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잇태리
박찬일 지음 / 난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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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른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여행상담 선생님 일수꾼이에요. '잇태리'를 여행하고 싶다고요? 어떻게 하면 여행을 잘 할 수 있는지 알고 싶다고요. 잇태리 여행하는 거, 어어렵지 않아요오~ 제가 맛있고 즐거운 잇태리 여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먼저어, 잇태리에 가기 전에 잇태리 음식점에 가서 잇태리 음식에 적응하면 돼요. 홍대 부근의 '라꼼마'가 참 좋아요. 그리고 나서, '라꼼마'의 오너 셰프인 박찬일 아저씨를 만나서 물어보면 돼요~ 박찬일 아저씨를 못 만났다?

 

그래도 방법이 있어요오~ 글맛이 살아 있는 박찬일 아저씨의 《어쨌든, 잇태리》를 보면 돼요. 잇태리 갈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박찬일 아저씨가 시시콜콜 알려주셔요. 뭣보다 '진짜 잇태리를 만나는 박찬일의 버킷리스트 30개'도 있어요. 잇태리가 익숙하지 않고 낯설어서, 가서 뭘 해야할지 애매하다면 그걸 정해주는 리스트에요. 그러니까, 박찬일 아저씨는 '잇태리 애정남'이에요. 이 책 읽고 잇태리 갔다오면 잘 다녀왔다고 소문이 날 거예요.

 

<개그콘서트>의 <사마귀유치원>에 일수꾼이라면, 이렇게 소개할지도 모르겠다. 박찬일 셰프는 자신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 잇태리를 아주 맛깔나게 버무린다. 아마도 자신있게 글요리를 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 같은데, 그 글요리를 맛보는 입장에선 맛이 돋는다, 돋아. 

 

읽다 보면 눈은 번쩍! 귀는 쫑긋! 말초신경은 아~. 물론 이 표현은 약간의 과장이 섞인 것이지만, 죽기 전에 다시 한 번이라도 잇태릴 가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죄를 짓는 느낌이 들 것 같다. 특히나 먹을거릴 놓고 보자면 더욱 그렇다. 

 

20대 중반 배낭여행의 한 코스로 잇태리에 발 디뎠을 때, 나는 몰랐다. 그저 헤집고 돌아다녔다. 그때까지의 잇태리란 <시네마천국>의 아름다운 시칠리를 품은 나라, <로마의 휴일> 오드리 헵번의 베스파를 잉태한 나라, 피자의 본고장 정도였다. 그때 그 짧은 잇태리는 그 전에 알던 피자의 맛을 바꾸고 로마는 질서정연보다는 번잡했다는 정도 외에 지금 특별히 남아 있질 않다. 

 

물론 잇태리 남자들이 잘 생겼다는 것은 남자인 나도 인정할 만 했는데, '잇태리 남자는 바람둥이'라는 선입견까지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자인 내게 '작업'을 거는 잇태리 남자는 없었으니까!) 먹는 것에 대해 지금만큼 민감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그냥 있으면 꾸역꾸역 먹었다. 특별히 잇태리 음식을 감식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주어진 대로 먹었다.

 

그런데, 커피를 생의 중심에 놓은 지금, 내게 잇태리는 다소 특별하거나 로망을 품은 곳이다. 커피의 심장, 에스프레소가 탄생한 곳이 잇태리니까. 이전에 갔을 때, 잇태리의 에스프레소를 맛보았는지 그것도 모르겠다. 기억이 가물하다면 아직 나는 잇태리 에쏘를 맛보지 않은 것으로 하자.

 

그러니, 잇태리는 다시 가고 싶은 로망이다. 자주는 아니라도 종종 잇태리를 들린다는 박찬일 셰프가 부러운 것도 사실이고. 책은 그 로망을 더욱 부추긴다. 박 셰프, 잇태리를 툴툴 거리는 것 같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행간에는 잇태리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거나 잇태리를 향한 지름을 부추긴다. 한마디로, 잇태리 돋는 책이다.

 

미국식 피자나 짝퉁 화덕으로 페이크하는 피자집들 말고, 진짜 피자이올로를 만나서 진짜 잇태리 피자 맛을 보고, 올리브와 식초, 소금만 딱 뿌려진 간결한 샐러드와 (금연법이 발효됐다지만) 시골 카페의 방코에 서서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에쏘를 들이키고 싶다.

 

또 작년 8월에 돌아가셨다는 위대한 주방장이자 파스타의 어머니, 리디아 할머니의 흔적도 만나고 싶다. 허름한 주방복을 입고 팔순의 나이에도 생면을 만들었다는, 잇태리 음식의 원형질이 있었던.  

 

그래, 뭣보다 내겐 커피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조차 맛있다는 잇태리의 커피. 빨리빨리와 여유가 바리스타 안에서 공존하는 커피. 에쏘의 본고장에서 모카포트의 본고장에서, 잇태리의 검은 혈액을 내 심장 안에 투여하고 싶은 거다. 젖과 커피가 흐르는 땅에서 잇태리의 향을 맡는 그런 순간. 책을 보면서 나는 그런 것을 상상하고 꿈꿨다.

 

총리에서 실각했지만, 여전히 베를루스코니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잇태리 사람들이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만, 채무위기에 맞닥뜨린 잇태리의 경제가 바가지를 씌우는 것은 아닐까, 우려 안 되는 바도 아니다만, 박 셰프는 잇태리 여행은 순전히 먹는 여행이라고 했다. 먹는 것만 놓고도 잇태리는 가볼 만하다는 얘기렷다. 그는 이렇게까지 염장질을 해댄다.

 

“이탈리아 식당의 메뉴는 계절별로 변해서 식도락가들을 즐겁게 한다. 지방별로 요리가 다 색다르고(돈 많은 서울내기들의 입맛에 맞추기 바쁜 한국의 지방 음식을 생각해보라) 식당의 개성이 뚜렷하다.”(p.45)

 

나는 그저, 책이 안내하는 잇태리를 맛보며, "뿌오나(buona․맛있다)"라고 외치고 싶었다. 혹은 "케 벨 파노라마!(오메 멋있는 거!)" 이 말은 좀 변태적 기질 때문이겠다만, 젖 떼고 나서도 여전히 여자들 가슴골에 머리를 처박고 싶어하는 것이 수컷이라는 박 셰프의 말마따나,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들은 고맙게도 옷이란 모름지기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드러내기의 용도로 쓰는 것이라고 믿는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이다."(pp.70~71)

 

그래, 인정한다. 내 안구정화를 위해서다! 잇태리 여자들의 드러내기 패션 훔쳐보기! ^^;; 버스를 몰면서 통화를 하는 잇태리 운전사의 곡예운전도, 코레아에서 왔다고 하면 박두익부터 외치고 보는 잇태리인들의 무심함도, 1유로를 받는 잇태리 주요역 화장실의 작태(?)도 잇태리를 향한 돋움을 막진 못한다. 그까이꺼 걍 가서 맞닥뜨리면 되지, 뭐. 이렇게 생각하게 만든다.

 

박 셰프는 고단수다. 부러 이런 잇태리의 부정적인 면모를 슬쩍 흘린 것 같다. 그것조차도 어쩌면 덮을 수 있는 곳이 잇태리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이다. 잇태리가 그에겐 애증의 관계였다고 고민하나, 책은 증보다는 애가 절절 끓어오른다. "맛의 천국"이요, 잇태리 자체가 아예 맛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이 그걸 증명한다. 그리고 이렇게 방점을 찍는다.

 

"그래서 이탈리아는 가볼 만한 나라다. 혹시 이탈리아에 나쁜 감정이 있어서 “절대 가볼 만한 나라가 아니야”라고 반박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적어도 당신은 지옥 같은 한국을 떠나온 것이잖아”라고 말하겠다."(pp.29~30)

 

졌다. 지옥 같은 한국을 떠나온 것이잖아. 이말 하나로, 모든 것은 진압되고 올스톱된다. 더 이상 할 말, 없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그래, 이제 한국에서 모든 잇태리는 박찬일로 통한다. 이렇게 잇태리를 요리해 놓다니, 박 셰프는 분명 잇태리관광청의 명예홍보대사이거나 무료 왕복티켓 같은 걸 협찬 받고 있을지 모른다. -.-+ (조사하면 다 나와~)

 

이젠 로마,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 등만 돌아놓고선 잇태리 봤다고 깝칠 일 아니다. 잇태리를 잘 갔다왔나 아니냐는 박찬일 버킷리스트를 몇 개나 했는지로 평가 받아야 한다. 그래, 나도 잇태리를 다시 먹을 날을 꼽는다. 역 근처에서만 먹지 않으면 되니까, 그것만 피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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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음식문화박물지
황교익 지음 / 따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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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라고 하면 으레 치를 떠는 사람들, 있다. 특히 먹을 것 놓고, 정치가 어쩌니 저쩌니 하면 화제를 돌리자거나 짜증 내는 사람들, 역시 있다. 정치를 저 여의도나 파란 집에서 벌어지는 그들만의 리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예, 정치라면 무관심하다고, 어떤 것도 모른다는 양 자랑스레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닥치고 정치다. 정치는 저들의 리그에만 있는 게 아니다. 당장 무엇을 먹을 것인지 택하는 것부터 정치는 이미 이뤄지고 있다.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그러니 정치에 관심 없다며 치부터 떨고 보는 일은, 거칠게 말해, "난 일자무식쟁이"라는 커밍아웃이다.

 

내 작은 커피하우스는 공정무역커피를 다루고, 유기농산품과 비정제당을 쓰며, 가급적 화학첨가물과 트랜스지방이 들어가지 않은 제품을 쓰고자 노력한다. 세상을 위하고 손님들 건강을 챙기기 위함이다, 라고 한다면 이유의 10%밖에 담지 못한다. 우리가 그리 하는 건, 정치적 노력이다. 비록 완벽하진 않으나, 우리는 그렇게 애를 쓰고 있으며 계속 그런 기조를 유지하고자 먹거리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

 

정치적 노력이라 함은, (거대)자본에 의해 기획된 먹거리를 멀리하고 노동의 가치와 지속가능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와 내 동료들은 그것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기존 자유무역체제의 폐해와 구멍을 고민하며, 같은 노동자라는 관점에서 커피 생산(노동)자들을 생각한다. 더불어 자연이 만든 커피의 유기적 흐름을 떠올린다. 커피 한 잔을 위해 지불하는 돈이 농민과 노동자에게 잘 전달되는지, 지속가능성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따지고자 한다.

 

그것은 간단한 것에서 시작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먹는 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가. 누구에 의해 생산되고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가. 그런 사유가 정치적이야? 하고 묻는다면 나는 '올커니 정치'라고 대답하겠다. 정치는 그렇게 모든 일상과 조응한다. 거친 비유지만, 노스페이스 착용 여부는 물론, 어떤 노스페이스를 입느냐에 따라 '계급'을 나누고 있다는 초딩들의 형태를 보라. 아이들에게도, 입는 것에서도 정치는 작동하고 있다. 

 

하나 더 예를 들까?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는 먹거리. 뻔하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좀 짜증나지 않던가? 황교익 선생의 이야기를 빌자.

 

"한국 사회는 거대 자본이 시장을 완전히 잠식하여 영화관에서 먹는 음식 하나에까지 이것 먹어라 저것 먹지 마라 하고 간섭을 한다. 영화관이란 겉은 세련된 문화의 공간이지만 그 안은 영악한 속물들이 소비자의 주머리를 강탈하기 위해 꾸며 놓은 공간이다. 팝콘이 표상하는 세련된 미국적 삶이란 대체로 이런 것이다."(p.261)

 

황 선생이 《한국음식문화박물지》에서 음식문화를 논하면서 '정치'를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결국 방점을 찍기 위함이리라. 정용진이 소비자를 위한다는 명분을 걸고 내놓은 '이마트 피자'를 놓고, 동네 피잣집 죽이네살리네 할 필요도 없다. 통큰 치킨도, 이마트 커피도 마찬가지다. 소비자를 위한다는 명분은 명백하게 거짓이다. 쥐어짜내기가 가능한 자본은 가격 뒤로 다른 악행을 모조리 숨긴다. 황 선생의 말대로,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오로지 '손해'밖에 없다.

 

'싼값'에 홀라당 넘어가고 마는 '실리적' 소비자들이 그들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것이 정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통은 단순히 경제의 영역이라고 볼 뿐이다. 무식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빈곤하기 때문이다. 그래, 솔직하게 멍청해서다. 싸니 좋은 거다. 다른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싼값'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다. '반값혁신'이라고? 무슨 호랑이 잡초 뜯어먹는 소린가.

 

이걸 한 번 씹어보자.

 

"먹을거리를 선택하는 문제가 비정치적인 일인 듯이 여겨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의 먹을거리 유통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다. 2010년대 한국의 상황에서 보자면, 재벌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강자로 군림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그들에게 이득을 주는 먹을거리에 탈정치적인 포장을 한다. “서민들이 먹기에 합리적으로 싸다”는 것이다. 싼값으로 만들기 위해 빠져나간 돈이 결국은 농민과 노동자의 피땀임을 그들은 숨기고 있는 것이다."(pp.275~276)

 

'통큰'이니 '착한'이니, 거짓부렁으로 소비자를 현혹하는 제품의 먹거리를 선택하는 건, 결국 '대량생산 대량유통의 재벌 중심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아도 이것은 정치적 행위다. 그러니 더 이상 '정치'라고 외면할 것이 아니다. 내 일상과 생활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정치를 몰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음식문화박물지》는 먹거리의 정치를 어렵지 않게 핵심만 콕콕 찝어서 말한다. 사실 세상은 좀 웃기다. 어딜가도 맛집이고, 맛집 블로거랍시고, 뻐긴다. 슈거와 화학조미료로 사람들 입맛을 길들여놓고, 그렇게 길들여진 입맛으로 사진 잘 찍어서 올리면 그만인줄 안다. 먹는 것이 왜 중요하며, 어디서 어떻게 온 먹거리인지는 관심이 없다. 한심하다. 조미료로 맛의 평등을 이뤘으니 민주화라도 이룬 줄 아나보다.

 

《한국음식문화박물지》는 장담건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것이다. 황 선생은 비록 그것을 '일리'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 일리는 오랜 취재와 연구, 분석에 따른 금과옥조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손쉽게 먹는 삼겹살, 소갈비, 치킨 등이 사회적으로 어떤 함의를 품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고관대작들의 먹거리가 아닌 인민들이 일상에서 먹는 '한국음식'에서 지금-여기의 삶을 쓰고 다룬다. 그래서 '음식'이 아닌 '음식문화'다. 그속에 한국인의 삶이 있다. 한국음식을 한국인의 삶 속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선생의 노력이 물씬 묻어나온다. 음식문화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전통음식은 역시 그들만의 것이다.

 

우리가 먹는 것을 위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한국의 자연이다. 중국산이 판을 친다지만, '한국음식은 전적으로 한국의 자연에 기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황 선생은 권유한다. 한국음식은 한국 땅에 사는 사람들이 일상으로 먹는 음식이다. 그 일상에서 우리는 좀 더 우리가 먹는 것에 예민하고 감각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자연에서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자연에서 얻어야 하는 존재다.

 

그러니, 음식의 정치를 외면해선 안 된다. 모든 것을 조작하고 싼 먹거리를 통해 소비자에게 다가서는 자본의 립서비스는 우선 의심부터 해야 한다. 먹거리는 맛있고, 윤리적이고, 정상적인 마케팅으로 나서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먹거리 자본은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들에겐 이익과 손해 외에 다른 고려사항이 없다. 먹는 것에서부터 깨어나는 것,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좋은 세상의 단초가 될 수 있다. 당신의 정치를 먹는 것에서도 펼쳐라.

 

"정치는 먹는 것을 나누는 행위이다. 누가 더 먹고 누가 덜 먹을 것인가, 누가 좋은 것을 먹고 누가 나쁜 것을 먹을 것인가가 정치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한국인은 먹는 것이 정치적인 일과 관련이 없는 듯이 여긴다."(p.274)  

 

커피 만드는 사람인 나는 황 선생(의 말씀)을 감히 지지한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내가 먹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 그것이 우리의 생의 감각을 깨우고, 우리를 삶의 주체로 서게 만들 거라고 믿는다. 그것은 가깝게는 좀 더 좋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만들고, 멀리는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길로 인도할 것이다. 또한 그것이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믿는다. 내가 내 인생의 자유 주체로 서는 것.

 

어머니는 어릴 때 말씀하셨다. 니가 먹는 밥에 얼마나 많은 농부의 노력이 들어가 있는지 아니? 그땐 새겨듣지 않았다. 그러나 뒤늦은 각성으로 이제는 안다. 나는 커피 생산(노동)자의 노력과 땀을 눈으로 보고 접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내가 만드는 커피와 먹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누군가의 입에 들어가는지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한다. 먹거리를 진지하게 선택하는 일이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일과 무관하지 않음을 안다. 

 

그러니 늘 되새긴다. 먹는다는 건, 먹혀지는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의 응원을 받아 힘껏 사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의 말마따나, 그건 어쩔 수 없이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일'이지만, 나의 태도와 자세를 어떻게 취할 것인지 사유해야 한다. 먹는다는 건, 참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다.

 

《한국음식문화박물지》, 먹는 것에서도 당신의 우주를 넓히는 길을 안내할 것이다. 뿌잉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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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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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작지만 소중한 작당모의가 있던 겨울밤. 10평 남짓한 내 공정무역 커피하우스, 와인과 커피를 놓고 '부어라마셔라지껄여라' 송년의 밤이었다. 우리, 사회적기업가학교 동기들이었다. 그 쌀쌀한 날씨, 우린 펄펄 끓고 있었다.

 

밤말? 쥐가 듣는다지만, 쥐쉐이는 일본에 가 있는 마당이니, 우린 마음껏 지랄 좀 떨었다. 사회적기업을 공부하고, 추가로 스터디를 하거나 청강을 하면서 정기 모임을 갖고 곡성을 오가면서, 우리는 다소간의 갈증을 갖고 있었나보다.

 

일을 저지르기로 했다. 사회적기업을 만들어보자는 것. 그것도 인증따위에 목을 매지 않는 우리 내면에 뿌리를 박고 그것을 작동원리로 하는 우리들 마음의 깔맞춤. 뭣보다 우리는 '자유'를 함께 찾기로 했다. 나의 자유, 너의 자유, 모두의 자유. 기득권이나 타자가 만들어놓은 욕망이나 틀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나의, 우리의 것으로 작동하는 삶. 그런 삶을 도모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은 물론 뒷세대와 함께 고민하는 것. 나와 사회가 함께 즐거움을 도모할 수 있는.

 

우리는 그것을 '지(知)랄라'로 명명했고, '자유를 꿈꾸는 나를 찾는 시간(삶)'을 (가)기치로 삼았다. 심각한 주제를 놓고도 만담이 오가고 수시로 샛길로 빠지는 우리의 송년은 즐거웠고, 꿈을 꾸면서 슬슬 끓었다. 어쩌다 보니, 그날이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사망과 맞물렸는데, 우린 그날을 좀 더 행복하고 잘 하기로 서로의 마음에 불을 붙인 날로 기록할 것이다.  

 

100도씨(100℃). 

나는 내 책상에 그렇게 휘갈겼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온도까지 끓어오르게 만드는 것. 사실 이것을 '혁명'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한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는 '다른 사회'를 꿈꾸기 위해 우리의 몸과 마음에 불씨를 붙였다는 것. 경쟁과 평가, 타인의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가 아닌, 힘들고 불편해도 나의 자유, 우리의 자유, 모두의 자유에 우리 스스로가 복무하는 주체가 되자고, 우리는 마음을 모았다.

 

물론 사람 일은 모른다. 더구나, 우선 나부터 껌정 머리의 짐승은 믿을 게 못된다! 중간에 불씨가 꺼질 지는 모를 일이다. 그래도, 나는 우리 마음의 불씨까지 꺼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날의 온기가 우리 각자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지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어느 다른 곳으로 불씨를 옮겨서라도 100도씨를 향해 끓어오를 수 있을 테니까.

 

실은 난, 오래 전부터 이상하게 생각하고 궁금했다. 뜨거웠던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억에도 속절없이 자본 권력에 투항하고 순응하고야만 지금의 상황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았음이 이상했다.

 

프랑스혁명을 떠올려봐도 그렇다. 상위 5%가 전국 토지의 25~30%를 소유하고 있던 상황에 대해, 프랑스혁명사는 이리 기술한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상한 것!"

 

그런데, 여긴 달랐다. 물론 역사적·시대적 상황과 여건이 다르고, 그러면서 축적된 DNA가 달라서일 수도 있겠지만, 1988년 기준으로 상위 5%가 전국 토지의 65%, 상위 10%가 76%를 차지하고, 지금이야 상위권이 더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음이 분명할 터. 그러나 아직 혁명의 파토스는 미약해 보였다. 자본의 힘이 그만큼 세서? 아니면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행복의 조건으로서 돈의 힘을 절감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르겠다. 들고 일어나도 벌써 그랬어야 했건만. 허나, 지금의 우리는 조금씩 불을 당기고 있다. 그건 명백한 현상이다. 촛불로 불씨를 당기더니, 김진숙 위원과 희망버스로 캠프파이어를 했고, 강정마을 지킴이들과 함께 불놀이를 하고 있으며, 'Occupy(점령하라)'로 부채질을 하면서 오버슈팅의 위험한 감이 있어도 <나는 꼼수다>로 장작불로 만들었다.

 

뭣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끓어오르는 개인이 있다. 슬퍼하고 분노하면서 행동하는 개인이 있다. 나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본다.

 

혁명, 자유의 이름으로 쟁취하는 그 과정.

100도씨 비등점을 향하는 불씨. 명백하게 끓어올라야 할 지점. 아하, 맞다. 프랑스 작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프란츠 파농은 말했었다. "혁명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1987년6월의 민주항쟁을 다룬 《100℃》는 억압받던 자들이 어떻게 끓어올랐는지 보여준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난 민주항쟁의 재현. 최규석 작가는 반공소년 출신 영호의 사례를 통해, 그것이 어떻게 발화해서 소중한 백지 한 장을 얻어냈는지를 감정 충만한 이야기로 그려냈다.

 

반공소년 이야기에서 시작한 것이 내겐 흡착력 강한 자석이 됐다. 내게도 그런 과거가 있었으니까. 반공 웅변대회뿐 아니라 반공 독후감대회 등에서 나는 늘 무적의 똘이장군 만만세였다. 북한의 돼지를 잡아야 한다고 목소리 높인 연사이자 리뷰어였다.

 

그땐 자랑스러움이었지만, 부끄러움으로 바뀌기까지는 몇 년 걸리지 않았다. 쥐구멍으로 숨어야 할 것은 돼지가 아닌 나였다. 영호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누나에게, "욕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영호처럼, 나도 내게 욕을 해주던 친구가 있었다. 덕분에 나는 미욱하지만, 조금씩 깨어날 수 있었다.

 

《100℃》의 미덕은, 우리의 DNA에도 민주화운동을 향해 끓어올랐던 지점이 살아숨쉬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비록 혁명의 기억을 갖지 못한 우리지만, 우리는 지금이라도 혁명을 이뤄낼 수 있음을 자극한다. 혁명은 언제든 상상력의 클라이맥스가 아니었던가.

 

《100℃》는 단지, 6월 민주항쟁의 기억을 통해 과거의 좋았던 날을 되새김질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날을 기억하자는 것도 아니다. 지금-여기의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게 만든다. 자본이 삼킨 세상이 우리 대부분을 바뀌게 만들고 있으나 바뀌지 않기 위한 몸부림을 통해, 다시 세상을 뒤집는 꿈. 그러니까 본래대로 돌아가는 꿈. 혼자 잘 살겠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살아가는 꿈말이다.   

 

물론, 맞다. 감옥에 갇힌 영호처럼 끝이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 왜 없겠는가. 정말로 이길 수나 있기나 한 건지, 왜 회의가 없겠는가. 더구나 상대는 독재나 군부 아닌 야비하고 교묘한 자본이다. 이놈은 정말 세다. 독재보다 더 세다. 그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최 작가는 영호 옆방의 양심수 선생님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그 두려움과 직면할 것인지 단초를 준다. 그것이 99도다. 100도씨가 되면 끓을 것이므로 지금이 99도라고 믿는 우리의 자세. 불을 때다가 지레 겁을 먹고 원래 안 끓는다며 포기를 할 수도 있지만, 사람도 분명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역사에도 있으며, 6월 민주항쟁이었다는 것. 99도에 그만두면 너무 아깝다. 우리는 이미 9부 능선을 넘어서고 있다. 

 

솔직하게 나는 이기고 싶다.  6시 땡 치모 크락숀 눌러삐가면서, 운동권이 된 영호를 자식 취급 않기로 했다가 면회를 하는 변화된 모습을 보인 영호아버지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맞잡고. 우리가 만들고자하는 사회적기업에서도, 다른 삶도 가능함을 보여주는 증명하는 차원에서도.  

 

《느린 희망》에서 읽은 쿠바농민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왜 체 게바라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그는 답한다. "혁명 때문이죠. 모두에게 이로운 혁명." 《100℃》 역시 같은 맥락이며, 우리가 꿈꾸는 사회적기업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무언가를 대표하는 것보다 꾸준히 일관되게, 마음 먹은 것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 나와 같은 배를 탄 이들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것. 그리하여 달팽이의 속도로 꾸준히 거닐면서, 6월 민주항쟁이 그랬던 것처럼, 6시의 축제를 함께 즐겼으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의 혁명이 돼서, 혁명이 자극한 삶의 희열을 함께 나누는,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100도씨, 그렇게 끓어오를 날을 위해, 더 이상 우리는 지지 않아야 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외치고, 분노할 땐 분노하면서 만담을 나눠야 한다. 독립투사들도 만담하고 그랬으며, 민주화도 웃으면서 했다. 그러니, 지금은 더욱 더! 

 

이기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우리는 100도씨를 향해,

승리할 때까지 Hasta la victoria Siempre!

 

체 게바라의 말이었다. 그가 볼리비아로 떠나며 남긴 작별의 한 마디. 이 작별 인사는 68혁명을 통해 전세계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체 게바라는 영원히 남았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지금 우리, 돈 때문에 성적 때문에, 뭣보다 관계 때문에 죽는다. 그러니 그때 그날처럼 이기고 승리해야 한다. 다시는 누구도 죽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본의 교살을 막아야 한다.

 

그것이 100도씨로 끓어올라야 할 명백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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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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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의 '통큰'이나 '착한'이라는 수사는 본디 사전적 의미와 다르다고 봐야할 것 같다. 거대 할인점을 중심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들 수사는 말하자면, '비용 대비 효용' 혹은 '인풋 대비 아웃풋'이 크다는 점을 강조한다. 소비자들 역시 이런 수사에 쉽게 넘어간다. 당장 가격이 싸거든. 이만큼 소비 욕망을 자극하는 것도 드물다. 

 

시장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저렴한 가격 혹은 가격 할인은 소비자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본능적으로 소비 욕구가 피어난다. 거칠게 말해서 섹스나 술, 마약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통큰'이나 '착한' 등의 수사는 자극의 강도를 한층 높인다. 할인점들은 유통혁명이니 가격혁명이니, 택도 아닌 말을 써서 자신들의 싼 가격을 획기적인 것으로 포장한다.

 

술이나 담배, 혹은 마약에 중독되는 것처럼 저가에 마음을 뺏기면 다른 요인들은 마음에서 지워진다. 왜 이것이 싸고 저렴할까, 에 대한 생각을 않는다. 가격이 싼 만큼 누군가의 몫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잊는다. 유통 과정의 누군가가 고통을 당하거나 싼 가격으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받을 것이란 생각에 이르지 못한다. 

 

물론, 그 피해가 거대 할인점 당사자인 경우는 '절대' 없다. 그들은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슈퍼갑이다. 소비자가 갑 아니냐고? 에이, 당신의 (마트)소비 형태를 보라. 당신의 욕망이 온전하게 작동하는 것인지, 마트가 진열해 놓은 상품의 유혹이 더 강한지. 그러니 마트 갈 때의 목표 상품만 사오는 경우가 있던가? 그들은 소비자 앞에선 갑임을 숨기지만, 우리의 욕망을 조정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갑이다.

 

거대 마트는 모든 것을 공산품으로 전락시킨다. 저가를 불신했던 과거와 단절시켰다. 내구성과 장인을 중시하던 전통도 지워버린다. 이것은 다른 문제를 차례로 유발한다. 싼 가격을 위해 노동력이 싼 지역(국가)로 생산라인을 돌림으로써 지역사회의 황폐함을 유발한다. 싼 가격에 납품받기 위해 생산업체에 비용을 전가한다. 자연적으로 그것은 구조조정이나 임금의 하향조정을 부른다. 부채는 늘고 소득은 주는 악순환. 배 부르는 것은 오로지 거대 마트다. 때론 상품이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지도 지운다.

 

장점도 일부 존재하겠지만, 거대 마트는 신자유주의의 첨병이다. 단순히 재래시장을 죽이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그곳엔 신자유주의의 작동시스템이 축약돼 있다. 장하준은 '통큰'의 문제와 관련해, 사회적 합의를 거치지 않은 점 등을 들었다. 즉, 복지국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복지정책이 잘 돼 있었다면, 충분히 좋은 타결을 볼 수도 있었고, 사회적으로 추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될 문제임을 지적한다. 문제가 생기면 세금을 통해 희생 당한 사람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지정책은 그러므로 노동자를 위한 파산법이다. 기회가 있거나 주어진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관대해지고, 사회적으로도 비용이 덜 든다.

 

그러나 부를 장악한 대부분의 기득권은 그것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복지국가는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무엇으로 간주한다. 아마도, 함께 잘 살기 싫은 거겠지. 잘난 맛에 살아야 하는데 말이지.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경제(학)의 위키리크스다. 폭로랄 것도 없다.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거나 사유가 미치지 못한 부분을 건드린다. 혹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한 수정을 요구한다.

 

물론,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완벽한 책이라는 것은 아니다. 책의 미덕을 꼽자면, 사유를 촉발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경제 체제는 우리 모두를 위해 바람직한 것인가. 쉽게 말해 미국식 자본주의,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으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에 메스를 댔다. 좀 더 까놓고 말하자면, '돈 넣고 돈 먹기'식의 '무조건 돈만 많이 벌면 미덕'이라고 강요하는 '팍스 이코노미카'(모든 것은 돈으로 통한다)의 거짓을 폭로한다.

 

경제학자로서 당연한 제기다. 무릇, 경제(학)는 '모두가 부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가난하지 않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체제의 도래와 함께, "부자 되세요"라는 주술이 장악했다. 죽지도 않았건만, 경제는 늘 죽어있던 존재였고, 알맹이가 없음에도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를 내건 작자를 대통령으로 꼽기까지 이르렀다.

 

신자유주의(시장주의)의 '돈질'은 이런 것이다. 피자를 시키면, 30분이 표준이 된 마냥, 배달을 완료하겠다는 다짐. 결국 그것은 피자배달원의 죽음을 불렀다. 속도전과 성과 낚시질 시스템을 내포한 신자유주의의 흉포함이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그래서, 비밀에 대한 폭로가 아니다. '속지 마, 죽지 마, 저항해야 해'라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기득권의 알맹이 없는 '경제' 논리에 더 이상 속고만 살지 말고, 의심도 해보고, 경제시민으로서 권익을 지키자는 쪽이다.

 

장하준은 자본주의를 긍정한다. '수많은 문제점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은 경제 시스템'이라고 믿는다. 다만 그는 지난 30여 년간 세계를 지배한 특정 자본주의 시스템, 즉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부제가 설명한다.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다.'

 

시장주의는 자본과 이에 결합한 경제학자들이 권력과 손잡고 만든 체제다. 번지르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 줄 알았다. 미국은 승승장구했으며, 세계는 풍요를 보장받은 줄 알았다. 그러나 2008년의 금융위기에서 30년 신자유주의 체제는 얼마나 속이 곪아있는지를 드러냈다. 번지르르한 동안 피부인줄 알았으나 과도한 분장이었다. 클렌징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겹분칠만 한 떡칠 화장술.   

 

그러니 장하준은 청정 클렌징 폼을 뿌린 정도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아니다. 이제부터 제대로 알아보자는 사유의 떡밥을 던진 셈이라고나 할까. 성찰이 필요하다는 지적으로 읽어도 되겠다. 신자유주의가 어떤 분칠을 했는지 파악하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

'사회적 불평등으로 불안에 떨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 비교적 평등하게 나누고 사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

 

책은 시장이 만능이라고 배웠거나 강요받은 자들에게, 그 원칙을 버리자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장하준이 내세운 근거가 그 원칙에 금이 가게 했다면 성공적이겠다. 그래도 그 원칙을 버리지 못하겠다고 꽁꽁 자신을 가둔다면, 글쎄 그는 시장근본주의자겠지. 혹은 자신의 자본 기득권을 놓기 힘든 사람이거나. 이렇게 규정하는 나도 폭력적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세계를 퇴보시키고 재앙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던 원칙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예전과 비슷한 대참사들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또 빈곤과 불안으로 고통받는 수십억 인구(개발도상국만 이런 상황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어떤 일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제 불편해질 때가 왔다.(p.341)

 

장하준의 얘기처럼 자유시장은 정치적으로 정의되는 것일테다. 정부가 개입하지 않은 순정한 '자유시장'은 없다. FTA(자유무역협정)가 '자유'라는 말을 달고 있다고, 그런 순진한 착각은 하지 말라. 그 비준을 둘러싸고, 정치가 개입하는 현장을 당신은 끊임 없이 봐 왔잖나!

 

FTA를 하지 않으면 무역을 하지 않는 것처럼, 과거 조선시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펴는 것처럼 호도하는 자들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욱 키움과 동시에 인민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겁주려고 하는 소리다. 알다시피, 충공(충격과 공포)는 그들의 대표적인 기득권 유지 수단이잖나.

 

부디, 생각을 해야 한다. '통큰'이나 '착한' 뒤에 숨은 것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말해주지 않는다. 말하고 싶은 것만 내뱉고, 자신들의 진짜 의도는 숨긴다. 우리의 욕망은 그래서 진짜 우리의 것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실은, 통이 밴댕이 소깔딱지만큼 작고 졸렬해서 그들은 '통큰'이라는 수사로, 그들 자신을 감춘다. 착하지 않아서 그들은 '착한'이라는 수사를 강조한다. 정말로 통크거나 착하다면, 그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기 마련이다.

 

아직, 진짜 위기는 오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선 23가지만 말했으니까. 이 책을 통해 색안경을 벗었다면, 우리는 23가지 외에도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아파도 현실을 직시할 때만 우리에겐 진짜 '자유'가 찾아올 것이다. 지금이 위기라고 절감할 때, 가장 힘이 되는 위로는 역설적이게도 '지금보다 더 큰 위기가 올 날만 남았다'는 인식이다. 왜냐고? 간단하다. 지금이 덜 위기에 처해 있어서 더 큰 위기에 대비해 단련하기 좋은 때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고 내가 말하는 ‘경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해서, 의사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요구하는 데에는 고도의 전문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단, 한 가지 전제 조건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씌워 놓은 장밋빛 색안경을 벗어 달라는 것이다. 이 색안경을 쓰고 보면 온 세상이 단순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이제 안경을 벗고 냉혹한 현실을 직시해 보자(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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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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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31일, 세계는, 인류는 또 하나의 기록을 새겼어요. 세계 인구, 70억 명을 넘어섰습니다. 60억 명에서 12년, 50억 명에 도달한지 24년 만입니다. 인구 증가는 점점 빨라집니다. 10억에서 20억까지는 100여 년이었지만, 20억에서 30억은 32년이 걸렸어요.

 

유엔인구기금(UNFPA)은 70억 인구를 언급하면서, 실제 인구는 5000만 명정도 적거나 많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의도된 잠정 수치이긴 한데, 급격한 인구증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취지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70억 명이라는 숫자, 쉬이 짐작이 가질 않습니다. 내 옆에 있었던 당신의 존재는 분명하지만, 70억 명 하나하나를 머리속에 떠올리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70억 개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 70억 개의 각자의 진실이 있다는 것, 나는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입니다.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 그런 한편으로, 산다는 것은 그것과는 또 다른 단상을 부여합니다. 70억 명의 한 명으로 태어나는 것, 참으로 소중한 탄생이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대부분 현실은 가혹합니다.


최근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인 <천일의 약속>에서 지형(김래원)의 아버지는, 아들 지형과 알츠하이머 환자인 며느리 서연(수애)이 애를 낳는다는 얘기에, 대책없이 무모하다는 말을 던집니다. 대부분 현실이라고, 다를까요? 통계 수치를 따지자면, 그 말, 현실적으로도 유효합니다. 장 지글러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을 접하자면 말입니다.


그는 아들에게 알려줍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2005년 기준, 10세 미만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갑니다. 3분에 1명이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잃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립니다. 아프리카에선 전인구의 36%가 굶주림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고요.


장 지글러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다룬 세계의 모습입니다. 그건 '빈곤'이라는 이름의 재앙입니다. 유엔의 정의에 의하면, 빈곤이란 기회와 선택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빈곤,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것이며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을 박탈하는 상태임에도, 지구는 속수무책입니다.


70억 인구. 그 가운데 30억 명이 하루 2.5달러의 돈으로 생을 간신히 지탱한다고 합니다. 즉, 우리 돈으로 3000원이 채 안 되는 돈으로 기나긴 하루를 버텨야 하는 것이죠. 더 나가볼까요? 100명 중 20명이 영양실조, 1명은 아사직전이랍니다.


존엄한 존재로 태어났건만, 살아감은 그렇지 않은 현실입니다.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곡물 잠재량만으로도 전세계 사람이 먹고 살 수 있고, 프랑스 곡물생산으로 유럽 전체가 먹고 살 수 있는 전세계적 식량과잉의 시대. 세계의 농업생산력은, 120억 명에게 하루 2400~2700kcal의 먹을거리를 공급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의 굶주림과 죽음을 수치로 접해야 할까요? 그들의 빈곤은 게을러서? 빈곤층 사람들이 실수를 저지르고, 그 실수를 반복함으로써 더 가난하고 불쌍한 처지로 몰아가고 있다? 어떤, 저 잘난 인간들은 그렇게 쉽게 말합니다. 자연도태설입니다. 전형적인 백인 우월주의적 정당화에 부자와 권력자들의 '가난한' 논리입니다.


허나 그것은 정확한 진단이 아닙니다. 당신도 가슴 아파했던, 세계의 불공정함. 부의 편중과 가난의 대물림. 인구의 증가만큼, "굶주림은 비극적인 방식으로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지글러 역시 문제의 핵심이 '사회구조'에 있다고 진단합니다.


절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당신이 고민했던 세계의 불평등과 불공정함. 당신이 그래서 가고자했던 길을 나는 기억합니다. 그 틈을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당신이 선택했던 그 길. 그런 세계를 사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지구의 슬픔을 조금씩 달래주지 않나 싶기도 해요. 


식량 자체는 풍부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습니다. 구조적 기아입니다. 사회구조로 인해 빚어지는 결과라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글러가 아들 카림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핵심도 그것이 아니었을까요? 세계가 돌아가고 작동하는 원리를 알려줌과 동시에, 카림, 너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세계를 사유하거라.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세계의 굶주림에 대한 고민과 사유, 이것이 당신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세계를 사유하게 합니다. 풍족한 식량을 갖고 있음에도 절반이 굶주리는 세계의 구조와 현실에 대해 나는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가질 것인가. 그리고 회의하고 질문할 것.


《세계가 만일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이라는 책에 나오지요. 100명 가운데 6명이 59%의 부를 가졌고, 그들은 모두 미국인입니다. 74명이 39%, 나머지 20명이 2%에 매달렸다는 통계적 현실. 또한 20%가 에너지의 80%를 사용합니다. 철저하게 파레토 법칙에 충실한 사회구조. 1%에 대한 99%의 저항은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습니다. 99%의 저항이 세상의 구조에 금을 내기 위해 계속 돼야 할 이유입니다.


2011년 세계인구동향보고서에 의하면, 70억 인구 가운데 10~24세의 젊은층들은 세계적 경제위기, 교육기회의 박탈 등으로 '잃어버린 세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곧 미래를 잃어버릴 것이란 경고죠.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거짓 위로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 지금의 구조를 그대로 놔둔다면 우리는 늘 잃어버린 세대를 반복적으로 만날 겁니다. 


지글러가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이 가진 미덕은 그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불행은 결핍이나 부족이 아닌, 분배와 구조의 문제라는 것.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 얼마나 적확한 직설인가요. 불공정하고 잔혹한 세계질서에 더 이상 눈 감고 귀 막고 살지 말 것을 권하는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세계를 사유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래요. 나는 당신을 다시 생각합니다. 장 지글러가 주목했던 세계의 구조적 문제와 당신의 고민이 맞닿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나는 그렇게 세계의 진실 혹은 속살을 마주하고, 나의 살아가는 태도와 자세를 다시 돌아봅니다. 나는 그 착취구조에 협력하고 있진 않은가. 섬뜩합니다. 기존 질서가 유지돼서 피 흘리는 이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질서에 순응하는 것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더라도 지금의 질서와 체제가 행하는 살인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랬듯, 나 역시 다른 세계를 꿈꿉니다. 불공정하고 잔혹하며 착취가 일상화된 자본주의적 질서가 아닌, 좀 더 진일보한 사회체제 속에서 굶주림의 해결을 위해 사회질서가 가장 먼저 작동하는 사회. 쿠바 독립의 아버지인 호세 마르티의 말을 약간 변용하자면, 단 한 사람이라도 굶주린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을 자지 않는 사회. 그런 마음의 세상이라면, 나는 산다는 것을 좀 더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 같아요. 물론 그런 세상이 오리란 확신 따윈 없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살고 싶진 않네요.

 

그래요, 책을 읽으면서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잘 있나요? 어떤 꿈을 꾸고 있나요?

커피 한 잔과 함께 당신이 참 보고 싶은 하루입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당신과 내가 꿈꾸던 세상을 그리는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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