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山無人
水流花開
빈산 사람 없고
물 흐르고 꽃 피네
- 최북, <공산무인도> 화제(畵題)
최북의 <空山無人圖>(종이에 수묵담채, 31×36.1cm, 개인소장)의 화제이다.
동파 소식 시구(詩句)이기도 하다.
'공산' '무인'보다 '수류' '화개'가 더 와닿는다.
지금까지도, 지금도, 어쩌면 앞으로도 '水流'와 '花開'라는 말을 만나면
설레었고, 설레고, 설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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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주 시인의 시집 『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 겨』(문학동네, 2018)에서 시 <채근담을 읽었다>를 읽었다. 좋다. 

처음에는 책 『채근담』을 읽고 쓴 시인 줄 알았다. '채근담'은 은유였다. 시인이 읽은 '채근담'은 꼼꼼하게 읽은 부분과 그냥 지나친 부분, 힐끗 보고 지나간 부분, 그리고 읽고 싶은 부분과 읽은 느낌,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펼쳐서 읽는다. 


시인이 '토옥동 계곡'에서 읽은 것은 자연이다. 자연의 흔적이다. 자연의 모습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다. 살아있는 자연이다. 어떤 것은 읽고, 어떤 것은 지나친다. 어떤 것은 너무 무겁기도 했고, 어떤 것은 가벼워서 편하기도 했다. 사람에게 다가오는 자연도 각기 다르다. 그 속에 사람도 들어있다. 이때 시인은 자연을 읽는 이이기도 하고, 자연의 일부인 자신을 살피는 이이기도 하다. 


잘 보이지 않거나 춥고 괴로운 것은 지나치고 싶다. 누구나 그렇다. 자신에게 닥쳤을 지도 모를 힘든 상황도 '애써 피하고' 싶다. "낙엽만 보고 걸었다 (...) 낙엽은 가벼워서 편했다"고 하고, 그 가볍고 편안한 낙엽이 "내 삶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시인은 '가벼움'을 지향한다. 그래 보인다. 그렇다고 삶이 가벼웠다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무거움이 훨씬 많이 차지한 삶이었던 것 같다. 추측컨데 "나무와 돌과 물은 너무 무거웠다"는 데서 "나무와 돌과 물"이었던, 혹은 그러 하고자 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래서 닥쳤을 "지난여름, 폭우에 뽑힌 나무뿌리"도 그렇고 "살얼음 속으로 숨은 물고기" "응달의 너덜겅" "흙 속의 서릿발"도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행 "눈 위에 찍힌 내 발자국"은 '가벼웠'거나 '너무 무거웠'던 것을 모두 내포한 발자국이다. 

나도 채근담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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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의 블로그에서 철학자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 소개 글을 읽었다. 저자의 첫 산문집이자 유고집인, 저자가 번역한 롤랑 바르트의 책 제목 <애도 일기>를 따서 부제로 단 이 책은 죽음을 앞두고 쓴 철학적 기록이다. 구입하여 읽을 생각으로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다. 인용구 몇 개도 스크랩하여 옮겨 두었다. 


그러면서 한기호 소장의 '죽음'에 관한 글 한 편을 더 읽었는데, 최성일과 구본준에 관한 것이다. 출판평론가 최성일은 45세의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오직 책 읽기와 글쓰기로 평생을 살았다. 그이의 처절한 글쓰기는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다. 나는 그의 글을 좋아하여 그의 책은 물론 그의 아내의 책 <남편의 서가>도 읽었다. 그에 대한 나의 '애도'였다.


최성일의 부고 기사를 쓴 한겨레신문의 구본준 기자는 건축전문기자였다. 그의 책은 물론, 블로그에서 건축 관련 글을 읽는 재미가 상당하였다. 그런데 그도 예기치 않게 이탈리아 현지 취재 도중 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블로그는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한겨레신문이 불로그 서비스를 종결하면서 그의 블로그 글도 사라졌다. 그가 남겨놓은 글을 모아 책으로 출간되기를 바랄 뿐이다.


죽음은 가까이 있다. 다만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죽음은 멀리 있는 것처럼, 당분간 오지 않을 것처럼 여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음이 서린' 책을 읽으면 겸손해진다.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삶은 방종할 수 있다. 죽음은 소중함과 감사를 일깨워준다. 


수원 봉녕사에 다녀왔다. 25년 전 아우가 사십구재를 마치고 이승을 떠난 곳. 그때 나는 독경 소리를 뒤로 들으며 대웅전을 나왔었다. 마당에 가득하던 초여름 햇살 저편 수돗가에서 젊은 팔을 걷고 흰 무를 씻는 비구니들의 웃음소리가 햇살처럼 청명했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우를 보냈던가 붙들었던가. 모르겠다. 다만 세상과 삶의 부조리만이 깊이 가슴에 각인되었을 뿐. 그때 아우는 떠나는 자였고 나는 보내는 자였다. 그사이 세월이 제자리로 돌아온 걸까. 지금은 내가 떠나야 하는 자리에 선 걸까. 오늘 나는 여기에 왜 다시 왔을까. 그를 만나기 위해서일까, 나를 만나기 위해서일까. 오후에 날이 흐리더니 돌아가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의 피아노> 158번 글이다.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 그리고 이제 '떠나야 할 자'가 된 '보내던 자'의 모습이 한 편 시처럼 그려졌다. 그 시가 너무 슬퍼서 눈물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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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도착한 책 중에서 정민의 <석복>(김영사, 2018)을 읽었다.


추사의 글씨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글귀는 예서로 쓴 "작은 창에 볕이 많아, 나로 하여금 오래 앉아 있게 한다(小窗多明, 使我久坐)"는 구절이다. 작은 들창으로 햇살이 쏟아진다. 그는 방안에서 미동없이 앉아 있다.(17)


네 글자 100편 중 <명창정궤(明窓淨几)> 글머리 부분이다. 

'명창정궤'는 서예가들도 많이 쓰는 구절이다. 

정민 교수는 "한국고전번역원 데이터베이스에서 '명창정궤'를 쳐보니 무려 171회의 용례가 나온다."고 했다. 

이 말에 이어진 구절들도 숱하다. 


'명창정궤' 뒤에 무엇을 덧붙이면 좋을까 생각해봤다. 

'분향작시(焚香作詩)'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음주독서(飮酒讀書)'가 현실에 더 가까우려나? 


"밝은 창 깨끗한 책상 앞에 앉아 향을 사르고 시를 짓는다." 그럴 수 있으면 좋을 주말 앞둔 금요일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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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2월 16일

나는 일기 쓰는 것을 더 이상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여기에서 나를 확인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만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109쪽)


1912년 2월 25일

오늘부터 일기를 꼭 쓸 것! 규칙적으로 쓸 것! 포기하지 말 것! 설령 아무 구원도 오지 않더라도, 나는 언제라도 구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고 싶다. (307쪽)

카프카도 이런 다짐을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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