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 문학의 비밀을 푸는 18개의 놀라운 열쇠
정여울 지음 / 이순(웅진)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정여울의 문학멘토링》.

우선, 나는 이 책을 온전하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평가할 수 없다.

저자가 '정여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군가!

그녀, 한겨레에 <정여울의 청소년인문학>코너를 연재하는 문학평론가이다.

나는 그것을 꼬박꼬박 읽는 독자로서, 뭣보다 이 코너가 주는 '망치 한 방, 전구 반짝'을 좋아한다.

말인즉슨, 그 글은 자주 세상의 진실과 마주대하게 만들고, 나를 성찰하게 한다. 

그녀의 글은 또한 미려하며, 번뜩인다.

가령, 몇 주 전에 봤던, 앞뒤 맥락없이 제시하지만, 이런 글 앞에 나는, '형님!'했다.

그리고, '사랑'을 다시 생각했다.   

 

 

그런 내게, 이 책은 <청소년인문학>의 업그레이드판이다.

2주에 한 번 그녀의 글을 보는 것, 감질났는데, 이런 축복이 있나. :)

 

정여울은 "우리의 다채로운 삶을 담아내는, 크기도 문학도 일정하지 않은 그릇"인 문학에 대해 조곤조곤 말을 건다. 문학의 역할부터 문학의 기법, 문학의 내용 등 문학과 친구가 되고, 연애를 하는 법을 알려 준다.

콘셉트, 한마디로 이렇다. "문학아, 놀자~"

 

아~ 좋다. 《정여울의 문학멘토링》에 대한 나의 소감이다.   

책 덕분에 문학이랑 더 잘 놀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문학이랑 아삼육처럼 지낸 사이는 아니다만,

이전부터 문학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고, 이 책을 통해 그 힘을 확인한 셈이랄까.

 

뭣보다, 슬픔에 대처하는 문학의 자세.

얼마 전, 나는 거듭 언급했었다.

덴마크 작가 이자크 디네센(Isak Dinesen, 본명 카렌 블릭센(Karen Blixen)). 

그녀, 우리가 영화로 더 익숙한, 영화의 원작인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썼다.

이 책, 디네센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영화 내용처럼 그녀는 커피 농장을 일구다 말아먹었고, 사랑을 잃었다.

그런 '슬픔' 앞, 그녀는 이야기를 썼고, 이렇게 말했다.

 “All sorrows can be borne if you can put them into a story or tell a story about them(모든 슬픔은 당신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맞다. '문학의 힘'이다. 

정여울의 말처럼, "인간이 상처에 ‘아파하는 법’을 몰랐다면, 문학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문학은 인류가 입었던 수많은 상처의 박물관이다. 또한 문학은 인류가 입었던 수많은 상처의 치료법이 숨겨진 지혜의 보물 창고다." (p.201)

 

그러기에, 문학은 쓴 사람은 물론이요, 그것을 읽는 사람에까지 치유의 권능(!)을 발휘한다. 상처는 문학을 통해 치유의 길을 걷는다. 물론 그것이 완전하진 않아도,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문학은 인간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의 눈물과 피를 먹고 자라나는 영혼의 원시림이다." (p.203)

 

정여울은 더 나아가, 문학의 '사회성'까지 언급한다. 문학에 드러난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로, '개인의 고통'을 '사회적 고통'으로 공감하게 만든다고. 

 

맞다. 프랑스혁명의 지적 동력은 루소 등이 쓴 찐~한, 당대로선 포르노소설에 가까웠다고 일컬어지는 '연애소설'이었다.

당대의 인민들은 그 연애소설을 통해 주인공이 처한 현실에 '공감'했고, 

그것이 혁명에까지 이르는 동력 중의 하나가 됐다. (by.《인권의 발명》)

개인의 고통이 사회적 공감의 촉매가 된다는 것. 그것이 또한 문학이 지닌 강력한 힘임을 이 책은 강조한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문학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타인의 아픔을 자발적으로 느낄 줄 아는' '공감의 능력'을 키우게 한다. 

 

"우리는 그렇게 문학을 통해 ‘나의 상처’를 넘어 ‘세상의 상처’와 교신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pp.208~209)

 

나 역시 문학 덕분에 위로 받고, 조금씩 슬픔의 늪에서 나를 건져올렸다.

많은 경우, 이별한 직후였다.

한 없이 아래로 침잠하던 나는 詩를 붙잡고 견디고 버텼다. 책과 함께 했다.

문학은 어떻게든 개별의 인간을 놓지 않는다. 손을 내민다. 눈을 맞춘다. 어깨를 빌려준다. 문학은 그래서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이다.  

 

당연하게도 책은, 개별의 슬픔에 공명하는 문학의 힘만 언급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상상력이 살아 숨 쉬는 보물창고”로서 문학이 문명을 어떻게 지탱했는지도 언급하고, 일상 속에서 기적을 발견해내는 능력을 문학을 통해 어떻게 배우는지도 알려준다.

문학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라면,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정여울은 문학 속 '악역'의 진짜 매력은 '얼마나 잔인한가'가 아니요,

'주인공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로 결정된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곧, 우리는 문학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묻게 됨을 의미한다.  

혹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를 묻는다.

물론 문학이 답을 줄리는 없다. 문학의 역할은 딱 그것까지다. 질문하기.

그것으로 족하다. 답까지 준다면, 그건 참고서(문제집)지, 문학이 아니다.

 

좀 과장하겠다.

우리는 문학이 있어서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즉에, 인류는 멸망의 길로 들어섰어야 했으나, 문학이 그 시간을 늦추고 있다.

정여울은 그것을 18가지 지도로 설명을 했다.

당신도 읽어보면 좋겠다. 문학이 좀 더 가깝고 진득한 친구이자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우리들 각자의 마음 속엔 포기하지 않은 꿈이 있음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묘사처럼.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의 잡자.”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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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으로 리드하라 -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
이지성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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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노동. 엄청나다.

모든 지성과 땀이 총력을 다해 이룬 결과이리라. 

그것은 저자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책을 둘러싼 모든 이해관계 당사자들, 특히나 눈에 보이지도 않고, 기록으로 남을 수도 없는 사람들의 노고(노동) 역시 담겨 있다. 책은 단순하게, 지성만을 담은 결과물이 아니다.

 

그러니, 한 권의 책을 '까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안의 노동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러나, 노동 자체의 신성함과 별개로 노동의 결과물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노동과 그 결과물은 별개의 것이다. 영화가 그렇듯 책도 마찬가지다. 

 

사실, 좋은 것만 말해도 부족할 판국이다. 세상에 얼마나 좋은 책이 많은가 말이다.

나쁜 책 혹은 쓰레기라고 불려도 시원찮을 책까지 시간과 공을 들여 말하는 건, 피곤한 일일 수 있겠다. 

 

이 책, 《리딩으로 리드하라》. 그래도 말해야겠다.

저자가 나름 책을 위해 쏟은 시간과 노력, 노동은 분명 존재하고 인정하겠지만,

그 결과로 나온 이 책, 설익다못해 썩었다.

주장을 펴기 위해 조사하고 알아봤다는데,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조악하고 비약 투성이다.

 

특히, 위험하다.

불온해서 위험하다면야, 이 불한당 같은 체제를 바꿀 수 있는 동력인가 해서 반가워하겠지만, 

이 위험은, 이런 경우다.

고기가 썩었는데, 어떻게든 팔려고, 나쁜 것을 감추기 위해 소스 등으로 간을 듬뿍쳤다. 

마음의 복통을 일으키고, 삶을 혼선에 빠트릴 위험.

고기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도축업자가 아니라, 어설프게 칼만 들 줄 아는 정육점 종업원이 칼놀림을 하는 경우라고나 할까.   

 

그래, 왜 이런 비유를 했는지 나도, 근거를 들어야겠다.

 

《리딩으로 리드하라》가 그토록 강조하고자 했던 인문고전. 

요즘 이른바 '대세'의 일환으로 자리잡은 장르인데, 백번 양보해서 강조하는 것,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그 방법론이라는 것이 어처구니 없다. 더 나아가, 알맹이도 없다. 

 

이 책, 지겹도록 '천재'를 들먹인다. 강박관념처럼 천재에 집착한다. 

우리가 그토록 천재를 열망했던가, 착각할 정도로, 이 책은 '천재 나팔수' 노릇을 한다. 

평범한 아이가 어떻게 천재가 됐고, 천재가 세상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데, 그 천재가 된 결정적인 이유는 거의 오롯이 인문고전. 다른 이유,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자신이 힘들게 찾아낸 결정적인 무엇도 아니요, 무조건 인문고전을 많이 읽었단다. 그것이 다다.

 

책의 너스레는 한마디로 호들갑의 극치다. 한 구절을 보자.

 

"...1만 엔권 지폐의 주인공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국민들로부터 메이지 유신의 아버지, 일본 근대화의 선구자, 게이오 대학을 창립한 위대한 교육가로 칭송받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열네 살이 되도록 전형적인 시골 촌놈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스물 다섯에 에도(동경)에 게이오 대학의 기원이 되는 학당을 열 정도로 진보한 지식인으로 변신했다. 약 10년 사이에 바보에서 천재로 변화했다고 볼 수 있는데, 비결은 다름 아닌 지독한 인문고전 독서였다." (p.48)

 

하급무사의 아들. 전형적인 시골 촌놈의 삶. 이것들이 어떻게 '바보'로 단정지어질 수 있는지, 모른다. 저자만 알려나?

 

그리고 게이오 대학의 기원 학당을 연 진보한 지식인. 그것을 천재로 단순 설명한다. 그가 말한 천재가 당최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이렇듯 엉뚱한 논리와 결론으로 늘 치닫는다.

우리 교육의 문제를 들먹인다. 초중고 12년 교육을 받고도 지적이고 창의력 넘치는 인재가 되기는커녕 바보가 되어 사회에 나오는 문제.

배우면 배울수록 무능한 사람이 되고, 시키는 일만 하는 바보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 시스템에 뿌리를 둔 잘못을 지적하면서, 책이 내린 결론은 고작 이렇다. 

"학교는 다녀야 한다. 그것도 될 수 있으면 최고의 학교를 다녀야 한다."

 

시스템을 거론하는가 했더니, 그 결론이라는 것이 최고의 학교를 다니라는 충고다.

돈과 권력이 있어야면 이른바 '명문'도 다닐 수 있는 현실을 모르는 건지, 한심한 충고다.

책은 아예 맛이 가기로 결정한 양, 한 방 더 날린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는 없다!"

 

빈민들을 위한 인문고전 독서교육 프로그램인 클레멘트 코스의 사례를 들면서 책은 아래와 같은 억지주장을 편다.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문맹을 천재로 만든다.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지능이 낮은 아이를 천재로 변화시킨다.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평범한 학생들을 아이비리그 졸업생들보다 뛰어난 인재로 만든다.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둔재를 노벨상 수상자로 만든다. 

 

나는 이 책이 말하는 '천재'라는 단어가 무엇을 가르키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둔재고 지능이 낮아서 그런가 본데, 책에 의하면, 나는 인문고전 독서가 부족한 탓일 게다.

 

그러면서, 책이 내놓은 확신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든다. 

"만일 철학고전 독서교육이 제대로 정착하면 우리나라는 유대 민족보다 더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함은 물론이고 천재들을 지속적으로 길러내게 될 것이라고."(p.84)

 

철학고전 독서교육이 어떻게 하면 제대로 정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것이 천재, 노벨상 수상자와 어떤 관련을 맺는지, 알 수가 없다. 책은 그저 우격다짐이다. 

 

아울러, "인간은 본래 천재로 태어난다는 것이 교육학의 정설"(p.92)라고 주장하는데,

교육학 전공한 분들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진짜 그런지, 나는 궁금하다.

 

이 얼치기 인문고전 동기부여 책은 천재 타령을 부자 타령으로 옮기며 자폭한다. 

 

돈, 지금 시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책은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인문고전 독서와 돈을 결부시킨다.

저자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면서, 자본주의니 부자니 투자니 하는 말을 싫어함을 전제로 하고 이 말을 꺼낸다.  

 

"세상에는 인문고전 독서에서 얻은 사고력과 통찰력을 '돈'과 관련된 쪽으로 활용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들이 세계 경제학계와 금융계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을."(p.113) 

 

인문고전을 통해 사고력과 통찰력을 기르고 얻을 수 있겠다. 

그러나 돈과 관련된 쪽으로 그것을 활용하는 것, 다른 문제다. 그런 사람들이 경제학계와 금융계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 그게 인문고전의 사고력과 통찰력 때문만은 아니다.

누군가에겐 인문고전이 그저 '클렌징 폼'이거나,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포장'일 수도 있다.

 

인문고전이 돈을 벌게 해 준다는 식의 주장은, 인문고전의 힘을 강조하거나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인문고전의 힘을 개무시하고 되레 좁게 만드는 것이다.

 

책은 이렇게도 비약한다.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을 만든 사람들이 인문고전 독서광이자 저자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은 인문고전 독서로 다져진 사람들의 두뇌에서 나왔다. 이는 인문고전 독서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이 돌아가는 방향을 알 수 없고, 부를 쌓기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p.114)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 지금 그 부작용이 '미친놈 널뛰기'하듯 불거져 나오는 상황이고,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면서 새로운 시작이 요구되는 시점인데, 책은 오히려 그런 움직임에서 역행한다.

저자는 2008년 금융위기의 본질조차 모르는 '무식쟁이'임을 스스로 토로한 셈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자세와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또 있다.

  

우리가 맞닥뜨렸던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책은, IMF가 이런 시절부터 인문고전 독서광이었던 천재 경제학자의 머릿속에서 탄생했단다.

그래서, 그 경제학자 이상으로 인문고전 독서에 미친 경제학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IMF위기 때 우리나라가 그리 허망하게 무너지진 않았을 거란다.

기똥차다. 이런 논리의 비약, 인문고전 독서가 알려준 혜안인가?

 

물론, 커밍아웃이 없는 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맹렬한 신도임을 고해성사한다.

신자유주의의 거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대한 반쪽 평가('현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철인적 지도자')만 언급하고선, "신자유주의의 역사는 곧 인문고전 독서가들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책은, 욕 먹는 한이 있어도 외치겠다고 부득불 우긴다.

우리나라 경제학자들, 왜 케인스나 하이에크보다 더 위대해지거나 동등해지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서구 경제학자들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섬기는 데 만족한 듯한 모습을 보였느냐고.

서구 경제학보다 우월하거나 동등한 한국만의 경제학을 만들지 못하면 영원히 금융 종속인 상태로 살아갈 거라고.

 

"한국 경제학계의 을지문덕이나 강감찬 또는 이순신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것인가? 아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나는 그 영웅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주제넘은 이야기들을 했다. 혹시라도 반감을 가진 독자들은 내 치우친 열정을 용서하기 바란다."(p.125)

 

그건 열정이 아니다. 과도한 비약이다.  

또라이도 불온하면 좋은데, 이건 불온이 아니라 체제순응적 깔때기 짓이다.  

 

나는 의심까지 한다. 재벌가에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은 설마 아니겠지? (실제로 저자는 강연에서 재벌그룹 일환에게 인문고전 독서교육을 했다고 말했다!)

책은 이병철, 정주영을 제대로 섬긴다. 이병철이 '인재경영'이란다. 『논어』에서 비롯됐단다.

정주영은 '의지경영'으로 추켜세운다. 『채근담』과『대학』 등의 고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단다.

그리고 경영자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이병철, 정주영 이상의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은 인문고전을 읽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이상한 주장은 곳곳에서 등장한다. '천재'만큼은 아니겠지만, 인문고전 쫌 읽었다는 양반이, "수신修身은 내팽개친 채 우리나라 자본주의는 바뀌어야 한다는 식의 어려운 주장을 내세우는"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공부는 젬병이다. 그래놓고선 천재의 뇌구조를 들여다봐서 얻은 결론이, 고작 부자 되세요?  

 

그래, 책의 말마따나,

나는 '돈 있는 사람만 대접받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부자는 갈수록 더 부자가 되고 빈자는 갈수록 더 빈자가 되는 우리나라에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누군가'다.

떨리는 목소리로 감히 묻고 싶다고 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책을 읽고 있는가?"

그래, 말해주마. "《리딩으로 리드하라》 읽고 있다. 토 나올 뻔 했다."

 

더 나쁜 건, 첩첩산중인건, 종교적 근본주의자 면모까지 덧붙인다는 거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문고전 독서교육을 받고 천재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 중 불행한 삶을 산 이들은 『성경』을 부정했다는 공통점이 있다."(p.103)

 

책은 그 예로, 감옥을 들락날락하고 여자를 사귀지 못하는 성격장애로 고생했다는 등의 윌리엄 제임스 사이디스를 든다. 더불어, 『성경』을 부정했기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시대의 천재들도 많다고 덧붙인다.

 

대체, 어떤 조사를 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오는가? 나는 책이 담은 멘탈을 심히 의심한다.

하긴, 책은 진짜 자신의 생각 따윈 없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만 내세우고 싶은 거다.

인문고전을 읽는 것만으로 천재가 되고, 화폐를 긁어모으고, 리드할 수 있게 되는 사회?

조까라 마이싱. 인문감수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으면서 있는 척 위장하는 게 더 나쁘다.  

 

인문고전의 진짜 힘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다.

뭣도 모르면서 찌껄이는 건 나도 매 한가지겠지만, 책의 주장은 한 없이 위험하다.

보아 하니, 꼴통 신자들 이미 양산해 놓고 있는 모양새다.

아마도 책이 말한 주장대로 따르자면,

이들이 이지성을 멘토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천재들이 될 터인데, 심히 관심 끊을란다.

리드 잘 해보시고, 나는 빼주시라.

 

마성의 김꽃두레(tvn 코미디 빅 리그 <아메리카노>의 안영미 캐릭터)가 말한다.

"이런, 리딩으로 초딩 되는, 허~접 같은 경우를 봤나~" (꼭, 꽃두레 톤으로!)

부릉부릉, 할리라예~

 

별 한 개도 아까우나, 백만 스물 두 번 양보하여, 인문고전 독서를 권장했다는 점에서, 에라~ 선심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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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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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는 이야기》는 보고 읽는 순간보다, 책을 덮고 난 뒤 일상을 영위하면서 툭툭 떠오르는, 사유를 하게끔 만드는 작품이다. 우화가 지닌 속성일 수도 있겠으나, 이땅에서 펼쳐지는 사건사고, 현상을 접할라치면 자연스레 그의 짧은 우화가 툭툭 떠오른다.  

 

1월20일, 3주기를 맞는 용산참사를 자연 연상케하는 '가위바위보' '새'는 시기적으로 맞물려 그런 잔상을 드리운다. '갑옷도시' '용을 잡는 사냥꾼' '농장의 일꾼들' '원숭이 두마리' 등에선, 자본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이 세계의 잔인함과 그 농간에 넘어가 자유를 자본에 넘겨준 인간들의 무력함을 엿본다.

 

끊임없이 긍정(의 힘)을 설파하며 개인의 노력만 강조하는 시대의 간교함은 또 어떻고. 천사를 찌부러트리는 '불행한 소년'은, 일말의 논쟁이 있었다지만, 여러 메타포(은유)가 있지만 나는 천사로 위장한 지금 시대의 자기계발(기만)서에 대한 은유로도 읽었다. 

 

기득권은 반성이나 성찰 따윈 않는다. 문제가 생겨도 시스템을 거론하지도 않는다. 처벌하고 즉자적인 대응이나 반응을 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여긴다. 그러니 가난이나 불행, 고통을 온전히 개인의 책임으로만 떠넘긴다. 자신들이 가진 권력, 힘만큼의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건, 그게 크나 적으나 비슷하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에는 동물이 주인공인 작품이 많다. 그걸 보고 있자니, 우린 역시 동물의 왕국이다. 동물의 세계나 인간의 세계나 다를 바가 없다. 아니, 모르긴 몰라도 인간의 세계가 더 야만적일 것이다. 우리는, 곧 짐승의 시간을 버티고 있음을 절감한다. '괴물'은 우리가 지금 괴물이 돼 있음을, '괴물의 시간'에 살고 있음을 거의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어쨌거나 지금의 내게 가장 큰 위로와 힘을 준 것은 '스스로 줄을 자른 연'이었다. '하늘이 그립지 않니?'라고 묻는다. 연은 답한다. 아니. 스스로 줄을 자른 연은 하늘을 그리워하지 않아. 며칠 전, 제안이 왔다. 거대 커피체인점 홍보실장 어떠냐고. 자암시 고민하다 거절했다. 잘했다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곧 이 책의 '스스로 줄을 자른 연'이 들어왔다. 최규석이 내게 준 위로였고, 힘이었다.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영어로 땡큐, 중국어 쉐쉐, 일본어로 아리가또라고 하지요. ^^

 

책의 미덕은 곧 그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것. 그런데도 최규석은 짧은 우화의 힘을 빌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최규석. 본인이야 어떻게 받아들이든, 나는 그를 (사유형) 천재라고 생각한다. 매번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놀란다. 재미는 기본으로 그는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세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의 책을 볼 때마다 기분 좋은 이유다. 더구나 잘 생기기까지 했으니, 보통 잘 생긴 것이 아니고 완전 쩔게 잘 생겼다. 하늘이 공평하다는 말은 틀렸다. 하늘은 드물게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준다. 최규석이 한국의 그 예다. 외국엔 조지 클루니가 있듯.  

 

감히 말하건대, 최규석은 우리 시대의 보물이자 축복이다. 만화계뿐 아니라, 지금 모두의 우리에게.

 

아울러, 다시 한 번. 용산을, 추모한다. 떠올린다. 기억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뿐이지만, 그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들의 무덤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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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이경훈 지음 / 푸른숲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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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였다. 도시. 내게 급작스레 던져진 화두. 태어나서 지금까지, 도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한 적, 없었다. 부산과 서울. 군대조차도 행정구역상 서울이었으니, 나는 저 두 곳에서 줄곧 서식하고 있다. 스물 셋, 잠시 미국에서 6개월을 꿈처럼 보냈던 외에는. 

 

부산과 서울. 이 도시(들), 딱히 좋아한 것 같진 않지만, 익숙했다. 물론 언젠가 이 도시를 떠날 것이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고는 있다. 평생 살고 싶은 곳은 아니거든. 서울은 너무 빡빡하고 대체로 권위적이다. 드물게 반짝반짝 빛나는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부암동. 그곳은 서울(의 일부)이라기보다 그냥 부암동이다. 나는 그저 이 도시가 그닥 매력적이 아니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내 사는 곳이 도시가 아니라고 말한 적, 없었다. 당연했다. 나는 '도시'에 대한 사유를 진지하게 해보지 않았다. 고작해야 시골의 대척점으로서 도시를 떠올린 정도?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이 말, 그래서 도발이었다. 아니, 왜? 강하게 궁금증을 유발한다. 제목, 섹시했다. 들추고 싶고, 벗겨내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봉인을 풀었다.

 

책을 읽는 내내, 덮고 나서,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나는 도시에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왜? 서울은 걷는 것을 박탈하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요즘 걷기 열풍이라 서울에서 걸을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걷다가 나자빠지는 소리냐고? 그러게. 그럼에도 서울은 걷기에 우호적이지 않다. 아니, 걷는 자들을 종종 능멸한다. 자, 이야기를 풀어보자.  

 

'걷고 싶은 거리'를 처음 접했던 건 이십대 초반. 파리가 그렇다고 했다. 내 이십대 민무늬 정신에 주름을 새겨준 고종석 선생의 파리 예찬 이유 중 하나였다. 궁금했다. 걷고 싶다는 생각을 부르는 거리라니. 부산에서도, 서울에서도, 그런 느낌, 가져보질 못했다. 되레 그곳들은 걷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곳에 가까웠다. 차가 장악한 공간이니까. 사람은 차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 


고종석 선생은 『도시의 기억』에서 다시 파리를 꺼냈다. "파리는 걷기를 유혹하는 도시였다. 오밀조밀한 볼거리들만이 아니라, 그 도시의 공기 전체가 걷기를 유혹했다." 그는 파리를 허송하면서 도시 한쪽 끝에서 맞은 편 끝까지 걷는 날도 있었다고 했다. 해찰하며 느릿느릿 걸었다고 했다. 오래 전, 짧게 들른 파리를 다시 가고 싶었다. 파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나도 그런 걷기를 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파리를 걸으면서 낭비하고 싶기 때문이다.


서울 곳곳에 '걷고 싶은 길'이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다. 오세훈이 '디자인'했던 서울은 그런 풍경을 낳았다. '걷고 싶은 길'을 통합해서 관리하겠다고 했었다. 헌데 걷고 싶은 길, 참 애매한 말이었다. 시민들이 걷고 싶은 것인지, 시민들에게 걷고 싶어지도록 만들겠다는 것인지. 자동차에 점령당해 걷기 힘들게 만들어 놓을 땐 언제고. 변덕쟁이들.

 

더 큰 문제. 걷기 혹은 보행환경에 대한 진단과 해결 차원이 아니었다. 오세훈은 거리 특성화나 디자인, 보도 포장 교체 등 보여주기 식 사업에 치중했다. 걷기 혹은 도시에 대한 진중한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오세훈의 '디자인 서울'은 그랬다. 도대체, 서울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차들이 자꾸만 인도로 올라오는 것이 불편했는데, 책은 역시나 그것을 꼬집는다. 그것이 도시를 망가트리는 것임을. 인도에 주차를 하는 야만적인 행위부터 규제하는 것이 디자인 거리 조성의 첫걸음이란다. 인도가 주차장으로 변모하는 현실. 그것, 걷기를 소외시키고, 도시 디자인에 삑살이를 놓는다.

 

도시를 판별할 수 있는 좋은 예가 있다. <섹스 앤 더 시티>. 네 명의 여성들이 펼치는 뉴욕라이프와 스타일을 보여주는 드라마. 그 가운데,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가 구두에 유독 꽂힌 이유는 뭘까? 마놀로 블라닉의 명품적 권위 때문에? 패션의 종결은 구두라서? 천만에. 구두는 곧 걷기다. 멋진 구두로 거리를 폼 나게 걷고 또 걷는 일. 도시의 본질이자, 도시성에 대한 애정임을 책은 말한다. 즉, 걷기야말로 도시 생활의 필수이자 상징이며 기쁨이란다. 그래서 묻는다. 당신의 서울은, 걸어 다닐 만합니까?

 

그러니 걷고 싶은 거리는, '둘레길'처럼 산책이나 운동을 위한 길을 일컫는 게 아니다. 도시 안에서 걷도록 만드는 일이다. 다양한 상점이 늘어서 있는 다양한 구경거리가 있는. 차들이 인도 곳곳에 포진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시는 즉, 걷는 것에서 비롯돼야 한다. 걷는 것에서 도시를 사유해야 한다. 혹은 걸으면서.  

 

“걷기는 도시라는 공적 공간을 즐기고 공동체에 참여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다. 벤야민은 “도시는 이야기책이며 걷기라는 언어로서만 해독이 가능하다”고 했다. 《걷기의 역사》의 저자인 솔닛은 “도시를 점유하는 방식은 걷기”라고 단언한다.”(p.244)


저자인 이경훈 교수에 의하면, 도시성의 최전선은 '걷기'다. 헌데, 걷고 싶은 것에 대한 오해의 지점을 잠시 지적하자. 길과 거리에 대한 구분의 모호함. 길과 거리는 다르다. 이는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지 않는 우리의 언어적 몰이해와도 연관된다. 


“길은 목적지향적 통로이나, 거리는 길의 일종이나 걷는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한 도시의 영역이다. 영어로 보면, 길은 로드(Road)고, 거리는 스트리트(Street)다. 그런데 우리는 길과 거리를 구분하지 않고 혼용해서 쓴다. 뭘 까다롭게 그러냐고 하는데, 길과 거리를 섞어 쓰는 건, 단순한 용어상의 혼용일 수 있지만, 도시에 대한 몰이해를 나타내는 방증이다.”


즉, 길은 이동과 도착이라는 목적 지향적이다. 반면 거리는 경험이라는 과정 지향적 성격을 띤다. 도시를 잘 모르니까, 서울시는 걷고 싶은 길과 걷고 싶은 거리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도시적 걷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어딜까? 가로수길이다. 길과 거리를 명확히 구분하자면, '가로수거리'가 돼야 할 곳. 압구정동 로데오길과 폭이 같음에도, 두 거리는 차이가 크다. 이 교수는 가로수길에 없는 두 가지를 든다. 


하나. 차가 인도에 주차하지 않는다. 인도 폭이 넓지 않아 차가 올라오기 애매하고 가로수가 촘촘하게 있어서 인도에 주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둘. 공원이 없고 상점이 연속돼 있다. 그것이 가로구길을 대표적인 도시 거리의 모습으로 보게 한다. 거리는 자연보다 상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가로수길의 처음과 끝까지 700m를 걷는 동안 힘들지 않다. 쇼윈도의 구두와 옷을 보고 카페 손님을 보는 동안 가로수길은 끝난다.

 

맞다. 옳소. 차가 왜 인도를 점유하는가. 인도에 차가 있는 건 특히나 불법임에도. 우리는 별다른 불만없이 차를 모신다. 왜? 다들 차를 가진 사람들이라서? 차를 인도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권리이자, 도시의 권리다. 자연스럽게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길. 그것이 도시의 모습이다. 그래서 가로수길에서 만난 유모차가 나도 참으로 반가웠다.

 

 

“‘서울은 자동차에 의해 살해된 도시’라는 프랑스 사진작가 얀 베르트랑의 말처럼 서울에서 걷기란 고행에 가깝다. 인도가 없는 좁은 이면도로에서는 차에게 길을 내주고 눈치를 보며 걸어야 한다. 인도가 비교적 넓은 대로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자동차가 인도에 올라와 주차하려고 낑낑거리고 있어서 차를 피해 조심히 걸어야 한다.”(p.24)


서울에 살고 있다면, 당장 당신 주변을 둘러보라. 건물 앞에 차를 주차하도록 만들어서 인도를 잡아먹는 행위가 얼마나 많이 자행되고 있는지. 서울은 그런 면에서 차와 사람과의 관계가 여전히 반도시적이다. 건물-자동차-사람-자동차의 배열. 서울에서 걷기 위해서는 자동차의 눈치를 봐야 한다. 끔찍한 일이다. 더 많은 가로수길을 만들자는 이 교수의 주장은 그래서 반갑다. 가로수길과 같은 비싼 거리를 조성하자는 것이 아니라, 차에 종속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걷고 싶은 그런 거리.  

 

“자동차를 피해 조심스럽고 불편하게 걸을 필요가 없는 안전한 거리는 상점의 쇼윈도와 어우러져 지루하지 않은 ‘진짜 도시의 거리’를 만든다.… 나는 서울의 모든 거리가 가로수길처럼 바뀌길 바란다. 가로수길과 같은 ‘우리 동네’에서 이웃들과 인사하며 지내는 삶을 꿈꾼다. 진정으로 걷고 싶은 거리, 진정으로 살고 싶은 도시를 말이다.”(p.43)

 

아울러, 공원 등 녹화 공간에 대한 과도한 집착. 서울의 녹지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자연을 별로 존중하거나 경배하지도 않으면서 자연, 자연 노래를 부르면서 공원 만들기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 꼴불견이다. 

 

책은 도시에서 상업시설은 필수임을 강조한다. 그게 곧 도시성이다. 도읍 都에 시장 市, 즉, 행정과 상업이 합쳐진 것이 도시다. 고로, 상업도시라는 말은 없는 법. 도시라는 말에 상업이 내장돼 있으니까. 도시는 곧 '상업성'의 다른 말이다. 헌데, 우리는 상업성이라는 말에 묘한 거부감을 가지는데, 이 교수는 그것을 '가식'이라고 규정짓는다.

 

나무만 심는다고 '친환경'이 아니다. 도시에는 도시환경에 맞는 건축과 조경이 있다. 친환경도 말그대로 환경에 어울려야 하는 것이다. 친자연과 혼동해선 안 된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우리나라에선 친환경이라는 말에 대한 오해가 있음을. 특히나 상업성이 있어야 할 곳은 나무나 공원으로 채우고, 그렇지 않아야 할 곳은 광고로 도배질 한다. 시민들의 미감을 해치는 행위다. 개념 없고 품위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쇼핑몰에 대한 비판도 지금 서울이라는 도시를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몇 달 전, 신도림에 '디큐브시티'라는 거대 쇼핑몰이 들어섰다. 그런 메가 쇼핑몰이 들어설 때마다 자랑이랍시고 떠벌린다. 한국 최대, 아시아 최대, 어쩌고 저쩌고. 사람들이 그 규모에 압도당하도록, 저들은 자랑하기 바쁘다.

 

그러나 그것, 가짜 도시처럼 만든 것이다. 쇼핑몰은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무엇이다. 거리를 흉내 내고, 도시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곧 도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전원에나 어울릴 상업시설이다. 그러니 도시는 점점 힘을 잃는다. 도시 안에서 쇼핑몰을 사유하지 못한 결과다. 더 넓고 더 크게 만들어 놓기만 하면 장땡인줄 아는 천박함이다.

 

과거, 나는 도시를 외따로 떨어진 개별들의 공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책은 도시성의 중요한 포인트 중의 하나로 공유공간을 꼽는다. 뉴욕의 예를 든다. 뉴욕의 아파트는 매우 좁아서 밥은 식당, 빨래는 빨래방, 야구경기는 바 등에서 해결한다. '홈(Home)'이 도시 곳곳에 퍼져 있는 셈이다. 그러니 바깥의 지저분함에 대해 서로 지적하고, 규율을 한다. 결과적으로 도시가 아름다워진다.   


“이렇게 최소화된 개인 공간은 역설적으로 도시 전체를 ‘나’와 ‘우리’의 공간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아파트보다는 한 도시에 산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도시 전체를 자신의 공간으로 확장하며, 자연스레 공공의 공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나타난다.”(p.125)


도시성의 의외의 발견이다. 헌데, 서울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공유공간의 기회를 숱한 '방'에 뺏긴다. 가령, 노래방에 가는 건, 아는 사람과 함께다. 뉴욕에서 브런치를 먹는다는 건, 이웃과 사귈 수 있는 계기다. 그러나 지금 서울에서 브런치를 먹는다는 건, 과시적이거나 그것이 뉴욕 라이프인양 경험하는 것에 불과하다. 상업시설은 접촉의 기회를 줘야 하나, 우리는 되레 그것을 과시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장담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당신의 서울이, 당신의 도시가 달라질 것이다. 책 제목에 완전 공감할 것이다. 서울로만 한정할 필욘 없다. 당신의 공간, 자체다. 당신의 시각과 관점을 달라지게 할 것이다. 이 책은 서울을 비판하는 것보다 서울에 대해 애정한다. 도시를 애정한다. 내가 사는 공간을 사유한다는 것은 곧 애정을 보태는 일이다. 

 

서울이 도시겠거니 살았던 나나 당신이나, 도시와 서울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그만큼 책이 주는 충격이 만만찮다. 낯설게 보기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책의 장점은 분명하다. 세계는 넓어지고 감각이 열린다. 눈은 번쩍, 귀는 쫑긋, 말초신경은 아~ 

 

올해, 다양한 책을 읽었다. 사유를 가능케 한 좋은 책들도 많았고, 쓰레기 같은 책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서 올해의 책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를 손에 든다. 도시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마침 서울시장 선거도 있었는데, 나로선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이 도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떤 시장후보가 내 서식지를 도시로서 손색없게 만들 것인가에 초점을 둘 수도 있었다.

 

언제까지 내가 서울에 살게 될지는 모를 일이나, 나는 내 사는 동안 서울이 도시라는 이름을 획득하게 됐으면 좋겠다. 뉴타운으로 범벅된 토건의 공간이 아닌 걷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그런 도시를 꿈꾸는 일, 나쁘지 않다.  

 

건축가 루이스 칸은 말했다. "도시는 소년이 일생 동안 거닐면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교시를 찾는 곳이다." 거닌다고 했다. 교시를 찾는다고 했다. 도시는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 서울이, 혹은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이 각자의 도시가 된 것은 우연이지만, 우리는 그 우연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공간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교시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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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렌디피티 - Serendipit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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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연히 그 사람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지.
그토록 애가 타게 찾아 헤맨 나의 이상형...

혼자가 힘들어 곁에 있는 여자 친구가 이제는 사랑이 되 버렸잖아. 운명같은 여잘 만났어.
이제 나를 떠나 달라고, 그녀에게 말해 버리면 보나마나 망가질 텐데.
그렇다고 그 애 때문에 그녈 다시 볼 수 없게 돼버리면 나도 역시 망가질 것 뻔한데...

- 쿨, <운명> 중에서 -


웬만해선 운명의 장난을 말릴 수 없다 


그렇다. 운명이란 '넘', 장난을 무쟈게 좋아한다. 웬만해선 그 넘의 장난,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대개의 사람살이, 그 장난에 울고 웃는다. 운명과 맞장뜨다가 ‘울고 넘는 박달재’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고. 그렇다면 운명이 치는 장난은 다 받아줘야 하나? 운명을 거스른 자에겐 천벌이? 벼락이? 에이 장난도 정도가 있지! 운명이 뭐길래?

그런데, 태생적으로 운명이라는 말, '닥치고 복무'를 내포한다. 즉, '따라야 할 무엇'이다. 때론 그 복무가 좋을 수도 있으나, 개척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솔깃한 측면도 있다. 운명이랍시고, 질질질~ 끌려다니기만 하는 건 억울하다.

뭐하다 안 되면 운명 탓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사실 운명이란 넘, 실체는 불분명하다. 모호한 대상이다. 이 넘도 뜬금없이 덤태기쓰는 건 억울할 터. “지가 잘못해 놓고선 왜 나보고만 그래”하며 눈을 흘길 지도 모른다. 운명은 어쨌든 장난꾸러기. 운명을 개척하라는 말은 장난에 넘어가지 말란 얘기와도 일맥상통할지도 모른다. 

우연이 겹겹이 쌓은 운명

좋다. 질문하나 하자. 당신,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가? 당신 사랑은 운명적인가, 아님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가? 대체 운명이 무엇이기에?


운명은 필연이란 말과 통한다. 필연은 또 우연과 한껏차이의 한통속이다. 운명은 결국 우연의 중첩에 따른 결과물일 수도 있지. 그래서 “난 운명적인 사랑을 할 거야~”라는 말, 우연을 쌓아서 운명으로 치환하겠단 기대의 표현이다. 한편으론 운명의 장난을 받아들이겠단 의지다. 아, 거룩할 손, 장난에 아랑곳 않는 저 대범함. 


<세렌디피티>, 그 ‘운명적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운명으로 치장된 사랑을 원하는 이들에게, 운명의 장난을 받아주되 마냥 두 손 놓고 기다려선 안 된다고 속삭인다. 운명이란 넘, 앞서 얘기했듯 어떤 장난질로 우릴 당황하게 만들지 모르니까. 늘 운명의 어떤 장난에도 열려 있을 것!


7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 한 백화점에서 우연히 마주 친 조나단(존 쿠삭)과 사라(케이트 베킨세일). 당시 그들 귓가에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이 울린 것일까. 운명이 문을 두들긴다. 그들, 운명을 놓고 배팅을 하고, 숨바꼭질을 한다. 그 과정에서 우연이 겹겹이 쌓인다. 물론 예상 가능하듯, 그 우연(들)은 운명을 위한 깔맞춤이다. 


이런 우연을 보자. 그 사람이 좋아했던 옛 영화 포스터가 갑자기 내 눈앞에 나붙는다. 동명이인이 자꾸 등장한다. 그 사람 이름을 담은 노래도 울려 퍼진다. 뭔가 작위적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우연을 운명으로 치환하려면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영화는 우연을 중첩한다.

하긴 대개의 우리는 어떤 만남앞에서 그런 착각(!)을 부른다. 그저 우연일 뿐인데, 운명이 아닐까, 스스로에게 주술을 건다. 운명에 굶주렸다는 얘기다. 혹은 생이 지루하거나 권태롭거나. 태어난 것도 운명이니, 그 정도는 애교겠지.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허나, 조나단과 사라에겐 각기 다른 사람이 있다. 운명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다. 그들의 존재감이라는 게 그렇다. 조나단과 사라를 엮어주기 위한 일종의 희생양. 이 넓은 세상 위에, 그 길고 긴 시간 속에,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그대’를 만나는 일이 어찌 쉽고 대수로울 수 있으랴. 어떤 만남이든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비율 속에 이뤄지는 법이다. 거기에 우연섞인 특별함까지 가미된다면, 그건 로또 당첨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운명론자’ 사라와 ‘개척론자’ 조나단은 어떻게 씨줄과 날줄을 엮어 운명을 만들 것인가. ‘우연히 발견하는 능력’ ‘운수좋은 뜻밖의 발견’이란 뜻의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운명에 접근하기 위한 다양한 도구와 수단을 나열한다.


<The Three Princes of Serendip>이란 옛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아무리 찾아도 없는 보물을 우연히 발견한데서 유래한 Serendipity. 영화에선 ‘운명의 사랑을 발견하는 능력’이란 뜻으로 포장돼 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운명의 퍼즐을 끼워 맞추는데 집중한다. 배팅 치고는 지나치게 센 것 같은데, 5달러 지폐와 [콜레라시대의 사랑]이 동원된다. 전화번호가 그곳에 있다. 모험심, 참 충만하다. 기민 기고, 아니면 말고, 이거나. 나는 운명과 저런 배팅 못한다.

어쨌든 ‘우연’이 ‘운명’이었는지 확인하려는 의도치고는 가혹하지만 그건 또한 ‘영화적 운명’이다. ‘우린 운명, 곧 필연’임을 확인하기 위한. 그래서 두 사람은 망가지지 않기 위해 뺑이를 친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불일치가 ‘이끌림’을 희석시킬 수 없듯, 운명적인 사랑을 찾겠다는데 그까이꺼 대수로울 거 없다는 자세다.


운명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쥐~


몇 년 전, 뉴욕을 찾았었다. '보고 싶다, 친구야'가 명분이었지만, 내 욕심 중 하나는 센트럴 파크(의 아이스링크장)에 있었다. 왜 그곳이었냐고? 조나단과 사라가 그곳에서 다시 만난다. 손을 잡는다. 스케이트를 탄다. 사랑이다. 운명이다. 그것을 밟고 싶었고, 결국 밟았다. 내 영어 이름은 조나단(조너~선)이다. 사라. 하긴 그 이름. 한때 사귀었던 사람의 영어 이름이었다. 그녀에게 이 영화를 얘기해줬을 때, 그녀는 우리를 '운명'이라고 했었다. 하하.;;
 


<세렌디피티>. 가슴의 ‘끌림’을 ‘운명’으로 치환하기 위한 적재적소의 요소를 적절하게(?) 배치한다. ‘운명론’의 필요충분조건은 만족된다. 여느 만남이 날줄과 씨줄의 오묘한 엮임이 아니겠느냐마는, 특별한 이끌림은 분명 있다. 이때, 감정의 동요는 좀 더 격렬하게 수반된다. 세월이 꼭 망각과 결부되지는 않는 듯하다. <세렌디피티>는 그것을 말한다. 살다보면 그렇다. 잊고 싶은 기억은 오래 남고, 간직하고 싶은 순간은 덧없이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각자 결혼식을 앞둔 조나단과 사라, ‘한 순간’을 잊지 못해 좌충우돌하는 과정은 우연의 연속이지만, 사실 그 정도는 ‘애교’다. 그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7년이 지난 영수증을 찾아 헤매는 조나단이나 친구를 억지 대동해 지나간 흔적을 더듬는 사라의 애처로움. 작위적인 우연이지만, 그 끈을 연결해주고픈 애틋함을 유발한다. (허나, 케이트 베킨세일 정도의 여자라면, 어떻게든 없는 운명도 조작하고 싶다!)


우연과 운명은 다른 빛깔이 아니다. 우연이라 생각했던 것들, 어쩌면 잘 짜인 각본의 무대에서 시간의 흐름이 상정한 궤도를 따라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 각본을 미리 엿볼 생각은 않는 게 좋겠다. 씨줄과 날줄을 하나둘 끼워 맞추고 “운명아! 덤벼라 내가 간다”며 큰 소리 한 번 내지르는 것도 사람살이의 재미니까. 옥동자는 외친다. “운명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쥐~~~”

그러니까, 지금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며 연말연시다. <세렌디피티>의 시즌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영화는 의미가 없다. 그 시즌이라야 이 영화는 산다.
이 작위와 상투가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오직 크리스마스 시즌이기 때문이리라.

참, 어쩌다 보니 남자3호가 됐다. 세렌디피티다.
무슨 말이냐고? 글쎄... 세렌디피티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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