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한 이정록 시집 아버지학교(열림원, 2013)를 받았다

먼저 읽는 <시인의 말>이 가슴에 와 박힌다.


아버지는 쉰여섯, 입춘에 운명했다. 소한 지나 입춘까지, 원고지라는 멀고도 척박한 땅에 아버지를 모셨다. (어머니학교를 포함하여) 두 시집을 나란히 읽어보니 성숙시집같다. 생의 여로가 이렇게 이어진 듯싶다. 두 학교를 모두 마쳐도 졸업은 없다. 죽어서도 무릎 아픈 학생부군이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학교의 불량학생들이다. 내가 먼저 회초리를 맞겠다.”(6~7p)


시집을 읽으면서 이정록 시인이 먼저 맞는 회초리에 나도 내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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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게도 나는 오랫동안 내 인생의 한 권의 책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져왔다. 나를 기다리는 책, 내가 그 책을 향하여 긴 시간을 걸어왔을 것 같은 책이 분명 있으리라는 생각을 품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책은 없다. 단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꿨다는 얘기는 간혹 들었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말은 아니다. 모색과 탐독 과정에서 임펙트 강한 책은 있을 것이다. 전환의 계기가 된 책, 새로운 싹을 틔운 촉매로서의 책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 한 권의 책을 만나는 경험은 드물 것이다.


아까운 책 2013(부키, 2013)을 받아들면서 내가 미처 알아보지 못한 책 가운데 나를 기다리는, 내가 기다려온 한 권의 책은 없는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해보았다. 결국에는 내가 읽은 모든 책이 합해져서 한 권의 책을 이루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어쩌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미련한 짓과 나를 붙들고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 미련이 나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책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까운 책 2013》에 수록된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라는 부제가 붙은 다시, 그림이다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오랫동안 바라보기,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

예술과 관련짓지 않더라도 관찰과 관조는 대상의 핵심을 명징하게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책을 통하여 인문과 사회, 예술과 문화, 인간과 과학을 오랫동안,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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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은 소리의 다채로움을 누리게 해준다. 태아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외부의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청각은 인간이 외부의 상황이나 정보를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통로 가운데 하나이다. 외부 환경 파악에 시각이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하지만 상상력을 전개하는 데는 청각이 더 효율적이다.

시각에 비하여 청각은 의지적 차단이 불가능하다. 시각은 스스로 눈을 감음으로써 보는 것을 막을 수 있지만 소리는 듣는 이에게 자율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물론 듣기에도 경청(listen)과 듣기(hear)와 같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청각의 작용은 그냥 들리거나 귀 기울여 듣거나 하는 차이일 뿐이지 듣는 것을 충족시키는 소리는 변함이 없다. 소리를 통하여 사물의 근원성에 도달할 수 있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소리에는 생명성이 존재한다. 한문학자 배병삼은 원래 ()’이 망가져버린 자리는 소리()’가 치유하는 법이라고 했다. 현대사회에서 소리의 필요성을 적확하게 언급한 것이다.

소리와 관련된 시들을 살펴보면서 한국 현대시에는 시각적 요소가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지만, 청각 요소도 상당히 많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장철문 시 흰 국숫발」(시집 <무릎 위의 자작나무>, 창비, 2008.7.25 초판1)은 그야말로 소리의 향연이다. 소리만으로 이렇게 풍성한 잔치 풍경을 표현해낼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에 이른다. 청각의 시각화이다. 미리 말하면 흰 국숫발에는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진 높은 시적 완성을 보인다. 제목의 은 이미 시각 요소를 전제하고 있어 시각과 청각이 공존한다. 여기에 리듬감이 더해지면서 시적 운율미를 한층 높였다.

827행으로 이루어진 흰 국숫발은 한밤중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마치 국숫발을 뽑고, 이 방 저 방에서 온 가족이 몰려나와 국수를 먹는 모습으로 그려냈다. ‘ 내리는 소리 = 국숫발 뽑는 소리 = 국수를 삶고 나눠 담는 소리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 흰 국숫발이라는 등식을 전제로 한다.

, 이제부터 비오는 소리는 본격적으로 국수를 뽑고, 물을 끓이고, 국수를 삶고, 빨고, 소쿠리에 건져 담고, 그릇에 나눠 담고, 국물을 붓는 과정을 거쳐 국수 먹는 소리로 나아가는 잔치판을 만난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다시 국숫발이라는 소리로 환원한다.

 

슬레이트 지붕에 국숫발 뽑는 소리가

동촌 할매

자박자박 밤마실

누에 주둥이같이 뽑아내는 아닌 밤 사설 같더니

- 장철문 흰 국숫발1

 

지금이야 1급 발암물질인 석면 함량 비중이 높아 점차 사라져가고 있지만 초가지붕을 벗어나 함석지붕을 거친 개량주택의 대표적인 지붕이 바로 슬레이트였다. 오목과 볼록을 반복하는 물결 같은 굴곡이 만드는 홈은 빗물을 잘 흘러내려 처마 아래 흙마당에 일정한 간격의 낙수구멍을 만들기도 했다. 슬레이트 지붕은 빗소리를 잘 들리게 했다. 깊은 밤 가만히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무슨 긴 얘기를 듣는 기분마저 든다.

첫 행 슬레이트 지붕에 국숫발 뽑는 소리란 슬레이트 지붕 위로 내리는 빗소리를 국숫발 뽑는 소리로 규정하고 시작한다. 단번에 은유의 중심부로 찔러 들어가는 수법이 예사롭지 않다. 흔히 시를 배우는 초심자들이 저지르기 쉬운 것 가운데 하나가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것이다. 즉 정황을 하나하나 다 설명한 다음, 그제야 은유에 이르려고 한다는 점이다. 만약 이 시를 슬레이트 지붕에 내리는 빗소리 국숫발 뽑는 소리라고 했다면 첫 행부터 늘어져 시 전체에서 보여주는 통통 튀는 운율미를 제대로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박자박 밤마실” “아닌 밤 사설은 슬레이트 지붕에서 나는 빗소리이다. 그 빗소리는 폭우나 세우(細雨)가 아닌 추적추적 내리는 가랑비일 것이다. 그래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자박자박 소리를 내며, 길고 길게 끝이 없을 것처럼 뽑아내는 사설 같기 때문이다. 밤마실 나온 할매가 자근자근 풀어놓는 길고 긴 사설에 젖다보면 어느새 밤이 푹 깊어져버린다.

관용구 아닌 밤뜻하지 않은 밤’, ‘뜻밖의 밤의 뜻으로 쓰이지만, 밤의 깊고 그윽한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의도의 측면도 있다. ‘밤마실에서 아닌 밤 사설로 내디딘 어법이 입 안에서 자연스럽게 구른다.

동촌 할매는 고유명사이지만 이 땅 윗세대의 대표적인 인물이요, 시골 노인네의 전형이요, 나눔과 공존의 상징이다. 이후부터의 시적 전개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먼저 공동체의 대표 인물로서 동촌 할매가 지금부터 풀어가는 사설로 봐도 무방하다.

또 다른 하나는 처음 시작처럼 빗소리 그 자체가 국숫발 뽑는 소리요 국수 삶고 건져 나눠먹는 풍광으로서의 상상 전개이다.

 

     

 

배는 출출한데 저 햇국수를 언제 얻어먹나

뒷골 큰골 약수터에서 달아 내린 수돗물

콸콸 쏟아지는 소리

양은솥에 물 끓는 소리

- 같은 , 2

 

한번 국숫발 뽑는 소리를 듣자 식욕이 저 먼저 달려 나간다. 아닌 밤 긴 사설로 깊어지자 배도 출출해진다. 그 해 수확한 밀가루를 반죽하여 막 뽑아낸 국숫발은 그야말로 햇국수의 풋기를 가득 안고 있다. 밀이 자라기까지 햇볕과 비와 바람과 흙의 냄새가 섞여있을 그 햇국수를 얼른 먹고 싶은 것이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이제 본격적으로 국수를 끓일 준비를 한다. 뽑은 국수를 삶기 위하여 수돗물을 받고 양은솥에 끓인다. 그 수돗물은 정수장에서 보내오는 대도시의 수돗물이 아니라 뒷골 큰골 약수터에서 달아 내린 수돗물이다. 흔히 시골의 수돗물은 맑은 계곡물을 막아 만든 수원지나 약수터에서 끌어온다. “뒷골 큰골 약수터에서물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대나무를 쪼갠 홈을 이용하여 수로를 만들거나 호스를 길게 연결한다. 그러한 사실을 함축적으로 담아서 단번에 보여주는 달아 내린이라는 어구가 맛을 더하였다.

뒷골 큰골 약수터에서 달아 내린 수돗물/ 콸콸 쏟아지는 소리/ 양은솥에 물 끓는 소리는 비의 양이 꽤나 많아져서 이제 빗물이 모이면 제법 큰 소리를 내며 흐르는 모양을 그려낸 것이다. 동시에 분주하게 국수를 삶는 역동적인 장면을 잘 그려냈다.

 

흰 국숫발, 국숫발이

춤추는

- 같은 , 3

 

이제 국수가 끓기 시작한다. 양은 솥 안에서 흰 국숫발은 춤을 춘다. 끓는 물속에서 국숫발은 제각각 요동친다. 가는 면발이 꿈틀거리며 끓는 모양은 그야말로 충을 추는 것에 다름 아니다. 때로 느리게, 때로 빠르게, 때로는 일정한 방향으로, 때로는 반대 방향으로 국수는 끓는다.

이 연에서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노는 묘미를 최대한 발휘한다. 3연 첫 행에서 한 번 쉼표를 찍어줌으로써 국숫발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한 단계 상승하는 리듬감을 형성해준다. 2행은 형용사 춤추는하나 만을 씀으로써 긴 여운을 남기는 지속성을 확보하였다. 또한 다음 연 첫 행을 수식해주는 효과를 통하여 자연스러운 연결을 이끌어낸다.

 

     

 

저 국숫발을 퍼지기 전에 건져야 할 텐데

재바른 손에 국수 빠는 소리

소쿠리에 척척 국수사리 감기는 소리

- 같은 , 4

 

국수가 끓기 시작하자 시인의 마음은 조급해진다. 처음에는 국숫발 뽑는 소리에 저 햇국수 언제 얻어먹나하고 기다렸는데, 이제는 끓는 국수의 면발이 퍼질까봐 안달이 난다. 시인의 마음을 알기나 했다는 듯 이제 끓인 국수를 찬물에 빨아 소쿠리에 나눠 담는다. 국수 빠는 장면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끓인 국숫발을 건져 찬물에 담근 후 면발이 차가워져 탄력이 생기면 한 손으로 적당량의 국수사리를 집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국수사리를 훑어 내려 물기를 제거한다. 어느 정도 물기가 제거된 국수사리를 둘둘 말아 소쿠리에 덩이덩이 담는다. 4연은 그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낸다.

국수 빠는 소리”, “소쿠리에 척척 국수사리 감기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그야말로 빗소리는 이 모든 양태를 두루 안고 있다. 천태만상을 빚어내는 빗소리의 조물 능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리서리 저 많은 국수를 누가 다 먹나

쿵쿵 이 방 저 방

빈방

문 여닫히는 소리

아래채에서 오는 신발 끌리는 소리

헛기침 소리

- 같은 , 5

 

이제 시인은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동천 할매의 누에 주둥이같이 뽑아내는 아닌 밤 사설 같은 국숫발을 수돗물 콸콸 받아 양은솥에 대범하게 끓였는데, 너무 많이 끓인 것이다. 빨아 건져놓고 보니 서리서리 저 많은 국수를 누가 다 먹나하는 걱정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걱정은 단지 기우일 뿐이다. “이 방 저 방에서 쿵쿵 문 여닫히는 소리를 내며 신발 끌고, 헛기침 하며 야참 국수를 먹기 위해 식구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햇국수를 향해 모이는 식구들 장면이 설레는 가슴으로 한 마당 축제장으로 모여드는 구경꾼들 같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실제로 집안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쿵쿵 이 방 저 방” “문 여닫히는 소리가 나지만 실은 빈방으로 있던 것이다. 시인은 슬쩍 한 단어를 집어넣음으로써 모든 할 말을 다 한다. 모름지기 시는 이러해야 한다.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할 말 다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을 아낀다 해서 할 말 다 못하는 것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단어 하나라도 제 자리에 있을 때 뜻과 상징이 뚜렷해지고 울림을 갖게 된다. “빈방한마디로 인해 아래채에서 오는 신발 끌리는 소리/ 헛기침 소리가 모두 허상임을, 결국에는 시인이 돌아가고 싶은 시간의 한때를 갈구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더 나아가보면 시 전체에서 시인이 이르고자 하는 것을 빗소리를 통해 상상세계로 펼쳐낸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3연과 4연은 각기 첫 행에 능청스러운 질문을 던지고, 나머지 행들은 순식간에 대답으로 보여준다. 시를 전개하는 시인의 솜씨가 일품이다.

 

     

 

재바르게 이 그릇 저 그릇 국수사리 던져넣는 소리

쨍그랑 떵그랑 부엌바닥에 양재기 구르는 소리

솰솰솰솰

멸치국물 우려 애호박 채친 국물 붓는 소리

- 같은 , 6

 

, 이제 사람들이 모였으니 잔치국수를 나눠줄 차례이다. 사람이 많이 모였으니 재바르게 국수를 나눠담는다. 감아놓은 국수사리를 그릇마다 던져넣고, 그러다가 양재기가 바닥에 구르기도 한다. 나눠 담은 국수사리에 멸치국물 우려 애호박 채친 국물을 따르면 햇국수 한 그릇이 완성된다.

6연에서 특히 눈을 끄는 것은 의성어 솰솰솰솰이다. 멸치 국물 우리고 애호박 채친 국물 붓는 소리를 이처럼 잘 표현한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후루룩 푸루룩

아닌 밤 국수 먹는 소리

 

수루룩 수루룩

대밭에 국숫발 가는 소리

- 같은 , 7~8

 

7연과 8연은 다시 한 번 내리는 빗소리의 정체를 확인시켜준다. “아닌 밤 국수 먹는 소리, “대밭에 국숫발 가는 소리이다.

이 시에는 몇 개의 의성어가 등장한다. 자박자박, 콸콸, 쿵쿵, 쨍그랑 떵그랑, 솰솰솰솰, 후루룩 푸루룩, 수수룩 수루룩, 이러한 의성어는 그것이 쓰인 자리에서 가장 적합한 소리를 형성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소리들이 각기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비와 국수를 둘러싼 정경을 그려나가는 시인의 솜씨가 놀랍다.

장철문 시에서 소리는 고향이며, 고향이 지닌 공동체의 근원적인 생동감이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시골의 따스한 한 토막 기억과 여운과 울림이다.

 

장철문 시인에게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소리이다. 그 소리는 간단하지만 간단함이 지닌 생의 끈질김에서 나온다. 그래서 소리는 삶이 만들어낸 수많은 양태이다. 시집 무릎 위의 자작나무에 함께 수록된 다른 시편들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먹는다는 것은/ 세계를 밀고 가는 일이다”<단풍 행렬> 세계를 밀고 가는 그 먹는 일은 공양간 앞에 국숫발처럼 일렁이는/ 젓가락 젓가락짝들”<단풍 행렬>을 만들어낸다. 살아가는 형상은 모두 다르지만 삶을 만들어내는 근원의 힘은 동일한 데서 나온다. 그것은 바로 삶의 소중함이다. 그래서 먹음은 곧 삶의 에너지를 만드는 일이다. 그 먹음을 가장 생생하게 드러내주는 소리, 장철문 시인의 시가 지닌 힘은 거기에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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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도착한 <창비> 봄호를 뒤늦게 뒤적거리다가 이상국 시인의 시 2편을 읽다. <강변역>과 <Jangajji Road>이다.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시에 너무 힘을 주었다. 시는 세상을 읽는 것이다. 힘준다고 잘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딱 자신 만큼의 눈으로 바라보고, 보는 그 만큼 자신에게 다가온다. 반성한다.

 

이상국 시인의 시는 편하다. ‘편하다’는 말은 시창작의 고뇌와 깊은 사유 없이 손쉽게 시를 전개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상국 시인은 생활 속에서 시적인 것을 바라보는 관점을 늘 견지하는 것은 물론, 시의 구조를 세우고, 시어를 다스리는 데도 심혈을 기울인다. 그의 시를 쉽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치열한 조탁 과정을 거쳐 나온 시이기 때문이다.

 

         

 

강변역
        - 이상국 詩
 
강변역 물품보관소 옆 벽에는
 
밤눈*이라는 시가 걸려 있다
 
추운 노천역에서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의 바깥이 되어주고 싶다는 시다
 
나는 그 시 때문에 볼일이 없는데도 더러 거기로 갔다
 
바깥이란 말 때문이었다
 
내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 시의 바깥에 오래 서 있고는 했다
 
* 김광규의 시
                         - <창비> 2013년 봄호

 

8연 8행의 <강변역>은 울림이 크다.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으면서 ‘바깥’이라는 단어가 지닌 사유의 진폭이 얼마나 큰가를 새삼 느낀다. 이 시는 ‘바깥’이라는 단어로 집결된다. ‘바깥’이란 단지 외부, 겉, 변방 등의 표면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생애를 상징할 수도 있고, “강변역 물품보관소 옆 벽에” 걸려 있는 김광규 시인의 시 <밤눈>처럼  “추운 노천역에서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를 춥지 않게 감싸주려는 존재일 수도 있다.
시인이 “그 시 때문에 볼 일이 없는데도 더러 거기로 갔다”는 것은 “바깥이라는 말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시 <봄밤>을 감싸주는 ‘바깥의 바깥’이 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시 <봄밤>을 읽으며 자신의 바깥에 대하여, 자신이 바깥이 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바깥인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텍스트 밖에서 의미를 찾아보자면 자녀를 방문하여 그들의 바깥이었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들의 바깥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다. “볼 일이 없는데도 더러 거기로 갔다”는 것은 자식에게 갈 볼일이 없는데도 더러 간 것이다. 속초에 거주하는 시인은 서울 사는 자식 집에 가기 위해서 버스를 탄다. 그 버스가 도착하는 동서울터미날 근처에 ‘강변역’이 위치해 있다. 결국 “그 시 때문에 볼일이 없는데도 더러 거기로 갔다”는 것은 꼭 그 만큼 서울행을 한 것이고, 자녀에게 볼일이 있어서, 또 “볼일이 없는데도 더러 찾은” 횟수와 등가가 아닐까.
이러한 추측은 <창비> 봄호에 함께 수록된 이상국 시인의 또 다른 시 <Jangajji Road>와  시집 《뿔을 적시며》에 수록된 <혜화역 4번 출구>와 같은 다른 시편들을 읽고 함께 연관지어 본 데서 생겨난 것이다.

텍스트를 벗어나지 않고 시 <강변역> 안에서만 찾아보면 ‘바깥’이란 시인의 마음이다. 대상의 바깥이 되어주고 싶은 것, 사랑하고 연약한 것을 안쪽으로 보호해주는 바깥이고 싶은 것이다.

 

이상국 시인의 시가 지닌 강점은 스토리가 있고 재미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군더더기가 적고, 울림이 크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곳곳에서 나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나의 내면을 보게 된다. 깊이 공감하고 그의 시에 매혹된 것이다. 내가 그의 시를 통하여 나 자신을 보는 것처럼 그는 세상 풍경을 통하여 자신을 본다. 현대의 물상과 표정을 통하여 과거를 추억하기도 한다. 그에게 현대는 어쩌면 과거를 돌아보는 거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시가 지닌 궁극적 지향점에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Jangajji Road
        - 이상국 詩
 
강변역을 떠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낙타를 갈아탄다
이 길은 천리 밖 동해를 떠난 내가
月谷에 깻잎장아찌를 전해주는 길
실크로드의 어딘가에 敦煌이 있었던 것처럼
낡은 벽화로 가득한 이 동굴에서
나는 대개 경전을 읽거나
눈을 감고 면벽한다
月谷에는 자식들이 있다
그들은 나의 故國이다
스쳐가는 역마다 지푸라기 같은 사내들과
아이를 못 낳는 계집들과
핸드폰을 든 행자들이
티끌처럼 아우성을 친다
험준한 산악을 넘어 여기까지 오는 데만
예순해가 더 걸렸다
月谷은 西에 있고
동쪽에서 살던 일을 다 잊지는 않았으나
月谷에 이르면 나는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곳은 발굴될 것이다
나는 고단한 낙타에게 물을 먹이고
해 지는 풍경을 보고 싶었으나
주린 낙타는 고개를 높이 쳐들고 막무가내
사막의 풍진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경전을 덮고 月谷을 향하여
지금 미아역을 지난다고 문자를 날리는데
스크린 도어가 닫히고
언뜻언뜻 맞은편 동굴 벽에
그림자 같은 내 모습이 지나간다
                        

                         - <창비> 2013년 봄호

 

지하철을 낙타로 비유하고, 지하철이 지나는 터널에서 돈황석굴을 연상한다. ‘Jangajji Road’는 궁극적으로 삶의 길이자 문명의 길이다. 개인사로 비춰보면 “험준한 산악을 넘어 여기까지 오는 데만/ 예순해가 더 걸”린 길이다. 그 개개인의 ‘장아찌 로드’가 더해져 문명과 교역과 역사를 형성하였다. 그는 동쪽으로 돌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고국은 월곡, 자식이 살고 있는, 장아찌가 도달해야 할 지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장아찌로 상징되는 이 땅의 모든 아비와 어미의 길은 자식에게 가닿아 있다. 그것은 어떤 문명로드보다 험준한 고난의 길이고 종착이 없는 길이다. 그 길에는 수많은 역경이 놓여 있다. 그러나 끝내 도달해야 할 가장 숭고한 길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대목은  모르는 척, 중요하지 않은 척 슬그머니 언급하고 지나치는 “그리고 언젠가 이곳은 발굴될 것이다”라는 시구이다. “월곡은 서(西)에 있고/ 동쪽에서 살던 일을 다 잊지는 않았으나” 결국 천리 밖 동쪽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 자신의 생과 사유와 저작과 흔적이 나중에 발굴되고, 주목을 받고, 돈황학처럼 연구될 것리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식이 살고 있는 월곡이 고국이요, 동으로 돌아가지 못하여도 후회되지 않는 이유이다.
‘장아찌 로드’는 단지 천리밖 동쪽에서 출발하여 강변역을 거치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낙타를 갈아타고 월곡에 이르는 외적인 길이 아니다. 자신의 고국이 된 자식에게 향하는 길이요, 자식에게 먹이를 물어나르는 어미, 아비의 길이다. 앉으나 서나 걱정인, 자식의 건강과 번성이 세상 무엇보다 기쁜 부와 모의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장아찌로드’를 ‘부정고도(父情古道)’라고 부를 수도 있지 싶다. ‘장아찌로드’는 부정(父情)의 전파, 부정이 향하는 경로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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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대체로 일 년을 주기로 피고 진다. 그러나 한 뿌리, 한 가지에서 피어났을지라도 지난 해 꽃과 올해 꽃이 같지는 않다. 꽃은 대기의 기운과 자연 조건을 품어 안고서 태어나고, 짧은 기간 동안 생을 온통 밝히다가 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한 번 나고 한 번 죽는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피는 꽃을 노래하고, 지는 꽃을 슬퍼한 것은 일기일회(一期一會), 핀 꽃을 다시 대할 수 없는 단 한 번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문인수 시인의 시 」(시집 !, 문학동네, 2006년 초판1)을 읽고선 죽음 속에서 피어난 새로운 탄생의 찬란함에 소름이 끼쳤다. 꽃은 세상 어떤 곳, 어떤 순간에도 피어나는 힘을 지닌 존재라는 상징과 의미를 지녔기에 예찬의 대상이 된 것이다. 물론 꽃이라는 이유로 다 그러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모름지기 시인의 몸속에 들어온 꽃이란 일생일대 한 번 피고, 한 번 죽는 절대성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시를 짓게 하는 이유가 되었을 때는 말이다.

수많은 꽃 가운데 이런 꽃을 보신 적 있는가. 꽃을 다룬 수많은 시 가운데 이런 시를 읽은 적 있는가.

 

4연으로 이루어진 은 죽음으로써 환하게/ 뼈 부러지게기쁜 꽃으로 피어나고 싶은 시인의 절대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진 시이다. 그리고 그 환하게/ 뼈 부러지게피어나는 기쁨은 반드시 죽음을 담보로 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죽음을 전제한 태어남이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얼마나 절절하겠는가. 반드시 온 힘 기울여 태어났을 것이고, 최선을 다해 생을 꽃피울 것이다. 사람 역시 일생일사(一生一死)의 생명체이다. 그런데도 꽃보다 풀보다 조금 더 오래 생명을 지속한다고 간절함과 소중함을 망각하고 대충대충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말이 되지 않는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쥔 에이포 용지를 냅다 방구석으로 던졌다. , 처박힌 종이 뭉치에서 웬 관절 펴는 소리가 난다.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진다.

- <문인수 , 1>

 

글 쓰는 이는 백지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라고 했다. ‘수많은 불면의 날을 견디고와 같은 흔해빠진 레토릭(수사)이 실은 진정한 사실이라는 점을 글을 쓰는 이들은 대체로 공감하고 인정한다. 서화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백지 앞에서의 공포와 안 써지는 글의 화풀이 대상으로 백지를 구겨 던져버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이야 초고는 물론 창작 전반이 컴퓨터에서 직접 이뤄지기도 하지만, 썼다가 지우고 또 쓰는 과정이 단지 종이에서 모니터로, 펜에서 자판기로 옮겨갔을 뿐, 글 쓰는 행위와 글을 쓰는 작가의 심사는 변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고지나 백지에 직접 펜으로 글을 쓰던 문인들의 집필실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겨던진 수많은 종이 뭉치들로 어지럽혀지곤 했다. 창작의 고통의 증거인 동시에 그 결과로 나온 글들이 왜 빛날 수밖에 없는가를 확인시켜주는 물증이기도 하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쥔 에이포 용지를 냅다 방구석으로 던졌다.” 이 얼마나 생생한 날것의 현장 표현이가. 시인의 당시 심사와 그에 대한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치솟았던 심사가 순간, 잠시, , 멈추었다간 문득 한 장면에 집중한다. 이 순간을 ,” 한 자로 잡아챘다.

시를 쓰면서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가 장면과 상황의 전환이다. 자칫 상투적이게 될 수 있고, 지나치게 상세하게 하다보면 느슨해져 긴장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아슬한 경계 지점과 긴장을 탈 줄 알아야 한다. 순간적 방심을 푹 찌르고 들어가는 예리한 칼날은 언어 자체보다 시인의 감각에 있다. “,” 이 한마디는 검객의 칼날처럼 한 치 빈틈을 헤집는다.

시인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구겨 던진 종이 뭉치가 웬 관절 펴는 소리가나듯이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진다.” 구겨 던진 종이가 부풀어오르다 그치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시인의 심사가 에이포 용지를손아귀로 꽉 꽉 꽉 구겨” “냅다 방구석으로 던진 것으로 표현되었다면, 그 으깸이 뿌드드드 드드하고 관절 펴는 소리로 부풀어오르는 것이다. 구겨짐이 폄으로, 압축이 부풂으로의 이행이다. 그리고는 이내 잠잠해진다.” 긴장감이 잔뜩 내포된 잠잠함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 듯한 징조이다.

 

            

 

종이도 죽는구나.

- <같은 , 2>

 

구겨 던져진 종이가 부풀어오르다, 다 부풀어오른 순간을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 죽음은 모든 상황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종이가 생성해낸 기쁨의 절정이 담겨진 죽음이다. 죽어서 오히려 살고, 죽음으로써 생명을 탄생시킨 역설이 고스란히 자리해 있다. 캄캄한 밤하늘을 번쩍 하고 가르는 섬광과도 같다. 무겁고 튼튼한 뚜껑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다.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장벽을 타넘는 비월이다. 여기까지만 읽는다면 2연이 왜 이토록 번뜩이고 중요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어지는 내용을 담아내기 위한 사전 장치와 배경과 전후 연결과 비약의 디딤돌 역할을 이 한 행으로 모두 처리해준다.

 

그러나 입 콱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 얼마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으면, 그리고 그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産道를 얼마나 힘껏 빠져나왔으면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 기뻤을까.

- <같은 , 3>

 

시인은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서 던져진 에이포 용지뿌드드드 드드” “관절 펴는 소리를 내면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지는 것을 종이의 죽음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 죽음은 환하게/ 뼈 부러지게기쁜 죽음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시인 자신에게 되물을 정도이다. 시인은 충분히 알고 있다. “입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 얼마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는지를. “그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 얼마나 힘껏 빠져 나왔는지를. “말이 되기까지 마음 밑바닥에, “입 콱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눌어붙어 견디고 기다려야 했던 시간, 시 한 편으로 태어나기 위해 말이 빠져나온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 시인은 너무도 훤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기뻤던 것이다. 시만이 아니라 무릇 세상 태어나는 모든 것이 그러하지 않은가. 땅 위에서의 일곱 날을 위하여 칠년을 땅 속에서 기다려온 매미의 찬란한 울음이 그렇고, 세한을 견디고 피어난 매화가 그렇다.

 

이 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이 바로 부풀어 오르다 잠잠해진 종이에서 죽음을, 산도를 힘껏 빠져나온 생명을 읽은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절 펴는 소리를 내며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는 종이를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기쁜 순간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그것이 을 완성시켜주는 대목이다. 꽃으로 피어난다는 것은 입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서눌어붙어 견디다가 마침내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힘껏 빠져나온, 그토록 환하고 뼈 부러지게 기쁜 일이다. 견딤과 절망과 암흑의 과정을 거치고 나와야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기쁨인 것이다.

대부분의 꽃이 그러하다. 어느 꽃이 더 아름답고, 덜 아름답고를 논하기 전에 꽃으로 피어나는 것 자체가 이미 뼈 부러지게기쁜 일이다. 꽃 피는 일을 한 분야에서의 성공이나 빛나는 창작의 결과물로 비유할 수도 있지만 찬찬히 둘러보면 마음 속에, 일상 속에 피는 꽃이 얼마나 많은가.

 

         

 

누가, 날 구겨 한번 멀리 던져다오.

- <같은 , 4>

 

그러면 관절 펴는 소리를 내며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죽음에 이를 테니. 그리하여 입 콱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 “그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 힘껏 빠져나와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기쁜 그런 꽃으로 피어날 테니. 그렇게 하고 싶나니, 부디.

문인수 시인은 그런 마음을 단지 마지막 한 행으로 드러냈지만, 필자가 보건데 이미 시인은 구겨 던져진 종이 뭉치를 주목하는 순간, 벼락같은 깨침으로 자신이 구겨 던진 에이포 종이 뭉치에 자신을 함께 구겨 던진 것이다. 동시에 관절 펴는 소리를 내며 뿌드드 부풀어오르는 종이 뭉치가 시인 자신을 일으켜 세워 입 콱 틀어막힌마음 밑바닥의 무거운 절망과 기나긴 암흑을 빠져나오게 한 것이다.

 

은 그야말로 섬광과도 같은 깨침이 번쩍하고 눈앞을 환하게 밝히는 시이다. 이러한 통렬함을 문인수 시인의 시 여러 곳에서 발견한다. 도식적 상황에 빠지지 않는 시적 번뜩임을 확보한 시들이다.

에서의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라든지, 마지막 행 !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와 같은 구절은 시적 울림을 저 깊숙하고 고요한 곳에서부터 천천히 끌어올려 마침내 펑 터뜨려준다. 해방이다. 카타르시스다.

시어의 미묘한 운용은 시적 울림을 가속화시킨다. 1연의 뿌드드드 드드의성어를 한 번 띄어씀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살려낸 것, 이어지는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진다.”의 반복도 그러한 효과를 고조시킨다. 3연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으면에서는 일부러 어휘를 중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의미효과를 더욱 살려냈다. 또한 입 콱 틀어막힌1연의 말이 되지 않는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쥔과 연결되면서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 빠져나온 말(, , )의 발산(發散)으로 나아가게 한다. 한 편의 시, 한 편의 서화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이 꽃이 피는 과정과 닮았다면, 이 시는 그야말로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 힘껏 빠져나온 뼈 부러지게기쁜 절창의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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