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에로의 초대
이무석 지음 / 이유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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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방어기제




  삶의 순간마다 마음의 평정을 깨뜨리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불안을 초래하는 이 사건들은 죄책감, 공격적 욕구, 미움, 원한 등의 감정을 낳는다.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으론 눈물바다를 헤맨다. 나아가 혼란을 불러일으킨 대상을 향한 안경렌즈는 왼쪽은 악마의 것이고 오른쪽은 천사의 것이 되기도 한다.

  정신과 전문의 이무석의 `정신분석에로의 초대`(도서출판 이유, 2003)는 근래 내가 산 책 중에 가장 흥미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기초이론을 저자의 입맛에 맞게 해설하고 있는데, 풍부한 그림과 다양한 실례로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예의 안경렌즈 부분도 책 속 그림 중 하나인데 자아의 방어기제 중 `분리`에 해당한다. 분리는 자기와 남들에 대한 이미지나 태도가 전적으로 좋은 것과 전적으로 나쁜 것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것으로 나눠지는 것을 말한다. 우유와 독약을 섞으면 우유마저 마실 수 없게 되니 분리해서 보관하는 것과 같은 원리란다. 어떤 한 사람을 천사로 보다가 갈등 상황이 생기면 곧 악마로 치환해버리는 경우가 여기 해당된다.

  삼십 여 가지의 자아 방어기제가 실려 있는데, 이 방어기제는 본능적 욕구에 대항하는 초자아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는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려 노력하고 이 모든 과정은 방어기제가 되는 것이다.

  `억압`은 가장 흔히 쓰는 방어기제이다. 가질 수 없는 것, 허영심, 순간의 충동 등을 무의식의 가방 속으로 눌러 꾹꾹 눌러 버리는 것이다. 누구나 죄의식, 창피, 자존심의 손상 등에 대한 기억이 있다. 이 경험들은 고통스런 불안의 기초가 되므로 자연스레 억압의 대상이 된다.

  억압은 불안을 방어하는 기본적인 방어기제이지만 실패하면 남 탓으로 돌리는 투사가 되고 만다. 성숙이냐 유치하냐의 갈림길이 여기인데 신경증적 이상 징후를 보이지 않는 대부분은 전자의 틀 안에서 사유하고 행동하리라. 억압이 강한 환경일수록 편견이나 선입견이 많아진다. 이는 억눌린 생각들이 풀려나올 길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길을 터주기 위해 정신 분석가들은 억압을 극복하는 과정을 가장 기본적인 분석 단계로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억압에 이어 눈길이 오래 머문 부분이 `취소` 기제였다. 상대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느낄 때, 그에게 준 피해를 취소하고 원상복귀하려는 행동을 정신분석이론에서는 취소(undoing)라고 한다. 크고 작은 인간의 속죄행위가 이 취소에 속한다.

  인정받는 한 집안의 맏며느리, 신이 나서 부엌일을 진두지휘한다. 평소에 뺀질거리는 셋째 동서가 설거지라도 하기를 바라는데 그럴 기미가 없다. 참지 못한 큰며느리는 둘째동서의 설거지통에서 설거지거리를 나눠주며 셋째더러 욕탕에 가서 하라고 한다. 설거지양이 많지 않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미안한 맘과 죄책감이 생긴 큰며느리는 커피를 타서 얼른 셋째동서에게 밀면서 다정하게 군다. 정신분석이론에서 보면 `커피를 건네는 행위`가 기본적인 취소의 방어기제가 된다.

  책을 읽다보면 일상의 사소한 행위부터 큰 사건까지 인간의 모든 행위들은 방어기제의 소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어릴 때부터 가정적, 사회적, 환경적 이유로 인해 욕구는 좌절되고 금지는 갈등을 일으킨다. 이렇게 되면 마음의 평화가 깨지면서 불안이 생긴다. 두려움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충족을 얻는 방법을 타협한다. 이 방법 과정이 방어기제이다. 이 방어기제는 곧 개인의 성격 특성이 된다.

  인간은 마음의 평정을 원한다. 자아는 방어기제를 적절히 활용해 불안을 피하고, 한편으론 본능 욕구를 부분적으로나 충족시킨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마음의 갈등을 해소하고 평정심을 회복한다. 정신분석이론이야말로 지극히 인간적인 학문이란 생각이 든다. 프로이트의 위엄이 지당해 보이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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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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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말고사 시험기간이다. 사위가 쥐죽은 듯 고요하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본 아파트 단지 내 버스정류장에도 한낮의 적요만이 감돈다. 주말이면 간편 복장에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던 학생들 모습은 간 데가 없다. 지금 저들은 저마다 열공(?)의 동굴 하나 파서 들어앉은 게 분명하다.

  중3인 아들녀석도 예외는 아니다. 오롯이 주말을 시험공부 모드로 바꾸긴 한 것 같은데,  몸과 맘이 영 따로 논다. 십 분이 멀다하고 의자 뒤로 물리는 소리를 내더니 냉동실 문 열기에 바쁘다. 목이 탄다며 한입 가득 얼음을 털어 넣다 못해 숫제 냉장고로 들어갈 기세다. 유독 열 많고 땀 많은 체질이라 요즘 같은 여름이면 하루에 속옷을 두세 벌씩 적셔내긴 하지만, 이건 체질 문제라고 이해해주기엔 무리가 있다. 공부에 집중할 맘이 없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이 안 된다. 

  공부 잘 한다고 평판이 난 학생들의 엄마들이 전해주는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 학생들의 공통적인 학습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었다. 자기절제, 자기주도, 자기확신이 그것이다. 그 학모들이 들려주는 얘기에 아들녀석을 대입시켜보면  맘에 차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자기절제 부분부터 보자. 주말 오락프로그램을 본다 치자. 자기절제심이 강한 그들은 스스로가 정한 시청 시간을 철저하게 지킨단다. 애처로워 보여 다 보고 공부해도 된다고 엄마가 권해도 좀체 흔들리지 않는단다. 정말로 그럴까 싶어 신기하고 부럽기만 하다. 아들녀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박이일’을 다 보고도 엉덩이가 무거워 도무지 일어나지 못하는 유형이기 때문이다. 십 분만 더 보고 일어난다고 약속한 것이 한 시간이 되기 일쑤다. 자기절제 같은 고상한 트레이닝은 너무 멀리 가 있다.   

  그 다음, 자기주도 학습 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런 태도를 제대로 심어주지 못한 건 엄마인 내 탓이 크다. 녀석이 중학생이 된 뒤에도 나는 없는 시간을 짜내서라도 공부하는 아들 옆에서 빨간색연필을 들고 있었다. 요령부득인 아들을 도와주고 싶었다는 핑계가 있었지만 그것보단 엄마로서의 욕심이 앞섰으리라. 일이년 매달려 같이 용쓰다 보니 내가 먼저 제 풀에 나가떨어지게 생겼다. 체력, 지력 다 한계를 느낀 상태에서 어느 날 문득, 이게 뭔 짓인가 싶어 자괴감만 일었다. 공부 모범생 학모들의 얘기를 듣고 보니 나야말로 녀석의 자기주도적 학습을 망친 주범이 아닌가. 진짜 공부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만의 스타일과 방법을 터득한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게 온전한 방식이고 백 번 옳다. 하지만 아직도 완전히 적응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엄마로서의 내가 보인다. 천하태평, 낙천적인 녀석의 방식 옆에서 아직도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해하는 것은 엄마인 내 몫이다. 그래도 색연필 들고 동그라미와 사선 긋기를 열심히 해대던 시간을 벗어난 것만 해도 여간 다행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자기확신(자기욕심)이야말로 공부 모범생의 지름길이란다. 과외를 해야 하지 않을까, 무슨 과목이 부족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엄마에게 공부 모범생들은 ‘걱정하지 말고 일단 믿어보라’고 확신을 준단다. 자신의 역량을 알고 나아갈 길에 대한 기대치가 있으니 그걸 자신감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녀석은 한 번도 스스로 뭘 해보겠다고 욕심을 내지도, 꼭 뭔가를 이뤄야겠다고 확신을 내비치지도 않는다. 그저 십 분이 멀다하고 냉장고 문만 열어젖힌다. 각 얼음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가 싶으면 공부 다 했다고 책을 접고 나온다. 세 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 있어도 삼십 분처럼 느껴진다는 공부 모범생의 길은 정녕 멀고 험난하기만 하다. 지켜보며 속 타는 엄마야말로 각얼음이 필요할 지경이다. 열불 돋은 나도 아들 몰래 얼음조각을 집어 든다. 얼음 한 입 물고 냉정을 되찾는 일이야말로 모범엄마를 향한 지름길이겠지만 그런 현명한 결론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얼음은 너무 차고, 현실은 여전히 후텁지근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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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 다른 십대의 탄생] 공부는 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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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7-21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동병상련!
우리 아들도 이하동문입니다.ㅜㅜ
하지만 나는 마음을 비웠기 때문에 노심초사하지는 않아요.

다크아이즈 2010-07-23 04:11   좋아요 0 | URL
언제쯤 맘 비우기가 될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 지금 노심초사하는 중입니다.ㅎㅎ 여전히 잘 계시지요?

꼼미 2010-07-23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오니 글이 잔뜩 올라 있네요. 어찌 지내시나 궁금했는데...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맘 참, 겪지 않으면 절대 모를 일이지요. '자식을 키우는 일이 바로 도를 닦는 일이다'라는게 제 생각^^

다크아이즈 2010-07-23 18:25   좋아요 0 | URL
도 닦느라 서재질도 제대로 못한답니다. 꼼미님과 저의 공통점이라면 바람처럼 스치듯 서재 행차 한다는 것? ㅎㅎ 여전히 잘 계시리라 믿으며...
 
경주 남산에 가면 신라가 보인다
윤석홍 지음 / 산악문화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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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끈한 시집을 선물 받았다. 윤석홍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을 낸지 십여 년 만이란다. 소리 소문 없이 출간된 시집 제목은 ‘경주 남산에 가면 신라가 보인다’(산악문화, 2010)이다. 남산에 그렇게 많은 골짜기가 있다는 걸 시인의 시집을 통해 알았다. 남산에 대한 내 무지를 부끄럽게 만드는 그의 시편이 나는 미덥다. 산이 좋아 골골마다 행장 꾸리고 나섰을 시인의 모습이 시집과 오버랩 된다.

  아직 몇 편 밖에 못 읽었지만 그래도 리뷰 쓰고 싶은 욕심에 덜컥 연필을 들었다. 이런 시는 한꺼번에 몰아 읽어서는 안 된다. 숨겨 논 추파춥스를 혀끝으로 녹여먹듯 야금야금 읽어야 제격이다. 리뷰 제목 ‘시 한 편 건졌다’는 시인의 시 한 구절에서 따왔다. ‘비석대골’ (87쪽) 마지막 행에서 빌렸음을 밝힌다.

  나는 시를 잘 모른다. 하지만 내 취향에 맞는 시를 발견하면 긴 글에서 맛볼 수 없는 야릇한 희열을 느끼곤 한다. 그리하여 오늘도 시의 변방을 기웃거린다. 짓는 자가 아닌 읽는 자로서의 그 서성거림이 언제나 즐겁다. 세상에 시인은 많고, 좋은 시 또한 지천이니 입맛 따라 시를 고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어쩌면 나는 윤석홍 시인의 시보다 그 인품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시보다 더 시적인 그 행보를 좇다보면 머리에 푸른 잎 돋고 이 봄날은 마냥 계속될 것만 같다. 산을 좋아하는 그의 생에 대한 눈썰미는 산에서 완성된다. ‘나비의 겹눈은 명확한 상을 버리는 대신 / 세밀한 움직임을 얻는다 했지요 / 무엇 하나 고정된 것 없는 봄날 / 거짓 없는 진행형을 봅니다 / 그렇습니다, 흔들리는 봄날도 진짜입니다’ (43쪽)라고 시인은 남산 정우골에서 읊조린다. 나비의 겹눈으로 보이는, 혼곤히 흔들리는 봄날마저 세밀하게 보면 진짜 봄날인 게다. 시인의 눈에만 이런 발견이 쉽게 친구 되는 것 같아 질투가 날 정도이다.

  몇 년 전 시인의 소식을 한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일 년 간 모아온 원고료 전액을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기부했다는 기사였다. 당시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큰 돈 아닌 원고료를 차곡차곡 모은 것도, 그것을 좋은 일에 쓰려고 맘먹었다는 것도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인이 존경스러워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씩 발표하는 시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덕이 쌓이고 / 시간이 흐를수록 / 영혼이 맑아진다면 / 어느 날엔 깨달음의 / 소리도 들리’(37쪽)는 시인의 목소리는 그의 가슴이 내는 소리다. 시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다만 시가 시인의 영혼을 불러내고 있 것이다. 

  잠깐의 산행에서도 그의 성품이 드러난다. 사람을 아끼는 나머지 동료들에게 비옷이나 사탕을 나눠 주는 것은 당연하고, 산을 좋아한 나머지 널브러진 쓰레기와 빈 깡통을 줍는 것은 취미가 되어버릴 정도이다. 언젠가부터 시인의 기부 선행을 벤치마킹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심한지 몇 년 만에 드디어 나도 시인의 흉내를 내볼 수 있었다. 내가 봉사하는 교도소의 회원들에게 일정 금액의 영치금을 넣은 것이다. 열세 명의 회원들에게, 내가 일 년 간 노동해서 번 돈의 일정 퍼센트를 기부했다. 그런 기특한 짓을 하고 가장 먼저 자랑한 사람은 물론 윤석홍 시인이었다. 착한 사람에게 착한 일 했다는 칭찬을 듣는 것만큼 기쁜 것도 없었다.

  ‘마음의 눈으로 살펴보고 싶은 / 이 환장한 봄밤’ (86쪽)을 가끔씩 맛볼 수 있다면 그건 순전히 윤석홍 시인 같은 맑은 영혼의 소유자들 덕분이다. 착한 사람들은 덜 착한 나 같은 사람을 깨쳐줄 의무가 있다. 그것도 한 편의 시를 통해서라면 더 말해 무엇 하랴. ‘몇 번이고 돌아가야 하는 길 대신 / 사방에 길을 내어 빠르게 오른다면 / 우린 우리의 길을 잊을지 모른다 / 그 길에 두고 온 / 마음 한 자락마저 잃’ (92쪽)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오래 묵혀가며 그의 시집을 들춰볼 것이다. 몸살 앓는 봄밤에 끙끙대면서도 이 글을 달갑게 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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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양장) -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혼마 야스코 지음, 이훈 옮김 / 역사공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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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과 극은 통한다. 지나치게 활발하거나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제 안의 우울을 감추기 위해 그런 행동양식을 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울을 포장할 매혹적인 통제력마저 놓쳐버린다면? 맥 풀린 그 우울은 ‘말’까지 버리라고 강요할지도 모른다. 혼마 야스코의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역사공간, 2008)를 읽으면서 공권력의 횡포 앞에서 개별자의 운명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은 ‘할 말 없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인간이 존엄하다고 말할 때, 그 존엄은 개별자로서의 존엄을 말하지 힘의 논리 앞에서 그것을 양보하거나 희생해도 좋은 존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언제나 개별자의 인권은 권력의 마수 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덕혜옹주도 그런 길을 걸었다.

  혼마 야스코가 쓴 이 평전은 제목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덕혜옹주와 소 타케유키’ 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덕혜옹주 못지않게 남편 소 타케유키에 관한 변호가 많은 내용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어떤 제목으로 출간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덕혜옹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편이었던 소 타케유키를 위한 평전의 몫도 크다는 것이다.

  타의에 의해 뒤틀린 그들의 운명은 그 둘에게서 ‘말’이란 것을 뺏어가 버렸다. 혼마 야스코는 시종일관 혼신을 다해 그 둘에게서 연민의 시선을 떼지 않는다. 덕혜옹주의 일본 시절후견인 역할을 했던, 배다른 오라버니 이은 왕세자와 올케 이방자 여사에게는 서운함을 내비칠 정도로 덕혜옹주의 입장이 되어 그녀를 이해하고 재조명한다. 대마번주의 아들이라는 백작 신분으로, 한 왕국의 공주(비록 망국의 왕족이긴 하지만)와 정략결혼해야 했던 소 타케유키도 운명의 희생자였음을 작가의 시선은 놓치지 않고 있다.

  사춘기 시절부터 앓고 있던 덕혜옹주의 정신분열증은 그들 결혼 생활에 치명적인 방해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라 잃고 부모 잃고, 말 설고 사람 선 이국땅에서 우울이 깊어지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남편 소 타케유키의 배려와 관심이 있었다 한들 근원적인 아픔과 고통이 제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을 덕혜옹주에겐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끝내 정신병원까지 가게 되고, 이혼을 거쳐, 말까지 잃게 되는 건 당연한 순서처럼 보였다.

  소 타케유키 역시 덕혜옹주 못지않은 부침의 세월을 보냈다. 귀족 신분으로 태어나 평탄한 세월을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권력의 희생자라는 면에서는 아무리 연민해도 지나치지 않다. 소 타케유키로서는 최선을 다한 결혼 생활이었다.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왕녀의 지참금을 보고 결혼한 것도 아니고, 덕혜옹주에게 비정한 사람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다만 운명이, 상황이 그들을 갈라놓았을 뿐이다.

  덕혜옹주와의 사이에 유일한 혈육이었던 마사에마저 신혼 생활 몇 개월 만에 자발적 행방불명이 되었을 땐, 마지막 희망마저 놓친 심정이었을까? 소 다케유키 역시 하찮은 말을 버려버렸다. 대학 교수로서 학자로서 말년에 인정받는 삶을 살았지만, 소 타케유키는 죽을 때까지 덕혜옹주에 관한한 그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다. 다만 몇 편의 시로 그 시절을 안타까운 은유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 혼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구완으로 잠시 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197쪽)

   덕혜옹주가 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 없었다면, 소 타케유키는 말을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은 경우였다. 말 못하는 자와 말 하지 않는 자의 내면은 상통한다. 개별자의 우울이 공권력 앞에 무너질 때, 말을 버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항거가 없는 모양이다. 말 버린 자들은 말이 없는데, 말 많은 자  이렇게 남아, 그 둘의 실어를 공감하는 말을 휘갈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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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8-05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 다케유키도 말을 버렸군요.
낙선재로 덕혜옹주를 만나러 왔었는데 돌보던 이가 끝내 허락하지 않아서 못 보고 돌아갔하고...한국사 전에 나왔어요. 그는 마지막으로 옹주를 보고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겠죠...

다크아이즈 2010-07-23 04:17   좋아요 0 | URL
8월 말에 소설 덕혜옹주로 공개토론회 하는데, 저는 이 책에 더 구미가 당기네요. 주관은 개입되었되, 감정 과잉이 덜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여자란 무엇인가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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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철이다. 6․2지방 선거를 앞두고 홍보 전략도 각 당의 노선만큼이나 다양하다. 그 중 홈페이지에 올린 여당의 한 동영상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인기 있는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을 패러디한 ‘선거 탐구생활’이란 홍보 영상물인데, 하필이면 여성을 비하하는 내용이란다. 여성 유권자 및 야당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건 당연하다.

  논란이 증폭되자 해당 동영상은 이틀 만에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다행한 일이나 여성유권자들에 대한 사과보다 변명이 앞서는 것도 영 마뜩찮다. 영상 제작 관계자에 따르면 ‘정치에 관심이 없는 20대 여주인공이 정치와 한나라당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는 점을 원작을 빌려 말하려고 했던 것’이라나? 남녀의 차이점을 꼬집어 공감을 산 원작과 여성을 노골적으로 비하한 패러디물은 그 거리가 한참이나 멀다는 것을 그들만 모르는 것일까. 

  “뉴스 좀 보고 살아라, 그러니까 아는 게 하나도 없지.”

  “여자는 뉴스를 바퀴벌레 다음으로 싫어해요.”

  동영상에 나오는 여성 비하 발언 내용 중 일부분이다. 여자는 현 정부가 원전수주 계약한 나라 이름을 힌트까지 줘도 못 맞힐 뿐만 아니라, 공약보다는 후보자의 외모를 기준으로 투표 한단다. ‘드라마는 재방 삼방까지 보지만 뉴스는 절대 안보는 여자’라서 시사 문제와 공약집은 수능보다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여자가 드라마에 빠질 때, 남자는 스포츠에 빠지고, 반대로 여자가 스포츠 채널에 관심 가질 때, 드라마에 몰입하는 남자도 있을 수 있는 게 사람살이 아닌가. 남녀의 다름을 비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어느 한 쪽의 우위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다. 여성의 비정치적, 비시사적 성향이 도마 위에 올라야 할 이유도 없거니와, 여성이 비정치적, 비시사적이라는 그 생각마저 편견이라는 생각은 왜 못하는 것인가.

  “여자가 아는 건 쥐뿔 없어요.”  

  그러니 선거할 때, 무엇이든 잘 아는 남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것도 여당 후보를 찍어야 한다는 것일까? 선거에 무지한 여성 유권자를 겨냥한 여당의 흡인 전략으로 이런 동영상을 기획했다면 타깃을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았다. 선거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것은 개별자 나름의 사정이지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사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뉴스를 싫어하고, 상식에 엉뚱한 대답을 하고, 무식하다고 자책하는 여성이 대다수 여성 유권자를 대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것을 남성적 시각으로 보려는 서구의 정치적 상황이 이런 편협한 생각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도올 김용옥은 ‘여자란 무엇인가’(통나무,2000)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구 문명은 바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철저한 부정, 즉 여성의 비존재라고 하는 여성성의 부정으로 귀착된다.’ 부연 설명하자면 유목으로 대표되는 남성 중심적 문화가, 농경으로 상징되는 여성 중심적 문화를 지배하게 된 것이 서양 역사의 자연스런 흐름이란다. 신의 인간 창조에 여자가 끼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들의 신이 철저히 여성성을 부정함으로써만 그 존립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선거제도 역시 서구에서 유입된 것이니 예의 남성 위주의 생각도 자연스레 따라온 것일까. 

  반면, 도올에 의하면 동양은 여성과 남성의 조화 문명이었다. 철저한 남녀 평등적 철학구조를 가졌다. 선거제도에서 여성성의 회복을 인정하는 열린 시각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이번 선거는 어느 한 성만의 능동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두 성의 조화로운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한다. 투표를 통해 여성의 인권과 정치수준이 결코 그들이 생각하는 저급한 것이 아님을 보였으면 한다. 여성 유권자들의 소중한 한 표가 상생을 위해 나아가는 조화로운 날갯짓임을 분명히 알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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