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게 기다리는 봄은 때로 너무도 더디게 오고, 혹은 예기치 않게 와서 내면을 흔들어 놓는다. 꽃이 피는 때를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긴 겨울 끝에 오는 새로운 희망 때문인가, 아니면 혹독한 시련의 종지부, 어둡고 추운 내면을 밝히고 덥히는 정화의식 때문인가.
이유가 어떠하든 봄은 만인의 기다림 위에 꽃으로 피어난다. 이원규 시인의 시 「거울 속의 부처」에서 내면이 깨어나고 열리는 과정과 순간은 너무도 간절하다.

 

        

 

내내 긴 겨울잠을 자다
매화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깨어보니

 

삼매는 오간 적도 없고
삼발 머리에 손톱 발톱만 자랐다

 

봄은 봄이로세
부시시 일어나
토방에 군불을 지피고
꽃피는 법당 하나 차렸다

 

촛불 두 개를 켜고
헌화 헌다 헌향
목불 하나 없는 법당에서
커다란 거울을 보며
백팔 배를 하였다

   - 이원규 詩 「거울 속의 부처」 1~4연

 

「거울 속의 부처」는 쉬운 시어(詩語)로 깊은 사유와 시적 감성을 담아낸 작품이다. 시인은 “매화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봄이 왔음을 깨닫는다. 첫 행에 “내내 긴 겨울잠을” 자다가 깨어났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내면의 어둡고 긴 고뇌에 침잠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하여 긴 시간 동안 “삼매는 오간 적도 없고/ 삼발 머리에 손톱 발톱만 자랐다.”


봄이 왔다는 외부의 신호에 문득 정신을 차려 시인의 내면도 봄을 맞을 준비를 한다. 그 준비는 거창할 것도 없이 “토방에 군불을 지피고” 목불은 없지만 “꽃피는 법당 하나” 차린 것이다. 그리고 “촛불 두 개를 켜고/ 헌화 헌다 헌향” 하고는 없는 목불 대신 “커다란 거울을 보며/ 백팔 배를” 한다.

 

‘거울’은 잠과 깨어남, 외부와 내면, 나와 부처, 고뇌와 씻김 사이에 놓인 관문이자 의식 전환의 기점이다. 그 관문을 통과하여 새로운 세계에 새로운 관점과 의식의 발을 내디디게 된다. 인식의 전환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 부처는 멀리 있지 않고, 목불, 석불, 금불에도 있겠지만, 삼라만상 모두에도 깃들어 있지 않은가. 물론 거울을 보며 백팔 배를 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긴 겨울잠에서 깨어 토방에 군불을 지피고 촛불을 켜고 헌화, 헌다, 헌향하는 전환의 조짐을 이미 다 갖추었다. 이제 완전한 전환만을 남겨둔 셈이다.

 

     

 

한 번 절하고
너는 누구냐
또 한 번 절하고
너는 또 누구냐
묻고 묻다가

 

거울 속의
남루한 부처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그도 분명 울고 있었다

   - 같은 詩, 5~6연

 

이제 시는 5연에서 다시 한 번 상승한다. 거울 속의 백팔 배를 하고 있는 나를 향하여 일배(一拜) 할 때마다 묻는다. “너는 누구냐”고. “또 한 번 절하고” 거듭 묻는다. “너는 또 누구냐”고. 그렇게 백팔 배를 하면서 백여덟 번을 묻는다. 그게 어디 숫자상의 108번뿐이겠는가. 천번 만번 묻는 것이며, 깊고 깊게 묻는 것이다. 그렇게 “묻고 묻다가” 마침내 “거울 속의/ 남루한 부처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내가 나에서 타자화되는 순간이자, 나의 승화이며, 나의 깨달음이다. 동시에 나를 바라보는 부처를 발견하는 순간이며, 나와 부처 간의 교감이 오가는 순간이다. 그리하여 “그도 분명 울고 있었다”는 마지막 행에 이르러서는 나의 내면이 위무받기에 이른다.


물론 시인은 그 ‘거울’조차 떠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거울 속의 남루한 나를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내면을 읽어주는 마지막 행 “그도 분명 울고 있었다”는 것으로 대신할 뿐이다. ‘우는 그’는 시인 자신인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부처이다. 아, 봄날은 이리 눈물겹고, 이리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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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가 지나기도 전에 전설이 되어버린 곳이나 사람이 있다. 나는 가급적 유명한 장소나 사람을 피해왔는데, 선운사만은 그 전설에 한쪽 발을 담근 채 오래 귀 기울여 듣고 싶었다. 선운사는 이래저래 문학 작품에 직접 묘사되거나 인용되면서 여전히 살아있다. 현존하는 사찰이니 향 피우고 꽃 올리며 불법을 전하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선운사는 실존하는 장소라는 사실보다는 마음속에 전설처럼 자리하고 있다. 가수 송창식의 노랫말처럼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그런 선운사에 가신 적 있으신지?
한 번 받은 감동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고 내면에서 에코처럼 계속 떠돌면서 확대 재생산을 한다. 살아오면서 경험으로 배운 것이다. 나 역시도 그 유명한 동백꽃을 보러 선운사에 갔다. 그러나 “동백꽃은 일러 피지 않고” 부도밭과 마애불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도솔산 정상에 올라 이마에 손 올리고 먼먼 곳을 바라보다가 돌아왔다. 그 후 내 맘 속에 자리한 선운사는 대웅전 앞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고, 추사의 해서필치가 생동하는 백파선사 석비가 서 있는 부도밭에 수선화 무리 지어 번지는 그런 곳이 되어버렸다. 절 뒤편 붉은 동백꽃이 눈물처럼 후두둑 져 내리는 전설이 여전히 맘속을 떠도는 것이었다. 이런 게 사랑이지 싶다.

 

안상학 시인의 시에는 그리움과 눈물과 사랑이 출렁인다. 무슨 기교나 치장 따위는 걷어낸 맨얼굴의 시를 대할 때면 한 두레박 퍼 올린 새벽 첫 우물물을 마시는 느낌이다. 몸 전체를 깨어나게 한다. 그의 삶, 바로 그것이 만든 것이지 싶다. 진정성의 힘이다. 시 「선운사」(시집 『안동소주』, 실천문학사, 2002년 초판3쇄)에는 그렇게 붉은 감동이 있다.
너무도 많은 시인들이 써서 식상해질 법도 한 ‘선운사’. 시인은 이런저런 치장 없이 그냥 그리워해버리고 만다. 세상에 솔직함보다 더 큰 사랑 고백이 어디 있겠는가. 5연 11행으로 구성된 시 「선운사」에는 붉은 그리움이 번진다.

 

       

 

세상 살면서 한 곳쯤은 그리워하면서 살아야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나 이미 사랑을 품은
그런 한 곳쯤은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지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잖아
       <안상학 詩 「선운사」, 1~2연>

 

사람 누구나 “세상 살면서 한 곳쯤은 그리워하면서” 살지 않을까. 물론 살아가면서 장소가 바뀌기도 하고, 한두 곳이 더 추가되기도 하겠지만, 그리운 곳을 품고 사는 것만은 다 닮아 보인다. 특히 마음 속 그리워하는 그곳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내 이미 사랑을 품은” 그런 곳이다. 그래도 괜찮지 않은가.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름답게 핀 꽃을 사랑한다. 꽃은 당연히 피어 있어야 하는 존재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듯싶다. 그러나 “다 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피었으니 지기도 하는 법. 가본 곳만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본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했지만, 만나지 못했지만 이미 맘속에 자리해버린 이 사랑을 어쩌랴.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니. 이 기막힌 구절 안에 시인의 사유 전체가 담겨 있다. 그리 말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시인의 시가 자리한 그리움과 외로움의 근원은 바로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닌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 비극적이거나 소외와 외면, 억압과 슬픔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빛보다 그늘, 각광을 받기보다는 묵묵한 존재 자체에 더 많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 세상 살면서 한 사람쯤은 그리워해야지
내 아직 한 번이라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았지만
그 한 사람쯤은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지
       <같은 詩, 3연>

 

1연의 “세상 살면서” 그리워하면서 살 “한 곳쯤”이 2연을 거치면서 3연에서 “세상 살면서” 그리워할 “한 사람쯤”으로 바뀐다. 1연의 ‘한 곳’에서 ‘한 사람’이 연상되었을 수도 있고, 처음부터 “그리워할” 한 곳과 한 사람을 동일시하고 시작했을 수도 있다.
1연의 ‘한 곳’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미 품은 사랑이고, 3연의 ‘한 사람’도 “아직 한 번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런 한 곳쯤은”, “그 한 사람쯤은”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지”라고 말한다. 아무렴 괜찮고말고. 나도 그러고 싶은 걸. 그게 가능한 이유는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2연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피기만 하고 지는 꽃이 없었다면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 “한 번이라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았”던 사람을 절절이 그리워할 수는 없다. 물론 가보거나 만나보거나 하고서도 얼마든지 그리워할 수 있지 왜 없겠는가. 그러나 4연을 읽는다면 왜 2연이 깊게 다가오는지, 왜 그렇게 써야 하는지를 이해할 것이다.

 

       

 

그렇다지, 그곳 그 땅은 지는 꽃만 품안에 안는다지
지는 꽃이 흙이 되어 땅빛이 붉다지
그 땅에서 피는 꽃 또한 붉다지

 

날이 갈수록 붉어지는 가슴이여
       <같은 詩, 4~5연>

 

4연은 전해들은 바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확신도 내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다지”라는 종결 어미는 직접 눈으로 확인한 바가 아니지만 동조와 동의, 수긍과 수용, 나아가 나도 그렇게 믿는다는 다짐과 묻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제 왜 “그곳 그 땅”이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그리워하면서 살” 곳인지, 왜 “한 번이라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았지만” 그리워하면서 살 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지는 꽃만 품안에” 안기 때문이며, “지는 꽃이 흙이 되어 땅빛이” 붉기 때문이다.
2연의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서 “지는 꽃만 품안에 안는” 상황으로 나아간다. “품안에 안는” 것이 피는 꽃이 아니라 지는 꽃이다. 그래서 그리워하는 마음, 곧 품안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한번이라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은” ”지는 꽃“을 안는다. 그리하여 그 땅 흙이, 지는 꽃을 안은 품이 붉어진다.

 

시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감동의 유지는 물론, 확대 재생산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곳 그 땅”은 “지는 꽃만 품에 안는” 곳이고, “지는 꽃이 흙이 되어 땅이 붉”은 곳이다. 더 나아가 품에 안고, 품에 안긴 지는 꽃으로 땅이 붉어지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 “그 땅에서 피는 꽃 또한” 붉은 곳이다.
수용과 변화와 생성의 과정에서 진정한 그리움을 완성시킨다. 그래서 그러한 곳, 그러한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는 시인은 “날이 갈수록 붉어지는 가슴”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음미하다보면 안상학 시인의 시 여러 편에서 보이는 상징과 승화의 요소가 이 시에서도 보인다. 단순히 실존하는 선운사에 대한 그리움에 국한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넘어선 상징, 곧 지는 꽃, 붉어지는 가슴, 그리움, 사랑, 품안, 땅빛 등이 다양한 상징적 요소를 지닌다. 님이나 자유, 혹은 구도, 구원과 같은 상징적 요소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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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사물의 본질을 획득하는 통찰력과 관물(官物)을 통한 내정(內情)의 시적 표현력 가운데 어디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할까? 우문일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거창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은 좋은 시는 두 측면을 두루 겸비해야 한다는 너무도 자명한 해답을 뛰어나게 획득해온 정일근 시인의 시를 애기하기 위해서이다.

그의 시는 쉽되 힘이 있고, 힘이 있되 리듬감이 있어 울림이 크다. 그만큼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때로는 남성적 웅혼한 톤을 구사하다가도 어느 순간 섬세한 내면을 건드리는 대목에 이르면 왜 그의 시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된다.

 

       

 

적요한 겨울 산길 따라 오체투지로 기어왔지만

산문(山門)이 그 길 뚝, 멈추게 한 뒤

내 신발 밑에 숨어 따라온 저잣거리의 노랫소리

소매 끝에 슬쩍 묻어온 달콤한 음식 냄새

휙휙, 단칼에 끊어버린다

 

바람도 신발을 벗어 들고 조심조심 지나는 그곳에

사람의 길도 말씀의 길도 다 끝난 그 마지막에

겨울산을 마주 보고 단단하게 앉은 절 집 한 채

달마의 짙은 눈썹처럼 꿈틀꿈틀 선정(禪定)에 들어 있다

 

        - 정일근 시, 내 마음의 동안거(冬安居)1, 2

 

내 마음의 동안거(冬安居)는 그의 평소 열망이 어디에 놓여있는가가 잘 드러난다. ‘통도사 도심(道尋)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시는 통도사 선방에 들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 들지 못하고 애달파하는 시인의 내면이 절실하게 와 닿는 시이다.

사실 한 번 닫힌 마음문은 단 1mm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석 자가 못되는 돌계단이지만 그 단호한 거부 앞에 시인은 몇 년째 전전긍긍하고 있다. 왜일까? 자신이 그 돌계단을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여전히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 공부 하러 왔습니다, 인사하고 선방(禪房) 계단 오르는데

네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돌계단이 금강(金剛)의 손바닥을 펴고

내 두 뺨을 철썩철썩 사정없이 두들겨 팬다

 

산토끼도 폴짝 뛰어오를 수 있는 불과 석 자 높이 계단 아래

속진(俗塵)은 입도 열지 못해 산짐승처럼 엎드려 크렁크렁 울고

그 위로 열락(悅樂)은 구름처럼 둥실둥실 떠간다

저 단순한 경계의 높이 밟고 오르지 못해

나는 벌써 여러 해 겨울을 전전긍긍하고 있다

 

         - 정일근 시, 내 마음의 동안거(冬安居)3, 4

 

시인은 적요한 겨울, 산길을 오체투지로 기어 산문에 이르렀다. 속진을 끊어버리고 그곳, 바람도 신을 벗고 조심조심 지나고, 사람의 길, 말씀의 길 다 끝난 그곳, 시인은 비로소 겨울 공부 하러 왔습니다하고 방문 목적을 드러낸다. 그러나 선방 계단을 오르지도 못하고 그만 거부당한다. 불과 석 자 높이, 산토끼도 뛰어오를 수 있는 높이를 시인은 오르지 못해 산짐승처럼 엎드려 크렁크렁 운다.

사실 그 계단을 오르기 위해 시인은 여러 해 겨울을 전전긍긍하며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수많은 고뇌와 열망으로 코피가 터지고, 살과 뼈가 사위어 이제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왔지만, 여전히 그 경계를 건너기가 어렵다. 도대체 어찌해야 선방에 드는 일이 가능할까? “기름진 오장육부 들어내고 살 오른 시()마저 던져버려야가능할까?

5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대라고 하는 도심(道尋)’이 등장한다. 그 계단을 오르면 도심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다. ‘도심(道尋)’은 시인과 연이 있는 동안거 든 스님인 듯이 여겨지며, 그러면서도 도를 찾는구도(求道)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에게 여전히 그 길은 멀어 보이고, 쉽게 올라 가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계단을 오르지도 못한 채 나는 검붉은 코피 펑펑 터지고

사위어가는 살과 뼈로 가벼워져 여기까지 기어왔지만

저 엄숙한 경계의 깊이 건너뛰기에

내 몸 여전히 무겁다, 너무 무겁다 한다

 

기름진 오장육부 들어내고 살 오른 시()마저 던져버려야

그대 곁에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것인지

 

꽝꽝 소리 내며 물 얼고 눈 내리는데, 한뎃솥 걸고 한뎃잠 자며

나는 비루먹은 망아지처럼 겨울 들판에 서 있다

 

                - 정일근 시, 내 마음의 동안거(冬安居)5, 6, 7

 

이 시는 공간상으로는 산문(山門) 안과 밖, 선방 안과 밖, 계단 위와 아래(벌판), 시간상으로는 현재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거 여러 해가 복합적으로 엮여 있다. 시인이 기어이 도달하고 싶어 하는 계단 위 선방 안은 끝내 시 속에 비쳐지지 않는다. 다만 그곳이 어떠한 곳인가는 몇몇 시구를 통하여 알 수는 있다. “네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라며 단호하게 거부하는 그곳은 속진(俗塵)을 용납하지 않는 곳, “열락은 구름처럼 둥실둥실 떠가는 곳, 그리고 무겁고 기름진 몸으로는 건널 수 없는 엄숙한 경계이다.

사실 계단 위 선방만이 그러하지 않고, “달마의 짙은 눈썹처럼 꿈틀꿈틀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한 채 절집 전부가 그러하지 않을까. 오체투지로 왔어도 저잣거리의 노랫소리/ 소매 끝에 슬쩍 묻어온 달콤한 음식냄새도 단칼에 끊어버리는 산문 역시 선방 계단을 오르는 것만큼의 엄숙한 경계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엄숙한 경계는 결코 산문 안쪽 선정에 든 절집 한 채의 선방 돌계단이 아니라 그것을 오를 자격이 있는가를 척도하는 내면에 있었다. 시인의 내면이 스스로 금강의 손바닥을 이루어 자신의 정신을 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자격 심사를 몇 해째 통과하지 못한 열망만이 고뇌에 차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라. 선방에 드는 것만이 선정에 들 수 있는 절대 방법이 아님을 마지막 연은 보여준다. 시인은 결국 한뎃솥 걸고 한뎃잠 자며겨울 들판에서 선정에 든다. 그 선정은 선방에 들기 위한 각고의 노력, 기름진 오장육부를 들어내고 살 오른 시마저 던져버리려는 용맹정진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시인의 동안거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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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행위가 마치 수행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마음의 때를 벗기는 일이 구도의 첫걸음이라고 한다면 생활 속에서 종종 빠져드는 일삼매 역시 수행의 한 방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적 있지 않은가. 육체적으로는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온몸 기울여 매달리다보면 마음 깨끗해지는 일. 어쩌면 손빨래도 그 가운데 하나이지 싶다. 세탁기가 다 빨아주는 요즘이야 제대로 못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날씨 좋은 날, 큰 대야에 묵은 옷가지들을 넣고 주물러 빨다보면 옷의 때를 없애는 것만이 아니라 머릿속, 마음 속 때마저 지우는 느낌이 들곤 한다.

함민복 시인은 1995년 여름 한 철을 고창 선운사 암자에 머문 적이 있다. 이 시는 그 무렵 썼지 싶다. 시 「東雲庵·1」(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비, 1996)은 철저하게 관자(觀者)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시인은 이만큼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지만 그 대상이 곧 시인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혹은 독자 자신의 행위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바위 그릇에 물 받아 놓고
스님 옷을 공양주 보살이 빤다

 

마음에 묻은 때야
염불과 經으로 씻지만
옷에 묻은 때는
물[水]보살의 힘을 비는 수밖에 없나보다
     <함민복 詩 「東雲庵·1」, 1·2연>

 

그릇처럼 움푹 패인 바위에 물을 받아놓고 빨래하는 공양주 보살을 시인은 무던히 바라보고 있다. 이 단순한 행위에서 수행의 본질, 삶의 근원, 인간 보편성을 직관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시인의 눈이고 보면 놀랍다.
빨래하는 장면을 보면서 시인은 마음에 묻은 때는 염불과 경(經)을 통해 씻어내야 하지만, 옷에 묻은 때는 자연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단순 명쾌한 사실을 느낀다.
세상 만물에는 모두 불성(佛性)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일어나는 일들 하나하나가 불성의 자비 베풂이 아니겠는가.

 

       

 

목탁 소리
빨랫방망이 소리

 

저렇게 때려대서야
겁나,
도망가지 않을 때가 어디 있겠나
    <같은 詩, 3·4연>

 

목탁소리는 마음의 때를 씻는 소리, 빨랫방망이 소리는 옷의 때를 씻어내는 소리로 구분지을 수도 있지만, 이제 구태여 구분지을 필요는 없다. 둘 다 때를 씻어내는 마음속에서 ‘염불’이 되고 ‘경’이 된다. 내가 너가 되고, 너가 내가 되는 피아(彼我)의 구분이 없는, 마침내 시인의 심중으로 분리되었던 ‘소리’들이 하나로 들어선다.
4연은 위트감각이 돋보인다. 함민복은 뛰어난 직관력뿐만 아니라 이를 반짝이는 표현으로 바꿔놓는 탁월한 언어감각도 지닌 시인이다. 위트 있는 표현은 시적 재미를 부여하는데, 시인의 시들에서 금알갱이처럼 반짝이는 그러한 시구들을 종종 만난다.
4연의 너스레는 얼핏 가벼워 보이지만 앞에서 이루어진 통찰의 결과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목에 힘주지 않고 일부러 유머러스하게 표현해낸 점이 시인의 높은 공력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더욱 빛을 발한다.

 

       

 

뒷산 푸른 나무, 붉은 흙탕물 나도록 몸 씻는
장마철
낙뢰 소리 서늘하다
    <같은 詩, 5연>

 

이제 시간이 바뀌었다. 장마철 햇빛 반짝 나던 어느 하루, 공양주 보살이 빨래하던 장면에서 출발하여 장마철 일상으로 이동하였다. 시인의 시적 감수성은 “뒷산 푸른 나무”마저 몸 씻는다는 것에 가닿는다. 푸른 나무는 “붉은 흙탕물 나도록” 몸의 때를 씻고 씻는다.

장마철 붉은 흙탕물이야 계곡의 흙이 빗물에 씻겨 내리면서 생겨난 현상일 테지만, 시인은 뒷산에 가득 찬 푸른 나무들이 몸을 씻기 때문으로 읽은 것이다. 푸름과 붉음의 극적 대비, 그런 장마철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뢰 소리가 깨달음처럼 시인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시를 읽고 난 후의 내 가슴도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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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현대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찰 가운데 하나로 운주사를 꼽을 수 있겠다. 감동적인 창건설화와 깊은 불교사상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찰이 어디 있을까마는 운주사 산과 계곡의 천불천탑 조성설화는 어느 것보다도 드라마틱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민중적 백그라운드는 새 세상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결부되면서 어느 시대에나 연결되는 묘한 상징성을 지닌다.

역사 이래로 억압과 소외와 수탈로부터 자유로운 민중이 었었던가. 그 민중은 시인 누구에게나 가슴 저 밑바닥에 자리한 오랜 연인이자 잊지 못할 첫사랑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대흠 시인의 시「천년 동안의 사랑」(시집 『귀가 서럽다』, 창비, 2010년)을 그런 도식적 해석과 상징성 부여로만 이끌어 가고 싶지는 않다. 이 시는 그런저런 생각 다 버리고 그냥 소리 내어 읽어 보면 가슴 저린 사랑의 연시, 이런 것이 아름다운 한 편의 서정시라는 사실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긴 시편을 끌고가는 잔잔한 어투에서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 다칠까봐 어루만져 주는 품새, 힘들게 산을 오르는 하이힐 연인의 손을 잡아 주기도 하고, 자신의 보폭을 일부러 줄이는 마음도 엿볼 수 있다.  그런 시인의 마음이 왜 내 마음 같아지는가. 나만 그러할까. 마음 절절한 사랑 한 번 가져보지 못한 이 누가 있겠는가. 사랑해본 사람치고 그 사랑이 ‘천년 동안의 사랑’이 아니었던 이 누가 있겠는가.

이대흠의 「천년 동안의 사랑」은 1연 43행으로 이루어진 시이다. 비교적 긴 시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함 없이, 오히려 오래고 오랜 얘기에 깊이 빠져들었다가 문득 깨어나듯 가슴 아래께에 찡한 통증이 오는 시이다.

    

처음으로 와보네, 라는 그녀와
운주사에 갔네 빨리 온 찬바람에 말라 쪼그라진 나뭇잎들
잎들은 저마다 곱게 물들길 원했을 것이나
계절은 참혹한 운명을 선사하였네
그래도 끝끝내 제 상처를 다스려 가을을 물들인
감잎을 보며 그 감잎처럼 저물어가는 그녀에게
사랑을 말하진 못했네 노을 같은 측은함으로 나
그녀의 손을 잡았을 뿐 언제 지은 절인지
누가 지은 절인지 알 수가 없어
더 믿음이 가는 돌부처들 지나 와불 뵈러 가는 길
하필 머슴부처가 뭐냐고 부처도 주인 있고 머슴 있냐고
우리는 동시에 이맛살을 찌푸렸네
       <이대흠 詩 「천년 동안의 사랑」, 1~12행>

“처음으로 와보네, 라는 그녀와” 시인은 운주사엘 간다. 32행의 ‘하이힐’로 유추해 보건데 아마도 시인이 먼저 운주사에 가보자고 제안했을 것이다. 또한 운주사행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분명해 보인다.

왜 그곳엘 가자고 했을까? 직접적인 이유를 일러주기보다는 주변 상황으로 조금씩 조금씩 드러내준다. 그녀의 현재는 “빨리 온 찬바람”의 계절, 운주사 나무 모습으로 대신 설명된다. 그녀와 시인의 사랑은 “곱게 물들길” 원한 나뭇잎과 같았으나 “참혹한 운명을 선사하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제 상처를 다스려 가을을 물들인/ 감잎”처럼 참혹한 운명의 상처를 다스려 자신을 물들인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시인은 차마 “사랑을 말하진” 못한다. 대신 “노을 같은 측은함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을 뿐” 무엇도 알려줄 수 없어 다만 “와불 뵈러” 가자 한다.

왜 “노을 같은 측은함”일까? 무슨 사연으로 인해 헤어지게 된 두 사람의 이별이 마지막 스러지는 빛의 잔상, 잔영인 노을만큼 마음 슬픈 색깔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는 40행에서 비로소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가는 길에서 “머슴부처”를 만나고, “하필 머슴부처가 뭐냐고 부처도 주인 있고 머슴 있냐고” 동시에 말하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둘의 마음이 일치한다. 와불 뵈러 가는 길, 누구도 먼저 속의 말을 하지 못하고 이러저런 다른 얘기들을 했을 테고, 마침 “머슴부처”를 만나자 그런 말을 동시에 했을 것이다. “머슴부처”는 ‘머슴인 부처’가 아니라 이 땅 ‘머슴들의 모습을 한 부처’이리라. 가장 헐벗고 가장 낮고 괴로운 머슴들을 구재하기 위해 오신 부처가 아니실까. 그걸 모를 리 없는 두 사람이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의도로 표면상의 이름이 주는 못마땅함을, 그것도 동시에 거론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두 사람은 그렇게 와불에 이른다.

   

나뭇잎 몇 덮고 누운 와불은 말이 없고
천년을 합궁하고 있는 와불을 보여주려
그녀의 손을 잡고 높은 곳으로 끌어올릴 때
나는 잠시 와불이 되어 그녀를 이불 속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네
아주 잠깐의 천년 그녀는
부론 폐사지에서 보았다는 느티나무 이야기를 하였네
처음엔 너럭바위였다고 그러나 손톱으로 두드려보니
텅 터엉 목어가 되어 울더라고
천년 세월이란 나무가 돌이 되는 시간이라고 하였네
오래된 나무의 뿌리는 누군가의 속울음으로 다 받아들여
그렇게 검어진 것이라고 쓴 적이 있네
그 뿌리 천년의 세월을 다 받아들이면
돌이 되겠지 저렇게 캄캄히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잎 내지 못하는 돌이 되겠지
나는 천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네
나무의 가지들처럼 엉킨 기억의 끝 어디쯤에
천년 전 기억이 맺혀 있을 것인데
가슴이 조금 뛰었을 뿐 그녀 얼굴이 아른했을 뿐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네
       <같은 詩, 13~31행>

와불은 “빨리 온 찬바람에” 떨어진 “나뭇잎 몇 덮고” 말없이 누워있다. 시인은 “천년을 합궁하고 있는 와불을 보여주려/ 그녀의 손을 잡고 높은 곳으로 끌어” 올렸고, 이 행위는 그녀에게 와불을 보여주려는 행위인 동시에 잠시 와불이 된 시인의 이불 속으로 그녀를 끌어들였던 것이기도 하다.
14~15행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된다. 13행으로 미뤄보건데 두 사람은 이미 “나뭇잎 몇 덮고 누운” 와불을 친견하였다. 그런 후 시인은 누운 와불 모습이 전체적으로 다 보이는 “높은 곳으로” “천년을 합궁하고 있는 와불을 보여주려”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올리는 것이다. 반면 14~15행은 13행에서 친견한 와불을 왜 보여주려 했는지를 언급하고 바로 그 와불이 누워있는 “높은 곳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올린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시의 전개 순서상 앞의 것이 더 가까워 보이지만 말의 뉘앙스와 시적 느낌은 뒤의 것이 더 잘 어울린다. 물론 둘 모두로 이해해도 무방하리라.
그 순간은 “아주 잠깐의 천년”이다. 천년은 너무도 오랜 시간이어서 역설적으로 표현한 “아주 잠깐의 천년”이라는 말에 목이 멘다. 그런 마음을 알았던 듯 “그녀는/ 부론 폐사지에서 보았다는 느티나무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는 너럭바위인 줄 알았는데, “손톱으로 두드려보니/ 텅 터엉 목어가 되어” 우는 나무였다는. 그리곤 “천년 세월이란 나무가 돌이 되는 시간이라고” 더하여 말한다. 둘 사이의 사랑하고 헤어진 세월이 그러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무가 돌이 되는 시간”은 “누군가의 속울음을 다 받아들여/ 그렇게 검어진” “오래된 나무의 뿌리”와 상통한다. 그녀는 “나무가 돌이 되는” 천년 세월을 얘기했고, 시인은 그러한 “누군가의 속울음을 다 받아들여/ 그렇게 검어”지고 “천년의 세월 다 받아”들여 돌이 된 시인 자신의 천년 세월을 얘기한다.
그러나 그 “천년 세월”은 결코 희망적이지는 않다. “저렇게 캄캄히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잎 나지 못하는 돌이” 될 것이다. 심지어 “천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지만 “가슴이 조금 뛰었을 뿐 그녀 얼굴이 아른했을 뿐/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잔인하리만치 곧이곧대로 얘기한다. 천년만년이 지나도 잊혀질 것 같지 않던 당시 기억이 잠시 “아른했을 뿐/ 선명히 떠오르지” 않는 것이 세월의 냉정한 힘이다.

    

가파른 길을 걸으며 하이힐을 벗어버릴까 나를 보던 그녀
나는 그녀가 맨발로 돌아가는 게 두려워 그녀를 부축하였네
나 그녀와 맨발의 세월로 돌아가게 되었다면
어쩌면 운주, 그 배에서 내리지 못했을 것이네
나는 절인 배추처럼 젖은 목소리로 나이 듦과 건강과
가족의 안부 묻는 말 따위나 하였네
처음이 아닌 것 같네, 라는 그녀와 운주사를 빠져나왔네
천 년 전 우리가 나란히 누워 사람들의 시름에 캄캄해지면서
노을 같은 분홍울음을 쏟아냈던 기억
천 년 동안 합궁하며 세상의 쓸쓸함을 다 어루만지는
바람을 자식으로 두었다는 그 사실도 잊고
운주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네
       <같은 詩, 32~43행>

그녀는 “가파른 길을 걸으며 하이힐을 벗어버릴까” 하고 시인에게 눈빛으로 동의를 구한다. 하이힐은 단지 가파른 길을 걷는데 불편한 존재만이 아니라 세상의 길, 그녀가 가고 있는 길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길의 힘들고 어려운 그녀의 운명을 벗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맨발의 세월”이란 천년 동안의 일이고, 천년 동안의 세월이다. 그리로 돌아가는 건 원래대로의 회귀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녀가 맨발로 돌아가는 게 두려워”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를 부축”해줄 뿐이다. 힘들고 어려운 길에서의 부축은 잠시의 위로와 힘을 더해주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해결이나 벗어남은 아니다. 시인은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녀와 맨발의 세월로 돌아가게 되었다면/ 어쩌면 운주, 그 배에서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시인은 시시하고 상투적인 “나이 듦과 건강과/ 가족의 안부를 묻는  따위”로 화제를 돌린다.

   

천 년 전으로의 원대복귀 문턱에서 시인은 현재의 길로 내려선다. 그래, “천 년 전 우리가 나란히 누워 사람들의 시름에 캄캄해지면서/ 노을 같은 분홍울음을 쏟아냈던 기억/ 천년 동안 합궁하며 세상의 쓸쓸함을 다 어루만지는/ 바람을 자식으로 두었다는 그 사실”조차도 잊는다.
그러나 그런다고 천년의 사랑이 다 잊혀질까. 천년의 사랑이 파묻혀버릴까. 설사 “맨발의 세월로 돌아가게 되었”더라도 천 년 전의 사랑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천 년 전 “그녀 얼굴이 아른했”을지라도, “노을 같은 분홍울음을 쏟아냈던 기억” “바람을 자식으로 두었다는 그 사실”조차 까마득히 다 잊어버려도 천 년 전의 사랑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운주를 빠져나온다. “처음이 아닌 것 같네”라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는 천년 세월이 다 들어 있다. 그게 단지 기시감일 뿐일까. 슬프고 아린 천년 사랑이다. “분홍울음을 쏟아냈던 기억”마저 아른해지고 잊혀지는 현실이어서 더욱 저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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