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길을 잃다
서숙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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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빠름을 경배하고, 변화를 당연시하는 시대. 그렇다. 모든 것은 떠나게 되어 있고, 잊혀지게 마련이다. 그 모든 변화를 우리는 감내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빠름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일까. 모든 것은 하나둘 떠났다. 그 옛날, 우리가, 시대가 품고 있던 어떤 유적 같은 것들. 발길에 걷어 채일 수도 없을 만큼, 과거는 빠르게 잊혀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쉽게 망각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어떤 복고의 힘은 ‘세다’. 추억의 힘도 ‘세다’. 너무 빠르고, 너무 변해서, 그 속도와 변화를 따르지 못하는 ‘느린’ 사람들에겐, 과거가 발길에 채인다. 한편으로, 잊혀짐이 두려워서일까. 지난 유적들이 때론 우리를 불러낸다. 망각이 마냥 온당한 것만은 아니라는 듯. 물론 그것이 철저히 상업성에 기인한 부름일 수도 있지만.

서숙은 그래서 책머리부터 이야기한다. 레트로스펙티브. 깨달음은 더딘 발걸음으로 올 것이라고. 늦된 자신을 위무한다. (너무 빨라도, 너무 변해도, 이에 쉽게 적응 못해도) 괜찮아, 괜찮아. 너무도 빠른 속도와 변화의 시대에, ‘괜찮아’라는 나지막한 속삭임은 하나의 주술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지탱할 수 있다. 낙오해도, 밀려나도, 뒤떨어져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나는 <일부러 길을 잃다>의 텍스트를 그렇게 읽었다. ‘길 잃기’의 주체성. ‘이 길이 아니면 안 된다’가 아니라, ‘이 길이 아니라도 좋다’. 누군가는 그것을 ‘길을 잃었다’로 표현하겠지만, 당사자는 또 다른 이정표를 찾는 행위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 그래서 서숙은, <하와유? 컴퓨터>에서 외친다. “가상현실이 그치고 현실이 있게 하라.” 가상현실에 적응 못한 세대의 볼멘소리로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어차피 각 세대가 조응하는 접점의 ‘차이’일 뿐이다. 그것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사이버에 적응 못한 구세대의 푸념이 아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가 아닌 각자의 삶의 방식. 일부러 택하는 ‘길 잃기’의 행위. 그러하기에, “인간의 참모습은 그 정신에 있지 않고 그 현존에 있습니다. 진실은 역사에 있지 않고 현재에 있습니다. 선악의 기준을 넘어 약동하는 생명력은 더욱 고귀합니다.”(<안녕하세요, 까뮈씨>) 무중력의 매력도 분명 있겠지만, ‘살아있음’의 심장박동을 느끼는 것은 역시나, 현실 속 현존에 있다는 사실을 서숙은 분명히 주장하는 듯 하다.

그런 한편으로, 서숙은 <휴대폰 이야기>를 통해, 서로 다른 그 길을 감식한다. 이해와 거리감을 표현하면서. 서숙은 “휴대폰 하나씩을 손에 들고, 목에 걸고 이 도시를 헤매는 우리의 젊은이들도 나름으로 유목민화하고 있는 셈”이라며, 디지털 시대의 코드(노마드)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물론, 서숙은 자신의 자리에서 멀리 빗겨나진 않는다. 자신을 ‘안티 노마드’라 칭하면서 “자유로우나 고독한 영혼들은 마치 섬처럼 외롭게 떠있는 존재들 같다”거나 “그들이 쉼 없이 휴대폰을 통해 토해내는 것은 혹시 외로움의 비명은 아닐까”라고 의문을 내던진다. 그럼에도 딸로부터 버림받은 휴대폰을 주워든 자신의 뒤쳐진 걸음걸이. 레트로, 레트로. 산 보듯 강 보듯 어슬렁거리는 서숙의 길 잃기. 

주체적인 길 잃기는 어쩌면, 자의식의 발로다. 앞선 누군가 걸었던,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다고 나섰던, 길을 의심하는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아니면 ‘케세라 세라’의 포기이거나. 마음은 끊임없이 요동칠 지어다. 진짜 길을 잃고 헤맬 때의 막막한 감정을 떠올려보라. ‘일부러’ 잃은 길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을 때의 황당함을 생각해보라. ‘나, 길을 잃어보련다’고 호기롭게 나섰다가, ‘나, 돌아갈래’하고 번복할 때의 심정이란. 그렇다고 마음의 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다. “우리 한번 길 잃어볼래?”라는 말 속에는, 호기심과 두려움, 반항심 등등의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지 않을까. 길을 잃는 행위가 가져올 결과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또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서숙의 세계(수필)은 그러나, 일탈은 꿈꾸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능동적이라기보다는 수세적이다. 그의 글에는 중산층의 안온함이 여과 없이 묻어난다. 빠르고 변화무쌍한 시대를 공세적으로 거스르는 ‘러다이트운동’(기계파괴운동)과 같은 과격함이나 전복은 없다. TV 아침드라마와 신문을 통해 즐거운 세상사 걱정을 하고, 친구를 만나 규모 있는 살림살이의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여사를 만나 그림전시회를 가는. 물론 그것이 나쁘다거나, 결핍은 아니겠지만. 서숙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세계에서 모든 소재를 뽑으면서 세상과 소통할 뿐, 더 나아가지는 않는다. 간혹 길을 잃고자하는 의지도 드러내지만, 그것으로 그친다. 길 잃기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거나 생의 틀을 바꾸는 계기가 되진 않는다. 그저 숭실대학교 뒷마당에 당도하고야 마는 싱거운 모험.

물론 가끔은 서숙의 세계도, 마음도 흔들리는 것 같다. “매양 떠나고 싶어 하면서 한편으로는 한자리에 머물고자하는 우리. 한사코 홀로 있게 되기를 소망하는 반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진정한 대화를 갈구하며 끊임없이 인간의 품을 그리워하는 우리. 인연의 고리로부터 훌훌 벗어나고 싶어 하는 한편, 떨쳐내지 못할 집착에 연연하여 한없이 전전긍긍하는 우리.”(<마음이여, 정착하지 마라>) 그리고 자신들 부부의 은혼식(25년)과 친정 부모님의 금혼식(50년)을 맞아서도, 결혼을 의심한다. “책임감이나 의무감 또는 자식이나 집안을 위한다는 명분 그런 것 말고 뭐 좀 보다 절박하게, 하필이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저 사람과 내가 같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결혼을 했는데, 이미 감정이 시들해져 버린 후에도 이 제도라고 할지 관습 속에 그저 안주해야 하는 당위가 과연 무엇일까.”

<나에게 사치는>을 읽으면서, 이전부터 혐의를 가지긴 했는데, 나에겐 ‘글쓰기’가 진짜, 사치라는 생각을 굳혔다. 채워지지도, 영글지도, 그렇다고 콘텐츠가 절박하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종의 배설구. 군더더기와 중언부언, 불확실한 세계. 그러나, 서숙은 단호했다. 이 사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여느 세계를 다룰 때와는 다르게 단호했다. 글쓰기가 서숙에게 주는 희열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스티븐 킹의 말이 떠올랐다. “글쓰기는 마술과도, 생명수와도 같”아서 “마음껏 실컷 마시면서 허전한 속을 채우라”던.(<유혹하는 글쓰기>)

나는, <일부러 길을 잃다>를 덮고서, 과연 궁금하기도 하다. 주체적으로 길을 잃었을 때, 그 결과를 생각했을까, 아니 했더라면, 어떤 결과를 바랐을까. 꽃은 필 때 질 것을 염려하지 않고, 태어날 때 죽을 것을 고려하지 않지만, 그것은 ‘의도하지 않음’이 전제돼 있다. 과연 내가 ‘일부러’ 길을 잃었을 때, 그것을 선택했을 때, 나는 그 길의 끝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일탈의 결과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마음이여, 정착하지 말 것’을 주문한 서숙의 주체적인 길 잃기의 끝에는 어떤 ‘황홀경’이 자리매김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을 장착한 나는, <일부러 길을 잃다>에 그은 밑줄을 다시 한번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그리곤 속삭인다. ‘다시 못 돌아가면 어떠랴, 괜찮아, 괜찮아...’ 시대의 흐름과 빠른 속도에 낙오된 나는, 이왕 늦어진 것, '달팽이의 속도'를 택하련다. 무한성장, '암세포의 논리'가 아닌. 나는, 변명처럼 일부러 길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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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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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달 17일은 '세계빈곤퇴치의 날'이었다.
14년째를 맞은 이 날, 지구촌 곳곳에서는 '빈곤에 반대하는 지구적 호소(Global Call to Action against Poverty, GCAP)' 캠페인이 진행됐다. 한국에서도 '1017 빈곤심판 민중행동'이라는 행사가 열렸고, 빈곤에 대한 관심 촉구를 위한 '화이트밴드 콘서트'도 열렸다. 이 화이트밴드는, 뜻을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이 '흰 띠(White band)'를 착용해 빈곤 퇴치를 위한 실제적인 행동을 촉구한다는 의미다. 빈곤은 그렇듯, 더이상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수사가, 빈곤 문제의 부각을 막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나의 문제는 영원히, 아닐까. 그저 남의 문제라고 덮으면 될까. 나는 묻는다.

다수빈국과 소수부국의 불균형.
알다시피, 빈곤은 심화되고 있다. 빈곤은 어디에도 널려있지만, 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소수의 부자는 다수의 빈자를 착취하고, 이를 국가로 바꿔도 다르지 않다. 빈곤은 어디에도 널려있다. 그렇다면 빈곤에 대한 관심은? 미디어를 통해 빈곤국이나 기아국에 구호물자 등이 수송되는 것을 본 것이 다는 아닐까. 나는 그렇게 안도했던 것 같다. '국제기구나 부자 나라에서 저들을 도와주고 있구나, 다행이다.' 그것으로 나의 죄의식은 봉합된다. 그 구호품이 어떻게 그들에게 전달되고 소비되는지, 알 생각도 없었다. '저것으로 충분하겠지', 하고 여겼다. 그저 워낙 일상적인 현상으로만 치부해서일까. '함께 사는 길'을, '세계의 불균형'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타인의 고통에 예민해지지 못한 불찰.  

빈곤은 바로 우리의 문제 아닌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그래서 좀더 정밀한 진단을 내려준다. 빈곤은, 기아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과 자기가 속한 작은 우주에 대한 질문 자체임을. 사실, 쉽지 않은 문제다. 이 팍팍하고 비열한 세계에서,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는, 의외로 힘이 세다. 남의 빈곤까지 생각해볼 여력이 많지 않다. 그래도, 이 책은 말한다.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보라고. UN식량 특별조사관으로 활동했던 장 지글러는 아들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이를 쉽게 풀어낸다. 나와 관련없다고 치부하지만, 언제 내 자신의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이 곳은 우리가 함께 발 붙이고 있는 지구의,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이웃의 문제라고. 그는 나지막하게 건넨다. 기아의 진실을. 물론 그렇다고, 그런 이야기들이 귀찮다고 하는 사람을 그렇게 타박할 문제만은 아니다. 소수를 제외한 평범한 개인의 일상과 삶은 이미 어찌할 도리없이 숭악한 자본의 질서에 편입돼 죽지 않을정도로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정신의 빈곤. 

장 지글러는, 묻는다.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는데, 왜 하루 10만명이, 5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가?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조사에 따르면, 2005년 현재 8억5000만명이 굶주림에 스러진다. 미국의 생산가능 곡물 잠재량만으로도 전세계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고, 프랑스의 곡물생산으로 유럽 전체가 먹고 살 수 있는 전세계적 식량과잉의 시대에도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이들을 접해야 한다는 사실. 참으로 불합리하고 흉포한 세계질서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인 어린이들이 구조적 부조리에서 제일 먼저 당하게 되는 이 현실. 미디어에 나온 구호물품으로 당신의 죄의식을 씻지 말 것을 권한다. 실제 세계 곳곳에서 수백만의 빈민은 부자들의 쓰레기로 연명하고 있음을 장 지글러는, 폭로한다. 그걸, 몰랐냐고? 그렇다면, 그 쓰레기 생산에 일조하는 우리는, 괴물인가, 인간인가. '나면서부터 십자가에 못박히는 아이들'은, 우리의 쓰레기가 만들어낸 악몽이자, 비극이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비극.

'밥은 먹고 다니냐",
고 묻던 (송)강호(<살인의 추억>)의 말은 그저 허튼 농담이 아니다.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생산성의 급격한 향상으로 물질적인 결핍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지만, 굶주림으로 죽음에 이르는 생명들은 아직 여전하다. 아니 굶주림은 더 심화되고 있다. 장 지글러는, 말한다. "현재로서는 문제의 핵심이 사회구조에 있단다. 식량 자체는 충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 빈곤은 세습되고 배고픔의 저주는 대물림된다는 사실. 끔찍하지 않은가. 국제기구, 구호단체의 손길에 모든 것을 내맡긴 채 팔짱을 끼고 있던 사이, 저주는 확산됐다. 어떤 대가도 한 아이의 생명에 비할 수는 없다는 말, 너무 이상적이고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산다. 밥은, 곧 생명.

테러, 전쟁, 그리고 다국적기업. 
나는 이 책을 통해, 테러와 전쟁, 그리고 다국적기업이 착취하는 기아와 빈곤의 구조를 좀더 명확하게 알게됐다. 그들은 기아를 무기로 삼아, 자신들의 정치적 혹은 경제적 욕망을 채우고 있었다. 밀로셰비치, 투라비, 테일러, 그리고 미국 등을 비롯, 네슬레의 흉악함. 그리고 북한 역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야기. 또한 나날이 심해지는 사막화와 삼림파괴, 환경오염 등은 빈곤에 대처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을 점점 좁히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전세계적인 식량위기를 마주대하는 건 아닐까. 풍요의 종말.

그러면 희망은, 대안은? 
장 지글러는, 한 사람의 사례를 든다. Power Of One. 서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나라, 부르키나파소 출신의 토마스 상카라. 깨어있는 개혁가였던 상카라의 눈부신 조치는 아프리카 대륙의 귀감이 됐을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그 역시 검은 커넥션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 희망은 깨지고 비극은 반복되는 세계. 상카라의 방식은 맞았다. 자급자족과 식량공급의 확대의 충분조건에는 역시 사회정의의 확립이 있어야 한다. 기아와 빈곤에 눈감고 귀막고 입닫은 현실에서, 우리의 행동이 필요함을. 장 지글러는, 아들에게 세상을 뒤엎으라고 말한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아이에게 혁명할 것을 권하는 아버지? 그러나 장 지글러는 그것이 진정 아들을 위한 것임을 아는 것 같다.

야만적인 미디어들.
'지금-여기'의 대다수 주류 미디어들은 기아나 빈곤 문제에 그닥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눈을 감고 있는 것 같다. 빈곤 앞에 '악' 소리 제대로 내지 못한채 스러지는 빈자들의 아우성에 미디어들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빈곤은 너무도 익숙한 의제라서? 나서봐야 별 볼 일없다는 판단 때문에? 돈이 안돼서?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미디어의 해악은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기아와 빈곤을 부추기는 작자들과 다를 바도 없다. 부자 되는 법 설파를 멈추고, 빈곤한 자들의 아우성과 빈곤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해 주면 안될까. 하긴, 바보 같은 바람.

물론 그것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아.
나도 충분히 안다. 그러나, 학교도, 미디어도 이를 충분히 알려주지 않는건 아닐까. 빈곤이나 기아의 원인과 결과는 세부적이고 정확한 분석을 필요로 하는데, 왜 그들은 침묵할까. 미디어나 학교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모호한 이상이나 현실과 괴리된 인간애나 정서만 가질 뿐, 그 구조적인 원인과 끔찍한 결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아닐까. 당신들의 잘난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이 빈곤을 심화시키고 세습시키는지, 대안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단 한사람이라도 그것을 제대로 고민하게끔 만들면 좋지 않겠나. 빈곤이 당장 없어지진 않겠지만, 한사람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다시 한번, 되새긴다.
'좌파 낭만의 스토리텔러' '결핍된 계급의식의 저격수', 켄 로치 감독의 일갈을.

   
  "희망은 없다. 정치가와 경제인은 대개 남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한다. 고용주는 고용인의 일자리를 뺏고, 헐값으로 대체 노동력을 산다. 이런 구조 안에서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경제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소수의 탐욕에 봉사하는 경제가 아니라, 다수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그런 구조 말이다."
 
   
나는 여전히, 이 말을 믿는다. 아니 신봉한다. 그리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빈곤과 기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활로. 장 지글러 역시 이에 동조한다.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 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 빙고. 이 책의 미덕은, 마음의 기아로부터 우선 탈피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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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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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매체를 둘러봐도, 사진'들'이 쏟아진다. 노동자들의 고통을 담은. 20년 넘게 전봇대를 오르내린 전기공, 정해진씨는, "전기원 노동자 파업은 정당하다"고 외치며 스스로 몸을 불살랐다. 이에 동료들은 대오를 이뤄 힘겨운 투쟁을 펼치고 있다. 사진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서울 창전동 아파트 10층 높이의 교통 관제탑. 이랜드-뉴코아 조합원, 박명수씨가 30일 가까이 고공 투쟁을 펼치고 있다. 사진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기시감이 일어났다. 지난 2003년 고공크레인 위에서 목숨 건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어느 일하는 아버지, 고 김주익씨.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길에서도 초등학생 세 아이에게 휠리스를 사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던 그였다. 고공크레인에 올라, 세상을 향해 절규하던 그의 모습(사진)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10여년을 거리에서 붕어빵을 팔던 노점상인이었다. 고 이근재씨. 고양시 지자체의 폭력적인 단속에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료 노점상들은, 그의 영정사진을 펼치고선, 지자체의 폭력적인 단속에 저항했다. 사진은 어디에도 널렸다.

#2. 11월11일, '범국민행동의 날'. 이른바 '신자유주의와의 전쟁'이었다. '노동자' '농민' 등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의 일부가 주요 참가자였다. 그러나, 경찰은 집회를 원천봉쇄하고자 노력했고, 광화문 현장에서도 물대포와 소화기를 이용해 참가자들을 진압했다. 무력진압도 예사였다. 사진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사진들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 는 70년대 구호가 아직도 유효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1970년 고 전태일 열사의 외침 이후에도, 그 엄혹함과 야만성은 한치의 나아감이 없는 것은 아닐까,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다. 부끄러웠다. 전태일 열사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건만, 70년대와 다를 바 없는 구호가 여전하다니.  

나는 그 사진들을 보면서, 수전 손택의 고민에 더욱 공감했다. 어느 미디어를 접하건, 차고 넘치는 사진들이지만, 그것은 대개 철저히 무관심하게 소비됐다.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수전 손택은 말하지 않았던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관음증적인 향락을 보건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아울러 사라예보에서 만난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들은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과연, 사진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성찰할 수 있을까. 수전 손택은, 최소한 20세기 초반에는 가능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에른스트 프리드리히의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은 독자들에게 스스로 말을 걸게 하는데 실패하지 않았고, 아벨 강스의 영화, <나는 고발한다>도 전쟁의 참상을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다. 버지나아 울프 역시, 전쟁의 참상을 담은 사진들을 보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거나, 전쟁을 없애려 애쓰지 않는 것은 도덕적 괴물의 반응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러나, 그 성찰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페인 내전부터, 전쟁(혹은 전투)이 발생할 때마다 참상이 필름에 담겨지거나, 베트남전부터 텔레비전을 통해 이것이 오락거리의 일부가 되면서, 그것은 이미지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9.11이 비등점이 된 것 같다. '영화보다 더욱 영화 같은 상황'이라는 인식은, 그 참상을 "마치 영화처럼 느껴진다"고 표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미지가 안겨다주는 충격이, 한편의 영상처럼 소화되는 단계. 어쩌면 사람들은 새로운 유희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존재인 셈이다.  

그렇다고 성찰만 바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성찰만 바라는 것도 사실 폭력이 될 수 있다. 사진을 통해 누군가는 더욱 호전적이 될 수 있다. 성선설, 성악설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보다 강한 자극을 원한다. 그리고 내성이 길러진다. 수전 손택 또한 말하지 않는가.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맞다. 우리는, 대개 관음증 환자이고, 타인의 목이 잘려나가고, 유혈이 낭자한 것보다, 내 손에 피 한방울 나는 것이 더 아픈 법이다. 전쟁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소식이라면,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저 내 것이 아니길 바라는, 타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자기 보호의 본성일 수도 있다.

나는 두렵다. 그것이 당연한 것일지라도. '지금-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괴물'이 돼가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세계'를 보여준다고, 광고하는 미디어들은, 기실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 국한된 무엇, 점점 신자유주의에 경도된 가치판단에 의한 거리만을 보여준다. 전쟁의 참상, 타인의 고통을 말한다고 보여주는 것 또한 대상을 타자화하는 것에 불과한 사진들이 차고 넘친다. 수전 손택은 이것을 '이국적인(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작금의 미디어들의 사진 전시는 타인에 대한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것이 아닐까. 특히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동고(同苦)의 능력을 잃은. 주류 미디어들의 이 같은 결핍은, 결국 미디어 수용자들의 판단에도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희망은 있는가. 너무 뻔한 상투구다. 언제 어디서나 접하는 그런. 누군가는 역시나 그럴 것이다. 그게 오늘날만의 문제인거냐고. 따지고 보면,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진행돼 왔다고. 전쟁은 항상 있었고, 비주류의 고통과 투쟁도 존재했다고. 그럼에도 문제는, 사람들이 이미지가 건네는 공포에 점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또 사진에서 우리는, 세계를 사고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이미지에만 휘둘리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린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진을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 되어버렸다." 빨간띠를 두른 노동자들의 투쟁은, 누군가에겐 이미 식상한 이미지가 돼버렸다. "또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들이 왜 그렇게 빨간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섰는가에 대한 이해는, 다른 세계의 것이 돼버렸다. 수전 손택의 말은 뻔하지만, 그것이 희망일 수밖에 없음을 호소한다. "현대의 희망, 현대의 윤리적 감수성에 중심이 되는 것은 비록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탈선이며, 비록 얻기 어렵긴 하지만 평화는 규범이라는 확신이다." 이미지로부터 무엇을 이해하고, 어떻게 이미지의 포로가 되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행위. 나는 그것이, 어쩌면 이 세계를 좀 덜 슬프게 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희망을 버려!' 어쩌면, 나는 그것이 더욱 현실적인 대답이 아닌가 싶다. 수전 손택은, 여전히 탈선적인 전쟁의 종말을 보고 싶겠지만, 나는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지 않는다. 혐오스러운 것이 자아내는 매혹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끔찍함을 동경하는 인류의 본성이 한순간에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윌리엄 해즐릿도 그러지 않았던가. "불행에 대한 사랑, 잔악함에 대한 사랑은 연민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 그래서, 전쟁이 없는, 이상적인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나빠지거나 최악으로 가는 것만 막아도 다행이다. 수전 손택은 그런 면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작가이며, <<타인의 고통>>도 충분히 읽어볼만한 책이다. 어쩌면 그도, 세상이 극도로 나빠지는 것을 막자는 생각에서 이 책을 서술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서 "희망을 버려!", 라는 말은 비관이 아닌 현실 긍정이며, 고독한 자기푸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사이다.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수동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온갖 미디어를 통해, 쇄도하는 이미지들의 공습에 좀더 의연해질 필요가 있다. 이미지들의 폭격이 일으키는 문제점 중의 하나는, 엇비슷한 처지의 사람끼리도 고통을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기득권층이야 그런 셈치더라도, 마냥 태연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에서 조금씩 발을 빼야 한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소식과 인류를 짓밟는 해악들이 온갖 미디어를 통해 드러난다손,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지는 것은 아니듯,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몸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자극에 반응하는 뇌가 아니라, 자극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슴이다. 당사자가 고통을 표현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고문과 폭력을 연구한 영문학자인 일레인 스캐리는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도 말했다. 

악은 그렇게 평범하다. 남의 고통엔 관심없는, 그래서 엄혹한 시대의 풍경은 '악의 평범함'을 잉태했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전쟁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것이 일상에서의 어떤 고통과 참사를 대입해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잇단 분신과 투쟁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는 눈길, 노동자대회 참가자들을 폭도로 모는 시선. 이 모든 것은 이미지 과잉의 시대와도 연결돼 잇지 않을까. "너의 불행과 아픔이 곧 나의 행복과 기쁨"이 이 시대의 명징한 징후가 아니라면,  우리는 타인의 세계를 존중하되, 동정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챙겨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타인의 고통>>을 그렇게 읽었다. 타자를 분석하거나 교정하지 말고 돌봄의 윤리를 갖는 시선이 필요함을. 전쟁은 결국 인류를 타자화하는 미친 짓이고.

최소한 인간은 아니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미지가 제공한 최초의 자극에 휘둘리는 일은 곧, 우리 안에서 키운 괴물에 잡아먹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사는 것은 더 끔찍하고. 수전 손택의 과제는 그래서 새겨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는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지 않을 것은 물론,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양심의 명령까지 생각해볼 것을 권유하는, 수전 손택의 나지막한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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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에쿠니 가오리 지음, 소담출판사 펴냄, 2004).
처음 제목과 마주 대했을 때 어떤 의미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주말이 몇 개라고 묻다니. 일주일에 한번 있는 주말도 감지덕지, 부둥켜안고 놓아주고 싶지 않은 마당에, 몇 개냐니, 몇 개냐니. 놀리냐, 놀리냐, 이렇게 되레 묻고 싶다. 물론, 에쿠니 가오리의 주말은 어떻게 구성돼 있을까, 하는 호기심도 인다.

우연히 받은 선물이다.
선물 준 사람은 가벼운 책을 골랐단다.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건조함’을 좋아하는 나로선, 나쁘지 않다. 아니, 감지덕지. 아~싸 가오리~ 외쳐야 할 판이다. 더구나 처음 접하는 가오리의 에세이. 어떨까? 소설과 다른가? 그 건조함은 여전해? 에세이 주제가 결혼생활 행간이라. 그의 소설 속 결혼은 당최 환상이라곤 없었으니. 이른바 ‘정상성’이라는 그닥 동의하지 않는 통념에서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않은, (내가 접한) 가오리 소설 속 결혼이야기. 다른 사람의 결혼(사)생활엔 관심 없지만, 괜한 호기심이 일더라. 그의 결혼(이야기)는 뭔가 다르리라? 자신의 결혼생활은 소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결론은 아니. 별 차이 없다.
최소한 그가 내뱉은 결혼의 일상은 (내가 아는) 여느 결혼과 그닥 다르지 않더라. 다만 그는 명쾌하면서도, 답이 없다. 그가 말하는 결혼은 ‘옳다 그르다’도 아니고, ‘좋다 나쁘다’도 아냐. 그저 일상에서 길어 올린 감정을 덤덤하게, 혹은 건조한 문체 속에서도 애끓도록 묘사하더라. 왔다리 갔다리. 그는 수시로 변덕을 오간다. “결혼하고서 생활에 색이 입혀졌다”고 하더니, 어느 순간, “결혼은 야만” 혹은 “결혼은 struggle”이라고 툭 내던진다. 그래, 그게 사람살이지. 그래서, 냉정과 열정사이.

이거 정신병 아냐?
그래, 그는 툭 내던진다. “애정이란 병의 한 종류라고 생각한다. 애정이 있기에 모든 것이 골치 아파진다.” 역시 병이다. 그는 결혼이 아닌, 한 남자에 대한 애정(병)을 담는다. 물론 자기애를 기반으로 한. 그 애정이 일상과 뒤섞인 ‘결혼’이란 어떤 형태. 제도보다는 약간 친근한. 반짝반짝 빛나는. 그러면서도 울 준비는 되어 있다.

결혼을 않은(못한?) 나로선,
(결혼에 대한) 환상 또한 거의 없다고 내뱉곤 하는 나로선, 그의 결혼 감상기가 흥미롭다. ‘외간 여자’도, ‘외간 남자’도 아니다. ‘외간 결혼’을 만나본 셈이랄까. 하지만, 난 결혼도 안(못)했는 걸.^^; 그는 결혼에 대해,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뭐 당연하다. 그저 담담한 감상을 흩뿌린 에세이니까. 그러면서도 위험하다. 이 에세이는 심기도 하고, 깨기도 한다. 결혼에 대한 환상을. 한마디로, 외줄타기. 결혼은, 미친 짓일 수도 있고, 행복한 짓일 수도 있지. 어쩌면 광우병 위험 부위 같은 것이거나 유기농 음식 같은 것. 마음의 작용, 그리고 일상과의 접목. 일곱 빛깔 사랑.

나는 어쨌든, ‘풍경’이란 챕터의 이야기들이 인상 깊다.
다른 풍경이기에 더욱 좋다는. 십분 공감할만하지. 그건 사람살이에 대한 일종의 통찰이지.
“그 렇게 오늘도 우리는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다른 풍경이기에 멋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났을 때, 서로가 지니고 있는 다른 풍경에 끌리는 것이다. 그때까지 혼자서 쌓아올린 풍경에... 나는 남편을 타인으로 의식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바로, 웨하스 의자.

부부가 ‘일심동체’라거나,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 ‘비밀이 없어야 한다’는 말을 나는 믿지도 않거니와, 어이없다고 생각한다. 변치 않겠다는 새빨간 거짓 맹세도 탐탁찮고. 물론 한 순간만큼은 진심임을 믿지만.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만나 서로의 세계를 넓히면 것으로 충분하지, 무슨. 이심이체, 빙고. 세계는 그런 이해와 오해의 과정 혹은 정반합을 거치면서 넓어진다. 나의 작은 새.

가을이다.
결혼하기 좋은 계절? 진짜? 난 몰라. 그건 당사자 입장에서 내뱉은 말일 테고. 하객은 축의금 뺏기는 계절. 그래도 당신이 즐겁다면 기꺼이 내 줄 순 있지. 대신 밥이나 잘 내주쇼. 그리고, 결혼식장과 피로연이 끝나고 나오면, 낙하하는 저녁.

알코올 중독자의 알코올처럼,
알면서도 멀리할 수 없는 음식물을, ‘devil food’라고 알려주던 가오리는 결국 “남편은 아마도 나의 ‘devil person’이리라”고 전한다. 흠, 그것도 재밌네. 나쁜 걸 알면서도 멀리할 수 없는 사람? 아니면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악마의 유혹?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해!

에쿠니는, 나는, 묻는다.
당신에게 ‘devil person’은 누구지?
아니면, 당신의 ‘devil person’은 몇 명입니까?
완전 흘려들어도 좋을 만큼의 농담이지만, ‘devil person’은 프라다를 입을까?

그래,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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