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 선생의 <나 혼자만의 시 쓰기 비법>(푸르메, 2014)에서 읽은 내용이다. 


문학청년이던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서정주가 어느 봄날, 한 술집에서 만났다. 그 무렵 시도 쓰고 소설도 썼던 김동리가 "내가 시 한 편 썼는데 한 번 읊어볼까?" 하고 말했다. 얼근하게 취한 서정주가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거렸고 김동리가 읊었다.

"벙어리도 꼬집히면 우는 것을,"

그 순간 서정주가 무릎을 탁 치면서 "야아, 명작이다,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울다니!" 하고 말했다. 

(311p)


김동리 선생이 읊은 것만 놓고 보면 여운이 부족하고, 서정주 선생의 오독만 따로 떼어서 보면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보면 시적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즐거운 오독(誤讀)이다. 


삶에도 이런 오독이 있다. 

간혹 스마트폰도 오독한다. 내 손가락이 터치한 것과는 다른 내용을 저 맘대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상당히 시적일 때가 간혹 있다. 기특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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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건축전문지 「플러스」가 건축가 22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의 ‘가장 잘 지은 고건축’ 항목에 부석사가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였다.
부석사는 별다른 언급 없이도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 면면을 잘 알고 있을 만큼 너무도 유명한 사찰이다. 부석사를 말하고자 한다면 한이 없을 정도이다. 최고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불교철학을 바탕으로 한 가람배치, 태백과 소백 양백이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하여 그 능선과 봉우리를 앞마당처럼 펼쳐놓은 장쾌한 풍광하며, 답사지로서도 최상으로 분류되는 사찰 아니던가. 시인은 그런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있다. 5연 17행으로 이루어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는 부석사의 세부적인 묘사라든가 느낌을 말하지 않는다. 시인 특유의 남도 서정성을 남성적 톤으로 유장한 가락으로 풀어낸다.


풍광 전체가 끓어 넘치고 자물리고 스러지고 하면서 마침내 “한 우주율로 쓰러”지는 장엄한 광경을 연출해낸다. 부석사에 대해, 혹은 부석사에 가서 쓴 많은 시 중에서 이 시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르러 마침내 뒤돌아서서 무량 펼쳐지는 장쾌한 능선을 마주하였을 때의 느낌과 가장 어울리는 톤으로 시를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맞이하는 풍광은 남도의 서정성을 가득 담은 웅혼한 남성적 가락이다. 1연과 2연은 이러한 장엄한 광경을 시공을 넘나드는 장대함으로 표현해 놓았다. 일상에 지쳐 자잘해지고 자잘해졌던 마음을 일순간에 툭 터지게 한다. 송수권 시인의 시적 특성이 거침없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시인의 초기 시에서 남성적 서정성과 애조를 마주하고선 나는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였다. 소리 내서 읽으면 읽을수록 입안에 감겨오는 우주 만물을 주물럭거려 펼쳐놓는 가락에 전율이 일었다.

 

         

 

천고에 몇 번쯤은 학이 비껴 날았을 듯한
저 능선들,
날아가다 지쳐 스러졌을 그 학 무덤들 같은 능선들,
오늘은 시끄럽게 시끄럽게 그 능선들의 떼 울음이
창해를 끓어 넘친다.

 

만상이 잠드는 황혼의 고요 속에
어디로 가는지 저희들끼리 시끄럽게 난다.
- 송수권 詩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1~2연

 

천고와 학과 능선과 학 무덤과 떼울음으로 표현해내는 풍경은 너무도 크고 너무도 오래어 현세의 풍광이 아닌 것 같다. 황혼의 능선이 저희들끼리 서로 끌며 “어디로 가는지” 아스라이 저문다.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의 상주처인 무량수전에서 바라보는 저 너머에 또 하나의 극락정토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전설 같기도 하고, 한 폭의 관념 산수 같기도 한 이 장면은 부석사가 단지 산비탈에 계단을 이루어 쌓아올린 사찰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창대한 공간에 시공을 넘어서 피어나는 연화정토의 정수이자 화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엄한 우주적 공간을 창출해내야 하는데, 1~2연은 기가 막히게 시간과 공간을 연출해낸 것이다.

 

浮石寺의 무량수전 한 채가 연화장을 이룬
그 능선들의 노을빛을 되받아 연꽃처럼 활짝 벌고
서해 큰 파도를 일으키고 달려온 善妙 낭자의 발부리도
마지막 그 연꽃 속에 잦아든다.
- 같은 詩, 3연

 

그렇다. “학 무덤들 같은 능선들”은 이미 “연화장을” 이루었고, “연화장을 이룬/ 그 능선들”이 보내는 노을빛을 되받아 “부석사의 무량수전 한 채가” “연꽃처럼 활짝 벌”어져 연화정토를 이룬다. 귀국하는 의상대사를 뒤따라 “서해 큰 파도를 일으키고 달려온 선묘 낭자의 발부리도/ 마지막 그 연꽃 속에 잦아든다”. 3연의 “서해 큰 파도”는 1연의 “창해”와 맞물리고, “창해”는 “어디로 가는지 저희들끼리 시끄”러운, “학 무덤들 같은 능선들”과 일체가 된다. 그리하여 선묘낭자는 “연화장을 이룬/ 그 능선들” 위로 파도를 일으키며 달려와 연꽃처럼 번 무량수전 속에 잦아드는 것이다.
결국 풍광 모두가 무량수전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집결은 억지로 빨아들이지도, 그렇다고 모이도록 강제하지도 않는다. 거대한 우주가 율을 이룰 뿐이다.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서서히 서로가 서로에게 겹쳐지고 스며들면서 품어 안는 4연과 5연은 부석사 무량 광대한 세계를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오래 감동을 주는 명장면이다.

 

장엄하다
어둠 속에 한 능선이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또 한 능선이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하는 것

 

마침내 태백과 소백, 兩白이
이곳에서 만나 한 우주율로 쓰러진다.
- 같은 詩, 4~5연

 

      

 

다른 것들을 끌어들여 변형시키거나 나의 것으로 변모시켜 놓는 것이 아니라 서로 포개지고 스미면서 하나가 되는 이 장엄한 장면, 송수권 시인이 추구하는 시 세계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송수권 시인은 시 「대숲 바람소리」처럼 세상 만물이 서로에게 스미고 번져가면서 마침내 “한 우주율로 스러지”는 세계를 지향해 왔다. 이러한 세계는 부석사와 절묘하게 부합한다. 시인은 이 시에서 부석사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해놓지 않았지만 부석사의 가람배치와 건축 사상은 거대한 우주율, 불국토의 구현이 아니겠는가.


부석사 가람은 모두 약간씩 비껴 앉으면서 서로를 맞대응하지 않는다. 부딪혀서 발생하는 대립을 가급적 자재하고 양보하면서 서로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살려주는 구도이다. 아홉 단을 상승하면서 이뤄내는, 극락세계에 이르는 건축 철학의 기조는 상생과 조화이다. 이러한 특성이 21세기에 남은 가장 위대한 고건축이 되게 한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는 순간 이미 부석사는 광대한 자연을 껴안았다가 풀어놓고, 다시 껴안았다가 풀어놓으면서 극락세계로 오르는 장엄한 세상을 펼친다. 그 정상이 9품 만다라 상품상생(上品上生)의 맨 위에 위치한 무량수전이다. 안양루(安養樓) 누각 밑을 지나 마지막 계단에 오르면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의 상주처인 무량수전 앞마당에 올라선다. 1043년, 고려 정종 9년, 원통국사가 중창할 때 지은 무량수전은 아주 간결하면서도 고요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처마 끝을 살짝 들어 올린 팔작지붕은 엄정함 속의 경쾌함, 정(精) 속에서의 동(動), 긴장 속에 감동을 응축시켜 놓았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의 당당함은 그 기둥에 오래 기대서있고 싶게 한다. 그리하여 “한 능선이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또 한 능선이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하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그 자체로 장엄함에 빠져드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단지 시인이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 바라보는 풍광은 저만큼 떨어져 펼쳐진 거리감 있는 세계가 아니라 저 장엄한 풍광이 곧 무량수전이요, 무량수전이 곧 광대한 우주의 연화장을 이룬 연화정토인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이 기대어 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이 단지 부석사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만도 아니요, 또한 특정 공간으로서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만도 아닌, 불심에 기대어 선 모든 기둥이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부석사의 위치도 절묘하다. 태백과 소백으로 갈라지는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위치한 동시에 “태백과 소백, 兩白이/ 이곳에서 만나 한 우주율로 쓰러”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그러나 태백과 소백산맥 전체를 앞마당처럼 펼쳐놓는 그 지점에 “부석사의 무량수전 한 채”가 “연꽃처럼 활짝” 벌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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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호 글, 이상희 사진의 <섬에서 섬으로 바다백리길을 걷다>를 읽다.

이상희 작가의 사진도 좋지만, 전윤호 시인의 글은 근래 읽은 여행산문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섬에도 흙과 돌의 길이 있다. 풀과 나무가 있다. 삶과 역사가 있다. 기다림과 오지 않음이 있다. 여기에 물의 길이 하나 더 있을 뿐이다. 못 걸을 이유가 없다. 천천히 글을 따라가다 보면 함께 가자고 보채는 것도 아닌데, 저자를 앞질러 가서는 안 될 것 같다. 저자가 본 것들을 놓치고 가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이다. 수목과 화초, 바람과 소리와 사람의 냄새를 살펴가며 걷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들르는 섬마다 일박 하는 심정으로 하루에 섬 하나씩만 읽었다. 여섯 개 섬을 다 읽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바닷길을 걷는다는 건 섬과 섬을 연결시키는 의미도 있다. 통영 앞바다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걸어야 할 바닷길, 섬들은 많다. 우리나라에는 약 3,000여 개의 유무인도가 있다고 하지 않은가.

정작 내가 걷고 싶은 것은 섬이 되어버린 내면이다. 남들의 눈에는 고립과 차단으로 외로워 보일 섬이 의외로 볼 만한 경치도 있고, 맑고 시원한 바람도 분다는 걸 확인하고 싶다. 물론 그걸 확인하기 위하여 굳이 섬을 걸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섬 아니더라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

다만 이 책을 읽다보면 섬을 걷는 방법이 섬을 발견하는 가장 빠른 길임을 확인하게 된다. 당연하다. 내면을 걸어야 내면을 잘 발견한다. 그래서 이번 여름에는 휴가기간 동안 '바다백리길'을 한 번 걸어보자고 나를 유혹해본다.


이 책을 출판한 '남해의봄날'은 통영에 있다. 지방에서 출판활동을 하는 출판사들은 많이 있지만, 남해의봄날만큼 성격을 분명히 하고, 그것에 맞춰 출판하는 곳은 드물다. 로컬북스 시리즈 설명에 감동하였다.

"이웃한 도시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다른 자연과 문화, 아름다움을 품고 있습니다. 독특한 개성을 간직한 크고 작은 도시의 매력, 그리고 지역에 애정을 갖고 뿌리내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해의봄날이 하나씩 찾아내어 함께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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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기 시인의 시집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니었을 때>를 읽는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양해기 시인은 남들이 눈여겨 보지 않는 것들을 본다.

그냥 보지 않고 눈여겨 본다. 

그러고는 눈여겨 보지 않던 것들을 화들짝 눈여겨 다시 보게 하는 것들로 바꿔 놓는다.

심지어 그림자와 사물의 뒷편까지도 본다. 

개의 눈, 죽은 참새에게서 전생이 사람이었던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가 보는 사물과 현상은 하나하나가 명확하게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한 몸이 되었거나 변형되었거나 몸 바꿔 앉은 것들이다.


시집 곳곳에서 죽음이 수시로 출몰한다.

생명은 이미 죽음을 품고 있고, 죽음은 저 홀로 따로 있지 않다.

양해기 시에서 생명과 죽음은 함께이거나 하나이다.

그는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서 수많은 과거와 전생과 다른 생명을 본다.

전혀 이질적인 것에서 본질을 통찰해낸다. 

그래서 시에 담긴 대상이 더 안타깝고, 더 슬프다.

그러한 것들을 보는 시인의 눈은 연민과 안타까움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시로 나온 대상은 담담하게 묘사되고 언급된다. 

그게 더 가슴을 쥐고 흔든다.



사전 동의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양해를 구하며, 짧은 시 4편을 옮겨 놓는다.


[인형 세우기]



영은이가 인형을 가지고 논다


헝겊조각을 펴서

인형을 눕힌다


서 있을 때

눈뜨고

눕히면 눈을 감는다


일찍 돌아가신 엄마 대신

영은이는

오늘도 인형과 함께 놀고 있다


불안한 영은이는

자주 인형을 일으켜 세워본다


인형이 

오래 눈감고 있지 못하게 한다


(54p)



[아기 관]



성남 화장터

병원 구급차가 도착했다


작고 조그만 관이 옮겨지고


화장터 뒤편에서

유난히 하얀

연기가 뒤섞여 나온다


연기는

이제까지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관 속 아이의 얼굴을

허공에 그려두고 있었다 


(53p)



[낡은 운동화]



신발 한 짝이

흙바닭에 버려져 있다


뒤집히면서도

신발은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21p)



[벌레]

 


어디론가 바삐바삐 가고 있는

저 작은 벌레도


오늘 나처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모양이구나 


(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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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서거 5주년이다. 서거 이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책들이 지속적으로 출간되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이처럼 많은 관련 책들이 나온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이 유일할 것이다.


왜 그럴까? 노무현 대통령의 진심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가 어떠한 철학과 원칙을 가졌으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어떠한 위험과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는지, 그리하여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를 가까이에서 모셨거나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부채의식이었을 것이다. 사명이었을 것이다.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저술한 책들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리고 우리가 보고 들었던 사건과 상황의 갈피에 담겨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진심을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감이 끝내 이 책을 쓰게 했을 것입니다." (문재인, <기록> 13쪽)


<기록>은 "노무현 대통령이 마주했던 시간과 상황을 가장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알려진 윤태영 비서관의 책이다. 


"주요 회의나 개인 일정에 배석하여 기록하는 것이 나의 주 업무가 되었다. 대통령은 나에게 특권을 주었다. '체력과 집중력이 허락한다면, 내가 참석하는 모든 회의나 행사에 자유롭게 배석하도록 하게.' (...) 그렇게 시작된 기록은 퇴임 후로도 이어졌고, 서거하시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남았다. 수백 권에 달하는 휴대용 포켓 수첩, 1백 권에 달하는 업무 수첩, 1,400여 개의 한글파일이 생산되었다." (17~18쪽)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언론의 악의적 보도로 인하여 부정적 이미지도 넓고 깊게 퍼졌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진심을 알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사후 출간된 많은 책들로 인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진심을 알게 되는 사람들이 하나둘 더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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