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아침 저녁 서늘한 느낌이 좋다. 공기도 투명해졌다. 담장 너머 감나무의 감이 색을 더해간다. 회사 마당의 모과 열매도 노랗게 익을 준비를 한다. 고영민 시인의 「모과불(佛)」 읽기를 올린다.

하나의 열매에는 그 열매가 맺히기까지 지나온 과거가 다 들어 있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산다는 것이 과거를 추억하며 현재를 불태워가는 과정이라고 하지 않은가. 추억은 과거와 현재의 나를 들락거리며 몸의 말단까지 향기로 채워놓는다지 않은가. 그리하여 현재는 추억으로 방부 처리된다. 그런데 말이지, 몸 안팎을 들락거린 시간과 공간이 온전히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가 함께 불태워져야 하는 게 아닌지.

고영민의 시 「모과불(佛)」(시집 『공손한 손』, 창비, 2009년)에는 정교한 관찰과 경험의 배후에 만상의 원리를 독특한 시선으로 끌어잡아 앉힌 감동이 있다. 삼라만상에 서로 들고남이 없는 것이 없다 했는데, 모과만큼 독특하게 이를 완성시켜 내는 열매도 없지 싶다. 한 번쯤 설풋 익은 모과를 책상머리나 승용차 안에 모셔 둬본 사람은 안다. 향기 덜한 모과가 스스로 빛깔을 들이고 향을 만들어내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한쪽부터 검게 썩어가며 몸 전체가 고스란히 말라 가는 것을. 모과는 숱한 과일들과는 달리 썩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썩으면서 짓물러 몸 허물지도 않는다.

        

내가 일하는 회사 마당에 오래된 모과나무 한 주가 서 있다. 모과 열매가 온전히 몸 태워 숯이 되는 과정을 열 해째 되풀이하는 것을 보면서 모과를 사랑하게 되었다. 열매처럼 둥근 육질의 줄기가 탈피하는 모양이며, 여름마다 매미 울음소리를 열매마냥 나무 전체에 매달고 있던 모과나무. 우수수 가을잎 다 털어내고 크고 노란 모과만 남겨진 가지를 보는 재미는 쉽게 대할 수 없는 장면이다.

3연 18행의 시 「모과불」에는 이러한 모과의 한 해와 여러 해의 과정이 고스란히 열매 하나로 ‘등신불’이 된다. 그 모과의 열반과정에는 시인 자신이 들고나던 시간과 공간 역시 중첩된다.

설풋한 모과 하나를 주워다가
책상에 올려놓았다
저 흉중에도 들고나는 것이 있어
색이 돋고 향기가 난다
둥근 테두리에 들어 있는
한 켠 공중(空中)
가끔 코를 대고
흠, 들이마시다보면
어릴 적 맡은 어머니 겨드랑이 냄새가 났다
       <고영민 詩 「모과불(佛)」, 1연>

덜 익은 모과 열매 “하나를 주워다가/ 책상에 올려놓”고 바라본 경험과 관찰과 시인 자신의 과거가 절묘하게 배합되어 있다. 설풋한 모과가 저 스스로 “색이 돋고 향기가” 나는 과정을 읽어내는 눈은 천상 시인이다. 모과 한 알의 “저 흉중에도 들고나는 것이” 있다 했으니, 사람 역시 스스로 “색이 돋고 향기”를 만들기 위해서 그러해야 함이 분명하다. 아, 그것은 “둥근 테두리에 들어 있는/ 한 켠 공중”이었으니, 사람 역시 한 켠 공중을 둥근 몸 안에 넣고 살아가는 것을. 문득 코를 대고 그걸 확인해 보니 “어릴 적 맡은 어머니 겨드랑이 냄새가 났다.” 경험이 없고 사실을 모르면 절대로 쓸 수 없는 시구이다. 시인의 둥근 몸 테두리 안에 넣은 “한 켠 공중”이 이 한 줄에 고스란히 함축되어진다. 추억과 향수의 응집. 모과의 울퉁불퉁 둥근 몸 가득 냄새와 색을 채워 넣고 있었던 셈이다.

모과의 얼굴 한쪽이 조금씩 썩기 시작했다
모과 속에 들어 있던 긴 시간
한 여름의
그늘 냄새, 매미 소리
       <같은 詩, 2연>

흉중에 들고나는 것들로 스스로 색과 향을 만들던 모과가 이제 숙성의 시기를 지나 썩음의 단계로 접어든다. 그 썩음의 과정은 “모과 속에 들어 있던 긴 시간” 곧 “한 여름의/ 그늘 냄새, 매미 소리”를 추억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를 현재에 되살려 놓는 것이다. 세상 모든 열매가 그러하다.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벼 이삭에도 태양과 폭우와 땀 냄새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도저한 과정의 응축된 시적 표현이다. 사람이라고 다르겠는가.

     

이 연에서 내가 주목했던 부분은 “모과의 얼굴 한쪽”의 ‘얼굴’이었다. ‘얼굴’을 생략하고 그냥 “모과의 한쪽이 조금씩 썩기 시작했다”라고 해도 무난하다. 그럼에도 ‘얼굴’이 쓰인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머리부터 시작하여 한 몸을 태운 등신불을 염두에 둔 것이다.
등신불은 다비와 달리 화기(火氣)가 직접 닿지 않고 기름 부음으로 완성된다. 몸 사름은 머리부터 시작한다.

내 방 허공중에
매일 하루치의 제 것을 조금씩 꺼내 피워두던
모과 하나가
말끔히 한 몸을 태워
검은 등신불로 앉아 있다
       <같은 詩, 3연>

“얼굴 한쪽이 조금씩 썩기 시작”하던 모과가 이제 온몸 말끔히 태워버렸다. “매일 하루치의 제 것을 조금씩 꺼내” 시인의 “방 허공중에” 피워두던 모과. “한 여름의/ 그늘 냄새, 매미소리”와 같은 “모과 속에 들어 있던 긴 시간”뿐만 아니라 그 시간만으로 모자라 흉중에 들고나는 것들로 “색이 돋고 향기”를 만들던 모과가 제 몸 안의 것들을 조금씩 꺼내놓았다.

번 것을 내어놓는 자선 행위로 자신의 완성 시기를 준비한다. 채웠던 것을 비워내는 자연의 섭리. 그렇게 매일을 조금씩 꺼내 피워두고, 또 한편으로는 조금씩 썩기 시작하며 “말끔히 한 몸을 태워”간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 그 자리에 “검은 등신불로 앉아 있다”.

인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시편이다. 마음 한 켠을 따스하게 데우는 손이다. 채우고 비우는 일. 마침내 다 비우고 더 이상 비울 것 없는 상태로 남는 일. 시인은 모과를 대신 보여줌으로써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등신불은 자신의 몸을 부처님께 바치는 소신공양이되 몸을 태워 형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그대로 보존하는 ‘육신불’이라는 사실도. 다 비운 몸을 보여준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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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외경(外景)을 통한 내정(內情)의 표출’이라고 말해왔다. 외경이 개입되거나 반영된 의식과 정서의 언어적 표현의 완성도가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故 오규원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이러한 인식에 반(反)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정이나 의식의 반영 혹은 개입이 없이도 얼마든지 외경만으로 풍요로운 시의 향연을 누리게 해준다. 그의 향연에 참석하다 보면 시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다. 의식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고 외경만을 언급함으로써 오히려 더 깊은 심회와 내정을 배후에 펼쳐 놓는다. 관찰시라고도 할 수 있는데, 사물의 현상이나 대상을 묘사로만 전개한다. 이러한 시적 방법론을 뛰어나게 구사한 시인들도 여럿 있다.

       

시집 『두두』(문학과지성사, 2008년)에 수록된 시편들은 오규원 시인의 독특한 시세계를 형성한다. 시가 짧아지고, 짧아진 만큼 투명성과 여백을 확보하였다. 먹을 아껴 쓰고, 단 몇 개의 필획만으로 완성한 초솔한 문인화 진수를 보는 느낌이다. 심원한 문인화 세계를 형성한 작가들을 보면 만년으로 갈수록 획을 절제하고 여백을 최대한 운용한다. 화려한 채색 대신 먹을 주조로 하고, 담묵이나 농묵보다 갈필을 선호한다. 고졸한 표현은 서화(書畵)의 진수가 졸박(拙樸)함에 있다는 동양서화론의 실천적 결과물이기도 하다.

오규원 시인 1주기를 맞아 출간된 유고시집 『두두』에 수록된 시편들은 그의 엄격한 시창작 태도가 그대로 살아 있다. 다만 칼날 같은 언어 구사보다는 한결 투명성을 지닌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나이가 들면서, 혹은 죽음을 예감하면서, 마치 생의 뒤편이 어떻게 장식되어야 하는가를 알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한 시편들이 주는 감동은 생각보다 오랜 여운으로 자리하였다.

       

시 「부처」는 1연 12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교적 짧은 시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집에 수록된 다른 시편들에 비해서는 긴 편에 속한다. 경주 남산에서 만난 수수한 부처상을 이만큼 서서 담담하게 묘사한다. 해학적인 여유까지 엿보인다. 거리가 주는 심적 여유로움일 수도 있겠다. 시인 자신의 내면 정감의 개입을 차단하고 단지 사물 현상을 옮겨 전할 뿐이다.

물론 아무리 내정의 개입을 막고 작가의식의 반영을 차단한다고 해서 시인의 성향과 사유와 시선과 시적 교감이 모두 막아지겠는가. 어차피 시인의 눈에 의해 걸러져 선택된 대상이고, 시인은 그 대상에서 시적 요소를 발견한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규원 시인은 어설픈, 과잉된 감정의 개입을 막고 최대한 형상의 묘사만으로 승부하려 한다.

   남산의 한 중턱에 부처가 서있다
   나무들은 모두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있고
   햇빛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붙어 있다
   코는 누가 떼어갔어도 코 대신 빛을 담고
   빛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다
                        <오규원 詩 「부처」 1~6행>

제목이 「부처」이기도 하지만 “남산의 한 중턱에” 서있는 불상을 시인은 그냥 “부처”라고 부른다. 불상이 곧 부처의 형상이지만 시인은 이러한 전환 장치 대신에 곧장 부처로 진입한다. ‘불상’의 외형이 아니라 부처의 진면목을 얘기하겠다는 의도이다. 미술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뛰어난 예술성을 지닌 불상들의 엄정한 범주보다는 허물어지고 허술한 구석을 맘껏 지닌 부처의 불성에 단박 다가선 것이다. 지극히 단순한 명사 하나로 지은 제목은 “보라, 나는 부처에 대해 직접 시를 쓰고자 한다.”는 선언과도 같다. ‘부처’, 단 두 자의 명사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크고 넓은 세계를 내포한 단어는 드물다.

       

“남산의 한 중턱에” 서있는 부처는 외따로 떨어져 있다. “나무들은 모두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있”다. 아마도 불상 주변을 정리하여 공터가 생겼지 싶다. 그런데 시인은 단지 그렇게 여기고 넘어갈 법한 것에서 탁월한 시적 감각을 포착해낸다. 이 “거리를 두고 서있”는 나무들은 현장의 사실 묘사이기도 하지만 이제 ‘거리’에 대한 시인의 치밀한 의중을 전개하기 위한 포석으로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앞에서 언급하였던 시인 자신의 의식 개입의 차단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싶기도 하다. 나무들은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있는 반면 “햇빛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딱 붙어 있다”. 그 밀착도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부처 몸의 부재를 메워주기도 하고, 때로 조금의 여유로서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런데 “부처의 몸에 붙어 있”도록 부처가 햇빛에게 허락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부처는 누가 떼어간 “코 대신 빛을 담고/ 빛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있던 것이 사라지면 다른 것으로 메우고, 그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자리는 또 다른 것으로 자리하게 하는 열림과 무소유의 경지를 읽어낸 것이다. 사물과의, 만상과의 이 도저한 밀착도라니! 시를 읽는 이 마음속에 딱 붙어 선다.

   곁에는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고
   지나가던 새 한 마리 부처의 머리에 와 앉는다
   깃을 다듬으며 쉬다가 돌아앉아
   부처의 한쪽 눈에 똥을 눠놓고 간다
   새는 사라지고 부처는
   웃는 눈에 붙은 똥을 말리고 있다
                        <같은 시, 7~12행>

부처 곁에는 마치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라도 하는 양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다. 결코 많지 않아 “드문드문”한 그들은 진정으로 부처님을 따르고 경외하는 이들이 아닐까. 한없이 고요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이러한 구도에 느닷없이 “지나가던 새 한 마리 부처의 머리에 와 앉는다”. 예기치 않은 장면이지만 지금까지의 상태를 흩뜨려 놓을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하길 허락한다. 그래도 감히! 앉는 것을 넘어서 심지어 “깃을 다듬으며 쉬”기까지 한다. 그것도 모자라 햐! 이놈 봐라, 불경스럽게 아예 “돌아앉아/ 부처의 한쪽 눈에 똥을 눠놓고 간다”. 그것까지도 허락하는 부처시다. 대자대비의 부처는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빛으로 없는 몸을 메우고, 찾아오는 이의 날개를 쉬게 하는 우리 곁에 딱 붙어 서있는 부처시다. “한쪽 눈에” 눠놓고 간 똥까지도 말리고 있는 부처시다. “웃는 눈”으로.

해학과 유머와 여유가 이토록 감동적으로 그려진 시가 얼마나 많이 있을까. 오규원 시인은 어쩌면 미리 알고 있었을,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내면을 이렇게 보여준 건 아닐까. 언어에 대해서 엄정할 대로 엄정하여 절대로 넘치는 수사로 치장하길 경계해 왔던 오규원 시인의 시어조탁 자세는 구도자의 모습을 닮아 보였다. 그러한 자세를 허물지 않으면서도 내적으로 오히려 더 크게 열린 것을 볼 수 있다. 맑고 시원한 웃음 한 자락이 마음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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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회의 『선비답게 산다는 것』(푸른역사)은 이 출판사에서 출간한 정민 著 『미쳐야 미친다』와 같은 선상에 놓인 기획서라고 할 수 있다.

유려한 문체를 구사하는 학자들의 문장을 읽는 일은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시간의 소통을 얼마나 매끄럽게 연결시켜 놓는지 마음을 달뜨게 할 정도이다. 청소년들이, 일반인들이 고전을 많이 읽게 하기 위해서는 고전을 다양하게 끌어들이고 유려하면서도 재미있게 펼쳐놓는 저작자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러한 역할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로 안대회, 이종묵, 정민, 김풍기, 심경호 등이 퍼뜩 떠오른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아쉬움은 필요한 핵심만을 취하다 보니 다양성을 확보하는 대신 깊이와 두터움을 챙기기 어려웠다는 점이다.『선비답게 산다는 것』은 큰 테마를 따라가는 소재와 주제의 꼭지글들로 엮여져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하나의 꼭지를 가지고 한 권을 쓸 수 있는 소재와 주제들이 넘쳐난다. 단순한 뻥튀기 방식으로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주제를 파고들면 들수록 넓고 깊은 바다가 펼쳐져 질과 양에서 모두 풍성함을 획득할 것으로 여겨지는 소재거리가 많다. 저자가 나열하는 인물들과 저서 목록들을 보면 그것들을 다 언급하지 않은 채 꼭지글이 마쳐지는 것에 아쉬움이 일 정도이다.

저자가 쓰거나 옮긴 책들 가운데 『고전 산문 산책』(휴머니스트), 『조선의 프로페셔날(개정판: 벽광나치오)』(휴머니스트),  『궁핍한 날의 벗』(태학사), 『조선후기 소품문의 실체』(태학사), 『원야』(예경)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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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피고 진다. 피고 지는 일, 거기에 꽃의 매혹이 있다. 피었으니 지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피기도 어렵고 지기도 어렵다. 어느 한쪽을 꼭 택하라면 피기보다 지기가 더 힘들지 싶다. 시인들은 꽃이 피고 지는 일을 자연 현상 차원으로 여기지 않았다. 꽃이 피고 지는 일을 마음 속 작용 여하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고 보았다.

꽃이 시인을 미혹시키는 건 시인의 내면 표현을 대행해주기에 더 없이 좋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시인의 마음에 섭정을 하거나 대리청정 하는 단 하나 사물을 세우라고 한다면 많은 시인들이 꽃을 천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동서고금의 시 가운데 피는 꽃의 절정과 지는 꽃의 비애를 기막힌 솜씨로 빚어낸 명편들이 숱하게 많다. 지는 꽃을 다룬 시 가운데 장석남 시인의 「길」(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 2001년 초판1쇄)을 나는 우선으로 꼽고 싶다. 2연 9행의 짧은 시에는 “부드럽고 연한 상상”(최하림)의 특징이 잘 내포되어 있다.

       

장석남의 시는 발묵이 잘 된 수묵화를 닮았다. 섬세하고 담백한 마음결이 시에 담겨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는 힘주어 강조하지 않는다. 감정의 고조와 시적 긴장도 잘 표출하지 않는다. 조용하고 편안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묘한 점은 부조화를 이룰 법한 시어들이 독특한 사유 방식으로 절묘하게 어우러져 시를 빚어낸다는 것이다. 독특한 발상과 표현이 시를 쓰는 한 사람으로서 나를 화들짝 놀라게 만들기도 하고, 그의 시를 사랑하게도 한다. 그의 시에는 일상어가 종종 등장한다. 특히 줄임말과 같은 입말은 친근성을 확보한다. 시인 자신만의 어조로 전개한 시를 읽다보면 내 심사까지 조용해지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만의 독특한 어법이다.

  바위 위에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이 앉아 있습니다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장석남 詩 「길」, 1연>

시인은 바위 위에 떨어져 있는 팥배나무 흰 꽃잎을 바라본다. 5월에 피는 팥배나무 꽃은 배꽃을 닮았다. 희고 예쁘다. 첫사랑 같은 꽃이다. 반면 열매는 배가 아닌 팥을 닮아 팥배나무라고 한다. 그러한 팥배나무 꽃잎이 바위 위에 떨어져 있다. 시인은 “바위 위에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이 앉아 있”다고 했다. 그 장면 하나만으로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고 했다. 설마 “하얀 꽃잎들”로 인해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까마는 시인에게만은 사실이다. 왜? 꽃잎이 앉아 있기 때문이다.

바위가 그 꽃잎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 싶다. 그렇지 않다면야 꽃잎이 바위에 내려앉아 있는 동안 훤히 속을 보여줄 리 만무하다. 1연은 2연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한 가지 지닌 셈이다. 즉 “바위 위에 앉은”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에서 바위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이는 시인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이” 바위 위에 앉아줌으로써 바위의 마음을 투명하게 한 것이다. 바위는 팥배나무 꽃을 흠모하였음이 분명하다.

조금만 더 확대해석을 해보자.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을 “바위”가 사랑하는 이로 대입시켜 보자.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유를 더 잘 알 것 같다. 어쩌면 시인은 이 시에서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였던 이와의 추억을 얘기하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이처럼 확대해석하지 않더라도 바위 위에 앉아 있는 팥배나무 하얀 꽃잎들로 인해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표현은 기막히다.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온
  길들을
  다 
  걸어보고 싶습니다
         <같은 詩, 2연>

지는 꽃이 지나온 짧은 궤적을 ‘길’이라고 표현한 시인은 장석남이 처음이지 싶다. 꽃이 지는 짧은 거리를 마치 먼먼 길처럼 말하는 그 속에는 참으로 많은 얘기가 담겨 있다. 이를 두고 최하림 시인은 시집 해설에서 “무목적의 꿈과 부재의 꿈의 그림자들”이라고 하였다. 꽃잎이 맺혔던 팥배나무 가지와 꽃잎이 져서 내려앉은 바위 사이를 걸어볼 수는 없는 일이다. 걸을 수 없는 길을 걷고자 하였으니 당연히 “부재의 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읽지 않았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싶다.

어떻게? 이 시에서의 ‘길’은 단지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온”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꽃잎이 내려오는 동안,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꽃이 피면서부터 시작하여 꽃잎이 바위 위에 내려앉기까지의 시간도 포함한다. 시공(時空)이 하나로 합치된 ‘길’인 것이다. 따라서 공간으로서의 길은 “다/ 걸어” 볼 수 없겠지만, 시간의 경과로 이루어진 추억 속을 걸어보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시인은 팥배나무 하얀 꽃잎과 바위를 만남과 사랑으로 대체시킨다. 하얀 꽃잎이 바위에 닿았을 때를 사랑하는 이를 만나 이루어진 사랑으로 본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손길이, 마음이 몸에, 마음에 와 닿았을 때 몸 전체가, 생애 전체가 온통 환해지는 느낌.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 시인은 그 순간을 본 것이다. 그러하니 “하얀 꽃잎”이 피어난 순간부터(사랑하는 이를 본 순간부터) 그 꽃잎이 바위 위에 내려앉기까지(나에게 와서 서로 사랑하게 되기까지) 모두 다 오가며 기억을 더듬고 추억해보고 싶은 것 아닌가. “길들”이라고 복수로 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꽃잎 하나하나를 모든 만남과 사랑으로 보았고, 그 사랑들을 다 알아보고, 느껴보고 싶은 것이었다.

시 「길」은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의 표제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과 함께 읽으면 좋을 시다.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에서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라고 하였지만, 그 꽃나무는 사랑하던 대상이고, 그가 자리했던 내 마음 자리에서 그를 뽑아낸 일이다. 그러니 뽑아낸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보는 것은 당연히 아픈 일이다.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은 殘像들”만 남았기에 “죽은 꽃나무”이고, 이를 “뽑아낸 일”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은 통증을 유발한다. 그게 설사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말이다. 그러하니 어찌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온/ 길들을/ 다/ 걸어보고 싶”지 않겠는가. 설사 그것이 남녀 간의 사랑에 국한되는 게 아닐지라도, 또한 자신의 사랑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더듬어보는 것 자체가 “길들을/ 다/ 걸어보”는 일이 아니겠는가.

시는 고요하고 연하디 연한데,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온/ 길들을/ 다 걸어보고 싶"다는 기막힌 표현 앞에 나는 화들짝 놀란다. 이것이 장석남 시가 지닌 매혹이지 싶다.

한 가지 더 짚고 가자. 2연의 “꽃잎들이 내려온” 구절은 1연의 “바위 위에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이 앉아 있”다는 것과 자연스럽게 아귀가 맞는다. 바위는 다가가지 못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여기서 기다길 수밖에 없었고, 그 마음을 알아 “꽃잎들이 내려온” 것이다. 시인의 사랑도 그랬나보다. 그녀가 시인에게 다가온 순간, 시인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환해졌나 보다.

1연은 바위 위에 꽃잎들이 앉아 있는 모양이다. 2연은 파격적으로 행을 바꿔줌으로써 꽃잎이 내려오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한 행 한 행을 끊어가며 천천히 읽으면 꽃잎이 나리는 모습이 더 잘 연상된다. 행 하나를 가르는데도 그것이 가져올 효과와 절제가 요구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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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 테일러의 <런더너>(최세희 역, 오브제, 2012)는 제목만 놓고 보면 충분히 낚일 법한 책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런던 관련 책을 꽤나 사 읽은 나 역시 제목에 눈길을 먼저 주고, 그 다음에 내용을 살펴보았으니 제목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이겠다.

‘파리지엔’이나 ‘뉴요커’라는 말처럼 ‘런더너’라는 말에 눈길이 한 번 더 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15쪽에 이르는 꽤 긴 ‘들어가는 말’을 읽고 나면 이 책이 독자를 낚기 위한 의도에서 ‘런더너’라고 제목을 달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베이징의 10분의 1 크기에 약 300개 언어를 사용하는 750만명이 살고 있는 런던. ‘들어가는 말’만 놓고 보면 저자에게 런던은 그다지 우호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나는 도시가 자체적으로 날 밀쳐내고 있다고 느꼈다.”(14p)고 말할 정도이다.

      

     

언어소통이 자유로운 캐나다인이 그렇게 느꼈을 정도이니 의사소통이 불편하고 문화 차이가 큰 동양인에게 런던은 어떻게 다가오겠는가. 그러나 이 책은 그와는 조금 다르게 접근한다.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저자가 왜 제목을 ‘런더너’라고 지었는지 이해가 간다. 저자는 “나는 한 번도 누가 런더너이고, 누가 런더너가 아닌지 구분한 적이 없다.”(22p)고 했다. 이는 진정한 런더너라면 “런던 토박이이고, 마리르보 교회 종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태어난 존재여야만 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런더너에 대한 규정 대신 진정한 런더너를 만나려면 어찌 해야 한다는 대답을 들을 뿐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런더너를 정의하는 말들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이해한 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런더너라는 것이었다.”(23p) 저자 크레이그 테일러는 5년간 런던 전역을 돌며 200명의 ‘런더너’를 만나 인터뷰한 결과,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그 말을 내놓는 데 이르기까지 저자가 인터뷰한 기록이다. 3장에 걸쳐 18개의 테마에 85명의 인터뷰이들이 등장한다. 그들 중에는 이란, 우간다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다채로운 일을 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 모두가 ‘런더너’이다. 그들 얘기를 들어보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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