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행위가 마치 수행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마음의 때를 벗기는 일이 구도의 첫걸음이라고 한다면 생활 속에서 종종 빠져드는 일삼매 역시 수행의 한 방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적 있지 않은가. 육체적으로는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온몸 기울여 매달리다보면 마음 깨끗해지는 일. 어쩌면 손빨래도 그 가운데 하나이지 싶다. 세탁기가 다 빨아주는 요즘이야 제대로 못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날씨 좋은 날, 큰 대야에 묵은 옷가지들을 넣고 주물러 빨다보면 옷의 때를 없애는 것만이 아니라 머릿속, 마음 속 때마저 지우는 느낌이 들곤 한다.
함민복 시인은 1995년 여름 한 철을 고창 선운사 암자에 머문 적이 있다. 이 시는 그 무렵 썼지 싶다. 시 「東雲庵·1」(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비, 1996)은 철저하게 관자(觀者)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시인은 이만큼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지만 그 대상이 곧 시인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혹은 독자 자신의 행위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바위 그릇에 물 받아 놓고
스님 옷을 공양주 보살이 빤다
마음에 묻은 때야
염불과 經으로 씻지만
옷에 묻은 때는
물[水]보살의 힘을 비는 수밖에 없나보다
<함민복 詩 「東雲庵·1」, 1·2연>
그릇처럼 움푹 패인 바위에 물을 받아놓고 빨래하는 공양주 보살을 시인은 무던히 바라보고 있다. 이 단순한 행위에서 수행의 본질, 삶의 근원, 인간 보편성을 직관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시인의 눈이고 보면 놀랍다.
빨래하는 장면을 보면서 시인은 마음에 묻은 때는 염불과 경(經)을 통해 씻어내야 하지만, 옷에 묻은 때는 자연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단순 명쾌한 사실을 느낀다.
세상 만물에는 모두 불성(佛性)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일어나는 일들 하나하나가 불성의 자비 베풂이 아니겠는가.
목탁 소리
빨랫방망이 소리
저렇게 때려대서야
겁나,
도망가지 않을 때가 어디 있겠나
<같은 詩, 3·4연>
목탁소리는 마음의 때를 씻는 소리, 빨랫방망이 소리는 옷의 때를 씻어내는 소리로 구분지을 수도 있지만, 이제 구태여 구분지을 필요는 없다. 둘 다 때를 씻어내는 마음속에서 ‘염불’이 되고 ‘경’이 된다. 내가 너가 되고, 너가 내가 되는 피아(彼我)의 구분이 없는, 마침내 시인의 심중으로 분리되었던 ‘소리’들이 하나로 들어선다.
4연은 위트감각이 돋보인다. 함민복은 뛰어난 직관력뿐만 아니라 이를 반짝이는 표현으로 바꿔놓는 탁월한 언어감각도 지닌 시인이다. 위트 있는 표현은 시적 재미를 부여하는데, 시인의 시들에서 금알갱이처럼 반짝이는 그러한 시구들을 종종 만난다.
4연의 너스레는 얼핏 가벼워 보이지만 앞에서 이루어진 통찰의 결과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목에 힘주지 않고 일부러 유머러스하게 표현해낸 점이 시인의 높은 공력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더욱 빛을 발한다.

뒷산 푸른 나무, 붉은 흙탕물 나도록 몸 씻는
장마철
낙뢰 소리 서늘하다
<같은 詩, 5연>
이제 시간이 바뀌었다. 장마철 햇빛 반짝 나던 어느 하루, 공양주 보살이 빨래하던 장면에서 출발하여 장마철 일상으로 이동하였다. 시인의 시적 감수성은 “뒷산 푸른 나무”마저 몸 씻는다는 것에 가닿는다. 푸른 나무는 “붉은 흙탕물 나도록” 몸의 때를 씻고 씻는다.
장마철 붉은 흙탕물이야 계곡의 흙이 빗물에 씻겨 내리면서 생겨난 현상일 테지만, 시인은 뒷산에 가득 찬 푸른 나무들이 몸을 씻기 때문으로 읽은 것이다. 푸름과 붉음의 극적 대비, 그런 장마철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뢰 소리가 깨달음처럼 시인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시를 읽고 난 후의 내 가슴도 서늘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