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철학 범우문고 185
가드너 지음, 이창배 옮김 / 범우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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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만의 거울로 세상을 본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자기가 꾸려온 삶의 방식대로 사물과 사람을 본다. 객관적 눈을 가졌다고 자부할수록 실은 편견이라는 잣대가 웃자란 경우일 때가 많다. 각자 경험한 만큼 사물을 평가하고, 스스로 처한 상황에 따라 사람을 평가한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할수록 그 경계는 실체가 없다.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카페에 들렀다. 휴가철이라 다들 산과 바다로 떠났는지 실내에는 우리밖에 없다. 심심했는지 곁자리에 앉은 사장이 슬쩍 우리 수다에 끼어든다. 눈치를 보더니 본심을 얘기한다. 테이크아웃해서는 안 되는 팥빙수를 사간 고객이 카페 전용 빙수 용기를 돌려주지 않는단다. 몇 호에 사는지도 모르는 그 손님 하나가 주민들 이미지를 다 흐려놓았다고 흥분한다. 업주 입장에서 양심불량인 그 손님이 서운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주민들 이미지까지 판단하는 건 섣부르다 싶다.

영국의 수필가 알프레드 가드너는 그의 작품`모자철학`에서 이런 인간의 속성을 잘 묘파했다. 작품 속 모자가게 주인은 모자 크기(머리크기)로 손님을 판단한다. 변호사나 선장 등 전문직 종사자는 머리가 크고, 일용직이나 육체노동자 등 단순직종인들은 머리가 작다는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마찬가지로 금융업자는 돈의 유무에 따라, 가구상은 의자의 질에 따라, 미식가는 요리 솜씨에 따라 상대를 재단한다는 것이다. 가드너식대로라면 카페사장은 빙수 그릇을 되돌려주느냐 아니냐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했다.

사람은 이해하고 소통하는 관계이지 판단하고 평가하는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한데도 우리는 세상을 제 안의 눈으로만 본다. 그 눈은 결코 객관적이지도 선명하지도 않다. 편견이라는 모자를 완전히 벗어던지지는 못하겠지만 그 모자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만이라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보고 싶은 사실을 볼 뿐, 봐야할 진실을 보는 데서는 언제나 멀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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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한번은 스페인을 만나라 - 뜨겁고 깊은 스페인 예술 기행 일생에 한번은 시리즈
최도성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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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지를 연민함

 

 

주문한 책들이 배달되었다. 맨 위의 것 한 권을 집어 올리는데 종잇조각이 너덜거린다. 책을 감싸는 띠지다. 강렬한 붉은색의 띠지는 다섯 권 중 네 권에나 둘러져있다. 더위 탓일까. 성가시게만 보이는 띠지를 보고 있자니 자원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띠지의 존재이유는 광고 효과 때문일 것이다. 서점에서 손수 책을 고르던 시절에는 그 시각적 덕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각종 커뮤니티가 활발하고 인터넷 서점이 발달한 지금에는 그 효과를 장담하지 못한다.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띠지 문구를 보고 구매욕을 발동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래도 띠지를 굳이 변호하자면 장식효과 및 책 보호 역할도 한다고 할 수 있다. 일정 부분 책갈피 기능도 담당해준다. 하지만 띠지의 모든 기능을 설명해도 실용적 측면에서는 그다지 와 닿지 않는다. 대부분 책 주인에게 별 관심을 받지 못하고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신세다. 본문용보다 빳빳한 재질에다 컬러 인쇄까지 해야 하니 그 제작비 또한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3000부 기준에 권당 100원 쯤 든다니 비용 대비 그 효율성이 미미하다.

 

 

띠지 문화는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있단다. 일본에서 출판마케팅 기법으로 90년대 후반부터 활용했는데 우리 업계가 흉내 낸 거란다. 누구를 위한 띠지일까.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봐도 출판업자들의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관행처럼 굳어온 악습을 과감하게 뿌리칠 용기가 없는 건 아닐까.

 

 

좋은 책은 화려한 띠지가 퍼뜨려주는 게 아니다. 책 내용이 말해줄 뿐이다. 자원, 시간, 인력을 낭비하면서까지 띠지를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 모양새에 비해 효과는 미미한 띠지. 유통 기한 십초의 운명인 띠지를 연민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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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 시나브로문고 1
무울 엮음 / 움터미디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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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픔을 지는 자

 

  인디언 속담에서는 친구를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고 정의한다. 우정에 관한 경구 중에 이토록 가슴을 저미는 말이 있을까. 흔히 친구가 슬플 때 위로하는 건 쉬워도 기쁠 때 느꺼이 웃어주기는 더 어렵다고 한다. 인간 속성 상 동정하기는 쉬워도 인정하기는 어렵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내 슬픔을 등에 져줄’ 정도라면 동정과 인정을 넘어서는 그야말로 참된 우정이 아닐까.

 

 

  연예계 잘 나가는 걸 그룹 한 팀이 왕따 사건에 휘말렸다. 당사자들 간의 불만이 SNS를 통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급기야 기획사 측에서는 왕따 대상이 된 한 명을 방출하기에 이르렀다. 휴머니즘적 접근보다 경제 논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기획사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디어가 제공해주는 여러 사실을 진실로 캐는 데 일가견이 있는 네티즌들이 가만 두고 볼 리 없다. 불 같이 일어난 그들은 기존 멤버들의 안티 카페를 개설하고 왕따 당한 당사자를 위한 구명 운동에 나섰다. 며칠 만에 몇 십만의 회원이 모였다. 유래 없는 일이다.

 

 

  세상은 다변화되고 그 속도마저 빨라졌다. 이제 우정마저 그 도도한 물결에 휩싸여 허울로만 남는 지경이 되었다. 여유는 사라지고 오직 앞서야 한다는 강박만이 눈앞에 넘실댄다. 우정도 친구도 소용없다. 내 슬픔 따위는 들키고 싶지 않은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관계를 만들기를 세상은 요구한다. 더 나은 미래, 더 좋은 거처, 더 괜찮은 생활이라는 미명하에 어려서부터 물질의 노예가 되기를 부추김당하고 있다. 그 심한 예가 연예계라 할 수 있는데 반짝 인기 있을 때 한몫하자는 심산으로 기획자들은 어린 연예인들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해왔다. 인성이나 가치관 등 사회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덕목은 안중에도 없어 뵌다.

 

 

  왕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느끼는 건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는 것이다. 가해자 역시 또 다른 피해자가 되어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한다. 왕따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언제나 상황의 논리와 관련이 있다. 왕따의 배경이 되는 구조적인 문제부터 생각해볼 문제이다. 이건 어른들이 해결해야 할 몫이다. 길지 않은 인생,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를 한 명이라도 더 만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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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서랍 - 이정록 산문집
이정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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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은 까지려고 핀다

 

  단단한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선 잘 버려야 한다. 부질없고 속절없는 말일랑 내려놓을수록 좋다. 누추한 말들의 집을 추스르기 위해 시인을 만나러 간다. 시인은 말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새가 난다’라는 단순한 문장이라고. 이 단순한 문장이 문장의 전부라고. 어떤 새가 어찌어찌 난다, 라고 말했을 때 이미 시는 제 맛을 잃어버린다.

 

 

  억지 장식을 달지 않기 위해 펜 끝을 세우는 일은 글 쓰는 사람의 기본자세일 터이다. 퇴고는 첨이 아니라 삭이어야 한다는 시인의 말은 새길만하다. ‘새 똥구멍이 훤히 보이는’ 일층 아파트를 고집하며, 운명처럼 진솔하게 시골생활을 변주해온 시인. 그 정점에서 시인은 온 삶이 시인인 엄마의 말을 채록하고 있는 중이다.

 

 

  시인의 말로 양념되고 버무려진 그 시편들이 세상에 나와 또 다른 위무의 어머니가 된다. 진물 나는 시도 좋지만 꽃밭 같은 동화·동시가 치유의 매력이 있어 쓰기도 한단다. 여기까지 듣는데 갯바람을 타고 나들이객들의 취한 노랫가락이 고성으로 들려온다. 하지만 그 소요(騷擾)는 시 열매 툭툭 내던지는 시인의 소요(逍遙) 앞에서 적수가 되지 못한다. 겸허한 시인의 말 풍경 속으로 여름밤 물상들의 귀가 순하게 젖는다.

 

 

  꽃은 까지려고 핀다 - 좋은 사람이 선물해준 그의 산문집에 시인이 적어준 말. 거짓을 벗어야 하고, 감추지 않아야 하고, 수치를 견뎌야 한다는 뜻일 게다. 까지는 게 어려운 건 금기를 넘어설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갯바람과 풀섶에 내 누추를 적시고도 좋은 글은 아득하고.  시인학교에서 만난 이정록 시인. 잘 까진 꽃으로 가득한 『시인의 서랍』에 밑줄만 하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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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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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의 태양

 

  강렬한 태양을 벗어나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은 일탈을 꿈꾼다. 고작해야 계곡이나 바다 찾아 발 한 번 담그는 정도의 일탈이겠지만 일상의 틀을 훌훌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거다. 그도 잠시 결국은 세상이 원하는 삶, 가족이 바라는 생활, 본인 스스로가 규정한 테두리 속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게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여기 제대로 된 일탈 종결자가 있다.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문제적 인간 뫼르소. 엄마의 장례식에서도 눈물 흘리지 않고, 연애를 하되 깊이 사랑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하며, 타는 듯한 태양빛에 홀려 살인을 저지르는 사내다. 평범하고 규범적인 인간 군상과 자신이 왜 다른지조차 자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천상 자유인. 자신이 일탈적 선상에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는 실존적 인간형이다.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뫼르소에겐 사랑, 도덕, 가족애, 신념 그리고 종교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이다. 도덕적으로 계산할 줄도 모르고, 종교적 원죄의식엔 물들지도 않았다. 애초에 인간에 관한 연민이나 사회가 부여한 관습이나 질서 따위에 한없이 무관심할 뿐이다. 우발적 살인으로 재판정에 섰지만 자기변명마저 혐오한다. 자신을 위한 재판이건만 스스로 제 3자가 되어버리는 부조리한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한 여름이면 이 작품이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격렬하게 이마에 내리꽂히던 뫼르소만의 실존적 태양 때문이리라. 실존주의는 누가 뭐래도 개별자의 삶을 우선한다. 타인에게 상처나 방해 없는 실존이라면 나도 기꺼이 그 배에 승선하리라. 개인의 자유의지가 존중되는 사회야말로 가장 건강한 집단이라 생각하므로.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게 솔직하기 위해 타자에게 유해한 손짓을 가한 뫼르소는 내 식의 부조리 연극의 주인공이 되기엔 한참 부족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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