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낮은 집 마음이 자라는 나무 1
임정진 지음 / 푸른숲주니어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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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붕 허비어 볼까요?

 

  전화를 자주 하느냐 안 하느냐로 효·불효를 따진다면 나는 불효자에 속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 속은 그렇지 않겠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한다고 엄마는 애써 위안하신다. 연세에 비해 건강한 축이기도 하고 자식들 전화에 애면글면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나는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걸로 효도를 대신하는 셈이다.

 

 

  며칠 전 태풍이 왔을 때야 걱정이 되어 전화를 드렸다. 형제 중 가장 늦게 안부를 물어 온다며 듣기 좋은 투정을 부리신다. 별 일 없으셨느냐는 의례적인 인사에 그럴 리가 있었겠냐고 기다린 듯 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다른 형제들에게 몇 번이나 쏟아놓았을 그 황망했던 사건은 이러했다.

성당에서 돌아와 대문을 들어서는데 초로의 사내가 마당에서 서성이더란다. 뉘신가 했더니 엄마 소맷자락을 붙잡고 지붕으로 올라가더란다. 맙소사!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사내가 보여준 장면은 반쯤 허빈 기와로 만신창이가 된 지붕이더란다. 아침나절부터 몰래 지붕에 올라가 장난감 기와를 만지듯 한 장 한 장 뜯어냈던 모양이었다.

 

 

  이웃집 도움으로 경찰이 달려왔다. 안면부지인 사람이 남의 집 지붕은 왜 뜯었냐니까 태풍에 비샐까 손봐주려 했다는 황당한 답이 돌아왔다. 예전에 지붕 개량 일을 한 적이 있는, 정신질환자의 우발적 소행으로 잠정결론이 났단다. 오뉴월 닭이 오죽하여 지붕에 올라갈까, 라며 엄마는 사내에게도 사정이 있을 거라며 연민했다. 놀란 가슴 쓸어내리기도 잠깐, 지붕 허빈 사내를 위해 며칠 째 기도하는 중이라 했다.

 

 

  해프닝을 지켜본 이웃과 성당 사람들이 합심해 지붕을 도로 덮어 주시더란다. 팔순을 훨씬 넘긴 엄마가 송수화기 너머로 하는 말 - 이웃은 자식 보다 가깝고 늙을수록 믿는 데가 있어야 한데이. 자식 말고 의지할 데가 있는 엄마의 삶이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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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트 어웨이 - 할인행사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톰 행크스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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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곁의 공

 

 

  피지 모누리키 섬에 가야한다는 누군가의 말을 기억해내기 좋은 오후다. 완전한 고립을 즐길 맞춤한 시간이다. 아파트 너머 강 물결은 잔잔하고 담장 밖 거리의 차 소리조차 새어들지 않는다. 그 섬에 가서 희고 둥근 공인 윌슨과 하룻밤을 지새우리라. 피범벅이 된 손바닥을 그 몸에 찍어 사람 얼굴을 그려 넣으리라.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고립감이 찾아오면 맘껏 튕겨 울적함을 달래보리라.

 

 

  피지의 모누리키 섬이 배경인 영화「캐스트 어웨이」를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그런 상상을 하게 된다. 개봉한지 십 년이 넘은 영화는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무인도에 갇힌 남자는 같이 떨어진 소포꾸러미 중 윌슨 상표가 붙은 배구공을 윌슨이라 이름 짓고 친구 삼는다. 삶에 대한 열망과 운명에 대한 원망이 혼재된 4 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남자는 제 자리로 돌아온다.

 

 

  원시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해서 우리 삶이 온전할 것인가. 영화 제목처럼 산다는 건 저마다 망망대해에 버려져 표류하는 것과 같다. 살아갈 희망이 사라진대도, 어긋난 사랑이 부서진대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게 삶이다.

 

 

  이제 남자는 새로운 삶의 지표를 설정해야 한다. 황량한 사거리에 한 장의 지도를 든 남자. 저쪽으로 가면 텍사스고 이쪽으로 돌면 캘리포니아지요. 낯선 아가씨의 익숙한 친절을 뒤로 하고 담담히 지도를 접는 남자. 하늘색 티셔츠 안으로 꿈꾸듯 바람이 일고, M자로 벗겨진 남자의 이마 위로 생에 대한 호기심이 얼비친다. 오른쪽으로 입 꼬리를 자주 올리는 남자가 독백을 한다. ‘살 만한 게 인생이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솟을 테고, 그 세파에 무엇이 실려 올지 어떻게 알아?’

 

 

  결말을 알 수 없는 그 여정에도 빠져서는 안 될 게 있다. 윌슨이란 이름의 배구공 하나. 소통과 위안을 주는 그 어떤 소품도 남자의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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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에게 권력을 주지 마라 - 답답한 현실을 바꿀 분명한 해답
미하엘 슈미트-살로몬 지음, 김현정 옮김 / 고즈윈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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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게임

 

의미 있는 사진전 하나가 개최된다. 서울 안국동 한 갤러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빛과 그림자’라는 타이틀로 이달 말까지 전시한다는 소식이다. 일간지 정치부 사진 기자 출신의 최재영 사진가의 엄선된 작품을 모았다. 역대 일곱 명의 대통령과 당시 대선에 도전한 후보 등 사십여 점의 모습을 담고 있단다.

 

 

전시회를 알리는 소식 중 유독 눈길이 가는 한 컷의 사진이 있다. 전국체전 개막식 스탠드 매스게임에서 연출된 전두환 부부의 얼굴상이다. 카드섹션이라 불리는 그 작업은 그 시절 흔히 행해진 권력자를 향한 강제된 퍼포먼스였다. 몇 컷의 장면을 얻기 위해 주로 천 명 이상의 고등학생이 동원되었다.

 

 

그 시절 학창 시절을 보낸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서로 다른 학교에서 모인 남녀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내용도 제대로 알 수 없는 매스게임 연습에 매달려야만 했다. 대형에 맞춰 훌라후프를 던졌다, 감았다를 수도 없이 하는 사이 여름이 깊어갔다. 이성을 가까이 접할 수 있고, 수업을 빼먹는다는 기쁨만으로 힘든지도 모르고 뙤약볕을 즐기던 시절이었다.

 

 

애국이란 이름으로 개인을 억압하던 사회, 집단의 힘을 과시하던 사회, 권력자 개인을 추앙하게 만들던 사회, 그런 억눌림이 일상화되었어도 절실하게 자각하지 못했던 사회. 이런 일이 불과 삼십 년 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것이 이 사진전이 갖는 일반적인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그에 못지않게 그 사진들을 보면서 자신만이 겪은 아련한 땀 냄새를 되불러내는 일, 이것도 사진전이 베푸는 중요한 감흥이 되어 준다.

 

 

철 지난 매스게임 한 컷 사진을 통해 시대가 주는 보편적 정서를 느끼는 것과 동시에 개별자로서의 특별한 심상이 떠오르는 일. 사진이 주는 최대의 매력이다. 고린내 나던 운동화를 말리며 매스게임 연습을 하던 그 때의 검은 눈동자들, 풀풀 날리는 먼지처럼 운동장을 떠도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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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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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사건 뉴스가 끊이질 않는다. 특히 아동성폭행 범죄도 증가일로에 있단다. 이번엔 나주에서 7세 어린이가 이불 째 보쌈 당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온 국민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린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법적, 사회적 안전망이 강화되는가 싶었는데 별 소용이 없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강압적인 신체접촉이나 성적학대 등을 소아성폭행이라 할 수 있는데, 이제껏 보도된 대부분의 사실처럼 가해자와 피해자는 안면이 있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많다. 또한 가해자가 정신질환이나 범법자 등 특수 상황에 처한 경우로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평범한 사람일 경우도 많다. 이번도 예외가 아니다. 한 마디로 이웃사람이 더 무서운 세상이 되어 버렸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에도 소아성애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어린 롤리타와 성인 험버트는 각각 유혹하는 적극적 피해자와 유혹당하는 수동적 가해자로 설명될 수 있다. 정황상 상호 교감이 전제된 롤리타의 언행에 비해 일반적으로 성폭행 피해자는 자기 의사에 반해 오롯이 육체적, 심리적 무참함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나보코프가 어린 소녀를 등장 시켜 하고 싶었던 말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탐색이었지 성폭행범을 위한 변명서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20세기가 인정하는 문학작품의 목록에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소설 롤리타로 인해 생긴 ‘롤리타 콤플렉스’는 오욕에 찌든 남성들의 순수에 대한 열망이자 환타지를 대변한다. 예술의 범주 안에서 허용되는 인간을 탐구하는 자유로운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양심이란 게 있어 스스로 인간 행동 양식을 제어한다. 언제나 그것을 벗어날 때가 문제다. 인면수심의 욕망을 분출하는 대상으로 어린 영혼이 감당해야할 고통은 너무 크다. 열등감의 발로가 현실에서 잘못 변용될 때의 나쁜 예를 지켜보는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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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전략 - Reading & Writing
정희모.이재성 지음 / 들녘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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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은 잔잔했고 비는 부슬거렸다. 기상청의 예보가 아니라면 태풍 언저리에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거센 바람의 주요 길목들은 상처가 깊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 강풍의 결이 살짝 비껴갔다. 가을 맞기에 좋을 적당한 비바람만 안겨 주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기엔 더할 나위 없는 날씨였다.

 

 

  그녀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다. 몇날며칠 고심해서 썼을 그녀 글의 첫 독자가 되는 게 오늘 내가 할 일이다. 그녀가 베푸는 밝고 다사로운 에너지를 생각하면 그 글의 독자가 되어달라는 그녀의 청은 천 번이라도 내겐 행운으로 여겨질 뿐이다. 혀에 감기는 커피번은 부드러웠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시고 싶었던 캐러멜마키야토는 달콤했다. 비오는 날엔 대화든 미감이든 부드럽고 달콤한 게 제격이다.

 

 

  그녀의 글은 창을 타고 내리는 빗물처럼 시원했고, 숙성된 반죽처럼 차졌다. 젊은 날 우정의 삽화 몇 장과 역사적 현장성을 조합한 노고의 결정체였다. 한 땀 한 땀 기억의 조각보를 글맛이란 바느질로 기워내고 있었다. 쉼 없는 행보를 하는 그녀의 열정이 존경스럽다고 내가 말했다. 세상은 거저 얻는 게 없다고 그녀가 답했다. 바람 불고 낙엽 떨어지는구나, 단순히 이런 느낌만 있으면 늙은 거래요. 그 사람의 물리적 나이가 아무리 젊어도 그건 늙은 거래요. 바람이 부는구나 저 바람 갈라야지. 낙엽 지는구나 저 낙엽 낚아야지. 적어도 이런 감흥이 남아있다면 그건 젊은 거래요. 아무리 나이 들어도 그건 젊게 사는 거래요.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매사에 마음이 젊으니 저리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맘 품새를 가졌나 싶다. 그녀의 기가 내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모든 주변인은 멘토가 될 만하다. 바람 불고 비 스칠 때 그런 사람과의 커피 타임은 짜릿하기만 하다. 부족한 기를 나누는 그 오롯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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