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가 지나기도 전에 전설이 되어버린 곳이나 사람이 있다. 나는 가급적 유명한 장소나 사람을 피해왔는데, 선운사만은 그 전설에 한쪽 발을 담근 채 오래 귀 기울여 듣고 싶었다. 선운사는 이래저래 문학 작품에 직접 묘사되거나 인용되면서 여전히 살아있다. 현존하는 사찰이니 향 피우고 꽃 올리며 불법을 전하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선운사는 실존하는 장소라는 사실보다는 마음속에 전설처럼 자리하고 있다. 가수 송창식의 노랫말처럼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그런 선운사에 가신 적 있으신지?
한 번 받은 감동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고 내면에서 에코처럼 계속 떠돌면서 확대 재생산을 한다. 살아오면서 경험으로 배운 것이다. 나 역시도 그 유명한 동백꽃을 보러 선운사에 갔다. 그러나 “동백꽃은 일러 피지 않고” 부도밭과 마애불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도솔산 정상에 올라 이마에 손 올리고 먼먼 곳을 바라보다가 돌아왔다. 그 후 내 맘 속에 자리한 선운사는 대웅전 앞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고, 추사의 해서필치가 생동하는 백파선사 석비가 서 있는 부도밭에 수선화 무리 지어 번지는 그런 곳이 되어버렸다. 절 뒤편 붉은 동백꽃이 눈물처럼 후두둑 져 내리는 전설이 여전히 맘속을 떠도는 것이었다. 이런 게 사랑이지 싶다.

 

안상학 시인의 시에는 그리움과 눈물과 사랑이 출렁인다. 무슨 기교나 치장 따위는 걷어낸 맨얼굴의 시를 대할 때면 한 두레박 퍼 올린 새벽 첫 우물물을 마시는 느낌이다. 몸 전체를 깨어나게 한다. 그의 삶, 바로 그것이 만든 것이지 싶다. 진정성의 힘이다. 시 「선운사」(시집 『안동소주』, 실천문학사, 2002년 초판3쇄)에는 그렇게 붉은 감동이 있다.
너무도 많은 시인들이 써서 식상해질 법도 한 ‘선운사’. 시인은 이런저런 치장 없이 그냥 그리워해버리고 만다. 세상에 솔직함보다 더 큰 사랑 고백이 어디 있겠는가. 5연 11행으로 구성된 시 「선운사」에는 붉은 그리움이 번진다.

 

       

 

세상 살면서 한 곳쯤은 그리워하면서 살아야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나 이미 사랑을 품은
그런 한 곳쯤은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지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잖아
       <안상학 詩 「선운사」, 1~2연>

 

사람 누구나 “세상 살면서 한 곳쯤은 그리워하면서” 살지 않을까. 물론 살아가면서 장소가 바뀌기도 하고, 한두 곳이 더 추가되기도 하겠지만, 그리운 곳을 품고 사는 것만은 다 닮아 보인다. 특히 마음 속 그리워하는 그곳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내 이미 사랑을 품은” 그런 곳이다. 그래도 괜찮지 않은가.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름답게 핀 꽃을 사랑한다. 꽃은 당연히 피어 있어야 하는 존재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듯싶다. 그러나 “다 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피었으니 지기도 하는 법. 가본 곳만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본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했지만, 만나지 못했지만 이미 맘속에 자리해버린 이 사랑을 어쩌랴.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니. 이 기막힌 구절 안에 시인의 사유 전체가 담겨 있다. 그리 말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시인의 시가 자리한 그리움과 외로움의 근원은 바로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닌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 비극적이거나 소외와 외면, 억압과 슬픔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빛보다 그늘, 각광을 받기보다는 묵묵한 존재 자체에 더 많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 세상 살면서 한 사람쯤은 그리워해야지
내 아직 한 번이라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았지만
그 한 사람쯤은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지
       <같은 詩, 3연>

 

1연의 “세상 살면서” 그리워하면서 살 “한 곳쯤”이 2연을 거치면서 3연에서 “세상 살면서” 그리워할 “한 사람쯤”으로 바뀐다. 1연의 ‘한 곳’에서 ‘한 사람’이 연상되었을 수도 있고, 처음부터 “그리워할” 한 곳과 한 사람을 동일시하고 시작했을 수도 있다.
1연의 ‘한 곳’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미 품은 사랑이고, 3연의 ‘한 사람’도 “아직 한 번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런 한 곳쯤은”, “그 한 사람쯤은”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지”라고 말한다. 아무렴 괜찮고말고. 나도 그러고 싶은 걸. 그게 가능한 이유는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2연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피기만 하고 지는 꽃이 없었다면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 “한 번이라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았”던 사람을 절절이 그리워할 수는 없다. 물론 가보거나 만나보거나 하고서도 얼마든지 그리워할 수 있지 왜 없겠는가. 그러나 4연을 읽는다면 왜 2연이 깊게 다가오는지, 왜 그렇게 써야 하는지를 이해할 것이다.

 

       

 

그렇다지, 그곳 그 땅은 지는 꽃만 품안에 안는다지
지는 꽃이 흙이 되어 땅빛이 붉다지
그 땅에서 피는 꽃 또한 붉다지

 

날이 갈수록 붉어지는 가슴이여
       <같은 詩, 4~5연>

 

4연은 전해들은 바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확신도 내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다지”라는 종결 어미는 직접 눈으로 확인한 바가 아니지만 동조와 동의, 수긍과 수용, 나아가 나도 그렇게 믿는다는 다짐과 묻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제 왜 “그곳 그 땅”이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그리워하면서 살” 곳인지, 왜 “한 번이라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았지만” 그리워하면서 살 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지는 꽃만 품안에” 안기 때문이며, “지는 꽃이 흙이 되어 땅빛이” 붉기 때문이다.
2연의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서 “지는 꽃만 품안에 안는” 상황으로 나아간다. “품안에 안는” 것이 피는 꽃이 아니라 지는 꽃이다. 그래서 그리워하는 마음, 곧 품안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한번이라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은” ”지는 꽃“을 안는다. 그리하여 그 땅 흙이, 지는 꽃을 안은 품이 붉어진다.

 

시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감동의 유지는 물론, 확대 재생산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곳 그 땅”은 “지는 꽃만 품에 안는” 곳이고, “지는 꽃이 흙이 되어 땅이 붉”은 곳이다. 더 나아가 품에 안고, 품에 안긴 지는 꽃으로 땅이 붉어지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 “그 땅에서 피는 꽃 또한” 붉은 곳이다.
수용과 변화와 생성의 과정에서 진정한 그리움을 완성시킨다. 그래서 그러한 곳, 그러한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는 시인은 “날이 갈수록 붉어지는 가슴”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음미하다보면 안상학 시인의 시 여러 편에서 보이는 상징과 승화의 요소가 이 시에서도 보인다. 단순히 실존하는 선운사에 대한 그리움에 국한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넘어선 상징, 곧 지는 꽃, 붉어지는 가슴, 그리움, 사랑, 품안, 땅빛 등이 다양한 상징적 요소를 지닌다. 님이나 자유, 혹은 구도, 구원과 같은 상징적 요소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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