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예술가의 초상, 알폰스 무하 위대한 예술가 2
김은해 지음 / 컬처그라퍼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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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평전의 조건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질문이었다. 알폰스 무하에 대한 세세하고 꼼꼼한 기록으로서 이 책은 나쁘지 않다. 기록노동과 출판노동 등에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도 익히 짐작을 할 수 있다. 저자는 감동적인 예술 작품을 만났을 때의 충격을 표현한 '스탕달 신드롬'을 거론하면서 알폰스 무하의 삶과 예술을 충실히 기술한다. 무하에 빠진 저자의 감흥도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다. 노동에 대한 평가와 결과에 대한 평가는 별개다. 내게 이 책은 알폰스 무하의 입문서 격이었는데, 저자의 감흥은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혼자 좋아서 블라블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감흥, 그 격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 채 내뱉고만 있었다. 즉, 독자와의 밀당에 실패한 셈이다. 


좋은 평전의 조건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인물의 내면 풍경을 드러내면서 그것이 시대나 당대의 사회와 어떻게 조화를 이뤘는지, 인물에 대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을 새로이 부각시키거나 비추면서 당시의 시대 배경이나 미시 생활사까지 복원해내는 것. 또 지엽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로 흥미를 자극하면서도 전체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아울러, 읽기도 좋아야 한다는 조건도 붙을 것이다. 가독성 문제인데, 전반적으로 수식어가 많고 글이 길다. 아르누보의 특징인 '장식성'을 감안한 글쓰기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저자의 감흥만 따르기엔 지루하다.   


뭐니뭐니해도 평전은 인물에 대한 깊은 연구가 선행되면서 인물의 철학이나 사유, 사상 등이 독자에게 잘 전달돼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같은 언어권의 사람이 유리하다. 역사와 문화 등을 공유하고 인물의 미묘한 뉘앙스까지 제대로 이해하고 붙잡아낼 수 있을 테니까. 혹자는 주석이 많아야 한다는 점도 좋은 평전의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주석을 통해 배우는 것이 의외로 많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면에서 《성공한 예술가의 초상, 알폰스 무하》는 성공적인 평전은 아닌 듯하다. 책은 때로 현실과의 접목을 위해 억지를 끌어낸다. 작가는 가령, 청년 무하의 사회 진출을 위한 출발과 오늘날 젊은이의 것을 비교한다. 이것은 범주의 오류다. 시대적 상황이나 여건이 너무 다르다. 19세기나 21세기 모두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경쟁은 치열하다'는 말을 돌고 있다며 단순 비교를 하는데, 과연 적당한 비유일까. 뭔가 지금의 청년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자극은 적절하지 못하다. 청년 무하가 성공할 수 있었던 시대와 사회적 배경과 지금 한국의 상황을 비슷하게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틈만 나면 그림 삼매경에 빠졌던 한 소년이 학창시절에 재능이 없다고 통보 받아 자신이 사랑하는 미술을 시작조차 못할 줄 알았건만, 타인들의 평가에 구속됨 없이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다 보니 결국 승승장구한 아티스트가 된 이야기"(p.20)라는 소개는 분명 흥미롭다. 안타깝게도 그런 소개만큼의 전개가 안 됐다는 점이다. 책을 읽고 훅~ 당겨서 당장 전시회도 보러갈 생각이 들 것으로 기대했다. 아니었다. 


프랑스어로 신예술을 의미하며 19세기 최후의 예술사조를 뜻하는 '아르누보'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알폰스 무하라는 예술가를 만난 것이 소득이랄까. 아르누보의 전성시대였던 1890년~1910년이면,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 혹은 좋은 시대)'였다. 과거에 없었던 풍요와 평화로 인해 문화예술이 번창하고 우아함이 넘쳐났던 시대. 무하와 맞물려 벨 에포크의 시대상이 잘 드러나지 않은 점도 아쉬움이다. 


성공한 예술가의 초상을 그렸으나, 책은 '성공한 평전의 초상'으로 남지 못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고야 말았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았으나, 내 느낌대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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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이탈리아 - 빠릿한 디자이너의 느릿느릿 이탈리아 관찰기
문찬 지음 / 컬처그라퍼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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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이탈리아(), 비슷한 점이 많다고 말한다. 둘 다 반도에 자리한 나라이며, 남북이 갈라져 있으며(나라가 갈라졌든, 정서적으로 갈라졌든), 사람들은 승질급하고 다혈질이며, 정이 많다는 점 등을 든다. , 그럴 듯하다. 그렇게 따지자면, 최고 권력자들에 대한 공통점도 나온다. 독재자가 등장했거나 또라이같은 작자들이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을 잡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

 

비슷하다는 거, 거짓말이다. 개뿔이다. 억지로라도 비슷한 점을 찾고 싶어서 그렇게라도 끼워 맞췄을 수도 있겠다. 슬로우 이탈리아를 보니 그 점이 더욱 확연해진다. 한국엔 투철한 준법정신이 국가의 강력한 기강이자 근본인양 허구한 날 지껄인다. 이 나라의 도덕수준이라는 것이 거리에서 휴지 버리는 것 여부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정도다. 이탈리아? 저자가 훑어본 이탈리아, 준법정신 따위는 개에게나 줘 버려~ (물론 개도 받지 않을 터이지만!)

 

대신 이들은, 물론 자본주의에 물든 것은 매 한가지이긴 하나, 성공이라고 일컬었을 때 그것이 금전적인 윤택함을 뜻하지 않는다. 자아실현이 성공이란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고, 하며, 자기 생을 자신이 기획하고 꾸려나가는 것. 남의 인생을 살지 않는 것이다. 잘 먹고 삶을 즐기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삶을 삶답게 사는 것 아닐까. 프랑스어로 사부아 비브르(Savior vivre).

 

한국에... 그것,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진 않겠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미치도록 애 쓰고 용을 써야 가능한 무엇이다. 뭣보다 오지랖 넓은 남들의 혀 끌끌 차는 시선도 견뎌내야 한다. 잘 먹고 삶을 즐기겠다는 목표 아래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만큼만 일을 한다는 것,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알까? 이런 분위기가 만약 사회적으로 조성된다면, 게으르다고 타박하고 국가경쟁력 떨어진다고 기득권은 아주 개지랄을 떨어댈 것이다.

 

책은 부러운 이탈리아의 일면을 끄집어낸다. 이런 일기예보를 상상하니, 나는 당장이라도 이탈리아에 풍덩 빠지고 싶었다. 오늘 밤 하늘의 별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는지 예보해준다고 한다. 저자는 남부 타란토 항구에 머물 때, 기상캐스터의 약간 상기된 어조의 예보를 듣고 밤 산책을 나가 별비를 맞았다고 했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 나는 이탈리아와 한국은 명백히 다르다고 나 홀로 판결 내렸다. 기상캐스터의 옷과 미모에 매달리는 한국에서 별빛예보를 듣는다는 건 상상불가!

 

저자는 이탈리아인들이 개인을 중시하고 자신만의 기준을 갖게 된 연유를 르네상스에서 찾는다.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를 이끌어 가는 삶. 이런 정신을 싹트게 한 계기가 르네상스라고 하면서 깊은 것을 볼 줄 아는 이탈리아인의 안목을 언급한다. 제 아무리 뛰어나고 출중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발굴하고 드러내 줄 안목을 지닌 사람이 없다면 그는 그저 장삼이사로 삶을 마감했을 터. 다빈치나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재능을 키우고 발휘하며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이탈리아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다빈치나 미켈란젤로가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닌 사회 전체가 만들어냈다는 저자의 시각에 완전 동의한다. 비범함을 알아보고 지원하며 갈채를 보내줬기 때문에.

 

한국의 권력자들이 웃기지도 않은 것도 이런 지점이다.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키워야한답시고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깝죽댄다. 창조경제, 창의적 인재 육성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아니 사실은 별로 그럴듯하지도 않은 용어인데, 사람들을 현혹한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를 만들어낸 사회적 분위기와 환경 등은 고려하지 못한다. 눈을 현혹시키는 시각적 요소가 아닌 적합한 역할에 맞추는 이탈리아 디자인의 힘이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로부터 나온다는 저자의 깨달음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책을 읽으면 이탈리아, 발 딛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러나 전제는 커피 만드는 사람으로서, 음식에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탈리아에 대한 로망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십대 초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발 디뎠던 이탈리아에서 내가 놀란 것은 오리지널 피자의 맛과 준법정신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이후 이탈리아에 대한 허기는 책 등을 통해 때우고 있다. 이 책도 그 일환이지만, 직접 만나는 것보다 좋은 게 있을라고.

 

전반적으로 심심한 책이다. 이탈리아에 사는 가장 보통의 사람들을 만나 그 이야기를 풀어냈으나 차라리 전공인 디자인이라는 창을 통해 이탈리아를 바라봤으면 어떨까 싶다. 여느 이탈리아 여행 책과 큰 차이가 없다. 비교할 건 아니지만, 박찬일 셰프의 어쨌든, 잇태리의 감질 맛 나는 이탈리아보다 맛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이탈리아에 대한 책을 읽고 싶다면, 굳이 이 책을 권하진 않겠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제시할 수도 없다. 다른 책을 읽거나 이탈리아로 가서 부닥치는 것이 훨씬 낫겠다. 따라서 책에 좋은 점수를 주긴 어렵다.

 

어쨌든 저자도 이탈리아를 다시 찾을 것임을 예보(?)했다. 이탈리아를 다녀온 사람들이 다시 이탈리아를 찾는 이유도 제시한다. “. 느슨한 사회의 나른함을, 단단히 조여진 허리 벨트를 헐렁하게 늦추었을 때 느끼는 편안함 같은 이탈리아의 공기를 그리워하게 된다.”(p.27) 하긴, 잇태리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을 일삼던 박찬일 셰프도 그것이 반어법임을 은근슬쩍 드러내며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혹시 이탈리아에 나쁜 감정이 있어서 절대 가볼 만한 나라가 아니야라고 반박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적어도 당신은 지옥 같은 한국을 떠나온 것이잖아라고 말하겠다.”

 

이 지옥 같은 한국, 아니 무간지옥 그 자체인 이곳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지 않겠나. 그 어디가 이탈리아라면 브라보! 먹기 위해 이탈리아를 가는 것도 좋겠다. 나는 다시 이탈리아를 간다면 그것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생에서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맛있는 것을 먹고 건강하게 사는 것, 이탈리아와 나는 그것으로 통할 테니까. ‘라르테 디 아란자르시(어떻게든 만들어 내는 것)’을 외치면서. 내 오감을 열고 아템포(본디의 빠르기)’로 나는 이탈리아를 걷고 먹고 만날 것이다. 단언컨대 이탈리아는 가장 완벽한 먹거리가 있는 곳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았으나 내 느낌 그대로를 적었다. ‘주례사 리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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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컴퍼니 - 변화를 주도하고 성공으로 이끄는 혁신 전략
리사 보델 지음, 이지연 옮김 / 레디셋고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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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된 단어들이 있다. 변화가 그렇고, 혁신도 그렇다. 이에 따라붙는 창의나 창조 등도 마찬가지다. 특히 기업들은 이 단어(들)에 목을 맨 듯, 끊임없이 지저귄다. 그러나 안을 파고들면 내용이 없다. 동어반복에 좀 더 면밀히 따지고 들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포장된 수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지. 니들 더 뺑이 쳐라. 떡고물 좀 떨어지게 해 줄 테니 회사 배 좀 더 불려봐라.

 

왜 그리 거칠게 말하나 싶을 텐데, 그들이 지저귀는 ‘혁신’의 공허함 때문이다. 오로지 경쟁에서 이기라는 말을 교묘하게 포장했다. 이윤을 더 뽑아내기 위함이다. 외부 뿐 아니라 내부에서 경쟁을 부추긴다. 혁신이라는 말로 포장된 ‘등골브레이커’의 면모다. 기업, 물론 돈(이윤)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이윤인지, 그 이윤이 어떻게 나오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기업의 변화와 혁신이 단지 이윤을 위해서라면 그것은 공허하다. 변화와 혁신의 기저에는 노동이 검토돼야 하나 대개의 경우, 이런 배려나 생각은 빠져 있다. 기업과 사회의 관계 또한 텅 비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킬 더 컴퍼니》는 기업의 혁신과 변화를 말한다. 그것을 위해 회사를 죽이라고 말한다. 경쟁자의 입장에서 나의 회사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촉구한다. 그리고 회사에 만연한 좀비적 태도를 깨울 수 있는 다양한 프로세스와 방법을 제시한다. 나쁘지 않다. 어느 정도 회사가 커지고, 사람이 많아지다 보면 회사는 불가피하게 관성에 의해 움직인다. 표준화된 절차와 문서 작업이 따르고, 형식적인 일들이 많아진다.

 

“회사의 리더들이 사람이 아니라 프로세스에 초점을 맞춘다. 모든 업무를 표준화하고 형식화하다 보니 회사에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리더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프로세스를 살핀다.”(p.63)

 

책은 그것에 메스를 대라고 말한다. 필요하다. 회사가 관성에 의해 그냥 굴러가게만 하다간 시장에서 낙오되고 말 테니까.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관성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더 이상 신경 쓰지도 않고 무사안일주의 문화가 퍼진다. 관료화가 점점 똬리를 틀게 된다. 회사는 순응과 효율을 강조함으로써, 노동자들은 온순한 양 혹은 좀비로 전락한다. 노동자들의 주체성은 찾아볼 수 없다. 의사 결정 능력도 덩달아 감퇴되기 때문이다. 위험을 피하려는 문화가 바이러스처럼 휘감는다.

 

책이 강조하는 ‘생각하는 문화’, 나쁘지 않다. 저자는 그것을 ‘싱크잉크’라고 표현한다.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이상적 회사를 지칭한다. 좀비 회사를 싱크잉크로 변화시키라고 말한다. 노동자들에게 탐구심, 호기심, 주인 의식, 창의적 문제 해결, 독립심을 심어주라고. 이것이 생산적인 혁신을 위한 기초를 놓는다고.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여기서 말하는 혁신의 내용은 결국 CEO와 임원, 주주들의 잇속을 챙기는 수단이다. 시장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방편에만 치우쳤다. 노동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결여됐다. 회사를 죽임으로써 노동(자)의 성격과 질이 어떻게 바뀔 것이며, 사회 속에서 기업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유는 없다. 혁신이라는 말을 오염시킬 뿐이다. 혁신은 사람(노동)과 사회와 함께 결부돼야 할 문제지, 기업 안에서만 얘기돼선 안 될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을 시장으로 환원하는 자세. 달갑지 않다. 기업 내 좀비문화를 바꾸기 위한 방법에서 좀 더 깊은 고민을 내포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기업 내에서 시장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화는 존재할 수 없을까. 함께 공유하기 위해 만드는 그런 문화들. 생산성과 효율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그것이 자연스레 따라올 수 있는 기업 문화와 노동에 대한 사유. 


그래, 맞다. 경영기술서에 뭘 그런 것까지 바라다니, 나도 참 오지랖이긴 하다. 네가 대안을 내놓아라, 하면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노동자협동조합을 꾸리는 일개 커피노동자가 세세한 그림까지 어찌 그리겠나. 다만 이 리뷰는 편향적이면서도 균형을 잡기 위한 것이다. 예단이지만,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 책이 건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리뷰를 쓸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런 사소한 태클을 거는 반대 의견도 좀 있어야지. 책도 말하지 않았던가.

 

“최선의 정책은 동료나 부하들이 다수 의견에 공공연히 반대할 수 있고 심지어 반대하도록 권장되는 회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p.76)

 

또 하나의 사소한 우려라면,

이 책이 권하는 다양한 방법론이 또 하나의 프로세스가 되지 않을까?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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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경제학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영욱 외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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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단박에 우리를 사로잡았다. 우물 안 개구리 같던 한국을 단박에 세계의 중심국가를 끌어올리는 주술 같았다. 모든 것은 세계화로 향했다. 모든 수사는 세계화에서 비롯되고 파생됐다. 그러나 그 세계화가 줄기차게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양극화는 심화됐고, 격차사회로 진행됐으며, 돈이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게 됐다. 지구촌이라는 말로 세계화를 설명했던 수사는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세계화는 화폐화의 다른 말이었던 것이다.

 

행복의 경제학은 그런 세계화의 거짓부렁을 꼬집는다. “세계화는 인간과 환경을 희생시켜 자신의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각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는 초국적 기업의 작품이다. 이 과정에 세계의 분열과 갈등에 대한 책임이 있다.”(p.141) 그리고 우리의 반성과 성찰을 유도한다. 그것이 오래된 미래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이기에 설득력을 더한다. 헬레나는 우리가 어떤 준비나 논의 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세계화를 발가벗겨 놓는다. 기만적인 언어와 뉴스피크(정치선전용의 모호하고 기만적인 표현)를 통해 지구인의 삶 깊숙이 들어온 신자유주의의 폭주와 폐해에 대한 총정리라고 해도 좋겠다.

 

이 책의 미덕은 세계화의 폐해에 대한 실증적 지표와 설득 뿐 아니라 확실한 대안을 내놓는다는 점이다. 지역화. , 마을공동체의 회복이다. 지역정체성과 지역경제, 지역지식이 앞으로의 시대를 이끌어가야 할 근거를 제시한다. 세계화는 그 수사와 달리 공동체를 파괴했다. 그러나 인류가 살아가기 위해서 공동체는 필수적이다. 인간적 유대가 필요하다. 공동체에서 살아 숨 쉬는 역할 모델을 만나고 사랑을 배운다.

 

세계의 붕괴를 막으려면 지역적 상호의존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즉 대규모에서 인간적인 규모로 인위적 소비문화에서 사람과 자연이 빚어내는 문화로.”(p.78)

 

그것은 우리가 아는 마을이다. 관계와 이웃이 다시 살아난 마을공동체를 통해 세계화에 초토화된 지구의 삶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헬레나는 조목조목 설명한다. 성장과 세계화의 이름으로 파괴되었던 문명은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회복될 수 있다. 지역화 즉 마을화는 지금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위기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경제와 환경은 건강을 되찾을 것이고, 도시화의 불건전한 조류를 막을 수 있으며, 문화적 다양성이 회복될 것이다. 종족 갈등이나 폭력도 줄일 수 있다. 무엇보다 지역화를 향해 나아가는 게 현재의 세계화를 지속하는 것보다 비용이 덜 들고 사회환경적 손실도 적다.”(p.35)

 

성장의 이름으로 진행됐던 세계화는 경제의 집중을 불러왔다. 기업들만 살이 쪘고, 노동자는 거리로 내몰렸다. 이 책이 내세운 지역화는 그 집중이 불러온 폐해를 물리치고 행복의 경제학으로 갈 수 있는 방법론이다. 곧 경제시스템의 전면적인 전환이다. 그것은 당연해 뵌다.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기존 경제 체제를 살짝 수정하는 정도로는 지금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스템 자체가 문제라는 점은 이미 2008년 경제위기로부터도 명백해 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관성이 지금의 체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유감이다.

 

지역화는 세계화된 기업자본주의에 대한 체계적이고 폭넓은 대안이다. 경제활동의 규모를 근본적으로 줄이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국제무역의 철폐를 의미하거나, 자급자족을 위해 노력하자는 건 아니다. 단지 보다 책임 있고 보다 지속 가능한 경제를 발전시키고,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집 가까이에서 생산하자는 것이다.”(p.36)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맛있는 두부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금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포장두부에 익숙해져 있다. 식품 대기업들의 포장 두부가 마트를 비롯한 시장을 장악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짜 두부라고 보기 어렵다. 유통기한 보름의 각종 화학첨가물과 향이 가미된 짝퉁이다. 우리는 진짜 맛있는 두부를 잃었다. 소규모 가내수공업이 갓만든 두부의 맛은 마을 단위에서만 가능한 무엇이다. 지역화가 필요한 것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덩치를 키우고 성장해야 한다는 논리가 만들어낸 기형아가 포장 두부인 셈이다.

 

행복의 경제학은 안정적인 지역경제로 향해야 한다는 근거를 명확히 제시한다. 생태적·사회적 파괴로 치닫고 있는 지금 상황을 되돌리기 위함이다. 즉 경제활동을 인간적·생태학적 욕구에 적응시키려는 것이다. 마을기업 등 지금 마을공동체와 함께 형성되고 있는 마을경제의 구조가 자리를 잡아가야 하는 이유다. 소수의 거대 기업은 극히 소수의 이익만을 위해 복무한다. 공동체 따윈 안중에 없다. 대다수 노동자나 주민의 삶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지역화가 급선무다. 지역화 혹은 마을화는 그래서 경제민주화의 다른 이름이다.

 

경제민주화가 경제 주체들이 주인이 되는 것이라면, 지역에 기반을 둔 기업들 손에 경제활동을 맡기는 지역화와 바로 연결이 된다. 안정적인 지역경제는 협동과 친밀, 상호의존적 공동체의 근원이 된다. 지역공동체가 커지고 강해짐으로써 사람들의 삶도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행복의 경제학은 마을이 대세가 돼야 함을 확인하는 책이다. 그곳엔 진짜 삶이 있다. 세계화라는 명분에 의해 노예화된 삶은 바뀌어야 한다. 에너지, 식량과 농업, 교육, 의료, 미디어 등이 거대기업이 아닌 인간을 위해 작동해야 한다. 마을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나고 자란 곳에서 각자의 삶이 뿌리내림으로써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마을화(지역화)는 경제학이 인민의 진짜 행복을 위해 복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성장에 대한 맹목적 인식을 아직 깨기는 어렵다. 성장해야만 분배도 있을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의 주술에 주화입마를 입은 까닭이다. 그렇다고 이웃 없이 관계없이 살아가는 무연사회가 주는 끔찍한 풍경을 더 이상 접하는 것은 두렵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책을 덮고 나서 어떤 방식의 행동과 실천을 하느냐가 내 삶과 지구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역 제품을 사세요라는 캠페인,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엇이다. 나는 이것부터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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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부모 -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
이승욱.신희경.김은산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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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학교 2013>은 한 편의 지옥도를 보는 것 같다. ‘교육’으로 포장된 사육의 현장은 학교라는 이름이 이미 지옥의 다른 이름임을 엿볼 수 있다. (당연하지만, 지옥이라고 만날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엄마의 치맛바람에 휘둘리는 모범생 민기의 말이 그것을 대변한다. “날 때부터 스무 살이었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그전까진 없는 인생이니까.” 어떤 것도 주체적으로 할 수 없는, 엄마의 꼭두각시로 움직이는 저 아이의 마음, 아마도 지옥이리라.

 

한해 평균 158명의 청소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라, 청소년 자살 증가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 등 불명예는 꼬리를 문다. 청소년 전체 사망 중 자살 사망 비율이 2000년 14%에서 2009년 28%로 10년 새 2배나 늘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는 이 통계. 그렇다면 아이들을 지옥으로 내모는 사람들은 누굴까.

 

《대한민국 부모》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다른 누구도 아니다. 부모다. 부모에게도 그러니, 이곳은 지옥이다. 우리는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니 엄친딸(엄마 친구 딸)이니, 우스개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런 미친 단어도 없다. 내 자식의 오리지널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아이에 빗대 아이를 다그치는 이상한 풍토가 이 땅엔 있다.

 

그 저변에는 교육열이라는 이름의 불안열이 있다. 불안을 동력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극한으로 치닫는다. 어떻게 살아야할지 중심이 없는 부모는 그저 아이를 다그치기만 한다. 옆집 엄마의 한 마디에 대책 없이 흔들린다. 내 스스로 만든 지옥에 아이까지 끌어들이는 형국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가치는 없다. 아이에게 전파해 줄 수 있는 가치가 없으니 물려줄 것이라곤 내 마음의 지옥뿐이다. 즉, ‘함께 살자’가 아닌 ‘함께 죽자’의 구조. 자신의 불안을 아이에까지 전이하는 나쁜 구조.

 

나는 자식도 없고, 결혼도 않았지만, 《대한민국 부모》는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할 필독서라고 본다. 우리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게 자식이 없다고 남의 일이 아니다. 내 조카의 일이며, 그 부모는 내 지인들이다. 주변의 부모인 친구나 선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이 스스로 만든 감옥을 엿본다. 자신의 아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함으로써 스스로 만든 마음의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한다. 자율적으로 들어간 그 틀에서 그들은 나올 생각을 않는다. 아니 못하는 것 같다. 내 아이를 믿지 못하고, 남들보다 뒤처질 거라는 무한 불안만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것을 위해 자신이 할 일은 돈을 벌어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다.

 

이 견고한 논리에 맥없이 투항한 이유를 저자들(이승욱, 신희경, 김은산)은 심리 상담 현장에서 길어 올린 생생한 예를 통해 잘 설명해준다. 정서적으로 애착관계를 가진 사람과 분리된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감정이 불안이다. 아이와 엄마의 관계에서 분리가 발생할 때, 아이뿐 아니라 엄마도 불안해한다. 정서적으로 불안한 부모가 아이와의 분리를 받아들이기 힘든 건 자명하다. 부모는 아이를 끝까지 지켜야한다는 명목으로 ‘헬리콥터 부모’가 된다.

 

그것은 곧 불안사회에 대한 심리학적 근거의 제시다. 아이보다 부모의 불안이 훨씬 더 크다. 아이의 불안은 부모의 불안이 전이된 것이다. 즉, 부모의 불안일 뿐, 아이의 불안은 아니다. 부모의 불안을 보면서 자란 아이는 불안해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부모는 아이를 다그칠 뿐이다. 불안 때문에 두뇌 회로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문제는 시스템이다. 잘못된 시스템 때문에 부모와 아이 모두 지옥도에 빠졌는데, 그 지옥도에서도 아이를 다그치기만 한다. 잘못된 시스템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지난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고3 남학생이 성적을 강요하는 엄마를 살해하고 8개월간 집에 방치해 둔 사건. 아이의 패륜을 탓하기 전에 무엇이 엄마를 살해하도록 몰아갔는지 그 근원, 우리는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을까. 글쎄.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부모 공부’가 아닐까 생각했다. 부모가 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스스로를 포함해서!)를 보호해야 함을 감안하면 공부가 필요하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들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보호받고 있구나. 우리는 안전하구나. 우리가 성장해도 되는 곳이구나. 요즘 아이들, 패기가 없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어른들의 생각은 잘못됐다. 부모가 그런 환경을 못 만들어줬다. 그러면서 윽박만 지른다고 아이들이 저절로 그렇게 될 리가 없다. 부모들이 베이스캠프가 먼저 돼 줘야 한다. 베이스캠프가 불안하니까, 아이들은 베이스캠프에 묶여서 못 떠난다.

 

이 책은 충격적인 것만 예만 모아놓은 게 아니다. 부모 딴에는 모든 희생을 치러서 의사를 만들어 놨더니 “당신의 아들로 산 것은 지옥이었습니다. 저를 다시는 찾지 마십시오”라는 메시지만 남기고 연락이 끊긴 아들은 지금 가장 보통의 아들일 수 있다. 자기 삶도 서사도 없는 부모, 부부간의 관계도 깨진 채 껍데기만 남은 가정은 우리 대부분의 가정일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자신의 삶을 꾸릴까. 부모에게 대놓고 ‘찌질이’ ‘미친년’이라고 부르는 비정상이 정상처럼 흘러가는 세상. 과연, 대한민국 부모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슬픈 족속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떠해야 할까. 이 책이 건네는 진단서는 꽤나 약발이 있어 보인다. 포기. 인간의 성찰과 성장은 포기하는 순간부터 일어날 수 있다. 포기의 다른 말은 곧 수용이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오리지널을 인정하면서 남의 아이와 비교하지 않기. 오롯이 내 아이를 내 아이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부모도 아이도 지옥도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의 문제 해결 진단은 그런 면에서 꽤나 유효해 뵌다. 기존 사고의 틀에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 이 책이 좋은 책인 이유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없애는 것입니다. 저희가 제안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우려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비현실적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를 없애고 새로운 현실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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