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도 마음도 한갓 물 밑에 잠긴 자갈밭 같은 것이어서

물이 지나갈 때마다

지나온 겁의 시간이 다 소리를 내는 거라


- 이홍섭 <물소리> 14~16행, 시집 [검은 돌을 삼키다], 달아실출판사, 2017


한때 종일 물소리나 듣고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마침 등산을 하다 날이 저물어 야영을 했다. 깊은 산중 냇가에서 듣는 물소리는 처음에는 생소했으나 차츰 익히 듣던 일부처럼 여겨졌다. 그러다가 새벽녘, 물소리가 범상치 않다는 느낌에 퍼뜩 잠에서 깼다. 필경 저것이 수백년 전부터 할 말이 있어 나를 이리로 불러낸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 말만 받아 적어도 평생 쓸 글을 한 자리에서 다 쓰겠다 싶었다. 귀를 가만히 귀울여 봤다. 한참을 듣고 있어도 그게 그거였다. 범상한 내가 범상치 않은 행동을 잠깐 한 것일 뿐이었다.  


대로변으로 이사를 하였다. 집앞을 지나는 자동차 소리가 문 닫고 누워 있으면 꼭 냇물소리 같았다. 가만히 듣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어느 날 밤, 한밤중에 깨어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귀신처럼 앉아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모든 소리는 단 한 번도 같은 게 없다는 걸. 그 당연한 걸 혼자 터득하는데 꽤 오래 걸린 셈이다.  


혼자 걸어왔다 싶은 길, 혼자만 알고 있다 싶은 얘기, 혼자만 껴안고 있었다 싶은 고통도 돌아보면 다 별거 아니다 싶을 때가 있다. 어떻게든 그걸 들려주고자 애쓰던 날도 있었다. 그러나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몸과 마음 위를 지나가는 것들로 인해 스스로 소리를 내기 마련이다. 똑 같게 들리지만 단 하나도 같지 않은, "귀신보다 더 무서운 건 물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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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법이나 범법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정치권력층과 밀착하여 초법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부유한 천민’이라고 부르자. 부유한 천민은 법망 피하기를 넘어, 정책과 법을 이해관계에 맞추어 바꾸기도 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상황을 조작하기도 한다.

재산과 부를 등에 업고,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왜곡된 가치관을 내재화한 ‘정신적 천민’이 ‘부유한 천민’이고 ‘기득권 천민’이다. 이런 정신적 천민이 공동체를 위한 책임 의식과 인륜적 감정을 얼마나 견지하겠는가? 사회 정의와 기본 질서를 망각하고 부조리를 양산하는 ‘부유한 천민’은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하다."


이정은(한국철학사상연구회), <다문화 사회와 민족정체성 - 이질적 문화공동체들의 한국적 갈등과 연대>, [철학, 삶을 묻다], 동녘, 2016


이재용이 징역 2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구속된 지 353일 만에 풀려났다. 이번 판결은 이재용의 집행유예를 목표로 논리를 짜맞추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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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김남시의 <본다는 것>(김남시, 너머학교)을 읽었다. 

"무엇인가를 보는 행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고, 나의 눈은 하늘과 나무뿐만이 아니라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향해" 있기에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잘'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끊임없이 궁구해야 한다.

 

"우리의 눈으로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카메라로 무엇인가를 찍는다는 것과 전혀 달라요. 왜냐하면 카메라는 이러한 '앎'이 없이도, 다시 말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렌즈를 통해 들어온 외부 사물의 이미지를 그대로 포착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서는, 그러니까 낮은 단계의 지각 상태에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볼' 수 없을 테니까요."(18-19p)


'본다'는 것은 단지 시지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지각을 통해 비쳐지는 사물 그 상태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본다는 것은 우리 눈에 들어온 시각적 자극들을 우리가 알고 있던 앎과 지식에 의거해 '무엇'이라고  보는, 일종의 해석의 과정"(24p)이다. 


루드비치 플렉은 특정한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집합적 지식의 체계를 '사유양식'이라고 했는데, 이 사유양식은 공동체의 역사, 지리적 조건, 사회 문화적 배경들에 의해 형성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앎과 지식이 역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달라짐에 따라서 사람들이 세상의 사물들을 무엇이라고 보아왔는가가 역사적으로 변화해 왔다"(25p)는 사실이다. 즉 어떤 사물, 현상이 시대마다 의미와 해석이 달랐던 것은 '앎과 지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2016년, 대한민국에서 촛불은 어떻게 해석되는가? '밀랍에 심어놓은 심지에 붙여놓은 불'을 의미할까?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만든 집합적 지식체계, 곧 사유양식에 따라 해석하면 이렇다. 잘못된 정치권력에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죽비이자 횃불이고, 민심이자 그것들을 표현해내는 무기이다. 


그렇기에 촛불에는 지금까지 한국현대사가 잘못 이행되어온 과정과 배경까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촛불'을 표면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결코 촛불을 켜든 수백만 명의 의미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김진태의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는 발언이나 "현재 촛불시위는 평화시위가 아니다. 좌파 종북 세력은 통상 시위 때마다 분대 단위로, 지역별로 책임자를 다 정해 시위에 나온다."는 김종태의 발언은 그들의 앎이 거기까지이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생각하고 아는 만큼 해석한다. 

똑 같은 촛불을 보면서도 이렇게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앎'에 대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의 환경이 대다수 국민들의 환경과 달랐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앎과 지식이 역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달라짐에 따라서 사람들이 세상의 사물들을 무엇이라고 보아왔는가가 역사적으로 변화해 왔다"(25)는 것이다.

결국 2016년 우리가 켜든 촛불은 1970년대 군사독재에 저항하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항쟁, 노동자대투쟁을 거치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대학생 반값등록금 등의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앎과 지식'이 달라져서 나온 결과이다. 


따라서 2016년 촛불은 단지 박근혜를 퇴진시키고, 최순실과 그 일당들이 행한 국정농단에 항의하는 차원이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 시스템을 개혁하여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세우는 것이며, 미래 한국에 더 높고 고귀한 가치를 실현시키는 데 작용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켠 촛불이 끄지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에 따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고자 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것"(71p)을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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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은 <표현의 기술>(생각의 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는 여야가 싸우는 게 정상입니다. 안 싸우면 문제 있는 겁니다. 그 덕분에 민주주의는 선을 최대화하는 게 아니라 악을 최소화합니다. 시끄럽고 문제가 많지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엄청난 죄악이 벌어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겁니다. 최악의 사기꾼, 거짓말쟁이, 이중인격자, 폭력배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합시다. 국회가 입법권을 제대로 행사하고 사법부의 독립성이 살아 있다면 그 대통령이 죄악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강점과 경쟁력이지요. (53쪽)
그런데 지금 우리의 "국회가 입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사법부의 독립성"도 살아 있지 못하기 때문에 "최악의 사기꾼, 거짓말쟁이, 이중인격자, 폭력배가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도륙내어 쑥대밭으로 만드는 죄악을 마음껏 저지르게 하고 말았다.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이유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그를 단죄하는 것과 함께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올바로 세우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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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운다

나는 아내보다 더 처량해져서 우는 아내를 본다

다음 생엔 돈 많이 벌어올게.

아내가 빠르게 눈물을 닦는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음 생에는 집을 한채 살 수 있을 거야.

아내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다음 생에는 힘이 부칠 때

아프리카에 들러 모래를 한줌 만져보자.

아내는 피식 웃는다.

이번 생에 니가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아이가 되어 말한다. 배고파.

아내는 밥을 차리고

아이는 내가 되어 대신 반찬 투정을 한다.

순간 나는 아내가 되어

아이를 혼내려 하는데 변신이 잘 안된다.

아이가 벌써 아내가 되어 나를 혼낸다.

억울할 건 하나도 없다.

조금 늦었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아내에게 말한다.

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

아내는 눈물을 문지른 손등같이 웃으며 말한다.

오늘 급식은 여기까지

 

- 안주철, <다음 생에 할 일들>,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창비, 2015.6.22 초판1쇄)

 

안주철 시인의 시 <다음 생에 할 일들>을 읽다.

, 시라는 게 이런 거구나. 힘 빼고 써도 범종 울리듯 내면에서 메아리치는 감동을 주는 것. 그게 시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런 시를 쓰지 못하면 어찌할 것인가. 더 열심히 시를 써야 하는 이유를 거듭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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