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김남시의 <본다는 것>(김남시, 너머학교)을 읽었다.
"무엇인가를 보는 행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고, 나의 눈은 하늘과 나무뿐만이 아니라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향해" 있기에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잘'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끊임없이 궁구해야 한다.
"우리의 눈으로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카메라로 무엇인가를 찍는다는 것과 전혀 달라요. 왜냐하면 카메라는 이러한 '앎'이 없이도, 다시 말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렌즈를 통해 들어온 외부 사물의 이미지를 그대로 포착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서는, 그러니까 낮은 단계의 지각 상태에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볼' 수 없을 테니까요."(18-19p)
'본다'는 것은 단지 시지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지각을 통해 비쳐지는 사물 그 상태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본다는 것은 우리 눈에 들어온 시각적 자극들을 우리가 알고 있던 앎과 지식에 의거해 '무엇'이라고 보는, 일종의 해석의 과정"(24p)이다.
루드비치 플렉은 특정한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집합적 지식의 체계를 '사유양식'이라고 했는데, 이 사유양식은 공동체의 역사, 지리적 조건, 사회 문화적 배경들에 의해 형성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앎과 지식이 역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달라짐에 따라서 사람들이 세상의 사물들을 무엇이라고 보아왔는가가 역사적으로 변화해 왔다"(25p)는 사실이다. 즉 어떤 사물, 현상이 시대마다 의미와 해석이 달랐던 것은 '앎과 지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2016년, 대한민국에서 촛불은 어떻게 해석되는가? '밀랍에 심어놓은 심지에 붙여놓은 불'을 의미할까?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만든 집합적 지식체계, 곧 사유양식에 따라 해석하면 이렇다. 잘못된 정치권력에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죽비이자 횃불이고, 민심이자 그것들을 표현해내는 무기이다.
그렇기에 촛불에는 지금까지 한국현대사가 잘못 이행되어온 과정과 배경까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촛불'을 표면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결코 촛불을 켜든 수백만 명의 의미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김진태의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는 발언이나 "현재 촛불시위는 평화시위가 아니다. 좌파 종북 세력은 통상 시위 때마다 분대 단위로, 지역별로 책임자를 다 정해 시위에 나온다."는 김종태의 발언은 그들의 앎이 거기까지이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생각하고 아는 만큼 해석한다.
똑 같은 촛불을 보면서도 이렇게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앎'에 대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의 환경이 대다수 국민들의 환경과 달랐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앎과 지식이 역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달라짐에 따라서 사람들이 세상의 사물들을 무엇이라고 보아왔는가가 역사적으로 변화해 왔다"(25)는 것이다.
결국 2016년 우리가 켜든 촛불은 1970년대 군사독재에 저항하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항쟁, 노동자대투쟁을 거치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대학생 반값등록금 등의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앎과 지식'이 달라져서 나온 결과이다.
따라서 2016년 촛불은 단지 박근혜를 퇴진시키고, 최순실과 그 일당들이 행한 국정농단에 항의하는 차원이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 시스템을 개혁하여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세우는 것이며, 미래 한국에 더 높고 고귀한 가치를 실현시키는 데 작용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켠 촛불이 끄지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에 따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고자 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것"(71p)을 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