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1 : 사랑하다 나는 오늘도 1
미셸 퓌에슈 지음, 나타니엘 미클레스 그림,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영원히 내 가슴 속에 각인돼 생을 이끌 그 순간. ‘사랑사고’라고 명명했던, ‘One Fine Day’로 각인된 그날 그 순간. 1996년, 어느 햇살 좋은 가을날의 주말. 내 설렘과 사랑이 시작됐고, 훗날의 용기와 통증을 동반하기 시작한 날. 누군가를 보고 ‘아찔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경험한, 그것은 어쩌면, 일생에 단 한 번 찾아올까 말까한 그런 순간이었다. 사고의 경위는 이렇다. 


우리의 접속장소였던 학원의 야트막한 정원에서 나는 음악에 마음을 맡기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싶었다. 가을햇살을 등지고 걸어오는데, 뭐랄까, 눈이 아득해졌다. 하늘거리는 원피스와 파란빛 재킷, 얼굴을 감싸는 챙 넓은 모자와 푸른 선글라스로 한껏 분위기를 낸 모습이 가을 햇살과 뒤범벅됐던 순간, 아주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심장은 박동속도를 높였고, 쿵쿵쿵 우렁찬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느닷없이 당하고야 마는. 준비도 예고도 없이 맞닥뜨리는, 사랑사고였다. 그렇게 작동한 심장을 부여잡고, 다운타운을 거닐다가 들어간 곳이 백화점 옥상 테라스에 위치한 커피하우스. 가을풍경이 잘 보일 것 같다며 들어간 그곳의 커피 한 잔 가격은 25센트. 가난한 학생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착한 가격. 커피와 함께 각자의 기억을 이식했다. 커피와 함께 한, 커피 향 같은 그녀와 마주한 그 순간, 나는 지금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어김없이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누군가와 말을 섞고,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웃고, 어슬렁거리며 작은 고민과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이젠 그녀 생각 없이도 보내는 날이 꽤나 많지만, 느닷없이 그녀가 떠올라선 그저 이렇게도 묻고 싶은 날도 있다. “잘 지내나요, 당신...?”


사랑은 그래서, 혁명이다. 모든 것을 바꿔버리니까. 송두리째 바꾸길 원한다면, 사랑 외에는 방법이 없다. 미셸 퓌에슈의 말, 절절하게 공감한다. 


“그 사람을 사랑한 이후로 나는 정말 엄청나게 변했어요. 그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사랑 자체가 나를 변화시킨 거죠. 요즘 나는 음악, 풍경, 햇빛, 인생, 모든 것을 즐겨요. 마치 모든 것이 한층 강렬하고 진실해진 것처럼 말이죠.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감상적인 된 걸까요? 사랑은 신비로 가득하다.”(pp.72~73)


신비하다. 그녀가 내게 번짐으로써 나의 생은 180도 방향을 틀었다. 신자유주의에 포획된 경쟁자로서의 촉은 꼬리를 내렸다. 사랑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녀 덕분에 나도 누군가에게 번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커피 한잔이 그런 번짐이고 싶었다. 뭣보다 그녀가 내게 건넸던 그 말처럼 ‘건강하게’ 사회에 썩어 들어가고 싶었다. 사랑의 의무.    


삶이 의무투성이라면 지겹고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를 돌봐야 했다. 사랑하기에 가능한, 사랑받는다는 사실에 따르는 의무, 특히 사랑하는 상대가 가치 있게 여기는 나를 소중하게 돌봐야 할 의무. 미셸 퓌에슈는 “사랑이란 상대의 필요를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의 에너지가 전환된 것은 사랑하기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길지 않다. 굳이 사랑을 기나긴 설명으로 채워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듯, 책의 한 줄 한 줄은 내 사랑에 느낌표를 찍는다. 건강하게 사회에 썩어 들어가기 위한 나의 모든 결정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겠다. 그 모든 과정은 어쩌면 모험이었다. 주류사회의 요구와 유혹에 늘 초연하게만 버틴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사랑하다’라는 행동의 철칙에 나를 견주어야 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내 사랑에 걸맞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묻고 물었다.


“사랑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상대가 나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 걸맞은 인간이 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에너지는 엄청나다. 이 에너지는 진정한 개심(改心), 삶의 방식의 전적인 변화, 다른 가치 체계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p.92)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형성하도록 도와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내 사랑에 대한 존경이자 태도이다. 사랑은 단순히 느낌이나 감정이 아닌 행동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니까. 실천함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 《나는, 오늘도 1 : 사랑하다》가 건네준 귀한 속삭임이다. 


책은 사랑이 축복임을 새삼 알려준다. 사랑을 일개 감정으로 알고 있다면 오산이요, 오해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실존의 강력한 상징”이라는 미셸 퓌에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사랑할 때 밖에는 삶이 아니다. 삶은 사랑하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냥 살아지는 것이다. 흉터가 남는다손, 아픔이 있다손, 그것을 피해선 안 된다. 


사랑에 대한 숱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방법론’과 ‘지침서’는 깡그리 무시해도 좋겠다. 이 책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뭣보다 사랑을 감정이나 느낌이 아닌 행동과 실천의 것으로 꾹꾹 눌러 담으면 헤매기만 하는 당신의 사랑도 해방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돌봄으로 번지는 관계를 사랑의 핵심으로 삼을 것. 

  

“어느 경우든, 처음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사랑이란 돌보는 것이다. 상대를 돌보고 관계를 돌보며, 또한 자신을 돌보는 것.”(pp.96~97)


사랑 덕분에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됐다. 내게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됐다. 내가 누구인지 눈뜸으로써 사랑은 좀 더 크게 다가왔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언제나 사랑, 사랑을 할 것이다.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것이 삶이므로. 사랑이 나를 울게 하고, 사랑이 나를 파멸시키더라도, 사랑이 나를 나답게 하고, 나로서 살게 한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그러니까, 사랑은 명사가 아닌, 영원히 동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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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프로이트는 자신의 바람대로 됐다. 아니, ‘바람이라는 표현보다 더 강력한 무엇이었다. 철저한 기획의 승리라고 볼 수도 있겠다. 코페르니쿠스, 다윈과 같이 이름만 대면 세상 누구나 알 수 있는 명성가. 그는 전리품을 챙긴 정복자가 됐다. 프로이트라는 이름이 주는 힘은 그만큼 강력하니까. 의학계나 학계뿐 아니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인간을 설명하는 거대한 테제가 됐다. 프로이트라는 이름이 주는 권위와 권능은 그의 업적 이상으로 여전히 힘을 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권능을 가능하게 했을까? 책을 보고 좀 놀랐다. 책이 꼼꼼한 사실에 기인해서 쓰여졌다면, 프로이트가 행한 엄청나고 방대한 조작(!) 때문에. 그것은 거의 신적 왕권을 획득하기 위한 처절하고 치밀한 몸부림이었다. 더구나 세상을 상대로 그것이 먹혔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놀랐다. 세상의 위대한 것들이 반드시 고귀한 품성이나 인격을 토대로 구축되는 것이 아님을 새삼 확인했다. 그러니까, 나도 프로이트의 이 말을 그대로 인용할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 이것만큼은 당신이 옳았어!

 

위대한 발견이 꼭 고귀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콜롬버스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냥 모험가였을 뿐이에요.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지만 결코 그를 훌륭한 위인으로 볼 수는 없지요. 한마디로 발견자가 위대한 사람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중요한 발견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p.97)

 

우상의 추락은 나처럼 프로이트에 대해 표피적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접근을 하게끔 만든다. 정신분석학과 인류사에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이에 대한 그야말로 반전. 이 양반, 반전 있는 사람이었어! 프로이트는 그야말로 공작의 대가, 평생 2에서 벗어나지 못한 허세 킹’? 물론 설핏 듣고 칼럼 등을 통해 읽은 적이 있었다. 프로이트의 업적이 과장됐으며, 지나치게 성()에 근거한 치료방식에서 틀린 것이 많다고. 그의 업적 가운데 지금 적용할 수 있는 치료법이 많지 않다고.

 

오늘날 현대인들은 프로이트의 치료 성공 사례가 서류상에서만 성공적이었지 실제로는 환자들의 상태를 호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p.524)

 

책은 그것을 세심하고 꼼꼼하게 확인시켜준다. 흥미롭다. 위대한 업적 뒤에 부각되지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우리는 대개 위인들의 큰 업적에 압도된다. 덕분에 사소하고 작은 이야기를 놓친다. 이미 권위와 권능에 이미 잠식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삶의 흥미로운 지점은 디테일에 있음에도 말이다. 많은 우리는 프로이트를 잘 모르지만, 안다고 생각한다. 고전을 읽지 않았으면서 읽었거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래서 더 소홀하게 되는 지점도 있다. 프로이트는 그런 심리를 꿰뚫고 그렇게 자신의 업적을 부풀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저자인 미셸 옹프레의 이 비판적 평전의 시도는 높이 살만하다.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를 만나면서부터 비로소 내 진정한 친구를 찾았노라고 확신했었던 그가 친구의 구린내를 캐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터. 친구를 더 알고 싶은 생각에 프로이트의 저작물과 접근 가능한 서간을 꼼꼼하게 살피다가 잘못된 것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감정적인 혐오나 비꼼을 눌러 담은 흔적도 엿볼 수 있다.

 

정신분석학이 유효한 학문으로 남기까지 플라시보 효과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p.329)

프로이트는 과학 용어를 빌려 인간의 심리 현상을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왠지 그의 방법론에는 문학적인 분위기가 배어 있다.”(p.333)

프로이트가 만든 세계에 우연은 없다. 다만 순수하고 신비로운 필연성이 존재할 따름이다.”(p.433)

 

그런 한편, 책은 동어반복이 종종 눈에 띤다. 비슷한 내용을 돌려서 말하기도 하고, 중언부언한다. 했던 비판 반복하고,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보이는 지점도 있다. 사실보다는 미셸 옹프레의 해석이 도드라지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책 부피만 괜히 커졌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뭣보다 번역 때문인지, 원문이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종종 걸리는 부분이 있다. 저자, 번역자와 편집자의 조율이 좀 더 필요해 보인다.


어쨌든 프로이트의 속살을 엿보면서 권능의 불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공명심. 아마 프로이트를 살게 한 가장 큰 동력이었던 것 같다.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싶다. 유리한 배경을 갖고 싶다. 돈 역시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이 결코 나쁜 건 아니다. 문제는 유명세나 돈의 축적의 폐해를 생각하지 않은, 즉 성찰하지 않는 것이다. 명성을 가질수록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돌아봄이건만, 프로이트는 화려함에만 몰두했다. 명성과 돈에 집착했다. 원하는 말만 듣고,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을 공적이 아닌 사적으로만 취득한 사람으로 보인다.

 

프로이트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생활고에 시달리며 바쁘게 살기 때문에 신경쇠약과 같은 병에 걸릴 시간마저 없을 것이라고 했다는 발언은 충분히 그의 속물적 시선을 반영한다. 속물적이면 어떠냐고? 맞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토록 갈망하는 권위와 권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책임은 불가피함을 그는 몰랐을까. 몰랐더라도 그것은 죄다. 무지해서 나쁜 사람이다. 자기 위치에 대한 정치적 자각이 없었다는 증명이다. “가난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싸우고 있는 지금-여기의 대통령처럼 말이다. 그가 했다는 동성애나 여성 차별적 발언 또한 남성우월적 시선이 창궐하고 있던 시대의 탓으로만 돌릴 문제는 아니다

 

물론 그런 자각은 쉽지 않다. 자신만의 지식과 이론으로 기득권과 권위, 명예 모두를 가지고 싶은 사람일수록 더욱 어렵겠지. 더불어 세상과의 갈등을 피하면서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에 대해선 종북’(프로이트는 어떻게 불렀을까?)으로 몰아붙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프로이트가 앎을 추구한 것 같진 않다. 그래서 저자는 그를 철학자라고도 일컬었지만, 동의하진 않는다. 한편으로 불가능한 가정이지만, 궁금하다. 프로이트가 자각하고 성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업적은 가능했을까? 미셸 옹프레도 그것은 쉽게 말 못할 것 같다. 인간을 파악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이유다. 


누군가에겐 지금의 대통령이 우상일 수도 있겠다. 반신반인의 자손이니까. 특정 셀러브리티나 아이돌을 우상으로 여길 수도 있다. 이 책이 아주 잘 쓰인 평전은 아니다. 그럼에도 내게 주는 시사점이 있다면, 우상을 통해 투영해야 하는 현실의 자각이다. 그것이 비판을 통한 추락이든 외연의 확장이든, 우상을 향한 팬심이 뻗어나가야 할 지점을 사유하게 만든다. 감정적 혐오자이든 빠돌이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우상이 아니다. 정희진의 말(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을 빌어 살짝 바꾸자. 


나의 우상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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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너를 혐오할 권리가 있다.

 

슬픔이여 안녕의 프랑수아즈 사강(1935~2004)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50, 마약 복용 혐의로 선 법정에서 사강은 그렇게 당당했다. 굳이 그의 화려한 이력이나 사생활을 들추지 않더라도, 그 말은 타당했다. 아니, 그보다는 우리의 사유를 촉발하기에 충분했다. 과연, 마약(복용)은 범죄인가. 마약이 술이나 담배보다 나빠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마약이 나쁜 것인가, 인간이 나쁜 것인가.

 

청년 논객이라고 불리는 박가분이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를 들추면서 일베의 사상이라고 내세운 것이 나는 너를 혐오할 권리가 있다’. 이른바 혐오의 문화이다. 나와 다른, 혹은 비슷한 병맛들끼리 혐오를 통해 뭉친다. 타인에 대한 공격(혐오)를 통해 공동체 아닌 공동체를 이룬다. 그들끼리 재밌다. 이른바 까 대는재미다. 일베의 사상이라고 박가분이 정의한 것은 사강의 말을 변용했는데, 문제는 중요한 전제가 빠졌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박가분이 일베를 세계의 한 일부로 인정한 것에 충분히 동감하겠다. 일베가 이루고 있는 세계는 지금 무시할 수 없는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베의 사상이 일베를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옹호한다는 주장은 오버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일베는 생각하지 마!’라며 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임론을 들고 나온 것치고는 어설프다는 생각이 든다. 나름 일베의 사상에 대해 사상적 고찰을 했다지만, 책을 읽은 감상은 안 하느니보다 못하다! 일베에게 나름의 사상이 있고, 그것의 유래를 봐야 일베를 극복할 수 있다는 그의 취지는 생뚱맞다. 왜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일베에 대한 기본 태도와 연관 지을 수도 있겠다. 나는 일베 사이트에 들어가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그들의 행태가 기사로 나올 때 읽기도 하지만, 일베를 극복하거나 정화해야 할 무엇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물론 그것을 하나의 현상으로서 바라보고,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로 여긴다. 일베만 뚝 분리해서 떼어놓을 생각은 없다. 그것 역시 세상을 인식하기 위한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일베가 내 삶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잡아뗄 생각도 없다. 직접적이 아니더라도 다른 경로를 통해 일베(의 생각과 행동)가 내 삶의 어느 한 틈에 스며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베가 쓰는 용어사전이나 일례를 모아놓은 것 같은 - 그것이 일베를 좀 더 잘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었다손 치더라도 - 글쓰기는 도통 불편하다. 그 불편함이 저자의 의도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 불편함이 사유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헛된 것이라고 본다. 일베의 사상론을 드러내기 위한 그의 글쓰기는 그렇게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미시마 유키오 등 일본 극우파의 것을 일베에 대입시키는데, 어울리지 않는다. 일베의 행동이 일관되게 극우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아서다. 극우파가 분명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면, 일베는 명확한 목적보다 재미를 위해 움직인다. 일베의 무의식적인 사상을 재구성하고 기원을 추적한다는 명분으로 외국의 낯선 사상가를 비롯해 여러 사상적인 분석틀을 동원했다는데 그냥 끼워 맞춘 것 같다.

 

더불어 일베의 반복된 어떤 행동에 대해 사회적 논란과 처벌을 감수하고자 하는 사상적 의지없이 이해할 수 없다는데, 글쎄올시다. 사상적 의지라기보다 그것을 재미로 여기는, 혹은 자신에게 가해질 피해를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사회적 논란과 처벌 따위를 생각하기에 그들은 지나치게 순정(?)하다. 되레 논란을 즐길지도 모른다. 노출증 환자가 아니라고도 말하지만, 일베의 많은 유저는 일정부분 관심병(!)’ 증세를 가진 듯도 하다.

 

차라리 사상이라는 접근보다 - 이 말에 거부감을 지닌 사람도 꽤 많은 듯한데 - ‘현상에 대한 분석이라고 썼다면 어떨까. 아쉬워서다. ‘사상이라는 타이틀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기 때문이다. 일베가 구체적인 정치 프로그램이나 의제 없이 상대를 상처주고 비꼬는 방식을 지속하는 데 사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 심지어 그것을 미학적이라고 표현하는 건 과도하다. 일베가 2002년 시작된 촛불의 사상을 계승한다며, ‘촛불을 들었던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춰 글을 썼다는데, 글쎄, 고개를 갸우뚱한다.

 

저자의 의도가 일베라는 현상을 깊이 파고들어 우리의 성찰과 사유를 북돋기 위함, 혹은 행동을 촉발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글쓰기의 방법이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예가 효과적인 것 같진 않다. 책을 통해 스스로 계몽주의자이길 자처하는, 아니면 그것을 갈망하는 무의식을 엿본다. 그가 말하는 진보좌파도 모호하다. 한국에서는 진보도 좌파도, 우파도 보수 모두 애매모호함을 품은 언어이다. 본디의 뜻과 다르게 활용된다. 좋게 말하면 한국적인 방식으로 소화되고 있다. 그러니, 부디 그 말부터 정의하고 전개하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았을까.

 

나는 일베를 하나의 공동체로 인정한다. 현실과 접점을 찾기도 한다지만, 일베는 여전히 가상의 공동체에 가깝다고 본다. 그러나 박가분이 일베를 과대 포장한다는 인상 또한 받는다. 그는 현실의 국가와 사회를 넘어선 자율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좀 더 근본적인 사상에서 우파 성향을 보인다고 분석한다. 그것도 스스로 모두 평등한 병맛이 됨으로써. 박가분의 말을 풀자면, 일베의 사상은 아나키즘에 기인한다는 얘기이다. 모두가 우스운 인간임에 걸맞게 행동하는데서 재미를 찾는 일베 유저들에게 국가와 사회를 넘어선 자율적인 공동체를 향한 갈망이 있을까. 행여 무의식에서라도 말이다.

 

, 저자는 일베의 사상을 끄집어내기 위해 너무 무리수를 둔 것은 아닐까. 일베는 새롭지도 않고, 우파다운 말과 행동도 없다. 그런데도 이 책은 그런 이들의 요란스러운 현상에 편승한 기획은 아닐까, 의심도 들게 만든다. 박가분의 재능을 아쉬운 곳에 소진한 것 같다는 얘기다. 물론 그는 다음에 더 좋은 글과 책을 쓸 것이다. 그것, 믿어 의심치 않는다. 늘 좋은 책과 콘텐츠를 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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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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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어느 편인지 묻는 당신에게,

 

김형태 변호사, <변호인>을 보고 이런 말을 썼다. “영화 <변호인> 시절에는 극히 일부를 빼고는 판사고 검사고 기자고 형사고 자기가 잘못하고 있는 줄은 알았다. 지금은?” 그는 답변도 잇는다. 정의는 사라지고 편가르기만 남았다. 그의 말이 맞다. 누구편인지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됐다. 아니 누구편인지만 중요한 세상이다. 공자든 소크라테스든 그 누가 지당한 말씀을 하시든 넌 누구 편?”이라고 닦달할 뿐이다. 비겁하다. 내 스스로의 규율이나 율법은 없다. 편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


 

경찰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본부에 강제 난입했었다. 명분은 전국철도노조 지도부 검거였다. 실패했다. 그러나 경찰, 아니 정확하게 이성한 경찰청장은 실패한 작전이 아니란다. 대명천지, 강제 난입도 어이없는 판국에 실패가 아니라고 딱 잡아뗀다. 한발 더 나아간다. 작전의 책임 라인이 줄줄이 승진했다. 치안감 인사는 경찰청장이 추천한 인물에 대해 청와대가 최종 결정한단다. 라인, . 그래 역시 편이다. 우리 편 정실인사. 비겁하다. 과연 일선 경찰관들은 순순히 이 인사를 받아들일까. 그들은 경찰인 것을 부끄러워하진 않을까.

 

공범들의 도시에서 표창원이 토로한 대목이 겹쳤다. 경찰관을 괴롭히는 것. 내부에서 상사들의 불합리한 대우, 그리고 부하 직원을 마치 노예나 몸종처럼 부리려는 태도, 인격 무시 등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했다. 그러니 궁금했다. 과연 이 어이없는 난입 작전을 따라야했던 일선 경찰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리고 경찰을 향해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마음은 어떨까. 그런 것과 무관하게 이뤄지는 윗대가리들의 자리 잔치는 과연 정당한가.

 

우린, 참 비겁한 사회, 비겁한 세상에 산다. 적당히 비겁하면 세상이 즐겁다지만, 적당함은 이미 넘어섰다. 뻔뻔함과 후안무치, 안하무인이 지배한다. 공범들의 도시는 그것을 확인한다. 뭣보다 사회지도층이라고 불리는, 그렇게 불려서는 안 될, 세력들이 망쳐놓은 세상. 표창원의 토로에 동의한다며 손을 들 수밖에 없다. “결국 옳고 그름보다 이익을 앞세우는 우리 사회의 비겁한 관행 때문이라고 보거든요.”(p.172) 김어준이 그랬다. 남자는 비겁하지만 않아도 섹시하다고. 그래서 표창원, 우리 시대 가장 섹시한 남자라고 했다. 표창원은 비겁해지지 않기 위해 아마도 천직이라고 여겼을 경찰을 뛰쳐나왔다. 김어준의 말에도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한 사회의 수준을 측정하는 여러 기준이 있다. 그 중에 중요한 이런 기준이 있다. 그 사회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 혹은 가장 비난받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권리를 보호받느냐. 한국 사회는 그런 면에서 낙제점이다. 수준이 바닥이라는 얘기다. 격차 사회의 궁극을 보자는 듯, 한국 사회는 벌어지기만 한다. 결국 편을 가른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의 고통과 통증에 교감하고 동감하지 못한다. 오로지 타자화나 시혜만 있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본질적으로 고통의 경험에 근거를 둬야 한다. 윤리적 태도는 거기서 나온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을 아는 능력이 있어야 고통 받는 사람과 같이 아파할 수 있다. 고통은 따라서 도덕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고통을 없앨, 그럼에도 근본적으로 없애는 것이 아닌, 진통제만 원한다.

 

지금-여기엔 고통을 함께 감내하고 사회적 비용을 어떻게 줄일 수 있느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다. 공범들의 도시는 우리의 텅 빈 사유를 꼬집는다. 뜨끔했다. 책은 노르웨이의 경우를 든다. 지난 20117, 폭탄과 총기난사로 77명을 숨지게 한 테러범 블레이비크에 대한 판결. 그는 22년형을 선고 받았다. 당연히 말이 나왔다. 저런 놈을 우리 세금으로 먹여 살려야 하나? 어디라고 이런 말, 나오지 않을까.

 

그런데 책에는 없지만, 공 노르웨이 총리는 그런 반응에 이리 답했다. “우리는 더 큰 민주주의와 더 큰 사랑으로 이런 것들을 방어할 것이다. 당신이 원하듯 증오로 막지 않을 것이다.” 글쎄, 모르긴 몰라도 아마 여기라면 이런 말을 하는 정치인이 있었을까. 블레이크비의 형량이 적니 많니를 놓고 불붙은 여론에 암말 않고 묵묵부답이지 않았을까. 표창원 교수는 분명하게 사회적 합의를 강조했다. 냉정한 형벌 집행에 대한 것이다.

 

하나의 인간이나 인격체로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해주고, 여론의 분노 감정이 아니라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민주적 사법 절차를 통해서 아주 차분하게 단죄를 한 거죠. 물론 그게 받아들여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덧붙여 신창원의 경우를 빗댄 것은 아하~ 무릎을 치게 만든다. 신드롬과 현상으로까지 다다랐던 신창원의 탈주 행각. 범죄자에게 왜 환호를 했을까. 그리고 그를 향한 형 집행은 정당했는가. 좁게는 사법적 정의에 대한 물음표. 본인의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탈주한 2년 동안 경찰을 농락했다는 괘씸죄가 226개월형을 추가로 선고하게 했다는 심정적 확신이 우리에겐 자리잡고 있다. 명확한 범죄행각을 펼쳐주신 재벌가 회장님들에게 내려진 형 집행만 봐도 그것은 명확해진다. 하나 같이 똑같다. 재벌 회장님들은 우리와 다른 족속이자 종족임을 그렇게 확인시켜줘야 하나?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이 거짓임을 반복적으로 상기하는 것은 이 나라는 정의가 없는 나라임을 공표하는 셈이다.

 

있는 놈들이 모든 것들을 다 좌지우지하고, 결국은 정의라는 것은 이긴 자들의 논리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는 거죠. 그런데 어떻게 일반 서민들에게 법 지키고, 도덕 지키고, 윤리 지키라고 하겠냐고요.”(p.129)

 

그래 솔직하게 까놓고 말하자. 우리 사법부, 전문성이 없다, 동네 아저씨들 모임이다. 사법고시? 조까라 마이싱! 그렇게 힘들게 법전을 들이팠다는 사람들이 범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법맹이 됐다. 자기편이 누구인지부터 살피고 어디 줄에 서야하는지 눈치부터 본다. 법보다 편


그러니 타인이 어떻게 되든 말든 타인을 고의적으로 파괴시키고도 내가 이익을 얻겠다는 재벌 회장님들이 행하시는 형태의 범죄와 생계형 범죄를 구분하지 못한다. 피해자들에게 피눈물 나게 하는 범죄 행각에도 눈을 감는 건, 결국 그들이 남의 고통과 통증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통 환자임을 증명하는 꼴이다. 시파, 우리는 단적으로 그런 환자들에게 이 땅의 정의를 맡기고 있는 셈이다. 정의가 소멸하고 없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


물론, 그들만 탓할 것, 아니다. 결국 우리도 공범임을 이 책은 쓰라리게 알려준다. 그것에 통증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인간이다. 칼 아돌프 아이히만의 경우를 되새김질할 수밖에 없었다. 악의 평범성. 유대인학살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은 공무원으로서 철저하게 맡은 직무를 성실히 이행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법적 정의가 무너진 체계와 사적 이익에 복무하는 공권력의 탈선을 보면서도 무력한 우리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바로 공범이다.

 

공범들의 도시, 우리 사회의 수준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표창원이 영국 유학길을 통해 접한 경험이 눈에 밟힌다. 영국의 경찰은 한 여고생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한국까지 연락을 해서 찾아왔다. 표창원은 이를 국가 철학의 문제, 사회 전반의 인식의 문제라고 표현했다. 한국을 끌어내리고자 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자기 측근을 사면시키고자 국가권력을 사용하고,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인정은커녕, 실패한 작전에 대한 징계는커녕, 승진을 시키는 것이 제대로 된 사회일 턱이 없다.


이 사람들은 정의가 우습다는 거잖아요. 그까짓 것, 그 정의 지킨다고 비용이 얼마나 들 것이며 이익이 얼마나 될 것이냐, 이런 차원에서 들여다보니까요. 정의에 비용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 사회에서 어쨌든 정의에 관한 문제가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고, 묻힐 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엄중한 문제이고, 신뢰의 위기를 자초하고, 그 이후의 비용만 해도 얼마나 많은 비용이 추가로 들어가는데요.”(p.129)

 

우리의 현실을 후벼 파는 책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인 문제와 맞물려 더욱 쓰라리게 다가온다. 국가(정부)란 무엇인가. 지금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 인간은 왜 사는가. 우리, 이렇게 공범이 돼서 죄를 자꾸만 쌓아가도 좋은가. 이 리뷰를 그 잘난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본다면, 내게도 이렇게 물을 것이다. “넌 누구의 편이냐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일지도 모르지. 사실 따윈 상관없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을 제시하면서 그 사실과 이유를 들이대도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남을 종북이라고 부르면 편하다.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본 한나 아렌트에게 ()’의 동의어는 무사유였다. 생각하지 않고 누구의 편인지부터 묻는 너에게, 해 줄 말은 이것이다


조까라 마이싱.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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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보다 - 100 lessons for understanding the city
앤 미코라이트.모리츠 퓌르크하우어 지음, 서동춘 옮김 / 안그라픽스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도시에는 많은 이들이 산다. 그러나 대부분 도시를 그냥 산다. 어떻게 도시를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적다. 도시를 주어진 것, 즉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니 도시기획은 자본과 권력의 편의와 (사적) 이익에 복무하는 경우가 잦다. 공공의 것으로 공동의 공간인 도시는 공익을 외면해선 안 된다. 농촌이라고 다를 바 없겠지만, 도시는 공공성의 확장이다. 도시를 제대로 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내 사는 곳이 도시라면 더욱 그렇겠다.

 

『도시를 보다』는 도시를 사유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도시를 이해하는 100가지 코드’라는 부제는 흥미로운 지점을 제공한다. 물론 한계는 뚜렷하다. 서울과 같은 한국의 도시가 아닌 뉴욕의 소호를 다루기 때문이다. 소호의 도시생활을 구성하고 그런 생활을 토대로 도시의 코드를 구성하려는 시도라서 일부 괴리감도 있다. 그럼에도 소호에 초점을 맞춘 도시 코드가 마냥 이곳과 유리된 것은 아니다. 도시는 결국 사람이,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공동의 공간은 공통점을 지니게 마련이니까.

 

《도시 소공간의 사회적 삶》에서 윌리엄 화이트가 말했다는 “사람을 가장 많이 모으는 요소는 바로 사람”이라는 지적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책은 거기에 덧붙인다.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현상은 공공장소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도시생활의 기본적인 특징이자, 마을이나 도시에서 사회공동체가 형성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끌림은 개인의 매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고 의지하는 경제·사회·전략·문화적 의존성에 따른 것이다.”(p.36)

 

책을 읽고 새삼 다가온 것은 도시와 사람의 관계다. 도시는 사람을 끌고, 사람은 사람을 끈다. 사람이 모여 도시를 만든다. 사람들로 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도시의 운명인 셈이다. 그리고 도시는 어떤 특정한 코드를 잉태한다.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형성할 수밖에 없는 규칙도 생긴다. 공공의 공간은 그렇게 유기체처럼 변화한다.

 

『도시를 보다』는 상업적 공간으로서의 소호 혹은 상업적 코드에 많은 이야기를 할애한다. 그것이 상업주의에 매몰된 도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상업이 없으면 형성될 수 없는 도시의 DNA를 제대로 짚은 것이다. 그러하기에 의당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노동이다. 거칠게 말해, 도시는 노동을 먹고 자란다. 산업화 시대 이후 도시는 농촌 혹은 도시 주변부의 노동을 흡수하는 블랙홀이었다. 상업과 노동의 집산지가 도시였다. 이농을 부추긴 것도 도시가 아니라 도시의 상업이었다. 그리고 노동의 유입은 도시의 형태를 하나둘 바꿔나갔다.

 

“도시는 ‘노동’을 필요로 한다. 삶과 노동이 얼기설기 엉켜 있다. 노점상은 활기찬 도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한몫 거든다.”(p.34)

 

도시를 살면서 얻는 안정감의 일부에는 노동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살기 위해 노동력을 팔고자 도시로 향하기도 하겠지만, 도시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모든 현장이 도시를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책은 또한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가 지역 안전에 기여한다고도 말한다. 작업복에서 사람들은 안정감을 느끼고 그 안정감은 삶의 다양성에 무게를 실어 준단다. 틀리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노동과 도시는 서로에게 기대고 있다. 노동과 삶(생활)도 서로에게 삼투한다.

 

내가 노동을 제공함으로써 누군가의 삶의 일부는 채워진다. 타인의 노동으로 내 삶의 조각도 완성된다. 결국 우리 모두는 도시의 퍼즐이다. 그것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더라도 도시는 매일 같이 다른 퍼즐을 맞춰간다. 그래서 도시의 삶을 매일 같이 똑같다고 말하는 건 도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령,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도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의 구성은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생활과 노동의 관계란 타인의 노동으로 삶을 영위하고 자신의 노동을 타인에게 베푸는 것이다. 그 결과적 관계와 상호의존성 때문에 우리는 환경과 상호작용한다.”(p.66)

 

무엇보다 ‘도시를 보’는 나의 시선을 확장시켜준 것은 공유공간으로서의 도시에 대한 코드였다. 책이 인용했듯,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건축도시 형태론》를 통해 “공유지가 없으면 어떤 사회 시스템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내 보기엔 100개의 코드 모두가 아주 넓게 보면 ‘공유’라는 개념을 품고 있다. 물론 산업화 이전 공유지는 저절로 존재했으므로 공유지를 강조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도시는 공유를 강조해야 하며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다. 사유지가 많을수록 도시는 죽는다. 그곳에 발을 디디는 사람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공유는 한편으로 네트워크를 조장한다. 이웃과 친구를 만든다. 광장, 놀이터, 교차로 등이 필요한 이유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장소를 만들고 싶다면 음식을 제공하라는 윌리엄 화이트(《도시 소공간의 사회적 삶》)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건 내가 커피를 만들고 음식에 관심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보며 우리는 도시(의 속성)를 너무 모르고 있음을 새삼 확인했다. 알아야 진짜 사랑할 수 있는 법이다. 무엇보다 도시의 모든 속성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공공성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책이다. 함께 살고 있으므로.


“공공장소 개발을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주요 조건은 차량보다 사람이 우선시되는 시설,

사회적 조화를 위한 긴밀한 네트워크,

인간의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환경,

따듯한 햇볕을 쬐거나 그늘에서 쉴 수 있는 공간,

한적한 곳을 찾아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장소,

그리고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과 뜻밖의 놀라움이 공존하는 미묘한 균형의 조화다.

그럼으로써 거리의 풍경 속에 다양한 활동을 담을 수 있다.”(pp.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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