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서울 - 2000년대 최고의 소설과 함께 떠나는 서울 이야기 사전
김민채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옛날부터 이런 표현들, 가끔 궁금했다.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간다. 서울은 오르는 곳이었다. 위에 있는 곳이었다. 지도를 놓고 보면, 서울이 위에 있다는 것은 알겠다. 물론 그것도 북반구 기준에서다. 남반구 기준으로 보면, 서울도 위에 있질 않다. 어쨌든 재밌는 건, 서울보다 위(위도 상)에 있는 곳에서도 서울에 가는 것에 대해, 저런 표현을 쓴다는 거다. 서울은 어떻게든 올라야 하는 곳이고, 위에 있는 곳이었나 보다. ‘상경(上京)’이라는 관성적 표현도 그런 것을 증명한다.


때론 거슬렸었다. 아마 서울을 고향으로 두지 않았고, 서울을 일상적 애정의 장소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도 서울을 동경했었다. 촌놈에게 서울은 뭔가 휘황한 곳이었다. 서울, 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방학을 맞아 서울 친척집에라도 갈라치면, 어찌나 좋아했던지. ‘서울’ 노래를 불렀다. 서울은 그렇게 어떻게든 촌놈이 가야할 곳 같았다.


그리고 나는 서울에 발을 디뎠다. 진짜 서울에 올라왔다. 부산촌놈, 서울내기가 된 것이다. 대학이 문제가 아니라, 서울에 발 디뎠다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세상을 얻은 것 같았다. 바다가 그리워도, 두고 온 여자친구가 보고 싶어도, 내가 서울에 있다는 것만으로 뿌듯했다. 촌놈다웠다.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조용필의 노래, 아름다웠다. 뭣도 모른 채.


그러니까, 촌놈에게 서울은 공간적 개념이라기보다 정서적 개념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큰물에서 놀고 싶었던 촌놈의 욕심이 향한 곳. 서울을 사랑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서울을 더 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서울은 촌놈이 정복해야 할 곳이었던 게지. 그저 자신의 욕망이 이룰 장소였을 뿐이었다.


물론 그 치기어린 욕망, 오래가지 않았다. 청운의 꿈이라고 여겼었던 것, 한낮 허황된 욕심임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서울을 애정한 것, 아니었다. 이미 익숙해진 곳. 그냥 내 몸뚱이가 서식하는 곳이었다. 타인의 욕망을 자기 것처럼 포장한, 비루한 욕망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얼굴이 바뀌었다. 욕망은 점점 비대해졌다. 삶은 강을 경계로 나뉘어졌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사람의 가치는 외려 떨어졌다. 서울은, 사람이 살 곳이 못 되었다. 서울은 자신의 진짜 얼굴을 잃었다. 성형미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더 서울》의 저자 김민채도 그것을 말하고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에서 뉴요커를 흉내 내고 파리지앵을 부러워하며, 런더너를 지향하는 것. 그것을 소비하도록 만드는 서울의 비굴함이 싫었다.


“지금의 서울은 서울다운 고유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가장 서울답던 풍경은 근대화 이후 사라진 지 오래고, 그렇다고 고층빌딩숲을 서울의 고유함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어느 순간, 서울은 고유성을 잃어버렸다. 새로 만드는 공간이나 건물들은 ‘유럽풍’. ‘서양식’ 등을 최고의 수식어로 여기는 듯 설계되고 홍보된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 습관이나 문화가 생겼는지 알지 못한 채 ‘파리지앵’이나 ‘뉴요커’의 행동 방식을 열심히 따라한다.”(pp.100~101)


그럼에도 서울‘턱별시’는 사람을 조금씩 매혹시켰다. 서울, 하면 드러나는 것 외에도 또 다른 별천지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곳은 내가 알던 서울이 아니었다. 아파트숲으로 둘러싸여 있지도 않고, 높은 고층빌딩을 사람을 위압하지도 않았다. ‘지갑을 열어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계명도 없었다.


부암동이 그중의 하나였다. 내가 아끼는 그곳에는 커피가 있고, 운치가 있다. 낭만이 있고, 걷고 싶은 길이 있다. 쉬고 싶은 장소가 있으며, 자연이 살아 있다. 물론 안타깝게도 조금씩 그것을 해치는 요소들이 틈입하긴 하나, 그래도 부암동은 부암동. 그곳에서도 나의 사랑하는 장소 한 곳은 윤동주 시인의 언덕. (행정구역상으론 청운동이다.)


《더 서울》의 김민채 저자가 휘날레로 장식한 곳. 그래서 반가웠다. 그도 이곳을 사랑하는 구나. 동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 나도 그도, 그곳에 마음을 두고 있구나. “내리 3일을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올랐지만 전혀 지겹지 않았다. 갈 때마다 새롭고 경이로웠다. 두 발에 닿는 언덕의 경사가 즐겁고, 두 뺨에 닿는 언덕의 바람이 사랑스러웠다.”(p.327) 


처음 그곳을 갔을 때는 여럿이 함께였다. 일종의 소개를 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혼자 찾았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가기도 했다. 갈 때마다 마음이 좋았다. 그 야트막한 언덕, 사랑스러웠다. 아무나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너와 함께 걷고 싶었다. 그래서 김민채의 마음에 공감했다.

 

“누군가와 함께 다시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찾는다면, 내가 누렸던 순간들은 사랑하는 이에게 내어주고, 난 그저 그의 뒤에서 말없이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래, 걷고 싶다고.”(pp.327~328)


거기에 덧붙여, 윤동주 시인의 詩를 연인을 위해 읊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을 위한 시 낭송회를 연다면 그곳으로 하고 싶다. 바람에 스치는 별을 함께 바라보면서. 나는 그녀만의 윤동주가 되고 싶다.


김민채의 서울이야기는 지극히 감상적이다. 더 서울, ‘the’이기도 하고, ‘more’이기도 한데, 때론 그 감성에 공감하면서도 너무 개인적이라 뜬구름 잡는 것 같았다. 약간은 실험적인 형식인데, 혼자만의 감성만 너무 넘친다. 이해하기보다 느껴야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쉬이 그 느낌에 젖어들지 못했다. 다시 책을 본다면 모를까, 처음 본 감상은 그렇다. 꼭 소설가 지망생 혹은 작가 습작생의 글을 본 느낌이다. 서울이 지닌 보편적 감상보다 개인의 감상만 줄줄 흐른다.


‘서울과 친해지는 30가지 방법’이라지만, 자신의 경험과 느낌만 늘어놨을 뿐, 서울을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은 많지 않아 보인다. 혼자만 친해졌을 뿐, 다른 사람은 파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더’ 서울이라고 했을 때의 기대감이 꺾여서 그럴 것이다. 나의 필요와 요구에 맞지 않을 뿐이다. 문학(소설)과 어우러진 글은 감각적이다. 누군가에겐 참 좋은 시도이자, 즐거운 책 읽기일 것이다. 


그의 시선은 따스하다. 서울을 애정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개미마을의 이야기에서도 그것을 느낀다. 마을공동체의 하나인 그곳. ‘철거’라는 멘붕(MB)시대의 시대정신이 할퀸 그곳. 물론 그전부터 철거는 개미마을 사람들의 삶을 위협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철거로부터 자신을, 삶을, 마을을 지켰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이 쉽게 사라지고 없어지는 서울에서.  


“무허가촌이었다는 개미마을은 오랜 시간 동안 몇 번의 철거 사태를 겪어냈다고 한다. 마을은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그렇게 낡아왔다. 언덕 위의 무허가촌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었다. 2009년, 금호건설의 후원을 받아 100여 명의 대학생들이 개미마을에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 벽화를 즐기고, 사진으로 홍제동에서의 추억을 남긴다. 이제 그곳은 사람들의 마을이 됐다.”(p.45)


그리고 도시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 ‘걷고 싶음’에 대한 단상도 꺼낸다. 맞장구 쳤다. 걷고 싶은 서울을 향한 마음. 자동차에 잠식당한 인도에 대한 안타까움. 나도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람을 위한 다리가 아닌, 차를 위한 다리에 대해 늘 가졌던 불만이었다.


“한강은 아름답지만, 한강의 다리들이 어색한 이유. 한강의 다리들은 사람의 다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강의 다리들은 철저히 자동차 위주다. 인도는 최소화되어 있다. 길이 좁아 두 사람이 겨우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정도다. 다리에 오르는 길을 찾기 어려운 다리도 많다.”(p.293)


분리되고 격리됐으며, 외따로 떨어진 서울의 삶에, 마을공동체가 꿈틀대고 있다. 나는 그것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이다. 20년을 넘은 서울생활에서 가장 큰 변화다. 때리고 부수어서 바뀔 줄만 알았던 서울이 얼굴보다 마음을 신경 쓰겠다고 나서고 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과 살고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이웃을 돌아보게 하고, 내 삶터를 사유하게 한다. 그것은 곧, 타인의 욕망을 내 것으로 착각하고 내 삶의 자치권을 남에게 넘겨준 것에 대한 반성이다. 삶의 관계망을 다시 회복하고자 함이다. 이웃과 주변을 돌아보고자 함이다.


김민채의 서울에도 그런 단초가 담겼다. 저 담장 너머의 당신을 이해하는 것. 우리는 다시 서울을 살아내야 한다. ‘더’ 서울을 살아가는 태도. 서울을 다시 생각한다. ‘더’ 서울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각박한 서울이 마을공동체로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 그것이 지금의 서울에게 ‘더’ 주어진 과제다. 


“젊은 날 함께 같은 꿈과 희망을 나눴었어도 결국은 타인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

시간이 흐르면 존재의 형식은 변한다.

예전의 우리만을 기억해서는 타인의 삶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저 담장 너머의 당신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우리 존재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p.51)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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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라이프를 위한 슬로플랜
쓰지 신이치 지음, 장석진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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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 도서 목록만 살짝 뒤져봐도 안다. 세상은 온통, ‘해야 할 것’ 천국이다. 하나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을 한다. 실은 윽박지르는 모양새다. 10대부터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 20대에 해야 할 것, 30대에 꼭 해야 할 것, 4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죽기 전까지 꼭 해야 할 것. 당장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 투성이. 윽박지르는 형태도 가관이다. OO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OO가지, OO대에 경험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OO가지, OO대에는 사람을 쫓고 OO대에는 일에 미쳐라. 도무지 틈이 없다. 10대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뭔가 ‘해야 하’는 강박에 둘러싸인 존재 같다.


이것, 나는 불만이다. 온통 하기만 하란다. 안(못) 하면 낙오자요, 루저, 손쉽게 대수롭지 않게, 낙인을 찍는다. 이것은 일상에서도 마찬가지. 일정한 나이대가 되면 이 사회, 개인이 ‘해야 할’ 일을 친절하게도 정해주신다. 학교를 가고, 졸업을 한다. 회사에 들어가며, 결혼을 한다. 아이를 낳고, 죽어라 뒷바라지를 한다. 그 모든 것,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일까? 글쎄, 그런 것 같진 않다. 세상에 그 나이가 되면 꼭 해야 할 일 따윈 없다. 


사람들, 혼자 바쁘다. 아니, 세상이 바쁘라고 재촉한다. ‘바쁘지 않은 사람은 사람도 아닌’ 세상이다. 그러니 “바쁘다 바빠”를 외쳐야, 사람답게 사는 것처럼 착각한다. 바쁜 게 좋은 거라고? 의중은 알지만, 나는 그런 말, 싫어한다. 


쓰지 신이치, ‘슬로라이프’의 대명사. 그를 통해 나는 ‘부탄’이라는 나라를 알게 됐다. 그가 전해준 부탄은 독특했다. 특히 세계관과 가치관, 격하게 공감했다. 그곳은 느리고 행복하다. 다른 사람, 다른 나라와 비교하지 않는다. 이른바 문명보다는 행복. 빠름보다는 느림. 슬로라이프 전도사의 구미에 딱 들어맞는 나라였다. 쓰지 신이치는 여전히 슬로라이프 전도에 힘을 쏟고 있다. 이 책, 《슬로라이프를 위한 슬로플랜》이 증거다. 슬로라이프, 사람한테 참 좋은데, 설명할 수는 없고... 이런 것이 아니다.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뭐, 그것이 이토록 빠른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구시렁거릴 수도 있겠다.


슬로라이프. 단순히 느리게 행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선, 빨라야 했던 이유를 알아야 한다. 남과 비교했기 때문이다. 남의 눈치를 봐야했기 때문이다. 남보다 앞서야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경쟁을 삶에 내면화된 가치로 삼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송두리째 남에게 의존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남의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래서, 이번 책을 통해 ‘할 일’을 내려놓자고 말한다. 덧셈으로만 점철된 삶을 내려놓자고 말한다. 오사다 시로시의 「시인의 죽음」의 일부를 인용한다. “사람은 ‘무엇을 하였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로 평가받는다.” 그가 보는 세상의 풍경은 과잉이다. 물건의 과잉, 생산의 과잉, 상품의 과잉, 욕망의 과잉, 경쟁의 과잉, 정보의 과잉. 이 모든 과잉을 지탱하는 것이 ‘할 일’의 과잉.


그럼에도, 우리는 내치지 못한다. 과잉에 중독됐기 때문이다. 워커홀릭(일 중독자)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까지도 부지기수다. 나도 한때는 그런 줄 알았다. 워커홀릭이라는 타이틀, 이 현대문명 사회의 자랑스러운 표식인줄 알았다. 그렇게 ‘할 일’이 많아야 인정받고 출세하는 줄 알았었다. 개뿔이었다.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 자본이 조작한 ‘경쟁주의 사회시스템’을 생각 없이, 저항 없이 받아들인 형벌이었음을. ‘바쁘게 산다’는 것,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바쁘다고 힘들어하면서 돈 많이 받아들면 행복한가? 백이면 백, 아니다.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억지 자위한다면 모를까.


우리 인간은 태생적으로 바빠선 안 될 DNA를 타고 태어났다. 인류의 수천 년 역사를 살펴봐도 그렇다. 대부분의 시간, 인류는 ‘할 일’에 속박돼 살지 않았다. 때(시간) 되면 움직이고 뭔가를 한 것이 아니었다. 배가 고프면 먹고, 싸고 싶으면 쌌으며, 잠이 오면 잤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삶을 지켰다. ‘할 일’의 과잉에 부대낀 것은 불과 몇 백 년 되지 않는다. 그 ‘할 일’도 ‘하고 싶은 일’이 아니고,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을 만든 것도 바로 산업혁명이 스타트를 끊고 신자유주의가 정점에 이르게 한 경쟁원리였다.


오해 마시라. 경쟁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도 말하는 것, 아니다. 쓰지 신이치의 말을 인용하자. “물론 내가 돈벌이를 목표로 한 삶의 방식을 전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전적으로 경쟁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경쟁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식의 사회는 결국 누구나 살기 힘들며, 오래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p.41)


슬로라이프. 단순히 삶의 형태나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정치적인 태도이자 삶을 능동적으로 가꾸고자 하는 자세다. 곧 정치적인 슬로건이기도 하며, 세계를 바꿀 정치적인 구호이기도 하다. 가령, 슬로푸드. 그것이 패스트푸드의 반대의미로 느리게 만든 음식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슬로푸드는 음식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된, 지구상 모든 생명과의 연결 혹은 인연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의 태도다. 그것도 모르고, 한국 음식이 슬로푸드라고 세계의 음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개소릴 시부렁대는 멘붕(MB)정권(과 식품대기업)의 움직임은 무식의 극치이자, 이권에 치우친 행태다.  


저자가 강조한 슬로라이프는 ‘지금 이 순간을 살자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그 자체에도 집중하자는 것. 그리하여, 미래의 불안이라는 명목으로 현재를 담보로 하지 말 것. 지금의 자신을 부정하도록 만드는 불안증폭사회에 휘둘리지 말 것. 


“현대 사회는 수많은 부정 위에 성립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지금의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이는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교육도, 매스미디어도 하나같이 ‘지금의 나는 (적어도 충분하다고 할 만큼) 갖춰져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끔 우리를 유도한다.”(p.114)


그렇다면 이 불안증폭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뺄셈의 사고’를 권한다. 깊이 공감한다. 철철 흘러넘치는 과잉에서 얼마나 줄여나가느냐가 관건이라는 것. 뺄셈을 통해 우리는 좀 더 여유롭게 세상과 만나고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슬로는 그래서 곧 ‘관계망’의 확장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명목,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계로 전락한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 무연사회에서 탈피하기 위한 태도이자 자세, 슬로. 천천히 가야, 우리는 옆사람을 보고 옆사람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서로의 체온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법이니까.


쓰지 신이치의 슬로플랜은 곧, 인류의 관계망 회복을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머무르는 일과 함께 사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한다면,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음을 우리는 획득할 수 있다. “Life is slow. 즉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느릿한 과정이다.”(p.184)


나는 빨리빨리도 싫고, 열심히도 싫은 사람이다. 그것이 지금의 멘붕사회를 만든 주요인의 하나라고 본다. 열심히 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빨리빨리 하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주홍글씨를 새기는 것이 바람직한가? 좋은 것인가? 세상에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은 딱 하나다.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 일.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잃고 있다. 용산 참사는 그런 면에서 우리의 영원한 트라우마다. 그러면서도 다큐영화 <두개의 문>이 4만 명을 넘어섰다는 것은 우리가 그저 외면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증명일 것이다.


“올바른 사회란, 강한 사람도 약한 사람도, 건강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거침이 있든 거침이 없든 간에 누구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존중할 줄 아는 사회다.”(p.227)


다시 말하지만, 내가 읽은 ‘슬로라이프’는 단순하게 ‘느리게 살자’는 방식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슬로라이프는 정치의 문제요, 세계의 변혁을 이야기하는 주제다. 이 책을 ‘느린 것에 대한 예찬’으로만 봤다면, 심각한 인지장애를 가졌다는 얘기다. 멘붕 독서론. 어떻게 살 것인가. 슬로라이프는 그것을 자극한다. 우리 각자의 슬로플랜이 필요한 시대다. 멘붕(MB)의 시대를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에 대한 서평은 ‘해야 할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래서 기꺼이 이렇게 쓴다. 맹꽁이 소리가 그런 나를 행복하게 한다. 맹꽁이에겐 ‘해야 하는 일’ 따윈 없을 것 같다. 물론 나라는 인간, 회사인간에서 “오늘 할 일도 내일로 미루”는 인간형이 됐다. 그래서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격언 따위 개무시한다.


그런 내가 부끄럽지 않느냐고? 천만에. 대신 나는 맛있는 커피를 내릴 줄 아는 인간이 됐다. 커피 중에서도 느리게 내리는 드립 커피를 더욱 좋아하는 인간이 됐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조금은 헤아릴 수 있는 인간이 됐다. 마을공동체도 그렇게 슬로하게. “내일 할 수 있는 일은 오늘 하지 마라.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내일도 할 수 있다.” 쓰지 신이치의 이 바람직한 말에 좀 더 덧붙이고 싶다. “내일 안 되면 그만두는 걸로.”

 

이 책에서 내가 격하게 공감했던 말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어쩌면 아무도 울지 않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남자가 울보로 지낼 수 있는 사회’를 마음속으로 그려본다.”(p.80) 나는 제대로 울 줄 아는 남자가 되고 싶다. 당신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아울러, 정희진의 이 말, 격하게 동의한다. “이젠 무엇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안 함으로써 세상이 바뀌길 바란다. 무엇을 안 할 것인가? 무엇이 가장 올바른가보다 최소한 어떤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가 화두가 돼야 한다.(…) 무엇인가 꼭 해야 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이 계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살길이다. 여름 세끼, 하는 것도 먹는 것도 고역이다. 30도 날씨에 생계 노동은 말할 것도 없고 잠드는 것조차 힘에 부친다. 개인의 기력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구가 망가지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 것도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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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 Work - 열심히 일하면 어디까지 올라갈까?
CrimethInc 지음, 박준호 옮김 / 마티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무엇보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평온하게 일을 하는 겁니다. 저는 주어진 일을 하거나 누군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의무 따위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저는 완전히 자유롭지요. 어찌 보면 저는 엄청난 행운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불가능한 것의 가능성》(pp.269~270)-   

 

《워크 WORK》. 이 책, 심장을 뛰게 한다.

‘노동자 공동체’라는 ‘CrimethInc.’. 즉, 이 책의 저자, 다양한 주제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게 한다. 아카데믹하게 접근하지도 않는다. 생생한 노동의 현장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주제어를 선택하고, 맞춤형 이야기를 풀어낸다. 뭐랄까.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속이 후련하다. 이런 세상,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안도감 역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한다.


(중)노동을 작파하라.

저자가 말하는 핵심 중 하나다. 그건 곧 자유다. 맞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본에) 철저히 착취당하고 있다. 그런데 자본은 그것을 교묘히 감춘다. 인민들은 착취당함에도 착취당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저자는 그것을 조목조목 파헤쳐준다. 일(Work)을 작파하면 우리는좀 더 자유롭고 즐거울 수 있음을 알려준다. 교조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곧 자본주의를 작파하라는 주술이다. 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런 세상. 상상만 해도, 좋다! 어쨌거나, 지금의 세계. 대다수 인민들이 원하던 그런 세상은 아니다. 소수의 자본가들, 요즘 그들을 1%로 부른다지. 그네들이 조작하고 착취하는 세상. 속된 말로, 좆같은 세상.


우리,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이 책이 건네는 말 중의 하나다. 기존의 관점이나 개념을 다르게 생각하기. 그것은 지금 세상에 대한 의심이며 저항이다. 가령, 내가 몇 년 전부터 가지고 있던 어떤 회의 혹은 의문. 한 치의 의심 없이 상식처럼 통용되는 이것. 기업은 이윤을 위해 존재한다. 기업은 이윤극대화를 해야 한다. 이윤 없이 기업 없다. 와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기업=이윤’이라는 공식을 들이대는 폭력에 대한 고찰. 그 이윤은 과연 무엇일까. 계속 고민 중이다.

 

책이 권하는 다른 생각, 다른 사유, 이런 것들이다.


복지정책. 

복지정책에 대한 대개의 불만이라면, 무임승차다. 즉, 일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자(세금을 내지 않는 자)에 대한 혐오. 그러나 책은 되레 부자들이 무임승차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가난한 모든 이의 노동이 부자들에게 무임승차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 복지정책은 피 흘려 얻은 투쟁의 결과로, 지금 복지정책의 문제점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수치심과 무력감을 선사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미국식 복지의 허점이자, 자본이 원하는 구도다. 복지정책 역시 인민에 대한 통제 도구로 사용되면서 정해진 길에서 벗어난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 ‘복지’라는 말 자체가 이 사회의 맥락에서 갖고 있는 개념에 반대하는 나는 이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가난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들에게 자원을 되돌려 주는 길 뿐이다.”(p.173)


법. 

우리는 법을 곧잘 ‘정의’와 연관 짓는 로망을 아직 갖고 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그것을 체화했든, 관념을 통해서든 이미 알고 있음에도, 법이 정의를 수호할 것이라는 순수를 마음 한 칸에 품고 있다. 책은 법체제의 진짜 역할이, “권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법률 시스템은 개인에겐 행동을 결정할 자유가 없다는 의식을 심는다. 그렇지 않나?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준법의식’을 강조하는 사회를 보라. 그것, 누구를 위한 것일까? 과연 우리는 준법의식이 없어서 이따위 세상에 살고 있는가? 준법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총질만을 해댈까? 과연 그럴 것이라고 당신은 믿나? 전문가가 아니라는, 고시 패스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는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 법률서비스업자에게 우리를 맡기는 이 통탄할 현실. 과연, 이런 세상은 누가 만들었을까? 답은 뻔하다. 법을 자본에게 공탁(!)한 법률서비스업자들! 지금 우리에게 법의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런 규범에 관계없이 우리 가슴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잊게 된다는 것이다.”(p.295)


감옥. 

감옥, 범죄자를 수용하고 교화하는 곳. 그리하여,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공간. 그러나 《워크》, 이리 말한다. “감옥이 필요한 까닭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이 야기한 부의 불평등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다.”(p.161) 감옥이 행하는 (범죄자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통제는 곧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선결조건이라는 것. 더 나아가 감옥은 단지 사유재산권(있는 자들의 재산 보호)과 국경(이주민에 대한 차별) 같은 논리를 극단적으로 명시한 것일 뿐이란다. 그러니 감옥의 탄생과 역사는 자본주의와 패키지다.


“감옥은 범죄자 계급을 만들기 위한 계획의 한 단면으로, 산업자본주의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산업혁명 시기에 현대적 감옥구조가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p.162)


‘절도’라고 불리는 어떤 행위.

우리는 절도는 무조건 나쁜 짓이며 용서 받을 수 없는 짓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데 책은 역시 딴죽을 건다. “종업원이 동료의 도둑질을 고발하면, 이 금지는 축적된 부를 생산한 노동자들의 공통의 이익에 반하는 몇몇 자본가의 이익을 지키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p.306) 회사의 이익을 구성하는 요소를 보자. 간단하다. 제공한 노동력에 대해 합당한 가치를 보상받지 못한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실제 가치 이상을 지불한 소비자에 대한 착취. 그것의 합이다. 착취에 착취. 오로지 착취로 기업은 연명한다. 그런데도 기업(회사)은 무조건 이윤극대화를 해야 한다고? 세상에, 그런 것을 누가 정하고 주입했겠는가? 그러니 절도라고 불리는 동료의 행위는 ‘자본주의에 관한 근본적인 분노’라고 책은 주장한다. 재밌는 관점. 뭔가를 훔치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길이라니! 그리고 공적인 일로 만들자고 요구한다. 꼭 기억해야 할 이것.


“노동은 노동자에게서 나오고, 노동자는 노동으로부터 돌려받을 세상이 있다.”(p.308)


까놓고 말해보자.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경쟁하고 모든 것을 계산해야 하는 삶. 진정 원하는가? 탑에 오르면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그걸 안 해도 될 것 같은가? 그것이 진짜 우리가 꿈꾸는 것인가? 경쟁을 거부하면 다른 세상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태되면 끝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공포를 주입시켜야 사는 존재들이 있다. 자본(지배계층)이다. 그들은 공포를 먹고 산다. 그래야 인민들이 순순히 자신들이 짜놓은 구조와 기획 안에서 움직인다. 가두리 양식.  


일을 해야 한다는 거짓말.

‘먹고사니즘’을 일과 연동시킨 것이 그들의 계략이었다. 일을 쪼갰고, 전문가라는 이름을 단 그들의 보좌관을 뒀다. 가족주의를 통해 인민들을 일일이 쪼개 놨다. 기술의 진보는 허울 좋은 개살구였다. 따져보라. 기술(의 진보)이 인간을 일로부터 해방시키고 여유를 줄 것이라고 공언했다. 결과적으로 일자리는 줄었다. 비용이 준 것은 오로지 자본(고용주)였다. 인민에게 기술진보는 함정이었다. 컴퓨터가 나오고, 인터넷이 보급됐으며, 스마트폰이 등장했지만, 과연 우리의 일은 줄었는가? 문서작성을 해야 할 것은 더 많아졌고, 집에까지 일을 들고 가야 했다. 심지어, 이젠 이동하면서도 일을 해야 한다. 인간이 스마트해졌냐고? 글쎄, 나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당신은 답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인간은 기술의 진화와 함께 점점 더 소외되는 것 같다. 배제 당하고 있다.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장은 실업자, 노숙자라는 이름으로 배제의 메커니즘을 작동한다. 일을 죽어라 하는데도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스마트워크’니, ‘굿워크’니 시부렁거리는데, 그거 말짱 거짓말이다. ‘(딴소리 지껄이지 말고) 일 더하라’는 완곡한 표현이다. 그런 단어를 쓴 책들도 빤하다. 그런 책을 쓴 사람, 필히 (회사) 대표나 본부장(임원)일 것이다. 인민을 부려먹기 위한 자본의 대리인.


“자본주의는 부를 만들어내지만, 더 많은 가난도 만들어 낸다. 한 사람이 축적할 수 있는 부에는 한계가 없지만, 한 사람이 착취당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것이 몇몇 억만장자를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가난해져야 하는 이유다.”(pp.169~170)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뭐? 반란, 혁신, 변혁, 분노!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책은 없는가. 역시 책은 그것에 대해 활발하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사실 이미 인간에게 주어진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만 그것을 조작한다. 즉, 사회구조의 문제다. 고로 혁신이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회구조인 셈이다. 더불어 진짜 변혁에 대해 책은 이야기한다. 근본적인 변화. 지금과는 다른 세상.

  

“다른 방법은 없다.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사유재산제를 부수어야 한다. 경제적․정치적 변혁일 뿐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변혁이기도 하다. 그러한 변화는 위에서부터 계획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비판적 대중들 자신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p.383)


책은 그러기 위해 필요한 전략을 제시한다. “소외된 자들에게 가능한 전략은 개선보다는 반란이다.”(p.174) 특히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싸울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 자리에서 경험한 분노가 ‘힘’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처럼 지배당하고 사는 이상, 우리에게 역할이 주어진 이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p.389) 그리하여, 자경단, 도둑패, 혁명을 위한 비밀결사 같은 다양한 방식을 시험할 것을 권한다. 상상해보니 재밌다. 나도, 오션스 일레븐(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얼굴이 안 따라줘서 조지 클루니나 브래드 피트는 안 되겠지만 ㅠ.ㅠ) 덧붙여, 특정 장소를 점령해 대중 행사 개최하기, 고급 행사장에 입장료 내지 않고 대거 들어가기, 백화점에 쳐들어가 계산 안 하고 나오기.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남의 것이 아닌 내 인생. 내가 만드는 나의 자유. 책은 그런 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바이러스처럼 퍼졌으면 좋겠다. 그 바이러스가 세상을 망하게 만든다고? 나쁘지 않다. 그렇게 망한 세상,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열심히 중노동을 하게 만드는 구조가 없는 세상. 언제부터 우리가 자유를 잃었었는지 따져볼 때다. 그리고 자유를 찾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점검하고 나서야 할 때다. 《워크 WORK》는 그것을 도울 것이다. 이런 질문, 얼마나 멋진가. “열심히 일하는 것이 그토록 멋진 일이라면, 부자들은 왜 하지 않을까?” 이건희. 그 자는 1년에 몇 번의 출근만 하는데도 왜 천문학적인 연봉을 주나? 경영을 잘 한다고? 개뿔. 통제와 억압, 착취를 잘해서겠지. 자본은 인민의 자유를 억압할 줄 아는 그런 자들에게 공치사를 하는 법이니까.

 

마크 트웨인의 말, 되씹을수록 쫄깃하다. 자유라는 말, 얼마나 좋은가.


“인간이 지닌 최고의 재산인 자유, 자유 없이 인간의 삶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금, 다이아몬드, 현금, 채권이든 뭐든 자유의 값을 매길 수 있는 ‘공정 시장 가격’ 따위가 있을 수 있을까?” (마크 트웨인)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오타가 몇몇 눈에 띤다. 다음 쇄에선 꼭 고쳤으면 한다.

p.177. 공동체조자도 → 공동체조차도

p.188. 데모테이프을 → 데모테이프를

p.196. 실직적인 → 실질적인

p.392. 중요한다 →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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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 - 사회를 비추는 거울, 집의 역사를 말하다
서윤영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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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빨갱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대한민국(주류 지배층). 그리고 아파트공화국 대한민국. 무슨 상관인가 싶겠는데, 지금 대한민국의 대표적 주거양식인 아파트. 지배층은 그 아파트(경기)에만 잔뜩 신경을 쓰고 계시지. 헌데 그것 알까? 아파트라는 공동주택. 그것은 사회주의와도 관련돼 있다는 것을. 보편적 평등 차원에서 인민들이 한 공간에 주거할 수 있도록 만든 아파트, 사회주의 유산이기도 하다. 그토록 싫어하시는 빨갱이의 공동주택 양식을 자유 대한민국에 널리 퍼트리고자 애를 쓰시다니. 물론 그 아파트, 그들 식으로 철저히 자본화해서 노예 양산에 적합하게끔 만들었지만.


#2. 지금 서울광장 전의 서울시청 앞. 연식이 오래된 사람은 기억하겠지만, 분수가 있었다. 지금 아이들 노닐게 하는 그런 분수 말고. 한국은행 본점 앞에는 분수가 있다. 이 분수, 이유가 있다. 일제 강점기의 산물로서, 식민통치의 상징이다. 로마 제국에서 비롯됐단다. ‘물의 나라’로 불릴 만큼 로마는 곳곳에 분수를 설치했다. 로마를 여행하다가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분수, 다 그것의 산물이다. 로마는 시내뿐 아니라 식민지를 점령하면 가장 먼저 분수를 설치했다. 제국의 힘을 자랑함과 동시에 점령지라는 표시였다. 일본도 그것을 따라했다. 따라쟁이 같으니! 


《인문학으로 읽는 건축이야기》의 저자, 후지모리 데루노부에 의하면, 제대로 된 집은 신석기에 출현했다. 집의 출현은 인류에게 큰 영향을 줬다. 일상의 평온함과 실용은 물론, 마음과 정신에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후지모리는 그것을 ‘그리움’이라는 말로도 표현했고(여행 등으로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를 상상해보란다!), 집의 출현이 자기 확인 작업을 강화하는데 기여했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지금 ‘집’을 말하는 맥락에서도 그것은 다르지 않다. 우선 집에 대한 인간과 다른 생물의 비교. 이 책을 보고 알았는데, 포유류와 영장류, 집을 짓지 않는단다. 그러나 인간만은 다르다. 집을 짓는다. 이유는, 양육 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인간, 참 까다롭고 성가신 존재다. 생후 3년 집중 관리, 10년 이상 양육 지원. 엄마 되기, 아빠 되기가 고달픈 이유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집, 꼭 필요하다.


“인간은 출산과 양육 과정에서 남성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 그 기간이 모두 끝난 후에도 파트너십을 평생토록 지속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결혼과 출산의 시기에 집을 가장 필요로 한다.”(p.16)


생각해 보자. 결혼이라도 할라치면 가장 깊이 생각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집이다.(결혼 안 한 나도 그 정도는 안다, 뭐!) 집을 어디에 얻을 것이냐. 주변에서도 묻는다. 집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집은 어디에 얻었어? 집은 인간과 동일 시 되곤 한다. 자기 확인 혹은 타인을 읽기 위한 중요한 기제다. 지금 시대는 더욱 그렇다. 신분제가 사라진 자본주의의 창궐과 함께 집은 신분을 드러낸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 집(의 사회성)을 이해하는 정도는 낮은 것 같다. 재벌 계열 건설회사의 광고카피는 그런 우리의 이해를 대변한다. “`비교할 수 없는 당신의 가치.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줍니다.” 천박함의 극치이자 인간을 무시한 폭력이지만, 그것은 또한 지금-여기가 품은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다.   


“현 사회에서 ‘당신의 사회적 지위는 어떻게 되십니까, 자본의 크기는 얼마입니까’라고 직접적으로 물을 수는 없기 때문에 대신 ‘어디 사세요’라고 에둘러 묻는다.”(p.69)


어릴 때, 어른들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런 줄 알았다. 크면서 보니,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과 달리 세상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일상에서 대수롭지 않게, “어디 사느냐”고 먼저 물었다. 모순. 이율배반. 뭘 그 정도 갖고 발끈하느냐고, 말할 수 있겠다. 아 그럼, 철딱서니 없는 이 글, 더 이상 읽기를 멈추시라. 난 당신이 사는 곳, 궁금하지 않으니까.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 참 좋은 책이다. 집을 ‘사는(living)’ 곳이 아닌 ‘사는(buying)’ 것으로 아는 사람에겐 당최 상종 못할 종이에 지나지 않겠지만. 재테크, 부동산테크 하시는 분들, 부동산 시세와 집의 평수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랴. 집이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지, 인간과 집이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가 집의 평수(시세)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 이 책 보면 참 좋다.


장담하건대, 집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책을 보면 집이 달라 보인다. 내가 사는 집부터 내가 발길을 디디는 동선 곳곳에 놓인 건축물까지. 건축이 그래서 매력적으로 보인다. 건축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건축을 본다는 것은 한 시대의 지배적 담론을 읽어낸다는 것과 동의어다.


건축은 또한 기존 사회질서와 철저히 조응한다. 바로크, 로코코, 고딕 등 건축양식으로 시대를 호명하는 것을 떠올려보라. 그것은 지배계층의 의도와 질서가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아파트. 지배계층과 토건업자의 강력한 의도와 지배욕이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로, 집을 보면 시대가 보인다. 


과연 인민에게 아파트가 반드시 필요했을까? 지배계층의 숨은 의도가 이 책에 잘 나온다. 우선 ‘내 집 마련의 신화’부터. 왜 ‘신화’라는 말로 언어의 인플레가 가미돼야 했을까. 지배계층, 주택을 소유하도록 부추겼다. 집을 소유함으로써, ‘나는 더 이상 과거의 가난한 노동자가 아닌, 당당한 도시민’이라는 의식을 갖도록 부추겼다. 노동자들을 부려먹기 위해, 자본가에게 그건 필수였다. 노동자가 노동자임을 잊게 만들기. 노동 환경의 개선보다 도시 중산층의 모방 소비로 관심 돌리기.

 

그러니, 평생을 두고 집을 갖는 데만 온 힘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과연 집을 소유한다는 게 왜 필요한가 말이다. 그 합당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내게 댈 수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형님’ 혹은 ‘누님’ 하고 무릎 꿇겠다.


그 방법, 점점 더 교묘해졌다. 덕분에 ‘내 집 마련’, ‘등골 브레이커’가 됐다. 주택담보대출, 모기지론 등의 금융기법까지 동원됐다. 노동자들은 더욱 온순해졌다. 이 빌어먹을 사회에 진짜 필요한 저항과 반항, 혁명의 기운 모두를 야금야금 빼 먹었다.

 

지배층은 노동자들의 일치단결에 늘 노심초사하는데, 내 집 마련, 아파트라는 신화는 가족주의의 안온한 소파에 묻히도록 만들기에 딱! 그것으로 노동자계층의 자발적인 분열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니 책은 생각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왜 고작 아파트 한 채 마련한다고 모든 등골을 빨아 먹혀야 하는 것일까?


“저소득층 노동자에게 공동주거를 공급함으로써 주거 안정을 도모하고 나아가 사회적 불안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기본 입장은 사회주의자나 박애주의자 모두 같았지만, 그 방법론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이 아파트 내에 공용공간을 강조하여 노동자들이 단결하도록 하였다면, 박애주의자들은 공용공간을 최소화하고 각 주호 내에 안락함을 제공함으로써 가족주의를 심화시키고자 하였다.”(pp.249~250)


말머리에 언급했지만, 아파트, 노동자에게 공동주거를 제공해 주거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던 사회주의의 목표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우리의 아파트는 그것과 무관하게, 아니 정반대로 작동했다. 1970~80년대 그저 잘 살아보는 것이 모든 것에 앞섰던 시절, 지배계층은 노동자 인민들이 아파트를 장만하는 성취감을 갖도록 부추겼다. 아파트는 중산층의 좌경화와 단결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기득권 세력의 확대 재생산을 위한 것이었다. “건축의 역사는 곧 체제 순응의 역사”라는 저자 서윤영의 언급은 그래서 확 와 닿는다. 인민의 일상을 기존의 사회제체 안에 순응시키려는 노력이 건축에 투영될 수밖에 없다. 건축은 돈(자본)과 권력(제도 혹은 법)이 반드시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서재에 대한 사유도 다시 하게 됐다. 지금 많은 사람들의 로망이 서재다. TV나 영화를 볼라치면 서재는 매혹적으로 비친다. 혹은 명망가 혹은 셀러브리티들의 서재를 보여주면서 흔히 접할 수 있는 ‘OOO의 서재’. 서재에 대한 로망은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전 봤던 <돈의 맛>. 웅장하고 으리으리한 거대한 서재가 등장했다. 모든 것이 꽉 찬 서재.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이 알려주는 서재에 대한 팁. 서재는 사회적 욕망의 산실이다. ‘서재 갖기 유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흥미롭다.

 

“엄밀히 말해 가장의 사실私室인 그곳을 굳이 서재라 부르는 것은 정보와 지식이 권력과 경제자본으로 환원되는 사회에서 서재를 소유했다는 것은 권력과 경제력을 곧 권력인 사회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정보와 지식이 권력과 경제자본으로 환원되는 사회에서 서재를 소유했다는 것은 권력과 경제력을 소유했다는 것과 동의어가 되는 까닭에, 서재가 아닌 방마저 서재라고 부르는 것이다.”(p.153)


<돈의 맛>에서 윤 회장(백윤식)이 집을 나가기 전, 돈이 준 모욕에 대해 언급하는 곳이 서재이다. 이층 서재를 정리하면서 일층에 있는 비서와 딸에게 고해성사 혹은 자기 토로를 한다. 그리고 그 꽉 찬 서재에서 윤 회장 자신의 것이라곤 몇 권의 책밖에 없다. 그러니 저자의 앞선 언급은 그토록 으리으리한 서재를 갖춰놓은 이유에 대해 깨닫게 해준다.  


집을 ‘다시’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나를 닮은, 혹은 나를 담은 집을 짓고 싶은 이유가 더욱 강해졌다. 지금-여기의 우리는, 솔직히 말하건대, 사람이 집(아파트)을 닮았다. 그것은 지배계층의 교묘한 상징 조작에 휘둘린 까닭이었다. 우리에겐 우리의 삶과 자유가 있다. 사람이 집을 닮아선 안 된다. 집이 사람을 닮아야 한다.

 

우리, 다시 집을 돌아보고 들여다보자. 

집을 ‘소유’한다는 것, 과연 우리의 진짜 욕망이었을까? 주입된 것은 아니었을까?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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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온 편지
김용규 지음 / 그책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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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것은 답장입니다. 이제는 케케묵은 골동품 같은 뉘앙스가 돼 버린 편지. 그 편지를 받아들고 찡했던 제 마음의 울림을 담은 답신이죠. 물론 앞서, 제 마음을 흔들었던 《숲에게 길을 묻다》에서 이어진 작은 인연 덕분이기도 하겠죠.


이 편지를 받은 저도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숲이 뿜은 피톤치드를 그의 분신인 종이를 통해 받은 기분이라고 할까요. 선생님이 지닌 행운을 나눈 까닭이기도 할 겁니다. ‘제 스스로 찾은 기쁨과 즐거움의 삶의 시간을 재조립시키는 마법’을 볼 수 있어서이기도 하고요.

 

삶의 변곡점. 저도 제게 불쑥 다가왔던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내 선택을 위해 모든 것을 뒤집는다는 것. 그 순간은 각자에게 다른 형태이자 내용이겠지만, 그때의 느낌, 여전히 잊지 못합니다. 그냥 주어진 대로만 살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탈출을 감행했던 순간. 노예의 편안과 자본의 (거짓)평안을 거부하고 나섰던 순간. 그 순간을 다시 오롯이 기억해낸 것도 선생님의 책 덕분입니다.


여우숲을 떠올렸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만나 뵀을 때 상상했던 그 숲.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접했던 그 숲. 숲 학교가 들어서고 만났던 그 숲. 한때, 서울, CEO... 선생님의 몸과 마음에 묻은 그 기억이 낙엽처럼 썩어서 새로운 삶의 흙이 됐고, 그 흙이 뿌려진 숲은 참 좋았습니다. 그제서 깨달았습니다. 흙 묻었다며 더럽다고 야단치던 도시 어른들의 어리석음을. 저는 그래서 그런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울러 백오산방. 선생님 스스로 짓고, 선생님의 삶을 고스란히 품은 그 집. 저는 아직 도시의 네모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제 살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그리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압니다. 집은 사는(Buy) 것이 아니라, 사는(Live) 것이며,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으면 더 행복하다는 것을.

 

당장은 아니지만, 성급하게도 저는 이미 제 살 집의 이름을 정했습니다. 살짝 알려드리자면, 수운잡방입니다. 조선 중종 때 안동 출신 김유가 지은 전통 요리서의 이름이기도 하지요. ‘풍류를 아는 사람에게 대접하는 특별한 요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제 사는 곳에서 그렇게 풍류를 아는 사람에게만 커피를 비롯해 요리를 대접하고 싶거든요. 


제 소박한 바람은 그것입니다. 선생님의 편지를 읽으며 조금 더 선연하게 그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게 다 선생님을 비롯한 바람잡이들 때문(!)입니다. 백오산방을 비롯, 몇몇 분들이 살 집을 스스로 짓고 그 안에서 스스로 노래하는 풍경을 자꾸 접해서 그렇습니다. 그 분들, 그렇게 살 집을 스스로 짓고, 농사도 짓고, 숲과 자연에 기대 온전한 자신만의 삶을 모색하고 실험하십니다. 저는 그것에 마구 끌리는 학생인 셈이죠.


물론 저는 바지런한 농사꾼은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천성이 한량이라, 온 몸과 마음을 쏟아야 할 농사꾼의 자질에 턱도 없이 모자라서죠. 다만 텃밭을 어떻게든 가꿀 생각입니다. 커피도 퉁퉁 볶을 생각이고요. 그리고 선생님의 기조를 빌리려고요. 내가 만든 농작물과 볶은 커피를 돈으로만 사려는 사람에게 팔지 않을 심산입니다. '따라쟁이'라고 호통 치진 마세요. 하하. 그냥 선생님 생각에 동조하는 한 사람이라고 여겨주세요. 


더구나 그건 제가 결국 하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였다고요. 커피 얘깁니다. 공정무역 커피를 다루면서, 공정무역 커피산지를 다녀오면서, 저는 그만 ‘형님’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을 중요시 여겼던 제게, 산지를 직접 다녀온 경험은 또 다른 축복이자, 배움이었습니다. 커피열매 한 톨에 담긴 자연과 농부들의 노고, 하얗게 피는 커피 꽃과 빨갛게 혹은 노랗게 익는 커피 열매의 향기에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커피를 팔 수 있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물론 충분하지만, 제 수운잡방엔 더 까탈로 대하고 싶었습니다.


쉽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일회성 결심이 아닌 삶을 송두리째 바꿀 때부터 스멀스멀 스며든 사유입니다. 불가능할 거라고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선생님의 편지 덕분입니다. 선생님 말씀, 기억합니다. “작은 확신을 실현하는 것조차 온 생애가 필요하다.” 더불어 이것도. “하찮은 소망의 실현도 만만치 않다. 자신을 둘러싼 관계와 억압을 설득하고 깨 부셔야만 얻게 되는 전리품인 탓이다.”


아무렴요. 그래야 한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은 언제나 힘들고 쉬이 오지 않는 법이잖아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겨울나기’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겨울이 온 것을 알지 못하기에 오는 우리의 불행, 겨울엔 간결해지며 버티고 견뎌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금의 이상야릇하게 뜨거운 봄도 겨울을 견뎠기에 가능했다는 것도.


그리하여 선생님이 말씀하신 성장의 방식, 아니 방식이라기보다 철학에 저도 좀 더 근접조우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 그만큼 투철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니까요. 좀 더 크고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단단하게 다져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비료나 농약을 주어 단기적 성과를 얻는 방식이 아닌 이 땅을 써야 할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아마 농사꾼이자 숲학교 교장인 선생님도 그렇지만, 커피를 만드는 저도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책에서 말씀하신 것 기억하실 거예요.


“상대적으로 모양은 조금 못났어도 자연의 수많은 은혜로 빚어지는 농산물의 건강한 맛을 인정할 줄 아는 소비자, 여느 공산품처럼 모든 농작물도 최종 가격만을 통해 그 가치가 결정된다고 믿는 것이 아닌, 땅과 햇빛과 바람과 물과 다른 무수한 생명들과의 관계가 빚어내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인정하고 그 모든 것의 수고로움에 감사할 줄 아는 그런 소비자를 만나야 합니다.”(p.68)


사실 저는 이들 소비자 앞에 굳이 ‘착한’이라는 수사를 붙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은 선생님이 말씀하신 ‘인간’보다는 ‘사람’일 테고, 그저 우리들의 동지라고 여기고 싶습니다. 얼마 전 들은 얘기인데, ‘농부로부터’라는 유기농 가게가 있습니다. 그곳엔 ‘생긴 대로 좋아’라는 코너가 있는 모양입니다. 외모지상주의를 타파하는 이 코너, 흠집이 난 과일을 모아서 싸게 파는 자리라고 합니다.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네요.

 

“겉모양새로 가치를 결정하는 시선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세상에는 우리가 여유롭게 누릴 수 있는 것이 한 겹 더 늘어납니다.”


한량이 바라는 포인트가 저기 있습니다. 여유롭게 누릴 수 있는 것이 한 겹 더 늘어난다는 것. 나중에, 제가 꼭 숲에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있는 곳이 어디든, 제가 견지하고 싶은 것을 담은 이 편지를 한 번씩 들춰보겠습니다.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하신 이 말씀, 기억하실 겁니다.  “숲 생활 3년 만에 나는 풀도 나무도 강아지도 모두 생명인 것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놈이 되어버렸나 봅니다.”


저도 언젠가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남의 인생을 살지 않게, 자기다움을 추구하며 살 수 있는 길을 조금씩 만들고 있습니다. 경제적 불편이라는 겨울이 아직 남아 있지만, 저는 생각보다 잘 버티고 견디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을 얻었고, 이런 편지에 감흥 할 줄 아는 사람도 됐습니다. 아주 가끔은 스스로 버티고 견뎌준 것이 대견해서 토닥토닥해주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무언가를 대표하기보다 지키기로 마음먹은 것을 꾸준히 지치지 않고 지켜나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이 편지, 잘 간직하겠습니다.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여우숲, 참 좋았습니다. 산과 바다, 바람소리는 잘 있는지요? 참 이 책을 읽고 궁금했는데요. 절룩거리던 자자. 눈에 밟히더군요. 자자의 숨결이 깃든 그 여우숲, 저는 참 좋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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