의 답을 확인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모든 판단은 각자의 몫이니 동의하면 받아들이고, 동의하지 않으면 흘려보내면 그만이다.

몇몇 전작이 준 저자에 대한 믿음이 있다. 이 책을 구급상자인 양 한동안 가방에 넣고 다닌다. 언제라도 책장을 펼치면 나를 위로해 주리라. 바람은 곧 이루어진다. 말줄임표의 루프에 빠졌을 때, 책을 향해 마음을 여니 어느 순간 책이 열리며휘리릭 붕대가 날아든다. 괜찮아, 잘 지나왔어, 괜찮아질 거야. 뭉클한 온기가 마음으로 조금씩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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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 원자에서 인간까지
김상욱 지음 / 바다출판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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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우주정거장에서 바라보는 지구에 인간은 없다. 도시의 건물도 첨단 과학시설도 없다. 넘실대는 푸른 물결, 황토와 초록의 대지를 바탕으로 하얀 구름만이 소용돌이치며 유영할 뿐이다. 분명 존재하는데 보이지 않는다니! 초속 29.8km 정도로 공전한다는 지구의 소리가 들린다면 어떨까! 내 앞에 버젓이 물질이 보이는데 물질의 근원이라는 원자는 99%가 빈공간이라니 환장할 노릇이다.

대학에 비슷한 맥락의 내용이 등장하지만마음이 없다면 그렇다는 의미이니 이 경우와는 다르다. 두 눈 부릅뜨고 마음을 부라려도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아도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보이는 대상이니까. 뭐지, 이 익숙한 느낌은? 도덕경에 나온다는()’의 의미 아닌가! ‘()’의 형이하학 버전, 이 세상이다.

관점을 달리하면 세상은 형이상학 못지않게 신비롭다. 한 존재의 육체와 영혼을 별개로 생각하기 어렵듯 형이하학적 세상은 형이상학과 조화를 이루며 나를 둘러싼다. 도깨비님의 첫사랑처럼 시선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면 세상은 온통 아이러니투성이다. 알쏭달쏭 알랑말랑 애매모호 월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은 양자물리학자 김상욱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세상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 물리학의 경계를 넘어 다른 학문의 영역을 서성인다. 13개의 장에 걸쳐 기본 입자에서 원자로, 원자에서 분자로, 분자에서 물질로, 분자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사회로 종횡무진한다.

물리학의 관점에서 출발한 세상의 모습은 생물학, 화학, 지구과학의 지식을 자연스레 흡수한다. 무생물에서 시작했는데 그를 따라가면 어느 순간 생물과 인간을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경계가 허물어진다. 세상의 모든 존재를 통섭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다른 영역을 아우른다는 점에서, , 가 떠오른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인류 문명에 초점을 두고 과학적 영역을 넘나든다면, 김상욱은 다양한 과학의 영역에서 정의하는 물질에 방점을 두고 인간을 이해하고자 한다. , , 가 방대하고 탄탄한 과학적 고증을 바탕으로 인류 문명을 초고속카메라로 촬영하여 재생하는 듯하다면, 이 책은 기본 입자에서 시작하여 우주까지 진자 운동을 하는 물리학자의 방대한 시선을 보여준다.

 

? 이 책 읽으시네요? 유명하던데. 과학샘이시니까 술술 읽히시겠어요.”

지나가던 지인이 말한다. 물리교육을 전공했다고 하니 으흠~ 여유 있게 이 책을 읽으리라 예상한다. 연애를 글로 배운 인간, 무늬만 과학 교사는 그저 웃는다.

학교 현장은 전공 공부와 다르다. 중학교 과학은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각 영역의 기본 개념이 통합된 교육과정이다. 단원별 구분만 있을 뿐 교사는 네 가지 영역을 모두 다룬다. 사범 대학을 졸업했다고 바로 수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첫 발령 후 몇 년간은 교재 연구에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전공 영역은 장황해지지 않도록 무엇을 빼야 하나를 고민하고, 비전공 영역은 개론 정도의 지식만을 보유했기에 다시 공부한 기억이 있다.

대륙붕 깊이의 중학교 교과서 지식인으로서는 이 책의 모든 내용에 편안하게 끄덕이기에는 역부족이다. 용어들은 익숙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막상 설명하라면 주춤거리는 정도랄까.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거다. 이런 이유로 살짝 주눅이 들었지만, 관점을 바꾸기로 한다. 한계를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만 드문드문 흡수하기로 마음먹는다.

 

물리는 물질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며 물리학의 언어는 수학이다. 물리학자들의 목표는 세상의 물질들이 만드는 규칙을 찾아 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거다. 규칙은 보편적이고 단순할수록 좋다. 아우를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하여 우주의 맥박을 알아내는 게 그들의 로망인 듯하다.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니 원자가 이 책의 포문을 여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존재는 원자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원자들이 모여서 분자가, 물질이, 때론 생명이 만들어지지만 각각의 과정에서는 예측하기 힘든 창발이라는 새로운 특성이 나타난다고. 독립적인 존재들은 원자를 기반으로 한 수많은 창발적 결과물이다.

흙 속에 있는 산소 원자와 내 몸에 있는 산소 원자는 다르지 않다. 아끼는 사람이 죽는다면 그를 이루던 원자들은 세상 어딘가로 흩어질 뿐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의미이다. 물리학적으로 죽음은 원자의 소멸이 아니라 재배열이라는 문장이 많은 위안을 준다. 이토록 합리적이면서도 따뜻한 문장이라니!

 

생명체 안에서 일어나는 기작을 화학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동공 지진이 일어나지만, 몇몇 내용은 상당히 흥미롭다.

첫째, 원자들의 결합 방식과 우주에 존재하는 힘에 관한 설명이다. 이온 결합, 공유 결합, 금속 결합 등 어렴풋이 알던 내용을 확실히 설명해주니 답답하던 시야가 탁 트이는 기분이다. 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에 관한 내용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주기율표에 담긴 의미와 몇몇 원자들의 특성이다.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아연이 카드뮴과 같은 에 속하기에 몸에서 화학적으로 유사한 두 물질을 혼동한다는 설명에 소름이 돋는다. 수소, 탄소, 질소, 산소, 염소, 알루미늄 등 여러 원자에 대하여 몰랐던 특성을 알게 된 점도 좋다.

셋째, 산소의 무지막지한 존재감이다. 산소로 코팅된 지구를 밟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인지한다. 다른 물질과 무차별적으로 결합한다는 산소의 특성에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코카콜라 병을 젖병인 양 입에 물고 해맑게 웃는 순백의 CF 전속모델을 떠올린다. 북극곰이 실은 지상 최대의 포식자임을 종종 잊어버리는 인간을 생각한다. ‘산소 같은 여자로 비유할 만큼 무해 한 대상으로 인식하는 산소에 숨겨진 막강한 속성이 비슷한 맥락으로 겹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었다는 저자와는 달리 나는 세상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근본적인 세상의 실체는 시험 문제 밖의 영역이었으니까. 대학 4년을 떠올려봐도 딱히 흥미를 느낀 분야도 없다. 세상이 어떤 모습이든 먹고 사는 데 별반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여긴다.

시험을 목적으로 공부한 지식은 머릿속에서 금세 휘발한다. 곰곰 생각하면 지금까지 선명하게 각인되어있는 지식은 별자리, 야생화 등 스스로 알고 싶어서 공부한 분야의 것이다. 자발적인 동기로 쌓은 지식이 아니면 뇌는 가차 없이 메모리를 삭제하는가. 이보다 더 냉철하고 합리적일 수 없다.

이 책의 장점은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김상욱 작가의 순수한 호기심과 세상을 알고자 하는 열정에 자연스레 동화된다. 지적 호기심과 더불어 나를 바라보게 만든다.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는 인간인지 마음을 들여다본다.

가장 큰 장점은 시야가 넓어진다는 점이다. 그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주의 기운이 심장으로 확 스며드는 듯하다. 어느 순간 드넓은 공간으로 도약하여 까마득한 하늘에서 지구를 바라보듯 세상을 바라보는 상상을 한다.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 가장 신기했던 점은 구름의 입체감이다. 스케치북에 그려진 2차원의 구름은 땅에 발을 딛고 하늘을 올려다볼 때도 별반 다르지 않다. 모든 구름 입자가 일렬횡대로 늘어선다는 건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3차원의 구름을 상상한다는 건 그 안으로 지나가 보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비행기가 구름 속을 뚫고 들어가 구름의 홀로그램이 펼쳐지던 순간은 상상을 뛰어넘는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 좌라락 펼쳐지는 크리스마스 입체 카드를 난생 처음 보는 아이가 된다. “우와! 우와!” 절로 감탄사를 뱉어낸 선명한 기억이다.

다른 세상을 경험한 아이는 이전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매직아이의 입체 그림을 보아버린 거다. 땅으로 다시 내려와 고개를 들면 이제는 3차원의 구름을 충분히 볼 수 있다. 초점이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며 깊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초점이 생겼다. 바라보는 세상이 넓어지면 마음도 덩달아 확장되는 걸까.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우주인이라도 된 듯 깨작깨작 찌질한 일은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며 훗~ 지나칠 수 있을 것만 같으니. 형이하학적 도()를 깨달은 기분이다.

 

 

p63, 밑에서 6째 줄: 공기의 80퍼센트가 질소다. ~78퍼센트~

p119, 첫째 줄: 질소는 ~ 대기의 75퍼센트를 이루고 있으니 ~78퍼센트~

p119, 4째 줄: 산소는 ~ 대기의 23퍼센트 ~21퍼센트~

p160, 6째 줄: 충동할 충돌할

p211, 밑에서 6째 줄: 포도당으로 분해 엿당으로 ~

p214, 첫째 줄: 생성물(물과 산소) ~(물과 이산화 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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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청미래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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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의 눈처럼 쏟아지는 별밤을 구경해야지. 몽골의 밤하늘이 그렇게 장관이라던데. 인터넷 사진들 말고 눈으로 사진을 찍는 풍경을 꿈꾼다. 퇴직 이후 스스로 선물하는 이벤트를 상상할 때마다 세렝게티를 누비는 야생마라도 될 듯 설렜다. 체력을 키워야 하니 가끔 등산이라도 가야겠어. 순식간에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를 다녀올 때면 찌든 피곤도 가벼워졌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인생은 그리 만만한 대상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는 일이 닥친다. 순간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 서서히 진행되던 과정이 결과를 드러냈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리라. 작년 가을부터 슬금슬금 무릎이 삐그덕거린다. 동네 병원에서 물리 치료와 주사를 몇 번 맞고 그럭저럭 잊은 듯 지내온다. 드디어 임계점에 도달한 걸까.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욱신거리는 통증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금 큰 정형외과를 방문한다. MRI 사진을 찍고 3차 대학병원의 상담까지 받는다. 양쪽 슬개골 중앙 부분의 연골이 모두 닳아있다는 현실을 마주한다.

뼈다귀의 선천적 기형으로 오목하게 들어가 있어야 할 부분이 편평하여 둥그스름한 무릎뼈 가운데 부위의 마찰이 지속된 결과라나. 젊었을 때는 근육의 힘으로 지탱하다 갱년기가 시작되면서 존재감을 드러낸 듯하다. 퇴행성 관절염은 노화가 데려오는 인지상정의 현상이다. 문제는 인공관절을 하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설명이다.

 

밭일 하셨어요?” 벌써 무릎이 아프다는 말에 친한 지인이 농담을 건넨다. “제조사에 AS 신청해야겠네.” 남편이 농담으로 위로한다. “내일 가서 컴플레인 넣을까.” “..? 50년 쓰고 컴플레인이라뇨, 고객님..” 큰 딸의 단톡방 멘트다. 그래, 반백 년 넘게 사용했으면 많이 사용한 거지. 제각기 가벼운 농담으로 건네는 위로들로 잠시 스노볼 속 눈인 양 마음이 들썩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선고라도 받은 듯 우울감이 마음 전체를 잠식한다.

병원에서 관절염의 근본적 원인 치료제와 골관절염에 좋은 영양제 6개월 치를 준다. 쭈그려 앉기, 양반다리 금지. 10배 정도의 충격을 감당해야 한다니 계단 이용도 자제한다. 한 층을 오르내릴 때도 엘리베이터를 탄다. 학교의 것은 장애인용이라 엄청 느리다. 게다가 틈새를 노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려는 녀석들로 인해 더욱 느려터진다. 기다리다 속도 터진다. 마음으로 몇 번이나 왕복하며 하염없이 기다리고또기다리고다시기다린다.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니 업무기동력도 현저히 떨어진다.

일도 하기 싫고 근육을 키우라는 운동도 하기 싫고 책도 읽기 싫고 뭐든 하기 싫어진다. ‘철학의 위안은 개뿔. 지금이 고고한 형이상학을 논할 때인가? 재생도 되지 않는다는 연골이 무로 돌아간 이 마당에? 형이하학으로 둘러싸인 무연골인의 감성은 온통 삐죽투성이다. 독서 모임만 아니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책을 기대 없이 펼친다.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 등 학창 시절 교과서를 한창 누비며 이름깨나 날리던 철학자들이 등장하지만, 내용은 생소하다. 요약본의 업적만 가물가물 기억나는 정도다. 철학에 문외한인 나는 그들의 철학서에 제대로 접근한 경험이 없다.

철학의 위안위안에 초점을 맞추어 철학자 6명의 사상을 정리한 에세이이다. 건조하고 심오하리라는 편견이 앞섰기에 설마 철학책이 지금의 나를 위로해줄 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저자의 깔끔한 서술과 각기 다른 관점에서 철학자들이 건네는 위로에 마음이 차츰 정돈된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의 평가와 내 실제 사이의 간극이 어느 만큼인지 생각해보라고 한다.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을 위한 비물질적 요소를 강조한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켜봐 줄 누군가의 우정과 자유와 사색을 둘러본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이 두려워하는 것만큼은 아니라는 세네카의 말에 울컥한다. 어떤 사건들을 바꿀 만한 힘은 없더라도, 사건에 대한 태도를 선택할 자유는 주어진다는 말에 큰 위안을 받는다.

신을 죽인 인간으로만 알고 있던 니체에게서 의외의 따뜻한 촌철살인의 관점을 발견한다. 완성된 삶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 어려움에 당혹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으로부터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일구지 못하는 사실에 당혹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든다.

 

자기 연민에 빠져있던 나는 몽테뉴를 지나면서 이성적 인간 모드가 된다. 학문과 지혜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 평이한 글을 쓰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창작은 인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서열이 높다는 말을 깊이 담는다.

사실 여러 책과 화려한 인물들의 말을 인용하는 글을 볼 때마다 내 지식의 초라함을 내려다보곤 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닌 내 생각만으로 글을 구성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주눅이 들었다. 우리 자신에게서 더 위대한 통찰력을 끌어낼 수 있다는 몽테뉴의 말에 힘을 얻는다. 내가 쓰는 문장들은 내가 최초이므로 당당히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하니 뿌듯함이 화하게 번진다.

쇼펜하우어는 생에 대한 의지로 이성에게 눈이 멀었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언급한다. 세상만사 다 잿빛일 것 같은 철학자가 상심한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가 뜻밖이다.

이 많은 분량이 머릿속에서 나온 창작이라니! e북 쿠폰으로 구매한 <수상록>의 두께에 압도당했던 나에게 니체의 사상은 희망을 준다. 알랭 드 보통은 이와 관련하여 빽빽한 수정의 흔적들이 보이는 <수상록> 원고 사진을 싣는다. 책이 태어나기까지 치러야 했던 수많은 첨삭과 퇴고를 발견해야 한다는 문장을 곁들인다. 작가를 희망하는 사람은 10여 년의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는 니체의 문장은 도전 의지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토닥토닥 책이 건네는 위로는 마음을 덮는 이불인가. 세월을 거슬러 온 말들이 나를 위로한다. 위로의 방식 역시 제각각이다. 이 책을 읽으며 신문지를 떠올린다. 스스로의 온기로 몸을 데우는 셈이지만 노숙자에게 신문지는 건조하면서 따뜻한 이불로 더없이 뭉클한 존재 아닌가.

알랭 드 보통의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불안한 존재들을 위해 6인의 철학자와 이들의 생각을 엮은 작가. 담담한 위로는 지금의 나에게 더없이 적절한 방식이었다.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앞으로 해야 할 행동을 정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고통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기로 한다. 잃어버린 관절 말고 얻은 것과 얻을 것을 헤아린다. 계단이 없는 곳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장애인의 어려움을 깨닫는 시간을 갖는다. 나와 함께 먼 길을 돌아 걸어주는 동료의 마음을 본다. 내 몸을 돌아볼 기회를 얻는다. 치킨을 통해 골격 구조를 세밀하게 관찰하며 인간과의 유사성에 놀라는 학습자로 빙의한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근육운동이다. 내 안에 있어야 하는 줄도 모르던 대퇴사두근과 빗내측광근을 키울 기회를 얻었으니. 세렝게티 초원을 누비지는 못할지라도 근육질녀가 되는 미래가 온다면 몽골의 별밤이 몽골몽골 피어오르는 날도 가능하지 않을까.

 

 

p14, 1째줄: 불안해해거나 불안해하거나

p14, 2째줄: 내비치치 내비치지

p86, 밑에서 7째줄: 상활 상황

p126, 마지막줄: 받을∨∨것이고 받을것이고

p284, 6째줄: 표현했다)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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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5-29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육운동 꾸준히 하셔서 몽골 초원의 별밤은 꼭 보러가셔야죠!
응원하겠습니다.
염세주의 철학자들에게서도 위안을 받으셨다니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나비종 2023-05-29 17: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다리 펴기 운동하면서 감격 중입니다.
보다 많은 내용이 펼쳐져 있지만 다리 병자의 눈에는 온통 다리 병자와 연관된 문장만 눈에 쏙쏙 들어오던 지라. 실제로 읽어보시면 저의 리뷰와 느낌이 많이 다를 지도 모르겠습니다.^^;;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윤정은 지음 / 북로망스 / 2023년 3월
평점 :
품절


뜨거운 별을 품은 평균 온도 270의 우주는 뜨거운가, 차가운가. 낮과 밤으로 이루어진 하루는 밝은가, 어두운가. 수묵화의 주인공은 붓으로 그린 부분인가, 여백인가. 기쁘면 절로 눈물이 흘러나올 때가 있다. 아픈 기억은 기억되는 게 좋은가, 지워지는 게 좋은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이어진 많은 것이 모순되는 두 가지를 모두 품는다.

소설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는 아픈 기억에 대한 상반된 질문에 답을 건네준다. 각기 다른 마음의 얼룩을 품은 이들이 세탁소 사장인 지은을 통해 치유를 받는 에피소드들이 담긴다. 판타지적 요소가 담겨 몽환적인 느낌이다. 얼핏 드라마 <호텔 델루나>가 떠오른다. 소설 속 인물들이 안고 있는 아픔은 이보다 더 현실적일 수 없다. 소설의 형식을 취하는 다큐멘터리랄까.

현실과 비현실이 오가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널린 빨래의 표면에서 반복되는 증발과 응결을 떠올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체에서 눈에 보이는 액체로, 액체에서 기체로 수시로 상태가 변하는 물방울의 정체성이 소설의 분위기와 닮아있다.

 

주인공 지은은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치유하는 능력과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두 가지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실현 능력을 잘못 발휘한 소녀는 한순간에 가족을 잃는다. 가족을 찾기 위해 수 세기를 넘나들다 치유 능력을 발휘해야 실현 능력이 발현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를 세운다. 제공한 옷을 입은 손님의 상처가 얼룩으로 드러나면 세탁을 해주거나 주름을 펴고 위로의 차를 만들어 건네주는 게 주인의 역할이다.

드러나는 상처는 제각각이다. 밖에서 문을 잠그고 어머니가 일을 나갈 때마다 느꼈던 외로움을 지닌 재하, 사랑의 얼룩에 아파하는 연희, 인플루언서로 살던 삶을 지우고 싶은 은별, 상처를 기꺼이 안고 가겠다는 재하의 어머니 연자,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라 자책하던 과거와 인정을 받아야 안도했던 날들과 가족들 때문에 생긴 시간에 대한 강박을 지우고 싶다는 영희.

그들의 얼룩을 지워주는 지은의 얼룩은 항상 입고 있는 검은 바탕의 붉은 꽃무늬로 형상화되어있다. 세탁소 주변에서 따스한 김밥을 건네주는 분식집 사장과 지은의 눈물을 목격하며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는 해인이 온기 어린 울타리로 등장한다.

 

마음이 아프면 꺼내어서 얼룩을 지우고 다려서 펴고 햇볕에 널어 잘 말리면 된다니! 눈물이 마음으로 흘러들어 심장에 얼룩으로 남는 장면을 상상한다. 심장의 얼룩이 다시 마음 밖으로 흘러나오는 상상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시각화한 문장을 보니 마음이 보송보송해진다. 등장인물들의 눈물이 말라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덩달아 개운해진다.

주인공을 통해 건네는 위로가 따뜻하다. 문제를 끝까지 피하지 않고 겪어낼 것, 슬픔이 때론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낯선 타인을 대가 없이 도와주라는 것, 진짜 행복과 가짜 행복을 구분하지 못하는 뇌를 속여보라는 것, 자신을 잃어가면서까지 지켜야 할 관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 나를 모욕한 감정이나 언행을 택배처럼 반품하면 내 것이 아니라는 것.

손님들을 치유하며 마음의 얼룩을 제대로 흘려보내는 비법을 깨달은 주인공은 결국 스스로 상처를 치유 받는다. 마음 안 날씨는 나의 것이며 오늘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라는 것. 윤정은 작가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어둠이 품은 빛을 보여주는 작가의 시선이 마음에 든다. 각기 다른 상황에 위로를 건네는 장면에 봄빛이 맴돈다. 절대적인 능력의 보유자인 지은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도 깔끔하게 그려진다. 인물들의 상처가 조명이 되어 나의 상처를 비춘다. 깊은 곳에 숨겨둔 상처, 떠올릴 때마다 매번 울컥한 상처, 시간이 연고가 되어주던 상처. 깊고 얕은 상처들이 얼룩처럼 마음의 바다를 유영한다.

특히 마음에 드는 내용은 재하의 어머니 연자가 상처를 대하는 태도이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얼룩을 지우지 않는 인물이다. 객관적으로 가장 기구한 삶으로 보이는 그녀는 살아있는 한 모든 얼룩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주름만 조금 펴달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단단함과 뭉클함이 여운으로 남는다.

컬러링북을 연상시키는 송지혜 작가의 세세한 그림도 좋다. 표지에는 세탁소의 전경을 그리고 본문에서는 중간중간 에피소드가 바뀌는 장면에서 건물의 부분 부분을 다르게 끼워 넣은 발상이 신선하다.

사소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마음이 세탁되는 과정을 묘사한 문장들이 다소 반복되는 듯하다는 거다. 신선한 발상이나 반복된 서술이 이어지니 임팩트가 희석되어 긴장감이 떨어진다. 소설의 전개가 다소 식상해지는 느낌이랄까.

 

프렌치 메리골드의 꽃말은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다.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의 능력이 특별한 전유물이 아님을 시사한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능력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마음이 믿는 대로 살아간다면 행복은 반드시 오고야 마는 햇살인 듯 자연스레 마음의 꽃을 피워주리라.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을 아는가.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진리가 담긴 농담 말이다. ‘1단계, 냉장고 문을 연다. 2단계, 코끼리를 넣는다. 3단계, 냉장고 문을 닫는다.’이다. 마음을 꺼내는 데 이 비법을 적용해본다. 마음의 문을 연다. 얼룩진 상처를 꺼낸다. 토닥토닥 말린다. 잘 말린 상처는 더 이상 상처가 될 수 없다. 다만 흔적으로 남을 뿐이다. 문을 열고 상처를 들여다보는 순간, 치유는 시작된다.

당신은 무엇으로 마음의 문을 여는가. 나는 마음이 색채를 잃거나 사막을 품을 때면 글을 쓴다. 빈 문서 1에 내가 정한 크기로 마음을 담은 발자국이 걸어간다. 내가 원하는 속도만큼 천천히 혹은 빠르게. 모니터에 펼쳐진 마음을 바라본다. 시린 마음을 덜어낸 자리는 종종 뜨끈해진다. 그 순간, 온기가 심장을 향해 흘러든다. 하얀 바탕 위의 글씨들이 마음의 얼룩인 듯 출렁거린다.



p39, 밑에서 4째줄: 돌아가가면 돌아가면

p130, 밑에서 5째줄: 첫사랑 과 첫사랑과

p139, 13째줄: 세 사람을 ~

p169, 2째줄: 안 가겠더라고요 안 가겠다~

p264, 9째줄: 곁은 지키는 이들 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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