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게 기다리는 봄은 때로 너무도 더디게 오고, 혹은 예기치 않게 와서 내면을 흔들어 놓는다. 꽃이 피는 때를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긴 겨울 끝에 오는 새로운 희망 때문인가, 아니면 혹독한 시련의 종지부, 어둡고 추운 내면을 밝히고 덥히는 정화의식 때문인가.
이유가 어떠하든 봄은 만인의 기다림 위에 꽃으로 피어난다. 이원규 시인의 시 「거울 속의 부처」에서 내면이 깨어나고 열리는 과정과 순간은 너무도 간절하다.

 

        

 

내내 긴 겨울잠을 자다
매화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깨어보니

 

삼매는 오간 적도 없고
삼발 머리에 손톱 발톱만 자랐다

 

봄은 봄이로세
부시시 일어나
토방에 군불을 지피고
꽃피는 법당 하나 차렸다

 

촛불 두 개를 켜고
헌화 헌다 헌향
목불 하나 없는 법당에서
커다란 거울을 보며
백팔 배를 하였다

   - 이원규 詩 「거울 속의 부처」 1~4연

 

「거울 속의 부처」는 쉬운 시어(詩語)로 깊은 사유와 시적 감성을 담아낸 작품이다. 시인은 “매화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봄이 왔음을 깨닫는다. 첫 행에 “내내 긴 겨울잠을” 자다가 깨어났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내면의 어둡고 긴 고뇌에 침잠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하여 긴 시간 동안 “삼매는 오간 적도 없고/ 삼발 머리에 손톱 발톱만 자랐다.”


봄이 왔다는 외부의 신호에 문득 정신을 차려 시인의 내면도 봄을 맞을 준비를 한다. 그 준비는 거창할 것도 없이 “토방에 군불을 지피고” 목불은 없지만 “꽃피는 법당 하나” 차린 것이다. 그리고 “촛불 두 개를 켜고/ 헌화 헌다 헌향” 하고는 없는 목불 대신 “커다란 거울을 보며/ 백팔 배를” 한다.

 

‘거울’은 잠과 깨어남, 외부와 내면, 나와 부처, 고뇌와 씻김 사이에 놓인 관문이자 의식 전환의 기점이다. 그 관문을 통과하여 새로운 세계에 새로운 관점과 의식의 발을 내디디게 된다. 인식의 전환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 부처는 멀리 있지 않고, 목불, 석불, 금불에도 있겠지만, 삼라만상 모두에도 깃들어 있지 않은가. 물론 거울을 보며 백팔 배를 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긴 겨울잠에서 깨어 토방에 군불을 지피고 촛불을 켜고 헌화, 헌다, 헌향하는 전환의 조짐을 이미 다 갖추었다. 이제 완전한 전환만을 남겨둔 셈이다.

 

     

 

한 번 절하고
너는 누구냐
또 한 번 절하고
너는 또 누구냐
묻고 묻다가

 

거울 속의
남루한 부처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그도 분명 울고 있었다

   - 같은 詩, 5~6연

 

이제 시는 5연에서 다시 한 번 상승한다. 거울 속의 백팔 배를 하고 있는 나를 향하여 일배(一拜) 할 때마다 묻는다. “너는 누구냐”고. “또 한 번 절하고” 거듭 묻는다. “너는 또 누구냐”고. 그렇게 백팔 배를 하면서 백여덟 번을 묻는다. 그게 어디 숫자상의 108번뿐이겠는가. 천번 만번 묻는 것이며, 깊고 깊게 묻는 것이다. 그렇게 “묻고 묻다가” 마침내 “거울 속의/ 남루한 부처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내가 나에서 타자화되는 순간이자, 나의 승화이며, 나의 깨달음이다. 동시에 나를 바라보는 부처를 발견하는 순간이며, 나와 부처 간의 교감이 오가는 순간이다. 그리하여 “그도 분명 울고 있었다”는 마지막 행에 이르러서는 나의 내면이 위무받기에 이른다.


물론 시인은 그 ‘거울’조차 떠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거울 속의 남루한 나를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내면을 읽어주는 마지막 행 “그도 분명 울고 있었다”는 것으로 대신할 뿐이다. ‘우는 그’는 시인 자신인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부처이다. 아, 봄날은 이리 눈물겹고, 이리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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