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1 - 개정판, 종합편, 바칼로레아 논술고사의 예리한 질문과 놀라운 답변들 휴머니스트 교양을 읽는다 3
최병권.이정옥 엮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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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대입 수험생들이 철인삼종경기 출전자들에 비유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수험생들은 내신을 관리하고 수능을 준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논, 구술의 부담까지 떠안는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웬만한 대학들의 입학사정에 맞추다보니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가 없다.

  특히, 논술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학부모들을 사교육의 장으로 내모는데 일조를 한다. 정규과목에 편성되지 않아 그 실체가 모호한데다,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사고의 집적물을 글이나 말로써 표현해야  한다니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당사자인 학생들보다는 논술교육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세대인 학부모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더할 수밖에 없다. 해서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논술학원에 드나든다.

  짬짬이 글쓰기를 가르친다는 것을 아는 지인들이 묻는다. 논술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학원에 보내야겠지요? 두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갖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다. 그저 열심히 읽고, 열심히 쓰고, 열심히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조심스레 말할 뿐이다.  고작해야 '연습'이라는 말에 힘을 주면서, 여건 상 혼자 할 수 없다면 학원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해줄 수 있을 뿐이다.

  전혀 도움 될 것 같지 않은, 상식적이고도 모범적인 답안을 내놓고, 마음 한 구석엔 분노와 부러움과 자괴가 동시에 인다. 그것은 우리의 제도권 커리큘럼에는 전무한 논술교육에 대한 분노요, 교양인을 길러내는 선진국들의 논술 교육에 대한 부러움이요, 제대로 논술을 가르칠 줄 모른다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부끄러움이다.  학생들도 부담을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어렸을 때부터 충분한 연습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창의적 사고의 확장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이다. 

  프랑스 대입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에서 논술 시험을 소개한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부러움이 절로 인다. 그들이 말하는 평균적 교양은 우리가 보기에 지성인들의 철학적 경지를 말하는 것 같다. 도무지 고등학생으로서는 감히 탐색하지 못할 것 같은 주제들을 다양하게 접근한다. 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는가, 노동은 욕구충족의 수단에 불과한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는가, 등의 질문이 입시문제라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고, 그것에 대한 다양하고 놀라운 답변들이 제시된다는 것도 더한 충격이다. 폭넓은 독서와 교양 교육이 바탕이 되어서인지 추상적이고 철학적이며 난해하기까지한 답변들이 즐비하다.

  그들에게 논술이나 철학은 학문이 아니라 교양적 차원의 논의이다. 생각하고 토론하고 논술하는 이러한 방식의 교육은 이미 나폴레옹시대부터 이어져왔다. 그러한 전통이 모여 프랑스인들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의 세계로 이끈 것은 아닌지.  그에 비해 따로 논술이나, 철학, 나아가 토론식 수업 한 번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우리의 교육 현장에서 외피만 빌려입은 논술교육이 제대로 자리잡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부족한 연습으로는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 모두 옹골찬 알맹이에서는 한참 멀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 논술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하는 분위기이니, 언젠가는 앞선 그들처럼 우리네 교실 풍경에도 토론과 에세이가 난무하게 되는 걸 지켜보게 되지 않을까.  단지, 입시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평균적인 교양을 지탱해주는 수단으로서 논술이 대접받는 그 시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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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멜로 이야기 마시멜로 이야기 1
호아킴 데 포사다 외 지음, 정지영 외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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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날이 엊그제였고, 소박하나마 한 때 한글 전용 운동을 한 전력이 있던 내가 이런 품위 없는 제목을 가져온 것에 대해 용서하시길. 출판계에 때 아닌 대리번역 의혹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급하게 달려오느라 더 나은 제목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백만 권 이상의 판매부수를 자랑하던 책 한 권이, 알려진 바와 다른 정보로 파문이 일고 있다. 한 일간지 칼럼의 의혹이 단서가 되어 시작된 이번 사태는 관련 당사자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독자들에게는 적잖은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출판사 측에서 해명자료를 내놓았지만 독자들로서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논란이 된 책은 내 책꽂이에도 얌전히 꽂혀있다. 아이들 책읽기 교재로 활용한 것이기에 남들보다는 많이 산 기억이 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일조를 한 셈이니 뒷맛이 씁쓸하기도 하다. 교훈과 감동이라는 어린이 독서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이 책은 비교적 유익한 편에 속한다. 하지만 그것이 꼭 베스트셀러가 돼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내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의 목록에 이 책도 끼워두었다. 실제로, 누군가 어떤 책을 읽을까 물어오면, 이런 책만 피하면 된다고 말해버릴 정도였다. 

 

  나는 은근히 가르치려들고,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회적으로 동의를 구하는 책들을 부담스러워한다. 그런 책들이 자기 계발서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것도 의아했고, 어느 샌가 베스트셀러 상위를 달리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숫제,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로로 정착할 조짐까지 보이니 내 독서관에 대해 잠시 흔들리기까지 한다. 독자로서 새삼, 나는 까다로운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백만 권 판매 신화의 주역은 마케팅이었는데, 그 매뉴얼은 유명인을 내세워 독자를 깨치는 것이었다. '제가 직접 번역했답니다. 당신의 교양을 높여주고, 삶의 방향을 제시해줄 것입니다.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우아하고 지적이며 세련되기까지 한 유명 아나운서를 번역자로 내세운 이런 방식은 분명 판매부수에 획기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대리번역이 아니라면 이 자체가 지탄받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책 안 읽기로는 세계에서 거꾸로 순번을 세는 게 빠른, 야만적인 독서율을 자랑하는 우리네 독서시장에 이러한 기법은 불쏘시개 역할을 했으니, 문화를 사랑하는 시민의 이름으로 출판사측에 감사패를 줘도 모자랄 일이다. 출판업이 자선사업도 아니데 상업적 이득을 도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한데 실은 전문 번역가에 의한 대리번역이었고(출판사측에서는 이중번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실제 번역가로 알려진 유명 아나운서는 홍보대사 역할을 했다니 번역자의 이미지나 명성만 믿고 책을 산 독자들로서는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 것인가. 번역의 노고를 생각하며 역자 사인회(이 또한 해괴하다. 필자도 아닌 역자가 사인회를 여는 곳도 있는지.)에 참석해서 책을 산 사람들의 실망감은 어찌 또 보상할 것인가.

 

  하오나,

  이 사태를 보는 내 생각은 출판사나 번역 당사자들 못지 않게 독자들의 잘못도 크다도 본다.  대리번역을 일삼는 출판사의 행태도, 허영심에 물든 거짓 번역가의 소행도 결국은 독자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참에 베스트셀러가 좋은 책이 아니라 좋은 책(좋은 말을 쓴 책이 아님을 강조한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는 물론 독자에게 달려있다. 좋은 책을 보는 눈이 커지면 허욕에 물든 출판 환경 때문에 분노할 독자는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세상에 좋은 책이 많아 즐겁고, 잘 쓰는 사람들이 많아 나날이 절망한다. 저마다 즐기는 책이 다양하고, 사람마다 절망하는 작가가 다른 사회일수록 어느 한 책이 몰표로 밀리언셀러가 되는 일은 드물어지지 않겠는가. 대부분의 베스트셀러가 이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모든 베스트셀러가 최고인 것은 아니다. 일찍이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은 의심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데카르트 선생의 '삐딱선'미학을 신봉하는 의심많은 한 독자,  미심쩍게 등장하는 베스트셀러를 바라볼 때마다 이런 생각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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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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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란스럽다.

   책 읽는 자로서 나는  별종에다 까탈스러운가?  써야할 리뷰 대상이 된 책에 대해서는 될 수 있으면 타인의 리뷰를 미리 들춰보지 않는다는 게 그간의 내 소신이었다.  혹여 타인의 생각을 훔쳐보는데서 생길지도 모를 선입견이나 영향력을 우려하는 것이다.  한데, 이번에는 예외이다. 리뷰를 올린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왜 어떤 이유로 사람들은 이 책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렸는가? 정말로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 리뷰들을 읽고 나서도 진정한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내가 잘못 읽고 있는가? 읽히는 소설이긴 하지만 열광할만한 근거는 찾지 못하겠다.  딴지는 아니고,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면서도  소수의 취향에 해당하는  나같은 인간은 깊은 의문에 쌓인다. 소설을 읽을 때(책을 읽을 때) 내가 지향해온 소박한 철학(철칙이라 해두자)을 이제 거두어 들일 때가 되었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프로 작가가 쓴 모든 읽을 거리는 될 수 있으면(될 수 있으면에 방점이다) 완벽한 문장을 지향해야 한다는 게 독자로서의 내  생각이다.  어떤 시인이 말했다.  시는 은유이기 때문에 말이 좀 안 되고, 비문을 써도 용서가 된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시인을 마음 속 깊이 신뢰하지는 않는다.  어디선가 읽은 이런 말이 떠오른다.  '어떤 시인이 진정 시인인가, 아닌가는 그가 쓴 산문으로 판가름 난다. 산문이 되지 않는 시인은 더 이상 시인이 아니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호흡 긴 문장을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헐거운 문장력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를 쓰는 행위를 경계하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시든 소설이든, 모든 활자화된 것의 기본 예의는 문장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너무 과민한 걸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푸른숲, 2005)을 읽는 동안 유쾌했고, 동시에 짜증이 났다. 남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다는데 원래 냉혈한 기질이 있는지 눈물은 나지 않았다. 우선, 유쾌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구성은 빼어났고, 스토리라인은 선명했다.  작가는 목 좋은 자리를 선점해 단골을 유치한 포장마차 주인처럼 민첩하고 유연한 방식(호기심을 자아내는 구성과 적당히 신파가 섞인 서사)으로 대중성 확보에 성공한 듯 보인다.   이것이 작가 공지영의 힘이다.   쉽고 감성적인 언어로 작가와 독자가 동시에 원하는 목표점인 자연스런 감동과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낸 것은 분명 장점이다. 부럽고 본받을 일이긴 하다.  이것이 곧 대중소설의 존재 이유가 아니겠냐고 누군가가 목놓아 외친다면  이 리뷰를 쓰는 의미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작가는 프로이고 프로는 책임있는 문장들을 뱉어낼 의무가 있다. 물론 모든 작가들이 김훈이나 천운영처럼 미려하면서도 적확하고, 섬뜩하면서도 정교한 문장을 구사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위에 방점 찍은 것처럼 될, 수, 있, 으, 면,  제대로 된 문장을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감동과 공감만이 목적이라면 굳이 소설에서 그것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학이 예술의 고매한 범주 중 하나라고  볼 때, 그 예술성은 독자에게 전달되는 정서적 감동 외에 감동을 전달하는 문체적 특성에서도 발견되어야만 한다. 

  공지영 소설이  대중적, 외연적 확장을 하면 할수록 그 문체적(더 확실하게는 문장력) 결함의 아킬레스 건이 도드라져 보일 것이라는 우려는 나만의 생각일까.  나는 공지영 작가를 존경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다만, 좋은 문장을 만나기 위한 독자로서의 신경증적 강박이 있다는 것은 고백해야겠다. 물론, 독자로서 문학이 예술이 아니라 그저 오락이나 휴식에만 머물러도 좋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면  이 강박은 자연스레 없어질 것이다.

  읽기에 껄끄러웠던 첫 도입부의 몇 개 문장만 인용해본다.

 

   비는 저 불빛들 속에서만 내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젖게 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를 테니까. (9쪽)

   이 겨울비처럼 어두워져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는 많이도 있었다. 그를 만난 후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10쪽)

 --- 도입부의 문장 일부이다. 어둠 속 비오는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도무지 나로서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젖게 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를' 이유가 없다.  사족이다.  뒤쪽의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이 어둠 속에서 우리를 젖게 하는 것의 정체가 비라는 것쯤은 비를 맞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지 않겠는가. '불빛들 속에서만 내리고' 있는 비의 선명한 이미지를 묘사하다 보니,  '어둠 속'의 비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엷은 운무처럼 뿌연 빗속에서 달리던 차들 위로 태양처럼 붉은 신호등이 켜졌다. (10쪽)

--- 딱히 비문은 아니지만 이런 앞뒤 문맥상 불분명한 비유를 왜 써야하나? '뿌연 빗속'에  '태양'이라...

 

  어머니는 왜 자신의 친구였던 고모를 미워했을까. 그러니 나도 어머니를 미워한 것이 먼저였을까, 아니면 고모를 닮아버리겠다고 결심한 것이 먼저였을까. (14쪽) 

  그러나 그것은 미개지에 들어선 점령군이 부르는 승전가 같은 종류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건드리기만 하면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 오래되고 내밀한 상처였으며 설사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언제나 피를 흘리는 그런 종류의 아픔이이고 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반역에 실패한 패잔병들이 부르는 악에 받친 풍자가 같은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니다, 다른 점도 물론 많다. 고모는 나보다 우리 집안사람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어떤 물질적 향응도 자신을 위해 쓴 적이 없었다. (15쪽)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온 은하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야만 성이 차던 존재, 술에 취한 날이면, 닫힌 문들을 발길로 차면서 나는 진실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발음해본 적은 없지만 그 때 누군가 내 심장에 청진기를 가져다 대었다면 아마도 이런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15쪽)

  나는 위스키에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발견된, (21쪽)

---앞 뒤 연결이 생뚱맞고, 대구가 맞지 않아 부자연스러운 문장들.  도대체 왜 작가는 이런 부주의함들을  도처에 깔아놓아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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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29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글 하나 제대로 써보지도, 책 하나 제대로 내지도 못한 독자입니다만, 책 한 권이 있으면 열심히 읽는 독자로서 말하고 싶어요. 종종 공지영같은 수준미달을 보면 그의 책을 위해 베어지는 나무들이 아깝다고. `고등어' 이후에는 같은 말을 하고 또 하고, 되풀이해 하는 반복 재생 녹음기 같아요.

marine 2006-12-04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체 문제, 저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공지영에 대해서는 읽은 책이 별로 없어 왈가왈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문체는 작가의 기본적인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크아이즈 2006-12-04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드님, 블루마린님 동지를 만난 것 같기는 한데 작가에게는 좀 미안하네요. 부주의한 문장들, 예민한 독자들은 자꾸 신경 쓰이는 것 맞지요?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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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외출을 할 때면 습관적으로 책을 챙긴다. 혹,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거나, 늦는 상대를 기다려야 할 상황이면 책보다 나은 친구는 없다. <단순한 열정>, (문학동네, 2001).  우선 이 책은 휴대용으로 안성마춤이다. 중편 정도 되는 분량이니, 잠깐 시간을 달래기에는 그만이다. 약속 시간에 도착해보니 삼십분이 남았는데 내심 즐거웠다. 언제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미뤄온 책을 집어든다. 삼십분만 할애하면 되니까.

  이 책에서 말하는 에르노식 감정을 나는 20대 이후로는 잊어버렸다.(잃어버렸다, 가 맞을지도.) 따라서 그녀의 '단순한 열정'이 결코 사랑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는다. 집착이자, 욕망이요, 무모함이자, 감정의 낭비로 비칠 뿐이다. 남녀간의 사랑에서 주체적 날개를 달지 못하고 스스로를 속박한 채, 한 남자의 그 무엇(혹은 모든 것이라고 쳐두자)을 기다리고 기대한다는 건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철든 이후 나는 이런 식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배제해야할 사랑의 방식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자동차가 문 앞에 와서 멈추는 소리, 자동차 문이 쇠를 내며 닫히는 소리, 문지방을 넘는 그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는 순간이 오면 나는 항상 온 신경이 곤두서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 사람이 전화로 사나흘 쯤 후에 들르겠다고 알려와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 해야할 일들, 예를 들면 친구들과의 식사마저 짜증스럽기만 했다. 그 사람을 기다리는 일 외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13쪽)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문지방을 넘는 그 사람의 발소리'와 '친구들과의 식사마저 짜증스러'울 정도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상대가 유부남이라는 걸 인정하고 만나는 만남이라면 스스로 주체적인 통제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과도한 감정의 낭비보다는 집착도 없이, 무모함도 없이, 욕망의 부피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기주도적 사랑 말이다.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지니고 있기 위해 다음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17쪽"을 권리는 에르노에게 있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유아적 집착일 뿐이다. 사랑에 대한 지나친 기대치나 미련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너무 일찍 청춘의 열정이 사라졌나?) 영혼이 피폐해지도록 광적이고, 집착하고, 미련 갖는 사랑은 사양하고 싶다. 더 이상 (상대가 유부남이냐, 아니냐의 잣대 따위는 상관이 없다.) 에르노처럼 상대에게 편지질을 하거나, 처음 보는 망또를 걸치고 현관앞을 서성이는 우스꽝스런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급물살의 소용돌이에 허우적대는 것은 한 번 정도로 족하지 않을까.

  모든 에너지와 감정을 쏟아 부은 채 일상의 질서조차 조절할 수 없는 사랑이야말로 이런 글을 쓰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지극히 개인적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소설이란 상표를 달고 발표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황폐한 월 보고서 정도로 읽히는 걸 보니, 나도 시니컬을 너무 잦은 친구로 삼는가 보다. 집착하지 말라, 기다리지 말라, 다만 상황을 즐겨라. 그런 사랑의 보고서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은 당당하고, 담백하고, 쿨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덜 부끄럽고, 덜 죄책감에 시달리고, 덜 상처받는다.

  마치 일본 사소설류를 접할 때(정말이지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나 적응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느끼는 거부감과 비슷한 감정이라고나 할까.  에르노처럼만 사랑하지 않으면 된다, 라는 것을 독자로서 재확인할 뿐이다. 거짓없이 자신이 경험한 것만 쓴다는 것에 매료되어 관심을 가졌지만, 이런 식의 경험에만 천착한다면 정중히 사절이다. 왠지 조금 읽다만 <칼같은 글쓰기>도 흥미를 잃을 것만 같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이라고 선언할 때 이런 책이 보편타당성을 갖게 되는 시대, 혹은 이런 책에 대한 독자층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경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의 선언이 근대문학(거시적, 역사적 사회적 역할로서의 문학)에 대한 종언이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문학(미시적, 개별적, 개인적인 의미로서의 문학)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후자도 문학적 개연성을 충분히 획득했다고 (그런 쪽으로 탁월한 작가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믿고 있지만, 글쎄, <단순한 열정>류에는 내 너그러움이 동하지 않는다.

  마침, 책을 다 읽고나자 약속한 사람들이 왔고, 우리는 일을 했다. 그 두 시간 동안 속이 거북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상대가, 단지 나이가 조금 많다는 이유로 반말을 천연덕스럽게(친밀한 반말과 계층을 구분지으려는 반말은 너무나 다르다. 도대체 나이로 계층을 구별하려는 이 유교적 관습을 나는 혐오한다.)해댔던 것이다. 이 책이 그 상황에서는 속거북함에 일조하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이 책을 패러디한 그녀의 또 다른 애인인 필립 빌랭이 쓴 <포옹>에도 눈길이 가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쳐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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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0-01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셨군요. 저역시 한 번 읽었을 때에는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낭비될 열정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고는 두 번, 세 번 읽었을 때에 느낌이 또 달라졌더랬습니다. 두 번 세 번 읽었을 때에는 좀 험난한 사랑에 빠져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주 묘하게 동일시를 햇으니까요.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언제나 빛이 났습니다.
그런데 필립 빌랭의 포옹은, 읽자 마자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기분이었어요. 상대의 유명세에 기대에 나도 한 번 떠보자, 하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읽었어요. 이리 된다면, 유명해 지기 위해 유명 남자 배우와 사귀는 무명 여배우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크아이즈 2006-10-01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 접수했어요.^^* 누구든 경험한 만큼 텍스트에서 본다, 라고나 할까요? 이십대 때 제가 이 책을 읽었다면 아마 님과 똑 같은 생각을 했을 거에요. 제 독해를 의심할 필요도, 쥬드님의 몰입을 방해할 그 어떤 이유도 없겠는걸요. 개운합니다.

크리스탈 2008-06-11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글 잘 읽었습니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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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별 망설임없이 책을 샀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살다보면 누군가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가 되기도 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고급 호텔 사장이 되기도 한다. 가끔 나도 이국적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그 경험에 진정성만 배어있다면 중산층 평범한 일상이든, 하류층 곤고한 지옥이든 별 상관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는 될 수 있으면 파리의 접시닦이가 한 번 되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이국적 생활, 특히 파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이 책을 산 첫 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는 조지 오웰이 본 파리나 런던의 묘사력에 관한 호기심 때문이었으리라. 단언컨데,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는다. 단, 독자를 생각하지 않는 구성의 허술함 때문에 지루하게 읽히는 부분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그였다면 분량을 딱 반으로 줄이겠다. 르뽀 형식을 띄고 있지만 클라이막스가 없어 그 얘기가 그 얘기 같다.  등장 인물과 분량만 줄여도 흡인력 있는 읽을 거리가 되어 줄 텐데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파리나 런던에 가지 않더라도 밑바닥 생활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생생한 묘사 때문에 파리의 X호텔 레스토랑에 가지 않고서도 그 지하 공간의 온갖 악취를 맡은 듯하고, 런던의 부랑아가 되어 보지 않고서도 강변 벤취를 지나는, 노숙자를 깨우는 기차소리를 듣는 듯하다.  보라, 냉소의 경지를 넘어선 이 적나라한 묘사를.

   주방의 불결함은 더 심했다. 프랑스 요리사는 수프에 침을 뱉는다고 하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단지 사실을 진술한 것뿐이다. 물론 요리사 자신이 먹는 수프가 아닌 경우이다. 요리사는 예술가이지만, 그의 예술은 청결에 있지 않다. 그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더럽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음식이 세련되게 보이려면 더러운 처리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고기를 만지는 수석 요리사들의) 손가락은 모두 이날 아침에 백 번은 빨았던 그 손가락들이다. 이번엔 웨이터가 또 자신의 손가락을 그 고깃국물에 담근다. (중략) 대체적으로 음식 값을 비싸게 치를수록 그 음식과 함께 먹는 땀과 침도 많아진다. (104 ~105p 부분)

  강변 둑길에선 뭐니뭐니해고 일찌감치 잠드는 게 상책이지. 여덟 시까진 벤치를 차지해야 돼. 벤치가 그리 많지도 않고 또 다 차 있을 때도 가끔 있거든. 그리곤 곧장 잠이 들어야 돼. 열 두시가 넘으면 너무 추워 잠이 잘 안 오고 새벽 네 시만 되면 경찰이 내쫓거든. 근데 잠드는 게 쉽진 않아. 염병할 시가전차는 번번이 머리 옆을 날아다니지. 강 건너 옥상 광고 조명은 켜졌다 꺼졌다 해서 눈이 부셔. 추위도 매섭지. 거기서 자는 이들은 대개 신문지로 몸을 마는데, 그게 그리 도움은 안 돼. 세 시간 잤다면 억세게 운 좋은 거야. (278~279p)

   비루한 인간들을 관찰하는 끈덕진 시선은 동물농장과 1984년 같은 작품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비천한 계급도 중산층 사람들과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똑 같은 사회 구성원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으나 언제나 지나친 자기 연민이 문제이다. 일반 여성은 언감 생심 꿈도 못 꾼다.  매춘부를 보고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부랑자들을 포착해내는 작가의 그 통찰이라니.  

  자기연민은 그의 성격을 이해하는 실마리였다. 한순간도 불운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듯했다. 그는 긴 침묵을 깨고는 난데없이 '옷가지를 전당 잡히기 시작하면 지옥이지, 응?"하거나 '그 부랑자 구호소의 홍차는 홍차가 아니라 오줌이야.' 하면서 설명했고, 이것 말고는 이 세상에 생각할 것이 없다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더 잘 사는 사람들, 즉 그의 사회적 지평을 넘어서는 부자들은 아니고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을 벌레처럼 비천하게 질투했다. 그는 화가가 유명해지기를 갈망하듯 일을 갈망했다.  (중략)  그는 동경과 증오가 뒤섞인 채로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젊고 예쁜 여자들은 그에게 너무나 분에 넘쳐서 생각도 안 했지만, 매춘부를 보면 그의 입안에 침이 고였다. (200 ~201 부분)

    책('소설'이 타당하겠다)을 읽을 때, 설명에 밑줄을 긋지 말고 풍경에 밑줄을 그어라, 고 누군가가 말했다. 아마 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 읽은 듯한데 그 말은 이 책에서도 유효하다. 설명 이전에 풍경으로 그려지는 그림을 활자에서 맛보는 것이야말로 책 읽기의 묘미이기도 하다.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별이 네 개 밖에 안 뜨는 것은 불필요한 분량과 구성의 지리멸렬에서 오는 지겨움 때문이다. 군데 군데 숨은 보석이 있으니 그것을 찾는 재미로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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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0-0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날벌레가 추락사 했다고 해서 없는 돈 다 짜내어 산 우유를 버리다니, 그래도 믿을 구석이 있는 궁핍함은 그런가 보다, 생각하기도 했어요.

다크아이즈 2006-10-0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아마 완벽한 경험담이라기보단 취재력이 가미된 소설이기 때문에 그런 허술함(?)이 있었지 않을까요?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은 파리 빠진 우유도 없어서 못 먹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